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39
◈ 강호 인명록 (5)
* * *
황명을 전하러 온 무당산의 귀빈, 초호상장군 혁련무정(赫連務晶)은 신검단주 대리가 무당파에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금의 정가 섬예는 강호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황실에서 첩보를 다루는 모든 곳의 시선이 쏠려 있다.
동창과 금의위는 물론 정사에서 손을 뗀 태황후궁마저 정가 섬예에 대한 문건으로 자그마한 탑을 쌓아둔 형편이라 했다.
난세의 상징과 같은 경험.
세월의 격류에 올라탄 것처럼 바뀌어 가는 무위.
소림의 칠십이절예마냥 끊임없이 수를 불리고 있다는 독문무공.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와 은원은 물론, 세안 습관과 극도로 사소한 언행처럼 얼핏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들까지.
뭇 관청들이 제 역할을 잃고 있다고 해도 파악이 멈추지 않는다. 황실이 지닌 눈만큼은 천하를 움직이는 자들을 면밀히 주시했다. 그래서 명나라는 제국이었다.
‘행적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다만 정연신과 대면하기 전에 심신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호풍환우의 술법사들이 장차 닥칠 비바람을 예견했다 해도, 그 폭풍우가 불시에 온몸을 집어삼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누구라도 머릿속이 아득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징집령에 그처럼 어린 아이를? 군부가 미친 것인가?”
담담한 음성. 자색의 절세 미청년이 터무니없는 언행을 내보인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이목구비가 무색했다.
말본새와 품행 탓에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천하 강호를 대상으로 삼은 비무대회가 자그마한 징집 행사로 격하되어 버렸는데, 그 같은 언행이 실로 자연스러웠다.
말이 군부다.
황실을 겨냥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시 모를 꼬투리를 자연스럽게 피해 가는 언행이 당대 신검단주를 연상케 했다. 마치 문 너머에 있을 용희명에게 억지로나마 처세술을 배워 오기라도 한 것처럼.
‘품행이 유아독존에 가까우며, 성품 역시 연배에 걸맞은 인물이라 했는데…….’
하지만 혁련무정은 그 말을 걸고 넘어지지 못했다.
햇빛처럼 기척 없이, 그러나 모든 방위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기파 탓이었다. 모든 살갗의 기감을 빈틈없이 막아버리는 느낌.
감각을 잃은 것 같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는데도 그렇다. 심지어 육안으로도 초점을 붙들어두기가 힘들었다.
“큭.”
우웅―
혁련무정의 눈에 흐릿 황금빛이 스쳤다. 그녀는 찰나지간 이 압박에 섞인 공능들을 모조리 파헤쳤다.
북경 황실은 이미 정연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노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능법광륜기, 입황성주의 심검, 심극기린….’
그리고 또 하나.
정보 바깥의 무언가가 있다. 이 모든 것을 한가지로 융통무애하게 아우르는 기예. 필시 무당산에서 창안했을 것이다. 정가 섬예는 그런 자였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라고……?’
짧은 순간임에도 압력이 점차적으로 거세졌다. 승산과 별개로 끝내 검을 뽑았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 불현듯 무당 장문인이 나타나 정연신의 어깨를 짚지 않았다면.
“호흡에 마음을 쓰게. 얼핏 보기엔 자네가 내 광증을 가져간 것 같은데, 노혼을 앓기엔 이른 연배 아닌가.”
스윽.
노도사의 주름진 손이 자색 옷자락을 다독인다. 놀라울 만큼 친근했는데, 그 손짓만으로도 모든 기세가 온데간데없이 사그라들었다.
“……!”
두려운 광경이다. 절세고수의 공력 파동은 가뭄의 불볕에 빗대어지니까.
당장 신검단주 대리의 표정과 별개로 그러했다.
어째서인지 노혼이란 말을 들은 정연신의 얼굴엔 미미하게 수치심이 어려 있었는데, 혁련무정이 헤아리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녀는 소리 죽여 심호흡했다.
‘장성 아래에도 이런 자들이…….’
광활한 천하에서 손꼽히게 검을 잘 쓴다는 존재들. 그 오검(五劍)의 풍문에 과언은 없는 듯했다.
황실삼대고수로 이름난 숭례삼중궁(崇禮三重躬)이 아니면 제대로 가늠하기도 힘들 터였다.
“초호상장군 혁련무정입니다. 장군이지만 군부 무장이 아니라 황실 직속이지요. 아무래도 정 공께…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곧장 정연신의 대답이 돌아왔다.
“말씀하십시오.”
그의 재촉은 낮고 담백했다. 하지만 여전히 괴력난신과 같은 아득함이 묻어났다.
‘얼마나 짙은 영성을 빚었기에….’
황실의 누구든 오래 상종해선 안 될 존재다. 숭례삼중궁 중 건릉제의 직전제자라 할 수 있는 양천공(敭泉公)쯤 되어야 맞상대가 가능하지 않을까.
혁련무정은 자리를 떠나고픈 마음에 서둘러 이야기를 풀었다.
“종남제자 정혜 때문에 노하신 것이라면, 먼저 알아주셔야 합니다. 누구도 그 아이를 비무대회에 참가시키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몹시 꺼리는 형편이지요. 어떤 권세가든 똑같습니다.”
“……?”
정연신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 얼굴에 추궁의 기색은 없었다. 거짓말이 아님을 대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마치 명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러 문건대로 상단전이 극한까지 연마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제쳐두고.”
신검단주 대리의 눈길이 마광익주를 스친다. 순간적으로 어떤 전음을 들은 눈치였다. 이어진 말만 해도 그랬다.
“본성의 여의천주와 천룡대주가 북경으로 압송당했다? 이건 무슨 말입니까?”
정연신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혁련무정은 청명을 스치듯 노려봤지만, 당대 마광익주는 의뭉스럽게 빙글거리기만 했다.
복잡한 상황이었다.
무당 장문인의 섬서행을 강권하러 왔다가, 마침 ‘북도’와 함께 있던 신검단주 대리를 마주쳤다. 황명을 받든 처지인지라 본래의 임무부터 끝내고자 했다.
그런 뒤에 모든 사정을 차근차근 풀어내고, 무당파와 신검단주 대리로 북도의 포획을 도모할 심산이었는데.
‘망할.’
지금도 솔잎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마광익주 청명이 많은 것을 헝클어버렸다.
역시 신검단 산하의 대주들은 하나같이 골칫덩이다. 여의천주 북궁아와 천룡대주 위지극처럼.
“혹, 북도가 정 공께 투신의 머리를 베러 가자고 청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저 언덕 아래에 있는 자는 동창이 전력으로 주시하고 있는 위험인물입니다. 사안의 경중을 따졌을 때, 무림 강호마저 넘어선 일국(一國)의 중대사를 먼저 짚은 뒤에….”
“천하가 개판이네.”
청명의 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북경과 섬서라. 아쉽게도 우리 정 공께선 원영신에는 조예가 없는데. 북쪽 고수들과는 다르게 말이야.”
순간 혁련무정의 미간이 모였다.
“마광익주는 닥쳐라. 정 공, 어차피 북경으로는 못 가십니다. 신검단주 본인이라 해도 역모가 얽힌 황실의 행사에 간섭할 수는 없지요.”
그녀는 청명의 말을 끊으며 빠르게 말했다.
“괜한 부담을 짊어지지 않으시려거든, 북경 바로 아래의 산서, 하남, 산동에도 걸음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어차피 이런 시국에 입황성 흑색이란 전력을 스스로 깎아 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저 새로운 황권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잠시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실제로 두 대주가 북방 강호에서 황명보다 양민의 목숨을 우선시했던 사건이 컸지요. 일이 복잡합니다.”
“그 징집 비무대회, 왜 북경이 아니라 섬서에서 열지?”
묵묵히 듣고 있던 정연신이 불쑥 물었다. 대답은 청명의 입에서 나왔다.
“여러 추측이 있지요. 아무리 황명이라도 북경은 요족들의 코앞이니, ‘자기네 살기도 바쁜 무림 호족들이 거기까지 가 주진 않을 것 같으니 섬서에서 열었다’가 첫 번째.”
“…….”
“두 번째도 있습니다. 신검단주 대리의 혈육이 있는 땅에서 그런 행사를 연다? 혜아가 있으니 정 공은 당연히 참석할 테고, 동시에 강호의 무수한 칼잡이들도 걸음해 오겠지요. 당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천하오검을 보려고.”
그렇게 황실은 두 가지의 이득을 얻는다.
무림 강호에서 가장 막강한 집단의 주인 된 자를 온전히 눈 안에 넣고, 징집 비무대회의 효험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정혜에게 위해가 가는 일들은 원천적으로 차단될 터였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사아아―
무당산자락 특유의 희뿌옇고 잔잔한 바람 속에서 여러 인물이 침묵했다.
이제는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어 입을 다물고 있는 무당파 장문대리, 시종일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연신을 응시하고 있는 현공진인, 그리고 언덕 아래에서 여유롭게 전투마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는 삿갓의 거한.
‘저 북도는 필시 정 공을 따라다닐 것이다. 북방의 반골. 본래 그런 인물이니까.’
혁련무정은 이제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청명을 눈여겨봤다.
섬예 무맥의 전달자.
동시에 입황성 대총관과 더불어 정연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인물.
‘신검단을 적으로 삼는다면….’
가장 먼저 죽여 놓아야 한다. 혁련무정이 북방 강호의 인사였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
잠깐 눈이 마주쳤다.
“왜?”
청명이 서늘한 눈웃음을 짓는다. 혁련무정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정연신의 손에 칼자루가 쥐어진 상황이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역모의 오명을 감수한다면 당연히 북경이다. 하지만 잃게 되는 것들이 생길 터였다.
섬서는 안전하다. 조카의 안녕과 승승장구를 꾀할 수 있다. 새로운 황제를 비롯한 천하 각지의 유력자들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빠른 시일 내에 본인의 직책에서 ‘대리’란 글자가 빠질지도 모른다.
그 차이는 컸다.
그때였다.
“대주님! 아니, 정 공! 정 공!”
적막한 무당산의 운무가 웬 소녀의 외침으로 풀어 헤쳐졌다. 거칠 황 자가 새겨진 푸른 옷자락을 활기차게 휘날리는 고수였는데, 혁련무정의 머릿속에 있었다.
‘섬예 무맥의 정통 계승자…!’
파라락!
청색 소녀의 등 뒤로 십수 명의 새파란 소맷자락들이 날개마냥 펼쳐진다. 신검단주 대리가 자신의 손발을 보충하는 순간이었다.
* * *
초호상장군 혁련무정이 무당산에 당도한 지 엿새.
어두운 공간에 오로지 한 사람만이 밝았다. 창틀을 타고 들어온 햇살이 그에게만 쏟아졌다.
“…….”
사내는 몹시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그마한 용의 몸통으로 뒤엉킨 금빛 황좌. 온 천하에서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의자다.
또한 사내는 양어깨에 해와 달이 새겨진 용포를 몹시 자연스럽게 걸치고 있었다. 황좌의 등받이에 비스듬히 누운 모습으로.
융정제(隆禎帝) 주유극(朱由極).
조각마냥 짙게 뻗은 검미 아래에 권태로운 기색이 맺혔다. 동시에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명여.”
“예, 폐하.”
즉각적으로 어둠 속에서 울렸다. 환관 특유의 가느다란 음성이었지만, 온갖 등락을 겪어온 자 특유의 강단이 묻어났다.
“강호인들이 머물 처소들은 모두 지어졌는가?
“예, 분부하신 시일을 철족 장인들이 지켜냈습니다.”
“너도 애썼다.”
“받잡기 힘든 말씀입니다. 모두 폐하의 성은이지요.”
“일인지하 만인지상.”
건릉제의 아들, 융정제의 음성이 나긋하게 이어졌다.
“태사(太師) 입황성주를 제외하였을 때, 짐의 바로 다음가는 권세가는 정가 섬예라 할 수 있겠지. 입황성 신검단이란 그처럼 강력한 힘이니.”
“그렇사옵니다.”
“지금 섬서에 모인 대신들은 정신이 없겠군. 짐에게 잘 보이랴, 차기 신검단주를 기다리랴.”
“감히 말씀을 올리건대, 사실은 그와 같지 않나이다.”
“그런가?”
“뭇 대신들은 물론이고, 강호 명숙이라 불리는 무림의 야인들은 그 보폭이 굉장히 좁아져 있습니다. 대개는 처소에서 두문불출하는 형편이지요. 특히 종남파에 배정된 전각으로는 누구도 얼씬거리지 않고 있습니다.”
“섬예의 그림자가 그리도 큰가.”
“불시에 나타나 인근을 황폐화시키는 천재지변으로 유명합니다. 소문이 아무리 빠르게 내달린들 온 천하를 가득 채우기는 어렵다지만, 이제는 강호 상층부의 인사들이 신검단주 대리의 존재를 상시로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융정제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성정이 그토록 불같다면, 제 사람들을 잡아 가둔 이 몸에게도 화낼 수 있겠군. 혹은 짐의 권위를 무시한다거나.”
후자는 숭례삼중궁이라 일컬어지는 황실삼대고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럴듯한 핑계로 황명을 무시하고, 지금도 북방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는 존재들. 자연스레 이 순간 명여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정가 섬예는 폭급할지언정 예와 법도를 아는 인물로, 이 같은 시기에 북경으로 걸음할 리가 없습니다. 모든 문무백관과 강호 야인들의 생각이 일치합니다. 곧 섬서에 당도할 그의 옥면(玉面)으로 눈을 씻으실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그런가?”
기이한 반문이었다.
웃지 않는데 조소가 느껴졌다. 어떤 면에서는 아쉬움이 묻어나기도 했다.
황제의 본심을 짐작하지 못한 명여의 형상이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일렁거릴 만큼.
“충분히 쉬었다. 다시 시작하라.”
융정제가 말했다.
명여 말고도 어둠 속에 드리운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 당대 황제는 천하의 모든 일들을 알아두고자 했다. 실로 편집광적일 정도였다.
지극히 공손한 목소리들이 울렸다.
“신검단주 대리가 단독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여 북방으로 진격.”
“정가 섬예, 장성 도래.”
“초호상장군 혁련무정의 상소입니다. 손발이 부족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