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62
◈ 북제(北帝) (2)
* * *
―염정, 염정. 대답해라, 염정.
―나를 그리 부르지 말라고 했다. 스스로 그토록 숭상하는 ‘육원성군’에도 들지 못한 놈들이 감히…….
―연모하는 자가 생겼다. 내 휘하의 군주이며 대전사다. 어찌 다가가면 좋겠나.
―내게 오면 네 목을 절단 내어 주마.
―왕의 삶을 도끼질에 녹이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로다. 모든 수련이 무용하다.
―염정은 대답하지 마시고, 당신도 거기까지 하십시오. 염정께서 꾸린 왕가(王家)는 강압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노인이라 하여 모두가 지혜로운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너, 싸움 신의 책사인 문곡(文曲)에게 묻겠다. 내 대전사는 우리 씨족과 귀가 긴 놈팽이의 혼혈로, 타고난 품성이 강건하고 몹시 사내다우며….
―제게 이럴 것이 아니라 새로 오신 야율왕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의외로 세상 경험이 풍부할지도 모르지요. 그의 식견이 궁금합니다.
―북왕 야율? 아직 죽지 않았나.
―이곳 휘풍령의 소리동굴에서 싸움 신의 뜻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분입니다. 그 기백의 반이라도 되는 기량을 지녔다면, 일찍 죽기는커녕 곧 영토를 만들고 확장하기 시작하겠지요. 듣자 하니 그의 곁에 있던 빙제(氷帝)가 자신의 부군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던데… 듣고 있지요, 야율왕?
―그렇다면 이 땅에서 유일하게 천단광갑이 없는 북왕에게 묻겠다. 내 대전사는 맺고 끊음이 확실한 성품에, 남방에서 약탈한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극성까지 익힌 천고의 군주로….
* * *
깊은 밤이었다.
정연신은 물끄러미 허공을 올려다봤다.
눈 쌓인 지면과 별개로 북방의 하늘은 얼어붙지 않았다. 단단한 보름달이 짙은 빛을 뿌리면서 흐리게 흘러가는 구름을 밝히고 있었다.
겨울바람은 질겼다.
이따금 정연신의 발밑에서 작은 돌조각들이 스스로 굴러다녔고, 미미하게 파헤쳐진 땅에선 말라붙은 나뭇가지들이 떫은 흙내음을 내리깔았다.
모든 것이 적나라한 느낌.
북방의 냄새였다.
한편, 굶주린 이리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까마득하게 밤공기로 스몄고.
정연신은 그 와중에 가만히 손아귀를 쥐었다 폈다. 적막한 광혼산맥의 도시. 무수히 많은 기척을 느끼면서.
‘심장의 기척들이 엄청나.’
용음사사왕의 영토 한복판으로 거세게 밀려오는 박동 소리들. 온갖 요족 강호인들이 잠을 청하며 뿜어내는 울림이다.
그들의 중단전이 자리 잡은 심장은 하나같이 엄청난 진동을 내뱉고 있었다.
북방의 소리였다.
“왕이여, 어째서 잠을 청하지 않고…?”
조금쯤 당황한 듯한 중년인의 음성이 적막을 깬다.
북왕 야율의 기감을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먼저 말한 듯했는데, 정연신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등허리에 도 한 자루를 패용한 사내가 서 있었다. 민무늬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이 순간 정연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매를 움찔 떨면서도, 정작 팔다리 세맥과 근육은 미동도 없을 만큼 담이 컸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스스로 몸을 건사하는 데 자신감이 있든, 삼화취정의 육신마저 굳을 정도로 정연신이 두려운 것이든.
어쩌면 둘 모두일지도 모른다.
‘마마광멸도.’
투신에게 직접 천단광갑을 전수받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방의 최전선에서 호천성주로 군림해 온 초고수.
근래엔 연화나타의 이기어검을 받아내고 살아남은 자란 명성이 따라붙은 인물이기도 했다.
때문에 정연신은 그에게 특별한 호승심을 품고 있었다.
마마광멸도에게서 처음으로 천단광갑을 접했고, 내색하지 않을 뿐 투신의 무학에 아득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는 우두커니 멈춰 선 가면의 도객에게 물었다.
“잠이 안 오나?”
“…이쪽 강호인들은 길게 눈감지 않소. 전투마가 경공을 쓰는 데다, 언제 그 말발굽에 짓이겨질지 모르거든.”
어쩐지 마마광멸도는 혀가 길었다. 북왕 야율의 군영에서 도망치려다 실패한 것처럼. 그러고 보면 언젠가부터 말투도 공대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정연신은 어떤 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너도 투신을 사사했다고?”
그가 물었다. 순간 마마광멸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사사(師事)? 스승으로 모시진 못했소.”
“그럼?”
“무엇인지 모를 기준으로 엄선된 자들이 모인 자리에… 운 좋게 내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뿐이오. 십수 년 전 장성을 넘어온 고수들 중에서 말이지. 싸움 신은 그 자리에 학당의 훈장마냥 대충 걸터앉아 신공비기(神功祕技) 천단광갑의 가르침을 베풀었소. 낯설고 거친 땅에서 재주껏 살아남아 보라면서…….”
짧은 시간이나마 자기 보신에만 급급했던 사내의 음성이 어떤 추억으로 잠겨든다.
정연신은 분명히 느꼈다. 믿기 힘든 인물에 대한 마마광멸도의 경애를.
“물론 싸움 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소. 결과를 내는 건 가르침 받은 이들 각각의 몫이었고, 구결을 듣자마자 깨치는 것쯤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여기는 느낌이었지. 하지만 이 몸은 적어도 그를 사부로 여기고 있소. 많은 강호인들이 나와 같을 거요.”
파지직.
그의 손에서 반투명한 불티가 튀었다.
천단광갑에서 일어난 내공의 마찰. 이기어검마저 견딜 만큼 무지막지하게 압축된 수십 겹의 진기 갑옷인데, 그것을 걸친 마마광멸도의 몸은 어느새 광혼산의 낭떠러지까지 멀어져 있었다.
길고도 짧은 이야기를 내뱉으면서 자연스럽게 후퇴 보법을 밟았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정연신조차 잠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일 정도였다.
북왕 야율은 담담히 물었다.
“어딜 가려고?”
“…이곳의 풍광이 좋소. 만장단애 아래의 밤경치를 즐기기엔 아주 그만이지.”
후욱!
다음 순간 정연신은 마마광멸도의 옆자리에 서 있었다.
지나온 길을 따라서 경공술 십리광요의 은은한 빛무리가 깃털마냥 떨어져 내렸고, 마마광멸도의 가면 속 눈은 어떤 낭패감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연신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힘이 필요하다.”
“그야 그렇겠지. 나도 당신이 북왕들의 휘풍령에서 벌인 일을 자세히 들었소.”
마마광멸도는 짐짓 의연하게 고개를 주억여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북왕들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흥미롭게 살피고 있을 거요. 전투에 미친 일부는 당장 야율왕의 목을 따러 오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 모를 일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겠지. 북방인들의 호전성은 남녘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
숨죽인 외침으로 맺어진 말. 광대한 세상이 움직이고 있음을 육성으로 내뱉은 까닭일까.
진심인지 아닌지 마마광멸도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듯했는데, 정연신이 알 바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애시당초 장성과 가장 가까운 호천성의 성주였던 자가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낄 것 같지도 않았다.
“네가 말한 자들은 모두 휘풍령에서 남제를 등졌다.”
“당연히 그럴 거요. 북왕이 북왕을 직접 죽이려 든다? 그건 이미 투신의 뜻에서 아득히 멀어졌음을 뜻하오. 기절초풍할 일이지!”
마마광멸도가 낭떠러지에서 다시금 슬쩍 멀어지며 말했다. 정연신은 차분한 안색으로 그를 따라붙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내게 호의를 가지리란 법은 없지. 내가 겪은 북왕들은 하나같이 미치광이였다. 당연히 내가 원하는 건 그자들이 아니라, 지금 네가 지닌 호신강기의 성취다.”
낮게 이야기를 건네는 정연신.
직후 그는 마마광멸도가 정색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도했다. 투신을 사부로 여긴다는 이야기가 정말인 모양새였다.
“천단광갑을 달라? 당신은 자존심도 없소?”
“달라는 게 아니다. 비무를 해 보자는 거지. 물론 내게 별다른 자존심이 없는 것은 맞다.”
정연신은 담담히 대답했다.
고검진인의 전언과 머리, 입황대전의 전쟁터에 널브러져 있던 본성 무사들의 시체, 수급만 남아서 대롱거리던 명류대주와 소연대주… 이 순간 신검단주의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광경이었다.
그보다 앞서 겪은 일들은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청년은 이르게 많은 것을 잃었으며, 이제 그 심마를 극복하고 북방 강호의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천하 대국(大局)을 움직이는 자.
말 그대로 전쟁을 준비하는 중이다. 아직은 본 적도 없는 투신을 대종사로 인정한 지 오래였다.
문득 마마광멸도의 가면 속에서 입 열리는 기척이 일었다.
“…한번 출수해 보시오. 약하게, 손속에 만 근의 사정을 두고.”
쩌어어어엉!
말이 비무였다. 마마광멸도는 정연신의 출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복부에서 희끗하게 터져 나온 충격파를 온몸으로 맞이하며 도시 안쪽까지 밀려났다.
곧이어 여름 볕을 얻어맞은 것마냥 출렁거리는 대기. 한편 정연신은 후려친 손등을 두어 번 털어내는 중이었다.
콰가가각―!
마마광멸도는 잠시나마 넋이 나간 눈빛으로 두 줄기의 고랑을 만들다 멈추더니, 이내 자못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내가중수법마저 가미했군. 진기의 수발 속도로 치면 육원성군쯤 되어야 제대로 반응할지도 모르겠소.”
“통증은 없나?”
“말이라고.”
“뭐?”
“내 심법으로 운용되는 천단광갑엔 내공의 침투를 막아내는 공능이 있소. 적어도 같은 양의 진기를 쓴다면, 이쪽의 내공방벽이 뚫릴 일은 없다는 뜻이지. 이 정도면 팽가의 도법(刀法) 역시 씹어 삼킬 만하지 않소?”
이어 마마광멸도는 해볼 만할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야율왕의 어깨 너머에 자리한 낭떠러지를 힐끔거리면서였다.
한편 정연신은 자신의 손아귀를 쥐었다가 폈다.
스윽.
별다른 반탄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등에 남은 감촉도 굉장히 모호한 게, 호신강기를 엮고 있는 진기의 한 올 한 올이 유연한 철실처럼 느껴졌다.
내가중수법도 효용이 없다는 말까지 놓고 보면 무적이 따로 없었다.
‘약점이 없는 무공이라고…?’
그런 게 있을 리가.
하물며 입황성주의 월령신기조차 그보다 음(陰)한 혈공진기에 약세를 띠었더랬다.
삼봉 무맥의 무당 장문인에게 심마를 심어버린 몽요지체는 또 어떠했던가.
저벅.
정연신은 제법 기세가 살아난 마마광멸도를 향해 걸었다.
천단광갑은 그 자체로 군략에 가까운 신공절학이지만, 분명히 어떤 방도가 있을 터였다.
익힌 이의 무공에 따라 판이한 형(形)을 띠는지라 각각의 파훼법이 의미 없다고 해도.
“…어떤 천단광갑은 공격초로도 쓰인다던데.”
정연신의 말에 마마광멸도가 코웃음 쳤다.
“반수 이상의 북왕이 그럴 거요. 그자들의 내공심법이라면, 패도적이지 않은 것이 드물 테니까.”
“역시 하나씩 격파하려면 대비해 둬야겠군.”
“대비? 북왕 개개인의 심공을 모조리 꿰뚫고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요. 설령 그들의 무공을 안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 튀어나올지 모르는 게 천단광갑이기도 하고.”
“인정한다.”
“애당초 그리 파악이 쉬웠으면 명나라 무공 군세가 장성에만 머물렀겠소? 머릿수로는 이곳의 몇 곱절 이상인….”
순간 정연신은 조법(爪法)마냥 오른손을 들어 마마광멸도의 어깨를 짚었다.
각각 약지와 계지(季指:새끼손가락), 검지와 중지를 붙여 엄지까지 세 갈래로 만들면서였다.
“일단은 알았다. 회합장에서 보자.”
용의 손아귀를 흉내 낸 소림용권의 기수식과도 닮았지만, 훨씬 파괴적이었다.
쩌적―
마마광멸도의 어깨에서 반투명한 균열이 일어나 삽시간에 온몸으로 번진다.
“……!”
전신을 둘러치고 있던 유리 막이 부서져 내리는 듯한 모습.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시화무극수의 새 초식이었다.
“네 것은 차라리 단순해서 쉽다. 방벽으로 쓰이는 기운의 가닥을 하나로 묶어서 뜯어내면 끝이니까. 공수 양면으로 진기 구조를 달리할 때가 문제지.”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모르겠소만…!”
“내게도 정리가 필요한 묘리다. 아직 완성된 수법도 아니고.”
정연신은 제자리에서 굳어버린 마마광멸도를 지나쳤다.
투신을 몹시 경애하는 가면의 도객.
언뜻 보기에도 온전히 휘하로 들이기 힘든 인물이지만, 가장 자신하는 호신강기가 뜯겨 나간 만큼 당분간은 이곳 광혼산에 붙어있을 것이다.
정연신, 신소빈, 검성, 그리고 용음사사왕과 그녀의 대전사인 검단 등 하나같이 고절한 존재의 북벌 회합이 어떤 과실을 얻어낼 때까지.
‘동선은 정리가 끝났으니, 이번엔 보급을 확실하게 논해야겠지. 이곳 민초들을 약탈하지 않는 선에서.’
그때였다.
불현듯 먼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툭.
자그마한 소리.
강맹한 암습과는 거리가 멀었던지라, 정연신은 그것을 먼저 느끼고도 우두커니 멈춰 서기만 했다.
웬 악취가 물씬 풍겼다.
[북왕 위(位)에 오른 것치곤 네가 몹시 여유로운 듯하여….]음산한 육합전성과 함께 눈 위를 데구르르 구르다 멈추는 다리 한 쌍.
이미 반쯤 썩어버린 신체 부위다.
무언가에 절단된 것이 아니라 뼈째로 우악스럽게 뽑힌 듯했다. 극도로 패도적인 수공(手功)의 흔적이었다.
[내가 왔다. 네 친우의 다리를 들고.]밤공기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사아아―
구름보다 짙은 기운이 달빛마저 가린다. 먼 하늘에선 그보다 새까만 인영이 느리게 낙하해 오는 와중이었다.
겨울밤보다 짙은 어둠을 휘장마냥 끌고 떨어지는 모습.
순간 마마광멸도의 기파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밤눈이 밝은 걸까. 어쩌면 호천성주로서 구면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남, 제…?”
북방제일인의 이름.
천하 남제의 현현은 갑작스러웠다.
병략에 능통한 존재로서 선공(先攻)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느낌. 어떤 이라도 당황할 만한 순간이지만, 정연신은 묵묵히 다리를 한 번 구르기만 했다.
화륵!
발소리 대신 모닥불 피어오르는 마찰음이 울린다.
하늘을 날아온 불청객이 착지할 공터.
정연신을 한가운데 둔 채로, 푸른 불꽃이 빛살마냥 빠르게 거대한 태극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남화광태극(南華廣太極).’
신검단주의 영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