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61
◈ 북제(北帝)
* * *
세 사람이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대치 중인 곳. 제각각 삿갓을 쓴 중년의 외팔이와 젊은 흑포의 사내, 마찬가지로 새까만 옷자락을 발치까지 늘어뜨린 여인이었다.
천극문주 만휘.
입황성 천룡대주와 여의천주.
사아아―
폐허가 따로 없어진 땅에 흰 눈이 소복소복 쌓여 나갔다. 녹아들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조금씩 채우는 광경.
북녘 대지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흉진 땅을 희디흰 백설(白雪)로 감추면서. 또 왔던 곳으로 돌아누운 쌍둥이 북왕과 남녘에서 온 구파의 이방인들에게 한 점 한 점 새하얀 이불을 덮어주면서.
한편 수복되지 않는 것도 존재했다.
“사저, 사저…!”
“대사형! 어째서…….”
살아남은 공동과 형산의 제자들.
몸은 메말랐지만, 음성엔 물기가 맺혀 있었다. 흉년과 별개로 그들의 마음은 비옥했었기에 그랬다.
난세에 흔한 일이었다.
도사들은 피 묻은 파편들로 남은 사형제의 육신을 한자리로 모았다. 그리고 화륵― 소리와 함께 삼매진화를 피워 올렸다.
당장 신검(神劍) 동몽의 주인이 지척에 있건 말건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였다.
그들의 정식 장례는 아니다.
본래는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어 도교 명부(冥府)의 신들에게 보우받고, 망자가 무사히 우화등선하길 바라는 의미로 칼이나 거울 따위를 무덤에 두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 또한 난세의 일부였다.
북방 강호의 한복판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세월이 흐른 뒤 돌아와 본다면, 그 무덤은 흡성의 진법에 녹아 없어진 지 오래일 것이다. 공동과 형산의 도사들이 옳았다.
후욱―
흐릿한 연기가 솟구쳤다.
그것은 도교 사당(祠堂)의 향로에 피어오르는 것마냥 가느다랗게, 그러나 끝없이 위로 올라갔다.
유난히 광활하고 짙푸른 북방 특유의 하늘에 섞여들 때까지.
“원시안진.”
천극문주의 왼손 반장이 그 끄트머리를 향해 기울어졌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삿갓 아래로 겸연쩍게 웃는 외도제일검.
큰 슬픔의 와중에 그를 경계하는 도사는 없었다.
그간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동행한 사이. 이제 와서 정체를 알았다 한들, 직접 겪은 것보다 건너건너 들은 풍문을 우선시하는 이들은 없었던 것이다.
천극문주는 곧 여의천주와 천룡대주의 어깨 너머를 턱짓해 보였다.
“그러니까 자네들 말은, 저 친구들이 모두 섬예 무맥의 공부를 익혔다는 뜻이겠지?”
능선을 따라 투명하게 테두리를 친 햇살.
두 개의 깃대가 솟은 채 다가오는 와중이다. 북방 강호인들을 경계한 탓인지 아직 깃발이 매달려 있지는 않았다.
그 두 깃대를 든 수십의 인영들.
당연히 여의천과 천룡대의 무인들인데, 그들이 내뿜는 기운을 따라 기다란 깃대는 물론 광활한 능선마저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친다.
완전히 합일(合一)된 기파였다.
하나같이 전장 무공의 달인.
여느 신검단 무력대처럼 개별적으로 단독 임무를 수행하는 일 없이 무공 군세처럼 운용되어 왔다.
입황성 일각에선 본래 고강한 신검대나 예부터 광예결을 익혀 온 마광익이 아니면, 집단전에 한하여 적수가 없다고 평가받는 이들이다.
“저들은 확실히 섬예 무맥이 맞다. 당신의 기감(氣感)은 천하오검 중에서도 가장 조밀할 텐데, 내 말이 거짓으로 느껴지나?”
천룡대주 위지극이 싱긋 웃으며 묻자, 가장 흐린 눈으로 외도제일검이 된 맹인은 고개를 저었다. 다소 화가 난 듯했다.
“당연히 거짓부렁이 아니겠지. 목 아래에 칼이 들어와 있는데 뻔히 들통날 거짓말을 어찌 내뱉겠나?”
“지금 내 목엔 아무것도 없는데…?”
“정말로 그런가?”
천극문주의 조용한 물음에 위지극이 입을 다문다. 다음 말은 어느새 그들을 등지고 돌아선 흑포 여인의 입에서 나왔다.
“대주들이 포함된 여의천과 천룡대 전원의 합공이면, 그 대단하신 천하오검이 상대라도 팔다리 하나는 가져갈 수 있을 텐데.”
이국적으로 새까만 머리칼을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여의천주 북궁아의 뒷모습. 조금쯤 쉰 듯하여 맑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듣기 좋은 울림이 이어졌다.
“소림방장처럼 완전히 탈각할 자신이 있나?”
그녀가 물었다.
양팔 없이 정파제일이었던 범허대사와 같아질 수 있냐는 의미였다.
삿갓 아래로 희미하게 미소 짓는 천극문주.
“그건 어렵겠지. 신승만큼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자가 또 어디 있겠나?”
“그럼?”
“다만 자네의 말은, 저 험상궂은 수하들이 당도한 뒤에 내뱉어졌어야 했네. 한세월이나 합공을 기다려 줄 이유는 없지 않나?”
한순간 그의 손이 흐릿해졌고.
콰아아아아―!
굉음과 함께 공기가 무수히 찢어지더니 대기 중에 희끗한 실선이 새겨졌다.
신검 동몽의 궤적. 찰나지간 수백 번의 휘두름으로 하나의 금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
어느새 북궁아와 위지극이 각각의 호신강기와 발경력을 신공비기(神功祕技)의 구결로 벼락마냥 짜내면서, 희끄무레한 충격파가 지면을 쿠구궁 두드리고 있었지만.
“백년해로해야지. 조강지처와는….”
천극문주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반투명한 실선에 발을 들였다.
스스로 조강지처라 일컬은 청검(靑劍) 한 자루를 검집에 넣으면서인데, 그 수백의 칼질이 여의천주와 천룡대주에게 향하는 일은 없었다.
후욱!
연기처럼 사라지는 신형.
심오하기로는 천하에서 손에 꼽힐 이형공허(移形空虛)를 검으로 펼쳤다. 그 자리에 있었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내 천룡대주 위지극이 어깨를 슬쩍 늘어뜨렸다.
“어우, 죽을 뻔했군.”
그가 휘파람을 휘익 불자 전신에 맺혀 있던 기파가 실타래마냥 풀어 헤쳐진다. 흐린 바람이 품 넓은 흑포의 소맷자락을 파라락 때리며 가라앉았다.
한편 북궁아는 다시 수하들이 내달려오고 있는 능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여전히 무심했다.
“대리께 보고해야 할 사안이 늘었어.”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천극문주가 북방 강호를 배회하고 있다… 어떻게 반응하실지 모르겠군. 당장 외도제일검의 목적이 뭔지도 알 수가 없고.”
“개차반 여의천주께서 외간 동료를 심려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걸. 여하간, 떠도는 낭설로는 여기 육원성군 중 하나랑 인연이 있다던데.”
그 눈알도 여기서 자기가 뜯었다더만. 위지극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순간 북궁아의 시꺼먼 뒷머리가 얼음 아지랑이마냥 미미하게 일렁였다.
“직속상관에게 제대로 존칭해라.”
같은 흑색에게 건네기엔 지나치리만큼 강한 명령조였지만, 위지극은 슬쩍 웃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북방 왕가의 혈통으로 정연신 이전까지 최연소 흑색이었던 여의천주는 원래 그랬다.
그때 간소하게나마 장례를 지낸 도사들 중 한 사람이 다가왔다.
저벅.
먼지 묻은 도포를 걸친 중년의 검객.
도명이 취풍(取楓)인 도사로, 근래에 북방에서 이름이 조금 꺾인 초둔검법(憔鈍劍法)을 사사한 형산파의 제자였다.
그는 설움이 덧발라진 얼굴로도 북궁아와 위지극에게 정중히 양손을 모아 올렸다.
“두 분 대주께 은혜를 입었소.”
위지극은 똑같은 자세로 정중히 답례했다.
“지나가던 길에 취풍산인께서 누워 계셨을 뿐입니다. 아주 눈감기 전에 시운이 맞아서 다행이지요.”
흠잡을 데 없는 몸가짐과 달리 시비가 붙을 만한 말본새였지만, 공동과 형산의 도사들은 그 말을 꼬아 듣지 않았다.
온통 싸움꾼뿐인 입황성 흑색으로부터 온전한 품행을 찾는 이도 없었다.
피차 북방 강호에서 활동하던 고수들.
애초에 양측은 구면이다.
위지극과 마주한 형산의 취풍검객은 양손을 내리며 물었다.
“아주 올라오신 거요?”
“일단은 그렇습지요.”
종남 장문인을 누이로 둔 천룡대주는 연장자에게 싹싹하기도 했다.
사형제들을 잃은 취풍검객이 희미하게나마 입매를 올릴 정도였는데, 그것은 강호에 마모된 미소였다.
“잘됐구려. 그렇지 않아도 근래에 이 땅의 정세가 기이하게 바뀌어서.”
“기이하게라 하심은?”
“여러 북왕들끼리 배신, 궐기, 충돌이 난무하기 시작했소. 벌써 사광(使鑛) 땅과 대도시 옥요희(玉妖禧)엔 육원성군 중 둘씩이나 현현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오. 천하가 뒤집어지고 있지. 그도 그럴 게… 외도제일검 같은 자가 하나 이상이라면, 그것이 어디 사람 사는 땅이겠소?”
“아.”
“명백히 누군가가 난세를 부추기는 형국이니, 필히 경계해야 할 거요. 세상을 움직이는 자란 대개 속내가 음험한 법 아니겠소?”
“뭐, 알 수 없지요. 나름대로 좋은 뜻이 있을지도.”
“내 말을 믿으시오. 그 기량이 얼마나 경이롭건 언제든 파괴적인 출수를 내칠 수 있는 인물일 테니. 어쩌면 새로운 투신이 나타날지도 모르겠소. 온 천하에 모종의 영향을 미칠… 그만큼 전에 없던 움직임이오.”
“음.”
“……?”
취풍검객이 신검단 천룡대주를 의아하게 바라봤지만, 위지극은 비스듬히 시선을 틀어 외면했다.
그리고 어쩐지 경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얼버무렸다.
“어찌 됐든 보중하십시오. 천하가 많이 어지럽긴 합니다. 굶주린 강자들도 하나둘씩 은거를 깨는 형국이고.”
“이럴 때 황실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그건.”
잠시 스스로 말을 끊은 위지극이 북궁아를 힐끗하며 얘기했다.
“제가 사정을 조금 압니다. 무공 군세의 운용에 있어 황실이 엄청난 갈등에 부딪쳤거든요. 문무백관과 황제의 뜻이 모조리 제각각인 데다, 근래엔 단주 대리의 이름으로 자금성에 화탄이 떨어져서….”
“화탄?”
“정확히는 서찰입니다.”
―이제 황군은 물러나고, 입황성 신검단이 북방의 민초들을 구휼한다.
무시무시한 월권.
그 내용에 취풍검객은 상중임에도 헛웃음을 흘렸다.
황군을 갈음할 만한 신검단 전력이라면, 당연히 대주들뿐만 아니라 모든 입황성 무사들을 일컫는 게 당연했던 까닭이다.
연화나타 정연신이 장성에서 호천성까지 이기어검으로 된 포격을 날리는 것과는 격이 다른 문제였다.
그것을 공공연히 인정받자면 문무백관을 포함한 온 황실과 문무 양면으로 싸워야 할 수밖에 없었다.
큰 힘의 밀집에 의한 내란을 먼저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제국이기에.
“천하 남제에 맞서 북방의 또 다른 황제라도 될 셈인가…? 하여간 북경은 전쟁통이겠구려. 신검단주 대리에 대해선 많은 풍문을 듣긴 했소만…….”
“제가 그 전쟁통에 빠져 죽을 뻔했지요.”
위지극이 마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임 신검부대주가 자금성에 올라온 황제의 면전에서 ‘태황태후가 입황성을 겁낸다’고 지껄인 뒤, 우리 둘의 석방을 조건으로 순순히 뇌옥까지 걸어 들어갔으니. 뭐 황실의 입장에선 체면을 세운 격입니다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요?”
“삼방대장군과 황실삼대고수가 모두 장성이나 북방을 떠도는 지금, 신임 신검부대주를 어찌해 볼 만한 인물은 자금성에 없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무공이 몰라보게 고강해져 있더군요. 은잠술에 한해선 적수가 드물지도 모르지요.”
괴상한 놈. 위지극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
“태황태후께서 왕림하실 곳은 아닌 줄로 압니다만.”
“…이 서찰에 찍힌 신검단주의 직인을 알아보겠느냐. 정가 섬예가 너, 신검부대주에게 연통했다. 읽어 보거라.”
“소인은 밤눈이 어두운 편이고, 아시다시피 지금 이곳은 자금성의 뇌옥인지라.”
“읽어라.”
“그럼 잠시….”
“당금 천하에 너보다 밤눈이 밝은 이는 없을 것인즉, 당장 모두 보았느냐?”
“…예.”
“온전히 자유를 박탈당한 채 황실 뇌옥에서 이처럼 담담할 수 있는 자, 구주를 통틀어 너뿐이리라. 네가 명나라에 이겼다.”
“……?”
“흉작이 거듭될수록 덩달아 고단해지는 ‘문’, 왕을 자칭하는 북방의 늑대들이 투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세태… 네가 작금의 상황을 옳게 헤아렸더구나. 황실은 당대 신검부대주를 오래 묶어둘 수 없음이야.”
“태황태후 전하.”
“네가 청을 올린 대로, 이 나라는 이제 입황성의 행사에 일절 관여치 않는다. 적어도 북방을 평정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그리될 것인즉… 내가 궁명왕을 설득하여 양양의 본성으로 보낼 것이다. 정가 섬예가 한 점의 심려도 품지 않도록. 이 또한 네 뜻이었겠지.”
“아니.”
“수백 년 동안 입황성이 두르고 있던 압제의 사슬을 네가 끊었느니라.”
“…….”
“이대로 북상해도 좋다. 가서 정가 섬예를 알현하고, 모든 청이 받아들여졌노라고 말해라.”
열일곱 모두를 이끌고.
명나라 태황태후의 낮은 목소리가 아스라이 메아리친다.
북경 형부(刑部)에서 가장 깊숙하여 사람이 아니라 괴력난신을 가두는 뇌옥.
불현듯 시뻘건 안광이 명멸했다.
거친 입김과 함께였다.
하아―
장내를 덮고 있던 어둠이 자연스럽게 옅어지며 박쥐의 형상을 취했고, 그 붉은 기세에 새까만 옷자락이 섞여 자줏빛으로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