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in A Love Comedy RAW - Chapter (47)
Chapter 47 – 미유키에게 새긴 흔적
주말을 앞둔 금요일, 부활동 시간.
멀뚱히 서선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내 뒤에서, 미유키가 까치발을 들었다. 어깨 너머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한 그녀가 물었다.
“바비큐 기계는 왜 사려는 거야? 집에서 고기 구워먹으려구?”
“어. 이거 야키토리도 된대.”
“갑자기 야키토리는 왜?”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굳이 야키토리를 언급한다는 건, 나중에 같이 먹자는 뜻. 이런 내 말의 속뜻을 알아차린 미유키의 고개가 수줍게 수그려졌다.
함께 잔 날 이후, 미유키는 자꾸 날 보며 얼굴을 붉히고는 했다. 원래도 그랬지만 빈도가 더 늘었다는 얘기다.
당분간은 계속 저러겠지. 비가 오는 날마다 나와의 동침을 생각할 테고.
“저… 마츠다 군.”
몸을 배배 꼬던 그녀의 부름. 휴대폰을 집어넣은 내가 대답했다.
“왜.”
“나 오늘 문화제 준비 때문에 오늘 엄청 늦게 끝나… 체육관 대관해서 꾸며야 돼.”
“벌써?”
“벌써가 아니라 지금 시작해도 늦었어… 그러니까 부활동 끝나면 먼저 가.”
저건 기다리겠다는 대답을 바라고 한 가식적인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한 여덟, 아홉 시쯤 끝나려나본데… 그때까지 학교에서 기다리는 건 오버고, 시간에 맞춰서 데려와야겠다.
“데리러 올 테니까 끝나기 20분 전에 연락해 그럼.”
“그러지 않아도…”
“시끄럽고, 연락해라.”
“…. 알았어…”
마지못해 대답한 미유키의 눈매가 동그랗게 변했다. 집게손가락으로 내 앞머리를 집고, 위에서 아래로 스치듯 쓸어내린 그녀가 말했다.
“머리가 조금 길었어.”
“안 자른다.”
“누가 뭐래? 그냥 어울린다구…”
정성스레 내 앞머리를 정리해주는 미유키.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던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야, 미유키.”
“응?”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잘래?”
미유키의 손가락이 내 앞머리 가운데 부분을 쥔 채로 우뚝 멈췄다. 위아래로 한계까지 벌어진 그녀의 눈이 한 차례 끔벅거렸다.
“오늘…?”
며칠 전에 자고 가라고 했을 때보단 평정심을 되찾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미유키의 손목을 잡아 내려놓은 내가 말했다.
“일어나서 좀 쉬다가, 같이 조조영화 보자. 그 뒤에 집까지 데려다줄게. 어때?”
“아… 그…”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잖아. 너도 솔깃하지? 다 알아.
냅다 승낙하기 부담스럽다면 이유를 하나 만들어줄까? 그래야겠다.
“너 저번에 입었던 옷 아직 안 줬다.”
“주, 주말에 주려고 했어…!”
“주는 김에 자고 가.”
“가져오려면 집에 들러야 돼…”
“들렀다 가면 되지.”
“…..”
미유키는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랑 아빠는 마츠다 군의 차종을 알고 있는데, 만약 집앞에 마츠다 군의 차가 서있으면 의심할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머, 멀리… 멀리 세워놔… 알았지?”
붉어진 얼굴로 당부를 하는 미유키의 눈빛엔 자그마한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포근한 미소를 지은 나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고 상쾌한 듯 기지개를 켰다.
“알았어.”
**
상단세의 발 자세는 중단세와는 다르게 오른발이 뒤, 왼발이 앞인가? 왼손으로 타격을 하는 게 정석이니만큼, 사거리를 더욱 늘리기 위해서구나.
휴대폰으로 상단세 강의를 찾아보던 나는, 동산 위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무도 없다. 혼자 연습하기에 딱 좋은 상황. 치나미가 오기 전에 조금만 해보자.
죽도를 머리 위로 들어 어설프기 그지없는 상단세를 취한 나는 밀어걷기를 해보았다. 밀어걷기는 이동할 방향의 발을 먼저 움직이는 게 기본. 그것을 명심하고 천천히 발을 놀려보니 나름 잘 된다.
타격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상단세는 빠른 공격속도와 호쾌한 타격이 주를 이룬다. 속도와 파괴력을 높이려면…
‘좋아.’
나는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동작을 그대로 따라했다.
“흡!”
숨을 들이켰다가 훅 내쉬면서, 오른발로 바닥을 쭉 밀어내며 왼발을 크게 내딛었다. 그러자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힘이 빡 들어가면서, 왼발이 무겁게 들렸다가 바닥으로 기세 좋게 내려찍혀졌다.
그와 동시에 들고 있던 죽도를 그대로 내리치자,
후우웅-! 쿵!
바람을 쪼개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된 건가?’
영상에서 보던 상단세의 머리치기와 얼추 비슷한 것 같긴 한데, 봐주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한 건지 잘못된 건지 가늠을 못하겠다.
왼발에서부터 찌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을 참아낸 나는, 다시 한 번 발구름에서 이어지는 공격을 시도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아앗!?”
뒤에서부터 치나미의 경악스런 외침이 들려오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자세를 푼 나는, 눈을 부릅뜬 치나미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머리를 긁적였다.
“죽도는 다 닦으셨나보네요.”
“다 닦았어요! 그런데 마츠다 후배님! 지금 뭘 하신 건가요!?”
일단 시치미를 떼야겠다.
“평소대로 연습을 했습니다.”
“평소대로…? 이상하군요. 평소대로라면 마츠다 후배님은 중단세로 연습을 하셨어야 했어요. 하지만 저는 분명히 상단세를 취한 후배님을 본 것 같단 말이죠?”
“아닐 걸요?”
“아뇨? 아닌 게 아닌데요? 분명히 상단세였는데요?”
“이상하네요. 잘못 본 게 아닐지?”
“마츠다 후배님…! 제게 거짓말을 하시려는 건가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날 압박하는 치나미. 엄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얼굴이 워낙 순둥한데다 체구가 작고, 말투가 너무 앙증맞아서 위압감이 전혀 없다.
이왕 걸린 김에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죽도를 허리춤에 착검한 내가 말했다.
“사실 스승님이 본 게 맞습니다.”
“역시 그렇죠!?”
“예.”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듣지 않으시나요?”
“그야… 하고 싶으니까?”
“…..”
태연한 내 순환 논법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 은근슬쩍 치나미의 앞까지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기초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흥미를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맨날 중단세랑 걷기만 하다 보니 지루해요.”
물론 기초는 중요하다. 비단 검도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일을 하든, 매일 연습을 해도 모자란 게 기본기다. 그러나 그 기본기를 배우는 사람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요즘 복싱 체육관에서도 관원들의 흥미를 유발하려 첫날부터 원투를 가르친다. 그런 식으로 당근을 주면서 재미를 붙여줘야 근성이 생기는 법. 너무 기초만 중시하다가는 부원들이 죄다 떨어져나가려 할 것이다.
아니 근데 갑자기 분위기가 열혈 스포츠물이 됐잖아? 진정하자.
“후배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검도는 심기체를 깨끗이 하고…”
그렇지. 심기체 처녀… 중요하지.
“그 심기체 단련도 잡념이 없을 때 잘 되는 것 아닐까요?”
“…. 그렇긴 한데요…”
넘어올 것 같다. 이대로 밀어붙이자.
“솔직히 중단세를 처음 배웠을 땐 이게 뭐지 싶었는데, 방금 상단세 영상을 보면서 머리치기를 따라해 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열정이 막 솟아나네요.”
두 주먹을 불끈 쥐기까지 하며 오버를 하자, 치나미가 귀를 쫑긋했다.
“그, 그랬어요…? 정말…?”
“예.”
“으으음…”
낮은 신음을 길게 터뜨리며 고민을 하는 치나미. 땅바닥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내게 타협안을 내놓았다.
“후배님의 말씀처럼, 흥미는 아주 중요한 요소에요. 하지만 저나 렌카가 말씀드렸다시피, 중단세를 배우지 않으면 상단세는 반쪽짜리만도 못한 겨눔세일 뿐이에요. 상대방의 손쉬운 먹잇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중단세를 배워라?”
“네. 상단을 가르쳐드리긴 하겠지만, 중단을 위주로 훈련해야 해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르쳐주신다는데 저야 좋죠.”
“좋아요. 그러면 아까 했던 머리치기를 한 번 시연해보세요. 기초의 중요성을 상기시켜드릴 겸, 한 번 보면서 피드백을 해드릴게요.”
“그럽시다.”
심드렁하게 대답한 나는 혼자 독학한 상단세를 취했다. 이후 치나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흡!”
짧은 호흡을 내뱉으며 죽도를 휘둘렀다.
후우웅-! 쿵!
발구름이 끝나자 예의 그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기세만큼은 좋았다고 생각한 나는 죽도를 회수했다. 그리고는 치나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요?”
“…. 흐에?”
짤막한 탄성을 터뜨리고는 입을 뻐끔거리는 그녀. 저 놀란 낯을 보니, 내가 제대로 한 건 아닐지 몰라도 아주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역시 난 재능이 있었구나. 그래, 주인공이 특별하지 않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나는 벙 찐 상태의 치나미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떠냐니까요? 잘했어요?”
감상을 묻는 척하며 저번처럼 그녀의 뒷목을 살살 문질렀다. 그러자,
“앗…! 그게… 방금 자세는… 흐아아…”
치나미의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눈이 확 풀렸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반응이 너무 찰진데, 혹시 여기가 성감대인가? 아니면 그냥 남자의 손길에 약한 건가? 다음에 제대로 확인해봐야겠다.
**
덜컥.
“늦었지? 진짜 미안해…!”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사과를 해오는 미유키.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을 본 나는 차를 출발시키며 미유키를 나무랐다.
“왜 이렇게 늦었는데? 잘 뻔했다.”
“내가 늦는다고 했잖아… 집에서 뭐하고 있었어…?”
“룩북 봤어.”
“룩북? 남자?”
“아니, 여자. 옷 입은 채로 팬티 갈아입는 거 있더라.”
노골적인 말에, 미유키의 표정이 멍해졌다. 슬쩍 그녀를 쳐다본 나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뻥이야.”
그에 다소 안도한 미유키가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진짜 뻥이지…? 그런 거 안 보지…?”
“보고 싶으면 봐도 되냐?”
“그, 그건 마츠다 군이 알아서 해야지…”
“그래도 돼?”
“…. 아니. 안 봤으면 좋겠어.”
“그럼 네가 보여줘.”
“아 뭐래…! 죽어도 싫어…!”
기겁한 미유키의 고개가 도리도리 저어졌다. 눈까지 질끈 감은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을 망각하고 입술을 덮칠 뻔했다.
참자. 참는 거다. 내일은 주말이다. 괜히 등교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려서 잠을 청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집에 도착한 뒤에 느긋하게 미유키를 녹여 가면 된다.
복합 카페에서 생각했듯, 수위를 점점 높여나가면서 미유키를 적응시키는 게 중요하다. 오늘은 너무 오버하지는 않되, 저번보다는 더욱 야릇하게 도전해보자.
“죽는 게 나을 정도야? 서운하네.”
“서운하긴 뭐가…! 하아… 마츠다 군이랑 같이 있으면 감정조절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감정에 솔직해지면 좋은 거지.”
“솔직해지는 게 아니라,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야.”
“같이 미치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미유키의 애정 어린 불평을 능청스레 넘긴 나는,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켜자 히죽거리며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