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as a Scrapped Extra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4
“응…? 저 친구, 귀족이었나 보구먼. 난 또 자네 손자인 줄 알았지.”
백발이 무성한 노인 네르진이 새파랗게 젊은 청년처럼 생긴 성자에게 극존대를 하니 오해를 산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느니, 그냥 오해를 방치하기로 했다.
“쯧, 세상 말세야. 나도 손녀딸이랑 같이 건국제 구경이나 온 건데 말이야.”
“….”
심금이 움찔거렸다. ‘손녀딸’이라는 단어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노인은 지금껏 혼자였다. 그의 손녀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이 난리에 함께 있지 않다면,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추론이 거기까지 이르자 이 까탈스러운 노인이 다르게 보였다.
‘그 상황에서 사지로 걸어가던 우리를 불러 쉼터를 제공해주었단 말인가.’
“아, 그리고 여기 마실 걸 좀 가져왔으니까 체하지 않게 천천히 마시라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눈앞의 호의를 빌어서 의문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으응? 궁금?”
“여기에는 웃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 겁니까? 이상하게 사람들이 긴장감이 없네요.”
“여기 상단주가 말해주더라고. 상단 건물에 인식 저해 마법이 걸려있다면서 안심하라고. 상단주 되게 좋은 사람이야. 이런 상황에 다른 사람들을 들이기 꺼려졌을 텐데 말이야. 4대 공작 중에 그, 데미니얀? 데미니얀 공작가의 후원으로 랜드 내에 건물까지 지었다지 않나! 이렇게 인성이 좋으니 공작가에서도 밀어준 거겠지.”
‘데미니얀….’
4대 공작가 중 하나. 제국의 기둥인 든든한 곳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하하, 어쨌든 그래. 건물 문을 열고 소리를 꽥꽥 질러대지 않는 이상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말어.”
문을 열고 소리를 꽥꽥….
눈앞의 노인이 우리를 부를 때 쓴 방법이지 않은가. 감사함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노인의 설명에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기 저 돌덩이들 보이지? 저것만 안 건들면 된다고 하시네.”
건물 구석구석에 박힌 마나석들이 보인다. 은은하게 마나의 빛을 내뿜는 게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오히려 네르진의 의심은 더더욱 깊어졌다.
‘인식 저해 마법이라고….’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특수 장비 없이 마법을 감지할 수 없으며, 마나를 수련한 전사라도 어려운 일이다. 마법이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시동어를 트리거로 불덩이가 나타나거나 방어 과정에서 보호막의 실체가 드러나는 등.
‘그래서 마틴 사장님이 대단하신 거지. 어쨌든 그건 특수한 경우고.’
그러나 마법사라면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마법을 감지할 수 있다. 네르진도 기본 소양으로 마법을 익혀둔 몸. 특히 ‘부여’나 ‘결계’ 등이 전공인지라 마나의 흐름에 한해서는 어지간한 사람보다 민감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해봐도 이 건물에서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
이 건물 전체는 물론이고, 곳곳의 마나석에서도 마나의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마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치 장난감처럼.
“허헛! 어쨌든 곧 배식이 있다고 하니까 데려온 애들이랑 같이 1층으로 올라오라고! 먼저 가 있을 테니!”
“네….”
휘적휘적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네르진은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끌어당겼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거짓말, 인가?’
구조의 손길도 실은 먹잇감을 유인하던 뱀의 혀였나…?
‘아니다. 노인은 확실하게 일반인이었다. 생의 끝에 서서 마나의 기운이라고는 티끌조차 남지 않은 황혼의 인간.’
그렇다면. 노인에게 인식 저해 마법과 마나석의 존재를 알려준 자가 거짓을 입에 담았을 터.
‘그 사람은, 상단주?’
이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조했다는 선의를 의심해야 할 줄이야.
“할아버지!”
“다녀왔습니다.”
먹을 걸 구하러 간 비앙카와 사보가 희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1층에서 배식이 있대요! 어서 올라가요!”
“….”
이어서 1층으로 내려온 상단 관련자로 보이는 사람이 크게 외쳤다.
“지금부터 1층에서 배식이 있을 예정이니, 모두 오셔서 받아 가시면 좋겠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식욕이 없더라도 먹고 힘을 비축해놓아야 합니다! 곧 제국 경비기사들이 올 겁니다! 모두 힘을 내세요!”
그러고는 올라간다. 그 뒤를 따라서 지하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올라가기 시작한다….
“우리도….”
“비앙카, 사보. 내 말 잘 듣거라.”
네르진은 떨리는 눈동자로 두 사람의 어깨를 잡고는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 보았다.
“하, 할아버지…?”
비앙카가 놀란 듯 보였지만, 오히려 지금은 경각심이 필요할 때였다.
“여기서 주는 걸 자연스럽게 받되,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물 한 모금조차 말이다.”
“대체, 왜, 왜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사랑스러운 손녀딸이 목소리를 떨어왔지만, 슬프게도 현실을 직시시켜줘야만 했다.
“어쩌면, 우리가 호랑이굴로 들어온 걸지도 모르겠구나…!”
*
“오라버니!”
“왔느냐.”
그 아이는 나의 빛이었다.
“또 이곳에 계셨어요? 천주(天柱)산맥 봉우리의 절벽이 얼마나 위험한데요.”
“하지만 풍류를 읊기에는 제일 좋은 곳이니 계속 발걸음이 닿는구나. 하늘 기둥 산맥. 이름부터가 운치 있지 않느냐?”
또한 유일하게 남은 분신이며.
“저 너머를 보거라. 코스모스 제국의 은혜를 나눠 받는 무수한 열국들이 보이는구나.”
“…구름에 가려서 안 보이는데요?”
“…대충 보인다고 해다오.”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이다.
뒤돌아보자 마찬가지로 백발에 20대 후반쯤의 미모를 가진 여동생이 보인다. 누가 저 아름다운 아이를 보며 나이가 세 자릿수라고 생각할까?
“그런데 등 뒤에 숨긴 그것은 무엇이냐?”
“오라버니 관이요.”
죽어 들어가는 관짝을 이야기하는 줄 알고 섬뜩해져서 침을 꼴깍 삼키니.
“꽃을 엮어 만들어 보았어요.”
화관. 새하얀 장미꽃을 엮어 만든 아름다운 면류관이었다.
“뭘 상상한 건데요, 오라버니?”
“…아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동생이 다가오더니 내 머리 위에 백장미관을 씌워주었다.
코스모스님의 성력이 느껴진다. 어쩐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어서 하늘 기둥 산맥 너머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좀 더 정진하자꾸나.”
“갑자기요?”
“응. 그래야 오래오래 함께 살지 않겠느냐.”
“네에, 오라버니.”
내 여동생이 말갛게 웃던 얼굴이 이토록 생생한데. 기억에 선명한데. 이 대화가, 여동생이 죽기 전 마지막 대화일 줄이야.
피스메이커의 단원 위스드라무스의 가주가 남긴 마지막 불씨를 제국에서 탈출시키는 작전을… 교황이 알아차렸다. 거룩한 은신자 전원이 긴급 출동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제발! 제발! 제발!”
땅을 박찼다. 대지가 갈라지며 터져나간다. 쏘아진 성자의 몸은 가속에 가속을 더하고 점멸까지 써가며 현장에 도착했지만.
“성, 자님….”
“자네!”
나무에 걸린 거적인 줄 알았건만! 옷도 몸도 만신창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거룩한, 은신자, 하늘 기둥, 산맥….”
마지막 말을 뱉은 단원은 사명을 다했다는 듯 숨을 거뒀다.
“….”
성자는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번에 발견한 단원은 둘. 슬쩍 쳐다본 다음에 스쳐 지나갔다. 머리 없는 몸이니 나중에 찾아줘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제발….”
다음에 발견한 단원은 셋. 자세가 참 인상적이었다. 끝까지 누군가의 망토 끝자락과 발목을 잡으려는 듯. 놈들이 향한 방향으로 손을 뻗으며 쓰러져 있었으니까.
“제발!”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망토를 둘러쓴 거룩한 은신자. 교황 직속의 암살 부대를.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붉은 여인. 원래는 새하얀 순백이던, 내 여동생.
“안 돼─!”
쌍권총을 꺼내 들었다. 코스모스의 적. 선의 대척점에 선 악마들에게 겨누라 명 받았던 정의의 무구를.
“성자다!”
“연관되어 있다면 죽이라는 명이다!”
“대형을 갖춰!”
거룩한 은신자들이 진형을 꾸리고 대비했지만. 쌍권총이 불을 뿜는 순간 서른 명이 넘던 그들 중 반절이 쓰러졌다. 요격, 도탄, 곡사. 쏘아진 수십 발의 탄환이 공간을 휘저은 결과였다.
“이게, 무슨!”
“큭!”
살아남은 거룩한 은신자들도 성자가 달려들어서 총으로 내리찍었다. 머리를 잡고 돌려버리기도 했다.
교황 직속 최강의 부대라던 거룩한 은신자 30명을 처리한 시간은 5분. 성자는 죽은 이들을 발로 차고, 밟고, 짓이겼다.
그리고, 여동생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흉부에 구멍이 뻥 뚫려서 심장이 사라진 여동생은, 차가웠다. 싸늘한 주검이 된 그녀를 부둥켜안은 채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포효. 온 천지가 진동하며 두려움에 떤다. 하늘 기둥 산맥이 우르르 떨며 운다. 그 위에 선 한 사람이 보였다.
‘네르진. 저 꼬맹이는, 살았는가. 내 여동생은, 죽고!’
분노,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이것이 여동생의 선택이었다.
코스모스 제국이 멸망한 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차원 연구소에서 갑자기 강림한 타임카오스 던전이라는 말도 안 되는 대재해는 순식간에 제국을 삼켜버렸고.
그 혼란한 가운데 피스메이커의 단원들도 각자도생으로 도망쳤으나, 대부분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삼켜졌다.
“….”
홀로 남은 성자는, 온 세계에 퍼진 코스모스 제국이 불러온 재앙들을 수습하며 다녔다.
“….”
홀로 남은 성자는, 혹시 살아남았을 피스메이커 단원들을 찾으며 100년을 떠돌았다.
“….”
홀로 남은 성자는, 계시를 통해서 이후에 세계로 낙하하는 종말들을 보고야 말았다.
“….”
홀로 남은 성자는, 유쾌하고 여유롭게 변했다. 무너지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
홀로 남은 성자는, 기도했다.
‘제가 진정 혼자가 되었습니다.’
고독함 속에서 절망을 버텨내며 종말을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아득한 시간 동안… 홀로.
“…!”
그 순간 몸이 위로 끌려 올라갔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었다. 하늘의 구름층을 뚫고 올라간 순간!
*
“허억!”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헛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했다.
‘여긴….’
기억이 난다. 죠베르카와의 싸움에서 완패한 후, 간신히 네르진을 찾아서….
‘큭, 이건 대체, 뭐지?’
역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옆을 돌아보니, 네르진의 등이 보였다. 그가 등을 보인 채 연금키트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양옆에는 소녀와 그보다 작은 소년… 사보가 서 있다.
“역시나. 음식에 정체불명의 미확인 물질이 들어 있었구나. 먹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준비하거라. 어서 탈출해야겠다.”
“네, 알겠… 어?! 할아버지! 깨어나셨어요!”
“아, 성자님!”
네르진이 황급히 뒤돌아서 다가왔다.
“성자님, 정신 차리셨습니까? 잘 됐습니다. 어서 탈출해야 합니다.”
“네르진…,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
“네?”
냄새? 당황하던 네르진이 뒤의 연금키트를 보았다.
“연금 과정 중에 악취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아니 그보다 먼저 탈출을….”
“그게, 아니다…!”
깨어나자마자 성자를 분노케 한 냄새. 역겹기 짝이 없는…!
“이 공간 전체에, 악마의 힘이 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