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restructuring RAW novel - Chapter 234
Chapter 50. 탄압의 여파(3)
위치한 건 자그마한 문과 정자 하나가 전부인 천공(天空).
따스한 봄바람에 희뿌연 구름이 정자를 감싸며 흘러간다.
[이번 투자 건도 거절하셨다 들었습니다.]뜨겁게 우려낸 찻물을 소리 없이 마신 노신사가 물었다.
그러자 눈앞의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하는 거구의 무장(武將).
[내, 말하지 않았나. 정리 수순을 밟겠다고.]무장의 음절, 음절에 구름 같은 연기가 흩날린다.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도, 귓가에 대고 외치는 것도 같은 오묘한 음성에 노신사는 고개를 숙였다.
[……또 그 얘기십니까.]찰그락-
차가운 바둑돌이 노신사의 손끝에 닿았다.
서늘한 촉감을 느끼며 돌을 고르고, 마음을 고르고, 말을 고른다.
그리하여 던진 화두.
[귀변은 실리, 중앙은 세력이라지요.]노신사의 백돌이 우측 귀—오른쪽 위 귀퉁이—를 차지한다.
주인 없는 영역을 잠식하고, 뻗어 나가기 위한 첫걸음.
쉽사리 디딘 걸음에 침착해진 마음을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바둑에서 귀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귀와 변이 중요하다.
그는 곧 실리를 택함이 경기에 있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그 말인즉슨.
[실리를 챙기라는 건가.]무장의 눈길이 노신사를 향했다.
스윽.
거구의 신체가 품고 있는 위압감이 찰나의 시선에 담긴다.
평범한 필멸자였다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등줄기에 땀이 차오를 정도.
그러나 백발의 노신사는 노장(老將)의 눈빛쯤이야 웃어넘길 연륜과, 실력과, 경험을 갖추었기에.
[천왕(天王)이시여.]입을 열었다.
[아직 세계는 왕을 필요로 합니다.] [……왕이라.]붙잡았다.
그러나.
[그건 그대가 아닌가.] [……!]왕은 붙잡히지도, 세 치 혀에 넘어가지도 않았다.
달콤한 말 한마디에 속아 넘어가기엔 그가 지나온 세월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
찰그락-
천왕은 흑 돌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바둑말일세.] [예.] [처음 만들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흰 돌과 검은 돌로 펼쳐 내는 수 싸움.
세상의 첫 ‘놀이’를 고안해 낸 존재와 눈앞의 사내가 절친한 사이였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이미 떠난 지 오래.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상 어린 읊조림에 노신사는 잠자코 기다렸다.
왕의 입이 열릴 때까지.
[자네, 귀변이 중요한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귀변 말입니까.]갑작스런 질문이었다.
그러나 답하기 곤란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조심스러울 뿐.
[그야 가장 적은 돌로 효율적으로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 아닙니까.]귀와 변은 바둑판의 끝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귀에 집을 짓는 것이 가장 빠르고, 변에 짓는 것이 그다음으로 빠르다.
그러니 빠르게 집을 지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귀변이 중앙보다 귀하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인데.
멈칫!
노신사의 백 돌이 잠시 멈추었다 착수했다.
[이기기 위한 싸움, 승부만을 위한 싸움만 한다는 걸세.]그럼 지기 위한 싸움도 있단 말인가.
씁쓸한 고개를 떨군 왕을 바라보는 노신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늙은이는 이만 물러나겠네.] [정정하신데 왜 자꾸 그런 소릴 하십니까.] [너무 오랜 세월이었네. 순환의 흐름을 억지로 막고 있었던 게지.] [하나…….]그러나 차마 더 이상 붙잡지 못했던 이유는.
탁!
[단수네만.]이미 끝난 판.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런. 입을 놀리는 데 급급했군요.]노신사가 입매에 감도는 씁쓸함을 지웠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으나, 예상했던 바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목줄을 끊고 도망칠지언정,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테니까.
황무지에서 땅을 일구고, 백만의 직원이 몸을 의탁할 집을 지어 올리고, 세계의 법도를 만들었듯이.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걱정 말게. 내 앞으로 십 년 정도는 버텨 볼 생각이니.] [십 년이라…… 짧은 시간이군요.]십 년이라…….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런히 접어 둔 코트를 집어 든 노신사가 가볍게 물었다.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허허, 이 세월을 살았는데 또 무슨 정리가 필요하겠나.] [그도 아니라면 그 십 년은 무얼 위한 것입니까.]그러자 가볍게 돌아온 대답.
[요즘 지켜보는 아이가 하나 있다네.]멈칫!
노신사가 막 중절모를 쓰려던 손을 멈췄다.
무량(無量)의 세월에 노쇠하긴 했으나, 가장 높은 하늘을 모시는 가장 높은 존재.
이 세계를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 중 마지막 남은 존재인 천왕이 지켜보는 아이.
[그 아이가 뜻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갈까 해.]게다가 이룰 뜻이 있는 놈이라.
오랜만에 심장이 저릿하다.
뜨끈한 기운이 뱃속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예지에 가까운 불길함에 전신의 기운이 동요한다.
[있네.]노신사는 손에 든 중절모를 푹 눌러썼다.
왕의 답을 기다리며.
[……오랜 친우의 물건을 되돌려준 아이가.]* * *
한때 희망이라는 것이 있었다.
“너라면 살 수 있을 거다.”
나라면 내 사람들을 지키고, 키워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희망.
“크흑…….”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있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채로, 달빛을 담은 검을 악귀처럼 휘두르던 사내를 떠올린다.
“그땐 더 강해져 있을 거다.”
“……죽지나 마라.”
강해졌다.
끝없는 싸움, 싸움, 싸움 속에서.
피비린내가 너무도 익숙해 더 이상 인지할 수도 없어진 세상에서, 그들은 다시 없을 도약을 이뤘다.
그러나.
“끄으으으으윽……!”
“준!!”
그게 다 무슨 의미였을까.
“죄송…… 합니다…….”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동료들을 하나둘 잃고. 더 이상, 할 수 있다 말할 수도 없도록 희망을 잃어버렸는데.
[사원 ‘준’에게서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털썩!
사이토는 눈앞에 떠오른 끔찍한 상자가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았다.
‘유품.’
제게 남은 모든 걸 담은 선물이었다.
사이토는 유골함이나 다름없는 상자를 차마 열 수 없었다.
부하를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상…… 남았을 텐데.’
직전 미션으로 받은 보상을 남겨 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준은 선택한 거다.
약간의 회복이 가져다줄 끝없는 고통 대신, 겨우 평안해질 죽음을.
‘……개자식.’
어떻게든 살아 보려 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이빨을 드러내는 마물들보다 무서운 건 희망의 부재였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다.
이 지겨운 싸움에도 분명 끝이 있을 거다.
……아무도 그리 말할 수 없는 암울한 하루의 연속.
스릉-
검을 들고, 일어섰다.
“분신흡수(分身吸收).”
이를 갈듯 말했다.
[분신(分身)이 소멸되었습니다.] [산개한 기력이 응집됩니다.]살고자 퍼트렸던 분신들을 없애고, 흐트러뜨렸던 기력이 전신의 마디마디를 채웠다.
키에엑! 키에에에에엑!
그토록 많은 동료들을 잡아먹고도 끝없이 몰려드는 마물들을 마주하고.
“암(暗).”
인영을 허공으로 흐트러뜨렸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몸.
동시에 시야가 색감을 잃었다.
타앗!
기척을 감추고 달린다. 흑백의 시부야를 찢어발기듯 밟으며 나아간다.
추잡한 침으로 아스팔트를 녹이고, 칼날 같은 발톱으로 무너진 역사(驛舍)를 짓밟고, 견고한 이빨로 만신창이가 된 전광판을 쥐어뜯는 마물들을 향해.
그리하여.
“살(殺).”
그들을 도륙 낸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피륙을 들쑤시는 무참한 검.
“사, 사이토 씨!”
“혼자서…… 위험해요!”
“우선 도망쳐야 합니다!”
몇 안 남은 이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하나 어찌하면 좋을까.
이 싸움에서 도망치더라도 갈 곳은 없는데.
푸욱-
아니, 이게 싸움이긴 한가.
그들의 진짜 적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저 미천한 미물들이 아니라는 건 이미 명백한 사실.
[‘거대 산편복’ 처치 완료.] [복지 포인트 2,000점을 획득합니다.]눈에 보이지도, 손에 닿지도 않는 저 시스템이라는 걸.
조소와 피눈물이 동시에 흐르는 순간.
푸홧-!
적의 발톱이 뒷목을 스친다.
[주의!] [척수에 감염이 감지되었습니다.] [출혈이 과다합니다.] [즉시 전투를 멈추고…….]뼈를 주고.
[‘거대 산편복’ 처치 완료.] [복지 포인트 2,000점을 획득합니다.]살을 취한다.
[‘거대 산편복’ 처치 완료.] [복지 포인트 2,000점을 획득합니다.]미물의 발톱에 허벅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미물의 이빨에 어깻죽지가 너덜거리고.
미물의 뿔에 복부가 뻥 뚫리도록.
“사이토 씨! 위험합니다! 제발 그만……!”
머릿속이 하얗다.
모든 희망을 버리자 사로(死路)가 활로(活路)처럼 보인다. 이제야 모든 게 정리된 기분.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길이었을까.
자신은 그 사내가 아니니까.
‘만약…….’
그자였다면.
이 자리에서 일본인들을 이끄는 게 제가 아니라 그였다면 달랐을까.
콰드득!
마물의 이빨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정신이 아스라이 멀어진다.
남은 건 눅진한 침과 산성으로 타들어 가는 살갗, 그리고 어두컴컴한 시야 바깥에서 들려오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그리운 목소리.
파즈즈즈즈즈즛-!
솟구치는 빛. 타들어 가는 살점에 포효하는 미물. 터지고, 치솟고, 쏟아지는 적의 파편.
“너는…….”
무한한 싸움의 끝이었다.
* * *
피융-
깔끔하게 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마물의 이마를 관통했다.
[‘방어’ 미션 성공.] [미션 보상 1포인트와 복지 포인트 1,000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됐다!”
정민규는 짧은 환호를 끝으로 재빨리 발길을 돌렸다.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덕분에 빨리 끝났네. 활 솜씨가 점점 느는데?”
“근력을 엄청 올려서 그런지, 점점 쓸 만해지네요. 안 지쳐서 연습도 더 많이 하니까 궁술 스킬도 잘 오르고요.”
오늘의 전투조는 의기양양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 등장한 미션.
자칫하면 밤잠 설쳐가며 해야 했을 싸움을 빠르게 끝냈으니, 저녁나절을 모두 구한 거나 다름없다.
그리 생각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온 거점은.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생각보다 다급했다.
물수건이며 물을 담은 대야를 들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쓰러지듯 누워 있는 여자를 본 순간.
“저기 민규 오네!”
“민규 씨! 여기 민영 씨가…….”
“!!”
정민규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미, 민영아! 괜찮아?”
“……추워. 너무 추워.”
제 연인, 최민영이 오한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추, 추워? 많이? 히익! 무슨 열이…… 우선 옷 좀 더 입고…….”
화살 한 발로 마물의 이마를 관통하던 정민규였으나 이때만큼은 횡설수설했다.
한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게 수천, 수만 배는 어렵다.
그를 뼈저리게 느끼며 정민규는 간신히 말을 골랐다.
“보상 들어왔지? 그걸로 일단 컨디션 회복하자. 응?”
“보상으로…….”
그러나 모자에, 옷에, 양말까지 껴입고, 낡은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제 연인은.
“……버틸 거야.”
“뭐?!”
“버틸 수 있어.”
버틴다 말했다.
“해열제…… 남은 거 있지?”
“있긴 한데…….”
“체력 스탯을 올릴게. …… 그게 장기적으론 더 유리해.”
들뜬 열감에 모로 누워 웅크린 채,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그분 말 듣고 근력 올렸더니 확실히 달라지는 거 보였잖아. 체력도 마찬가지일 거야. 확실히 도움 돼.”
“민영아…….”
최민영이 실눈으로 웃었다.
“해열제랑 물 좀 줄래? 수건으로 몸 좀 닦아 주면 더 좋구.”
한 알의 해열제와 민간요법 따위에밖에 기댈 수 없는 참담함을 억지로 눌렀다.
“……알았어.”
그때.
탁!
수건 쥔 손목을 붙드는 거친 손바닥.
“아뇨.”
“……?!”
들릴 리 없는 이의 목소리였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그러나 한 번의 꿈 같은 희망을 선물했던 이의 반가운 목소리.
“약은 웬만하면 안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긴…….”
놀라서 굳어 버린 정민규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우리 팀 치유사가 유능해서요.”
“우리 팀이라면…….”
그 틈에 들려온 또 한 번의 희망.
“같이 가시죠.”
“!!”
사경을 헤매던 최민영과, 굳어 버린 정민규와,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 탄식과 환호가 흘렀다.
“잘됐다, 민영아! 빨리 갔다 와!”
눈앞에 펼쳐진 오르막길을 꿋꿋이 오르겠다 눈물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아, 참고로 여기 있는 모두를 초청 드리는 겁니다.”
“……?!”
“저, 저희는 왜…….”
이 세상에는 오르막길을 묵묵히 오르는 대신, 부숴서 평지로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다 부숴 줄 테니 함께 걷자 말하는 사람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스윽-
이은호가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