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restructuring RAW novel - Chapter 236
Chapter 51. 노동조합(1)
“다들 뉴스 봤지? 회장님 갑자기 돌아가셔서 경영권 승계하신다네.”
“봤어요! 저희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월급쟁이가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하던 일 열심히 하는 거지.”
월급쟁이, 그것도 비정규직 말단 사원으로 살면서 스쳐 지나가 본 적도 없는 사람.
[이 팀장.]회장이 찾아왔다.
“……회장님.”
인자한 눈매가 부드러운 호를 그린다.
중절모를 살짝 들었다 내림으로써 인사를 건네는 점잖은 노신사.
[잠시 걷지.]한마디였다.
회장의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고 굳어 있던 다리가 자유를 찾았다.
그리고.
한걸음에 북적대던 사람들이 멀어지고.
두 걸음에 주변이 한적한 숲속이 되고.
세 걸음에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림자?’
키가 3-40미터는 될까. 양팔을 쫙 펼쳐도 다 안지 못할 만큼 거대한 아름드리나무가 어느새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통곡의 숲을 이루고 있는 전나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지의 곡선.
빽빽한 잎과 두꺼운 몸통을 그림자처럼 둘러싼 희뿌연 연기.
낯설면서도 그리운 향기까지.
풍성한 유려함을 갖춘 나무였다.
많은 걸 가지진 않았으나 여백마저 제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여유로움과 함께.
‘회사에 이런 곳이 있었나.’
입사 이래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고요함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묻지 않는군.]회장을 처음 본 건 신입사원 연수의 마지막, 우수사원 선발식 때.
그리고 직접적으로 독대한 건 지금이 처음이다.
‘어떤 타입이지?’
정보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높으신 분보다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예의라 배웠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시작한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정보가 부족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으니.
“바쁘실 텐데 직접 행차해 주신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모르는 척 떠본다.
[허허,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가. 좋지 않은 버릇이네만.]“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몸을 낮춰 적을 살핀다.
그러자 내가 아닌 늘어진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멈춰 서는 회장.
[오랜만에 듣는 생(生)의 목소리구먼.]“……예?”
뜬금없는 화제에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하회탈처럼 웃던 회장이 추억에 잠기듯 말했다.
[내 주변엔 이제 목을 울려 말하는 이가 남지 않아서 말일세.]목을 울려 말하는…….
‘잠깐만.’
“제 소리와.”
[내 말소리가 다르지 않은가.]“……!”
알고 있었다.
처음 하로나가 전시장에 등장한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저들의 말소리는 보다 또렷하고, 감정적이며, 직접적이다. 마치 영혼이 영혼에게 직접 속삭이는 것처럼.
성대의 떨림 대신 영혼의 울림으로 만들어 낸 음파인 걸까.
‘그러고 보니……!’
“아빠……?”
인사처장의 자택에 침입했을 때, 그의 딸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누구랑 얘기해……?”
“우움…… 아닌데…….”
그때 느낀 위화감이 무슨 의미일지 잠시 고민했었다.
뒤이어 몰아친 전투 준비 탓에 금방 머릿속에서 잊히고 말았지만…….
‘꼬마랑 처장의 말소리가 달라서였어.’
태생적 요인은 아니란 소리다.
입사 전과 후로 나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격이 다르기 때문일세.]격(格).
분수나 품위, 자격 따위를 일컫는 말.
[격을 높였기 때문이기도 하고.]도박사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이 탑의 주민들은 인간입니까?”
‘천공의 탑’의 고객들이 어떤 존재냐 물었을 때 뭐라 답했었나.
[신이라기엔 부족함이 많지.]“신은 아니지만, 부족함을 채우면 언젠간 될 수 있는 존재란 뜻이군요.”
‘부족함을 채운다…….’
그걸 ‘격’을 높여 간다 말하는 건가.
만약 고객이건, 직원이건 할 것 없이 ‘어떤 상태’를 향해 ‘격’을 높여 가는 중이라면.
‘왜 다들 이 미친 회사를 견뎌 내고 있는지 납득은 가네.’
그건 곧 직원들을 내 편으로 만들 때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최종 목표 또한 절실하다면 같이 싸워 주지 않을 테니까.
“신이 되기 위한 격(格)입니까.”
[신. 신이라…….]회장의 눈매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접혔다.
긍정도, 부정도 않는 모습.
[우린 그걸 ‘은퇴’라 부르지.]“……은퇴.”
정년퇴직, 은퇴…….
여유로운 노년을 계획할 수 있는 인생의 말년.
삶에 지치고 팍팍할 때 한 번쯤 생각해 보긴 했다. ‘은퇴하고 싶다’고. 하지만.
[더없이 영광스럽고, 고결하며, 귀중한 증험(證驗)이지.]……미처 몰랐네.
은퇴가 이렇게 어렵고, 거창한 건 줄.
사락-
회장이 거대한 크기에 비해 얇은 나뭇가지를 시선으로 쓰다듬는다. 그러자 천천히, 그러나 일정하게 옮아가는 눈빛이 형형하게 빛난다.
백발노인의 외양을 하고 있었으나 결코 쇠약해 보이지도, 권태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금껏 만났던 생존자들보다도 더 희망과 열망에 찬 얼굴.
그를 바라보며.
“그럼 구조 조정은.”
지금껏 매 순간 궁금했던 질문.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수백, 수천 번은 물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건 뭘 위해서 하는 겁니까?”
그때.
사락-
고목에서 흘러나온 희뿌연 연기가 농도를 더해간다.
[승기(僧祇) 그 친구, 내 꽤 아끼던 아이였네만.]쭈뼛!
순간 뒷목의 솜털이 삐죽 솟았다.
다리를, 등허리를, 목덜미를 감싸는 서늘한 연기가 그리 만들었다.
[깔끔하게 날려 버렸더군.]“……침입자를 처단했을 뿐입니다.”
언제고 이런 질타를 받으리라 예상은 했다.
다만.
[탓을 하러 온 게 아니라네.]“그럼…….”
[내 제안 하나 하지.]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받아들인다면, 자네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의 답을 주겠네.]우뚝 선 회장을 주시했다.
나와 비슷한 키, 비슷한 체형이나 왠지 모르게 거대해 보이는 사내.
연기 때문인지, 회장이 내뿜는 위압감 때문인지 산소 농도가 옅어진 기분이었다.
어떤 제안이냐.
지금이라도 멈추고, 굴복하라는 거라면, 나는…….
[그 자리를 제안하고 싶은데.]‘……?!’
들이마시던 숨을 잠시 멈췄다.
그 자리.
지금 맥락에서 등장할 ‘그 자리’라면…….
[이 국장.]‘!!’
[내 사람이 되게.]* * *
“……어?”
드미트리가 손에 든 시약을 흔들다가 멈췄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
방금 분명 액체의 찰랑임이 어색했는데.
미세하지만 묘하게 뭔가 어긋난 기분. 어쨌거나.
“이게 지금 하고 있는 연구.”
“무슨 연구랬지?”
“신체 재생 능력을 극한으로 올려 회복력을 강화하는 물약이다.”
드미트리는 하던 얘기를 마저 이었다.
“팀원 중에 괴물 같은 재생력을 가진 남자가 있다. 그의 혈청을 기반으로 약재와 기존 회복 물약을 섞었지.”
“괴물 같은 재생력이라…… 부럽군.”
“그럴 필요 없다. 곧 완성되는 물량이 꽤 되니 챙겨 주지. 팀장님도 허락하실 거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에게 지금껏 제가 이룬 성과를 알리고 싶은 마음 반, 그리고 못 보던 흉터로 너덜너덜한 몸이 안타까워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이렇게 오래된 상처는 치유사의 능력으로도 어찌하지 못한다 했으니까.
“왜 그러나?”
하지만 커다란 흉터가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간 동료의 눈은 어쩐지 낯설었다.
본국에서 그 끔찍한 훈련을 받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약한 눈빛.
“……평화로워 보여서.”
“아…….”
“뭐, 어제도 불곰에 머리 뜯길 뻔한 걸 겨우 살았으니 불평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싶다만.”
꿀꺽. 꿀꺽. 꿀꺽.
아까부터 홀짝대던 보드카 한 병을 마저 털어 넣은 동료가 물었다.
“신입사원 대표는 믿을 만한가?”
‘아.’
드미트리는 그제야 동료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눈빛의 의미를 알았다.
‘불안함.’
구조 조정이 시작되기 전에도 맨손으로 불곰을 잡고, 해상 5천 미터 상공에서 뛰어내린 뒤 그 바다를 헤엄쳐 빠져나온 특수요원이었지만.
“뱉은 말은…… 지키는 사내겠지?”
지금 그의 눈에 담긴 건 불안이었다.
말 한마디에 믿고 따라온 사내로부터 버림받진 않을까.
지옥을 버리고 이 평화로운 곳으로 도망쳐 온 자신이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
그래서.
“보여 준 게 많은 남자다.”
드미트리는 말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슴을 당당히 펴고.
“나는 믿는다.”
* * *
주름이 깊게 팬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우물처럼 깊은 눈빛에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하며.
“송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거절이라.]회장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파스스스스스스슷-
아름드리나무에 붙은 수만 개의 이파리가 일제히 떨었다.
바람 한 점 없이도 점점 세를 더해가던 떨림이.
파슷!
멈췄다.
‘……후.’
회장은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내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건지, 아니면 거절 정돈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도 많이 늙었어.]다만 확실한 건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은 원래 버려진 땅이었다네.]“무엇으로부터 말입…….”
내 궁금증 따윌 해결해 주기 위한 말이 아닌, 순수하게 제 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단어들을 분출하는 말.
[자네 같은 이들이 한 몸 뉠 수 있는 집을 말일세.]마치 강의라도 하는 듯 점잖은 말투.
그런데도 한마디, 한마디를 더해갈수록 서늘하던 공기에서 홧홧한 열감이 느껴진다.
‘……집이라.’
어찌할까.
내 삶의 터전을 망가뜨린 놈에게 기숙사를 내줘서 감사하다 할까.
아니면…….
지금 용암처럼 속이 끓어오르는 건 네놈만이 아니라 말할까.
그리 고민하는 찰나.
[자네 같은 친구들이 몇 명이나 있었을 것 같나?]“……예?”
너도 꼬리를 내릴 거다.
너도 패배하여 좌천당하고 말 거다.
너도 하룻강아지에 불과하다.
……그리 말하기에.
[그릇을 크게 가지게나.]“크게 가져서 거절하는 겁니다.”
[뭐라?]웃으며 답했다.
“겨우 인사국 하나 먹으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회장의 미간이 깊게 파인다. 그 곡선을 닮은 바람이 분다.
지표면이 들썩거리고 나뭇가지가 웅웅거리며 진동한다.
[자넨 부서 선택권을 줬더니 세상에 없던 팀을 만들었지.]“노사협력팀 말씀이십니까.”
그 고요하게 피어나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세상에 없던 팀이 아니라 이 회사에 없던 팀이죠.”
[……뭐라?]“회사가 곧 세상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할 말을, 내 할 도리를 다했다.
파아아아아아앗!
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등 뒤에 순백색의 업화(業火)가 피어나고, 지축이 흔들리며 나를 압박할지언정.
[어리석은 아이야.]“……!”
[자네 하나 정도 ‘삭제’ 시키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모르는가.]사락-
희뿌연 연기가 살갗 위로 내려앉는다.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우고 유품을 챙겨 떠나면 어떨까 싶네만.]“…….”
몸이 굳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팀에는 반역죄를 씌워 영겁의 세월이 지나도 갚을 수 없는 벌금을 매기는 걸세.]회장의 영혼이 발(發)하는 말소리가 족쇄가 되어 붙잡는다.
[그럼 남은 자네 동료들은 영원한 족쇄에 얽매인 채 생각하겠지.]내 발걸음을. 손짓을. 혀를.
[아. 그때 이은호를 따르지 말았어야 했는데.]물먹은 솜처럼 더해가는 무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시간 동안 자네를 원망하고, 또 원망할 게야. 어떤가?]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회장.
그 낯짝을 향해.
“저는…….”
입을 열었다.
“가진 것 없이 혼자 자라 의심이 많은 편입니다.”
온몸을 짓누르는 지독한 무게를 버텨 내고, 그나마 가벼운 혀를 놀린다.
[내 힘이 의심된다는 건가.]“그럴 리가요.”
내가 가진 것, 그리고 지금껏 쌓아 온 것들을 믿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준비를 해 뒀다는 말씀입니다.”
[……이 상황에서 허장성세인가.]허장성세라.
그리 믿고 싶겠지만.
“이미 노사협력팀 이름으로 모든 증거자료를 공개했습니다. 두 번의 전투, 투기장, 불법 실험까지.”
[……!]“이 상황에서 인사국장도 이긴 제가 소리소문없이 숙청당한다면, 직원들은 범인이 누구라 생각할까요?”
손끝을 움직이고.
발끝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인다.
그리하여.
“죽이시죠.”
한 걸음, 다가간다.
“그리고 팀을 벌하세요.”
두 걸음, 순백의 불길에 발을 딛는다.
“회장님 손으로 반란의 불씨를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세 걸음, 코끝에 닿을 듯한 늙은 얼굴에.
“죄 없는 신입사원을 결국 꺾어 낸 임원진들에게, 부디 정의의 철퇴를 가할 명분을 주시지요.”
보이지 않는 창을 던진다.
“투기장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불법 실험이 회사 차원에서 쉬쉬하는 이슈였다 인정하는 겁니다.”
[지금 무슨 소릴…….]“그리하면.”
지금껏 숨죽인 채 벼려온 창끝을, 주름진 미간을 향해.
“운영국이 가장 먼저 멈출 겁니다.”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팍팍한 치들이었으니, 쉽게 들고 일어나겠죠.”
던지고.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도 몰라. 마물들의 사체를 재활용도 못 해. 하다못해 사내 식당도 죄다 중단될 테니 밥도 못 먹을 겁니다.”
던지고.
“그럼, 다른 직원들은 어떨까요?”
[……헛소리! 다른 부서는 잘 돌아가고 있어!]“평가 자료를 봤습니다. 관리국, 영업국 할 것 없이 점점 높아만 가는 목표에 다들 반쯤 돌았더군요.”
또 던진다.
[……그건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 어쩔 수 없는…….]“원래 사람들은 상관없는 일에는 관심 하나 없다가도, 막상 자기 일이 되면 달라지지 않습니까?”
[뭐……?]“이 상황에 국장이, 회장이 일개 사원을 압박해 직접 숙청했다는 걸 알게 되면…… 다들 생각하겠죠.”
[?!]“아. 다음엔 내 차례가 될 수도 있겠구나.”
흠칫!
지배자의 논리를 깨부수고.
단단히 가로막고 있는 유리천장을 산산이 조각내서.
마침내.
“때마침 직원들의 인권을 대변해 줄 노동조합까지 등장한다면.”
[……!]“좋은 구심점이 되겠죠.”
내 앞에 무릎 꿇리도록.
“감당, 가능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