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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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나이트메어(Nightm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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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소율, 가이탄, 실렌, 데모나, 박지현… 다섯 개의 입이 있었지만, 한동안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라이프베슬이 갈라지고, 블러드 퍼핏들이 굳어버렸다. 사방에서 올가미처럼 옥죄어 오던 마력의 압박도 사라졌다. 당연히 모두 끝난 줄 알았는데… 반으로 갈라진 라이프베슬의 속에서 검은 촉수가 튀어나와 임유진을 휘감고, 심연으로 변해버린 절단면 안으로 끌고 가 버렸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그 안으로 뛰어든 노구덕.
두 사람을 꿀꺽 삼켜버린 심연은, 이내 피시식거리는 소리를 내며 라이프베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라 꽉 쥐어짠 걸레처럼 쭈글쭈글해지더니, 검은색의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뭘 어떻게 해 볼 사이도 없이, 불과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기가 막힌 상황을 내내 지켜보던 파티원들이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은 당연했다.
“뭐야…….”
털썩!
누군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스르르 허물어진 신소율은 굽이치는 파도에 처참하게 짓밟힌 모래성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냐고…….”
다시 한 번 음울하게 되풀이되는 물음. 그러나 선뜻 대답을 해 주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다른 이들도 할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어떻게 된 거냐고.
“아아… 유진이가…… 오너가…….”
평소라면 신소율을 위로해 주었을 터인 실렌. 허나, 지금은 그녀도 남을 챙길 계제가 아니었다. 띄엄띄엄, 임유진과 노구덕의 이름을 멍하니 계속해서 부르던 그녀는 곧 단아한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나마 정신적인 타격이 덜한 사람이 있다면, 같이 지낸 시간이 훨씬 짧은 박지현 정도였다.
“스승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대장은, 유진 언니는… 죽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던 박지현은 흠칫하여 말을 멈추었다. 홱 뒤를 돌아본 신소율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죽긴 누가 죽어! 한번만 더 그딴 말을 지껄이면, 너부터 죽여 버리겠어!”
“뭐라고…!”
한동안 조용히 지내긴 했지만, 불 같은 성미를 지닌 박지현이 이런 말을 듣고 참아 넘길 수 있을 리 없다. 도끼눈을 치켜 뜬 박지현은 이를 악물고 창대의 손잡이를 더듬으려다가, 돌연 씁쓸한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잔뜩 물이 괸 신소율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뿌옇게 흐려진 망막 안에서 와들와들 떨리고 있는 동공은 격랑 속에 몸을 내맡긴 조각배를 보는 듯했다.
“박지현 헌터, 방금은 말이 조금 경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가이탄의 충고에 박지현은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말실수를 인정했다. 박지현을 타이른 가이탄은 이내 고개를 돌려 신소율을 쳐다봤다.
“신소율 헌터, 일단 진정합시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합니다. 다행히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눈앞에서 불상사가 일어난 걸 본 것도 아니고, 유적이나 던전에 설치된 함정 중에는 대상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종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오너와 임유진 헌터는 이곳 유적의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정신을 다잡고 이곳을 뒤져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
손등으로 젖은 눈가를 훔친 신소율은 느릿하게 고갯짓을 했다. 어설픈 자기 위안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가이탄의 말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데모나 헌터…….”
이어서 데모나에게 말을 걸던 가이탄은 돌연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슨…?”
“조용히 해.”
가이탄의 질문을 짧게 일축한 데모나는 오직 한곳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곳은 자신의 왼손바닥. 바가지처럼 손바닥을 만 그녀의 왼손바닥에는 선홍색 핏물이 한가득 괴어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왼쪽 손목의 자상에서 스며 나온 핏물이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위로 거슬러 올라가 손바닥 안으로 흘러드는 양상이었다.
정상적이라면 당연히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려야 할 핏물이 물리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그 모습에, 가이탄은 그녀가 모종의 주문을 펼치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렇게 손바닥에 만들어진 작은 피웅덩이를 응시하던 데모나는 십여 분이 지난 뒤, 의미모를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괴어 있던 핏물을 바닥에 털어냈다.
“임유진은 모르겠지만, 일단 구더기는 살아있어.”
“……!”
순간적으로 네 쌍의 시선이 데모나의 얼굴에 화살처럼 꽂혔다. 그 중에서도 몇몇 인원들의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시선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는지, 살며시 이맛살을 찌푸린 데모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블러디미러(Bloody mirror)는 구더기의 시신경과 연결이 되어 있거든. 이 주문이 발동한다는 건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거야. 한마디로 아직 살아있다는 거지.”
노구덕이 들었다면 소름이 끼칠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데모나였다. 왜냐하면 정작 노구덕 본인은 자기 눈에 이런 주문이 걸려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경위를 설명하자면, 그가 울펜의 은신처에서 한동안 잠적한 일이 있었던 이후, 데모나는 눈의 상태를 점검한다는 명목으로 노구덕 모르게 두 가지의 주문을 심어 놓았다. 하나는 대상의 시야를 공유하는 이 블러디미러, 다른 하나는 대상을 추적할 수 있는 주문이었다.
그녀는 노구덕과 임유진이 사라지자마자 추적 주문부터 발동시켰다. 그러나 한계 거리를 벗어났는지 추적 주문은 발동이 되지 않았고, 다음으로 시도한 것이 이 블러디미러였다.
주문을 심어 놓은 경위가 동기가 어떻든 간에, 이 상황에서 희망의 동아줄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장 지금만 봐도 신소율이나 실렌의 시커멓게 죽었던 얼굴색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지 않은가.
“진짜야?”
“저, 정말이에요?”
“그래. 단… 의식을 잃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 말에 다시 어두워지는 두 여인의 얼굴. 데모나는 그녀들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멍청이들. 만약 구더기가 죽었다면 나보다 너희들이 먼저 느꼈어야 정상아냐?”
“그게 무슨 소리야?”
“어깨 위의 그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냔 말이지. 너희들은 그 교단인지 뭔지의 신도들이잖아? 허접한 수준이지만 심령차력술이란 강력한 주술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그 모체(母體)인 구더기가 죽었다면, 당연히 약하든 강하든 반동이 올 수밖에 없지. 그것도 생각 못해?”
“허, 그렇군요.”
“아…….”
“맞아! 그게 있었어!”
실렌과 가이탄은 이제야 깨달았는지 미약한 탄식을 흘렸고, 희망을 되찾은 신소율은 주먹을 불끈 쥐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데모나의 단언도 단언이지만, 본인들이 직접 노구덕의 생존을 확인하니 전보다 훨씬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그때, 기껏 되살아난 분위기에 초를 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기껏 왔는데 주인 얼굴도 보지 않고 그냥 가려고? 그럼 내가 섭섭하지.”
언제 나타난 것일까. 목소리가 들려온 곳, 벽면이 무너진 잔해 위에 하얀 얼굴이 허공에 동동 떠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살점과 근육이 깨끗하게 떨어져 나간 백골이었다. 해골 머리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은 목 아래를 가리고 있는 검은색의 로브 때문. 거대한 낫이라도 쥐어 준다면 영락없는 사신(死神)의 모습이라 할 만했다.
아니, 로브를 휘감은 백골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파티원들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주요 전력이 이탈한 지금, 저 해골의 등장 자체가 이미 사신이나 다름없다고.
삶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겨버린 마법사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 탄생한 마물. 마법사형 언데드의 대명사로 군림하는 최악의 괴물이 기어이 나타나고야 만 것이다.
“…리치…….”
신음성을 내뱉은 데모나는 힐끗 라이프베슬이 있던 자리를 곁눈질했다. 라이프베슬은 볼품없이 쪼그라든 그 상태 그대로였다. 역시 저것은 처음부터 라이프베슬이 아니라, 라이프베슬로 위장한 강력한 주문함정이었던 것 같았다.
“…진짜 라이프베슬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군요.”
가이탄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말인즉슨, 저 리치를 완전히 처리하려면 라이프베슬을 찾아 부수는 것도 병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력량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요. 최소한 중급 이상의 리치예요.”
“칫….”
마력량이 파악되지 않는다는 건 최소한 리치의 마력량이 실렌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얘기. 그 말대로라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였다. 어쩌면… 필사의 각오를 다져야 할지도.
아이리스 탐사대의 면면에 팽팽한 긴장감이 덧씌워진 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등장한 리치는 자기 안방이라서 그런 것인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굉장한 여유가 느껴졌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표정이 없는 해골임에도 불구하고 실실 눈웃음을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 어쩌면 리치가 발하는 요염하고 매혹적인 목소리 탓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입이나 성대는 전혀 없었지만.
“우린 아마도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안 그러니?”
저벅저벅 서너 걸음 앞으로 걸어온 리치는 예의 그 교태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한 게 아니라, 주문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리치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자, 잠깐 의아해하던 일행은 이내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대상, 데모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데모나 본인은 특유의 그 싸늘한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리치의 살가운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저 라이프베슬에 걸린 주문은 뭐지?”
“하아아… 차갑구나, 차가워. 나는 이렇게나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수백 년 만에 만난 후예는 이다지도 무정하다니.”
“…….”
뼈마디를 딸그락거리며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포즈를 취하던 해골은 데모나를 비롯한 일행에게서 아무런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자, 어색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 했다. 해골에 표정이 나타난 건 아니지만, 그 미묘한 움직임에서 분명한 민망함이 느껴졌다.
“흐흠… 라이프베슬에 걸린 주문 말이니? 그건 소울 트랩이라고 한단다. 소모 마력만 따지자면 상당히 비효율적인 주문이지만 제대로 성공하면 무척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지. 왜, 배우고 싶니?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르쳐 줄 수 있단다. 어쨌거나 너는 수백 년 만의… ‘축복’ 받은 혈통이니까.”
“저주받은 혈통이겠지.”
“어머, 말이 심하구나. 혈통에 관한 자긍심조차 잃어버린 거니? 뭐, 그만큼 영광을 잃어버린 시간이 길었으니… 나한테서 배우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그건 나중 문제야. 일단은 내 실험체부터 돌려받아야겠어. 그 녀석들은 어디 있지?”
“실험체라니…? 아, 소울 트랩에 걸린 그 두 명 말이니? 그들이 네 장난감이었나 보구나…. 안타깝지만 그것들은 포기하렴. 심연에 먹혀버린 이상 이쪽에서 다시 불러올 방법은 없단다. 죽은 망령이라면 가능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구나.”
“아저씨가 죽는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흠?”
하얗게 눈을 부릅뜬 신소율 쪽을 쳐다본 리치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장난감은 교육이 좀 필요해 보이는구나. 하지만 걱정 마렴. 너도 알겠지만 이곳은 사령술의 원전(元典),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까탈스러운 고양이라도 금방 순한 양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너도 마음에 들 거야.”
“내 실험체들을 돌려받는 게 먼저야. 그보다 우선은 없어.”
칼 같이 단호한 데모나의 말에, 리치는 드문드문 빠진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실소했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건방지기 짝이 없다니까. 조금만 잘해주려고 해도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기는.”
지금껏 온화함을 유지하던 리치의 태도가 백팔십도 뒤바뀌었다. 사납게 변한 말투에서 강렬한 적의가 느껴지자, 일행은 각자의 무기를 꼬나 쥐며 곧 닥쳐올 전투를 준비했다. 그 중에서도 실렌은 이미 입술을 웅얼웅얼 움직이며 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불쑥, 로브 속에서 튀어나온 하얀 손뼈에 푸르스름한 마력의 결정이 맺혔다. 점점 커지는 마력의 덩어리를 움켜 쥔 리치는 일행을 향해 씨익 웃는 것처럼 보였다.
“자고로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은 때려야 한다고 했지. 그 버르장머리를 친히 고쳐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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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일단 한편 올립니다. 새벽 중에 다음편 올라갈거고요. 분량이 더 남으면 아침~점심 사이에 또 한편이 올라갈 겁니다.
공지를 다시 보니 몰아서 올리는 이유를 적지 않았더군요. 분량을 채울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주된 이유는 뭔가 안 좋은(….!) 장면이 나올 때에는 후딱후딱 올리는 것이 독자님들의 분노지수를 낮출 수 있다는 걸 지난 경험을 통해 깨달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다음화에는 조금 불편한 장면이 나올 수도 있으니 양해부탁드립니다.
리리플은 연참 작업이 끝난 다음에 마지막 화에서 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