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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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벌레교단 vs 마녀회
‘열받아. 열받아 죽겠다고!’
오늘 만큼이나 이토록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동료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고작 기력이 쇠한 실렌이 넘어지지 않게 부축하는 게 다였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마력조차 다루지 못하는 자신이 끼어 들었다간 저 어마어마한 마력의 폭풍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갈려버릴 테니까.
불가항력이었고,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냐. 결국 도움이 되지 못하고 손가락 빨며 구경한 건 사실이지 않은가.
‘다음엔, 다음엔 절대……!’
속으로 결연한 각오를 세운 박지현은 어느새 가이탄이 쓰러져 있는 곳에 도달했다.
“스승님!”
“…….”
온몸이 상처투성이이긴 했어도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가이탄의 말라비틀어진 입술 틈 사이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확인한 박지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신소율에게 달려갔다.
“이봐! 괜찮아?”
“으그그…!”
박지현이 도착했을 즈음, 신소율은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죽 갑옷이 온통 헤지고 먼지가 덕지덕지 묻어 꼴이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가이탄보다는 양호해보였다.
“난… 됐어… 그보다 그 해골은…?”
“리치? 그, 글쎄…….”
폭발이 일어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박지현이 리치가 어찌 되었는지 알 리가 없다. 대충 사정을 짐작한 신소율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아직도 짙은 먼지가 자욱하게 일고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해치운 거야?”
“아니.”
“……!”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극도로 지친 듯 쉬어버린 목소리. 대답을 한 것은 데모나였다. 그렇잖아도 평소 혈색이 좋지 않은 데모나의 얼굴은 꽁꽁 얼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파리하기 짝이 없었다.
신소율은 불안감 반, 걱정이 반 담긴 음성으로 데모나의 이름을 불렀다.
“데모나 언니.”
“처치하기야 했지. 한 번.”
“한 번…?”
“말했잖아. 생명을 담고 있는 라이프베슬이 파괴되지 않는 한 리치는 불사의 존재라고. 저 괴물이 마음껏 공격을 받아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요컨대, 절대 죽을 일이 없었기에 여유를 부렸다는 것이다.
“오호호호호호!”
데모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것처럼, 먼지구름을 뚫고 뛰쳐나온 하이톤의 교소가 폐허가 된 석실을 짤랑짤랑 울리며 메아리쳤다.
“선조에게 괴물이라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거의 가라앉은 잿빛 안개 사이로, 파르스름한 두 개의 안광이 번쩍였다. 머리통만 남은 리치는 두개골을 허공에 둥둥 띄운 채 턱뼈를 딱딱 부딪치며 조소를 보냈다.
“재롱잔치는 잘 보았다. 이제 편히 쉬게 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렴. 호호호호!”
“흥. 머리만 멀쩡한 걸 보니 어지간히 돌대가리인 모양이지? 하긴, 자발적으로 리치가 되었을 정도니 어련하겠어.”
“뭣이!”
데모나의 반격에 낮게 떠 있던 두개골이 한 차례 높이 치솟았다 가라앉았다. 나름의 분노를 표현한 것 같았다. 아마도 혈압의 상승 지수를 나타냈다던가… 어쨌든, 씩씩거리던 리치는 금방 여유를 되찾았다.
“젊은 것들과 입 아프게 떠들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너희들의 말로는 정해져 있으니까.”
스르륵….
차갑게 내뱉는 리치의 목 아래에서 돌연 검은 마력이 뭉클거리며 일어났다. 펑펑 솟아난 마력 덩어리는 이내 살아있는 것처럼 흩어지며 리치의 몸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신소율과 박지현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의 그늘이 깃들었다.
“아아….”
“어떡… 하죠?”
신소율은 간절한 바람을 담은 시선을 데모나에게 보냈지만, 데모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무리하게 주문을 사용하던 실렌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고, 가이탄도 누적된 데미지에 정신을 잃었다. 남은 건 전력을 기대하기 힘든 박지현과 지칠 대로 지친 데모나, 신소율 뿐이었다. 전력이 온전했을 때에도 리치를 없애지 못했는데, 지금 이 인원으로 리치를 상대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설령 또다시 리치를 무찌른다고 해도… 그 다음은? 다시 부활한 리치는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건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거기에 더해, 몸을 거의 복구해 낸 리치는 최후의 결정타를 날렸다.
“일어나라! 나의 군대여! 황천에서 추방당한 죽음의 사도들이여!”
푸득!
무너진 잔해에서 별안간 허연 손뼈가 솟아올랐다. 뼈마디를 덜그럭거리며 땅 속에서 일어난 것은 사이한 안광을 발하는 해골이었다.
쿠드드드!
당연히 해골 하나로 끝날 리 없었다. 최초의 한 놈을 시작으로, 수많은 해골들이 우후죽순 바닥에서 솟아났다. 그 중에는 평범한 해골뿐 아니라, 창, 검, 활 등 가지각색의 병장기를 갖춘 해골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게다가 간혹 보이는, 두터운 장갑으로 중무장한 개체는 해골들을 인솔하는 기사 급의 언데드가 분명했다.
부활한 리치가 불러낸 것은 해골들로 이루어진 군대였던 것이다.
“맙소사…….”
박지현이 할 말을 잃고 멍해진 사이, 뒤쪽에서 픽,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힘없이 고꾸라진 것은 실렌이었다. 막대한 물량을 자랑하는 해골 군단의 출현에, 겨우겨우 버티던 정신력이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이로써 남은 것은 신소율, 박지현, 데모나의 세 명… 그나마 희박하게 남아 있던 승률이 제로에 수렴하는 순간이었다. 언데드에게 막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사제가 나가떨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승리를 쟁취한단 말인가.
“신소율.”
“…네.”
그야말로 천장단애 앞에 선 듯 눈앞이 아득해지는 절망적인 상황. 그 때문인지 데모나의 말에 답하는 신소율의 음성에는 힘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눈만은 여전히 전의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방법이 있어.”
“……?”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다니. 신소율과 박지현의 의아한 시선이 데모나의 옆얼굴에 꽂혔지만, 데모나는 두 사람을 돌아보지도 않고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잘 들어. 내가 주문을 쓸 기미가 보이면, 즉시 내게서 떨어져. 그리고…….”
살짝 뜸을 들인 데모나는 전열을 갖추기 시작하는 해골 군단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리치가 듣지 못하도록, 최대한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리치가 다시 부활하기 전에 저 둘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 너라면 할 수 있겠지.”
“무, 무슨! 자폭이라도 할 셈이에요?!”
“…….”
무심코 던진 말에 대꾸하지 않고 침묵하는 데모나를 보자, 신소율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하니 그 비장의 한 수란 게 정말로 자폭이란 말인가.
“그건 안 돼요. 난 못 한단 말이에요!”
“그럼 여기서 다 죽을 셈이야? 짜증나게 하지 말고 하라면 해. 너랑 입씨름할 시간은 없어. 아니면, 다른 방법을 말해 보든가.”
“그런……!”
신소율은 더 이상 따져 묻지 못했다. 데모나의 의견은 지금 이 절망적인 판국에서 그나마 유일한 타개책이었으니까.
“나는, 난…….”
“할 수 있어, 너는. 그리고….”
비로소 고개를 돌린 데모나는 말을 잇지 못하는 신소율과 눈을 맞췄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작게 소용돌이치는 붉은 색의 구체가 생성되어 있었다.
살짝, 흔들리는 눈으로 가만히 신소율을 바라보던 데모나는 파리한 보랏빛 입술을 달싹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두 사람 일은… 미안…….”
그러나 데모나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리치의 이죽거림이 그녀의 말을 뚝 끊어놓았다.
“뭘 그리 쑥덕거리는 걸까아? 응? 나도 좀 들려주지 그러니?”
콰아앙!
리치가 방출한 적색 마력포가 일행의 발밑에 틀어박히며 커다란 굉음을 일으켰다. 궤도를 보아 살상용이 아닌 위협용인 것 같았다.
“쉽게 죽이면 재미가 없지. 서서히 난도질해서 죽여줄 테다. 그리고 다시 되살아나, 나를 위해 마음껏 재롱을 부리는 거다. 물론 귀여운 우리 후배는 빼고. 호호호! 가라아!”
처벅. 처벅. 처벅.
리치의 명령에 따라 오와 열을 갖춘 죽은 자들의 군대가 진군을 시작했다.
“키아아아아–!”
대열 중앙에 선 해골 기사들이 선두의 병력을 독려하며 포효하고, 후열에 선 해골 궁수들이 활대를 높이 치켜들었다. 못해도 백여 마리에 이르는 망자들의 군대는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석실 바닥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신소율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겨우 세 명을 상대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병력. 리치를 상대하기 전에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높았다. 두 번, 세 번 다시 생각해봐도 데모나의 방법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대로 아이리스에 돌아간다 해도, 자기 혼자 뭘 한단 말인가.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신소율은 독한 마음을 품고 위도우메이커의 손잡이를 꾹 내리눌렀다.
헌데, 그 순간 누구도 생각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자폭이라니… 그리고 아저씨는… 유진이 언니는 어떡하라고!’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가라아! 무덤을 더럽힌 죄인들을 모조리 짓밟아… 케에엑! 켁켁!”
히스테리를 부리는 노처녀처럼 빼애애액 소리를 내지르던 리치는 별안간 사레라도 들린 듯, 성대가 있을 리 없는 목을 부여잡고 켁켁거렸다.
“왜, 왜 저러지?”
“쿠웨엑! 켁! 우우욱! 우웨에에에에엑!”
목을 잡다 못해 손을 이리저리 내저으며 지랄발광을 하던 리치는 난데없이 턱뼈를 으스러질 정도로 벌리며 바닥에 대고 구토를 하는 시늉을 했다. 그래봐야 위장도 존재하지 않는 해골바가지 속에서 토사물이 쏟아질 리 만무…….
“끄으… 꾸에에에엑!”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리치의 입 속에서 타르 덩어리처럼 시커멓게 꿈틀거리는 덩어리들이 마구마구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게 뭐야?”
“……!”
일행 중 가장 놀란 사람은 데모나였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중얼중얼 외우던 주문을 외우는 것도 잊어버린 채, 경악으로 가득 찬 눈으로 리치가 토해내고 있는 토사물들을 쳐다보았다.
“저건……. 설마.”
살아있는 것처럼 꾸물거리던 새까만 덩어리들은 이내 자기들끼리 꾸역꾸역 뭉치더니 사람 키보다 조금 큰 커다란 덩어리가 되었다. 둥그런 거울처럼 넓게 펴진 덩어리의 내부는, 지독하게 썩어버린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끊임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어느새 해골 군단의 진군도 우뚝 멈춰 있었다. 명령자이자 창조주인 리치가 저런 꼴이니, 마력의 공급이 끊긴 언데드들이 실 끊어진 인형 신세가 된 것도 당연지사.
“끄으으으…! 이런… 말도 안 되는… 안 돼애애애—!”
무엇이 그리 안 된다는 것인지, 리치의 사무치는 절규에 일행들이 일제히 의문을 떠올린 찰나, 리치가 토해낸 의문의 덩어리가 파도치듯 물결치며 난데없는 잡동사니들을 쏟아내었다.
우수수 쏟아진 잡동사니들은 대부분 두꺼운 책더미들이었고, 의자, 책상, 진열장, 심지어 거대한 침대 같은 가재도구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우아악!”
임유진을 꽉 둘러맨 거대한 체구의 오크, 노구덕이었다.
임유진의 쿠션이 되어 볼썽사납게 처박힌 노구덕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며 주위를 살폈다.
“망할, 여긴 또 어디야? 어엉?”
이마를 문지르며 사위를 살피던 노구덕은 가까운 곳에서 경련을 일으키는 리치와, 저 멀리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탐사대원들을 발견하고는 크게 반색했다.
“소율아! 데모나!”
“아, 아, 아, 아…….”
그토록 염려했던 이들의 생환. 바라마지 않던 일이 현실이 되었건만, 신소율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술만 벙긋벙긋거렸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문이 꽉 틀어 막혀버린 것이다.
하지만 찢어질 듯 치뜬 눈에서는 기쁨을 그득 담은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오늘 비오고 나서 날씨가 엄청 추워졌습니다. 바람에 테이블이 날아가네요… 독자 여러분도 건강 챙기시길! 내일은 더 춥답니다..
매후 / 하하.. 저도 독자분들이 빠졌는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그냥 전 리플에 그런 댓글이 달려 있어서요!
가식적썩소 / 수정했습니다! 항상 송구한 마음이군요.. ㅠㅠ
장마와방 / 그렇겠지요? 후후후!
MrX / 데모나가 저래봬도 책임감이 참 강한 처자입니다! 좀(?) 꼬였을 뿐이지…
호야[虎夜] / 더 로그..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어, 그러고 보니 더로그에도 데모나가 나오지 않나요? 디모나였나?
그눈건 /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이 정도로 이렇게 많은 돌을 던지시면 다음엔 어찌 감당하시려고! 혹시 총알이라도 날아오는 건가요?
북치네 / 넵! 건필하겠습니다!
월병인 / 일단 급한 불부터 끈 다음 긴한 대화(?)를 해봐야 겠죠?
은신설야 / 항상 감사합니다! 건강 챙기세요~
만능의자 / 그렇지요 물 흐르듯 너무 잘나가면 쓰는 작가도 재미가 없으니까요~
드래곤음양사 / ntr인듯 아닌듯 미묘한 것 같아요 이런 장면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