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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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벌레교단 vs 마녀회
그러나 재회의 기쁨을 만끽할 틈은 없었다. 어느새 제정신을 차린 리치에게서 분노가 뚝뚝 묻어나는 노호성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노오오옴–! 이 죽일 노오오옴–!”
“저건… 리치?”
이제껏 유지했던 간드러지는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무시무시한 마력줄기를 내뿜으며 포효하는 리치를 본 노구덕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그저 그런 해골바가지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저건 말로만 듣던 리치가 분명했다. 소울 트랩으로 잠시 떠나있던 사이, 나올 듯 말 듯 간만 보고 있던 리치가 현신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건…….”
리치에 이어 가까운 곳에서 도열해 있는 해골 군단의 존재까지 파악한 노구덕은 대강 어찌 된 사정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저기 쓰러져 있는 실렌과 가이탄만 보더라도 상황은 일목요연했다.
‘그렇다면 이게… 진짜 그거였군. 허, 저런 야비한 리치새끼를 봤나.’
무심코 품속을 만지작거리던 노구덕의 귓가에, 천둥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이 크게 울려 퍼졌다.
“내 성역에 감히 발을 들여놓다니! 어찌 살아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참, 시끄럽게 빽빽대기는.”
“뭣이?”
“이걸 보고도 그렇게 당당하게 나올 수 있을까?”
“……!”
비열함이 그득한 미소를 지으며 노구덕이 품속에서 꺼낸 물건은 바로 주먹만한 크기의 검은색 수정이었다. 반투명하게 비치는 내부에서 불그스름한 기운이 연기처럼 휘돌고 있는 흑색 수정을 본 리치는 입을 쩍 벌린 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 그, 그, 그건…!”
“라이프베슬!”
놀라움이 가득 담긴 음성의 주인공은 데모나였다. 경악으로 한껏 눈을 치켜 뜬 그녀는 리치와 마찬가지로 검은색 수정에서 좀처럼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가져와 봤더니, 역시나였군. 자기가 만든 아공간에 라이프베슬을 숨겨 놓다니… 이건 반칙 아냐? 이런 걸 어떻게 찾으라고… 이 치사한 리치새끼. 이걸 부수면 어떻게 될까? 응?”
노구덕은 의기양양하게 라이프베슬을 든 주먹을 뒤흔들었다. 하는 짓은 길가의 양아치나 다름이 없었지만, 생명이 걸린 당사자인 리치에게는 저승사자의 손짓으로만 보였다.
“안 돼! 제발 그러지 말아다오!”
“그럼 저것들 뒤로 물려. 어서!”
“그, 그래!”
해골 군대를 뒤로 빼라는 노구덕의 말에, 리치는 쩔쩔매며 그 요구에 따랐다.
척! 척! 척!
그 와중에도 통일된 발걸음을 유지하며 질서정연하게 빠지는 해골 군단. 뭔가 휭휭 급속도로 일변하는 상황에, 신소율과 박지현은 붕어처럼 눈만 데굴데굴 굴릴 따름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데모나 언니… 저, 저게 리치의 라이프베슬이라고요? 가짜가 아니고요?”
“그래… 소울 트랩과 연결된 아공간 안에 라이프베슬을 숨겨 놨던 거겠지. 그걸…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구더기가 찾은 거고.”
리치에게 있어서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불행이었다.
아이리스 탐사대 앞에 나타난 리치… 그녀의 본명은 베로니카로, 사령술과 영혼술법을 관장하는 마녀회의 장로 중 한 명이었다. 베로니카는 생전에도 ‘황천(黃泉)의 마녀’라 불리며 대륙 중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강자였으나, 죽어서 리치가 된 이후에는 영구불사에 가까운 생명력과 생전을 뛰어넘는 마력을 손에 넣어 더욱 강력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생명과 마력의 원천은 이곳 무덤에 잠든, 일천이 넘는 망령들의 에너지였으니까.
베로니카는 그 강대한 마력으로 라이프베슬이 숨겨진 자신의 연구실을 심연의 경계 속 아공간으로 재구축해 놓았다. 그리하여 무덤의 망령들과 소울 트랩 등에 걸린 침입자들의 영혼이 자연스럽게 라이프베슬 속으로 흘러들어, 스스로의 힘을 끝없이 충전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그 계산속에 상대가 소울 트랩을 극복해 낸다는 가정 따위는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수많은 강자들과 맞부딪쳤던 그녀의 생전에도, 소울 트랩을 정면으로 이겨낸 괴물은 없었다. 물론 정말 강한 자들은 소울 트랩에 걸리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라면, 그녀의 술법과 상극이라 할 수 있는 벌레교단의 수뇌들 뿐…….
‘벌레교단이라고?’
베로니카는 기억해 냈다. 저기 철퍼덕 쓰러져 있는 사제가 정신을 잃기 전까지 피의 주문을 난사했던 것을. 신을 받드는 사제이면서도 금기로 여겨지는 피의 주문을 쓴다? 그건 광신과 어리석음으로 똘똘 뭉친 벌레놈들의 주특기 아니던가. 어쩐지 놈들의 향취가 난다 여겼더니만… 정말로 그 벌레무리의 후예라면… 아니, 틀림없을 것이다. 리치, 베로니카는 확신했다.
“벌레교단의 잡놈들이었구나! 카아아악!”
한 차례 찢어지는 듯한 울음을 토해낸 리치는 번개처럼 손을 떨쳐 시커먼 빛줄기를 쏘아냈다.
쐐액!
“으헉!”
리치가 잠잠해진 틈을 타 임유진을 데리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던 노구덕은 갑자기 리치가 실성한 것처럼 기습을 해오자 대경실색했다.
“헙!”
메뚜기처럼 폴짝 몸을 날려 검은 광선을 피해낸 노구덕은 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이 리치가 미쳤나! 이 라이프베슬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단 거냐!”
“이 더러운 벌레놈! 그럼 그걸 고이 되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어차피 뻔히 부서뜨릴 거면서 잘도 나불대는구나! 교활한 자식!”
“…크흠. 뭐, 그렇긴 하지.”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할 말이 없어진 노구덕은 머쓱해진 얼굴로 얌전히 물러났다.
“아저씨!”
“유진이 언니!”
기다렸다는 듯 엉겨 붙는 신소율과 박지현에게 임유진을 맡긴 노구덕은 데모나에게 손에 쥔 라이프베슬을 흔들어보였다.
“데모나, 이걸 깨트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저 리치는 바로 죽어버리는 건가?”
“아니. 즉사는 하지 않아. 다만 현재 몸에 있는 잔존 마력만이 남아 급격히 약해지긴 할 거야. 그러니…….”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노구덕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라이프베슬을 꾸욱 움켜쥐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하긴 했는데… 괜찮겠어? 잘하면 저 리치한테 뭔가 알아낼 수도 있을 텐데.”
“쓸데없는 짓이야. 본연의 의무를 망각하고 유산이 제 것인 양 행세하는 노망난 늙은이에게 뭘 기대하는 거야?”
“음, 그것도 그런가. 그럼…….”
빠각!
결정을 내린 노구덕이 라이프베슬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우악스런 손에 잡힌 라이프베슬의 매끄러운 표면에 몇 가닥의 실금이 생겼다. 그 균열을 통해서 검푸른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자, 리치는 다급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 잠깐 멈추어라! 교섭, 교섭을 하자!”
“교섭?”
“헛소리로 시간을 끄려는 수작이겠지. 그냥 없애버려.”
리치는 옆에서 부추기는 데모나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네 이년! 마녀회의 적통으로 원수 같은 벌레교단의 하수인이 되다니! 선조들의 넋을 대하기 부끄럽지도 않더냐!”
“하수인? 망상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네. 적어도 유적에 잠든 영혼들을 망령화시킨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라고 보는데.”
“크으으으!”
괜히 말을 꺼냈다가 통렬한 반격을 얻어맞은 리치는 크게 신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예 데모나를 무시하고 파티의 전권자로 보이는 노구덕을 상대하기로 작심한 듯했다.
“너희들은 우리 마녀회의 유산을 노리고 온 것이겠지? 그래, 저 건방진 계집애가 있는 이상 내가 없어도 유산의 대부분을 무리 없이 가질 수 있을 테지. 하지만 먼저 선수를 친 사람이 있다는 건 알까나 몰라?”
이건 또 뜻밖의 소리였다. 노구덕은 예상치 못한 리치의 발언에 얼굴을 크게 찌푸렸다.
“뭐라고?”
“흥. 어차피 급한 대로 지어내는 말일 거예요.”
“호호호! 이 마당에 내가 거짓말을 할 것처럼 보이더냐?”
가만히 듣고 있던 데모나는 두 눈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선수를 친 사람이 있든 없든 이제 와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구더기, 더 들을 것도 없으니 어서 부숴버려.”
“음.”
빠드드득! 빠가각!
고개를 끄덕인 노구덕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솟아오르자, 커다란 손아귀에 잡혀 있던 라이프베슬은 처절한 단말마를 내지르며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러자 산산이 바스러진 조각 속에서 검푸른 마력의 파동이 크게 요동치며 줄기줄기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라이프베슬 속에 깃들어 있던 막대한 에너지가 한순간에 해방된 것이다.
“끼야아아아아악—!”
전신을 대(大) 자로 펼친 리치의 옷자락이 폭풍 속에 휩싸인 것처럼 요란하게 펄럭였다. 고개를 높이 쳐든 리치의 쩍 벌린 입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귀신들린 호곡성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그 처절한 울림은 기력이 쇠한 곡소리처럼 잦아들었다.
파스스스…….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고 있던 해골 군단의 일부 병력도 뼛가루가 되어 부스러졌다. 대부분 해골 기사 급의, 막강한 어둠의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던 강력한 언데드들이었다.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지휘자들이 거의 역소환되어버린 해골 군대는, 아직도 상당한 수효가 남아 있었지만 실상 알맹이가 빠져버린 빈껍데기나 다름이 없었다.
리치 쪽으로 확 기울어져 있던 승부의 추가 반대로 크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트합!”
라이프베슬의 잔여 조각들을 깔끔하게 털어버린 노구덕은 주저하지 않고 리치에게 쇄도했다. 수백 년 간 공을 들여 쌓아온 생명력과 마력이 모조리 날아간 상대다. 조금쯤은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줄 법 하건만, 이 무자비한 오크에게 그런 온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숨에 리치와의 거리를 좁힌 노구덕은 망연히 서 있는 리치의 두개골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빠각!
“끼아아악!”
머리통이 빠개질 것 같은 강렬한 충격에, 비로소 깊은 상실감에서 헤어난 리치는 쇠를 긁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척비척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두개골에는 상처 하나 없는 걸 보니, 데모나의 말대로 엄청난 돌대가리인 모양이었다.
노구덕은 손등이 얼얼한 가운데서도, 흠집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리치의 두개골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대단한 내구력이군. 갈아서 장비를 만들면 딱이겠는걸… 아니지, 저 뼈를 푹 고아서 사골을 해 먹으면…….”
누가 무식한 오크 아니랄까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댄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리치는 기겁해서는 마력포를 펑펑 쏘아보냈다.
“뭐라고! 이 무엄한 것! 죽어라!”
쾅! 쾅!
워낙 가까운 거리였던 터라, 리치가 쏘아 보낸 마력포는 노구덕이 피할 겨를도 없이 그의 몸에 적중했다. 그러나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리치의 마력포는 이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별 거 아니군.”
겉보기에는 평범한 오크의 살가죽처럼 보이지만, 노구덕의 신체는 비틀쉘이란 교단의 비전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비틀쉘의 효용이 가미된 그의 가죽은 쇳덩어리도 능가할 만큼 단단했고, 오우거의 가죽보다도 끈질겼다.
철벽의 성채처럼 마력포를 튕겨낸 노구덕은 성큼성큼 나는 듯이 걸어가 리치의 멱살을 덥석 부여잡았다.
“키흑!”
무지막지한 완력에 잡혀버린 리치는 속절없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예의 그 딱딱거리는 입에서 가련한 여성의 신음성이 흘러나왔지만, 그래봐야 그 본판은 허여멀건한 해골바가지. 동정심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는 상판대기였다.
“이, 이런 경우 없는 오크 놈! 너희 벌레놈들은 연장자에 대한 예우도 모르느냐!”
“이걸 때려봤자 내 손만 아픈데… 어쩐다?”
바락바락 악을 써 대는 두개골을 앞에 두고 잠시 고민하던 노구덕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리치의 동체를 바닥에 메다꽂았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라이프베슬이 파괴된 리치는 그저 경험치덩어리일뿐…
지난간 편 중에 선수친 놈이 있다는 걸 은근히 흘린 복선이 있었는데 알아차리신 분이 계셨는지 모르겠네요.. 후후
장마와방 / 저도 영광! 감사합니다!
호야[虎夜] / 아하…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네요 하도 오래전에 읽은 작품이라… 비상하는매(?) 맞나.. 도 재밌게 읽었었죠!
은신설야 / 의도치 않은 얼빵함 ㅠㅠ
월병인 / 아공간이 붕괴되면서 거식증에 걸려버린 리치..
으뜸볍신처리하기2 / 꾸에에엑! 하하… 품위를 지키지 못한 리치가 잘못했네요
가식적썩소 / 항상 감사합니다!
우낄푸핫 / 건필하겠습니다!
드래곤음양사 / 뜻하지 않은 전리품을 들고 영웅으로 귀환!
북치네 / 아마 여러모로 긴한 대화를 나눠야겠죠?
코드표 / 오크 종특상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김도리131 /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영웅들도 똥밭에서 구르던 시절이 있었기에..
소렐라 / 후후.. 이 정도로는 어림없습니다!
히앨로 / 아직 올챙이이니 좀더 분발해야죠! 강해지면 품위는 절로 따라오게 될테니!
hohokoya1 / 데모나는 아직 철벽입니다!
콜마 / 뜻하지 않게 그런 연출이 되었네요 ㅎㅎ
밤에만심심 / 또 이런 묘사를 하지 않으면 구더기나 유진이의 상처에 공감이 안갈 수도 있으니.. 이러나 저러나 정도를 유지하는게 참 어렵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