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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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프로즌하트(Frozen heart)
75# 프로즌하트(Frozen heart)
저녁때가 조금 지난 시간. 훈련을 하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아이리스의 연무장에는 낭랑한 기합성이 한창이었다.
드넓은 훈련장에는 자기만의 명상에 빠져 있거나 조용히 검술을 수련하고 있는 헌터들도 보였으나, 특히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작달막한 체구의 소녀가 자기 몸뚱이보다 큰 대궁(大弓)을 다루고 있는 광경이었다.
마침 수련이 끝난 참이었는지, 소녀는 촉이 뭉툭하게 되어 있는 연습용 화살을 한 군데에 모아 정리하고 있었다. 몇 분 뒤, 바지런히 움직여 훈련도구의 정리를 끝마친 소녀는 그대로 나이 지긋한 스승에게 달려가 꾸벅 허리를 숙여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너도 수고했다. 실력이 많이 늘었더구나. 조만간 같이 사냥을 나가도 되겠어. 훌륭하다.”
임가희를 칭찬하는 가이탄의 말에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평소 칭찬에 인색한 만큼, 그의 말은 단순한 빈말이 아니었다. 천재적 헌터인 제 어머니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았는지, 임가희의 재능은 그가 가르쳤던 헌터들 중에서도 충분히 수위를 다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헌터를 부모로 둔 어린 하프(Half)치고는 입문 시기가 약간 늦었다는 걸 감안하면, 그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 하지만, 그런 스승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정작 임가희 본인은 썩 만족스런 기색이 아니었다.
“아뇨! 이 정도로는 부족해요! 더, 더 노력해야…!”
표독스럽게 전의를 불태우는 임가희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가이탄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칭찬 한마디에 사심 없이 기뻐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제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순수한 향상심이 아니라 지독한 오기였다.
가이탄은 행여나 임가희의 투쟁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까 저어하여, 엄중히 제자를 타일렀다.
“넌 이제 열두 살이다. 성장기에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키면 후에 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어. 노력하는 것은 좋다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니… 너무 무리하지는 말거라.”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걔를 이길 수 없단 말이에요!”
결국, 속에 품고 있던 본심이 나와 버렸다. 임가희가 지니고 있는 맹렬한 투쟁심의 근원… 그것은 얼마 전 아이리스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동년배 천재 마법사, 소냐였다.
‘겨우 아홉 살에 완성 형태의 프로즌 스피어를 썼다고 했던가….’
소냐와 관련된 일화라면 가이탄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 일화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천재라는 수식어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솔직한 내심을 말하자면, 그 아이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는 임가희를 뜯어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측은한 눈길로 제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천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범재라…….’
임가희의 재능도 굉장히 준수한 편이었지만, 소냐에 비하자면 다소 색이 바래고 만다. 게다가 말이 동년배지, 소냐는 그녀보다 세 살이나 아래. 또한 그 아이에게는 소피아라는 걸출한 스승마저 있었다. 만약 이대로 3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상당한 수준의 헌터가 될 것임은 이미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차마 포기하란 말은 못하겠구나.’
앞서가는 천재를 뒤쫓는 범재의 말로는 대개 두 가지다. 무리하게 천재를 뒤쫓다 자신마저 망쳐버리거나, 끝내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그런 이들을 질리도록 봐 온 가이탄이었지만… 작은 욕심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막 싹을 틔운 제자에게까지 현실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는… 그 둘과는 다른, 세 번째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
“스승님?”
“아, 아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거라.”
“넷!”
의미를 알 수 없는 스승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임가희는, 이내 힘차게 대답하며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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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탄과의 훈련을 마치고,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에 대충 수건을 둘러맨 임가희는 종종걸음으로 자기 방에 올라왔다. 훈련 후의 지친 몸을 이끌고 방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자기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작은 소녀를 보더니 빳빳이 허리를 굳혔다.
“지금쯤 오실 거라 생각했어요. 언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소녀는 다름 아닌 임가희의 이복동생, 소냐였다. 잠깐 멈칫거리던 임가희는 불퉁거리는 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여긴 왜 왔어?”
“큰어머니께서 이걸 전하라 하셨어요.”
무표정한 얼굴의 소냐는 손에 든 쟁반을 내밀어 보였다. 쟁반 위에는 꿀을 살짝 첨가한 밀크셰이크가 담겨 있었는데, 이는 임가희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거리였다.
임가희는 쟁반 위의 밀크셰이크를 잽싸게 잡아챘다. 그리고 냉랭히 소냐의 옆을 지나치며 투덜거렸다.
“흥. 용건 끝났으면 어서 가버려. 어차피 잘난 체하러 온 거잖아?”
“오늘은 좀 달라요. 언니랑 얘기를 하고 싶어서 왔거든요.”
“얘기? 난 할 얘기 없어.”
“너무 그러지 마세요. 우린 같은 아버지를 둔 자매잖아요?”
“너…!”
임가희의 고개가 난폭하게 돌아갔다. 그러자 냉막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띤 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매번 볼 때마다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얼굴… 임가희는 소냐의 저 얼굴이 싫었다.
소냐가 언급한 ‘아버지’. 그건 노구덕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노구덕을 항상 ‘대부님’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말한 ‘아버지’는, 벌써 오래전에 고인이 된 오키도의 푸른 늑대, 박준혁이었다.
임가희도 자신이 박준혁의 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유일무이한 아버지는, 시골구석에 모녀를 내팽개쳐둔 채 일말의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았던 친부가 아니라,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따스하게 보듬어 살펴준 노구덕이었다.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 아빠는… 그 사람이 아니야.”
“언니야말로 너무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에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들으면 서운해하시겠어요.”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하잖아!”
임가희가 주먹까지 쥐어 보이며 위협적으로 소리치자, 소냐는 쿡쿡 웃으며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오늘의 소냐는 마치 임가희를 괴롭히기 위해 작정하고 찾아온 사람 같았다.
“글쎄요… 언니가 대부님을 따르는 그 마음은 존경할 만하지만, 과연 대부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이건 동생으로서의 조언인데, 조금쯤은 현실을 직시하는 게 어때요? 언니.”
“뭐? 그건 무슨 소리야!”
소냐는 두 눈을 실처럼 가늘게 뜨더니, 하얀 손가락으로 옆에 놓여 있는 쟁반을 톡톡 건드리며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대부님의 그 온정이 얼마나 가겠느냐는 거예요. 지금이야 큰어머니께서 젊고 아름다우시니, 더부살이하는 언니도 당분간 안심할 수 있겠죠.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흘러서… 음, 그래요. 대부님의 친자가 태어난다면 어떨까요? 그때도 대부님이 친자식도 아닌 언니에게 정을 주실까요?”
“뭐, 뭣…?”
“언니나 저나, 절반은 다른 남자의 피가 섞여 있어요. 듣자 하니 아버지는 대부님과 좋은 관계도 아니었다고 하던데…. 뭐, 그나마 완전히 남이나 다름없는 저보다는 형편이 좋을지 몰라도… 어쨌든 친자는 아니잖아요. 언니 생각은 어때요? 빈말로라도 언니가 대부님의 친자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아홉 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신랄한 발언이었다.
말을 잃어버린 임가희는 새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소냐가 말한 것들은 여태까지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껏 노구덕이 주는 애정을 당연하다 생각하고 받아만 왔지, 그 든든한 터전이 흔들릴 거라고는 조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아빠의 친자…?’
만약 임유진이 노구덕의 자식을, 그녀의 동생을 낳는다면… 몇 번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노구덕의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면… 소냐의 말대로 자신이 소외되어 버린다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친자가 아니기 때문에?
“왜 말이 없어요? 아, 표정만 봐도 알겠어요. 언니도 그런 건 싫죠? 버려지는 거… 말이에요.”
“아냐. 아빠가 그럴 리 없어….”
“어른들은 다들 그렇게 말하죠. 하지만 언니, 그거 알아요? 제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랬어요.”
소냐는 잠시, 옛 비트레이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록 오빠가 실종된 이후, 친모에게서 냉대를 받긴 했지만…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재환이나 유혜정 같은 헌터들은 소냐로 하여금 가족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때나마 그들이, 배다른 언니나 오빠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애정이었다. 친모인 그리드가 클럽에서 축출된 그날, 소냐의 인생은 백팔십도 뒤바뀌었다. 언제나 인자한 가면을 쓰고 있던 조재환과 이혜정 등… 그녀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던 헌터들이 그날을 기점으로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지극한 행동, 따스한 말 한마디… 모든 게 다 거짓이었다. 그들의 언행은 그녀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꼭두각시로 만들어 권력의 중추에 서기 위한 음모의 일환이었다.
굶주린 아귀와도 같았던 옛 지인들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무심히 흘려보낸 소냐. 그 개운치 않은 여운 탓일까. 다시금 말을 잇는 그녀의 어조는 절로 싸늘해져 있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 같은 건 없어요.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까 친절한 거죠. 대부님의 시점으로 보도록 할까요? 언니의 경우엔 큰어머니일 테고, 제 경우엔 이모겠죠. 친자도 아닌 우린 두 분 덕에 이곳에 얹혀 살 수 있는 거예요.”
“너… 이상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제가 이상하다고요? 언니가 지나치게 순진한 게 아니라? 전 그저… 또다시 버림받기 전에 제 가치를 증명하고 싶을 뿐이에요. 이모 덕으로 살아가는 쓸모없는 장식품으로서가 아니라,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저만의 가치를요.”
무섭게 부릅뜬 소냐의 눈빛에, 이미 아이의 천진난만함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총명하여 너무 일찍 세상사에 눈을 뜬 탓일까? 아니면, 어미로부터 학대 받고 지인들로부터 배신당한 유년의 기억 때문일까?
무엇이 원인이든 간에… 아홉 살 배기 아이가 잃어버린 순수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건 아이의 탈을 뒤집어 쓴 여우.
영악한 눈을 번뜩이는 소냐의 얼굴은 과거 소피아의 어린 시절과 섬뜩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소냐는, 소피아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과거 자신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나가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임가희는 자기도 모르게 꿀꺽 목울대를 넘겼다. 속으로는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저 확고부동한 눈동자를 보니 어쩐지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의 이마를 감싸고 있던 수건이 힘없이 풀리며 어깨를 타고 떨어졌다. 땀에 절은 수건을 느릿하게 주워든 임가희는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미우나 고우나 같은 아버지를 둔 자매인걸요. 언니에게는 한번쯤, 제 속마음을 솔직히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왕이면, 언니가 자극을 받아서 더 노력하기를 바라요. 그래야… 제가 더 돋보일 수 있을 테니까요.”
빠득!
임가희에게서 거칠게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생글생글 웃는 소냐의 표정에는 약간의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임가희가 성을 내면 성을 낼수록 더욱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냐의 여유도 거기까지였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구나.”
“……!”
임가희를 조롱하며 킥킥거리던 소냐의 낯빛이 급속도로 말라붙었다. 이내,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관절인형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임가희의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넉넉하게 열린 문 사이로, 나란히 서 있는 두 남녀가 보였다. 새파랗게 질려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비틀거리는 소피아. 그리고 침침한 낯빛 가운데 우묵하게 시선이 내려앉은 노구덕이었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물론.. 소냐의 내심은 저게 끝이 아닙니다. 다음화에 계속!
근데.. 전편의 추천수를 보니 평균이하더군요…이를 보고 작가는 독자님들이 생각보다 더욱 점잖으신 분들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ㅠㅠ
댓글란에 항상 빠지지 않던 그 음담패설들은 전부 다 거짓이었단 말입니까??
엣지미만잡 / 코멘트 감사합니다!
NineBreaker /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아마테라스† / 다음화를 보시면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가연을이 / 아니.. 그런 씬이 그려진다면 조아라가 아니라 소라넷에서 연재가 되지 않을까요…?
코드표 / 본격적인 건 다음화를 기대해주세요!
엠파이어3 / 음.. 기본적으로 관심이 고픈 아이인 것은 맞습니다
소장로네 / 아주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계시군요..
은신설야 / 넵 감사합니다~!
그눈건 / 사랑의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려줘야겠어요
가식적썩소 / 오타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교육이 왜 변태죠..?
북치네 / 감사합니다~ 저녁 때도 와 주세요~
월병인 / 여기저기 문제가 많은 아이입니다. 본격적인건 다음화에 나올듯하네요
김도리131 / 그러게 말입니다… 점잖치 못하신 분들이 많군요..커험..!
냐하항 / 그러면 추천수가 나락으로… ㅠㅠ 그래도 간간이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는 곁들여 드려야지요! 노블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