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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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연말연시(年末年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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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부터 시작되었던 송년회는 심야가 다 되어서 끝을 맺었다. 따로 폐회식을 진행한 건 아니었지만, 참석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지거나 연인, 혹은 지인들과 함께 2차를 나가는 식으로 흩어져서 회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연회를 준비했던 아내들이 뒷정리의 지휘를 도맡아 하는 사이, 먼저 자리를 뜬 노구덕은 집무실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휴우……. 죽겠군.”
그만을 위해 제작된 특제 의자에 몸을 누인 노구덕은 옅은 한숨을 지으며 뻐근한 손목을 마사지했다. 잠깐 시간을 내서 실렌의 묘소에 다녀온 이후로, 회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초대된 손님들을 바쁘게 접객한 탓이다. 사실 그의 지위 정도 되면 가만히 앉아서 인사만 받아도 될 터이지만, 그래서야 단합회를 겸한 송년회의 의미가 살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사리지 않고 손님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응대한 것인데… 조금 열정이 과했나보다. 아마 오늘 악수를 한 횟수만 헤아려도 족히 천 번은 가볍게 넘어갈 터. 그의 튼튼한 통뼈가 욱신거릴 정도다.
게다가 새로이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요청은 얼마나 많은지. 오늘 그가 지어준 이름만 해도 성환이, 진우, 혜진이… 너무 많아서 전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 참, 애들 이름 정도는 알아서들 지을 것이지. 내가 우리 애들 태명 지을 때도 이틀을 궁리한 사람인데…….”
참고로 임유진과 데모나가 품고 있는 아이들의 태명은 각각 ‘똘이’와 ‘솔이’다. 한 녀석은 제 엄마처럼 똘똘하게 자라라는 의미에서 똘이고, 다른 녀석은 소나무처럼 늘 푸르라는 의미에서 솔이다. 둘 모두 노구덕이 지은 태명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두 녀석을 태명으로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스퀘어에는 아이의 태명을 자주 부르면 귀신이 알아채고 잡아간다는 불길한 속설이 있던 터라, 아예 태명을 짓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였으니까.
하긴 지구에서도 이 비슷한 미신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다. 노구덕이야 그런 미신에 구애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디 엄마들의 마음이 그런가. 처음 며칠 동안 아이들의 태명을 입에 담던 노구덕은 임유진과 데모나의 사나운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요 녀석’, ‘저 녀석’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럴 거면 태명은 대체 왜 지어달라고 했는지.
‘내 자식들 멀쩡한 이름을 두고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다니… 쩝, 내가 홍길동도 아니고 말이야. 그나저나 슬슬 애들 이름도 생각해둬야 하는데 큰일이군. 문수 형님께 부탁드려 볼까. 이왕이면 아는 거 많고 똑똑한 사람이 지어줬으면 좋겠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노구덕은 갑자기 깍지를 낀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한바탕 크게 몸을 젖히고 나니 찌뿌둥하게 쌓여 있던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기지개를 켜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피로를 날려버린 노구덕은 두꺼운 뒷목을 주물럭처럼 매만지며 방 안의 어느 한 구석을 힐끔 쳐다봤다.
“뭐해? 할 말 있어서 들어온 것 아니었나?”
“…피곤해 보여서요. 방해했나요?”
“별로.”
땅거미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여느 때처럼 깊게 후드를 눌러쓴 아가레스트였다. 임유진, 데모나와 마찬가지로 뱃속에 노구덕의 아이를 품고 있는 그녀. 다만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그녀의 허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잘록했다.
“용건 있으면 빨리 말해. 뒷정리가 거의 끝나가니까, 조금 있으면 사람이 올…….”
늘 그렇듯,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아가레스트를 다그치던 노구덕은, 그녀에게서 풍기는 달갑지 냄새에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술? 또 마신 건가? 내가 분명히…….”
“너무 화내지 말아주세요. 가벼운 한 잔 정도는 괜찮으니까.”
“…경고했을 텐데. 마시지 말라고. 임산부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건가?”
“당신이 내 사생활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지 않나요? 그리고 어차피, 태명도 받지 못한 아이인 걸요. 이를 테면 저기 문을 나서는 외부인보다 못한 아이죠. 신경 쓸 것 없잖아요?”
“……”
대놓고 비꼬는 걸 보니, 그가 혼자 중얼중얼 떠드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아가레스트의 삐딱한 태도에 지끈지끈 골이 아파진 노구덕은 슬며시 이마 한 가운데를 짓눌렀다.
“…좋다. 태명, 지어줄까?”
“괜찮아요. 그런 이름을 받았다가 애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당신이나 나나 손해가 막심하니까요. 아이는 우리 계약의 증표잖아요? 소중히 다뤄야지요.”
노구덕은 기가 찬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여자가 심야에 진득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나타난단 말인가. 아이가 저 여인의 뱃속에서 산달까지 무사히 버틸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이었다.
데모나도 첫 대면부터 틱틱대기 일쑤였지만, 아가레스트는 그 정도가 심했다. 데모나는 주 공격 대상이 거의 노구덕에게 한정되어 있는 반면, 아가레스트는 주변의 모든 것을 비틀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 범위엔 자신의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가레스트는 인성의 어딘가가 지독하게 뒤틀린 사람 같았다. 정(情)을 주는 법을 상실한, 그런 사람. 그녀에겐 노구덕도, 퀸젤도, 가문도, 아이도… 모두가 복수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아직도 야행(夜行)을 하나?”
“설마요. 임산부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고요? 후후.”
무표정을 유지한 채, 입꼬리만 살짝 비틀어 메마른 웃음소리를 내는 모습이 상당히 기괴했다.
그녀의 도드라진 가슴팍에 작은 기복이 일 때마다 비릿한 혈향이 희미하게 풍겨 나온다. 노구덕은 아가레스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야행(夜行). 예전에 알게 된 아가레스트의 기행을 지칭하는 단어다.
아가레스트는 아주 잔혹한 습관을 지니고 있다. 고즈넉한 밤, 평소에 잘 억눌러두었던 증오가 걷잡을 수 없이 뻗치는 날이 오면, 그녀는 꼭 손에 피를 묻힌 채 돌아오곤 했다. 반군이 점거하고 있는 도시를 홀로 습격해서 들끓는 살의를 마음껏 풀고 돌아오는 것이다.
한밤의 악몽(Midnight nightmare). 나타났다 하면 반드시 무자비한 피의 비를 뿌리고야 마는 아가레스트를 지칭하는 별명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술도, 그 짓거리도 더는 하고 다니지 마. 복수를 무사히 이루고 싶다면 말이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고려는 해 보도록 할게요.”
마뜩찮은 대답. 아마 그녀는 술도, 살행도 끊지 못할 것이다.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만 하는 지금, 달리 치솟는 살의를 배출할 대상이 없을 테니. 그러나 노구덕에겐 그녀의 방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억지로 멈추게 하면, 그 다음엔? 유일한 배출구를 잃어버린 아가레스트의 분노를 무엇으로 달랜단 말인가.
불쾌하게 시작해서, 불쾌하게 끝난다. 그녀와의 만남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능력만은 인정할 만했다. 아가레스트는 노구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소피아의 암상조직과는 다른 독자적인 조직을 구축했다. 구(舊) 오라클의 인력을 일부 빼돌리고, 그녀의 손으로 가둬두었던 범죄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이었다.
“쯧. 그래서, 일부러 여기가지 찾아온 이유가 뭐지?”
“겸사겸사, 해서요. 모처럼 연말이니 아이 아버지 얼굴이나 볼까하고…….”
“본론만.”
“발레기우스의 종적이 묘연해졌어요. 기간으로 따지면 한 달이 넘었어요. 예전에도 며칠째 종적을 감춘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길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흠… 겨우 한 달이잖나. 너무 과민한 것 아닌가?”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능구렁이 같은 놈이 시시하게 방구석에서 뒹굴고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네요. 예감이 좋지 않아요. 당신의 생각은요?”
아가레스트는 종적을 감춘 발레기우스가 무언가 준비하고 있으리란 확신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노구덕은 하릴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할 말은 없군. 네 말대로 놈이 뭔가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보가 너무 없잖아? 이쪽도 그 건에 관해선 별다른 얘기를 들은 게 없거든. 오히려 위원회 쪽이라면 몰라도.”
“위원회…?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건가요?”
“글쎄. 정확한 정보는 입수되지 않았지만… 북부와 남부에서 병력이 결집하는 징후가 보인다고 하더군. 공개적인 징집은 아니고, 수송 물자가 급격히 증가한 모양이다. 어쩌면 조만간 대대적인 공세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뜻밖의 정보를 접한 아가레스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르카와 듀폰, 말리크와 바이바르스인가요…….”
“내가 듣기론.”
“…고맙네요. 좋은 정보를 얻었어요.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죠.”
다가오는 무언가를 감지한 것일까. 급작스런 한마디를 남긴 아가레스트는 노구덕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어둠에 몸을 녹여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허.”
이번에도 인사말을 건넬 기회를 놓친 노구덕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아가레스트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신소율도 울고 갈 잠입술이요, 은신술이라 할 만했다. 신출귀몰하게 사라지는 것도 그렇고, 미세한 마력의 잔향조차 남기지 않으니….
잠시 후, 여러 명의 인기척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실내로 들어왔다. 살짝 피로한 기색이 엿보이는 임유진과 데모나, 신소율이었다.
“푹 쉬셨어요?”
“그럭저럭. 접대도 예삿일이 아니더군.”
“다음에는 아저씨 얼굴을 한 악수 인형을 세워 놓는 게 어때요?”
“좋은 생각인데. 한번 고려해 보도록 하마. 그런데 소피아는?”
“언니는 세희랑 마지막 뒷정리하고 있어요. 거의 다 끝냈으니까 조만간 이쪽으로 오든가 할 걸요.”
항상 집에서 잔치를 열면 안주인이 고생하는 법이다. 그 진리를 반영하듯 세 여인의 얼굴엔 조금씩 지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비록 직접 몸을 움직이는 건 적어도 아이리스의 얼굴 마담이나 다름없는 그녀들이었으니, 노구덕 못지않게 손님들에게 시달렸을 터. 데모나야 북적이는 인파 한 가운데에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을 테고.
그러고 보면 연회에 가기 싫다고 툴툴거리던 데모나가 끝까지 자리를 지킨 것도 참 대견스러운 일이었다. 이제는 어엿한 아이리스의 안주인이라는 의식이 생긴 것일까?
“뭘 쳐다봐?”
“기특해서.”
“하?”
노구덕의 흡족한 얼굴에 말문이 막혀버린 데모나가 어이없는 신음을 내뱉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신소율이 그의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모르는 소리 말아요. 데모나 언니 간다는 거 내가 붙잡아 두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요? 방금도 방에 가고 싶다는 걸 내가 억지로 여기까지 끌고 온 거라고요. 기특하면 내가 기특한 거지!”
“호오, 그러냐? 피곤하다고 하면 좀 쉬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바뀌잖아요. 새해 첫 순간은 가족들이랑 있어야지, 혼자만 동떨어져 있고 싶다는 게 말이 돼요? 하여튼 데모나 언니는…….”
구시렁거리는 신소율의 말이 못마땅했던지 뒤로 물러나 있던 데모나의 아름다운 눈썹이 거칠게 굽이치는 것이 보인다.
“상관하지 마.”
“오늘은 다 같이 자고 싶어서요. 여보, 그래도 될까요? 조금 있으면 소피아도 올 테고…….”
데모나의 짜증은 그 뒤를 잇는 임유진의 은근한 제안에 흔적도 없이 묻혀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소율의 결정타.
“소냐랑 가희는 일찍 재웠어요. 어때요? 절호의 기회죠?”
“…애들이 다 잔다고?”
“응, 응! 잘했으면 상 줘요, 상!”
이때다 싶어 눈을 꼭 감고 삐죽 동그랗게 모은 입술을 내미는 신소율. 피식 웃은 노구덕은 가벼운 입맞춤으로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점점 깊어가는 밤.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선녀처럼 아리따운 아내들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욕망의 화신이 차려진 밥상을 거부할 리가 있나. 조금 전까지 피로에 힘겨워하던 노구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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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추천과 코멘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저번화 마지막 멘트로 의견이 많군요! 부활 떡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마는, 너무 깊게 의미 부여하지는 말아주세요!
다음화로 이번 에피소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빅이벤트 시작. 이후 2부 완결입니다.
12시 즈음 마무리 한편 투척하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