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ojong - Chapter 3
3권
새로운 시작
아침이라 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각,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킨 장씨 부인은 약간 초췌한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지는 궁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원래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병자처럼 마냥 연약한 몸도 아니었는데, 웬일인지 요즘 들어 계속 손발을 움직이기가 귀찮고 몸이 나른해서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마님, 상 올리겠습니다.”
“그러게나.”
그다지 입맛이 없었기에 식사를 거를까 생각했지만 장씨 부인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이가 지긋한 상궁 한 사람과 어린 궁녀 둘이 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와 앞에 차려 놓았다.
“마님, 최근 계속 밥을 잘 못 드신다기에 오늘은 특별히 죽을 쑤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상궁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전복죽 그릇의 뚜껑을 열고 앞으로 내밀었다.
전에 아기를 잃은 이후로 방에 칩거하며 계속 침울해하고 있을 때도 식사를 거르는 일은 잦았지만 전복죽만큼은 매우 좋아해서 잘 먹었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일부러 신경을 써 준 것이다.
“그래? 어디 한번 먹어 볼까.”
장씨 부인은 그제야 조금 식욕이 도는 듯 숟가락을 들고 전복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 숟가락도 못 먹고 금방 얼굴을 찡그린 채 급히 고개를 돌리며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우욱……!”
“마님! 왜 그러십니까!”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상궁이 급히 물었지만 장씨 부인은 속이 불편한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손만 내저었다.
“혹시 음식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설마…….”
갑작스러운 사태에 겁먹은 어린 궁녀가 울먹거리면서 그리 묻자 상궁은 그제야 퍼뜩 음식에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은수저를 들어 변색이 되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은수저의 색깔은 그대로였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조심스레 그릇에 남은 전복죽을 조금 떠서 맛을 봐도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속이 메슥거리는구나. 물 좀 다오.”
“네, 마님.”
찬물을 마시고 조금 진정한 장씨 부인이 자세를 고쳐 앉자,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괜찮으시옵니까?”
“고개를 들게. 내 잠시 속이 불편하여 그랬던 것뿐이니 너무 소란 피우지 말게나.”
“다행입니다. 저는 혹시 음식에 독이 있을까 우려되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상궁에게 장씨 부인은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독은 무슨, 자네가 상을 들고 들어오기 전에도 항상 독이 있는지 없는지 그 은수저로 확인을 하지 않나.”
“그렇긴 하옵니다만…….”
“내가 요즘 몸이 허한 탓인지 음식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네. 전복죽이라면 좀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네만 아무래도 무리였던 모양이야.”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운지 작게 한탄하는 장씨 부인의 말에 상궁이 돌연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계속 기분이 안 좋다며 방에만 계셨지요?”
“그랬네.”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고 몸도 이유 없이 무겁고요.”
“아니, 자네가 그걸 어찌 다 아는가?”
속을 빤히 들여다본 것처럼 상궁이 말하자 장씨 부인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마님, 혹시…… 아기씨를 잉태하신 건 아니십니까?”
“뭐라?”
뜻밖의 말에 장씨 부인이 말을 잇지 못하는데, 상궁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마님이 보이신 증상들은 모두 아이를 임신한 사람의 것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마님께서도 아기씨를 출산하신 경험이 있으니 잘 아실 것입니다.”
“설마…….”
그러고 보니 짚이는 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아기를 잃은 이후 도현과 잠시 동안 소원해지긴 했지만 요 근래엔 다시 신혼 시절로 돌아간 듯 아주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가.
게다가 몇 번이고 밤을 함께한 적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씨 부인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마님, 틀림없습니다. 지금 당장 의원을 불러오지요.”
“아! 그, 그러게나.”
아직도 뭐가 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장씨 부인을 뒤로하고 방을 나온 상궁은 날 듯한 발걸음으로 단숨에 뛰어가 별채에 따로 상주한 의원을 데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오는 동안 이미 상궁에게 귀띔을 받은 의원은 장씨 부인의 손목에 얇은 비단을 하나 덮고 그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음…….”
의원이 몇 번이고 위치를 바꿔 가며 신중하게 진맥을 하는 동안 숨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씨 부인은 마침내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급하게 물었다.
“어떤가?”
그러자 의원은 돌연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크게 절을 올렸다.
“축하드립니다, 마님. 아기씨가 들어서셨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네, 마님. 아직 임신 초기라 맥이 약해서 진찰하기가 좀 힘들긴 했습니다만, 확실합니다.”
“세상에! 마님, 경하드리옵니다.”
평소에는 의젓한 상궁마저 뛸 듯이 기뻐하며 눈물을 훔치자, 장씨 부인은 감격해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직 배도 부르지 않았는데 임신이라니.
“첫째 딸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할 줄 알았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마님께선 아직 젊고 어여쁘신데요. 대군마마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면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요.”
“내 아이라…….”
장씨 부인은 무의식적으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남편인 도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님, 경사스러운 일인데 빨리 대군마마께 전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상궁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장씨 부인이 말했다.
“그럼 자네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게나. 너무 소란 피우지는 말고.”
“예.”
남아 있는 다른 두 궁녀에게 장씨 부인의 수발을 맡긴 상궁은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현이 있는 곳을 찾았다.
한편 이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는 도현은 평상시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고 수련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웃통을 벗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니 저 멀리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상궁이 보여 도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데면 몰라도 거친 사내들이 주로 머무는 수련장은 궁녀들이 좀처럼 얼씬거리지 않는 곳인데 어쩐 일인가 싶었다.
“대군마마, 마님께서…….”
장씨 부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던 도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부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그러자 상궁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호호 의미 모를 웃음을 지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축하드리옵니다. 마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뭐…….”
진지한 얼굴로 상궁의 말을 듣고 있던 도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떨어뜨린 것도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회, 회임이라니. 아기가 생겼단 말인가!”
“네에, 그렇사옵니다.”
상궁이 고개를 숙이며 끄덕이자마자 도현은 얼굴에 활짝 미소 짓고는 장씨 부인의 처소로 달려가려고 했다.
“마, 마마! 옷은 입고 가셔야죠.”
“아차.”
당황하는 상궁의 목소리에 이미 수련장 입구까지 갔던 도현은 우뚝 멈춰 서서는 허둥지둥 돌아와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칠현아! 빨리빨리 이것 좀 묶어 봐라.”
“움직이지 마세요, 마마. 계속 풀어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급한지 계속 재촉하면서 괜히 애꿎은 타박만 맞은 칠현이 뭐라 구시렁대긴 했지만, 지금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마침내 금방 옷을 갈아입고 장씨 부인의 처소까지 달려온 도현은 궁녀들이 장지문을 열어 주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부인!”
“오, 오셨어요.”
도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긴장하고 있던 장씨 부인은 급하게 달려오느라 숨을 허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러십니까? 어머, 이렇게 땀까지 흘리시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소.”
도현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주려는 장씨 부인의 손목을 탁 붙잡고 물었다.
“부인이 회임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정말이오?”
그러자 장씨 부인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기가 부끄러운지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 의원이 다녀갔는데 확실하답니다.”
그 순간 도현은 장씨 부인의 몸을 번쩍 안아 들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래, 진짜란 말이지!”
도현은 시중들고 있던 궁녀와 내관들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나 장씨 부인을 끌어안고 볼에 입맞춤을 했다.
“고맙소, 정말 고마워. 세상에, 아기라니!”
“그, 그렇게 좋으세요?”
“당연하지. 너무 기뻐서 웃음이 멈추지를 않는구려.”
몇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이렇게 기뻐하는 도현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장씨 부인은 약간 어리둥절하면서도 슬며시 흘러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소리가 있듯 그날 점심때는 이미 장씨 부인의 회임 소식이 돌고 돌아 소현세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정말 경사스러운 일이로구나. 네가 올해 복이 많은가 보구나. 한동안 소식이 없던 아이까지 덜컥 들어서고 말이야.”
“하하, 감사합니다.”
소현세자의 진심 어린 축하를 듣고 도현은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부부 관계를 하면서 아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막상 일이 닥치고 보니 하늘 위를 나는 듯 마냥 기분이 좋기만 했다.
이제야 진짜로, 자신이 이 세계에서 봉림대군이라는 이름의 인간으로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만 같았다.
“네 부인에게도 잘된 일이지. 배 속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간 마음에 응어리져 있던 것도 풀리지 않겠느냐.”
“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심양까지 가는 긴 여정 하나만도 견디기 벅찬데 어린 딸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 장씨 부인의 상태는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항상 기운 없는 표정으로 축 늘어져선 딸이 몸에 지니고 있던 장신구만 하루 종일 쓰다듬던 장씨 부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었기에 소현세자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아침에 잠깐 얼굴 보고 왔는데 표정이 많이 밝아졌더군요.”
“그렇겠지. 참, 관저에 머무르고 있는 의원에게는 내가 벌써 일러두었으니 걱정하지 마라. 상에 올리는 음식 역시 각별히 몸에 좋은 것으로만 준비하라고 말해 두었다.”
“형님께서 그렇게 신경 써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뭘, 당연한 걸 가지고.”
기분 좋게 대꾸한 소현세자는 차가 식겠다며 얼른 들라고 손을 내저었다.
점심때가 지난 제물포 포구는 새벽 일찍 바다에 나갔다가 선창 가득 고기를 싣고 돌아온 배들로 붐볐다.
바닷가 특유의 짠내와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하는 가운데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한 떼의 갈매기들이 어선 주위에 내려앉았다가 어부가 기다란 장대를 휘두르자 푸드덕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답게 어선 말고도 덩치 큰 조운선(남부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운반하는 배)과 무역선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그중 한 척에서 눈에 익은 사람이 일행들과 함께 땅에 내렸다.
중인中人들이 쓰는 챙이 좁은 갓에 두툼하게 솜을 넣은 두루마기를 걸친 장 총관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고국에 돌아와서 그런지 공기부터 다른 것 같군.”
“저도 그렇습니다.”
고개를 돌린 장 총관은 옆에 있던 서상수 행수를 보며 물었다.
“자네도 병자호란 때 잡혔다고 했지?”
“네.”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
서 행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난리 통에 헤어지고 아직 소식을 모릅니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군.”
“아닙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겪은 아픔인데요. 그래도 대군마마 덕분에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되어 상단에서 일까지 할 수 있게 됐으니 언젠가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겠지요.”
노예로 끌려올 당시 아내와 열 살짜리 아들을 잃은 장 총관은 서 행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줬다.
“그래, 꼭 좋은 날이 올 걸세.”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여기서 다시 한강을 타고 조금만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한양에 도착하니까 마지막까지 사고 나지 않도록 선원들 관리를 잘하게.”
“알겠습니다, 총관 어른.”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관청을 찾아간 장 총관은 책임자에게 도현이 적어 준 편지를 보여 줬다.
친필로 직접 쓴 편지에는 장 총관과 일행의 신분을 보장하고 교역을 하는 데 도움을 주길 부탁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마지막에 도현과 소현세자의 수결(서명)이 있었다.
도현 혼자였다면 약발이 약했을지 몰라도 차기 국왕인 소현세자의 수결을 본 관리는 거만하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최대한 편의를 봐줬다.
장 총관이 심양을 떠나 이곳에 온 이유는 후궁 조씨의 행동에 경각심이 생긴 도현의 지시를 받아 조선 내부 사정을 파악할 지부를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관리의 도움을 받아 호패(조선시대 신분증)와 교역 허가증까지 받은 장 총관은 다음 날 제물포를 떠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포 나루에 도착해서 가져온 짐을 내린 장 총관은 도성 안에 지부로 쓸 작은 기와집과 가게 그리고 창고를 차례로 매입했다.
가게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몰려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한양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인 운종가雲從街에 냈다.
판매하는 물건은 비단이나 보석, 고급 벼루 같은 사치품들이었다. 모두 해적들한테 빼앗은 것들로, 정보도 수집하고 더불어 장물도 처리하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이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중년 부인이 하녀 두 명을 거느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점원이 재빨리 옆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더니 새로 가게를 열었나 보군.”
“예. 이틀 전에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흐음.”
부인은 흥미롭다는 듯 가게를 둘러보더니 앞쪽에 놓인 비교적 싼 물건은 쳐다보지도 않고 제일 안쪽 벽에 장식용으로 걸어 둔 비단에 눈길을 주었다.
“이게 맘에 드는군.”
“예? 아! 손님, 죄송하지만 이건 파는 게 아니라서…….”
중년 부인이 가리킨 비단을 본 점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해적들의 보물 창고에서 가져온 비단들은 모두 상급품이었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분류될 만큼 품질이 좋아서 가격이 엄청 높게 책정되었다. 그래서 손님에게 팔기보다는 눈길을 끄는 용으로 전시해 놓았던 것이다.
“파는 게 아니야? 그럼 왜 가게에 내놓은 겐가.”
“저, 그게…….”
“주인장을 불러오게. 내 그 사람하고 말을 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만만치 않아 보이는 성격의 중년 부인이 단호하게 말하자 점원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달려 들어가 점장을 불러왔다.
“제가 여기 점장입니다만 이 비단을 사려고 하신다고요?”
“그러네.”
이미 점원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점장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으로 재빨리 주판알을 튕겼다.
지금까지 간혹 비단을 사려고 문의하는 손님이 있긴 했지만 일단 가격을 듣고 나면 다들 너무 비싸다며 한발 물러서곤 했다.
이 부인도 꽤 돈은 있어 보이지만…… 과연 어떨까.
속으로 생각한 점장은 헤실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띠고 말했다.
“물론 가게에 내놓은 물건인 만큼 가격만 맞으면 팔 수 있지요.”
“처음 보는 순간 내 마음에 쏙 들었으니 반드시 가져가야겠네. 그래서 가격이 얼마인가?”
“한 필에 백 냥입니다.”
“백 냥?”
생각보다 더 비싼 금액에 중년 부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백 냥이라면 일반 사 인 가족이 반년은 족히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다.
그런데 고작해야 비단 한 필에 백 냥이라니, 아무리 최상급품이라 해도 과도하게 비싼 금액인 것은 사실이었다.
“호오, 꽤 비싸군.”
“예. 그래서 사겠다는 손님이 몇 분 계셨지만 아직도 팔리지 않고 있는 게죠. 창고에 그냥 넣어 두기도 뭐하니 이렇게 전시용으로 걸어 놓는 거랍니다.”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점장이 말했다.
이쯤 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중년 부인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좋아. 내가 사지.”
“아, 예 그러십……. 네에?”
이번에 놀란 것은 점장 쪽이었다.
“사, 사시겠다고요?”
“그러네. 한번 말을 꺼낸 이상 물릴 수는 없지. 이래 봬도 그렇게 쪼잔한 사람은 아니라네.”
흥! 코웃음을 치며 중년 부인은 하녀에게 손짓을 했다.
“배달할 장소는 이 아이가 가르쳐 줄 걸세.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게 큰돈을 매일 들고 다니는 건 아니니, 비단을 가져오면 준비하고 있다가 대금을 치러 주겠네.”
그렇게 말한 중년 부인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가게를 나갔다.
“허어…….”
뜻밖의 사태에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남겨진 하녀가 새침하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계속 그렇게 서 계실 건가요?”
“어? 아아, 미안하네.”
점원에게 비단을 상자에 넣어 고이 포장하라는 지시를 내린 점장은 은근슬쩍 하녀에게 물었다.
“대체 자네가 모시는 주인은 어느 고관댁 마나님이신가? 백 냥이란 거금을 한 번에 쓰시다니, 깜짝 놀랐네그려.”
“훗, 운 좋은 줄 아세요. 우리 마님이 여기서 물건을 사셨으니 앞으로 소문이 쫙 퍼져서 손님이 많이 늘어날걸요.”
“마님의 영향력이 그렇게 강한가?”
“그럼요. 지난겨울엔 우리 마님께서 모란꽃 자수 무늬를 끝단에 새긴 치마를 입고 나가셨는데, 그해 한양에 있는 사대부집 마나님들이나 아가씨들께서 모두 다 따라 하는 바람에 모란꽃이라면 지긋지긋하다며 진저리를 치는 어르신들까지 생겨났을 정도인걸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얘기하는 걸 보니 없는 일을 지어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한번 입이 트인 하녀를 슬슬 구슬려서 마님이 지체 높은 사대부집 출신이고, 주인어른은 한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라는 정보까지 빼낸 점장은 대어를 잡았다는 생각에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실제로 그 이후, 하녀의 말대로 한양 안에 입소문이 쫙 퍼졌는지 한동안 가게 문턱을 넘는 부유한 집 마님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명나라 사치품은 사대부와 일부 부유한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으나 청이 길을 막고 있어서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런 물건들을 많이 그것도 상급의 품질로만 구비해 놓고 있다는 얘기가 돌면서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까지 일부러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손님들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다른 가게처럼 매일 손님들이 붐비지는 않았지만 워낙 비싼 물건만 팔다 보니까 하루에 한두 명만 와서 구입을 해도 그날 하루 매상을 올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말 그대로 창고에 있는 물건을 꺼내 놓기 무섭게 모두 팔려 나갔다.
그동안 판매된 물건 내역을 천천히 훑어본 장 총관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전표를 내려놨다.
“이거 잘못하면 물건이 모자랄 수도 있겠군.”
“생각보다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큰 것 같습니다. 그동안 상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빨리 물건을 들여와야겠습니다.”
앞에 앉은 서 행수의 말에 장 총관은 머리를 끄덕였다.
“물건이 없어서 가게 문을 닫는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 내가 돌아가자마자 다시 배를 보내도록 하겠네.”
“이왕이면 넉넉하게 보내 주십시오.”
“그러지. 세 척 정도 분량이면 되겠나?”
“예.”
그동안 이리저리 처분을 했지만 아직도 웅도 창고에 해적들한테 빼앗은 노획품이 한가득 쌓여 있었기에 물품을 공급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봉황상단은 어느 국가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해상 교역이 가능하여 만약 웅도에 있는 노획품이 떨어지면 명나라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가지고 올 수도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장 총관이 갑자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건이 잘 팔려서 좋기는 하지만 아직 청국에는 몸값이 없어 지옥 같은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이 무수히 많은데 소위 지도층이라는 작자들이 그런 건 관심도 없고 이따위 사치품을 구입하는 데 물 쓰듯 돈을 내다니 참 답답하고 화가 나는군.”
“그렇지요.”
“이런 걸 보면 봉림대군께서 정말 대단하시지 않나.”
“맞습니다. 왕족이면서도 저희 같은 아랫것들과 쉽게 어울리실 정도로 소탈하시고 청국에 끌려간 백성들을 구해 내기 위해서 이렇게 상단까지 만들어 노력하시다니 그런 분이 없습니다.”
“그래.”
서 행수의 말에 장 총관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상단 일을 맡아 하면서 장 총관을 비롯한 간부들은 소현세자가 아니라 도현이 모든 걸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대군마마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지부가 빨리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될 게야.”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세게 나가지는 말고. 나중엔 몰라도 아직은 기존 상인들과 마찰을 일으켜서 좋을 것이 없어. 알겠지?”
“예.”
한양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기존 육의전 상인들의 눈 밖에 나면 자리를 잡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기에 이런 충고를 하는 것이다.
물론 육의전 상인을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데 신경 쓸 일이 많은데 괜한 분란이 일어난다면 골치가 아프기에 일단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는 생각이었다.
서 행수도 공납을 독점하며 관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육의전 상인들의 힘을 알기에 별다른 말 없이 수긍했다.
“그럼 자네만 믿겠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목에 힘을 주고 자신에 찬 얼굴로 대답하는 서 행수를 보며 장 총관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 날 장 총관은 배를 타고 웅도를 거쳐 심양으로 돌아갔고 한양에 남은 서 행수는 지부를 안착시키고 정보망을 구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도현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압록강 근처에 위치한 의주에도 거점을 만들어 한양과 심양을 연결했다.
여기도 만상灣商이라는 큰 상인 세력이 존재하지만 임경업 장군의 입김이 미치는 곳이라 한양보다는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청국 황제가 요구한 병사와 군량미를 준비하느라 크게 애를 먹고 있었다.
탕!
“필요한 수량을 다 채울 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앞에 놓인 서탁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인조가 언성을 높이자 호조판서인 이명李溟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미 한차례 지원군을 보낸다고 군량미를 많이 소모한 데다 작년에 흉작이 들어 제대로 세곡이 걷히지 않아 창고에 보관된 양이 육만 섬밖에 안 됩니다. 여기서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제하면 여유분은 오천 섬뿐입니다.”
“허어.”
거듭된 전란과 흉년 그리고 청국의 조공 요구에 재정이 안 좋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지는 몰랐기에 인조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대전에 모여 있던 다른 대신들도 인조와 마찬가지로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로 술렁거렸다.
“오천 섬이라니……. 저쪽에서 요구한 것은 오만 섬인데 턱도 없이 부족한 양이 아닙니까?”
“지금 그게 문제요! 이 상태라면 올해 또다시 흉년이라도 들었다가는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할 정도로 재정이 무너질 수도 있소.”
호조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대신의 질책에 처음 말을 꺼냈던 사람은 찔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나라가 이 꼴이 됐는지…….”
한탄 어린 인조의 말에 재정을 맡고 있는 호조의 책임자인 이명이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이며 죄를 청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호조판서인 저의 잘못이니 벌을 내려 주십시오.”
다른 신하들 같았으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며 책임 추궁을 했겠지만, 이명은 선왕 때부터 벼슬을 하며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인조의 측근으로 온갖 궂은일을 성실히 수행했기에 국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오죽했으면 작년에 칠십일 세가 되자 고령을 이유로 조정에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극구 만류하고는 정헌대부正憲大夫라는 칭호와 함께 사저에서 업무를 볼 수 있는 특혜를 내릴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어찌 경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것보다 당장 청에 보낼 군량미를 마련할 방법이 없으니 이를 어쨌으면 좋겠소?”
“전하, 현재 우리의 재정 상태로는 도저히 청의 요구를 들어줄 방도가 없으니 심양에 사신을 보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이번에는 출정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옵소서.”
안 그래도 상국인 명나라를 치기 위해 출정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던 대부분의 대신들은 전쟁에서 빠질 좋은 명분이라고 생각했는지 이구동성으로 청 황제에게 사신을 보낼 것을 건의했다.
인조도 자꾸 명과 청의 전쟁에 휩쓸리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기에 솔깃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 한쪽에 앉아 있던 김자점金自點이 끼어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이미 심양에 계시는 세자 저하께서 청국 조정과 협상을 해서 한차례 요구 조건을 낮췄는데 또다시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입니다, 전하.”
인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지만 절개를 지키고 병자호란 때 병사를 끌고 와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이명과 달리 김자점은 서북쪽을 방어하는 도원수로서 청군을 저지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데도 전투를 회피했고 후에는 대표적인 친청인사가 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이런 이유로 가뜩이나 아니꼽게 여기는 김자점이 사신 파견을 반대하자 친명파가 대다수인 대신들은 날을 세웠다.
“그럼 병판은 어떻게 하자는 거요?”
경쟁 관계에 있는 우의정 심기원沈器遠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김자점은 태연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병법에도 한창 기세를 올리는 적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청이 바로 그런 때이니 어려운 상황이지만 요구한 걸 그냥 들어주는 것이 나을 겁니다.”
“나라 살림이 거덜 날 판인데 무작정 퍼 주자는 말이오!”
대신 중 한 명이 노한 목소리로 따지듯 말하자 김자점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사신을 보낸다고 해서 청국이 사정을 봐줄 거라는 보장이 있소이까? 괜히 상대의 심기만 거스르는 꼴이 될 거요.”
“그건…….”
금방 대꾸를 못 하고 우물거리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돌린 김자점은 왕좌에 앉아 있는 인조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전하, 저라고 국고가 바닥나고 힘들게 키운 병사들이 청군의 화살받이가 되는 게 달갑겠습니까? 하지만 병자년의 치욕이 반복돼 강토가 유린되고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지는 걸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사옵니다.”
진정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이라도 되는 양 김자점이 열변을 토하자 대전에 모여 있던 대신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가를 찡그렸다.
그런 가운데 청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인조는 김자점의 이야기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중원 정복이라는 대업을 앞두고 있는데 청 황제가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우릴 공격하려고 할까?”
“그래서 더 위험한 겁니다.”
“……?”
“큰일을 벌이는데 뒤가 불안하면 되겠습니까. 아마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산해관을 넘기 전에 우리부터 정리하려고 들 겁니다. 지난 병자호란도 따지고 보면 명나라와 싸우기 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쳐들어온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이유도 있지만 청 황제인 홍타이지가 수십만 대군을 일으킨 가장 핵심은 김자점이 말한 것이기에 인조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청나라 입장에서 조선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날카로운 비수나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와 한창 싸우고 있을 때 갑자기 후방을 공격해 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청군이 강하다고 해도 앞뒤로 끼여 명과 조선군의 협공을 받는 건 절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홍타이지가 본격적인 중원 공략에 나서기 전 미리 후방을 정리해 두는 의미로 조선을 친 것이다.
하지만 그 빈틈을 노리고 명나라가 쳐들어올까 봐 홍타이지는 조선을 완전히 정복하지 않고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는 걸로 만족하고는 급히 군대를 회군시켜야만 했다.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고심을 거듭하던 인조는 이내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렸는지 머리를 들며 말했다.
“병판의 말대로 이미 한차례 세자가 요구 조건을 낮췄는데 또다시 사신을 보내는 건 괜히 양국 간에 분란을 만들 수도 있고 시간도 촉박하니 이번에는 어렵더라도 원하는 대로 해 주도록 합시다.”
“요구를 들어주고 싶어도 쌀이 없습니다.”
이명의 말에 인조는 약간 짜증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창고가 비었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특별 세금이라도 한시적으로 거둬 어떻게든 수량을 채워야 될 것 아니오!”
“가뜩이나 춘궁기라 백성들의 생활이 팍팍한데 곡식을 오만 섬이나 내라고 하면 반발이 클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우의정 심기정이 반대 의견을 내자 인조는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는 호통쳤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나보고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요! 세금을 걷든지 아니면 경들의 곳간에 쌓아 둔 곡식을 내오든지 무조건 다음 달까지 수량을 다 채워서 심양으로 보내시오!”
얼굴을 찡그리며 화를 쏟아 낸 인조는 더는 앉아 있기 싫다는 듯 왕좌에서 일어나 대전을 나가 버렸다.
그러자 대신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가는 인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졸지에 문제를 떠안게 된 대신들은 오후 늦게까지 머리를 싸매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야기를 나눠도 명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인조가 말했던 것처럼 특별 세금을 거둬 부족한 부분을 충당하기로 했다.
대신들도 조금씩 자발적으로 쌀을 내놓기로 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일부분에 불과했고 결국 모든 부담을 힘없는 백성들에게 떠넘기겠다는 것이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곡식을 거둬들이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춘궁기에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 먹고 있던 백성들은 그나마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이제는 밥 먹는 날보다 굶을 때가 더 많아졌다.
이러자 자연스럽게 국왕인 인조에 대한 원성이 더 커졌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유민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한편 영원성이 함락되고 산해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아직 친명배금親明排金(명나라와 가깝게 지내고 금(청)나라를 배척한다는 것) 사상을 버리지 못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명을 치려는 청국을 돕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지난 병자년의 치욕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데 복수는 못 할망정 오랑캐들의 요구에 병사와 군량미를 바쳐야 한다니 정말 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젊은 관리가 분한 듯 주먹을 꽉 움켜쥐며 하는 말에 척화파의 일원으로 대사헌 벼슬에 있는 이명한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나도 마찬가지일세. 하지만 주상 전하께서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셨고 관계가 악화되면 당장 심양에 계신 세자 저하와 봉림대군마마의 안위가 위협받게 되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소현세자와 도현의 이름을 거론하자 모여 있던 관리들은 하나같이 이맛살을 찡그리며 낮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으응…….”
왕위 계승 서열 일, 이 위의 왕족이 상대편에 볼모로 잡혀 있다는 건 그만큼 여러 가지로 조선의 선택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했는데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청 황제가 둘을 강제로 데려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해 대는데 정말 명을 무너뜨리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떨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어떻게든 막아야지.”
“무슨 묘책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자 정색하며 주위를 둘러본 이명한은 혹시 누가 엿들을까 봐 목소리까지 살짝 낮추고는 이야기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네.”
“염려 마십시오.”
“실은 며칠 전에 북경으로 은밀히 사람을 보내 청이 오월에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걸 알렸다네.”
“그게 정말입니까!”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관리들을 보며 이명한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이네.”
“잘하셨습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우릴 도와준 걸 생각하면 당연히 알려줘야지요. 큰일을 하셨습니다.”
관리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이명한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들 알고 이미 결정된 일을 계속 왈가왈부하면 주상 전하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자중들 하게.”
“알겠습니다.”
이명한은 젊고 혈기 왕성한 관리들이 행여나 사고를 치지 않도록 잘 다독이고는 자리를 정리했다.
입단속을 시켰지만 척화파끼리 모여 술자리를 하며 울분을 토하는 과정에서 소문이 조금씩 퍼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경업 장군의 귀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흘러들어 갔고 바로 비선을 통해 도현한테 사실을 알렸다.
장 총관이 건네준 쪽지를 꼼꼼히 읽어 본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사실이야?”
“예. 의주에 설치한 지부를 통해 임경업 장군이 직접 보낸 겁니다.”
“젠장!”
척화파 내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임경업 장군이 비선까지 써 가며 급히 알려 줄 정도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아주 컸기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걸 청이 알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딴 짓을 벌인 거야. 고리타분한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다니,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제 어쩌지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장 총관의 물음에 잠시 쪽지를 보던 도현은 이내 한쪽에 놔둔 화로에 그걸 집어넣었다.
화르륵.
불이 붙은 쪽지가 순식간에 시커먼 재로 변해 버렸다.
“그냥 놔둬.”
“에?”
“이미 명나라에 밀서가 전해졌을 테고 우리한테 소문을 완전히 차단할 능력도 없는데 뭘 어쩌겠어.”
“그렇군요.”
현실적으로 지금 역량을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장 총관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문제는 당분간 제쳐 두고, 웅도에 있는 호위대의 훈련은 다 끝났어?”
“네. 지난겨울 내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굴려 당장 전투에 투입해도 될 정도로 단련시켰습니다.”
시선을 받은 박영식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면서 대답하는 것이 안 봐도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을지 짐작이 됐다.
“수고들이 많았겠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노예로 지내는 것보다 낫지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포수는 훈련시키기 어려웠을 텐데 빨리 끝났군.”
“임경업 장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며 궁병과 포수 서른 명을 남겨 두고 가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 참, 그랬지.”
호위대 대부분이 병사 출신이라 빨리 적응하기도 했지만 임경업이 자발적 지원자를 받아서 남겨 둔 인원들 덕분에 훈련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앞으로 상단이 뻗어 나가는 데 큰 힘이 될 이들이니까 대우를 확실히 해 주도록 해.”
“예.”
“다음 달에 새로운 판옥선과 화포를 넘겨받기로 돼 있지?”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 일 때문에 제가 호위대 삼백 명과 함께 사흘 뒤 황해도로 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거 한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먼 길을 다녀와야 한다니 자네한테 미안하군.”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도현은 신뢰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앞에 있는 장 총관을 바라봤다.
며칠 뒤 도현한테 이야기했던 대로 장 총관은 호위대와 함께 바다를 건너 황해도 몽금포夢金浦에 도착했다.
몽금포는 장산곶長山串 동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포구로, 예전부터 수군 병영과 만호 벼슬의 무장이 배치될 만큼 군사상 요지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장 총관 일행은 일반 포구가 아닌 군영 선착장에 배를 댔다.
하얀 모래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해안에 내린 장 총관이 잠시 감탄한 얼굴로 주변 경치를 둘러보고 있을 때 일단의 무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장 총관은 이내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먼저 인사했다.
“장군님.”
그러자 제일 앞에 서 있던 중년 무장이 미소 지은 얼굴로 알은척을 했다.
“장 총관, 오랜만이군. 그간 무탈했나?”
“예.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평안하셨습니까?”
“나야 뭐 언제나 똑같지.”
“지난번 전쟁에서 세우신 전공을 인정받아 많은 상금을 하사받으시고 평안병사에 임명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감축드립니다.”
“고맙네. 이거 별로 한 것도 없이 나만 상을 받은 것 같아 좀 그렇군.”
“아닙니다. 장군님 덕분에 이렇게 저희들이 마음 놓고 바다를 건너올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군.”
“그런데 장군님께서 여기까지 나오시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평안병사의 임지는 여기가 아니라 평양이었기에 반갑기는 했지만 임경업 장군을 보며 장 총관은 의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있기는 하지.”
“혹시…….”
장 총관이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자 임경업 장군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놀라기는. 사실 주상 전하께서 한양으로 호출을 하셔서 가는 길에 자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들른 거라네.”
“아, 그러셨군요.”
그제야 장 총관은 마음을 놓았다.
사실 장 총관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긴장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몽금포에 온 건 교역을 하려는 게 아니라 판옥선과 화포를 몰래 가져가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이자 무기인 판옥선과 화포는 외부로 유출되는 걸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해상 교역을 위해 배와 강력한 화약 무기가 필요했던 도현은 웅도에서 인연을 맺은 임경업 장군과 수군 장수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봉황상단의 자금으로 몰래 판옥선 세 척과 여러 구경의 화포 구십 문을 제작했다.
아무리 봉림대군이라고 해도 이런 사실이 외부에 그중에서도 권좌에 집착이 강한 인조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기에 장 총관은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한양에는 갑자기 왜 가시는 겁니까?”
임경업 장군이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교지敎旨(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서)를 받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번에 출병하는 지원군 지휘를 내가 맡을 것 같네.”
“아, 역시…….”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반응에 임경업 장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뭐 들은 거라도 있나?”
“실은 청국 관리들 사이에 장군님을 지원군 지휘관으로 지목해서 부르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싸움을 피한 다른 장수들과 달리 장군님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전공까지 세우셨으니 청국에서 좋게 본 거지요.”
설명을 들은 임경업 장군은 약간 허탈한 얼굴을 했다.
“황당하군.”
“이번 전쟁에는 세자 저하와 봉림대군께서도 출정하시는데 장군님이 오시는 걸 알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거라도 위안을 삼을 수밖에. 두 분께서는 잘 지내시지?”
“예.”
“귀하신 분들이 먼 이국땅에 외로이 계신 것도 마음이 아픈데 다른 나라가 치르는 전쟁터까지 억지로 가셔야 한다니 정말 뵐 면목이 없군그래.”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에 장 총관뿐 아니라 주위에 서 있던 다른 장수들도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임경업 장군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배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봐야지. 함께 가세.”
“그러시죠.”
임경업 장군은 장 총관과 나란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선착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래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시대에는 지금과 달리 조선소라고 거창하게 각종 설비를 세워 놓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이 평평하고 재료를 구하기 쉬운 해변에 목재로 틀을 세우고는 거기서 배를 건조했다.
모래사장에는 건조가 다 끝나 마무리 도색 작업이 한창인 판옥선 세 척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세워져 있었다.
“보통 배들하고 좀 다른 것 같은데?”
임경업 장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판옥선을 쳐다보자 지금까지 존재감 없이 뒤에 서 있던 몽금포 만호 유상헌이 앞으로 나서 설명을 했다.
“봉림대군마마의 지시에 따라 기존 판옥선보다 반 배가량 크기를 키우고 돛대도 한 개 더 설치해서 약간 다르게 보이실 겁니다.”
“어쩐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임경업 장군이 흥미를 보이자 유상헌은 묻지도 않은 걸 계속 술술 이야기했다.
“선체가 커진 만큼 화력도 세져서 화포를 총 삼십육 문이나 장착할 수 있습니다.”
“호오, 새로 만든 판옥선에 탑재한 화포를 일제히 발사한다면 정말 정관이겠군.”
“그렇지요. 멋도 모르고 달려들었다가 십자포화에 걸리면 상대는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닌 게 이 정도 화력이라면 어떤 배든 상대가 난전을 시도하기도 전에 원거리에서 모두 침몰시킬 수 있다.
그때 가만히 대화를 들으며 판옥선을 살피던 장 총관이 입을 열었다.
“다 만들어진 겁니까?”
“도색을 마무리하고 내일 바다에 띄워 이상이 없는 것만 확인하면 되네. 그런 다음에 화포를 탑재하면 모든 작업이 끝나는 거지.”
“그럼 늦어도 사나흘 뒤에는 배를 가져갈 수 있겠군요.”
“그렇지.”
가까이 가서 작업장을 둘러보자 그제야 일행을 본 인부들이 일을 멈추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사다리를 이용해 직접 배 위로 올라간 임경업 장군은 선체 크기에 다시 한 번 감탄성을 내뱉었다.
“정말 멋지군. 우리 수군도 이런 배를 가지면 좋을 텐데 말이야.”
천생 무인이었던 임경업 장군은 재물보다 이렇게 뛰어난 무기를 보면 욕심을 내며 가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계속된 전란과 흉년 그리고 청의 조공 요구로 재정이 바닥난 조선은 신형 판옥선 건조는 고사하고 기존 병력과 군영을 유지하기에도 벅찼다.
그나마 청나라의 위협이 없었다면 벌써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군사력을 감축시켰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병사 수를 줄이지는 않았지만 악화된 재정 때문에 중앙에서 제대로 지원을 해 주지 않아 각 군영들은 훈련보다는 주변 둔전屯田(군영이 자체적으로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만든 토지)에 가서 농사를 짓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몽금포에 주둔한 수군도 만약 도현이 배를 건조해 주는 대신 충분한 식량과 피복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뒤편 논에서 한창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있었을 터다.
이건 임경업 장군도 마찬가지였는데 판옥선에 탑재할 화포 구십 문을 제작해 주는 대신 쌀 천 섬과 철괴 사백 개를 지원받았다.
물론 화포 제작에 들어가는 재료는 따로 공급받았고, 이걸로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급하고 병장기를 만들어 무장시켰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몽금포 군영과 평안도 병사들에게 도현의 지원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았다.
“상황이 나아지면 이런 배들을 건조해 함대에 배치할 수 있을 겁니다.”
부관인 박도치의 말에 임경업 장군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돼야지.”
다짐하듯이 그리 읊조리긴 했지만 씁쓸한 어조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 심정은 모두가 마찬가지인지 잠시 어색한 기운이 맴도는 가운데 장 총관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손뼉을 치며 나섰다.
“이런! 제가 깜빡 잊고 있었군요.”
“무슨 일인가?”
“다름 아니라 대군마마께서 여러분에게 격려 차원차 내주신 술과 고기가 잔뜩 있는데,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습니다.”
장 총관의 목소리를 들은 장수들이 순간 눈을 반짝거리며 뒤돌아보았다.
부대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물자도 제대로 공급이 안 되는 상황에서 하물며 평상시에도 쉽게 손에 넣기 힘든 술과 고기를 입에 댈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임경업 장군도 그런 부하들의 심정을 절절히 알기에 우울했던 얼굴 표정을 싹 지우고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군, 마침 배 건조 작업도 거의 다 끝난 참이니 오늘 밤엔 크게 잔치를 벌이는 게 어떻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일세.”
임경업 장군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언제 분위기가 가라앉았냐는 듯 왁!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후 몇 시간이 지나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약속대로 장 총관이 타고 온 배에 잔뜩 싣고 온 술과 고기, 그 외에 먹을 것도 다 풀어놓고 병사들이 마음껏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와아! 고기다, 고기!”
“크아! 이게 얼마 만에 먹는 술이야? 아주 입에 짝짝 달라붙는구만!”
병사들은 각자 삼삼오오 모여 입속에 술과 고기를 연신 번갈아 집어넣느라 정신없이 손을 놀렸다.
“너희들! 먹는 것도 좋지만 이게 다 대군마마의 은혜 덕분임을 잊지 마라!”
“네!”
“아무렴요. 대군마마 천세!”
이미 반쯤은 술에 취한 듯 기세 좋게 목소리를 드높이는 병사들의 대꾸에 임경업 장군도 뭐라 하지 못하고 피식 웃기만 했다.
“장군, 한잔 드시지요.”
임경업 장군을 비롯한 장수들과 장 총관은 신 나게 먹고 마시는 병사들 바로 옆에 배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목재를 모아 불을 피워 놓고는 모여 앉아 있었다.
장 총관이 권하는 술을 단숨에 들이켠 임경업 장군은 일렁이는 불꽃 너머로 흥에 겨워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병사들이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보는 나도 기분이 절로 들뜨는군.”
“군역이 힘들고 고된 일이니만큼 가끔은 이렇게 풀어 주고 놀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자네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노는 기분이 마냥 이어져선 안 돼.”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이 되면 다들 일상으로 돌아갈 겁니다. 뭐, 대군마마께서 각별히 신경 써 주신 거니 오늘은 장군께서도 아무 생각 말고 그냥 즐기시지요.”
다독거리는 장 총관의 말에 임경업 장군도 살짝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빈 술잔을 내밀었다.
“자네도 한 잔 받게. 이번엔 내가 따라 주지.”
“하하, 이거 감사합니다.”
멀리서 이름 모를 병사가 부르는 구성진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이며, 사람들은 깊어지는 잔치 분위기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이어 나갔다.
혼자 술을 다섯 병이나 비운 임경업 장군은 다음 날 늦게 한양으로 길을 떠났고, 배를 바다에 띄워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장 총관은 나흘 뒤 화포가 다 탑재되자 몽금포를 출발해 웅도로 돌아갔다.
산해관 전투
긴 겨울이 지나 생명의 기운을 머금은 새싹들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켜는 싱그러운 봄이 찾아왔지만 북방에 위치한 심양은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을 움츠리게 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관저 안은 평소와 달리 아주 부산스러웠다. 하인들은 물론이고 다른 때라면 아직 잠자리에 있을 관리들까지 의복을 다 갖춰 입고 굳은 얼굴로 나와 작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성거리고 있었다.
바로 오늘이 소현세자와 도현이 산해관을 치러 가는 청군을 따라 출정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전쟁터로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관저에서 지내는 모든 관리와 식솔들이 나와 있는 것이다.
어느새 배가 많이 불러 거동이 불편한 장씨 부인이었지만 오늘이 지나면 지아비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궁인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옷을 갈아입는 도현의 시중을 들었다.
괜히 걱정 끼칠까 봐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애써 참으며 옷고름을 묶어 주는 장씨 부인의 모습에 도현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등을 쓰다듬어 줬다.
“지난번처럼 몸 건강히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자 장씨 부인은 사슴처럼 크고 예쁜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꼭 그러셔야 됩니다.”
“내 약속하리다.”
도현은 장씨 부인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단호한 말투로 약속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했지만 스스로 봉림대군이 된 걸 받아들이고 앞에 있는 장씨를 진짜 부인으로 인정한 다음부터는 조금씩 애틋한 감정이 생겨났는데 임신 소식을 듣고 나서는 이런 마음이 더 커졌다.
관저 식솔들의 배웅을 받으며 황궁으로 간 소현세자와 도현은 성대하게 열린 출정식에 참석한 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 지휘부를 따라 원정길에 올랐다.
선봉군으로 총 이십만 대군이 투입됐는데 이 중 오만 명이 조선과 몽고에서 보낸 지원 병력이었다.
몇 년 전 청에 복속된 몽고는 무려 사만 오천이나 되는 병력을 보냈는데 유목민족답게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반해 조선군은 뿌연 먼지를 마시며 두 발로 쉴 새 없이 걸어야 되는 보병인 데다 병사들도 질이 떨어지는 속오군束伍軍 소속이었다.
속오군은 일종의 지방군대로 임진왜란 때 처음 만들어졌다.
병농일치제에 따라 속오군에 속한 인원은 평소 생업에 종사하며 가끔씩 훈련을 받다가 소집령이 떨어지면 모여서 부대를 이뤘다.
지금으로 치면 향토예비군과 같은 개념이었다.
청의 강압적인 요구에 어쩔 수 없이 파병하는 거라 정예가 아닌 전투에서 화살받이로 소모되더라도 별로 아깝지 않은 병력을 보낸 것이다.
이십만 대군은 긴 대열을 이루며 드넓은 초원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이동했다. 피워 올린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고 끝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았다.
날씨가 약간 쌀쌀했지만 이동하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고 비도 전혀 내리지 않았다.
청군이 오는 걸 명나라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걸 봐서 천혜의 요새인 산해관을 방패막이로 수성전을 펼칠 모양이었다.
젖만 떼면 바로 말을 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타고난 기병인 청군과 몽고족을 상대로 사방이 탁 트인 평지에서 전투를 벌이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일 테니 상대편의 선택도 이해가 됐다.
행군하는 동안 소현세자와 도현은 불편한 본진에서 떨어져 임경업 장군과 말을 나란히 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벌써 내일이면 산해관에 도착하네요.”
마치 시험 날을 앞둔 수험생처럼 도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하자 옆에 있던 소현세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러게 말이다.”
힐끗 고개를 돌린 소현세자는 뒤에서 따라오는 병사들을 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여기 있는 병사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 봐야죠.”
“그래야겠지만 당장 산해관에 도착하면 보병인 조선군을 먼저 앞세우지나 않을지 걱정이구나.”
“저하,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저희가 나서는 일은 없을 테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함께 있던 임경업 장군의 말에 소현세자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 거요?”
“오랜 전쟁 경험으로 산해관이 쉽게 뚫리지 않을 거라는 걸 예친왕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초반에는 노예 병단을 앞세워 상대의 힘을 빼 놓으려고 할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소현세자는 안장 위에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을 쳤다.
“아! 그렇지. 노예 병단이 있었군.”
전원 명나라 포로 출신들로 이루어진 노예 병단은 무장도 창과 나무 방패 하나로 아주 빈약했고, 평소에는 보급품을 옮기는 치중 부대로 쓰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앞에 세워 화살받이로 이용하는 일종의 소모품이었다.
노예 병단 병사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도착하자마자 조선군이 전투에 바로 투입되지 않으리라는 것에 소현세자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전투가 길어지면 언젠가는 공격에 투입될 테니 그때까지 한 명이라도 더 병사들을 살릴 수 있게 훈련을 시켜야 될 거예요.”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은 정색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임 장군.”
“예, 저하.”
“수고스럽겠지만 장군이 책임지고 병사들을 조련시켜 놓으시오.”
훈련이 부족한 조선군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임경업 장군은 소현세자의 지시에 바로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그렇게 행군을 계속한 원정군은 심양을 떠난 지 정확히 이십 일째 되는 날 산해관 성문 앞에 도착했다.
넓은 평원 끝자락에 우뚝 서 있는 산해관은 가파른 산줄기 사이에 세워져 마치 높은 벽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산해관을 소현세자와 도현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산해관을 넘으면 바로 자금성까지 밀고 내려가겠지?”
얼굴이 굳어 있는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담담한 모습으로 말했다.
“날이 풀리면 황제가 직접 후속 부대를 이끌고 온다고 하니까 이번에 명을 무너뜨리고 중원에 청국의 깃발을 꽂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고 봐야겠지요.”
“으음.”
지금 있는 병력은 선봉군이고 또다시 황제인 홍타이지가 직접 십만 명을 이끌고 오기로 되어 있었다.
병력도 엄청나지만 황제가 직접 친정親征에 나섰다는 것만으로 청나라가 지루하게 이어 온 명청 전쟁을 이번에 끝내려고 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도현의 눈에 산해관이 거센 태풍 앞에 선 등불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병력이 얼마나 많은지 다 도착하는 데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린 청군은 산해관과 마주한 벌판에 군영을 짓고 주위를 목책으로 둘러쌌다.
한편 청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요동총병인 오삼계吳三桂는 급히 집무실을 나와 성벽으로 올라갔다.
적이 오리라는 걸 몇 달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개미 떼처럼 새카맣게 몰려온 청군을 보자 오삼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으음.”
그러자 옆에 있던 좌군장 임표가 굳은 얼굴로 분통을 터트렸다.
“적이 산해관에 도착했는데 조정에서는 빨리 지원 병력을 보내 주지 않고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임표의 말에 다른 장수들도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위험을 인지하고 벌써 수차례 지원 병력을 요청했지만 한 달 전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잡군雜軍 오천 명을 보내 준 걸 제외하고 자금성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았다.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오삼계가 요동총병으로 주변 지역에서 나는 세금과 곡식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면 산해관은 벌써 무너지고 말았을 터다.
“보나 마나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는 건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겠지요.”
부관인 왕추용이 자금성에 대한 미련을 일찌감치 버렸는지 퉁명스럽게 말하자 오삼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는데 아직도 옛 영광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이곳이 무너지고 자금성이 불에 타면 그 권력도 다 부질없어진다는 걸 왜 모르는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북경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던 오삼계는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자금성에 있는 대신들이 하는 꼬락서니는 마음에 안 들지만 황제 폐하와 백성들을 위해 이곳을 무조건 사수해야 될 것이야.”
“하지만 우리만으로 이십만이 넘는 대군을 막아 낼 수 있을까요?”
압도적인 청군의 규모에 기가 죽었는지 장수 중 한 명이 약한 소리를 하자 오삼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호통쳤다.
“대명국의 장수로서 어찌 그리 허약한 소리를 하는 겐가!”
“죄, 죄송합니다.”
말을 했던 장수가 당황한 얼굴로 머리를 숙이자 오삼계는 성루 위에 모인 부하들을 쓸어 보고는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청군을 물리치고 보란 듯이 여길 지켜 낼 것이니 모두 산해관에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목숨 걸고 적과 싸우는 거야. 알겠나?”
“예, 대인.”
“다시 말하지만 절대 후퇴는 없어.”
스스로 다짐하듯 그렇게 말한 오삼계는 몸을 돌려 정면에 있는 청군 진영을 뚫어질 듯 노려봤다.
그렇게 긴장 속에 첫날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일찍 식사를 끝낸 청군은 산해관에서 사백 보쯤 떨어진 곳까지 군대를 진출시켜 진을 쳤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화려한 금장식이 들어간 갑옷을 입고 등 뒤로 길게 망토를 늘어뜨린 채 말에 올라탄 예친왕 도르곤은 심복인 야골타의 이야기에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맑고 바람 한 점 없는 것이 전쟁을 하기에 딱 좋은 날씨군. 안 그런가?”
“맞습니다.”
야골타의 말을 들으며 시익 미소를 지어 보인 예친왕은 오른손에 쥔 지휘봉을 들어 앞을 가리키면서 크게 외쳤다.
“적들에게 청국의 무서움을 보여 줘라!”
“옛!”
공격 지시가 떨어지고 얼마 있지 않아 대형 곳곳에서 전투 시작을 알리는 뿔고둥 소리가 고요한 전장을 가득 울렸다.
뿌우우웅! 뿌우우웅!
그러자 제일 앞줄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대형을 갖춘 채 앞으로 움직였다.
청군 복장을 하고 있지만 다른 병사들에 비해 옷도 허름하고 둥근 나무 방패와 창 하나만 달랑 가지고 있는 것이 따 봐도 노예 병단인 걸 알 수 있었다.
스스로 화살받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노예병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대형 뒤편에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서 있는 독전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빨리 움직여!”
“뒷걸음질 치거나 적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놈이 있으면 바로 목을 쳐 버릴 테니 알아서 해라!”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손에 든 독전대의 말에 노예병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편이었던 명나라 병사들과 싸우기 위해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절반쯤 다가갔을 때 뒤편에 방열된 청군 화포들이 불을 뿜으며 지원 사격을 해 줬다.
“발사!”
꽝! 꽝! 꽝!
슈우우우웅- 꽈아앙!
“크헉.”
“으윽.”
폭음과 함께 날아간 어린아이 머리만 한 쇠구슬이 성벽 곳곳에 떨어져 적병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포격을 신호로 속보로 걸어가던 노예병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성문을 향해 돌격했다.
“가자!”
우와아아아!
“적들이 성문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그러자 성벽 위에 대기하고 있던 명나라 궁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노예 병단을 향해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쏴라!”
슈슈슈슉! 슈슉! 슉!
수천 수백 발의 화살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오자 곳곳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오며 노예병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컥!”
“끄어억.”
각자 방패를 하나씩 들고 있었지만 쏟아지는 화살 비를 다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뒤에서 독전대가 정말로 머뭇거리는 동료를 즉결처분하며 마구 몰아붙이자 노예병들은 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성으로 달려갔다.
슈칵!
“허억.”
방패로 몸을 가린 채 꼼짝달싹 안 하는 노예병의 등을 가차 없이 검으로 베어 버린 독전대 대원은 큰 소리로 병사들을 다그쳤다.
“계속 앞으로 나가라! 멈추는 놈은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다!”
“히익.”
이런 가운데 청군에서도 상대편의 공격에 맞서 궁수대가 진형 앞으로 나와 화살을 쏘며 엄호사격을 했다.
그러자 명군의 화살 공격이 약해졌고 그 틈에 성벽 아래까지 달려간 노예병들은 끝에 밧줄이 달린 갈고리나 준비해 온 공성용 사다리를 걸치고 위로 올라갔다.
“제일 먼저 성벽 위에 올라가는 자는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고 금원보 하나를 상금으로 준다!”
지휘관의 외침에 노예병들이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성벽을 기어 올라가자 바로 명군이 반격을 해 왔다.
“어딜 기어 올라오려고!”
“이거나 먹고 뒤져라!”
창으로 노예병을 쑤시는 건 기본이고 뜨겁게 끓여 놓은 기름을 붓고 주먹보다 큰 돌을 던져 상대의 공격을 저지했다.
쏴아아아!
“뜨, 뜨거워!”
“으아아악!”
“살려 줘!”
적이 밀쳐 내는 바람에 공성용 사다리 하나가 뒤로 넘어가자 매달려 있던 노예병 다섯 명이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노예병들이 우수수 굴러떨어지면 또 그만큼의 병사들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성 주위는 양쪽 병사들이 흘린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사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예친왕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오히려 추가로 대기 중인 노예병들을 투입하며 공세를 강화했다.
채채챙! 챙! 챙!
“어서 성벽을 넘어라!”
하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보루이자 지난 수년간 청국의 중원 진출을 막아 온 난공불락의 요새답게 산해관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말 위에 앉아 전장 상황을 날카롭게 살피던 예친왕은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퇴각 명령을 내렸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화포 숫자가 늘고 병사들의 훈련 상태도 더 좋아진 것 같군.”
“오삼계가 산해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제법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입니다.”
첫 공격에 산해관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예친왕은 피해가 생겨도 부담이 적은 노예 병단을 이용해 상대편의 방어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예친왕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고삐를 당겨 진영으로 말을 돌리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이제 됐으니까 병사들을 뒤로 물려.”
“옛.”
군례를 취하며 대답한 야골타 장군이 손짓하자 한쪽에서 대기하던 신호수들이 나팔을 불어 후퇴를 알렸다.
그러자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던 노예병들은 이제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허겁지겁 성벽에서 물러났다.
썰물처럼 노예병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시뻘건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땅이 안 보일 정도로 많은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거 공략이 쉽지 않겠습니다.”
함께 전투를 지켜보던 임경업 장군이 고개를 돌리며 하는 말에 도현과 함께 서 있던 소현세자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봉림대군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이번에야말로 대업을 이루기 위해 청나라가 대군을 일으켰지만 결국 산해관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군대를 물린다는 걸 알고 있는 도현은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명나라뿐 아니라 대륙에 통일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북방 외적들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 왔는데 쉽게 뚫리겠습니까.”
“하긴…….”
수긍하는 표정을 짓는 소현세자를 보며 도현이 말을 이었다.
“오늘 전투는 이걸로 마무리 지을 것 같으니 이제 그만 군영으로 돌아가죠.”
퇴각 신호를 듣고 무질서하게 뒤로 물러서는 노예병들을 힐끗 쳐다본 소현세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가벼운 탐색전으로 첫날 전투를 끝낸 청군은 쉴 새 없이 산해관을 두드려 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어찌 된 일인지 다음 날부터 거북이처럼 잔뜩 웅크린 채 가만히 있었다.
이러자 명군이 오히려 더 불안해졌는데 차라리 공격해 오는 것이 낫지 너무 조용하자 상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 초조하고 갈수록 긴장감이 높아졌다.
“오늘도 움직임이 없어?”
성루로 올라온 오삼계의 물음에 장수 하나가 군례를 취하며 바로 대답했다.
“예, 장군.”
“저러고 있는 것이 며칠째지?”
“나흘 됐습니다.”
정면에 위치한 청군 진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오삼계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뭔가 있는데 도통 짐작이 안 되니 미치겠군.”
“적병들이 왼편에 있는 숲을 자주 들락거리는 걸 보면 혹시 공성 병기를 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일리 있는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흔한 공성탑 하나 보이지 않잖아.”
“그렇군요.”
한 손으로 성벽을 짚고 청군 진영을 가만히 응시하던 오삼계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부관.”
“말씀하십시오.”
“별동대를 이삼십 명 뽑아서 오늘 밤 적진을 살펴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오삼계는 굳은 얼굴로 성루에 서 있었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가능한 한 접전을 피하고 적이 무슨 꼼수를 부리고 있는지만 알아 오라고 했지.”
“예.”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오삼계는 멀리 화톳불이 군데군데 피워져 있어 환한 청군 진영을 보고는 무겁게 말했다.
“좋아. 그럼 내보내.”
“옛.”
부관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일단의 병사들이 성문 옆에 작게 나 있는 쪽문을 열고 몰래 성 밖으로 나갔다.
달빛에 반사가 될까 봐 검날과 얼굴에 검댕을 칠한 별동대 병사들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적진으로 접근했다.
바닥에는 첫날 전투에서 죽은 시신이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퍼석!
“쉿!”
지휘관이 인상을 굳히며 노려보자 발을 헛디뎌 소리를 낸 병사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조심해.”
“네.”
자세를 낮춘 지휘관은 턱으로 왼편에 보이는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숲부터 살펴본다. 들키지 않게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수상한 것이 있으면 바로 말해. 알겠지?”
“예.”
“가자.”
숲에 들어가자 진영에서 약간 떨어진 곳인데도 청군 병사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군데군데 경비를 서고 있었다.
“확실히 이상하군.”
“백부장님, 저길 보십시오.”
부하의 말에 시선을 옆으로 돌린 지휘관은 오십 보쯤 떨어진 곳에 족히 천여 명은 넘을 적병들이 개미처럼 굴속을 들락거리며 흙을 나르고 있는 걸 발견하고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끄으응. 어쩐지 조용하다 했더니 성문을 무너뜨리려고 두더지처럼 굴을 파고 있었군.”
“옆에 쌓여 있는 흙무더기를 볼 때 이미 상당한 길이를 판 모양입니다.”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자 굴 옆에는 커다란 왕릉처럼 생긴 흙무더기가 여섯 개나 보였다.
나무들과 산해관 방향에 있는 작은 언덕이 절묘하게 시선을 가려 몰래 굴을 파는 걸 명군에 감출 수 있었다.
“이제 어쩌지요?”
“이 사실을 빨리 아군에 알려야지.”
돌아가려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순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경비가 있었는지 어둠 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구냐!”
“이런. 들켰다. 튀어!”
지휘관은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부하들과 함께 성 쪽으로 달아났다.
“저기 있다!”
“잡아라.”
여기저기에서 횃불을 든 청군 병사들이 몰려오고 설상가상으로 한 무리의 적들이 정면을 막고 있자 별동대는 어쩔 수 없이 길을 우회했다.
잠이 오지 않아 호위와 함께 진영 주변을 산책하고 있던 도현은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병사들이 허겁지겁 무장을 챙겨 들고 숲 쪽으로 달려가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김덕술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지나가던 병사를 하나 붙잡고 물었다.
“적이 야습이라도 해 온 거야?”
그러자 장비처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청군 병사는 귀찮다는 듯이 이야기를 해 주고는 동료들을 쫓아갔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고 숲 쪽에 침입자가 있는 모양이오.”
말을 들은 도현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저기는 땅굴을 파고 있는 곳이잖아?”
“맞습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마마, 여긴 위험하니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궁금했지만 괜히 싸움에 말려들 수도 있기에 도현은 순순히 김덕술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숙소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던 도현은 일단의 수상한 무리가 다급히 이쪽으로 뛰어오는 걸 보고 굳은 얼굴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아무래도 오늘 밤은 조용히 보내기 틀린 것 같군.”
“예?”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현이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김덕술은 그제야 적을 발견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 뒤로 오십시오.”
김덕술의 말에 도현은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배운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나도 한 칼 하는 거 알잖아.”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됐어. 그리고 내가 피한다고 해도 저쪽은 여덟 명인데 김 위사 혼자 감당할 수 없잖아.”
도망치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졌는데 도현과 맞닥뜨린 적은 지휘관인 백부장이 포함된 무리였다.
살기를 뿌리며 서 있는 상대를 쳐다본 김덕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후우. 좋습니다. 대신 조심하셔야 됩니다.”
“염려 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도현이 중단 자세를 잡자 상대편 지휘관은 한쪽 볼을 실룩이고는 차갑게 말했다.
“죽여!”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들은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채챙! 챙! 챙!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날아오는 네 개의 검을 모두 쳐 낸 도현은 공격을 하느라 제일 오른쪽에 있던 상대의 옆구리가 비어 있는 걸 놓치지 않고 곧장 수평 베기를 펼쳤다.
슈각!
“크흑.”
길게 베인 옆구리에서 시뻘건 피와 함께 창자가 쏟아져 내렸다.
부상당한 상대의 가슴을 걷어차서 쓰러뜨린 도현은 섬뜩한 느낌에 상체를 살짝 옆으로 틀어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는 검을 피했다.
스치고 지나가는 검풍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간발의 차이였다.
쉬이익.
그러자 용수철처럼 튕기듯 앞으로 나와 거리를 좁힌 도현은 검을 있는 힘껏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이익.”
당황한 적이 황급히 검을 들어 공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것보다 도현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으아악!”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은 목 부위를 정확히 파고든 도현의 검은 상대를 일격에 죽여 버렸다.
순식간에 부하 두 명이 목숨을 잃자 지휘관은 이를 부드득 갈며 도현에게 덤벼들었다.
“이놈! 죽여 버리겠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백인대장인 지휘관은 앞서 상대한 두 명과 달리 제법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부하를 잃었다는 분노와 언제 청군 병사들이 몰려올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싸움을 빨리 끝내려고 급하게 도현을 몰아붙였다.
반면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던 도현은 수비에 치중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지휘관은 무리수를 뒀다.
빈틈을 노리고 내지르는 도현의 검을 무시한 채 그의 가슴을 마주 찌른 것이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육참골단肉斬骨斷의 수법.
도현은 찔려도 부상만 입는 어깨를 노린 반면 상대는 그대로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심장으로 검 끝이 향했다.
갑옷이라도 입고 있다면 피해가 덜하겠지만 산책을 나온 길이라 가벼운 무복만 입고 있던 도현은 검에 찔리면 잘해야 중상이었다.
하는 수없이 뒷걸음질을 치며 상대편 공격을 쳐 내려고 검을 맞댔다.
하지만 상대는 힘으로 밀고 들어왔고 결국 가슴 부위의 옷이 살짝 찢어지며 상처를 입었다.
“젠장!”
도현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고 바로 반격을 가했다. 팽이처럼 몸을 핑그르르 한 바퀴 돌려 왼쪽 팔꿈치로 상대의 안면을 세게 가격했다.
빠각!
“끄억.”
절묘하게 빈틈을 파고든 공격에 제대로 얻어맞은 상대는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를 뿌리며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히익.”
믿었던 지휘관까지 당하자 혼자 남은 적은 싸우는 걸 포기하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소란을 듣고 몰려온 청군 병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검을 손에 쥔 채 거칠어진 숨을 고르자 어느새 상대하던 적병 네 명을 깔끔하게 처리한 김덕술이 옆으로 다가왔다.
“다치셨습니까?”
걱정이 가득한 김덕술의 물음에 도현은 왼손으로 상처 부위를 스윽 닦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냥 살짝 스친 거야.”
“피가 나오는 걸 보면 상처가 깊은 것 같습니다.”
“괜찮대도.”
“그래도 혹시 놈들이 무기에 독이라도 발라 놨는지 모르고 상처가 덧날 수도 있으니까 의원한테 가서 치료를 받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김덕술이 호들갑을 떨자 도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졌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후우, 알았어.”
“어서 가시죠.”
상처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여기 계속 남아 있다가 또 싸움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염려한 김덕술의 재촉에 도현은 자신이 죽인 적들을 스윽 쓸어 보고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별동대는 청군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냈지만 경계망에 걸려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결국 명군은 작전에 실패했지만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행여나 일을 벌이기 전에 명군이 땅굴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청군 지휘부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조금 따끔하실 겁니다.”
작은 사기그릇에 온갖 약재를 넣고 찧은 걸 상처 부위에 골고루 바른 의원은 깨끗한 붕대로 가슴을 여러 차례 감아 단단히 묶어 줬다.
색깔이 거무튀튀한 것이 보기에는 영 별로지만 효과는 좋은지 약을 바르자마자 잠시 따끔거리더니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당분간 격렬한 운동은 하지 마십시오.”
“장담은 못 하지만 노력해 보지.”
도현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칠현이 새 무복 윗도리를 건넸다.
“바깥 분위기는 어때?”
질문을 받은 칠현은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얼른 대답했다.
“땅굴 근처에 명군이 침투한 것 때문에 지휘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예친왕이 비상 회의를 소집해서 임 장군님과 세자 저하께서도 불려갔습니다.”
“까딱했다가는 그동안 준비한 일이 다 수포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이번 일로 괜히 우리한테까지 피해가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치료 도구를 다 챙긴 의원이 꾸벅 인사하고 천막을 나가자 도현은 탁자 위에 올려 둔 검을 뽑아 깨끗한 헝겊으로 날에 묻어 있는 피를 직접 닦아 냈다.
그때 입구를 가린 휘장에 젖혀지며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이 들어왔다.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괜찮은 거냐?”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태를 물어보는 소현세자의 모습에 도현은 닦고 있던 검을 집어넣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정말이냐?”
못 미더운지 재차 물어보자 도현은 양팔을 크게 움직여 보이며 말했다.
“보세요.”
“그럼 다행이구나. 네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다고.”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걸 알면 앞으로는 더 조심해. 알겠지?”
“예.”
말투와 행동에서 도현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소현세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어딜 가시든 호위를 충분히 데리고 다니십시오.”
“그래. 이번에는 잘 넘겼지만 다음에 또 운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지. 무예를 조금 배웠다고 그걸 과신하면 안 돼.”
어디 갈 때마다 호위와 시중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이 귀찮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도현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네.”
“신 위사장, 말이 나온 김에 봉림대군한테 새로 위사 세 명을 더 붙여서 호위를 전담시키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소현세자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 도현은 두 사람한테 자리를 권했다.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러자꾸나.”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칠현이 잽싸게 차를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놨다.
“예친왕이 불러서 지휘 천막에 가셨다면서요?”
그러자 소현세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야기를 했다.
“안 그래도 말을 해 주려고 했는데 내일부터 우리 조선군도 땅굴 굴착 작업에 투입하게 됐다.”
“아니, 갑자기 왜요?”
“땅굴 주변에 적이 나타난 것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러지. 명군이 눈치채고 대비하기 전에 작업을 빨리 끝내라는 거야.”
예친왕의 마음은 이해가 됐지만 뭐든지 급하게 처리해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도현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병사들이 고생을 하겠군요.”
“그래도 지금까지 해 놓은 것이 있어서 하루 이틀만 더 작업하면 땅굴을 다 팔 수 있다니 다행이지.”
“그렇게나 빨리요?”
현대처럼 기계의 힘으로 움직이는 중장비도 없는데 단 며칠 사이에 백 장이나 되는 땅굴을 뚫는다는 이야기에 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자 옆에 있던 임경업 장군이 궁금증을 풀어 줬다.
“저희 말고도 몽고군 만 명이 작업에 투입돼서 주야 교대로 쉬지 않고 일을 할 겁니다.”
“아…….”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도현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기존에 땅굴을 파고 있는 인원이 오천 명이고 거기다가 추가로 투입되는 조선군과 몽고군을 합치면 무려 이만 명이나 된다.
완전히 쪽수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무식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물론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만큼 들킬 가능성도 컸지만 이만 명이 개미 떼처럼 붙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땅굴을 판다면 충분히 이틀 안에 작업을 끝낼 수 있다.
“힘이야 들겠지만 대신 공성전을 벌일 때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게 어디냐.”
“맞습니다.”
전공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청군 지휘부의 꼼수였지만 최대한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네요.”
“아무튼 그렇게 알고 넌 당분간 움직이지 말고 상처 치료하는 데 전념해라.”
“괜찮다니까요.”
“어허! 또 그런다.”
평소와 달리 소현세자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고 임경업 장군도 옆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권했다.
“당분간은 전투에 나설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세자 저하 말씀대로 하십시오.”
“끄으응. 알았어요.”
앓는 소리를 내며 도현이 대답하자 소현세자는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야지. 그럼 우린 이만 가 볼 테니 몸조리 잘하고 있어라.”
“벌써 가시게요?”
“오늘 새벽부터 당장 병사들을 작업에 투입하라고 해서 챙겨야 할 일이 많구나.”
그런 일은 임경업 장군이나 휘하에 있는 장수들한테 맡겨도 되지만 꼼꼼하고 인자한 성품을 가진 소현세자는 하루만이라도 고생할 병사들과 함께하며 다독여 주려는 것이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하하하! 걱정 마라.”
호탕하게 웃어 보인 소현세자는 임경업 장군과 같이 천막을 나갔다.
다시 의자에 앉은 도현은 팔짱을 낀 채 이맛살을 약간 찡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땅굴이라……. 제대로 성공만 하면 견고한 산해관 성문을 단번에 날려 버릴 텐데. 이게 실제 역사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 역사 학도였지만 그렇다고 명과 청 사이에 있었던 전쟁을 모두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청이 몇 번이나 대군을 동원해 산해관을 공격했지만 끝내 열리지 않았다는 건 알았는데 지금 예친왕이 진행하는 작전이 성공한다면 자신이 아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컸다.
한마디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다.
이게 자신의 존재로 인해 나비 효과처럼 역사가 조금씩 틀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지 도현은 불안했다.
만약 그렇다면 앞일을 다 알고 있다는 도현의 가장 큰 무기가 사라진다는 뜻이었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예친왕의 지시에 따라 새로 만 오천 명이 더 투입되자 땅굴을 파는 작업은 아주 빠르게 진행됐다.
수시로 예친왕과 청군 장수들이 찾아와 독촉을 해 댔기에 병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어두운 땅속에 들어가 굴을 파야 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상당한 양의 흙이 나왔고 그걸 그냥 쌓아 두면 땅굴을 파고 있는 걸 명군이 눈치챌 수도 있었기에 예친왕이 묘책을 냈다.
바로 청군이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진영 주변에 토벽을 쌓는 것처럼 위장해 흙을 처리한 것이다.
단순한 눈가림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해서 땅굴을 파면서 나온 흙을 대놓고 보여 주는데도 상대는 전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뭔가 수상하다는 걸 감지하겠지만 어차피 이틀 안에 끝을 보려는 상황이었기에 그때까지 들키지 않으면 상관없었다.
그렇게 병사들을 몰아붙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계속한 끝에 청군은 원하는 거리만큼 땅굴을 뚫는 데 성공했다.
“이백구십칠, 이백구십팔, 이백구십구, 삼백…….”
정확한 측정을 위해 차출된 병사 하나가 실타래 끝을 잡고 한 걸음씩 신중하게 수를 세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거리가 표시된 실타래는 삼백 보를 넘기고 나서도 한참을 더 풀린 다음에 멈췄다.
이 사실을 병사가 보고하자 용골대가 직접 거리 측정을 보러 나온 예친왕을 돌아보며 약간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삼백이십 보입니다, 전하.”
“그럼 성문 밑까지 정확히 도착했다는 뜻이군.”
“예. 오차를 고려하더라도 이 정도면 틀림없습니다.”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린 예친왕은 땅굴 작업을 감독한 책임자인 이유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방향이 틀어졌다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작업을 하면서도 제가 몇 번이나 확인을 했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목숨으로 죄를 치러야 될 거야.”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전하 앞에서 직접 자결을 해서 용서를 빌겠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에 예친왕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길게 끌 것 없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산해관을 칠 테니까 성문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게 준비를 철저히 해 둬.”
“옛.”
수고했다는 듯이 이유정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준 예친왕이 휘하 장수들과 함께 지휘 막사로 돌아갔다.
격려를 받고 잔뜩 고무된 이유정은 부하들을 다그치며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다들 들었지?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 어서 화약 설치 작업을 해!”
“알겠습니다.”
잠시 뒤 병사들은 짐마차에 실려 있던 나무 상자를 두 사람이 하나씩 들고 조심스럽게 땅굴 안으로 옮겼다.
“실수해서 터지면 끝장이니까 조심해서 다뤄!”
“예.”
병사들이 옮기는 상자에는 화약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무려 마흔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이걸 한꺼번에 폭발시킨다면 아무리 견고하게 쌓아 올린 산해관 성문이라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목까지 걸고 장담한 만큼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안 되기에 이유정은 여기에 화약 상자를 다섯 개나 더 가져와 설치했다.
순식간에 동굴 안은 화약 상자로 가득 찼고 폭발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다섯 개나 되는 심지 길이를 조정해 격발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예친왕이 지시한 대로 이레 만에 청군은 긴 침묵을 깨고 진영을 나와 산해관 앞에 대형을 갖추고 늘어섰다.
청군의 움직임을 보고받고 황급히 성루로 달려온 오삼계는 정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적병들의 모습에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뭘 꾸미고 있는지 계속 걱정만 하다가 이렇게 전투가 벌어지자 차라리 속은 편해졌다.
“당장 비상종을 울리고 병사들을 모두 대기시켜!”
“예, 장군.”
땡땡땡! 땡땡땡!
비상종 소리와 함께 막사에서 쉬고 있던 병사들까지 모두 다 몰려나와 각자 맡은 위치로 달려갔다.
그렇게 첫 전투 이후 한동안 조용하던 전장은 다시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말에 올라탄 예친왕은 성벽 밑에서도 훤히 보이는 명나라 병사들의 당황스러운 움직임에 냉소를 흘렸다.
“오늘에야말로 산해관을 무너뜨리고 북경으로 진격할 수 있겠군.”
그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지시를 내렸다.
“시작하라고 해.”
“예.”
대답과 함께 용골대가 손짓하자 사방에서 잘 보이도록 목재로 지은 망루 위에 올라가 있던 신호수가 붉은색 삼각 깃발을 들고 크게 좌우로 흔들었다.
설치한 화약을 폭파시키라는 신호였다.
예친왕이 있는 본진이 아니라 소현세자와 같이 대형 왼편에 위치한 조선군 진영에 있던 도현은 그걸 보고 약간 복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시작이군요.”
“그렇구나.”
“이대로 성문을 허물어뜨린다면 그동안 청군의 침입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해 온 산해관이 점령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임경업 장군의 말에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도현도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찌 됐든 지금 우린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래.”
이렇게 세 사람이 초조한 얼굴로 산해관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오늘 전투의 승패를 틀어쥔 이유정은 초조한 얼굴로 땅굴 앞에 서 있었다.
“신호가 떴습니다.”
“확실해?”
“예. 망루에 적색 삼각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부관의 말에 이유정은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약간 굳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심지에 불을 붙여라!”
“옛.”
그러자 횃불을 들고 있던 십부장 하나가 지체 없이 땅굴 안으로 길게 이어진 심지 끝에 불을 붙였다.
치이이이익!
기름을 잔뜩 먹인 심지는 빠르게 타들어 갔고 불이 제대로 붙은 걸 확인한 이유정과 병사들은 곧 있을 폭발 충격을 피해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땅굴 길이가 삼백 보나 됐기에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엄청난 폭음이 울리면서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크게 흔들렸다.
콰아아앙!
귀청이 나갈 정도로 커다란 폭음과 함께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라 순식간에 산해관을 뒤덮었다.
느닷없는 대폭발에 처음에는 깜짝 놀라 주춤거리거나 바닥에 엉덩이를 찧으며 주저앉았던 청군 병사들은 이내 그동안 지휘부가 산해관 성문을 깨기 위해 준비한 작전이라는 걸 알고는 주위가 떠나가라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
본진에 있던 지휘부도 기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몇 번이나 산해관을 넘지 못해 좌절을 맛봤던 예친왕은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보십시오. 화약이 제대로 터졌습니다.”
“하하하! 이제 산해관도 끝장입니다.”
“아직은 아니야. 먼지가 가라앉자마자 적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몰아붙여서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게 돌격 준비를 시켜 둬.”
“예.”
최고 지휘관답게 애써 침착한 태도를 보이며 휘하 장수들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예친왕도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이런 청군의 흥분과 환호는 시간이 지나 먼지가 가라앉으며 뿌옇게 가려져 있던 산해관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거짓말처럼 싹 사라지고 대신 탄식으로 바뀌었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처참하게 무너져 있어야 될 산해관 성문이 웅장하고 위압감 넘치는 모습 그대로 우뚝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피해가 완전히 없는 건 아니었다. 폭발 충격에 기와가 떨어져 깨졌고 성문 위에 있던 장졸들이 온통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걸 제외하고 성문은 건재한 모습을 과시하며 서 있어 청군 병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거리는 맞았지만 급하게 서둘러 작업을 하는 바람에 방향이 살짝 틀어진 땅굴은 성문이 아니라 왼쪽에 있는 망루를 날려 버린 것이다.
그나마도 위치가 성 바깥쪽에 치우쳐서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아무튼 수백 근에 달하는 화약을 일시에 터트리는 충격에 단단한 바위를 써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망루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면서 성벽에 십 장이나 되는 구멍이 뚫렸다.
“으윽…….”
“괜찮으십니까?”
폭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오삼계는 부관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무의식중에 피해 상황을 살피기 위해 시선을 돌리던 그는 왼편에 있던 망루가 무너져 내린 걸 발견하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젠장! 계속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더니 두더지 새끼처럼 땅굴을 파고 있었군.”
“성벽이 박살 났으니 큰일입니다.”
“당장 예비대를 모두 동원해서 무너진 곳을 막으라고 해. 어서!”
“옛.”
짧게 대답한 부관은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급히 뒤편에 있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 그대로 두 팔로 성벽을 짚고 선 오삼계는 청군 진영을 노려보고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곧 놈들이 쳐들어올 거다. 정신들 바짝 차리고 각자 위치에 서라!”
오삼계의 명령에 병사들은 무기를 챙겨 들고 전투에 대비했지만 폭발의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지 행동이 굼떴다.
한편 계획대로 성벽 일부를 무너뜨리기는 했지만 원하던 결과를 내지 못하자 예친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분노가 피어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글쎄요.”
“아무래도 땅굴의 위치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런 멍청한 것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굴이 야차처럼 변한 예친왕의 모습에 휘하 장수들은 괜히 불똥이 자신들한테 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땅굴 작업을 맡은 놈을 잡아 와 목을 쳐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고 성에 차지는 않아도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산해관을 함락시킬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졌기에 예친왕은 애써 화를 눌렀다.
그는 시선을 계속 정면에 고정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 장군.”
“하교하십시오.”
“당장 돌격 명령을 내려.”
“예? 아, 알겠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던 용골대는 이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잠시 뒤 공격을 알리는 뿔나팔과 북소리가 울렸고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뿌우우웅! 뿌우우웅!
“공격!”
우와아아!
단번에 결판을 내려는 듯 무려 오만 명이 넘는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했고 병장기와 깃발을 손에 든 병사들이 거센 파도가 되어 산해관에 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미리 방열해 둔 홍이포 수십 문도 일제히 불을 뿜으며 돌격하는 병사들을 지원해 줬다.
“발사!”
꽝! 꽝! 꽝!
슈우우웅- 꽈꽝!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온 수십 발의 포탄은 성벽 여기저기에 떨어져 내리며 아까 있었던 폭발의 충격에서 다 벗어나지 못한 명군 병사들을 괴롭혔다.
“으아악!”
“크흑.”
포격에 당해 부하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모습에 오삼계는 분통을 터트리며 고함을 질렀다.
“아군 포대는 어서 반격하지 않고 뭘 하는 거야!”
그러자 오삼계의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성벽과 망루에 설치되어 있던 명군 홍이포 포대가 하나 둘 포탄을 날리며 반격에 나섰다.
바로 이어서 궁수들도 화살을 날려 청군의 접근을 저지했다.
보이는 것이 다 적병이었기에 조준할 필요도 없이 막 쏘면 되지만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포격과 화살 세례에도 청군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돌격해 왔다.
그들의 목표는 성문이 아니라 망루가 무너지면서 틈이 생겨 버린 지점이었다.
상대가 노리는 것이 뭔지 명군도 알고 있었기에 예비대를 총동원해 무너진 곳에 투입했다.
척척척!
“적들이 오기 전에 어서 대형을 갖춰라!”
급히 달려온 병사들은 좌군장인 임표의 지시에 따라 줄을 맞춰 섰다.
망루가 무너지면서 성인 남자 키만 한 돌무더기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위에 올라선 병사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긴장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벽이라는 든든한 방패막이도 없이 이제부터 사납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청군과 온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상황에 갑자기 내던져졌으니 침착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특히나 제일 앞줄에 선 병사들은 정면에서 엄청난 수의 적병들이 병장기를 들고 무섭게 달려오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기랄! 이게 뭔 일이야.”
“어제 꿈자리가 사납더니만.”
“잡담들 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백인장의 호통에 병사들은 입을 다물고 손에 든 방패를 고쳐 잡았다.
적군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좌군장 임표는 예비대 중에서도 가장 힘이 좋고 무장이 충실해 아껴 둔 일 대를 방어에 투입했다.
“우리가 뚫리면 산해관이 함락된다. 모두 결사의 각오로 자리를 지켜라!”
“옛!”
병사들의 우렁찬 대답을 들으면서 임표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포격과 화살 비를 뚫고 성 앞까지 접근한 청군이 그 기세 그대로 달려왔고 임표는 그걸 노려보며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온다!”
이윽고 청군이 거센 해일처럼 덮쳐 왔다.
콰콰쾅!
“으아악!”
“크흑.”
비명과 함께 뭔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음이 터져 나오며 양군이 강하게 충돌했다.
“버텨라!”
왼팔에 두꺼운 방패를 끼고 다른 손에는 날카롭게 벼린 검을 든 명군은 양다리에 힘을 꽉 주며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는 적군에 맞섰다.
양군이 부딪친 지점에서는 서로 뒤엉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채챙! 챙! 챙!
“죽어!”
“사, 살려 줘.”
“끄어억.”
여기저기서 아우성과 비명이 속출했고 바닥은 어느새 병사들이 흘린 피로 질척거렸다.
상대가 쑤신 창에 찔린 동료가 쓰러지면 뒤에 있던 병사가 금방 그 자리를 메우면서 명군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익! 죽어라, 오랑캐 놈아!”
“너나 뒤져라!”
“계속 밀어붙여!”
악을 쓰며 마구 다그치는 장수의 독려에 청군 병사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상대의 방진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피해가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청군은 상대가 막고 있는 곳을 돌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덤벼들었다.
찌르고 베며 사방에 피가 튀었지만 청군은 악착같이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명군도 이를 악물고 막아 냈다.
그렇게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면서도 허물어진 부분은 돌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좁은 곳에 병력이 몰리다 보니 청군은 수적 우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러자 청군은 작전을 바꿔 무너진 곳을 공격하는 동시에 성문도 함께 두들겼다.
성벽에 걸쳐진 공성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도끼로 성문을 찍어서 부수는 등 그야말로 파상 공세를 펼쳤다.
명군도 지지 않고 끓인 기름을 쏟아붓고 돌을 아래로 던지면서 방어전을 펼쳤다.
“이거나 먹고 꺼져라!”
휘이익.
퍼억!
“컥.”
성벽을 반쯤 올라온 청군 병사는 위에서 떨어뜨린 돌에 머리를 얻어맞고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성문 앞에 몰려 있던 병사들은 펄펄 끓인 기름을 뒤집어쓰고 몸부림을 쳤다.
쏴아아아!
“뜨, 뜨거워.”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서 공격을 막아!”
장수의 고함에 병사들은 허겁지겁 방패를 들어 지붕을 만들어서 명군의 공격을 막고는 도끼를 가진 도부수刀斧手 수십 명을 동원해 성문을 마구 찍어 댔다.
두껍고 단단한 목재에 얇은 철판까지 입혀 특별히 강화한 성문이었지만 계속되는 도끼질에 조금씩 부서졌다.
꽝! 꽝!
“조금 더 힘을 내서 도끼를 휘둘러라!”
그러자 성문 뒤에 있던 명군 장수가 얼굴을 구기면서 소리를 질렀다.
“목재를 더 가져와서 빨리 성문을 보강해!”
“옛.”
가뜩이나 성벽 일부가 무너진 상황에서 성문까지 뚫리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라는 걸 명군 병사들도 알고 있기에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가 한쪽에 쌓아 둔 아름드리나무 목재를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그걸로 지지대를 세우고 부서져 벌어지는 곳이 있으면 바로바로 널빤지를 가져와 막았지만 이 상태라면 얼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성루에서 전황을 살피던 오삼계는 그걸 보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성문이 위험합니다.”
부관의 다급한 보고에 미간을 찌푸린 오삼계는 지체 없이 명령을 내렸다.
“벌써 쓰기에는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준비해 놓은 흑수黑水를 써서 놈들을 모조리 태워 버리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일단의 병사들이 시커먼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들통을 하나씩 가지고 성문 위로 올라와서는 아래로 쏟아 버리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하고 토할 것 같은 냄새까지 풍기는 검은 액체는 명나라 병사들이 머리 위로 들고 있는 방패를 흥건히 적셨다.
“으윽. 이게 뭔 냄새야?”
“새끼들이 오물 뿌린 거 아냐.”
“이 자식들! 성문만 열리면 다 아작을 내 버리겠어.”
방패 틈 사이로 흘러내린 검은색 액체를 보고 청군 병사들은 잠시 뒤 무슨 일이 닥칠지 상상도 못 한 채 투덜거리며 빨리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바닥이 질척질척해질 정도로 정체불명의 액체를 뿌린 명군은 거북이처럼 방패를 올리고 있는 적을 향해 횃불을 집어 던졌다.
휘이익.
화르르륵!
그러자 갑자기 엄청난 불길이 솟아나 성문 앞에 몰려 있던 청군 병사들을 몽땅 다 집어삼켰다.
명군이 뿌린 흑수의 정체는 바로 만주 일대에서 가끔씩 발견되는 죽음의 물, 즉 원유였다.
기름보다 몇 배나 더 센 화력과 한번 몸에 묻으면 잘 씻기지 않는다는 성질을 우연히 알게 된 오삼계가 위기의 순간에 화공을 펼치려고 준비한 비장의 수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흑수가 방패와 옷에 묻는데도 털어 내지 않고 그냥 놔둔 청군 병사들은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온몸에 불이 붙었다.
불길은 모든 걸 태워 버리려는 듯 덩치를 키웠고 그 속에 갇힌 청군 병사들은 숯덩이가 되어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온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옆으로 튀어나와 땅바닥을 마구 굴러 댔지만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살을 태웠다.
“끄아악.”
“사람 살려!”
불길이 얼마나 센지 높은 성루 위에 서 있는 오삼계도 후끈한 열기와 살 타는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다.
시뻘건 화염과 함께 성문을 두들기던 병사 수백 명이 한순간에 불쏘시개가 되어 사라지자 본진에서 이를 지켜보던 예친왕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젠장할! 뭐하는 거야. 어서 병력을 더 투입해서 저것들을 다 쓸어버려.”
“아, 예.”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용골대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망루에 올라가 있는 신호수가 깃발을 흔들자 대기하던 몽고족 병력이 앞으로 나서 전투에 가세했지만 산해관은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도현이 있는 조선군 지휘부도 의외로 선전을 펼치며 공격을 잘 막아 내는 명군의 모습에 감탄성을 터트렸다.
“뭘 썼는지 모르지만 성문에 몰려 있던 병력을 한 번에 다 태워 죽이다니 명군도 대단하군요.”
도현을 만나고 나서 명을 무조건 떠받치는 생각을 많이 고쳤지만 그래도 청보다는 명에 더 마음이 가던 임경업 장군이 고소하다는 듯이 말하자 옆에 있던 소현세자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오. 이거 잘하면 청군이 패할 수도 있겠소이다.”
다른 눈이 있어 티 나게 좋아하지는 못해도 쌤통이라는 표정을 짓는 두 사람과 달리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
“잘 생각해 보세요. 오늘 전투가 이대로 끝나고 싸움이 장기화되면 필연적으로 우리도 저 아수라장에 투입되지 않겠어요?”
도현의 말에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린 두 사람은 미소를 지우며 얼굴을 굳혔다.
“그렇구나.”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려는 조선군 입장에서 공성전이 길게 이어지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이야기 때문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도현은 양쪽 어깨를 으쓱이고는 일부러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뭐, 그래도 일단은 산해관이 무너지지 않고 명국이 계속 건재하면 청도 우리 조선을 너무 심하게 핍박하지는 못할 테니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임경업 장군이 얼른 동의하자 소현세자는 한창 전투가 진행 중인 산해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건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서로 호응하지 않으면 똑같이 망하거나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 명과 조선이 처한 상황에 빗대기에는 조금 틀린 점이 있었지만 명이 멸망하고 청국이 대륙을 지배하게 되면 현재보다 조선의 위치가 더 어려워지는 건 틀림없었다.
소현세자의 말에 도현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를 천천히 되새겨 보며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이익인지 고심했다.
굳이 역사를 알지 않더라도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청이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우뚝 서는 건 시간문제, 지금이라도 명보다는 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권력을 쥔 사대부 대다수가 벌써 이자까지 배로 쳐서 갚았을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거론하며 하늘같이 명을 떠받들고 있었기에 도현이 조금이라도 청과 친하게 지내려는 낌새가 보이면 당장 온갖 비난이 빗발칠 것이 분명했다.
특히나 아버지인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 조씨가 소현세자와 자신을 끌어내리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치고 들어올 수 있는 틈을 보이는 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상황에 살짝 짜증이 난 도현은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음 편히 움직이려면 한양에 있는 여우부터 처리해야겠어.”
“응? 방금 뭐라고 했느냐?”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입으로 튀어나온 도현은 소현세자가 고개를 돌리며 쳐다보자 약간 당황한 얼굴로 한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의아한 표정을 짓던 소현세자가 이내 신경을 끄고 다시 전장에 집중하자 도현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됐지만 청군은 처음 땅굴을 폭발시켰을 때만 해도 금방 함락시킬 것 같았던 산해관 성문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전하, 더 이상은 무립니다. 일단 병사들을 뒤로 물려 재정비를 한 다음에 내일 다시 공성전을 펼치시지요.”
용골대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예친왕은 핏발이 선 눈으로 호통을 쳤다.
“이대로 꼬리를 말고 물러서자는 거야!”
찔끔했지만 이 자리에서 화가 난 예친왕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자신뿐이었기에 용골대는 애써 용기를 냈다.
“그게 아니라 병사들이 치쳤기에 잠시 휴식을 취하자는 겁니다.”
“이익…….”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명군을 계속 몰아붙여 승부를 보고 싶었지만 이미 피해가 크고 야간전투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 시점에서는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걸 알고 있었지만 분한 마음에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예친왕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산해관을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병력을 뒤로 물려.”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나는지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살짝 흘러내렸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 봐 용골대는 서둘러 신호수에게 손짓했고 잠시 뒤 청군 본진에서 후퇴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둥! 둥! 둥!
그러자 격렬한 싸움을 벌이던 병사들은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공격을 멈추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아슬아슬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며 성을 지켜 낸 명군은 무수히 많은 시체를 남기고 돌아가는 적군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 우리가 이겼다.”
“이 오랑캐 놈들아! 어디 한번 또 덤벼 봐라!”
“다시 오면 아주 개박살을 내 주마!”
“하하하!”
성루 위까지 기어 올라온 적병을 상대하느라 갑옷 여기저기에 피가 묻은 오삼계는 병사들이 소리치는 걸 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겨우 버텨 냈군.”
그러자 오삼계 못지않게 갑옷이 더럽혀진 부관이 어디서 났는지 시원한 물을 한 대접 건네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고맙군.”
벌컥벌컥 냉수를 다 들이켠 오삼계는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고는 폭발에 무너진 망루를 바라봤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예. 놈들이 땅굴을 잘못 파서 다행이지 화약이 성문 아래에서 터졌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성문이 박살 나는 것도 큰 충격이었을 테지만 그것보다 더 치명적인 건 오삼계를 비롯한 명군 지휘부 전체가 한곳에 모여 있었기에 자칫 잘못하면 전투를 시작도 하기 전에 머리를 잃고 모래성처럼 힘없이 허물어질 뻔했다.
그걸 생각하면 오삼계는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나저나 무너진 곳을 막느라 좌군장이 고생이 많았겠어.”
“나중에 피해 집계를 해 봐야겠지만 적과 정면으로 부딪친 일 대의 피해가 클 겁니다.”
“그렇겠지.”
아직 초반인데 예상치 못한 일로 정예 부대를 소모시켜 버린 것에 오삼계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다가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도 일 대와 좌군장이 아니었다면 적들이 성안으로 몰려 들어와 우리가 버텨 내기 어려웠을 테니 어쩔 수 없지.”
“맞습니다.”
“분명 적들이 무너진 곳을 노리고 공격해 올 테니까 힘들더라도 가용 가능한 인력을 모두 동원해서 보수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부관도 망루가 박살 난 지점이 명군의 최대 약점이라는 걸 알기에 순순히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런 가운데 군영으로 돌아온 예친왕은 산해관에서 들리는 명군의 환호성이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아 물건을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와장창!
쨍그랑!
“아아악! 이런 치욕이 있나.”
분노하는 예친왕의 모습에 용골대와 장수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음을 졸였다.
도현 일행도 한쪽 끝에 서 있었는데 예친왕이 저렇게까지 화가 난 건 처음 봤기에 정색하며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한참 집기를 때려 부순 예친왕이 거칠게 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후우. 용 장군.”
“말씀하십시오, 전하.”
“지금 당장 가서 땅굴 판 놈을 잡아 와!”
눈에 살기가 가득한 것이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다는 판단에 용골대는 갓 군대에 들어온 신병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모습으로 얼른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서 찾으실 것 같아 밖에 대기시켜 놨습니다.”
“끌고 와!”
“옛.”
용골대가 급히 손짓하자 입구 쪽에 서 있던 무장 하나가 밖으로 나가더니 잔뜩 겁에 질린 이유정을 끌고 들어왔다.
패대기쳐지듯 바닥에 무릎 꿇린 이유정은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예친왕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몸을 엎드렸다.
“저, 전하. 살려 주십시오.”
“허어, 살려 달라……. 네놈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도 그딴 말이 나와!”
예친왕의 호통에 이유정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놨다.
“빨리 작업을 끝내라는 지시에 서두르다 보니 방향이 약간 빗나간 겁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호오! 그러니까 작업을 재촉한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는 말이지.”
“그, 그게 아니라…….”
“닥쳐라!”
꽝!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세게 내려친 예친왕은 이유정을 무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애초에 너처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며 눈치만 보는 이신(명나라에서 청으로 귀순한 신하를 가리키는 말) 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어. 여봐라!”
“옛!”
“당장 이놈을 끌고 나가 능지처참한 뒤 그 목을 잘라 진영 입구에 걸어 오늘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 줘라!”
“예.”
대답과 함께 호위 무사 둘이 다가와 양팔을 잡자 이유정은 기겁하며 매달렸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어서 끌고 나가지 않고 뭘 하느냐!”
강제로 질질 끌려 나가던 이유정은 이제 다 끝났다고 포기했는지 악이 받친 얼굴로 예친왕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 오랑캐 놈아! 초원에서 양젖이나 짜며 살던 천한 것들이 꼴에 나라를 세웠다고 거들먹거리는데 너희들은 절대 중원을 차지할 수 없을 거다!”
“저놈이!”
“저 주둥이를 막아라!”
만주족 출신들이 발끈하며 당장이라도 이유정을 때려죽일 듯 노려보는 것과 달리 명나라에서 귀순한 장수들은 아까 예친왕이 내뱉은 말 때문에 그런지 입을 꾹 다물고 굳은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읍읍!”
결국 이유정은 무사들에게 입이 막힌 채 짐승처럼 끌려 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자 장수들은 얼굴을 붉힌 채 앉아 있는 예친왕의 눈치를 봤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같으니라고.”
싸늘한 한기를 내뿜는 눈으로 좌중을 쓸어 본 예친왕은 입술을 살짝 비틀며 말했다.
“제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놈이 나오면 오늘처럼 목숨으로 죄를 씻게 할 테니 알아서들 해. 알겠나?”
“예, 전하.”
“소현세자.”
고개를 옆으로 돌린 예친왕이 눈을 맞추자 소현세자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네.”
“이거 귀한 손님을 앞에 두고 안 좋은 모습을 보여서 면목이 없군.”
“아닙니다.”
“내일 전투부터는 조선군도 참여했으면 하는데 괜찮겠나?”
“…….”
잠시 말이 없던 소현세자는 지휘 막사로 오기 전에 도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전쟁을 도우러 왔으니 당연히 싸워야지요. 임 장군에게 지시를 내려 놓겠습니다.”
“고맙네.”
다시 시선을 바로 한 예친왕은 휘하 장수들을 보며 날이 바짝 선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내일 다시 산해관을 공격할 테니 기필코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게 다들 준비 단단히 하도록 해.”
“옛!”
장수들이 군례를 취하며 천막이 떠나가라 크게 대답했다.
내일 어떻게 산해관을 공략할 건지 한참 이야기를 나눈 예친왕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회의를 끝냈다.
지휘 천막을 나온 도현 일행은 각자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소현세자의 막사로 함께 갔다.
“늦으셨습니다.”
내관인 최형외가 마중을 나와 있다가 허리를 숙이자 소현세자는 약간 지친 얼굴로 한 팔을 내저었다.
“그렇게 됐어. 차를 좀 갖다 주겠나?”
“금방 대령하겠사옵니다.”
“다들 앉지.”
“네.”
막사 가운데 있는 원형 탁자에 세 사람이 둘러앉자 최 내관이 미리 데워 놓은 찻물로 따뜻한 녹차를 내왔다.
“향이 좋군. 역시 최 내관 솜씨는 알아줘야 돼.”
한 모금 맛을 본 도현의 칭찬에 최 내관은 살짝 머리를 숙였다가 들었다.
“감사합니다.”
“칠현이가 만들어 주는 건 조금 텁텁한 맛이 나거든.”
“그렇습니까?”
“시간이 되면 최 내관이 차 끓이는 걸 좀 가르쳐 줘.”
“알겠습니다, 마마.”
그러자 상석에 앉아 있던 소현세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거 깐깐한 최 내관한테 교육을 받으려면 칠현이가 고생 좀 하겠는데.”
“걘 그래도 돼요.”
“하하하!”
지휘 막사에서 있었던 일로 약간은 무거웠던 분위기가 도현 덕분에 풀어졌다.
“그나저나 내일부터는 우리도 전투에 참여하게 됐으니 큰일이구나.”
“청 황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병력을 보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잖아요.”
“맞습니다. 그동안 훈련을 잘 시켜서 개죽음 당하지는 않을 테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무튼 큰 피해가 없도록 장군이 잘 지휘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저하.”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임경업 장군을 보며 옆에 있던 도현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아까 봤다시피 예친왕의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까 너무 티 나게 싸움을 회피하면 안 될 것이오. 차라리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첫 전투에서는 화끈한 모습을 보여 주시오.”
도현이 이야기한 대로 하면 사상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땅굴 작전의 실패로 청군 진영 분위기가 안 좋았기에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은 별말 없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아까 지휘 천막에서 이신들의 표정 봤어요?”
“다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더구나.”
“장수들은 물론이고 우리와 몽고족 족장까지 모인 자리에서 아예 대놓고 명을 버리고 청으로 귀부(스스로 와서 복종하는 것)한 이신들을 기회주의자에 겁쟁이로 깔아뭉갰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요.”
“힘을 합쳐도 부족할 판에 자중지란의 조짐이 보이다니 큰일입니다.”
임경업 장군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하자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한동안 군영 분위기가 어수선하겠지만 이걸로 가뜩이나 불편했던 재상인 범문정을 중심으로 한 이신 세력과 예친왕의 사이가 더 안 좋아지면서 우리가 파고들 틈이 생겼으니 잘된 일이지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은 이야기를 듣고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구나.”
“확실히 청국 내부가 흔들리면 우리한테는 이익이겠군요.”
“그럼 우리는 어느 쪽에 줄을 대는 것이 좋겠느냐?”
동생의 총명함을 익히 알고 있는 소현세자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그러자 도현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한 손으로 턱을 잠깐 매만지다가 이야기를 했다.
“글쎄요……. 물과 기름처럼 좀처럼 하나로 섞이기 힘들지만 두 사람 다 군부와 행정부를 장악하고 청국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기둥이니 감정싸움 정도는 몰라도 정면충돌은 회피하려고 할 거예요.”
“왜 그러지?”
“원래 그러면 어떻게든 한쪽을 쓰러뜨려 권력을 쟁취하려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도현은 빙긋 미소 짓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겠지만 일단 황제인 홍타이지가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고 균형을 잘 맞춰 주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서로의 영역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고 중원 정복이라는 큰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이상 양쪽 다 쉽사리 칼을 들이밀지는 못할 겁니다. 거기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아무리 예친왕이 군부 실세라고 하지만 다른 친왕들이 가진 힘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거지요.”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뿐 아니라 시중을 들기 위해 한쪽에 서 있던 최 내관까지 도현의 설명에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범문정이 다른 친왕들과 손을 잡으면 예친왕도 골치 아파지겠지.”
“그러면 우리도 범문정과 손을 잡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임경업 장군의 말에 소현세자도 호전적인 예친왕보다는 그래도 말이 통하는 범문정 쪽에 더 마음이 가는지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와서 약간씩 어긋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는 도현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주 위험한 선택이에요.”
“예?”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범문정보다는 황족인 예친왕이 더 힘이 센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무엇보다 현 황제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때 후계를 이을 황자가 이제 겨우 열 살도 안 됐다는 점이 문제예요.”
“……!”
이 시대에는 황제의 안위에 대해 사사로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대역죄였기에 소현세자와 임경업 장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구중궁궐에서 잔뼈가 굵은 최 내관은 재빨리 막사 밖으로 나가 혹시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고는 다시 돌아와 소현세자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소현세자는 도현과 시선을 맞추며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냐?”
역사에 나와 있는 일이라고 사실대로 말해 줄 수 없었던 도현은 대충 이야기를 지어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황제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걸 믿을 만한 소식통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정말이냐?”
“예.”
“으음.”
워낙 엄청난 일이라 재차 묻기까지 한 소현세자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도현의 성격을 알기에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함께 있던 임경업 장군과 최 내관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심각해졌다.
“청을 일으킨 누르하치가 뛰어난 능력 때문에 후계자로까지 생각했던 예친왕입니다. 그런데 후계 구도가 제대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현 황제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다면 누가 황좌를 물려받겠습니까?”
“그럼 예친왕이…….”
“확률은 반반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고 설사 범문정과 다른 친왕들의 반대로 황제가 되지 않더라도 어린 조카 뒤에서 모든 권력을 휘어잡고 대리 청정을 하겠지요. 한마디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예친왕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쥘 거라는 겁니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빈틈없고 정확한 분석에 두 사람은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건 제 예상일 뿐이고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당분간은 괜히 양쪽의 권력 다툼에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다 식어 버린 찻잔을 손에 들고 잠시 고심하던 소현세자는 도현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는 것이 좋겠구나. 오늘 나눈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으니 다들 입단속을 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저하.”
목이 타는지 남아 있던 차를 단번에 들이켠 소현세자는 마주 앉아 있는 도현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마음에 그냥 이야기나 좀 나누려고 했는데 더 심란해진 것 같구나.”
“죄송해요.”
“아니다. 오히려 일이 터지기 전에 그런 중요한 정보를 알게 돼서 다행이지.”
“맞습니다.”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은 전투에 신경을 집중하도록 합시다.”
“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합시다.”
소현세자의 말에 임경업 장군과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머리를 숙였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내일 봅시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군영을 나온 청군은 기필코 오늘은 산해관을 함락시키겠다는 듯 파상 공세를 펼쳤다.
임경업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몽고군과 함께 어제 전투로 지친 청군을 대신해 선봉을 맡아 성문을 공격했다.
하지만 밤사이 흙과 바위로 망루가 무너진 곳에 임시 토벽을 쌓은 명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시체 위에 다시 시신이 쌓이고 그 밑으로 시뻘건 피가 강을 이루며 흐르는 인세의 지옥이 펼쳐졌지만 독이 바짝 오른 예친왕은 물러서지 않고 병력을 계속 교대하며 산해관을 두들겼다.
무려 이틀 밤낮 쉬지 않고 이어진 전투에 명군은 몇 번이나 무너질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버티며 성을 지켜 냈고 그 이후부터 싸움은 지루한 소모전으로 변했다.
산동반도
병력을 보존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소모전이 이어지며 몇 번이나 전투에 투입되자 조선군의 피해도 계속 누적됐다.
“총 사상자는 사백팔십 명이고 그중 쉰 명은 부상이 약해 며칠 뒤에는 다시 전투에 나설 수 있을 겁니다.”
“사백팔십 명이라. 피해가 크군.”
도현의 중얼거림에 보고를 하던 부장 박도치는 송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필 오늘 우리가 맡은 지점에 상대편 궁수대가 집중 배치되어 있어서 피해가 컸습니다.”
“운이 나빴던 게지.”
씁쓸하게 말한 소현세자가 손짓하자 박도치는 허리 숙여 읍을 하고는 막사를 나갔다.
막사 안에는 소현세자와 도현 그리고 임경업 장군까지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들 긴 전투에 지쳤는지 얼굴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죽은 병사가 몇 명인가?”
소현세자의 물음에 임경업 장군은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 명이 넘었습니다.”
“후우. 전쟁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데 벌써 이 할이나 잃었군. 이러다가 병사들을 모두 여기다가 묻는 건 아닌지 걱정이야.”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애써 위로를 하면서도 상황이 너무 암울했기에 도현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당장 내일은 또 얼마나 죽어 나갈지……. 임 장군.”
“말씀하십시오, 저하.”
“아까 경상을 입은 병사들을 치료가 끝나는 대로 다시 전투에 투입한다고 했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러지 말고 의원들한테 말해 부상병들의 복귀를 최대한 늦추라고 하시오.”
“……!”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임경업 장군은 이내 꼼수를 써서라도 전투에 참여하는 병사의 숫자를 줄이려는 소현세자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거 괜찮은 방법인데요.”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수까지 써야 한다니 참 한심스럽구나.”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는 건데 뭐 어때요.”
“봉림대군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건 그렇고, 내일 또 공격을 한다고?”
“예. 다행히 몽고족 병력이 선봉에 선다고 합니다.”
대답을 들은 소현세자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때 입구를 가리고 있던 휘장을 젖히며 방금 전 나갔던 부장 박도치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저하! 급보이옵니다.”
“세자 저하 앞에서 어찌 이 호들갑인가?”
옆에 있던 임경업 장군이 꾸짖듯 질책하자 박도치는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급한 마음에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저하.”
“아닐세. 그것보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용건을 떠올린 박도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청 황제가 도착했습니다.”
“뭐라고!”
황제인 홍타이지가 후군을 이끌고 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정보다 그 시기가 빨랐기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다음 달에나 올 줄 알았는데 벌써 왔다고?”
도현의 물음에 박도치는 바로 대답했다.
“예. 지금 어가 행렬이 군영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선을 돌려 도현이 쳐다보자 소현세자는 복잡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 보자꾸나.”
“네.”
세 사람이 서둘러 천막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소문을 듣고 병사들이 잔뜩 몰려나온 가운데 화려한 어가 행렬이 들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황제의 등장에 전투로 지쳐 있던 청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황제 폐하시다!”
“폐하께서 지원 병력을 이끌고 오셨다!”
“만세! 만세!”
그걸 보며 도현은 쓰게 웃었다.
“밑바닥이던 사기를 단번에 끌어올리다니, 황제의 힘이 대단하긴 하군요.”
“그러게 말이다.”
“괜히 트집 잡히지 않으려면 우리도 가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도현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본 소현세자는 예친왕과 청국 장수들이 도열해서 마중 나가 있는 걸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지.”
어쩐지 청 황제의 위세를 높이는 광대놀음에 끼어드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았지만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기에 세 사람은 서둘러 예친왕과 장수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황금과 온갖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돼 실용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용도로 제작된 갑옷을 입고 눈처럼 하얀 백마에 올라탄 홍타이지는 커다란 지휘 막사 앞에 예친왕을 비롯한 장수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보고 말에서 내렸다.
황제가 앞으로 다가오자 예친왕의 선두에서 장수들이 큰 소리로 예를 갖췄다.
“폐하를 뵙습니다.”
“다들 반갑소.”
얼굴 가득 넉넉한 미소를 지으면서 황제가 한 말에 장수들은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 이 먼 산해관까지 나와 적과 싸우느라 수고가 많소.”
“아닙니다. 산해관 안에서 폐하를 맞이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짐도 아쉽기는 하지만 천하제일관이라 불리는 산해관을 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괜찮다는 듯 허허거렸지만 황제의 눈이 차갑게 굳어 있는 걸 본 도현은 상당히 화가 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당장 불호령을 내리고 싶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현뿐 아니라 예친왕 도르곤도 그런 황제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마를 땅에 찧으며 말했다.
“기필코 폐하의 깃발을 산해관 성문 위에 나부끼도록 하겠사옵니다.”
“하하하! 암, 그래야지. 예친왕만 믿고 있겠네.”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황제는 손수 예친왕을 일으켜서는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고 다른 장수들과 도현 일행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수십 명이 들어가도 넉넉하게 자리가 남을 정도로 큰 지휘 천막 안에는 언제 가져다 놨는지 황금을 씌워서 만든 황좌가 제단 위에 놓여 있었다.
황제인 홍타이지는 성큼성큼 걸어가 황좌에 앉았고 제단 바로 밑에 예친왕이 섰다.
소현세자와 도현은 몽고 족장들과 함께 왼편에 자리를 잡았고 반대편에는 청군 장수들이 긴장한 얼굴로 늘어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막 안으로 들어온 황제는 미소를 싹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듬히 황좌에 기대앉아 장수들을 쓸어 봤다.
한겨울 바람보다 더 차가운 눈빛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장수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경직시켰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하고 무거운 분위기에 도현과 소현세자는 물론이고 몽고족 족장들도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황제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산해관에 명나라 깃발이 걸려 있는 이유가 뭔가?”
“…….”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한 침묵만이 흐르는 가운데 황제는 오른편 앞쪽에 서 있는 용골대를 지목하며 재차 물었다.
“용 장군이 말해 봐. 왜 아직 함락시키지 못했지?”
“그, 그게 적들의 저항이 워낙 강해…….”
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던진 찻잔이 용골대의 이마를 때렸다.
“큭.”
신음과 함께 살이 찢어진 이마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지만 용골대는 닦아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 말해 봐.”
“저희가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 자금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아직도 이러고 있다니 정말 실망이야.”
“죽여 주시옵소서.”
황제의 말에 용골대는 털썩 그 자리에 엎드려 죄를 청했다.
시선은 용골대를 보고 있지만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 황제가 선봉대를 지휘한 예친왕을 야단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고개를 살짝 숙인 예친왕의 얼굴은 치욕감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예친왕을 힐끗 쳐다본 황제는 황좌에 등을 기댄 채 다시 용골대를 내려다봤다.
“죽어 마땅하지만 그동안 제국을 위해 헌신한 노력을 생각해 이번 한 번은 죄를 용서해 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손짓을 해서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는 용골대를 일어나게 한 황제는 좌중을 쓸어 보고는 특유의 묵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답답한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묘책이 있나?”
그런 묘책이 있었으면 벌써 썼지 지금까지 지루한 소모전만 벌이고 있지는 않았을 터이기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선뜻 나서 말하는 사람이 없자 심기가 불편해진 황제는 미간에 내 천 자를 그리다가 소현세자 옆에 있는 도현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호오! 봉림대군도 있었군. 지난번 영원성을 공략할 때 좋은 계책을 내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뭐 떠오른 생각 없나?”
튀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던 도현은 황제가 자신을 콕 집어서 지목하자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황제가 묻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아둔한 머리로 괜히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두렵습니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이 쓸모없는 것들보다는 낫겠지. 뭐든 괜찮으니 어디 생각해 본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
재차 물어보자 내심 작게 한숨을 내쉰 도현은 평소 자신이 생각한 걸 적당한 수준에서 편집해 이야기했다.
“바다와 연결된 만리장성의 시발점인 산해관은 예전부터 북방 민족이 중원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 온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보수와 증축이 계속 이루어져 지금에 와서는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지요.”
산해관이 공략하기 어렵다는 건 장수들뿐 아니라 황제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다들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비록 명이 전성기에 비해 많이 쇠락했다지만 그래도 중요한 전략 요충지인 만큼 산해관에는 정예 병력을 집중하고 지휘관인 요동총병에게 자율권을 주어 방어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곳을 힘으로 함락시키려면 적잖은 희생을 감수해야 될 겁니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북경을 치려면 산해관을 뚫고 가는 것이 정석이지만 굳이 상대가 유리한 곳에서 힘든 전투를 벌여 피해를 키울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바닷길을 이용해 산동에 상륙하거나 지난번처럼 산해관을 우회한 다음 만리장성 중 약한 곳을 무너뜨리고 북경으로 진격한다면 훨씬 피해도 적고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도현의 설명에 좌중이 크게 술렁거렸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청군이 장자령을 넘어 들어가 화북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일이 있었기에 가능성이 더욱 커 보였다.
“하긴 굳이 산해관을 고집할 이유는 없지.”
“맞소. 거리로 따지면 승덕이나 조양을 통과하는 것이 산해관보다 더 가깝지 않소.”
평소 예친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눈을 반짝 빛내며 찬성 의견을 냈다.
“폐하, 제 생각에도 봉림대군의 계책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탐스럽게 자란 수염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고심하던 황제는 도현을 내려다보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방어가 허술한 만큼 만리장성을 통과하면 수레 하나 지나가기 힘든 험준한 산악 지대가 나와서 보급에 어려움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해결할 거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수십만 대군이 움직이는 만큼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했다.
“산악 지대라 보급이 어렵지만 밑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풍족한 화북 지역이 나오니 휴대할 수 있는 만큼만 물품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조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위험이 크지만 제대로 진행된다면 명나라의 북쪽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대비가 허술한 북경을 단번에 함락시킬 수 있다.
잠시 생각을 해 보던 황제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지 이내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말했다.
“봉림대군의 계책도 괜찮지만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자가 어찌 꼼수를 써서 대업을 이루겠는가! 저 산해관 성문 현판에 적힌 천하제일관이라는 글처럼 희생이 크더라도 당당히 관문을 뚫고 자금성까지 내려가 진정한 황제가 누구인지 만천하에 보여 줄 것이다.”
선언하듯 말한 황제는 단 밑에 있는 예친왕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예친왕.”
“예, 폐하.”
“사흘간 쉬면서 병력을 재정비한 뒤 새로 가져온 공성 무기와 화포를 총동원해 산해관을 무너뜨린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전투를 지휘할 것이야.”
“알겠사옵니다.”
황제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예친왕뿐 아니라 천막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며 크게 복명했다.
그날 밤늦게까지 황제가 이끌고 온 본진 병력 십만이 계속해서 줄 지어 도착했고 예친왕은 근처에 있는 숲으로 병사들을 보내 공성 병기를 만들 목재를 대량으로 베어 왔다.
이런 상대편의 움직임에 대규모 공격을 예상한 오삼계는 서둘러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부족한 병기를 채워 넣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 가운데 북경에서 산해관으로 지원 병력을 보내는 걸 차단하기 위해 황제는 도현이 낸 계책을 일부 받아들여 소수의 병력을 산동반도에 상륙시켜 명 조정을 흔들기로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별동대는 몽고와 조선군으로 구성되었다. 그동안 계속된 전투로 병력이 줄어든 데다 몽고족 전사들이 약탈전에 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 강제로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보병이라 몽고족과 달리 기동성이 떨어지는 조선군을 굳이 별동대로 편성한 건 이번 기회에 조선과 명 사이를 확실히 갈라놓으려는 홍타이지의 꼼수가 숨어 있었다.
당연히 도현과 조선군 지휘부는 이런 걸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황명을 거역할 마땅한 핑계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안으로 이동해 급히 부른 청국 수군 함대를 얻어 타고 산동반도로 향했다.
쏴아아!
뱃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도현이 함교 위에 서 있을 때 갑옷을 입은 임경업 장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 계셨군요.”
“임 장군, 어서 오시오.”
“이제 두 시진만 더 가면 육지에 도착한답니다.”
“이틀 전에 배를 탔는데 금방이군.”
“때마침 불어온 순풍을 탄 덕분이지요.”
고개를 돌려 자신들이 떠나온 북쪽을 바라보며 도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혼자 남겨진 형님이 잘 지내실지 걱정이오.”
조선군을 떠나보내면서 혹시나 그길로 달아날 것을 염려한 홍타이지는 가장 중요한 볼모인 소현세자는 계속 본진에 남도록 했다.
“최 내관도 있고 따로 호위 병력 일백을 남겨 뒀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우리보다 황제와 있는 세자 저하께서 더 안전하시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임경업 장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전은 지난번에 이야기한 그대로지요?”
“예. 하지만 명예로운 무인이 마적 떼처럼 성과 마을을 털고 불태워야 한다니 썩 내키지 않습니다.”
임경업 장군의 불평에 도현은 양쪽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마찬가지요. 그렇지만 청군 장수가 직접 따라다니면서 감시를 한다니까 어쩔 수 없잖소. 대충 흉내라도 내야지.”
“몽고족은 아주 신이 난 모양입니다.”
“걔네야 약탈이 어색한 게 아닌 데다 예전부터 농사가 잘되고 무역이 발달해 부유한 지역인 산동반도에서 한몫 단단히 챙겨 갈 수 있게 됐으니 좋을 수밖에.”
“솔직히 약탈은 둘째 치고 명나라 토벌대가 몰려와서 불리한 상황이 되면 청 수군이 약속대로 우리를 데려갈지 걱정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별동대로 온 조선군은 꼼짝없이 다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명과 사이가 좋으니 그냥 항복해 버리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본토까지 들어와 분탕질을 한 병사들을 자존심 센 명 조정이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다.
아마 많이 봐줘도 노예로 모두 팔아 버릴 것이 분명했다.
심양에서 노예로 끌려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너무 많이 봐 온 도현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황제가 권유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별동대를 따라온 것이다.
최소한 왕자인 도현이 있으면 청도 쉽게 조선군을 버리는 패로 쓰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냥 청군만 믿을 수 없었던 도현은 떠나기 전 봉황상단에 은밀히 연통을 넣어 모종의 대비책을 세워 두었다.
“내가 있는데 설마 자기들끼리 도망치겠소?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도현이 별동대에 합류했는지 잘 알고 있는 임경업 장군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쑥스럽게 왜 그러시오. 그럼 나도 갑옷으로 갈아입고 올 테니 나중에 봅시다.”
“예.”
임경업 장군의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밑에 있는 자신의 선실로 내려갔다.
대군이라는 특별한 신분 덕분에 독실을 배정받은 도현은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칠현과 함께 방을 쓰고 있었다.
독실이라고 해도 침대와 협탁 그리고 작은 탁자뿐인 협소한 곳이지만 나름대로 지내기에는 괜찮았다.
새파란 얼굴을 하고 엎어져 있는 저 녀석만 제외하면.
“끄응, 끄응. 아이고, 나 죽겠다…….”
“야, 나 왔다.”
분명히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꼼짝없이 누워 있는 칠현을 향해 도현이 툭툭 발길질을 하자 그제야 고개를 스르륵 위로 들어 올렸다.
“마마, 오셨습니까아.”
“켁. 어째 아까보다 더 안색이 안 좋아진 것 같다.”
도현이 슬쩍 한발 뒤로 물러서자 칠현은 세상만사 다 산 표정으로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속을 얼마나 게워 냈는지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어요. 흐어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흑흑…….”
“사내자식이 볼썽사납게 훌쩍거리지 말고 그만 일어나.”
다 죽어 가는 몰골로 누워 있기에 측은한 마음이 든 것도 잠시, 금세 입을 쫑알거리는 꼴을 보니 아직 힘은 남아 있구나 싶어 도현이 이리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왜요오?”
“두 시진 있으면 뭍에 도착한다니 슬슬 갑옷으로 갈아입어야지.”
“헉! 정말요? 얏호!”
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는 칠현을 보고 도현이 툭 한마디 던졌다.
“너 인마, 계속 골골거리던 거 다 엄살이지? 다신 안 속는다.”
“예? 아니, 진짠데요! 보세요. 지금도 속이 울렁거려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
“아 씨, 더러워! 어따 얼굴을 들이대? 얼른 가서 손이라도 씻고 와!”
도현이 버럭 성질을 내며 칠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야! 왜 맨날 때리세요. 저만 미워해!”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그러지. 휴우, 너랑 말싸움하니까 벌써 지친다. 아, 그만하고 얼른 갑옷이나 꺼내.”
“예이.”
칠현은 방 한편에 놔두었던 궤짝의 뚜껑을 열고 끙차 하며 갑옷을 꺼내 도현의 옆에 하나씩 늘어놓았다.
창과 화살을 막기 위해서 비늘 같은 모양의 쇠를 이어 만든 갑옷은 무게가 꽤 나가서 아무래도 혼자 입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도현이 팔목에 아대를 착용하는 동안 칠현은 매듭을 꽉 죄어서 갑옷을 단단히 고정했다.
“더 세게 묶어도 돼. 한창 싸우는 도중에 갑옷이 흐트러지면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으차!”
몇 번 해 봐서 손에 익은 작업이었기에 순조롭게 갑옷을 착용해 나가고 있는데 순간 파도가 높게 쳤는지 배가 흔들거리는 느낌이 났다.
“우웁!”
“헉! 너 설마 여기서 토하려는 건 아니지? 참아, 참아!”
갑옷 위에다 토해 버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기세로 도현이 협박하자 칠현은 다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고 도리질 쳤다.
“휴우. 넌 대체 왜 그러냐. 배 조금 흔들린 것 같고.”
“마마께선 이해하지 못하세요! 뱃멀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데요.”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칠현과 달리 도현은 태연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그러게 진작 체력단련 좀 해 놓으라고 몇 번이나 누누이 말했잖아. 앞으로 나 따라서 어딜 가게 될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이래서야 되겠어.”
“헉! 설마 절 계속 여기저기 끌고 다니실 건……?”
“당연하지. 넌 전속 내관 아니냐. 어딜 가든 내 시중을 들러 따라와야지.”
“제, 제발 살려 주세요, 마마…….”
지금도 충분히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는 칠현을 보고 도현은 쌤통이라며 큭큭 웃었다.
“장난은 이쯤 하고, 어때? 다 끝났어?”
“예, 완벽합니다요.”
“좋아. 그럼 이제 도착하기만 기다리면 되겠군.”
정확히 두 시진 뒤, 별동대를 태운 청 함대 쉰 척은 산동반도 북부에 위치한 제법 커다란 규모의 포구에 도착했다.
끼룩끼룩.
갈매기들이 떼로 날아다니는 포구에는 수십 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예전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무역이 발달한 곳인 만큼 종류도 고깃배와 상선 등 아주 다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 새벽에 작업한 고기 상자를 내리고 있던 중년 사내 한 명이 제일 처음 청국 함대의 출현을 발견했다.
“어? 저게 뭐지?”
“왜 또 꾀를 피워.”
일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다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에 동료가 눈가를 찌푸리며 타박하자 중년 사내는 놀란 얼굴로 황급히 소리쳤다.
“저, 저길 봐!”
“봐 봐야 바다지……. 헉!”
바쁜데 뭘 보고 이 호들갑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하던 동료는 수평선 가득 나타난 수십 척의 배를 보고는 헛바람을 삼켰다.
“왜, 왜구다!”
산해관 쪽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청군이 여기까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남자는 수시로 명나라 해안에 출몰해 노략질을 해 대는 왜구라고 단정 지어 고함을 질러 댔다.
뭐, 사실 청군이나 왜구나 쳐들어오면 약탈당하고 목숨을 잃기에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둘 다 똑같은 존재였다.
순간 포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됐고 이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청 함대를 보고 혼란에 빠졌다.
“흐익!”
“정말 왜구 놈들이 나타났어.”
“어서 도망쳐!”
악랄한 왜구들의 행태에 대해 귀가 따갑게 소문을 들은 데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습격을 당한 경험도 있었기에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안쪽으로 달아났다.
그렇게 난리가 난 가운데 제일 먼저 몽고족 전사들을 태운 배들이 텅 빈 포구에 도착했다.
쿠웅!
두꺼운 널빤지를 이어 붙여서 만든 잔교가 신속하게 내려지자 몽고족 전사들은 말을 탄 채 그대로 하선했다.
“큭큭큭! 마음껏 빼앗고 다 불태워 버려라.”
“옛.”
대족장인 야율수이의 외침에 큰 소리로 호응한 전사들은 탐욕에 찬 눈을 번득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몽고족 전사들은 열 명씩 몰려다니며 약탈을 시작했다.
“히야!”
“사, 살려 줘.”
슈각!
“크윽.”
“꺄아악!”
말을 타고 달리던 전사들은 남자가 보이면 그대로 칼을 휘둘러 죽이고 아녀자들은 낚아채 옆구리에 꼈다.
인구도 많고 상선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포구였기에 현령이 상주하는 지방관청이 있지만 누구 하나 병사들을 이끌고 나오지 않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현령과 포졸들이 제일 먼저 짐을 싸서 줄행랑을 쳤고, 관리한테 버림받은 백성들만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가 칼에 찔려 죽거나 짐승처럼 질질 끌려 나왔다.
그렇게 한바탕 난장판이 휩쓸고 지나간 포구에 조선군이 상륙했다. 그들은 앞서 도착한 몽고족 전사들과 달리 오와 열을 맞춰 질서 있게 하선하고 함부로 흩어져 약탈도 하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도현은 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시커먼 연기를 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보기 좋지는 않군.”
그때 붉은색 갑옷을 입고 머리에 두건을 쓴 칠현이 고삐를 잡고 안장이 씌워진 갈색 말 두 필을 끌고 왔다.
“마마, 오르십시오.”
“그래.”
깍지를 껴서 내민 칠현의 손바닥을 밟고 말에 오른 도현은 마침 옆으로 다가온 임경업 장군을 보며 말했다.
“임 장군, 행여나 병사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약탈에 가담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단단히 주의를 주시오.”
“그렇지 않아도 잘 챙기라고 군관들한테 일러두고 오는 길입니다.”
“잘했소. 그럼 우리도 슬슬 출발해 볼까.”
“예.”
임경업 장군의 손짓에 부관이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출발!”
척척척! 척척척!
앞에 선 도현과 임경업 장군을 따라 행군하는 조선군 병사들의 움직임에는 군기가 가득 느껴졌다.
그런데 병사들의 숫자가 적은 것이 대충 봐도 이천 명 정도 밖에 안 됐다.
처음 오천 명이 조선을 출발해 그동안 산해관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원래는 삼천 명가량이 남아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산해관보다 훨씬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산동반도로 가는 인원을 줄이려는 도현의 지시에 따라 약간이라도 다친 병사들은 다 남겨 놓고 온 것이다.
이미 몽고족 전사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는지 대로에는 가재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군데군데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시신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약탈을 중지시키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명군과 싸우기도 전에 자중지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에 애써 참으며 도현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몰았다.
그렇게 마을을 가로질러 가던 도현은 왼편 골목 안에서 들리는 병장기 부딪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누군가 몽고족 전사들과 어울려 싸우는 걸 보고 말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같이 말을 몰던 임경업 장군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턱으로 골목 안을 가리켰다.
“저길 좀 봐.”
시선을 돌린 임경업 장군은 건장한 덩치의 사내 한 명이 거칠기로 유명한 몽고족 전사 세 명과 어울려 싸우는 모습에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관군은 아닌 것 같은데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군요. 하지만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거칠어진 걸 봐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임경업 장군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했는지 몇 합을 더 부딪치던 사내는 상대가 휘두르는 검에 옆구리를 깊게 베이는 부상을 입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몽고족 전사들이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내 손에 잡히면 아주 포를 떠 주마.”
사내는 이를 악물고 손에 든 검을 들어 올렸지만 지치고 부상까지 입어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기세가 확실히 죽어 있었다.
지금 다시 싸운다면 사내의 패배가 불을 보듯 뻔했다.
몽고족 전사들이 살기를 뿌리며 막 앞으로 달려들려는 순간 화살 한 대가 날아와 가운데 꽂혔다.
피슝- 퍽!
“어떤 놈이야!”
왼쪽 뺨에 긴 자상이 있는 전사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도현이 활을 든 채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거기까지. 셋이서 한 명을 핍박하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버럭 욕을 쏟아 내려던 전사들은 양옆에 서 있는 호위 무사들과 임경업 장군을 보고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경계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으면 될 걸 말을 듣지 않고 칼을 뽑아 들어서 저항하는 바람에 조금 혼을 내 주고 있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갈 길이나 가시오.”
“싫다면?”
“지금 같은 편끼리 싸우기라도 하자는 거요!”
근처에 있는 동료들을 불러들이려는 듯 상대가 일부러 크게 고함을 치자 도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괜히 분란을 일으켜 봤자 좋을 것이 없었지만 한쪽 구석에 어린아이를 껴안고 덜덜 떨고 있는 여인과 가족을 지키려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지탱하고 선 사내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쯧.”
자신의 오지랖에 짧게 혀를 찬 도현은 품에서 은자 여섯 냥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이자들은 내가 데려갈 테니까 그거나 챙겨서 꺼져.”
“…….”
잠시 서로 눈빛을 교환한 전사들은 냉큼 은자를 주워 들고는 골목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은자를 주지 말고 싹 살인멸구를 해 버릴까 고심하던 도현은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아직도 검을 들고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사내에게 멋있게 한마디를 해 줬다.
“이봐, 여긴 위험하니까 어서 가족들 데리고 다른 곳으로……. 어?”
아니, 해 주려고 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공이 풀린 사내가 힘없이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뭐야?”
“기절한 것 같은데요.”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퍽!
“으윽.”
가뜩이나 황당한데 칠현이 뺀질뺀질한 얼굴로 속을 긁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갈겼다.
“여보!”
“아버지.”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와 아이가 쓰러진 사내를 붙잡고 울음을 터트리자 도현은 입맛을 다시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게 됐군.”
현청은 함대를 이끌고 있는 청군 장수인 공유덕이 차지했기에 도현과 조선군은 마을 부호富豪의 장원에 임시 숙소를 차렸다.
마을뿐 아니라 근방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잣집답게 앞뒤로 널찍한 정원이 있고 방만 쉰 개가 넘어 조선군 전체가 머물기에 충분했다.
칠현과 호위 무사들을 대동하고 안채로 들어간 도현은 신발을 신은 채 미닫이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예 돈으로 쳐 발라 놨구만.”
스무 명은 들어와서 잘 수 있을 만큼 넓은 방은 도현의 말처럼 온갖 값비싼 물건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바닥에는 귀한 백호피 가죽 깔개까지 있었다.
투구를 벗어 칠현에게 건네준 도현은 비단으로 만든 침상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임 장군은 뭐하고 있어?”
“정원에 숙영지를 세우는 걸 둘러보고 잠시 현청에 지휘소를 설치한 공유덕 장군을 만나 보러 간다고 했습니다.”
“거긴 왜?”
“아무래도 청 수군의 행보가 중요하니 분위기를 한번 보러 간 거겠지요.”
“쳇.”
청군의 눈치를 봐야 된다는 것이 살짝 짜증이 났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기에 도현도 더는 트집을 잡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앉아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데리고 다니는 호위대 대장인 박영식이 작은 궤짝을 하나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뭐야?”
탁자 위에 내려놓은 궤짝을 보며 도현이 묻자 박영식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금 대인이라는 놈이 가지고 도망치는 걸 가져왔습니다.”
“그래?”
금 대인은 조선군이 차지한 장원의 주인으로, 포구 근처 땅을 다 가지고 있을 정도로 대지주이면서 고리 사채업으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교역 때문에 산동 지역을 자주 드나드는 봉황상단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입수한 도현은 이런 사실을 알고 피해를 주더라도 양심에 걸리지 않는 금 대인의 장원을 콕 찍어서 주둔지로 정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떨어질 콩고물도 기대했는데 알아주는 부자인 만큼 창고에 쌓아 둔 재산도 많을 테니 기병 쉰 명과 호위대 일부를 먼저 상륙시켜 몽고족이 건들기 전에 장원을 선점하도록 했다.
그래서 다른 부자들과 달리 금 대인은 값비싼 패물을 챙겨 달아나기도 전에 포구에서 곧장 달려온 기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난리 통에 급히 챙겨서 가져갈 정도면 아주 귀한 물건이 들어 있을 게 분명했기에 도현은 기대 섞인 시선으로 궤짝을 보며 말했다.
“열어 봐.”
“옛.”
퍼석!
단단한 검 손잡이로 자물쇠를 부수고 뚜껑을 열자 눈이 부시도록 환한 광채와 함께 온갖 값비싼 보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엄청난데요.”
칠현은 눈이 부시다며 과장된 태도로 놀라움을 표했다.
한 점의 흠도 없이 완벽하게 둥근 유백색의 진주, 청색의 옥과 비취 등 누구나 그 반짝거림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화려한 보석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도현의 눈길을 끈 것은 유리처럼 투명한 금강석이었다.
동양에서는 금강석이라 부르고 서양에서는 다이아몬드라 칭하는 보석 중의 보석.
“뜻하지 않은 수확이로군.”
해적 소굴에서 챙겼던 재물들에 비하면 양으론 달리지만 질적으론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좋았어. 칠현아, 이거 챙겨라.”
“알겠습니다!”
도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칠현은 시시덕거리며 뚜껑을 도로 닫고는 궤짝을 안아 들었다.
“우왁! 이거 꽤 무거운데요.”
“징징거려도 안 도와줄 거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습니다.”
궤짝 말고도 집 안에서 상당한 재물이 나왔다. 특히 다섯 채나 되는 창고에는 곡식과 비단이 한가득 쌓여 있어 도현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곡식이 얼마나 많은지 이걸로 당분간 보급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였다.
장원의 한구석, 간소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방 안에 커다란 덩치를 누인 흑치영은 고열로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으음…….”
이마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에 가까스로 눈을 뜨자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던 부인이 급하게 말을 걸었다.
“여보, 정신이 드세요?”
“음……. 여기가 어디지.”
아직 반쯤 몽롱한 정신으로 낯선 천장을 바라보던 흑치영은 순간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크윽!”
그러자 옆구리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격한 통증이 느껴졌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갑자기 움직이시면 안 돼요. 의원이 절대 안정이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고 가셨는데…….”
“다, 당신 괜찮소? 아이는?”
“밥 먹고 금방 잠든 참이에요. 당신 쉬시는 데 방해될까 봐 옆방에서 자라고 했으니 내일 아침이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그렇다면 다행이고.”
흑치영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아내를 겁탈하려고 한 나쁜 몽고족 놈들하고 맞서 싸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또 낯선 방 안에서 이렇게 태연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요?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여긴 또 어디고.”
“당신이 쓰러지기 바로 직전에 우릴 구해 주신 분이 계셨어요. 기억 안 나세요?”
아내의 물음에 흑치영은 혼란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 끝났다 싶은 상황에서 갑자기 화살이 날아왔고, 어떤 젊은 사내가 나타난 것까지는 생각이 났다.
하필이면 그때 긴장이 풀렸는지 눈앞이 흐려지면서 쓰러지는 바람에 얼굴까지는 자세히 기억 안 나지만, 무척이나 젊은데 저런 말을 타고 있다니 뭔가 특별한 신분의 사람인가 보다는 인상만이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인가, 말에 타고 있던?”
“그래요. 당신이 쓰러지는 바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를 거둬 주시고, 이렇게 방까지 내주셨답니다.”
아내는 무척이나 감격스러운지 두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그분이 안 계셨으면 길바닥에서 무슨 꼴을 당했을지 몰라요.”
“그래……. 그거 다행이로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날 길은 있는가 보다고 흑치영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직접 만나 보질 못했으니 뭐라 판단할 순 없지만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이렇게 구해 준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게다가 아내가 저리 싱글벙글 웃으며 은인이라고 극찬하는데 어떻게 수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신도 차렸는데 마냥 이렇게 누워 있을 순 없지. 은인께 감사하다는 인사라도 직접 드려야……. 윽!”
살짝 몸을 움직인 것만으로 날카로운 고통이 밀려들자 깜짝 놀란 아내가 달려와서 그를 억지로 눕혔다.
“여보, 괜찮아요?”
“으…….”
흑치영은 손을 아래로 내려 상처 부위를 만져 보았다.
깨끗한 붕대로 빈틈없이 감겨 있긴 했지만 흑치영이 움직인 탓인지 살짝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칼날이 안에 내장까지 닿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깊은 상처라 한동안은 요양이 필요하대요.”
“면목이 없군. 지금 우리한테 재산이라곤 튼튼한 몸밖에 없는데…….”
몽고족 전사들이 포구를 약탈하면서 그렇게 요란하게 지나갔으니 지금 와서 집에 돌아가 봤자 남은 게 없다.
다행히 세 가족 모두 목숨이라도 부지했으니 그나마 낫다고 할 순 있지만 몸이 이래서야 아내와 아이를 부양하기는커녕 오히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지경이 되어 앞길이 막막하기만 했다.
은인이라는 그 젊은 사내가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곤 해도 언제까지나 계속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
“그런 말 하지 마요. 일단 은인께서 당신 몸이 나을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도 좋다고 하셨으니, 지금은 그것만 생각해요. 네?”
“그게 정말이야?”
이런 척박한 세상에 아직도 선행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있다니.
흑치영은 내심 감탄하며 아내가 권하는 대로 이부자리에 누웠다.
“으윽……. 후.”
가슴에 꽉 막혀 있던 근심거리가 사라지자 몸도 편해진 건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밤새 포구 마을을 분탕질한 몽고족 전사들은 그거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날이 밝자마자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각 부족별로 흩어져 주변 고을을 약탈하러 떠났다.
이렇게 제 세상처럼 신이 나서 움직이는 몽고족과 달리 조선군은 거처로 정한 장원에서 대부분 머물며 조용히 둘째 날을 맞이했다.
임경업 장군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도현은 상을 물리고는 칠현이 끓여 낸 녹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어제 공 장군을 만나러 갔다고 들었는데 뭐라고 하던가?”
차를 몇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도현의 물음에 임경업 장군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분간은 여길 거점으로 삼고 머물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도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려만 놓고 당장 요동으로 돌아갈 것처럼 하더니만 어쩐 일이지?”
“여기 있으면 떡고물이 짭짤하게 떨어진다는 걸 안 거지요.”
“떡고물?”
쓰게 웃으며 임경업 장군이 이유를 설명했다.
“약탈품을 요동까지 실어다 주는 대신 삼 할을 받기로 몽고족 족장들하고 약조를 했답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어제 갔더니 넌지시 이야기를 해 주며 저한테도 생각이 있냐고 떠보더군요.”
“허어, 참. 그래서 뭐라고 했어?”
그러자 임경업 장군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히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뭐라고 합니까. 그냥 우리는 몽고족과 달리 노골적으로 약탈할 생각은 없지만 처치 곤란한 전리품이 생기면 도움을 받겠다고 했지요.”
잠깐 멍하니 쳐다보던 도현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잘했어.”
“어찌 됐든 청군이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다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상황이 변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퇴로가 확보되어 있다는 것만큼 든든한 건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적진 한복판에 있을 때는 그 가치가 더 크고 병사들의 사기에도 직접 영향을 끼친다.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 될 텐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꺼낼 참이었어.”
도현이 턱짓을 하자 한쪽에 서 있던 칠현이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서는 임경업 장군 앞에 내려놨다.
“이게 뭡니까?”
“펼쳐 봐.”
끈을 풀고 두루마리를 옆으로 펼치자 산동반도 지도가 나왔다.
“이건……!”
“명 조정에서 제작한 군사지도야.”
“이걸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임경업 장군이 놀란 얼굴로 묻자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나라가 얼마나 썩었는지 돈만 조금 찔러주면 병부 관리가 직접 필사해서 뒤로 빼돌려 준다는군.”
“허어.”
최고 극비로 취급되는 군사지도가 이렇게 쉽게 유출되어 나돌아 다닌다니 임경업 장군은 기가 막히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시선을 내려 지도를 살펴보자 군사용답게 지형이 아주 상세히 그려져 있고 거리도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거기 보면 파란색으로 표시된 곳이 있을 거야.”
“…….”
무심코 표시된 곳을 확인한 임경업 장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현을 쳐다봤다.
“여긴 세곡 창고 아닙니까.”
“맞아. 명나라 후방을 흔들려면 좀스럽게 양민들이 사는 고을을 약탈하는 것보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는 세곡 창고들을 터는 것이 더 충격이 크지 않겠어? 물론 그러면서 부수입도 짭짤하게 올리고 말이야.”
“대군마마한테 졌습니다. 언제 이런 계획을 다 세우셨습니까.”
황제의 지시를 따르는 것과 동시에 한몫 단단히 챙겨 갈 생각을 하다니 정말 도현다운 행동이었다.
“머리를 좀 굴렸지. 일단 창고를 점령하면 봉황상단 배가 와서 곡식을 가져갈 테니 운송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물론 곡식을 우리가 챙겼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떠날 때는 건물을 불태워야겠지.”
원활한 운송을 위해 세곡 창고는 배가 다닐 수 있는 큰 강 옆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도현의 말처럼 봉황상단이 소유한 교역선을 불러오기 좋았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세곡 창고를 노리면 명군도 대비를 할 텐데요.”
“그러면 다른 목표를 노리면 되지. 병력을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이니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어.”
혹시나 도현이 욕심을 부려 병사들을 위험하게 할까 봐 살짝 염려했던 임경업 장군은 그의 대답을 듣자 그런 생각을 털어 냈다.
“알겠습니다.”
“장수들과 상의해서 우리한테 가장 유리한 경로를 찾아서 보고하도록 해.”
“옛.”
눈을 반짝이며 대답한 임경업 장군은 어느새 다 식은 차를 단숨에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방을 나서는 임경업 장군의 뒷모습을 보며 도현이 미소 짓고 있을 때 가까이 다가온 칠현이 귓속말을 했다.
“봉황상단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네.”
잠시 뒤 미닫이문이 열리며 보통 키의 중년인 한 명이 들어와 넙죽 절을 했다.
“대군마마를 뵙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박 행수였군. 그동안 잘 지냈나?”
“예.”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중년인은 의주 출신 박춘동이라는 사내로, 봉황상단에서 행수로 일하고 있었다.
“지시하신 대로 교역선 열 척과 무장을 갖춘 판옥선 여섯 척을 언제든지 연락만 주시면 한 시진 안에 올 수 있도록 포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인도에 정박시켜 놨습니다.”
“수고했어. 그런데 선원들은 데려왔나?”
“네. 하온데 배도 없이 선원은 왜 데려오라고 하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의아한 얼굴로 묻자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이제 곧 있으면 여길 떠날 텐데 이 집 주인이 사 놓은 재물을 그냥 놔두고 가기 아깝잖아. 적당히 값나가는 걸 골라서 웅도로 옮겨 놓으려고.”
상인답게 바로 말귀를 알아들은 박춘동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럼 선단에 연락을 넣어 배를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에?”
“알아보니까 금 대인이라는 놈이 기특하게도 커다란 교역선을 두 척이나 가지고 있더라고. 뭐, 보나 마나 고리대를 놔서 반 강제로 빼앗은 거겠지만 말이야.”
그제야 선원 마흔 명을 차출해서 오라고 한 이유를 깨달은 박춘동은 무릎을 치며 감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래서 선원들을…….”
“맞아. 그 배를 써서 재물을 웅도로 가져가.”
“알겠습니다.”
“임 장군한테 일러서 병사 이백 명을 내줄 테니까 청군의 시선을 피해 오늘 밤에 작업을 하게.”
“네.”
대답을 들으며 시선을 돌린 도현은 한쪽에 서 있는 칠현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녁까지 박 행수와 선원들이 쉴 수 있도록 숙소를 구해 줘.”
“예, 마마.”
“밤에 작업하려면 피곤할 테니 이만 나가 봐.”
도현의 말에 박춘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는 칠현을 따라 방을 나갔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그날 밤 지시한 대로 창고에 쌓아 둔 비단과 곡식 일부, 그리고 장원에 있던 값비싼 장식품들을 수레에 실어 은밀히 포구로 옮긴 박춘동은 자신이 타고 온 판옥선까지 총 세 척의 배에 물건을 나눠 싣고는 웅도로 떠났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기 때문에 십인대 다섯 개를 장원에 남겨 둬 청국 수군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도록 한 도현은 다음 날 군대를 이끌고 포구를 출발했다.
첫 목표는 동쪽으로 이틀 거리에 위치한 세곡 창고였다.
드넓게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 조선군이 행군을 멈추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앞쪽에서 다섯 기의 기마가 뽀얀 먼지를 피워 올리며 달려왔다.
이히히힝!
“워워.”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운 부관 박도치는 능숙한 동작으로 안장에서 내려와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는 도현과 임경업 장군에게 다가가 군례를 취했다.
“다녀왔습니다.”
제일 안쪽에 있는 도현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그래, 분위기가 어땠어?”
“백인대 세 개 정도가 세곡 창고를 지키고 있지만 아직 우리가 오는 걸 모르는지 경계는 허술했습니다.”
“몽고 애들이 워낙 난리를 쳐 대서 비상이 걸려 있을 줄 알았더니 의외군.”
“그러게 말입니다.”
임경업 장군도 의외라는 듯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사실은 피란 온 주민들을 통해 연태煙臺포구에 변고가 생겼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청군이 아닌 수시로 출몰해 해안 마을을 노략질하는 왜구로 소문이 잘못 나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마구 노략질을 해 대고 있는 몽고족 때문에 왜구가 아니라는 것이 조금씩 퍼지고 있었지만 아직 여기까지는 전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배를 타고 움직이는 왜구는 토벌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딱히 토벌을 한다고 해도 이익이 되는 것도 없기에 부패한 지방관들은 주민들의 고통을 그냥 못 본 척 넘기는 일이 많았다.
지금이 그런 경우로, 불과 이틀 거리에 있는 포구가 정체 모를 무리에 습격을 받았는데도 세곡 창고를 책임진 관리는 토벌대를 보내기는커녕 설마 여기까지 오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경계조차 강화하지 않았다.
“혹시 함정을 파 놓은 것 아니야?”
도현으로서는 당연한 의심이었지만 박도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걸 염려해서 주위를 샅샅이 살펴봤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놓치기 아까운 기회입니다.”
습관처럼 턱을 매만지며 고심하던 도현은 임경업 장군의 말에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공격하자고. 혹시 모르니까 백인대 다섯 개는 예비로 빼 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무 작대기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간단히 공격 계획을 짠 도현은 잠시 뒤 병사들을 출발시켰다.
해안에 위치한 세곡 창고는 해적과 도적 떼의 습격에 대비해 굵은 통나무로 만들어진 목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안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 열 채와 병사들의 숙소로 쓰는 건물이 여러 채 들어서 있었다.
목책 끝에 세워진 망루 위에는 창을 든 병사 두 명이 번을 서고 있었지만 임무는 뒷전이고 기둥에 등을 대고 자기들끼리 농담 따먹기를 하느라 바빴다.
“연태포구가 습격당했다는 이야기 들으셨죠?”
“왜구가 쳐들어온 거라며.”
“그게 왜구라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몽고족이라고도 하더라고요.”
그러자 고참병은 심드렁한 얼굴로 주방에서 챙겨 온 육포 쪼가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여기가 산해관도 아니고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몽고족이 어떻게 와. 헛소리하지 말고 근무나 똑바로 서.”
“역시 아니겠지요?”
“당연하지.”
바로 그때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목책 밖에 있는 풀숲에서 화살이 날아와 병사들의 가슴에 박혔다.
쉬익!
“컥.”
“으……윽.”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뻐끔거리던 병사들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반대편 망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고 그렇게 경계병들이 모두 제거되자 풀숲이 흔들리더니 숨어 있던 조선군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해!”
임경업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직접 나선 도현이 낮게 소리치자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 끝에 밧줄이 매달린 갈고리를 집어 던졌다.
휘리리릭- 탁!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갈고리는 정확히 목책 끝에 걸렸다.
제대로 걸렸는지 몇 차례 힘껏 당겨 확인한 뒤 허리에 검을 찬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재빨리 달려가 줄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간 병사들은 입구를 지키고 있던 적병을 순식간에 제압하고는 지체 없이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퍼퍽!
“으악.”
“끄헉.”
“어서 서둘러!”
“예.”
끼이이익.
통나무를 잘라서 만든 문이 활짝 열리자 초조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현이 검을 뽑아 들며 크게 소리쳤다.
“공격!”
우와아아!
그러자 돌격 태세를 취하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지르며 목책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에서 명령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을 따라 도현도 호위와 함께 앞으로 달려갔다.
“저, 적이다!”
충격과 놀람이 그대로 담긴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비상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땡땡땡!
“뭐, 뭐야?”
세곡 창고 관리 책임자인 주천석은 당황해서 관사 밖으로 뛰어나왔다가 조선군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걸 보고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며칠 전 근처 포구에 변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정규군이 지키는 이곳까지 쳐들어올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진작 지원 병력을 요청해 두지 않은 걸 후회하던 주천석은 선두에서 나부끼는 조선군 군기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
“저건!”
우방인 조선군 군기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왜구라고 하기에는 병사들의 덩치도 크고 무엇보다 통일된 복장과 무장을 갖추고 있는 것이 해적이 아니라 정규군 같았다.
하지만 주천석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수십 발의 화살을 보며 그의 눈동자는 절망과 공포로 물들었다.
쉬이이익!
비처럼 쏟아진 화살 세례에 비상종 소리를 듣고 막사 밖으로 뛰어 나온 적병들은 고슴도치가 되어 무더기로 흙바닥에 쓰러졌다.
바로 이어서 정신없이 덮친 조선군의 공격에 적들은 힘없이 휩쓸려 버렸다.
“크아악!”
“커헉!”
“다! 쓸어버려라.”
“죽어!”
“흐억. 살려 줘!”
미처 방어 진형을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쐐기 대형으로 돌격해 오는 조선군의 공격은 공포 그 자체였다.
조선군이 휘두른 병장기에 적들은 비명과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순식간에 바닥은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진 시신으로 가득 찼다.
기선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숫자마저 조선군이 훨씬 많으니 애초에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광기에 찬 울부짖음과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도현은 비호 같은 몸놀림으로 일 검에 상대의 목을 쳐 냈다.
츄악!
“끄어억.”
베고 찌르고 걷어차며 그동안 익힌 무예를 아낌없이 쏟아 냈는데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어김없이 피를 뿌리며 적병이 허물어져 내렸다.
도현과 함께 다니는 호위 무사들도 실력을 발휘해 병장기에 피가 마를 새 없이 상대를 거침없이 베어 나갔다.
입구가 뚫리고 채 일각도 지나기 전에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가자 더 이상 저항할 의지가 사라진 적들은 분분이 무기를 버리며 항복했다.
챙그랑. 챙.
“하, 항복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창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두 손을 들어 올린 적군 병사를 향해 도현이 손을 휘둘렀다.
퍽!
“윽!”
“으으…….”
거꾸로 든 검 손잡이의 끝부분으로 관자놀이를 타격하자 적병은 신음을 흘리면서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도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것이 기폭제가 된 듯 여기저기서 병장기를 떨어트리는 쇳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싸움이 끝나 버렸다.
“마마! 다친 덴 없으십니까?”
“멀쩡하니까 걱정할 것 없소.”
피로 더러워진 칼날을 쓰러진 적군 병사의 옷에 슥슥 닦으며 도현이 돌아보자 어느새 다가온 임경업 장군이 서 있었다.
“다행이군요.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삼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왜?”
“왜라뇨……. 대군께선 귀한 신분 아니십니까. 그런데 괜히 이런 작은 전투에까지 일일이 나서시다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시려고요.”
“하하! 나도 명색이 무인인데 어떻게 뒷짐이나 지고 물러나 있을 수 있겠소.”
도현은 곤란해하는 임경업 장군에게 큰 소리로 웃어 보이고는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원래 성격이 이래서 말이오. 계속 잔소리나 하면서 나를 설득하려는 것보다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빠를 거요.”
“마마…….”
“그리고 내 뒤는 임 장군과 우리 병사들이 지켜 줄 텐데 뭐가 걱정이오. 안 그렇소?”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는 도현의 말을 듣고 임경업 장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께서도 참……. 그런 말을 들으니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군요.”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뜰 칠현이 놈하고 항상 투덕거리며 지내다 보니 내가 말솜씨 하나만은 끝내주게 늘었거든.”
그렇게 말한 도현은 임경업 장군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전투가 일단락되자 항복한 적병들은 모두 한군데 모아 무릎을 꿇려 놓았고, 사용하던 무기들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게 반대쪽으로 치워 놓았다.
겁에 질린 눈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적병들을 도현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임경업 장군이 곁에 다가와 물었다.
“저들은 어찌 처리할까요?”
“음…… 그냥 풀어 주시오.”
“예에?”
방금 전까지 목숨 걸고 싸우던 적군을 그대로 풀어 주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임경업 장군은 깜짝 놀랐다.
“풀어 주다니요, 비록 무기를 빼앗긴 했지만 적군 진영에 돌아가면 동료를 데리고 다시 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전에 우리가 재빨리 자리를 뜨면 놈들도 더 이상 쫓아오진 못할 거 아니오. 안 그래도 귀한 사람 목숨이 개만도 못하게 픽픽 죽어 가는 판인데, 더 이상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긴 싫군. 그리고 우리 처지에 포로를 주렁주렁 데리고 다닐 수도 없잖소.”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도현을 보고 임경업 장군은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까지 봐 온 도현의 성격상 한번 입 밖에 내뱉은 말은 번복하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병사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 도현은 호위 무사들과 함께 직접 세곡 창고를 둘러봤다.
철컥!
관사 앞에서 화살에 맞아 죽은 주천석의 품을 뒤져 찾아낸 열쇠 꾸러미로 칠현이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자물쇠를 풀자 호위대 무사 두 명이 커다란 나무 문을 양옆으로 열었다.
끼이이익.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답게 폭이 일 장이 넘을 정도로 실내는 엄청 넓었는데 그곳이 꽉 찰 만큼 많은 곡식 포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못해도 오백 섬은 넘겠는데요.”
칠현이 호들갑 떠는 걸 들으며 창고 안을 살펴본 도현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곳도 열어 봐.”
“예.”
신이 나서 대답한 칠현은 재빨리 나머지 창고 문도 열었다.
모두 열 채나 되는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 채워져 있고 얼추 봐도 오천 섬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잠시 뒤 연기로 약속된 신호를 보내자 근처 바다에서 대기 중이던 봉황상단 소속 선단이 재빨리 다가왔다.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해 커다란 선박 두 척이 한꺼번에 정박할 수 있는 선착장이 설치되어 있어서 화물선은 쉽게 배를 댔다.
곧바로 잔교가 설치되고 일부 경계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이 달려들어 창고 안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을 배로 실어 날랐다.
“빨리 움직여!”
“으싸! 으싸!”
“해 떨어지기 전까지 작업 끝내야 된다.”
감독관으로 변신한 장수들의 호통에 병사들은 무거운 곡식 포대를 두 사람이 나눠 들고는 일개미처럼 쉴 새 없이 옮겼다.
이천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달라붙어서 작업하자 곡식 포대는 금방 눈에 보일 정도로 푹푹 줄어들었다.
얼마 뒤 홀수선이 물밑으로 깊숙이 내려갈 만큼 화물칸을 가득 채운 배들이 밧줄을 풀고 나가자 그 빈자리를 바로 다른 배가 채웠다.
그런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한 끝에 오후 늦게야 작업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이게 마지막 배입니다.”
임경업 장군의 보고에 막 선착장을 벗어나는 배를 보며 도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창고를 다 비운 거야?”
“아닙니다. 워낙 보관되어 있는 곡식이 많다 보니 창고 하나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래?”
배가 부족해 곡식을 다 가져가지 못하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도현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양이 얼마나 돼?”
“오백 섬 정도 됩니다.”
팔짱을 낀 자세로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어 임경업 장군과 시선을 맞추면서 말했다.
“그건 우리가 가져가서 군량미로 쓰고 남는 건 공 장군한테 싼 값에 넘겨주자고.”
“알겠습니다.”
밤이 늦었기에 세곡 창고에서 머문 조선군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노획한 곡식을 가지고 연태포구로 돌아갔다.
떠나면서 창고와 건물에 불을 질러 여기서 조선군이 곡식을 얼마나 가져갔는지 모르게 만들었다.
짐수레 가득 실린 곡식 때문에 돌아가는 데 사흘이나 걸렸지만 도현이 풀어 준 포로들로 인해 세곡 창고가 습격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텐데도 쫓아오는 적군은 하나도 없었다.
흑치영
후원 한쪽 방을 차지하고 있던 흑치영은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고 기력이 회복되자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오늘도 산책을 나온 흑치영은 정원에 천막을 치고 점심을 지어 먹는 조선군 병사들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처음 아내의 부축을 받아 밖에 나왔을 때 자신이 포구를 습격한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겁했는지 모른다.
이웃을 죽이고 포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며 당장 떠나려고 했지만 아내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다시 짐을 내려놨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적개심을 감추지 못했지만 아내를 통해 약탈한 자들은 몽고족 전사와 청군이고 조선군은 가담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자 조금은 감정이 누그러졌다.
“산책 나온 거요?”
누군가 말을 거는 소리에 흑치영이 몸을 돌리자 건장한 체격에 갑옷을 입은 사내 한 명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김 형.”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흑치영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친근하게 형이라고 불린 사내는 장원에 남겨진 백인대를 지휘하는 대장으로, 이름은 김종보였다.
“몸은 좀 어떻소?”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약간은 어색하지만 명나라 사람답지 않게 능숙한 조선말을 구사하는 흑치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김종보가 호탕하게 말했다.
“잘됐구려. 그게 다 우리 대군마마 덕분이오.”
“안 그래도 구명지은에 감사하다는 인사라도 드려야 되는 것이 도리인데 도통 얼굴을 뵙기가 어렵군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흑치영이 하는 말에 김종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를 했다.
“조만간 한 건 크게 올리고 돌아오실 테니 그때 만나 뵈면 될 거요.”
“다른 고을을 점령하러 가신 겁니까?”
이야기를 하는 흑치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는데 뭣 때문에 그러는지 짐작한 김종보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비슷하지만 우린 거친 몽고족이나 청군과 달리 함부로 양민들 재산을 약탈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자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찔끔한 흑치영은 황급히 포권을 해 보이며 사과했다.
“그런 분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오. 우리는 안 그랬다고 해도 함께 온 무리가 포구에서 한 짓거리가 있으니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이다.”
그렇게 분위기가 약간 어색해졌을 때 빼빼 마른 병사 하나가 이쪽으로 뛰어왔다.
“백인장님!”
“귀청 떨어지겠다.”
김종보가 농을 했지만 병사는 듣는 둥 마는 둥 급히 말했다.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왜? 또 칠복이가 사고라도 친 거야?”
“그게 아니라 대군마마하고 임 장군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예.”
“그럼 어서 가 봐야지. 먼저 실례하겠소.”
“네.”
들뜬 표정을 지은 김종보가 손을 흔들고는 병사와 함께 황급히 장원 정문으로 달려갔고 그 모습을 보며 흑치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편 곡식 포대를 가득 채운 짐수레 수십 대를 끌고 조선군은 보무도 당당하게 줄을 지어 장원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대군마마.”
군례를 올리며 예를 갖춘 김종보는 냉큼 도현이 탄 말의 고삐를 잡았다.
“별일 없었지?”
“그러믄입쇼. 여긴 제가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허리를 직각으로 접으면서 크게 대답하는 모습에 도현은 미소 지으며 말에서 내렸다.
“하긴 자네처럼 범 같은 장수가 지키고 있는데 누가 감히 여길 넘보겠어.”
“아이고, 부끄럽습니다.”
“하하하. 임 장군, 내 말이 틀렸소?”
얼굴이 빨갛게 물들며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도현이 웃음을 터트리며 묻자 임경업 장군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자네가 있어서 든든하다네.”
“장군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사실인걸, 뭐.”
울상을 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종보 백인장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준 도현은 임경업 장군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난 이만 들어가 볼 테니 뒤처리는 임 장군이 맡아 주시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도현은 칠현과 함께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처에 도착한 그는 제일 먼저 무거운 갑옷부터 벗었다.
“휴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날씨가 더워서 더 힘드시죠.”
“무게는 이제 익숙해져서 견딜 만한데 통풍이 전혀 안 돼서 땀이 차는 건 정말 못 참겠어.”
“바로 목욕물을 준비해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이럴 때는 또 눈치가 빠르구나.”
“에이, 또 왜 그러십니까.”
“기특해서 그러지.”
“헤헤헤.”
갑옷을 챙겨 든 칠현이 밖으로 나가자 도현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목욕으로 시원하게 피로를 푼 뒤 이른 저녁을 먹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마마, 지난번 거리에서 구해 주신 사내가 마마를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구해 놓고 깜빡 잊고 있었는지 도현은 짧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맞다. 부상이 심하다던데 많이 좋아졌나 보지?”
“그런가 봅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살짝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든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
“예.”
잠시 뒤 칠현은 머리에 영웅건을 쓰고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흑치영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분이 봉림대군마마시오.”
칠현의 말에 흑치영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도현을 보며 넙죽 허리를 숙였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대군마마가 아니었다면 저와 제 가족은 그날 큰 곤욕을 치렀을 겁니다.”
그러자 도현은 흑치영을 쓸어 보며 점잖게 말했다.
“아닐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것보다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괜찮나?”
“네. 보내 주신 의원의 치료를 받아 이제 혼자 거동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군. 이리 와서 앉게.”
흑치영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고귀하신 왕족과 마주 앉을 수 있겠습니까.”
“환자를 세워 두는 것이 내가 불편해서 그래. 괜찮으니 이리 오게.”
재차 권유를 했지만 진짜 그래도 될지 망설이던 흑치영은 옆에 있던 칠현이 눈치를 주자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흑치영이 맞은편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칠현이 차를 가져와 두 사람 앞에 내려놨다.
“들게.”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흑치영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어 몇 모금 마셨다.
예상과 달리 다도茶道를 정확히 알고 예법에 맞게 차를 마시는 모습에 도현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다도를 배웠나 보군?”
“예. 선친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도를 알 정도면 귀한 집 자손 같은데 어쩌다가 그런 낭패를 당한 건가?”
도현의 물음에 흑치영은 손을 살짝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냥 여기서 작은 철기점을 운영하는 장사치일 뿐입니다.”
“철기점이라면…… 대장장이라는 말인가?”
“예. 선대 때부터 내려온 가업을 물려받았습니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와 다도라. 묘한 조합이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던 도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도 모르는군.”
“흑치영이라고 합니다.”
“…….”
무슨 일인지 이름을 듣자마자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앞에 있는 흑치영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지금 흑치영이라고 했나?”
“……예.”
“그러니까 이름이 영이고 성이 흑치黑齒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흑치영을 보며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숨을 내쉬었다.
“허어!”
그러자 옆에 있던 칠현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봤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도현은 칠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잠시 흑치영을 물끄러미 보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의 자손인가?”
흑치영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약간 경계 어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하하! 이런 곳에서 그분의 자손을 만나다니 정말 대단한 우연이군.”
짐작이 맞아떨어지자 도현은 얼굴을 활짝 펴며 방 안이 떠나가라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흑치상지 장군은 백제의 명장으로, 황산벌 전투로 유명한 계백 장군에게 가려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삼국사기와 중국의 역사서인 신당서에 언급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대대로 달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차관직을 지내던 명문가 출신으로, 뛰어난 용력에 머리까지 비상하여 스무 살에 대를 이어 달솔 벼슬에 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망하면서 그의 인생도 큰 격랑에 휩싸였다.
왕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고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죽자 흑치상지는 부하들을 데리고 임존성에 자리 잡은 채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또 다른 부흥군 장수인 복신과 손을 잡고 한때는 이백 개의 크고 작은 성을 탈환하며 꿈을 이루는 것 같았지만 내부분열과 나당 연합군의 강한 압박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당 황제가 몇 번을 권유한 끝에 중국으로 건너간 흑치상지는 좌령군장군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하며 승승장구했지만 끝내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을 받고 사형당했다.
역사를 공부하다가 잊힌 영웅인 흑치상지 장군에 대해서 알게 되고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던 도현은 그의 자손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자 무척 반가웠다.
“제 조상님에 대해서 아십니까?”
“암, 알다마다. 백제국의 명장이자 충신으로 나라가 망한 다음에도 목숨 바쳐 부흥 전쟁을 일으키셨고 힘이 약해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당 황제의 끈질긴 권유로 중국에 건너가 우리 한민족의 기개를 크게 떨치신 분 아닌가.”
이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가문의 내력을 기억하고 있고 자신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조상인 흑치상지 장군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을 나타내는 도현의 모습에 흑치영은 의아하면서도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군마마 같은 고귀하신 분이 저희 조상님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원래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다 보니까 흑치상지 장군님처럼 큰 인물이 잊힌 게 아쉬울 따름이야.”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 도현은 흑치영을 보며 친근하게 말했다.
“흑치상지 장군님의 자손이라고 하니 자네가 골목에서 보여 준 용력이 이해가 되는군. 따로 무예를 익혔나?”
질문을 받고 약간 망설이던 흑치영은 이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무예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그냥 집안에 내려오는 방법으로 몸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래? 흑치상지 장군의 무예라니 이거 대단하군.”
“세월이 흐르면서 수련법이 많이 실전되어 지금은 그저 건강을 위해 체력을 키우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한번 보고 싶군. 언제 기회가 되면 백제 전통 무예를 견식할 수 있도록 해 주게.”
“괜히 대군마마의 눈만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지난번 골목에서 몽고족 전사 세 명을 혼자 상대한 걸 보면 무예 실력이 상당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냥 대충 감사 인사만 받고 돌려보내려던 처음 생각과 달리 흑치영이 평소 존경하던 흑치상지 장군의 자손이라는 걸 알게 된 도현은 문득 그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럼 여기서 계속 철기점을 할 건가?”
도현의 말에 흑치영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쉽지만 난리 통에 가게와 집이 모두 불타서 당분간은 위해威海성에 있는 처갓집에서 신세를 지려고 합니다.”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군. 이거 우리가 한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미안하네.”
“운이 없었던 거지요. 조선군은 약탈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일단 흑치영이 자신과 조선군에 별다른 악감정이 없는 것 같아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뜸을 들이던 도현은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와 함께하는 건 어떤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흑치영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도현은 웃으며 말했다.
“내 휘하에 들어올 생각이 있냐는 걸세.”
뜻밖의 제안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흑치영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거절했다.
“미천한 소인을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부양할 가족이 있고 괜히 대군마마께 누를 끼칠까 봐 걱정됩니다.”
“가족도 함께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줄 것이니 염려 말게. 그리고 이건 한순간 기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러는 거야.”
“…….”
“흑치상지 장군처럼 백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큰사람이 되어 주게.”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열변을 토하는 도현을 보고 흑치영은 심장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자신한테는 부양해야 될 가족이 있고 아무리 조선의 왕족이고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해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의 말을 믿고 모험을 걸어도 좋을지 갈등이 됐다.
그런 흑치영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물론 이런 일은 바로 결정할 수 없겠지. 이틀간 더 머물다가 장원을 떠날 계획이니까 그때까지 답을 주게.”
“떠나신다면 이제 다시는 안 돌아오시는 겁니까?”
“글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아마 돌아오기 어려울 거야.”
“그렇군요.”
도현의 말에 흑치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뭔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자! 그 이야기는 이만하고, 오랜만에 기분 좋은 인연을 맺었는데 술을 빠뜨릴 수 없지. 박 내관.”
그러자 칠현이 허리를 살짝 숙이면서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주안상을 차려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칠현이 밖에 있는 호위 무사에게 말을 전하러 가자 도현은 흑치영을 보며 가볍게 물었다.
“아직 부상이 완쾌되지 않았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예.”
얼마 안 있어 원래 장원에서 일하던 하녀 두 명이 술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고급스럽게 도자기로 만들어진 주전자를 집어 든 도현은 흑치영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며 말했다.
“흑치상지 장군의 용맹과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이 맺어 나갈 인연을 위해여 건배하세.”
마치 상대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하며 도현이 술잔을 들자 흑치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잔을 마주 들었다.
“캬아! 자네와 함께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술맛이 더 좋군.”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비우며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눴다.
다음 날, 흑치영은 하루 종일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전날 밤에 들은 도현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도저히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곁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부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묻자, 흑치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래요? 은인께서 그런 말씀을…….”
도현의 제안은 흑치영의 아내에게도 역시 뜻밖인지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결단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만약 당신께서 은인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알아요. 저와 아이가 마음에 걸리는 거죠?”
아내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함께 살을 맞대고 산 지가 몇 년인데 서로의 마음을 어찌 모르랴.
애초에 흑치영은 좋고 싫음이 확실한 사내라서 저렇게 우물쭈물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런 그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건 도현의 제안에 마음이 끌리면서도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게 있다는 소리다.
“당신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까 괜히 전쟁에 휘말렸다가 우리 모자를 지켜 주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역시 못 당하겠군.”
여자의 감이란 날카롭다며 흑치영은 감탄했다.
겉으로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어느새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지금은 난세요. 어제까지 멀쩡히 살아 있던 사람도 내일이면 죽을지 모르는데, 지금까지 평범한 대장장이로 살아온 나로선 우리 가족을 지키는 것만 해도 벅차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은인의 말씀을 듣고 꿈이 생긴 거로군요.”
“음…….”
잠시 말을 고르던 흑치영은 입을 열었다.
“나도 한때는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을 질타하는 장수를 꿈꿨지. 어젯밤 대군마마와 말을 나누다 보니 젊었을 적 품었던 이상이 다시 떠오르더군. 사내로 태어나 넓은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고 내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그런 꿈 말이오.”
“네, 저도 알아요.”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금 새벽에 잠을 깨어 보면 어두운 방 안에 앉아 검을 쓰다듬고 있는 흑치영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손수 만든, 그리 비싸지도 않고 좋은 재료를 쓴 것도 아니지만 말로는 평범한 촌부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검을 손질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도 그의 마음속엔 옛날의 그 꿈이 살아 있음을 그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을 부양하고 생활해 나아가야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깊숙이 잠들어 있던 것을 도현이 건드려 버리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진 것이다.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당신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정말 그래도 되겠소?”
“한 번뿐인 인생이잖아요. 후회 없이 당신의 길을 가세요.”
흑치영은 가만히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없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고맙소. 당신은 정말 현모양처로군.”
“후후, 그걸 이제 깨달으시다니 너무하세요.”
마음의 결심이 서자 흑치영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날 오후 도현이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고, 이윽고 어제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지고 있던 것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흑치영은 이미 술잔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도현과 마주 앉아 다짜고짜 머리를 조아렸다.
“갑자기 왜 이러는가?”
깜짝 놀란 도현이 묻자 그는 결연한 표정을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젯밤 하신 말씀, 아직 유효합니까?”
“…….”
흑치영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자 도현도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표정을 굳히고 허리를 꼿꼿이 편 후에 답했다.
“그러네.”
“그럼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흑치영, 지금 이 순간부터 대군마마의 수족이 되어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빙 둘러 가는 겉치레 말 없이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진심으로 토해 내는 흑치영의 모습에 도현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여전히 몸을 숙인 자세로 조마조마하게 도현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던 흑치영은 뭔가를 끌러 내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흑치영, 고개를 들게.”
흑치영이 시선을 들어 올리자 한 손에 검을 든 도현이 그를 향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우연한 기회에 얻은 것인데, 날이 잘 들고 단단한 것이 천하의 명검이라 해도 손색이 없지. 이걸 자네에게 증표로 주겠네.”
“그런……! 너무 과분합니다.”
대장장이 일을 해 왔던 만큼 웬만한 검은 한눈에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바로 판단할 수 있다.
도현이 그를 향해 내민 것은 화려한 장식 따위 없는 실전용 검이지만 어느 이름 없는 명장이 만든 것인지 몰라도 굉장히 공을 들인 상급품이었다.
무사에게 무기란 자신의 목숨줄과도 같은 것.
이만한 물건이라면 은자 수십 냥을 주고서라도 사려고 할 사람이 넘쳐 날 텐데 아무 대가도 없이 받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양하지 말게나. 아무리 좋은 검이라 해도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나한테는 너무 길고 무거워서 말이야, 제대로 쓸 수가 없다네. 하지만 자네에겐 딱 맞을 것 같군.”
그 말을 듣고 흑치영이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일반적인 검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길었다.
검날에 쓰인 재료를 어떤 독특한 소재와 섞었는지, 보통 은색이어야 할 것이 묵빛이었으며 폭도 넓어 흑치영 정도의 체구를 가진 장정이 아니면 쉽게 사용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자아, 얼른 받게나. 설마하니 하루 종일 이렇게 들고 있게 할 셈인가?”
장난스럽게 재촉하는 도현의 말에 흑치영은 쉽사리 손을 내밀지 못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검을 건네받았다.
“이로써 자넨 내 사람이 된 거야. 이 검은 그걸 약속하는 증표일세.”
“네, 마마!”
흑치영은 감격해서 눈물을 숨기지 못했고, 도현은 그런 그를 향해 직접 술을 따라 주었다.
흑치영, 이후 후세에 이름이 길이 남을 장군의 탄생이었다.
노획한 곡식을 청군 수군 제독인 공유덕 장군에게 일부러 시세의 절반 가격만 받고 싸게 넘겨준 도현은 연태포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미 몽고족 전사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는지 조선군을 막아서는 적군은 하나도 없었다.
이때쯤 연태포구에 상륙한 무리가 왜구들이 아니라 청군이라는 걸 알아차린 산동성 도지휘사는 급히 황제가 있는 자금성에 사실을 알리고 부랴부랴 병력을 집결시켰다.
눈에 띄는 건 다 약탈하고 불태우는 몽고족과 달리 도현은 일반 마을은 건드리지 않고 철저히 세곡 창고만 노렸다.
그사이 턴 창고만 다섯 곳이고 노획한 곡식은 삼만 섬이 넘었다.
배가 부족해 도저히 가져갈 수 없는 곡식은 불태우지 않고 부근에 사는 주민들에게 그냥 나눠 주었다.
이런 도현의 행동이 소문나자 무거운 세금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힘겨워하던 주민들은 은근히 조선군이 오기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도지휘사는 벌써 수십 개의 고을과 성을 약탈하고 불태워 큰 피해를 입힌 몽고족 대신 황제에게 바치는 세곡을 빼앗긴 죄로 문책을 당할까 봐 겁을 내서 반개라는 장수에게 병력 오천을 내줘 조선군을 상대하도록 했다.
이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 뿌려 놓은 척후병을 통해 도현에게 보고됐다.
세곡 창고는 아니지만 제법 큰 명군 거점 하나를 점령한 도현은 적 지휘관이 쓰던 방을 차지하고 앉아 휘하 장수들과 가볍게 술을 마시며 오늘 거둔 승리를 치하하고 있었다.
“다들 수고 많았어.”
“명나라 수군 분함대가 주둔하는 곳이라고 해서 잔뜩 긴장했는데 너무 쉽게 끝나서 이거 맥이 풀릴 지경입니다.”
“하하하!”
박도치의 말에 모여 있던 다른 장수들도 와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상석에 앉아 있는 도현도 쓴웃음을 지어 보일 만큼 이번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한바탕 격돌을 각오하고 쳐들어왔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명나라 수군은 조선군이 온다는 소식에 주둔지를 버리고 벌써 멀리 도망가 버린 후였다.
그래서 조선군은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수군 주둔지 하나를 접수했다.
얼마나 급하게 달아났는지 창고에는 미처 챙겨 가지 못한 병장기와 물자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고 선착장에는 군선까지 한 척 버려져 있었다.
“창고를 뒤져 보다가 귀한 화약이 무려 쉰세 관(200kg)이나 버려져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군선 안에는 홍이포까지 그대로 설치되어 있더라고요.”
그렇게 오합지졸인 명군을 안주로 삼아 즐겁게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군관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충!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명군 오천이 우리를 향해 빠르게 접근 중이라고 합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순간 방 안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몽고족 부대가 산동성 성도인 제남에 더 가까이 있는데 왜 하필 우리부터 먼저 공격하는 거야?”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임경업 장군이 약간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세곡 창고를 집중적으로 노린 것이 아마 도지휘사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입니다.”
“끄으응.”
미간을 찌푸린 도현은 모여 있는 장수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오천이라면 만만치 않은 숫자인데 어찌했으면 좋겠나?”
“맞붙어서 지지는 않겠지만 그러면 우리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박도치의 말에 다른 장수들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투를 회피하자는 거야?”
“자존심이 상하지만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지만 어쩐지 개운치 않은 느낌에 도현이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고 있을 때 한쪽에 앉아 있던 흑치영이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마음껏 해.”
도현과 장수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흑치영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상대의 목표가 우리라면 회피한다고 해도 끈덕지게 계속 달라붙지 않을까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지?”
흑치영은 도현과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오십 리쯤 가면 소천곡이라는 협곡이 하나 있습니다. 길이 아주 좁고 양옆으로 울창한 숲과 절벽이 있어 매복하기 딱 좋은 장소인데 명군이 제남에서 이쪽으로 오려면 꼭 거쳐야 되는 곳이죠.”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눈을 반짝였다.
“거기서 매복 공격을 하자는 거야?”
“그렇습니다. 상대를 협곡 안으로 완전히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손쉽게 전멸시킬 수 있을 겁니다.”
“흐음.”
손가락으로 팔걸이 끝부분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임경업 장군을 봤다.
“임 장군이 보기에는 어떻소?”
“적을 유인하는 것이 관건이기는 하지만 괜찮은 작전 같습니다. 숲이 있다고 하니 가능하면 화공을 곁들이면 더 좋겠군요.”
긍정적인 반응에 도현은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건 내 성격에도 안 맞아. 그럼 흑치영의 의견대로 소천곡에서 매복을 펼쳐 적을 격멸하도록 하지. 제장들은 한 시진 뒤에 흑치영과 함께 구체적인 작전을 짜서 내게 보고하게.”
“옛.”
“다들 나가 봐.”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과 장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군례를 취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저녁에 다시 모여 작전을 점검한 도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사들을 깨워 식사를 챙겨 먹이고는 소천곡으로 출발했다.
소천곡은 예상한 것보다 더 험준한 협곡으로, 높은 산 사이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온통 울창한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사이에 작은 길이 나 있는데 짐수레 두 개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아주 좁고 구불구불했다.
장수들과 함께 말을 타고 협곡을 둘러본 도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군.”
“그러게 말입니다. 마침 가뭄이 들어서 시냇물과 나무들이 모두 바짝 말라 있어 작은 불씨만 던져 놓아도 말 그대로 협곡 전체가 화로가 되어 불타오를 것 같습니다.”
“후후후. 이거 내일 있을 전투가 기대되는데.”
“그런데 정말 미끼가 될 기병대를 직접 지휘하실 겁니까?”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며 임경업 장군이 묻자 도현은 태연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처럼 확실한 미끼가 어디 있겠어. 아마 대장기를 보면 눈이 뒤집혀서 앞뒤 안 가리고 쫓아올 거야.”
“직접 나서실 필요 없이 아무나 적당한 군관을 지목해서 깃발만 대신 들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되지만 내가 하는 것이 더 확실하지 않겠어?”
쓸데없이 위험을 자처하는 도현의 모습에 임경업 장군은 답답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혹시 다치시기라도 할까 봐 염려되니까 그러지요.”
“내 한 몸 지킬 실력은 되니까 걱정하지 마.”
“후우, 대군마마의 고집을 누가 꺾겠습니까. 대신 절대 위험한 행동은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도현이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임경업 장군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옆에 무예가 뛰어난 내금위 위사 두 명과 박영식이 이끄는 호위대가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여하튼 협곡에 도착한 조선군은 임경업 장군의 지휘하에 나무를 잘라 은폐물을 만들고 곳곳에 함정을 설치하는 등 적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시간이 흘러 정오가 갓 지났을 때 척후병 하나가 급히 말을 타고 달려와 적군의 도착을 알렸다.
“드디어 시작이군.”
“절대 무리하지 마십시오.”
“염려 마.”
아주 신이 나서 말에 올라타는 도현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임경업 장군은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박영식 호위대장을 보며 당부했다.
“자네가 옆에서 잘 보필하게.”
“알겠습니다, 장군.”
잠시 뒤 도현을 선두로 기병 이백 명과 보병 오백 명으로 이루어진 병력이 협곡 입구로 이동했다.
협곡 앞에 진을 치고 얼마쯤 기다렸을까,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명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제법 군기가 잡혀 있는 것이 정예병인 모양이군.”
그러자 옆에 있던 흑치영이 한 손을 들어 행렬 선두를 가리키며 말했다.
“깃발을 보면 도지휘사 직속의 부대 같습니다.”
“어쩐지.”
“군기와 함께 반般 자가 적힌 깃발이 있는 걸 볼 때 우군장인 반개 장군이 지휘하는 모양입니다.”
도현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흑치영을 봤다.
“유명한 사람인가 보지?”
“몇 년 전에 쳐들어온 왜구 무리를 토벌하면서 큰 명성을 얻었는데 무력은 뛰어나지만 성격이 급하고 잘 흥분해서 병사들 사이에서 멧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그럼 의외로 쉽게 매복에 걸려들 수도 있겠군.”
“그렇지요.”
눈을 반짝 빛낸 도현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어디 멧돼지 사냥을 시작해 볼까.”
조선군을 발견한 명군은 황급히 행군을 중단하고 전투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조선군이군.”
말 위에 앉아 정면을 살핀 반개의 중얼거림에 부관이 분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변방 제후국 주제에 감히 만주 오랑캐들과 작당해 황제께 반기를 들다니,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맞아. 저런 것들은 대국의 무서움을 단단히 보여 줘야 해. 그런데 듣던 것보다 병력이 적은 것 같군.”
“세곡 창고를 지키던 놈들이 지레 겁먹고 병력을 부풀려 얘기한 것이겠지요. 만에 하나 조금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라면 뒤편 협곡에 매복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코웃음을 치며 부관이 깔보는 투로 말하자 반개가 답했다.
“제깟 것들이 매복을 하고 있든 말든 상관없어. 우리 앞을 가로막는 놈들은 모조리 다 짓뭉개 버리면 되니까 말이야.”
“역시 장군님이십니다.”
맞장구를 치는 부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반개는 조선군 쪽을 잠깐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간 끌 것 없이 대형이 갖춰지면 바로 공격하지.”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반개 장군은 거만한 태도로 정면을 바라봤다.
병사들이 일렬로 늘어서며 전투 대형이 갖춰지자 반개 장군은 지휘봉을 치켜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공격!”
우와아아!
많이 쳐줘 봤자 천여 명도 안 되는 상대와 달리 명군은 오천이 넘었기에 다들 거침이 없었다.
선두는 오백 기마군이었고 그 뒤를 나머지 보병들이 거센 파도처럼 따랐다.
“옵니다.”
첫 대규모 전투라 긴장한 듯한 흑치영의 말에 도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적이 백 보 안에 들어올 때까지 절대 쏘지 말고 기다려라!”
도현의 지시에 방패를 든 보병 뒤편에 있던 궁수들은 화살을 재고 조준만 한 채 쏘지는 않았다.
“박 위사, 궁수들을 잘 통제해.”
각궁을 든 박태철은 도현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그사이 명군은 더욱더 속력을 올리며 달려왔다.
마침내 상대가 화살 유효 사정거리인 백 보 안에 들어오자 도현은 지체 없이 외쳤다.
“화살을 쏴라!”
슈슈슉! 슈슉! 슉!
궁수들이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시위를 놓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화살 수십 발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화살 세례에 선두가 무더기로 쓰러지며 돌격 대형이 약간 흐트러졌다.
“커억!”
“으윽.”
하지만 적은 그 정도 피해는 개의치 않고 계속 다가왔다.
“앞에 선 기병을 집중해서 공격해라!”
궁수들을 지휘하며 박태철도 각궁으로 적 기병을 세 명이나 쓰러뜨렸지만 상대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적이 오십 보 거리로 들어오자 박영식 호위대장이 약간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이제 뒤로 물러설 때입니다.”
“아직 아니야. 놈들을 확실히 끌어들이려면 한번 부딪쳐 줘야지.”
원래 계획은 화살로 상대를 자극한 다음 협곡 안으로 후퇴하는 것인데 걱정한 대로 도현이 위험한 행동을 하려 들자 박영식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적에게 발목을 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냥 살짝 건드리기만 할 거야.”
상대편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도현은 큰 소리로 보병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말 옆구리를 발로 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보병은 후퇴하고 기병은 날 따르라!”
지급받은 여섯 발의 화살을 다 쏜 궁병은 보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신속하게 뒤편 협곡으로 물러섰다.
“적들에게 조선군의 무서움을 보여 줘라!”
“돌격!”
두두두두!
후퇴하는 보병과 반대로 기병 이백 명은 도현을 따라 적을 향해 달려갔다.
이렇게 도현이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적과 맞부딪치려는 건 상대를 확실하게 속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말을 탄 기병보다 발이 느린 보병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양쪽 선두가 충돌하며 서로 뒤엉켰다.
콰콰쾅!
이히히힝!
여기서도 앞에 선 도현은 검을 사선으로 크게 휘둘러 적 기병의 어깨를 베어 냈다.
서걱!
“으악.”
그런 도현을 보호해야 하는 호위대 대원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접근하는 적을 쓰러뜨렸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대부분 군관급으로 이루어졌고 실전 경험도 풍부한 조선군 기병은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명군에 맞서 훌륭하게 싸웠다.
특히 새로 영입한 흑치영은 도현에게 받은 묵빛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상대를 수도 없이 베어 넘겼다.
하지만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기에 후속 병력이 계속 밀려오자 조선군 기병들은 금방 수세에 몰렸다.
자칫 적에게 둘러싸여 그대로 전멸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자 적병을 상대하면서 계속 주위를 살피던 도현은 미련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후퇴! 후퇴하라!”
그러자 아군 기병들이 검을 크게 휘둘러 상대하던 적을 떨쳐 내고는 황급히 말 머리를 돌려 후퇴했다.
“적이 달아난다. 쫓아라!”
와앗!
그런 아군 기병들 뒤로 흥분한 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쫓아갔다.
안타깝게도 쉰 명가량의 희생을 뒤로하고 기병들은 연신 칼등으로 말 엉덩이를 때리며 협곡을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는데 그 안에는 도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랴!”
“협곡 안으로만 들어가면 된다! 다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마치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있는 힘을 짜내 달린 아군 기병대는 아슬아슬하게 적들을 떨쳐 내고 협곡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협곡 오른편 산 중턱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던 임경업 장군은 거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장군기를 휘날리며 아군 기병대가 나타나자 반색했다.
“다행히 무사하시군!”
“장군, 뒤에 적군이 보입니다.”
“적들이 협곡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면 공격을 시작한다! 다들 준비해.”
“옛.”
한편 도현과 기병들을 한참 쫓아가던 반개 장군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황급히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의아한 얼굴로 부관이 묻자 반개 장군은 표정을 굳히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래도 찝찝해.”
“뭐가 말씀이십니까.”
“꼭 놈들이 우릴 이 안으로 끌어들이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이렇게 울창한 숲이 좌우에 있는데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는 게 수상하잖아.”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지만 혈기 넘치는 젊은 부관은 애써 불길한 느낌을 무시하며 말했다.
“제깟 놈들이 매복을 해 봤자 우리가 힘으로 밀어붙이면 오히려 각개격파를 당할 겁니다.”
“으음.”
반개 장군이 약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부관이 재차 추격을 종용했다.
“이미 협곡을 절반 이상 지났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매복 자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긴.”
“더 늦기 전에 어서 놈들을 쫓아가시죠.”
“좋아.”
고민하던 반개 장군이 막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후방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꽈아아앙!
조선군이 미리 설치해 놓은 화약이 터지며 집채만 한 돌덩어리들이 쏟아져 내려와 협곡 입구를 막아 버렸다.
“이런!”
그걸 신호로 양쪽 숲 속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화르르륵!
가뭄으로 나무들이 바짝 말라 있는 데다 아군이 일부러 기름까지 군데군데 뿌려서 불길은 삽시간에 숲 전체로 번져 갔다.
무시무시하게 피어오르는 불길과 후끈한 열기에 적군은 크게 당황했다.
“화공입니다.”
“젠장! 어쩐지 찝찝하더라니.”
와락 얼굴을 구긴 반개 장군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검을 들어 앞쪽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최대한 빨리 여길 빠져나간다. 서둘러라!”
반개 장군이 재촉하지 않아도 빠르게 다가오는 불길에 잔뜩 겁을 먹은 병사들은 앞을 다퉈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대형이 무너졌고 같은 편끼리 서로 뒤엉켜 밟혀 죽는 병사까지 생겨났다.
“저리 비켜!”
“빨리 가!”
“아악.”
그런 모습에 반개 장군은 화가 치밀었지만 스스로도 이글거리는 불의 공포에 마음이 급해져 병사들을 추스를 여유가 없었다.
“사, 살려 줘.”
몇몇이 화마에 휩싸여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불에 탔다.
그러자 병사들은 공포가 더 크게 번지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허둥지둥 반대편 입구 쪽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는 건 반원 모양의 대형을 갖추고 길을 막고 있는 조선군이었다.
“하하하! 허둥지둥 도망쳐 나오는 꼴이 보기 좋구나.”
임경업 장군과 함께 말을 타고 앞에 나온 도현의 놀림에 반개 장군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것들이! 다 죽여 버리겠다!”
“뒈지는 건 너희들이지.”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들을 쓸어버려라!”
화가 치밀어 오른 반개 장군이 검을 휘두르며 목청을 높이자 적병들은 출구를 뚫기 위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궁수 앞으로!”
도현의 말에 궁수들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미리 화살을 재어 놓은 시위를 힘껏 당겨 상대를 겨냥했다.
“발사!”
바로 이어진 명령에 궁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쐈다.
슈슈슉! 슈슉! 슉!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수백 개의 화살은 정확히 적병의 몸에 틀어박혔다.
퍼퍼퍽! 퍽! 퍽!
“끄아악.”
“우억.”
“헉!”
좁은 공간에 적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었기에 오히려 빗맞는 것이 더 어려웠는데 비명이 터져 나오며 선두가 힘없이 무너졌다.
“제기랄! 밀어붙여!”
이를 부드득 갈아붙인 반개 장군은 연신 공격을 독려했고 빠르게 번지는 불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궁수들이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지만 아무래도 쪽수는 어쩔 수 없는지 거리가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이대로 양군이 부딪친다면 자칫 조선군이 밀릴 수도 있는 급박한 순간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도현은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이야!”
도현의 외침에 아군 대형 뒤편에서 시커먼 쇠공 같은 것이 날아와 적진에 떨어졌다.
쿵!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쇠공들은 곧바로 폭발을 일으켰다.
꽈아앙! 꽝! 꽝!
“커허억.”
“으윽.”
아무것도 모르고 주위에 있던 적병들은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쏟아진 쇳조각에 말 그대로 피 떡이 됐다.
폭발을 일으키며 한꺼번에 수십 명의 적군을 쓸어버린 쇠공의 정체는 바로 조선이 자랑하는 화약 무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였다.
임진왜란 당시 화포 장인이었던 이장손이 개발한 비격진천뢰는 단단한 무쇠로 만들어졌고 모양은 둥근 공처럼 생겼다.
지름이 반 자가 조금 넘고 무게는 서른여섯 근 정도인데 안에 화약과 날카로운 쇳조각을 넣어서, 터트리면 현대의 클레이모어 지뢰 같은 역할을 한다.
비격진천뢰의 가장 무서운 점은 폭발과 함께 안에 넣어 둔 쇳조각들이 퍼지며 반경 삼 장 안에 있는 적들을 모두 살상한다는 것인데 죽지 않아도 큰 부상을 입고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컸다.
안에 시관인 죽통을 집어넣고 거기에 나선형의 홈을 파서 도화선을 감았다.
도화선을 감는 횟수로 폭발이 일어나는 시간을 조절했기에 지금처럼 투척해도 되지만 상황에 따라서 땅에 묻고 지뢰나 시한폭탄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임경업 장군이 혹시 몰라 본국에서 챙겨 온 비격진천뢰 쉰 개를 급히 만든 투석기를 이용해 적진에 던져 넣자 상대편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꽈아앙!
이히히힝!
“으악!”
반개 장군 본인마저 바로 옆에서 터진 비격진천뢰 파편에 옆구리와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부관이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그를 부축했지만 이미 갑옷이 온통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장군!”
“나 반개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정신 차리십시오.”
부관이 옷 한쪽을 찢어 상처를 지혈하려는 순간 반개가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우욱.”
“이런.”
낭패한 표정을 지은 부관이 다급하게 손을 놀렸지만 반개는 몇 번 더 피를 토해 내다가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부관이 그의 몸을 마구 흔들었지만 손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릴 뿐 반개는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최고 지휘관의 죽음은 가뜩이나 혼란에 빠진 명군을 더 최악으로 떨어뜨렸다.
반면 커다란 사각 방패를 손에 든 보병들로 단단히 저지선을 세운 아군은 화살 세례를 계속 퍼부으며 상대를 공격했다.
악이 받친 적들이 매복을 벗어나려고 저지선에 덤벼들었지만 오 열로 늘어선 아군은 마치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더 견디지 못한 적들은 불에 타 죽지 않으려고 병장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살려 주시오.”
“하, 항복합니다.”
처음 한 명이 항복하자 마치 도미노처럼 적병들이 차례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도현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고 병사들은 가지고 있는 무기를 위로 치켜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가 이겼다!”
“천세! 천세!”
“봉림대군마마 천세!”
이날 전투에서 도현은 명군 이천 명을 포로로 잡고 그에 상당하는 병장기와 보급 물자를 노획할 수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보급 물자가 손에 들어온 덕분에 사정에 여유가 생긴 도현은 여태껏 고생해 온 부하들에게 술과 고기를 베풀어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말이 연회지 바닥에 퍼질러 앉아 먹고 마시는 게 다였지만 평소와 달리 기름진 안주에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무척 만족한 눈치였다.
“대군마마다!”
“감사합니다, 마마!”
도현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여기저기서 외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 병사들을 향해 손을 들어 주면서 화답한 도현은 화톳불 앞에 앉아 있는 흑치영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여어.”
“마마.”
벌떡 일어나서 인사하려는 흑치영을 손짓으로 제지한 도현은 그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늘처럼 대규모 전투는 처음이었지? 자네 활약이 대단하던걸.”
“별말씀을요. 사실은 무척 긴장해서 손이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하하! 그런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등을 두드려 준 도현은 술병을 들고 흑치영의 잔에 넘실거릴 정도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다행이지. 자, 받게나. 자네의 첫 승을 축하하는 뜻으로 내가 주는 걸세.”
“황공합니다.”
흑치영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잔을 받아 들고는 단숨에 꿀꺽 삼켜 버렸다.
“크으-! 좋은 술이로군요.”
“오늘 얻은 전리품 중 하나야. 물이라면 모를까, 술은 들고 가 봤자 짐만 되니 차라리 여기서 다 마셔 버리는 게 낫지.”
“그래서 이런 축하연을 벌이시는 겁니까?”
“겸사겸사. 매일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고 있는데 술이라도 없으면 할 맛이 안 나지 않겠어.”
“그렇군요.”
“자, 그럼 나는 슬슬 일어나 볼까.”
“어딜 가십니까?”
도현은 병사들이 모여 있는 다른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할 일도 없는데 마냥 놀고 있으면 뭐하나. 이럴 때 자주 얼굴을 내비쳐야지.”
그렇게 말하고 도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흑치영은 도현이 다가가자 일순 당황하던 병사들이 이윽고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어찌 저런 분이 계실까.
평생 목숨 바칠 주군이란 바로 저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흑치영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이렇게 대승을 거둔 조선군과 달리 겁도 없이 산동성 성도인 제남성을 노렸던 몽고족 만 오천 명은 대패를 당했다.
방어전에 성공하며 자신감을 되찾은 도지휘사는 주변성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육만 대군을 만들어, 후퇴하는 몽고군을 쫓아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선군도 어쩔 수 없이 청국 수군이 있는 연태포구로 황급히 물러서야 했다.
행군 대열 선두에 서 있던 도현은 멀리 연태포구가 보이자 짧게 혀를 찼다.
“결국 다시 돌아왔군.”
“아직 청군 함대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것들은 우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거고.”
퉁명스러운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은 앞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청군 군선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어찌 됐든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으니 된 거지요.”
“흥.”
도현이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건 사실 청나라 수군 제독인 공유덕 때문이었다.
몽고족이 대패를 당하고 명나라 수군이 근처에 얼쩡거리기 시작하자 공유덕은 금방이라도 산동반도에서 철수할 것처럼 행동했고, 도현이 전령을 보내 조선군을 기다려 달라고 하자 뻔뻔하게도 포로로 잡은 명군 이천 명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동맹군으로서 당연히 조선군을 데려갈 의무가 있지만 그건 모른 척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화가 난 도현은 그냥 근처 바다에 대기시켜 놓은 봉황상단 배를 타려고 했지만 괜히 청군과 갈등을 일으켜서 좋을 것이 없고 무엇보다 지금 그가 가진 힘을 드러내면 엄청난 견제를 받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에 공유덕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대신 봉황상단 배에는 그동안 노획한 것들을 가득 채워서 웅도로 보냈다.
손해 보는 걸 싫어하는 도현은 공유덕 제독과 협상해서 포로들을 넘겨주는 대신 청군 함대에 격군으로 있는 조선인 노예 삼백 명을 돌려받기로 했다.
그 인원을 제한다고 해도 이천 명이나 되는 포로를 받으면 훨씬 이익이었기에 공유덕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넘긴 포로 상당수는 노예로 팔려 공유덕의 개인 주머니로 들어갈 것이 뻔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나마 병력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위로를 삼아야지.”
뒤에 늘어선 병사들을 힐끗 돌아보며 한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이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절반 정도는 잃을 각오를 했는데 거의 대부분 살아서 돌아가다니 이게 다 대군마마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것이 있다고.”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리며 도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임 장군과 장졸들이 열심히 싸워 줬기에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거요. 그나저나 산동반도에 상륙해서 명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귀환 뒤에 장군이 문책을 받는 건 아닌지 걱정이오.”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임경업 장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벌을 내리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군령에 의해 할 수 없이 실행한 거지만 친명파가 대다수인 조정 대신과 사대부에 이번 일은 엄청난 배반 행위였다.
분명 조선으로 돌아가면 이걸 가지고 시비 거는 자들이 있을 테고 최악의 경우 벼슬에서 물러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임경업 장군은 산동반도로 올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를 했는지 의외로 담담한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도현을 걱정했다.
“저야 그렇다 쳐도 대군마마께 화가 미치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저 공자 왈 책만 읽고 시끄럽게 목청만 높이는 샌님들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소.”
자칫 조정 대신들과 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임경업 장군은 어쩐지 마음 한쪽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았다.
사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금 처우가 나아졌다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은 유학자들의 나라로 무인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병부상서 같은 군부 고위직도 무인이 아닌 문관이 차지할 정도인데 왕족인 도현이 그런 불만을 해소시켜 주는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마마, 행여라도 그런 말이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면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앞으로는 자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짐짓 정색하며 임경업 장군이 충고를 하자 도현은 빙긋 웃는 얼굴로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후후후. 아무 데서나 이런 이야기를 할 만큼 반푼이는 아니니 염려 마시오.”
“하여튼 대군마마는 정말 못 당하겠습니다.”
그제야 임경업 장군도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 조선군은 잠시 뒤 연태포구에 들어갔다.
조선군보다 더 먼 곳까지 진출했지만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진 몽고족은 먼저 도착해서 벌써 배에 탑승해 있었다.
선착장으로 가자 공유덕 제독은 직접 나타나지도 않고 달랑 휘하 장수 하나를 보내 포로들만 데려가면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출발해야 하니 서둘러 배에 타라고 재촉했다.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참으십시오, 마마.”
저절로 손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으로 가는 걸 임경업 장군의 만류에 겨우 화를 가라앉힌 도현은 고개를 돌려 공유덕 제독이 넘겨준 조선인 노예 삼백 명과 오랜 행군에 지친 병사들을 보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겠지만 급하다고 하니 일단 승선부터 시키시오.”
“알겠습니다.”
군례를 올리며 대답한 임경업 장군은 서둘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지시를 내렸다.
잠시 뒤 병사들은 각 백인대별로 질서 정연하게 대기 중인 군선에 올라탔다. 무거운 물품은 이미 봉황상단 배에 실었기에 큰 문제 없이 빠르게 철수가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도현과 지휘부가 탑승하자 청군 함대는 쫓기듯 서둘러서 포구를 떠났다.
암투 1
몽고족 패잔병과 조선군을 가득 태우고 연태포구를 출발한 청군 함대는 산해관이 아니라 요동반도로 길을 잡았다.
원래대로라면 산해관으로 가야 했지만 갑자기 경로가 바뀐 이유는 청 황제인 홍타이지가 전투를 지휘하던 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어의가 급히 치료를 했지만 이레가 넘도록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심양으로 물렸다.
배에 타고 나서야 이런 소식을 들은 도현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게 정말이야?”
“네. 그래서 몽고족이 제남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도 조만간 철수하려고 했답니다.”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홍타이지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시기와 원인이 원래 역사하고 달랐다.
“군대를 물릴 정도면 황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이번 일로 우리 조선에 불똥이 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어찌 됐든 홍타이지 덕분에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게 됐군.”
“그러게 말입니다.”
황제가 중병을 앓는 건 청국 사정이고 이제 휘하 병사들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으니 임경업 장군의 표정이 밝아졌다.
반면 도현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나비 효과인지, 갑자기 발생한 돌발 변수에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복잡한 도현의 마음과 달리 잔잔한 파도와 순풍 덕분에 함대는 항해를 시작한 지 닷새 만에 목적지인 요동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착장에 내리자 뜻밖에도 청국 조정에서 보낸 관리가 도현과 임경업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청국 장수의 안내를 받아 도현과 임경업 장군이 관청 내에 있는 객사로 들어가자 관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공유덕 제독과 뭔가 이야기를 속닥이다가 급히 말을 끊었다.
“어서 오시오. 이분은 예부시랑인 홍백민 공이시오.”
공유덕 제독의 소개에 도현은 그를 따라 일어선 홍백민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소이다.”
“대군마마의 명성은 심양에서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옆에 계신 분은 조선이 자랑하는 명장인 임경업 장군이시겠군요.”
“처음 뵙겠소이다. 부족하지만 이번에 파병된 조선군을 이끌고 있는 임경업이라 하오.”
약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가 끝나자 네 사람은 각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시녀가 차와 간단한 다과를 내놓고 나가자 홍백민은 맞은편에 있는 도현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두 분을 청한 이유는 청국 조정의 결정을 전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민한 시기였기에 도현은 살짝 얼굴을 굳히고는 홍백민과 시선을 맞췄다.
“그게 뭐요?”
“소문으로 들어 알고들 계시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중병에 걸리시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전쟁을 급히 끝내게 됐습니다. 그래서 조선군도 이만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지시입니다.”
귀환 명령이 있으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병부도 아니고 예부 관리가 나와 이런 일을 전달한다는 것에 도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야기라면 예부가 아닌 병부에서 해야 되는 것 아니오?”
그러자 홍백민은 살짝 손을 내저으며 두루뭉술하게 핑계를 댔다.
“전쟁 뒤처리로 병부가 정신이 없기도 하고 청국을 위해 싸운 군대를 돌려보내는 데 성의껏 예를 갖춘다는 의미에서 제가 온 겁니다.”
그러면서 비단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쫙 펼쳤는데 거기에는 조선군에 귀환을 명령하는 내용이 적혀 있고 하단에 재상인 범문정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병부상서가 아닌 범문정의 직인이 찍힌 걸 보고 도현은 대충 내막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황제가 위중해지자 경쟁자이자 군부를 장악한 예친왕 도르곤이 부상하는 걸 막기 위해 범문정이 선수를 쳐서 병부를 찍어 누르며 견제하는 것이다.
명령서를 챙겨 옆에 앉아 있는 임경업 장군에게 건네준 도현은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럼 심양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바로 귀환하라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정이 여의치 않아 황성에 다른 나라 군대를 들일 여유가 없습니다. 대신 그동안 조선군이 고생한 것에 대한 답례로 황제께서 내리시는 하사품을 가져왔습니다.”
도현이라도 비상 상황에 타국의 군대가 수도 부근에 있는 건 꺼려지는 일이니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리고 굳이 심양까지 갔다가 다시 조선으로 가는 것보다 여기서 바로 귀환하는 게 훨씬 가까웠기에 오히려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알겠소이다. 임 장군과 병사들을 여기서 돌려보내겠소.”
“상황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군께서는 저와 함께 바로 심양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했지만 이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장졸들과 회포를 풀 시간도 없이 바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빨리 심양으로 돌아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그에 맞춰 대책을 세워야 하기에 잠시 고민하던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대신 나도 정리해야 할 것이 있으니 이틀 정도 시간을 주시오.”
“이틀은 곤란하고 하루 드리지요.”
“알겠소.”
그 뒤로 건성건성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눈 도현과 임경업 장군은 이내 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왔다.
객사를 벗어나자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임경업 장군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벌써부터 줄 서기가 시작된 모양입니다.”
“임 장군도 그걸 느꼈소?”
“제가 둔해 보여도 눈치는 빠르답니다.”
임경업 장군의 말에 도현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누가 차기 황제가 되느냐에 따라 여러 사람들의 위치가 뒤바뀔 테니 민감해질 수밖에 없겠지.”
“이러다가 내분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요?”
“어쩐지 그걸 기대하는 것 같군.”
그러자 임경업 장군은 눈을 빛내고는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솔직히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나도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웠으면 좋겠지만 양쪽의 핵심 축인 범문정과 예친왕의 성격으로 볼 때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요.”
“그럼…….”
“아마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겠지. 예를 들어 황제는 다른 사람이 되는 대신 실권을 예친왕이 가지는 정도로 말이오.”
“그걸 자존심 강한 예친왕이 받아들이겠습니까?”
“당연히 화가 나겠지. 하지만 범문정이 다른 친왕들을 부추겨서 압박한다면 어쩌겠소.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친왕들이 가진 힘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거요.”
워낙 예친왕이 특출했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친왕들이 약해 보여도 그들이 개인적으로 가진 힘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청국의 가장 강력한 무력 단체인 팔기군만 해도 황제 직속을 빼면 친왕들이 각기 하나씩 장악하고 운영할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떠올린 임경업 장군은 이내 머리를 끄덕이고는 도현의 이야기에 동의했다.
“대군마마의 말씀을 들으니 내전이 벌어지는 건 어렵겠군요.”
“아쉽소?”
“예.”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에 도현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정색하며 임경업 장군을 바라봤다.
“임 장군.”
“말씀하십시오.”
“지난날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과 울분은 내가 꼭 몇 배로 되갚아 줄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한양에 있는 대신들처럼 그냥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겠다는 결의가 가득 담긴 도현의 말에 임경업 장군은 심장이 뜨거워졌다.
“믿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맨 앞에 서서 청군의 목을 베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든든하군. 그러니 이번에 귀환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상심하지 말고 견뎌야 하오.”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는 임경업 장군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준 도현은 다시 객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오후 하사품을 실은 짐수레 한 대가 조선군 주둔지에 전해졌다.
하사품이라고 해 봐야 비단과 수달 가죽, 사금 그리고 향신료 같은 것들로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생각하면 다 갖다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도현은 받자마자 바로 임경업 장군에게 넘겨줬다.
황제가 병환 중이라 술을 마실 수 없었던 도현은 급히 구한 돼지와 소를 잡아 저녁에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는 병사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주며 위로한 뒤 일인당 은자 서른 냥을 나눠 주며 그동안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보상해 줬다.
은자 서른 냥이면 쌀 열다섯 섬을 살 수 있는 거금이었기에 돈을 받자 병사들은 크게 기뻐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산해관에 남겨 뒀다가 다시 합류한 부상병들까지 합쳐 무려 삼천 명 가까이 되는 인원에게 돈을 주려면 엄청난 거금이 들어간다.
하지만 산동반도를 돌아다니며 세곡 창고에서 나온 쌀을 조선에 가져가 팔아서 번 돈이 무려 금자로 십만 냥이 넘기에 그다지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변 시선 때문에 조금 더 나눠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임경업 장군과 장수들한테도 비단과 귀한 향신료를 듬뿍 챙겨 줬다.
다음 날 귀환길에 오른 조선군을 떠나보낸 도현은 바로 예부시랑인 홍백민과 함께 심양으로 갔다.
홍백민의 재촉에 역참에서 말을 바꿔 타며 빠르게 움직인 일행은 사흘 만에 심양 황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황제와 원정군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황궁에 들르지 않고 관저로 간 도현은 이제 출산이 임박한 아내를 볼 새도 없이 칠현을 보내 은밀히 장 총관을 불러들였다.
무릎을 꿇고 앉아 절을 하는 장 총관을 보며 도현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동안 혼자 봉황상단을 이끌어 가느라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저보다는 전장에 나가 계신 대군마마께서 더 힘드셨지요.”
“나야 그냥 구경만 하고 왔는데 뭘.”
가볍게 이야기를 하지만 장 총관은 도현이 전투가 벌어지면 항상 앞에 서서 싸우고 실제로 조선군을 지휘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황궁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안 그래도 황제가 오늘내일한다는 소문에 성내 민심이 흉흉합니다.”
뜻밖의 말에 도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냥 아프다는 정도가 아니라 위중하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그렇습니다.”
“으음.”
낮게 침음성을 내뱉으며 도현은 습관처럼 한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보통 이런 일이 생기면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소문을 막거나 축소시키는 것이 보통인데 그러지 않고 상세히 퍼졌다는 게 뭔가 찝찝했다.
“혹시 누가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는 거야?”
얼굴을 굳힌 도현의 물음에 장 총관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소문이 나는 걸 그냥 방치하는 건 확실합니다.”
“설마 범문정 재상이…….”
“맞습니다.”
“무슨 이익이 있다고 이러는 거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도현이 의아해하자 장 총관은 차분한 태도로 짐작되는 걸 이야기했다.
“친왕들의 불안감을 자극해서 서로 뭉치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호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최근 친왕들이 빈번하게 만나 회합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거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비단으로 만들어진 팔걸이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던 도현은 시선을 들어 앞에 앉아 있는 장 총관을 보며 말했다.
“이 사실을 예친왕 쪽도 알고 있을까?”
“핵심 인물들이 대부분 이번 전쟁에 출정했다지만 그래도 심양에 눈과 귀를 남겨 뒀을 테니 지금쯤이면 이곳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지. 일단 정보 수집 능력을 총동원해서 양쪽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감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목이 타는지 도현은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다른 보고 사항이 있나?”
“지시하신 대로 웅도에 화약 공방이 완성됐습니다.”
“그거 정말 기쁜 소식이군. 생산량은 얼마나 되지?”
“원료만 원활하게 공급되면 한 달에 여든세 근(50kg)은 거뜬히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웅도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려면 기본 무기인 화약의 자체 생산이 꼭 필요했는데 그게 가능해졌다니 도현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안 그래도 화약을 구하는 것이 어려워서 걱정이 많았는데 한시름 덜었군. 화약 장인들에게 포상금을 넉넉히 지급해 주게.”
“예. 그리고 이번에 노획품을 처리하며 자금이 넉넉해진 김에 북경과 왜국에 지점을 추가로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도 인원이 부족한데 여기서 지점을 더 늘리는 건 과잉 투자 같은데.”
도현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장 총관은 얼른 이유를 설명했다.
“명나라가 쇠퇴하면서 위상이 추락했지만 그래도 북경만큼 큰 도시가 없으니 미래를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진출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화약의 주재료인 유황을 원활하게 확보하려면 왜국에 지점 설치가 꼭 필요합니다.”
듣고 보니 장 총관의 말도 일리가 있는지라 도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자네 말대로 하지. 하지만 다른 지점의 운영도 소홀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도현은 씨익 웃음을 머금고 장 총관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더 바빠질 텐데 왠지 즐거워 보이는군.”
“저는 천성이 장사꾼이라서요. 가만히 현상 유지를 하는 것보다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이 더 적성에 맞나 봅니다.”
“하하, 그래. 그런 기세로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장 총관과 이야기를 끝내고 안채로 들어간 도현은 문턱을 넘자마자 바로 장씨 부인의 처소를 찾았다.
“부인, 나 왔소.”
“어머!”
방에서 자수를 놓고 있던 장씨 부인은 도현을 보고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급히 만류했다.
“어허, 몸도 무거운데 그냥 앉아 있으시오.”
도현은 장씨 부인의 어깨를 다정하게 쓰다듬고 불룩 튀어나온 배를 바라보았다.
“배가 많이 불렀군. 무겁진 않소?”
“무겁긴요, 이 안에 아기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저 좋기만 한데요.”
“그런가.”
도현은 몸을 수그려 장씨 부인의 배에 귀를 살며시 가져다 대었다.
두근두근.
가볍게 맥이 뛰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후훗, 간지러워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읍시다.”
허리를 끌어안고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도현을 보고 장씨 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음, 내가 없는 동안 걱정 많이 했소?”
“당연하죠.”
장씨 부인의 대답에 도현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빨리 돌아오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어쨌든 당분간은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요. 적어도 출산은 지켜볼 수 있겠지.”
사실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심양으로 돌아오는 발길을 더 재촉했지만 구태여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예정일은 언제요?”
“의원의 말로는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쯤이라고 하네요.”
“얼마 안 남았군. 아들일까 딸일까, 궁금한걸.”
“아들을 낳아야죠. 그래야 대를 잇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도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떻소. 사내아이면 집안에 활력이 넘칠 테고, 여자아이면 애교가 많아 좋을 테니 어느 쪽이든 부족할 게 없지.”
“……전 사내아이였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닮아 건강하게 자라서 오래도록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로 떠나 버린 딸이 떠오른 듯 장씨 부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난 부인을 닮은 예쁜 여자아이도 좋소만.”
그런 장씨 부인이 애처롭게 느껴져 가볍게 입을 맞추고, 도현이 말했다.
“양손에 꽃이라니, 세상 모든 남자들이 부러워할 일 아니오.”
“후후, 농담도 잘하셔요.”
자신의 기분을 달래 주려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는 도현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다.
“참, 세자빈마마께 인사는 하고 오셨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깜빡했군. 부인 얼굴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만.”
“안 돼요. 아무리 급해도 예를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얼른 다녀오셔요.”
“끄응……. 알겠소.”
떠나기가 싫은 듯 느릿하게 일어선 도현은 장씨 부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중에 식사라도 함께합시다. 해가 져서 선선해지면 정원에 산책도 하러 가고.”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몸인지라 앉아서 배웅하는 장씨 부인을 다시 한 번 끌어안은 도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날 저녁 아직 귀환하지 못한 소현세자를 대신해 관저에 있는 관리들을 소집한 도현은 황제인 홍타이지의 병환을 두고 벌어지는 후계자 다툼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뒤 괜히 난장판에 휘말려 분란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당분간 외부 활동을 자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현재 청국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한 편지를 적어 긴급으로 전령을 한양에 보냈다.
황제에 대해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난무하며 민심이 뒤숭숭한 가운데 보름 뒤 드디어 원정 병력이 심양에 도착했다.
산해관을 돌파하지 못한 데다 황제까지 중병을 얻어 실려 와서 그런지 입성하는 행렬은 어쩐지 초라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무런 귀환 행사도 없이 예친왕 도르곤은 황궁 앞 광장에서 황제를 대신해 군대를 해산시켰다.
도현은 관리들과 함께 관저 대문 앞까지 마중 나와 있다가 돌아오는 소현세자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다 나와 있었구나.”
“관저의 주인이 돌아오는데 식솔들이 마중을 나오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능청스러운 도현의 말에 소현세자는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이런, 대빈객께서도 나와 계셨구려.”
“세자 저하의 무사 귀환을 감축드리옵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박황을 일으켜 세운 소현세자는 주위에 있는 관리와 관저 식솔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반갑게 맞이해 줘서 고맙소.”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안채로 자리를 옮긴 소현세자는 도현과 중요 인물 몇 명만 모아서 회의를 가졌다.
궁녀가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도현이 진지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황제가 쓰러진 겁니까?”
다들 궁금해하는 일이었기에 일순 시선이 소현세자에게 집중됐다.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소현세자는 긴 한숨을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우, 온갖 방법을 다 써도 산해관이 무너질 조짐이 없자 마지막 수단으로 홍이포를 성벽 바로 앞까지 끌고 가서 포격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본진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황제가 뒷목을 잡으면서 쓰러지더구나. 바로 어의가 와서 치료를 하고 침도 놨지만 도통 침상에서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고 정신마저도 오락가락하는 상태란다.”
“허어, 이것 참.”
“으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모여 있던 관리들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현도 원래 역사에서 홍타이지가 죽은 원인인 뇌졸중과 증상이 유사하자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가운데 소현세자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소.”
순간 좌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다들 잔뜩 경직된 표정을 짓는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박황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상태가 위중하다지만 너무 성급하신 판단 같습니다.”
평소 같으면 신중한 박황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을 테지만 소현세자는 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나뿐 아니라 예친왕도 다시 소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귀환하는 내내 노심초사하며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 모습을 보였소.”
박황은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고 다른 관리들은 서로 귓속말을 속삭이며 앞으로 상황이 어찌 될지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현이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실은 저도 몇 가지 들은 정보가 있는데 그걸 종합해 볼 때 형님이 짐작하시는 대로 황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정보라는 것이 무엇이냐?”
소현세자가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관심을 보이자 도현은 장 총관한테 들은 걸 그대로 다 말해 주었다.
“재상인 범문정이 황제가 쓰러진 직후부터 대선, 아제격, 다택, 이 세 명의 친왕들을 빈번하게 만나고 다닌답니다.”
이 시점에서 재상이 황제의 형제이자 계승 서열이 높은 친왕들을 만난다는 것은 딱 한 가지를 뜻한다.
“아직 황제가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벌써 물밑에서 후계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정통 유학자인 박황은 탐스럽게 자란 수염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한탄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상석에 앉은 소현세자가 눈가를 찡그렸다.
“그럼 예친왕을 상대로 범문정과 다른 친왕들이 연합을 하는 거야?”
“아무래도 지금 이 상태라면 차기 황제로 예친왕이 가장 유력하니까요.”
그때 박황 다음 서열인 부빈객 박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현 황제의 소생으로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예친왕한테 황좌가 쉽게 넘어가겠습니까?”
심양 생활이 벌써 몇 년째인데 아직 제대로 청국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는 관리들의 모습에 도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유교 이념에 따라 장자 승계가 원칙인 조선과 달리 청국은 철저히 능력에 따라 자리를 물려준다는 걸 알아야 하오. 거기다 현 황제에게 아들이 있다고 하지만 장남은 후궁의 자식이고 황비에게 얻은 둘째는 이제 여섯 살도 안 됐는데 제대로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겠소? 그에 반해 예친왕은 비록 황제인 홍타이지에게 밀려났다지만 청 태조 누르하치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명분까지 가지고 있지 않소.”
그 정도 명분이라면 아무리 현 황제인 홍타이지에게 대를 이을 자식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황위를 넘겨받을 수 있다.
거기다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으니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다들 얼굴이 굳어 있는 가운데 말석에 있던 관리 하나가 조용히 의견을 내놨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예친왕 쪽에 줄을 대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생각에 다른 관리들은 물론이고 소현세자마저 동조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잘라 말했다.
“그건 안 되오.”
“왜 그렇지? 네 스스로 예친왕이 차기 황제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물론 그랬지요. 그러나 따로따로 놔두면 큰 힘이 안 되지만 재상인 범문정과 세 명의 친왕들이 서로 연합한다면 역시 만만치 않은 세력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어 봤자 우리가 얻을 것이 많지 않으니 차라리 한 발짝 뒤로 떨어져서 사태를 관망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도현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부빈객 박노가 입을 열었다.
“반대편 세력이 결집하면 무시하기 어렵다는 말씀에는 동의하지만 후계자 다툼에서 생길 이익이 적다는 건 이해가 안 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미는 자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면 아무래도 조선에 대한 처우도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관리들이 떠들어 대는 말에 도현은 답답하다는 듯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나중에 콩고물이라도 챙기려면 실질적인 도움이 돼야 하는데 무력이라고는 관저 경비 인원밖에 없는 우리가 저들에게 무슨 값어치가 있겠소. 물론 다른 방법으로 도울 수도 있겠지만 내부 다툼에 외부 세력이 끼어드는 걸 싫어할 테고 자칫 예친왕과 청국 조정의 경계심만 키워 나중에 골치만 아파질 것이오.”
단정적인 도현의 말에 관리들이 웅성거리자 양쪽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현세자가 결론을 내렸다.
“내 판단에도 이번 사태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일단 조용히 관망만 하도록 합시다. 대신 누가 차기 황제가 되느냐에 따라 조선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눈과 귀는 활짝 열어 두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소현세자의 말에 관리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고, 그렇게 회의는 도현의 의견을 따르는 걸로 끝났다.
다음 날부터 조선 관저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외부 활동을 일절 자제했다.
황제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며칠 뒤 소현세자와 도현이 황궁으로 병문안을 갔지만 침소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그냥 물러 나와야 했다.
그렇게 심양에 돌아온 이후에도 황제의 병세에 차도가 없자 소문이 더욱 무성하게 퍼지며 청국 정가는 긴장감이 고조됐다.
이런 가운데 드넓은 예친왕부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도르곤의 거처에서 커다란 고성이 터져 나왔다.
꽝!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세게 내려친 예친왕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범문정 그놈이 날 제쳐 두고 다른 친왕들과 작당해 호격을 황제로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 사실이야!”
살기마저 느껴지는 예친왕의 시선을 받은 만월개는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왕야. 거기다 폐하의 직속 부대인 양황기가 황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상대편에서 명분을 세우기 위해 홍타이지의 장남인 호격을 내세우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발 빠르게 팔기군 중 하나인 양황기를 움직였다는 말에 예친왕은 눈썹 끝을 치켜올렸다.
양황기는 태조인 누르하치의 직할 부대였고 홍타이지도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다른 팔기군 부대들이 산해관 전투에 참가해 기력이 많이 쇠한 것과 달리 양황기는 황도를 지킨다는 이유로 심양에 남아 있어서 전력을 그대로 보존했다.
이런 부대가 황성 안으로 들어온다면 뜻하는 건 딱 하나였다.
“이놈들이 결국 날 제거하겠다는 건가.”
이를 부드득 갈며 예친왕이 하는 말에 심복들 중 가장 성격이 급한 야골타가 앞으로 나섰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시면 제가 병사를 이끌고 가서 놈들을 싹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만월개가 기겁하며 만류했다.
“분하고 괘씸하지만 지금 움직이는 건 오히려 상대의 계략에 말려드는 겁니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선수를 빼앗기자는 거야!”
“저쪽에서 보란 듯이 양황기를 입성시킨 걸 보면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는 뜻 아니겠소. 거기다 아직 황제 폐하께서 살아 계신데 거사를 일으킨다면 그건 바로 반역이 된단 말이오.”
“…….”
반역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성난 황소처럼 날뛰던 야골타도 입을 꾹 다물고 주춤거렸다.
용력뿐 아니라 대세를 읽을 줄 아는 머리와 통찰력을 가진 예친왕은 얼굴을 구긴 채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정군을 그렇게 빨리 해산시키는 것이 아니었는데.”
“황제 폐하의 병환을 핑계로 범문정을 위시한 조정 대신과 친왕들께서 함께 압박을 해 대니 어쩔 수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 걸 보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사전에 계획을 세워 둔 것이 분명합니다.”
“쥐새끼 같은 놈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나?”
예친왕이 시선을 주며 묻자 만월개는 짐짓 정색하고는 차분히 대답했다.
“우선 상대가 무력을 동원하는 것에 대비해서 왕부 경비를 강화하고 왕야께서 수령으로 있는 백기단을 서둘러 황도 안으로 데려와야 됩니다.”
“놈들이 입성을 허락할까?”
“시비를 걸면 양황기가 먼저 들어온 것과 황도의 치안이 불안해서 그걸 진정시키기 위한 거라고 둘러대면 저들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다가 놈들이 먼저 움직이면 어쩌지?”
만월개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직 황제께서 살아 계신 이상 경거망동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우리를 자극해 먼저 움직이도록 유도한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예친왕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야골타.”
“말씀하십시오, 왕야.”
“당장 성 밖에 있는 백기단을 입성시키도록 해.”
“옛.”
힘찬 야골타의 대답을 들으면서 예친왕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억울하게 빼앗긴 황제의 자리를 이번에는 기필코 되찾고 말겠어.”
한편 기대와 달리 예친왕이 흥분해서 날뛰지 않고 차분히 대처하자 상대편은 계획을 급히 수정해서 자신들이 취약한 군부 쪽 인물들을 접촉해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 세력을 결집시키며 수면 아래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어느새 황제가 쓰러진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각지의 명의를 다 불러와 치료하고 온갖 좋은 약재를 구해 와서 먹였지만 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고 갈수록 깨어 있는 시간보다 정신을 잃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오늘도 침대에 누워 거친 숨을 내쉬는 홍타이지의 입에 어의가 은수저로 탕약을 조심스럽게 떠먹이고 있었다.
먹는 것보다 옆으로 흘리는 것이 많았지만 그나마 이 약이 아니라면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었기에 어의는 비단 천으로 입 주위를 닦아 가며 한 사발을 다 먹이고는 은수저를 궁녀에게 넘겨줬다.
그러고는 홍타이지의 오른쪽 소매를 걷어 팔목에 손가락 두 개를 대고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맥을 확인했다.
그렇게 한참 뒤 어의는 살짝 눈가를 찡그리더니 홍타이지의 손을 다시 이불 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방에 가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부르게.”
“알겠습니다.”
숙직 내관에게 말을 하고 한 번 더 홍타이지의 안색을 살핀 어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러자 밖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황비가 옆으로 다가와 어의를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도가 좀 있으신가?”
어의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얼굴이 굳어진 황비는 뒤에 있는 궁녀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뒤로 물러가 있어라.”
“예, 마마.”
궁녀들이 거리를 띄며 물러서자 황비는 어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황궁의 안주인으로서 꼭 알아야 되니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이야기를 해 보게.”
황비의 재촉에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어의는 이내 굳은 얼굴로 상세를 설명해 줬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더 이상 버티시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순간 너무나 큰 충격에 황비는 몸을 휘청거렸다.
“마마.”
“괘, 괜찮네. 그것보다 정말 가망이 없는 것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비가 되묻자 어의는 힘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길어지는 병세에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막상 일이 닥치자 황비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온갖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는 황궁에서 황비 자리를 굳건히 지켜 온 여인답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딱딱한 어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마나 남았나?”
앞뒤 내용을 다 잘라먹은 말이었지만 뭘 묻는지 알아차린 어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짧으면 사흘, 길어 봤자 이레를 넘기기 어려우실 겁니다.”
“으음, 사흘이라.”
낮게 침음성을 내뱉은 황비는 살짝 인상을 쓰다가 이내 날카로운 시선으로 어의를 노려봤다.
“이 사실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네.”
“알겠습니다.”
“만약 외부에 이 이야기가 떠돈다면 그때는 제일 먼저 자네의 목부터 칠 것이야.”
“예, 옛.”
싸늘한 말투에 어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 보게.”
“네.”
허리를 숙여 인사한 어의가 허둥지둥 도망치듯 약방으로 가자 고개를 돌린 황비는 달빛 아래 웅장하게 서 있는 침전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렇게 가시면 소첩은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벌써부터 친왕들 간에 후계자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황비도 모르지 않았는데 여기서 황제가 죽는다면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황제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아들이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황위를 이어받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적장자嫡長子(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라는 이유로 후계자 다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예친왕과 배다른 자식인 호격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 둘 중 누가 승자가 되든 황비와 적장자인 복림은 눈엣가시였기에 언제든 숙청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차라리 복림을 내세워 황위를 잇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친왕에 비해 세력이 약하고 이제 여섯 살도 안 된 아기였기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사방이 꽉 막힌 상황, 자신은 그렇다고 쳐도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니 황비는 눈이 캄캄해졌다.
어린 자식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했기에 황비는 거처로 돌아와서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밤새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방법을 찾았는지 은밀히 어의를 불러들였다.
어젯밤 일 때문에 어의는 눈치를 보며 들어와 바닥에 엎드리며 절을 했다.
“찾으셨사옵니까, 마마.”
“어서 오게. 그래, 폐하의 상세는 좀 어떠신가?”
“별다른 차도가 없으시옵니다.”
“빨리 쾌차하셔야 되는데 큰일이군.”
“…….”
회복이 어렵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태연히 연극을 하는 황비의 모습에 어의는 가증스러웠지만 혓바닥을 잘못 놀렸다가는 바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기에 가만히 있었다.
길게 기른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조용히 있던 황비가 눈짓을 하자 재빠르게 궁녀와 내관들이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탁 닫히는 소리가 나자 황비가 말을 이었다.
“내 자네에게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아무리 다 죽어 가는 사람이라도 일시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는 방도가 정녕 없을까?”
“그, 그것이…….”
황비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깨달은 어의는 금방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할 생각은 말게. 황궁엔 자네 말고도 뛰어난 의술 실력을 가진 자들이 많으니 말이야.”
대답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터.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황비가 차갑게 바라보자 어의는 그만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있습니다, 마마. 양귀비꽃에서 추출한 가루를 잘게 빻아 만든 환약을 먹이면 숨이 일시적으로 끊어진 환자라도 명부에서 불러올 정도로 강력하다고 하지요.”
“호오…….”
황비가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눈을 반짝였다.
“하, 하지만! 그 약은 너무 독해서 환자의 몸에 좋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심신의 기력이 다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네.”
“마마……!”
“자네,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이 있다지? 아이가 이제 겨우 다섯 살이라 했던가. 늦둥이라 무척 귀여워한다고 들었네만.”
어떻게 그 사실을?
어의는 몸에 소름이 쫙 끼치면서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부인이 혼자서 어린아이와 늙은 시부모를 모시려면 참 힘들겠군. 갸륵한 일이야. 게다가 작년엔 그 지방에 흉년까지 들어서 더 사정이 어려워졌겠군. 그나마 자네가 궁중에서 받는 봉록이 아니라면 벌써 길가에 나앉고도 남았겠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뜸을 들이는지 알 수 없어 어의는 그저 창백해진 얼굴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궁중에서 일하는 자의 운명이란 박복하지. 특히 황상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어의라면 상대방이 명을 달리했을 때 어떻게 해도 벌을 피할 수는 없지 않나. 가장 약한 게 귀양이고, 심하면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렇게 자네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날도 얼마 안 남았군. 슬슬 고향에 유서라도 써서 보내는 게 낫지 않으려나.”
단조롭게 읊조리는 황비의 목소리와 반대로 어의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이 후들거렸다.
“마마, 마마! 살려 주십시오.…….”
황비가 하는 말은 그저 협박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관습이 존재했기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어의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애걸하자 황비는 붉게 칠한 입술을 쓰윽 끌어 올리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말게. 지금까지 충성을 바쳐 온 자네를 어찌 그리 차갑게 내치겠나. 응……?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줬는데 말이야.”
황비가 부탁이라는 단어를 힘줘서 말하자 어의는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힘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알겠습니다. 황비마마의 말씀을…… 받들겠나이다.”
“호호. 자네가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이라 다행일세.”
황비가 비단 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이따가 오후에 또 황제 폐하께 탕약을 올려야 하니 그때 보도록 하지. 물러가게.”
“네…….”
휘청거리는 어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황비는 아름다운 얼굴에 독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탁탁.
대전에 깔린 네모난 돌을 가볍게 내디디며 궁녀들을 거느린 황비가 도착하자 입구에서 서성이던 어의가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늦어서 미안하네. 머리카락에 꽂을 장신구가 좀처럼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말이야. 폐하를 뵙는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은가.”
“아, 아름다우십니다, 마마.”
“고맙네.”
그렇게 말한 황비는 노을이 지면서 붉게 물든 서쪽 하늘에 눈길을 주었다.
“해가 지는군……. 폐하께서 기다리실라. 얼른 들어가세나.”
“예.”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주위에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시니까.”
“네, 마마.”
침전 입구를 지키는 궁녀가 문을 열어 주자 안에서 서늘한 냉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뒤에서 문이 끼이익 닫히고, 함께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비마마.”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던 궁녀들이 황비를 보고 무릎을 굽혀 인사하자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시중을 들 테니 물러나 있어라.”
매일 하루 두 번 황제에게 올리는 탕약은 어의가 아니면 항상 황비가 직접 먹였기에 궁녀들도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고 물러섰다.
이윽고 사방이 조용해지자 황비는 금색 실로 수놓인 두툼한 이불 위에 비스듬히 앉아 황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열이 오를까 봐 일부러 불도 때지 말라 일렀는데 아직도 땀을 흘리시는군.”
짐짓 다정한 손길로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을 갈면서 황비가 중얼거렸다.
환자의 몸이 불덩이 같을 땐 몸을 차갑게 해서 식히는 게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여기는 너무 추웠다.
이래서야 나을 병도 낫지 않을 지경.
하지만 누가 감히 황비의 지시에 토를 달겠는가.
어의는 새삼 그녀의 철두철미함에 치를 떨었다.
“그건 가져왔나?”
“예……. 여기 있습니다.”
어의는 탕약을 내려놓고 소매에서 검은색의 둥근 환약을 꺼냈다.
양귀비꽃에서 추출한, 마약 성분이 강한 환약.
사실 마약이라고 해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분량을 잘 조절하면 마취제와 각성제로 뛰어난 효능을 보이는 약재지만 이 정도 크기의 환약이라면…… 사지가 멀쩡한 청년이라 해도 성하지는 못할 터. 심지어 이렇게 약해진 상태의 황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뭘 망설이고 있는 겐가?”
차가운 황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어의는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황비의 그 눈빛에 몸이 돌덩이로 변해 버린 듯 발은 한 발자국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환약을 든 손은 부들부들 떨려서 머리가 어질거렸다.
“……유서는 잘 써 두고 왔는지 모르겠군.”
그 모습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던 황비가 낮게 중얼거린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췄다.
어의는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황제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어차피 황제는 가망이 없다.
그렇다면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의는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눈을 꾹 감았다.
차갑게 굳은 입술을 벌리고, 그 속에 환약을 집어넣은 뒤 탕약을 흘려보내자 황제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이며 꿀꺽하는 소리가 났다.
“……먹은 건가?”
“네. 이제 좀 있으면 효능이…….”
쉬익-!
조용한 가운데 약하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크게 강타했다.
“폐하?”
“으…….”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며 황비가 늙어 주름이 선명한 황제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폐하?”
“끄으……흐…….”
황제가 힘겹게 눈을 뜨고 탁해진 눈동자를 드러내자 황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접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아……. 황……비…….”
“힘들 테니 말하지 마셔요.”
황비는 황제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마치 아이를 어르듯이 말한 뒤 미리 준비해 뒀던 두루마리를 꺼내어 그 앞에 내밀었다.
의아한 듯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것을 바라보는 황제에게 황비가 말했다.
“자! 여기에 수결을 해 주세요, 폐하.”
“……?”
“이건 우리 이황자에게 황위를 양도한다는 칙서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 아무 문제도 없어요.”
“…….”
황제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황비는 초조한 듯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어서요! 폐하와 저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아들이지 않습니까. 둘째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표독하게 변한 황비의 외침에 황제는 지친 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황비가 억지로 쥐여 준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 자신도 앞으로 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마지막 가는 길에 처절한 여인의 외침을 듣고 그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형편없긴 했지만 그래도 황제의 독특한 버릇이 남아 있는 필체로 그가 수결을 끝마치자 마침내 가는 생명의 실을 놓아 버린 것처럼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폐, 폐하!”
어의가 황급히 눈을 까뒤집고, 목의 맥을 짚어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짜로 황제가 승하한 것이다.
“폐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어의를 보고 함께 눈물짓기는커녕 득의만만한 얼굴이던 황비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끼익-!
“마마?”
혼자서 직접 문을 열고 나온 황비를 보고 위사와 궁녀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제께서, 붕어하셨다.”
“…….”
짧고도 간략한 한마디였지만 그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폐하!”
“이럴 수가! 폐하!”
놀란 궁녀들이 서둘러 침전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그곳엔 넋이 나간 듯한 어의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는 황제만이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한 침전 앞에서 황비는 꼿꼿이 선 모습으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서서히 가라앉고, 그 뒤를 따르던 노을마저 사라져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태양이 졌구나. 마침내…….”
황제가 붕어했다는 어의의 확답을 받은 후 황비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조치를 취한 것은 이 소식이 황궁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침전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궁녀와 내관들은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지시가 내려지기도 전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으니, 시중을 들고 있던 궁녀들 가운데 봉황상단과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는 상궁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다른 궁인들이 바닥에 엎드려 곡을 하는 사이 몰래 침전을 빠져나온 상궁은 황궁 경비병을 통해 황제가 승하했다는 급보를 봉황상단에 알렸다.
“그게 정말이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도현의 물음에 칠현은 흥분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네. 방금 장 총관이 보내온 정보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일이 닥치자 도현은 가슴이 세차게 뛰며 입술이 바짝 말랐다.
“정보 출처가 어디라고 했지?”
“침전에 속한 상궁이라고 합니다.”
병이 든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인물 중 하나인 침전 상궁한테서 나온 정보라면 신빙성은 입증이 된다.
“지금 바로 봉황상단에 연락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보라고 해.”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형님을 찾아 봬야겠어.”
방을 나선 도현은 곧바로 소현세자의 거처로 갔다.
마침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던 소현세자는 동생의 방문을 미소 지으며 반겼다.
“어서 오너라.”
“형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도 많이 놀라서 그런지 네가 그렇게 정색하고 말하면 겁부터 나는구나.”
읽고 있던 책을 덮은 소현세자는 시중을 드는 내관에게 눈짓을 해서 주위를 물린 뒤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 보아라.”
그러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도현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죽었답니다.”
순간 소현세자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확실한 정보야?”
“네. 봉황상단에서 황궁에 심어 놓은 세작을 통해 얻어 낸 겁니다.”
“으음…….”
침음성을 내뱉으며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소현세자는 이내 고개를 들어 도현을 쳐다봤다.
“우리가 알 정도면 다른 쪽에도 소식이 들어갔다고 봐야겠지?”
“황궁에 함구령이 내려졌다고 하지만 숨은 귀들이 많은 만큼 예친왕과 범문정도 알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요.”
“그럼 한바탕 충돌을 피할 수 없겠군.”
“일단 우리도 대비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
무겁게 머리를 끄덕인 소현세자는 큰 소리로 최 내관을 불렀다.
“최 내관!”
“부르셨사옵니까, 저하.”
“지금 당장 신 위사장과 박황 공을 불러오게.”
“예.”
굳어 있는 소현세자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최 내관은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외부 활동을 자제하라는 방침에 따라 관저에 머물고 있던 두 사람은 전갈을 받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찾으셨사옵니까.”
“이리 가까이들 오시오.”
두 사람이 안쪽으로 다가와 앉자 소현세자는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는 그사이 조금은 진정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 확인한 소식인데, 황제가 죽었다고 하오.”
“…….”
금방 이해를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두 사람은 이내 눈을 부릅뜨며 앞에 있는 소현세자를 쳐다봤다.
“지, 지금 청 황제가 승하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믿기지 않는지 재차 사실을 확인한 대빈객 박황은 청나라에 반감이 많은 사람답게 반색했다.
“지난 병자년에 조선 산천을 짓밟고 씻지 못할 치욕을 안긴 철천지원수가 죽었다니 역시 하늘이 무심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도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대빈객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좋아만 할 일은 아니오. 그리고 행여나 우리가 황제의 죽음을 기뻐했다는 말이 새어 나가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으니 관리와 식솔들에게 주의를 주시오.”
“염려 마십시오, 대군마마. 그래도 자꾸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박황의 말에 살짝 미소 짓던 소현세자가 다시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 준 청 황제가 죽었다니 본인도 속이 시원하지만 당장 황좌를 두고 예친왕과 범문정의 대립이 격화될 것이 뻔하오. 그러니까 괜히 싸움에 휘말려 들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될 것이오.”
“옛.”
“특히 신 위사장은 수고스럽겠지만 당분간은 관저 경비에 더 신경을 써 주게.”
시선을 받은 신철 위사장이 머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목숨 걸고 관저를 지키겠습니다.”
“믿음직해서 좋소.”
소현세자의 이야기가 끝나자 도현이 바로 덧붙이듯 말했다.
“아직 청국 조정의 공식 발표가 없었으니 당분간은 꼭 알아야 되는 사람한테만 귀띔을 해 주고 비밀을 유지해야 될 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한양에는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오. 그 문제는 형님이 밀서를 적어 주시면 신 위사장이 믿을 수 있는 부하를 몇 명 뽑아서 보내는 걸로 처리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게 좋겠군.”
고개를 끄덕인 소현세자는 좌중을 한차례 쓸어 보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몰아치는 거센 폭풍에 휩쓸려 가지 않게 다들 정신을 똑바로 차리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저하.”
한편 도현의 예상대로 양쪽 진영에도 황제의 죽음이 알려졌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바로 범문정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문관과 이신 출신들을 저택에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하던 범문정은 황궁에서 전해진 급보에 얼굴을 굳혔다.
“하필이면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일이 터지다니. 예친왕의 독주를 막으려면 황궁을 장악하고 있어야 돼. 공 장군!”
“예.”
고개를 돌리고 대답하는 공유덕을 보며 범문정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당장 휘하 병력을 모두 이끌고 황궁으로 가게. 절대 예친왕과 백기단에 선수를 빼앗겨서는 안 돼.”
“염려 마십시오.”
시급을 다투는 일이었기에 자신 있게 대답한 공유덕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홍 시랑.”
“네.”
“자네는 다른 친왕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대비를 하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홍백민 예부시랑이 공유덕의 뒤를 따르자 범문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계속 황궁에 있어야 했는데 내가 잠시 방심했어…….”
“이러고 계실 것이 아니라 재상께서도 어서 황궁으로 들어가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신 중 한 명으로 공유덕과 함께 수군 장수로 있는 경중명의 말에 잠시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고심하던 범문정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첫째 황자님은 어디에 계시지?”
“글쎄요. 이 시간이면 댁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리로 가지.”
“황궁에는 안 가시고요?”
경중명이 의아한 듯 묻자 범문정은 서둘러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폐하께서 돌아가셨다면 어서 새로운 황제를 세워 우리 쪽에서 먼저 명분을 가져야 돼.”
범문정은 적장자이지만 너무 어린 둘째 황자보다는 비록 후궁의 자식이라도 성년이 된 첫째 황자를 차기 황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의중을 알아챈 경중명은 벌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범문정을 황급히 따라갔다.
두두두두!
“이랴!”
“시간이 없다. 더 빨리 달려라.”
최근 흉흉한 황도 분위기 때문인지 지나다니는 행인도 없고 가게 문을 일찍 닫아 텅 빈 거리를 한 떼의 기마들이 거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질주했다.
바로 공유덕 장군과 휘하 부하들로, 곧장 중심가에 위치한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의 정문인 대청문 앞에 도착한 공유덕은 급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워워!”
이히히힝.
“뭔가 이상합니다.”
부관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공유덕은 살짝 이맛살을 찡그렸다.
술시가 넘어 대문이 닫혀 있는 건 당연했지만 평소에는 금군들이 아래에 내려와 경비를 서던 것과 달리 지금은 모두 성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어쩐지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황제가 승하했기에 당연히 경계 상태가 강화된 것이라고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한 공유덕은 천천히 말을 몰고 앞으로 나갔다.
“요동 수군절제사 공유덕이다. 재상 어른의 명을 받고 왔으니 어서 문을 열어라!”
공유덕의 외침에 성루가 약간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장수 한 명이 머리를 내밀었다.
“황명에 따라 당분간 황궁 출입이 금지됐으니 그렇게 알고 돌아가시오!”
이미 황제가 죽은 것을 알고 있는데 황명이라니, 공유덕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기에 재차 성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했다.
“황궁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재상께서 특별히 지시를 내리신 일이니 우릴 들여보내 주게.”
범문정의 위세를 빌려 소리를 질렀지만 수문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재상의 지시보다 황명이 우선한다는 걸 모르시오! 계속 억지를 부린다면 역도로 생각하고 공격할 테니 그렇게 아시오.”
그렇게 경고한 수문장이 한 손을 들자 성루와 양쪽 성벽에서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활을 겨냥했다.
“이런.”
“장군, 이제 어쩌지요?”
뜻밖의 상황에 공유덕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왼쪽 길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일단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저길 보십시오. 백기단이 왔습니다.”
“끄으응.”
부관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옆으로 돌린 공유덕은 이름 그대로 온통 하얀색으로 칠한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몰려오는 걸 보고 얼굴을 구겼다.
팔기군 중 하나인 백기단은 예친왕이 수장으로 있는 부대로, 오랜 세월 여러 전장을 거치며 단련된 청국 최정예였다.
그런 백기단이었기에, 중무장한 병사를 천 명 넘게 끌고 왔지만 공유덕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원 전투준비!”
병사들이 황급히 전투대형을 갖추자 상대편도 이쪽을 발견했는지 말을 멈춰 섰다.
“흥! 누군가 했더니 범문정의 개들이었구나.”
선두에 선 야골타가 깔보는 듯한 어투로 입을 열자 공유덕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하긴 개는 충성심이라도 있지 목숨을 연명하려고 이리저리 박쥐처럼 옮겨 다니는 것들한테는 그것도 과분한 말이지.”
명나라를 버리고 청에 귀부한 이신들을 싸잡아서 깔아뭉개는 야골타의 놀림에 공유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익.”
이를 부득부득 가는 공유덕을 보며 야골타는 냉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뭐 주워 먹을 것 없나 하고 왔나 본데 지금이라도 꼬리를 말고 물러서면 목숨은 살려 줄 테니까 어서 꺼져!”
“닥쳐라!”
참다못한 공유덕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자 야골타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그럼 실력으로 몰아내는 수밖에. 쳐라!”
야골타의 외침에 백기단 병사들은 피에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우르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맞은편에서도 기병들이 마주 달려 나왔다.
“막아라!”
쿠콰콰쾅!
가운데서 맞부딪친 양쪽은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한데 뒤엉켜서 치열한 난전을 벌였다.
채채챙! 챙! 챙!
“크악!”
“으윽.”
한순간 신성한 황궁 앞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창에 꿰이고 칼날에 베이며 사방에서 구슬픈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양쪽은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상대한테 덤벼들었다.
그중에서도 묵직한 검을 마치 장난감처럼 휘둘러 대는 야골타의 모습은 상대편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으하아압!”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야골타가 내지른 검은 정확히 앞을 가로막은 기병의 머리를 으깨 버렸다.
퍼걱!
“끄허억.”
검이 아니라 마치 몽둥이로 내려친 것처럼 머리가 박살 난 기병은 힘없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야골타는 금방 다른 상대를 찾아 검을 휘둘러 댔다.
야골타뿐 아니라 백기단 병사들 전부가 뛰어난 실력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타고난 기병인 데다 여러 전투를 거치며 단련된 정예 부대인 백기단과 달리 공유덕이 끌고 온 병력은 실전 경험도 적고 기본적으로 팔기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비명을 지르거나 피를 흘리며 낙마하는 건 거의 공유덕의 부하였다.
그 모습에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 공유덕은 남아 있는 보병들마저 전투에 투입시켰다.
와아아!
퍼퍽! 채챙!
“컥!”
보병들까지 합세했지만 승기를 잡기는커녕 계속해서 밀렸다.
“사, 살려 줘. 크억!”
어느새 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공유덕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럴 수가.”
또다시 병사 한 명의 목에 검을 쑤셔 넣은 야골타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말을 몰아왔다.
“흐흐흐. 좋게 말할 때 도망치지 그랬어.”
“으으…….”
두려운 표정으로 공유덕이 주춤거리는 순간 뒤편에서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한 떼의 기마가 달려왔다.
“멈춰라!”
“젠장!”
새롭게 나타난 무리를 확인한 야골타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다른 친왕들이 거느린 팔기군 부대였는데 공유덕의 부하들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싸움을 중단하고 황급히 병력을 뒤로 물렸다.
덕분에 공유덕은 전멸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대청문 앞은 야골타의 백기단과 범문정 측 병력 그리고 황궁을 지키는 금군까지 세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며 묘한 대치 상태를 이뤘다.
“어떻게 됐느냐?”
황비의 물음에 금군 도독인 구천령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양쪽에서 다 병력을 이끌고 와서 잠시 충돌을 벌이다가 지금은 대청문 앞에서 대치 중입니다.”
일단은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황비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군.”
“하지만 황궁을 지키는 금군 숫자가 천 명뿐이라서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문을 깨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명색이 장수라는 자가 여자인 그녀보다 더 겁을 내는 모습이 황비는 너무나 한심스러웠지만 사방이 적인 지금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인척 관계인 구천령뿐이었기에 애써 화를 참으며 말했다.
“그 전에 상황이 정리될 테니 그때까지 구 장군은 황궁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뒷배를 봐주던 황비가 숙청당하면 자신도 같이 쓸려 나간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구천령은 결연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지금쯤 도착했겠지.”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상궁이 황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겁니다.”
그 시각, 비상 체제에 돌입해 무장한 병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는 예친왕부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황궁에서 사람이 왔다고?”
“그렇습니다.”
방금 전 황궁이 누군가에게 봉쇄됐고 백기단을 끌고 간 야골타는 다른 친왕들이 부리는 팔기군에 막혀 있다는 급보를 받고 노발대발 화를 냈던 예친왕은 의아한 얼굴로 앞에 선 만월개를 쳐다봤다.
“누가 보낸 거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만월개가 얼른 대답했다.
“황비마마십니다.”
“…….”
그 한마디로 예친왕은 금군을 동원해서 재빠르게 황궁을 봉쇄한 사람이 황비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것 참, 호랑이가 없으니 여우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건가.”
“어찌할까요?”
“들여보내.”
예친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잠시 밖으로 나갔던 만월개가 얼굴을 면사로 가린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평범한 아낙네처럼 꾸미긴 했지만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모양새나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궁에서 일하는 여자 특유의 버릇이 있어 출신을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황비가 아무 궁녀나 사절로 보낼 리는 없으니 적어도 상궁 정도는 되리라.
예친왕을 눈앞에 두고도 면사를 걷을 생각을 하지 않아 그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눈치 빠르게 여자가 손을 움직여 얼굴을 드러내었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로군.”
“왕야께서 내전에 들르실 일이 없으니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흥. 그도 그렇군. 그래, 황비께서 내게 무슨 말을 전하라 하시던가.”
“이걸…….”
여자는 품속에서 곱게 접힌 비단 봉투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그걸 만월개가 받아 예친왕에게 전하자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비단 봉투는 끈으로 엄중하게 봉인되어 있었지만 왠지 그 속에서 요사스러운 여인네의 독기가 퍼져 나오는 것 같아 내심 손으로 만지기도 꺼려졌다.
그래도 일단 사태가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예친왕은 어쩔 수 없이 비단 봉투를 펼쳤다.
얼굴에 가면을 쓴 것처럼 표정엔 아무런 변동이 없었지만 황비의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의 눈빛은 마치 얼음처럼 싸늘하게 변해 갔다.
서신에는 황제가 죽으면서 지금의 황비 소생인 이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노라 약속했다는 것, 그리고 그 증거로 친필로 수결한 칙서까지 있으니 정통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황비의 주장과 함께 이황자가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그가 장성할 때까지 예친왕에게 섭정을 맡길 의향이 있다는 것이 황비다운 도도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물론 섭정을 맡는 대가로 황비와 이황자의 신변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조건이 달린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흐음…….”
예친왕은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좋아. 황비마마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
만월개가 놀란 얼굴로 예친왕을 돌아보았고, 줄곧 숨을 죽이고 있던 여자는 비로소 살짝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왕야.”
하지만 인사를 올린 후에도 여자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답답해진 만월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 뭘 원하는 게냐? 볼일이 끝났으면 썩 물러가지 않고!”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과연 황궁에서 오랜 기간 단련된 사람답게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만약 왕야가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그 증표로 서명을 받아 오라 이르셨습니다.”
“말로는 못 믿겠다 이거냐?”
“저는 그저 마마의 말씀을 전해 드릴 뿐이옵니다.”
“허어, 그것참.”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던 예친왕은 팔을 뻗어 붓을 손에 잡았다.
“사내대장부의 말은 황금 백 냥보다 더 무겁다는 옛말도 있건만 네 주인은 꽤 의심이 많은 모양이로구나.”
“…….”
“하지만 미인의 부탁이니 못 들어줄 것도 없지.”
그렇게 말하며 종이 위에 거침없이 붓을 놀린 예친왕은 만월개를 돌아보고 말했다.
“여기 있네. 그리고 만월개 자네는 입구까지 함께 따라가서 배웅해 주고 오도록 하게나. 황비마마의 사람인데 내 허술하게 대우할 수는 없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야.”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자 홀로 남은 예친왕은 한 팔로 몸을 비스듬하게 받치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궁에 있는 암여우가 꽤 하는 것 같지만 과연 언제까지 위세를 떨칠 수 있을까? 훗, 일이 참 재밌게 돌아가는군그래.”
그러고 나서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탁 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 그러게 여자는 잘 골라야 한다지 않습니까. 쯧쯧, 말년에 이게 웬 고생입니까그려. 어쨌든 이왕 가시는 길, 편하게 고통 없이 가신 거라면 좋겠군요.”
술병을 들어 직접 잔을 채운 예친왕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건배하듯 들어 올린 후 독주를 단숨에 꿀꺽 삼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