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ojong - Chapter 5
5권
일그러지는 부자 관계
청군이 북경에 들어간 역사적인 순간 멀리 바다 건너 한양에서는 소현세자가 보낸 서신으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탕!
“명국과의 관계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된다니, 조선의 세자께서 어찌 이런 망발을 하실 수 있는 겁니까!”
한쪽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친 영의정 김류가 소현세자의 행동을 질책하자, 다른 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불만을 드러냈다.
“영상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금 어렵다고 오랜 시간 동안 신의로 이어 온 관계를 버리고 북방의 오랑캐 놈들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반란군들에게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가 강남으로 피난을 떠났다고 하는데, 계속 명과 관계를 유지하는 건 위험하지 않겠소?”
우의정 심기원이 신중하면서도 소현세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척화파인 대사헌 이명한이 발끈했다.
“임진년에 무도한 왜군에게 패해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있을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줬는데, 명이 약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고 바로 등을 돌린다니, 그건 오랑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세자 저하께서 심양에 너무 오래 계시다 보니까 청국 오랑캐들에게 물이 드신 게지요.”
병자호란 이후 친청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사대부와 신료 대부분이 성리학을 신봉하고 명을 상국으로 떠받들고 있었기에, 소현세자의 서한에 다들 불편함을 넘어 상당한 반감을 나타냈다.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주의자들이 옹호하고 나선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겠지만, 이미 소현을 세자 자리에서 쫓아내기를 원하는 숙원 조씨와 손을 잡은 상태였기에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다물고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나마 심양에 있는 박황과 박노가 보낸 서신을 받은 우의정 심기원이 친명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를 두둔해 주고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고 있었다.
어찌 됐건 전체적인 분위기는 소현세자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제일 안 좋은 건 병자호란 때 아들인 김경징이 세자와 왕실 식구들이 피난 가 있던 강화도 방어 임무를 소홀히 한 죄로 처형을 당하고 자신도 사임을 했지만, 곧 다시 등용돼 영의정 자리를 꿰찬 인조의 최측근인 김류가 앞장서서 소현세자를 공격하고 있다는 거였다.
병자호란 이후 어느 정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오직 국왕의 입 노릇만 충실히 수행해 왔기에, 이건 단순히 김류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인조의 뜻으로 신하들은 받아들였다.
“아무리 화가 난다지만 그래도 세자 저하신데 그건 너무한 것 아니오.”
심기원이 약간 질책하듯 말하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병조판서 김자점이 툭 끼어들어서는 비아냥거렸다.
“세자 저하라도 잘못하셨으면 지적을 받으셔야지요. 그래야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 아닙니까?”
김자점이 숙원 조씨와 손을 잡았다는 걸 알고 있는 심기원은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지만 여기서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기에 애써 욕이 나오려는 걸 눌러 참았다.
다른 신하들도 가장 골수 친청주의자로 분류되는 김자점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지만 김자점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아 놨는지 모르는 척 앉아 있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그냥 넘길 수 없소이다.”
“그래서, 폐세자라도 시키자는 거요!”
짜증이 난 심기원이 조금 언성을 높이자 김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필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진심이오!”
놀란 심기원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김류를 노려보는 순간 젊은 관리 한 명이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원하는 폐세자 문제가 나오려는 순간 흐름이 끊기자 화가 난 김자점은 얼굴을 구기며 호통을 쳤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일이라…….”
“그게 뭔데?”
김자점이 다그치듯 묻자 눈치를 보던 젊은 관리는 용건을 떠올리고는 다급히 말했다.
“청군이 반란군을 무찌르고 북경에 입성했다고 합니다.”
“뭐!”
“헉.”
폭탄이라도 터진 듯 방 안은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북경이 함락되다니, 정말인가?”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방금 심양 관저에서 보낸 급전이 도착했사온데 거기에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허어.”
여기저기서 탄식성이 터져 나왔고 척화파 중심인물 중 하나인 조경은 멍한 얼굴로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찌 이런 일이…….”
김자점도 놀랐는지 표정이 굳은 채 머릿속으로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자신한테 유리할지 고민했다.
처음 소현세자가 돌아가는 사정을 알리고 명이 무너질 수도 있다며 경고했을 때는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부 사정이 혼란스럽지만 대부분의 신료들은 일시적인 어려움일 뿐이고 곧 수습이 되어, 이번에도 청은 산해관에 막혀 내륙으로 들어가지 못할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출병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산해관을 넘었을 뿐만 아니라 북경까지 함락시키다니, 신료들은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반란 때문에 내부가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산해관을 어찌 그리 쉽게 넘을 수 있단 말인가?”
대사헌(현대의 감사원 역할) 이명한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자 소식을 전하러 온 젊은 관리가 침통한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해 줬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 총병이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청국에 항복하며 성문을 활짝 열어 줬다고 합니다.”
“저런…….”
“오삼계 총병이라면 명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데 그런 사람이 배신을 하다니. 허어.”
신료들은 마치 한양이 함락되기라도 한 것처럼 탄식을 쏟아 냈다.
“망조가 들었다는 징조 아니겠소이까.”
계속 코너에 몰려 있던 우의정 심기원이 약간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 신료들은 눈가를 찌푸렸지만, 명국의 몰락이 실제로 눈앞에 닥쳐왔다는 걸 다들 느꼈기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끄으응.”
“이럴 것이 아니라 주상 전하께서도 서신을 읽으셨을 테니 어서 대전으로 가서 대책을 의논하도록 합시다.”
“그러는 것이 좋겠소.”
“어서 갑시다.”
김류의 말에 신료들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방을 나섰다.
급히 대전 회의가 소집됐지만 멀리 바다 건너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조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신료들이 급히 명나라에 지원 병력을 보내 예전 임진왜란 때 도와준 제조지은을 갚아야 된다며 아주 황당한 의견을 내놓자, 인조한테 호통만 한바탕 얻어먹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가 청나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명나라에 지원 병력을 보내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조선에는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뭄과 전란으로 팍팍해진 나라 살림에 청국의 강요로 몇 차례 파병을 하며 그나마 있던 재정마저 고갈되어 버렸다.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가 틀어진 것도 있었지만, 오죽했으면 작년부터 심양에 보내는 관저 운영비마저 절반으로 줄여야 했다.
이런 상태에서 명나라를 돕기 위해 대규모 지원 병력을 바다 건너에 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만 봐도 신료와 사대부 들이 그동안 입으로만 복수를 외치며 준비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괜히 이런 이야기가 청국의 귀에 들어가서 나중에 있을 보복을 걱정해야 될 판이었다.
이때 청국에서 보낸 사신이 도착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며 실제로 팔기군 한 개 부대를 국경선으로 진전 배치시키자, 명나라를 돕자는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아무튼 북경 함락 소식 덕분에 소현세자의 서신 문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이번 일로 소현세자는 숙원 조씨 일당뿐만 아니라 골수 친명주의자들과도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볼썽사나운 꼴입니까!”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은 방에서 숙원 조씨의 앙칼진 목소리가 매섭게 울려 퍼졌다.
“한양에 있지도 않은 세자 한 사람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라면서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됐느냔 말입니다!”
“여론이 받쳐 준다면이라고 했었죠.”
화가 나서 팔팔 날뛰는 숙원 조씨와는 달리 김자점은 차분히 가라앉은 태도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조씨는 손톱을 세워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래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다르지요. 명과 청에 대해 소현세자가 경고했던 일이 맞아떨어졌으니 주상 전하께서도 그를 쉽게 내치지 못하실 겁니다.”
향후 대륙의 패권이 어느 쪽에 넘어가느냐에 따라 조선이 취해야 할 태도도 매우 달라진다. 자칫 잘못해서 줄을 잘못 잡으면 예전처럼 또다시 나라가 쑥대밭이 되는 전쟁을 겪거나 무지막지한 공물을 바쳐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인조는 물론이고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대륙에서 전해져 오는 정보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리 지금과 같은 일을 예견한 소현세자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
“지금은 때가 좋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왜 너만 모르느냐 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김자점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됐었는데…… 이대로 물러나란 말이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숙원 조씨는 김자점을 날카롭게 노려본 후 빨갛게 칠을 한 입술을 요염하게 핥았다.
“그럼 내가 직접 주상 전하를 찾아뵙도록 하죠.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시니까.”
“허어.”
김자점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무릎에 손을 탁 치면서 몸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평소 국정에는 통 관심이 없으시던 주상 전하께서도 매일 밤을 새듯이 하며 조정 대신들과 계속 의논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마당에 마마께서 찾아가신다면 하룻밤 위안은 될지 모르나, 그 이상 간섭하면 아니 됩니다.”
“왜요, 설마 전하께서 나를 내치기라도 하실까 봐요?”
“그런 말까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깥일로 정신없이 바쁜데 괜히 집안일을 내세워서 들쑤시는 건 어떤 사내라도 좋아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요.”
“이익!”
한마디로 말해 괜히 수선 피우며 돌아다니지 말란 뜻이다.
냉정하면서도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한 김자점의 말에 조씨는 답답한 듯 이를 악물었다.
“흥! 세자가 이대로 보위에 오르면 병판도 좋을 일이 없을 테니 어떻게든 그 전에 수를 써야 할 겁니다. 그것만은 잊지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만 있을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지요!”
조씨는 몸을 홱 돌리고 등을 보인 자세로 말했다.
“이제 그만 됐습니다. 나가 보세요!”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내쉬는 조씨의 뒷모습을 고까운 눈초리로 쳐다본 김자점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물러났다.
끼이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조씨의 거처를 힐끔 뒤돌아본 김자점은 혀를 쯧 차고 중얼거렸다.
“천한 암탉 주제에 하늘 모르고 날뛰다니. 과연 그 권세가 얼마나 오래 갈지 두고 보자꾸나.”
한편 북경을 함락한 예친왕은 이곳을 완전한 청국 영토로 만들기 위해 병사들에게 일체의 약탈 행위를 금지시켰다.
이자성이 바닥까지 탈탈 털어 가서 더 나올 것도 없었지만 이런 청군의 행동에 또다시 큰 곤욕을 치를까 봐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은 크게 안도하며 반발심도 많이 희석됐다.
그렇게 북경성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예친왕은 휘하 병력을 세 개로 나눠 무주공산처럼 비어 있는 주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숭정제가 강남으로 달아나면서 자신들이 버려졌다고 생각한 주민들은 의외로 순순히 성문을 열고 청군에게 항복했다.
물론 끝까지 저항하는 곳도 있었지만 그런 곳은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파괴하고 죽이는 걸로 확실히 실력 행사를 하자, 그 뒤부터는 소문을 듣고 청군 깃발이 보이면 알아서 백기를 내걸었다.
“예친왕을 만나러 갔다가 들은 소식인데 이틀 전에 제남성을 접수했다고 하네요.”
다행히 화마를 피한 자금성 서고에서 가져온 희귀본 서적들을 살펴보고 있던 소현세자는 도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럼 산동성도 이제 청군의 손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구나?”
“그렇다고 봐야죠.”
의자를 빼서 털썩 앉은 도현은 목이 말랐는지 탁자 위에 있는 찻주전자를 들어 빈 잔에 따라 한 모금 꿀꺽 마셨다.
“청군이 강한 건 알았지만, 벌써 산동성까지 세력을 확장하다니 너무 빠르게 무너지는 것 같구나.”
“저항의 구심점도 없고 워낙 청군에 대한 공포가 큰 데다 계속된 전란에 지친 영향도 있을 거예요.”
“구심점이라면 명국 황제인 숭정제가 있지 않느냐?”
그러자 도현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겨우 목숨은 보전했지만 강남 역시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시끄러운 상태인 걸 생각하면 화북 지역을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예요.”
단언하듯 도현이 말하자 맞은편에 있던 소현세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청이 명나라를 밀어내고 새로운 대륙의 패자가 되겠구나.”
“당분간 전체를 다 집어삼키는 건 힘들겠지만 최소한 화북 지역은 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봐야겠지요.”
“상황이 이런데 아직도 아바마마와 조정 대신들은 명나라를 못 버리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구나.”
소현세자의 이야기에 도현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명나라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형님의 생각은 저도 찬성이지만 이번에는 너무 성급하셨어요. 나중에 왕좌를 물려받거나 최소한 한양에 돌아가 반대 의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꺼내도 됐잖아요.”
“청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린단 말이냐? 그리고 제조지은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 사대부들이 혹시나 엉뚱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그렇게 충격을 줘서라도 정신을 차리도록 해야지.”
“무슨 말인 줄은 알지만 그러다가 형님이 다치실까 봐 그러는 거죠.”
“그 정도로 흔들릴 내가 아니니 염려 마라. 그리고 잘못된다고 해도 뒤를 받쳐 주는 든든한 동생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느냐?”
소현세자가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쳐다보자 도현이 괜히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됐어요.”
“후후후. 아무튼 북경까지 함락됐으니 이제 조선에 있는 사대부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겠지.”
이번 일로 조정 대신과 사대부 들이 조금이라도 명나라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기를 기대하는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들이 쉽게 바뀌겠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뭔가 깨닫는 것이 있겠지.”
“그러면 다행이죠.”
양쪽 어깨를 으쓱인 도현은 잔에 남아 있는 차를 마저 다 마시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볼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볼게요.”
“어딜 가는 거냐?”
“밖에요.”
한쪽 눈을 찡끗 감으며 하는 말에 소현세자는 북경에 있는 봉황상단 직원들을 만나려고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위험하니까 혼자 가지 말고 항상 위사들과 함께 다니도록 해라.”
“염려 말아요.”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소현세자를 뒤로하고 방을 나갔다.
김덕술과 박태철 두 위사만 데리고 반쯤 불에 탄 자금성을 나온 도현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상인들이 하나둘 나와 장사를 시작한 시장으로 향했다.
“자! 쌉니다, 싸요.”
“잘 말린 생선이 있어요!”
불과 얼마 전에 두 번에 걸친 약탈과 온갖 고초를 겪고 지금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생활을 이어 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도현은 너무나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평상복을 입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간 도현 일행은 삼 층으로 지어진 객잔 앞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부서져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집기와 이런저런 쓰레기들을 치우고 있던 점소이가 귀찮은 듯 말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장사 안 합니다.”
“여기가 해산객잔이 맞나?”
“맞기는 한데 보시다시피 사정이 이래서 손님을 못 받으니까 다른 곳으로 가세요.”
점소이의 말에 도현은 다른 객잔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홀 안으로 들어가 빈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어어? 이봐요!”
짜증을 내며 다가오는 점소이를 보며 도현 대신 옆에 서 있던 김덕술이 약간 위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인한테 가서 봉황이 오셨다고 해라.”
“예에?”
약간 주눅이 든 얼굴로 점소이가 머뭇거리자 김덕술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다그치듯 말했다.
“어서 안 가고 뭘 멍청히 서 있는 거야?”
“아? 예.”
그때서야 점소이는 손에 든 빗자루를 내려놓고는 허둥지둥 내실로 뛰어갔다.
“거, 애 놀라게 왜 눈을 부라리고 그래. 넌 얼굴이 흉기라고 했잖아.”
“내 얼굴이 뭐 어때서?”
“솔직히 편안한 인상은 아니지.”
“뭐야!”
“안 그렇습니까, 나으리?”
신분을 감추기 위해 박태철이 나으리라고 부르며 쳐다보자 도현은 옆에 있는 김덕술에게 힐끗 시선을 줬다.
“김 위사.”
“예.”
“부인한테 잘하게.”
“……?”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덕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도현이 입을 열었다.
“자네한테 시집을 오고 애까지 낳아 주신 걸 보면 부인이 참 자애롭고 측은지심이 많은 것 같군.”
“큭큭큭.”
“끄으응.”
김덕술이 와락 얼굴을 구기며 앓는 소리를 낼 때 내실 문이 벌컥 열리며 뚱뚱한 체격의 중년인이 허둥지둥 달려와 도현을 보고는 꾸벅 허리를 굽혔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주인은 봉황상단 소속으로 본명은 오삼돌이었는데 왕태춘이라는 가명을 쓰고 객잔을 운영하며,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해 지부장에게 넘기는 일을 맡고 있었다.
“연락을 하고 온 것도 아닌데, 뭘.”
“안쪽에 별채가 있으니 거기로 가시죠.”
“그럴까.”
의자에서 일어난 도현은 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객잔 뒤편에 있는 별채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담이 쳐져 있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다시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해산객잔 주인으로 있는 오삼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왕태춘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절을 올리며 중국어가 아닌 조선말로 주인이 인사를 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고를 치하했다.
“타국에서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노예로 끌려가 심양에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고 있었는데, 제게 새 인생을 주신 대군마마를 위해서라면 뭐든 못하겠습니까.”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쑥스럽군.”
진심이 가득 담긴 눈빛에 멋쩍어하는 도현과 달리 양옆에 선 위사들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김 지부장을 만나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물론입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북경 지부장인 김하방한테 연락을 취하기 위해 주인이 방을 나가자 김덕술이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도현을 쳐다봤다.
“징그럽게 뭐야?”
“헤헤헤. 그냥 저희가 주군은 정말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혹시나 예친왕이 보낸 벼룩이 있는지 주위나 잘 살펴봐.”
“저희들이 누굽니까? 벌써 미행이 있는지 다 확인했으니까 염려 마십시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함께 오래 다녀서 그런지 넉살이 늘어난 김덕술을 보며 도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칠현이랑 자주 어울려 다니더니 뺀질거리는 게 옮았네.”
아까 입구에서 마주쳤던 점소이가 가져다 놓은 차를 마시며 얼마쯤 기다렸을까 김 지부장이 주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대군마마.”
“김 지부장, 오랜만이군.”
“제가 먼저 찾아뵈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청군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연락을 취하기 쉽지 않았을 거야. 괜히 의심을 받는 것보다 내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낫지. 서 있지 말고 앉아.”
“예.”
도현의 말에 김 지부장이 의자에 앉았고 객잔 주인은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지난번 일은 정말 잘해 줬어.”
“전 그냥 대군마마께서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계획대로 실행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특히나 전장 한복판에서 말이야.”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북경에서 고생하는 김 지부장을 격려한 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자네한테 시킬 일이 하나 더 있어서네.”
“뭔지 말씀만 하십시오.”
“다른 것이 아니고 이곳에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많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뜻밖의 질문에 김 지부장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선교사라면 하얀 피부에 눈이 파래서 낮도깨비처럼 생긴 이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그자들이라면 여기 북경과 천진에 몇 명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잘됐군. 나중에 긴히 쓸 일이 있으니까 그들의 소재를 파악해 두고 가진 재주가 뭐가 있는지 알아 두게.”
“……알겠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종교인이면서도 뛰어난 기술자이자 지식인이었기에, 지금은 억울하게 죽었지만 명나라의 명장인 원숭환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통해 몇몇 앞선 기술을 습득하려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도현의 깊은 뜻을 모르는 김 지부장은, 선교사한테 왜 관심을 가지는지 의아해하면서도 그가 하는 일이었기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북경 주민들의 분위기는 어때?”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남아 있지만 입성 이후 청군이 별다른 약탈을 저지르지 않고 치안을 유지하자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습니다.”
“청군에 대한 반발심은 없고?”
“당연히 있지요. 하지만 워낙 반란군한테 고초를 당하고 숭정제가 자신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배신감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차라리 강한 청군의 보호를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흐음. 그렇겠지. 그러면 예상보다 청군이 화북 지역을 빨리 안정시키겠군.”
“돌발 변수가 없는 한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넓은 화북 지역을 쉽게 소화시키고 바로 아직 혼란을 벗어나지 못한 강남마저 청나라가 넘본다면,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조선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게 점심 식사를 함께하며 북경 지부에서 추진하는 일의 경과와 주변 정보를 자세히 보고 받은 도현은 오후 늦게 서야 거처로 돌아갔다.
북경이 함락된 지 한 달도 안 돼서 하북성을 비롯해 산동성, 산서성을 차례로 점령한 예친왕은 대륙에 기반을 완전히 굳히기 위해 전격적으로 천도를 결정했다.
심양에 있는 청국 황실을 북경으로 옮기겠다는 거였는데 일부 장수들이 좀 더 점령지가 안정된 다음에 실행하자며 반대했지만, 예친왕은 자신의 뜻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사실상 어린 순치제 위에 있는 그림자 황제인 예친왕이었기에 그가 결정을 내리자 다른 신하들은 불만이 있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도현과 소현세자는 예친왕의 부름을 받고 그가 거처로 쓰고 있는 전각으로 갔다.
이곳 역시 약탈을 당했지만 그동안 보수를 해서 불에 그슬린 벽과 기둥이 깨끗하게 치워지고 예친왕의 권력을 보여 주듯 값비싼 장식물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이리들 앉게.”
두 사람을 본 예친왕은 미소 띤 얼굴로 일어나 넓은 방 한쪽에 마련된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예.”
원탁을 사이에 두고 놓인 의자에 세 사람이 앉자 시종이 들어와 차를 내놓고 나갔다.
은은한 차향이 느껴질 때 맞은편에 있던 예친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동안 제대로 신경을 써 주지 못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황궁 안에 따로 전각을 내주시고 시종들까지 보내 주셔서 불편함 없이 편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소현세자의 대답에 예친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게.”
“네.”
“그건 그렇고 자네들도 북경으로 천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겠지?”
안 그래도 가장 신경 쓰고 있던 문제를 꺼내자 도현과 소현세자는 약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 폐하가 이쪽으로 오시면 조선 관저도 옮겨 와야 되니 미리 준비를 해 두게.”
천도가 결정됐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조선에서 더 멀리 떨어진다고 생각하자 소현세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와 달리 도현은 비교적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상반된 모습에 예친왕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거처는 명국 승상의 저택이 규모도 크고 거의 피해 없이 비어 있다고 하니 그걸 쓰면 될 걸세.”
이미 머물 곳까지 다 정해 두고 하는 말이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두 사람은 그저 조용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운영비는 남초 수입으로도 충당이 될 테니 심양에서처럼 따로 경작지를 내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떤가?”
남초 수입으로 조선 관저가 많은 이득을 보고 있다는 걸 예친왕이 다 알고 있었기에 엄살을 부릴 수 없었던 소현세자는 옆에 있는 도현과 살짝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심양에 있는 땅은 계속 조선 관저에서 관리하도록 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할 이야기가 있는데…….”
상대가 말끝을 살짝 흐리며 뜸을 들이자 무슨 요구를 하려고 저러는지 도현과 소현세자는 괜히 긴장이 됐다.
“봉림대군만 북경에 남고 소현세자는 이제 그만 조선으로 돌아가도 좋네.”
“……!”
순간 바로 이해가 안 돼서 멍하니 있던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지, 지금 영구 귀국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러네. 다음 대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가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좋지 않으니 특별히 귀국을 허락하는 걸세.”
전혀 기대도 안 했던 일이었기에 소현세자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기는 도현도 마찬가지였는데 원래 역사대로라면 북경에서 몇 년 더 볼모 생활을 하다가 귀국을 하는 거였기에, 이걸로 이제 역사의 방향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많이 틀어졌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몇몇 반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소현세자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인데 별로 기쁘지 않은 모양이군?”
짐짓 화가 난 듯 예친왕이 말하자 소현세자는 손사래를 치며 이야기를 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무 갑작스럽고 믿기지 않는 일이라……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장난을 쳐 본 거니까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으이. 조선에 돌아가서도 양국이 지금처럼 우애롭게 지낼 수 있게 가교 역할을 잘해 주길 기대하겠네.”
웃는 얼굴로 가볍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 있었는데, 조선에 보내 주는 대신 인조와 사대부들이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잘 다독이라는 거였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소현세자는 약간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사실 이번 결정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예친왕이 치밀한 계산 끝에 내린 거였다.
북경을 함락시키며 명과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니 이제 볼모로서 가치가 떨어진 소현세자를 조선에 돌려보내 인심을 얻고 더불어 청의 힘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그를 통해 조선 조정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속셈이었다.
거기다가 둘째 왕자인 도현을 계속 붙잡아 두고 있으니 최소한의 안전판은 확보해 두는 거였다.
사실 볼모의 가치로 따지면 소현세자가 훨씬 높았지만 가끔씩 자신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마음에 걸린 예친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현을 선택했다.
“그럼 준비할 것이 많을 테니 이만 나가들 보게나.”
“네.”
예친왕의 말에 두 사람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거처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앞에 앉아 있는 도현을 미안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고국을 떠날 때처럼 함께 돌아가야 되는데, 나만 먼저 가게 돼서 너한테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형님이라도 귀국하실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니 고맙다.”
서운할 텐데도 표시를 내지 않고 애써 미소를 지어 주는 모습에 소현세자는 도현의 손을 꼭 잡아 줬다.
“귀국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한양에 가시면 숙원 조씨가 더 집요하게 형님을 노릴 테니 걱정입니다.”
“아바마마가 총애하는 여인과 다툼을 벌이는 것이 썩 내키지 않지만, 나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뭔가 결심한 것이 있는지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소현세자의 모습에 도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시겠지만 그래도 절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요. 특히 김자점을 주의하십시오.”
“김자점이라면, 병판을 말하는 거냐?”
“예. 제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김자점이 숙원 조씨와 손을 잡았다고 하더군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현세자는 짧게 혀를 찼다.
“쯧. 병자호란 때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전투를 피했고 후에는 비굴할 정도로 청국에 아부하며 권세를 키우더니, 이제는 숙원 조씨와 작당을 해. 정말 상종 못 할 사람이군.”
“소인배이면서도 눈치가 빠르고 조정에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 자이니 조심하셔야 됩니다.”
도현의 충고에 소현세자는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마. 그나저나 북경에 혼자 남을 네가 걱정이구나.”
“염려 마세요. 이번 기회에 대륙의 여러 문물을 배우며 지내지요.”
“그래. 넌 항상 긍정적이고 똑똑하니까 잘 해낼 거다.”
어리게만 느껴지던 동생이 어느새 훌쩍 자라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에 소현세자는 흐뭇하고 대견한 시선으로 도현을 바라봤다.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려는 마음에 이틀 뒤 소현세자는 북경성을 나와 천진에서 배를 타고 심양으로 갔다.
그보다 먼저 황궁을 통해 귀국 소식이 전해진 조선 관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반면 전령을 통해 소현세자를 돌려보내겠다는 청국의 통보를 받은 조선 조정은 기쁨보다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왕위 계승자를 오래 붙잡고 있는 건 도리가 아니니 다시 돌려보낸다고…… 흥!”
인조가 청국에서 보내온 서신을 서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자 대전에 모인 신하들은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숙였다.
“언제부터 청국이 조선의 왕위 계승에 참견을 했다고 이따위 글을 적어 보낸 거야!”
세자 부부가 돌아오는 것보다 청국 황제가 문서로 소현을 왕위 계승자로 못 박아 적어 놓은 것이 거슬린 것이다.
세자 책봉을 받았으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소현이 자신을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있는 인조이기에 사소한 표현 하나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현은 명이 아니라 청국 황제에서 세자 책봉을 받았고 심양에서 수년간 볼모 생활을 하면서 섭정인 예친왕을 비롯한 여러 청나라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기에 불안감이 더 컸다.
특히나 인조가 의지하던 명이 몰락하고 청나라가 새롭게 대륙의 패자로 떠오르는 시점에서 갑자기 영구 귀국을 시킨다고 하자, 혹시나 예친왕이 자신 대신 청에 우호적인 소현세자를 국왕으로 세우려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연세가 있으시니 그걸 생각해서 세자 저하를 돌려보내 주는 걸 겁니다.”
딴에는 인조를 진정시키려고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화를 더 돋우고 말았다.
“대사간은 이제 나이가 많으니 내가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야 된다, 이건가!”
“그게 아니오라…….”
꽝!
당황한 대사간 조경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인조가 한쪽 손바닥으로 서탁을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듣기 싫소! 대신이라는 사람들이 그따위 말을 하니까 저잣거리에서 짐 대신 세자가 왕이 되어야 된다는 소문이 도는 것 아니오.”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무것도 모르는 상것들이 지껄이는 소리이니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달랬지만 인조는 화를 좀처럼 풀지 않았다.
“이렇게 태평스러워서야. 자고로 작은 구멍에 둑이 터진다고 그런 이야기들이 돌다가 자칫 역심을 품는 무리라도 나오면 경들이 책임을 질 거요!”
역심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인조의 입에서 나오자 순간 대전 안은 한겨울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흔히들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신권, 즉 신하들의 힘이 강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국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역모와 관련된 일이었다.
사대부들이 숭배하는 성리학의 기본 바탕이 충과 효이다 보니까 아무리 크게 강한 권세를 부리는 신하라도 일단 역모 죄를 뒤집어씌우면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달리 조선 왕조 육백 년 역사를 보면 왕을 넘어서는 권력을 지닌 인물은 상당히 많았지만 반정을 일으켜 새 왕조를 열려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무튼 엄청난 피바람을 동반하는 역모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하들을 숨죽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영상!”
인조의 부름에 영의정 김류는 머리를 숙이며 얼른 대답했다.
“하명하시옵소서.”
“불필요한 서신을 보내 조정을 어지럽힌 세자는, 돌아오는 즉시 동궁전에서 석 달간 근신시켜 부족한 학문을 갈고닦도록 조치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수년간 힘겹게 볼모 생활을 하고 겨우 돌아온 세자에게 근신을 명령하다니, 너무 가혹한 조치에 신하들은 크게 술렁였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를 했다가는 무슨 불똥이 튈지 몰랐기에 다들 그냥 숨만 죽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대전을 나온 신하들은 삼삼오오 모여 오늘 있었던 인조의 지시를 가지고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신하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삼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우정)을 비롯한 주요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인조의 지시 때문인지 의정부議政府(조선 시대 최고 회의 기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대부분 어두웠다.
“본인도 명을 버리고 청을 선택해야 된다는 세자 저하의 주장에는 반대지만 이번 조치는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대사헌으로 있는 이명한의 말에 우의정 심기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고뿔에 걸려 고생하시면서도 아침 문안을 거르지 않으실 정도로 효자신데, 지난번에 잠시 귀국하셨을 때도 그렇고 주상께서 왜 자꾸 냉대를 하시는지 모르겠소이다.”
대전에서 야단을 들은 대사간 조경이 한탄하듯 이야기를 하자 상석에 앉아 있는 영의정 김류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다 그러실 만하니까 역정을 내시는 것 아니겠소. 당장 저잣거리에 퍼지고 있는 이야기만 해도 기분이 좋지 않으실 텐데, 엉뚱한 서한이나 보내서 화를 내게 만드시니 근신을 지시하신 것도 많이 봐주신 게요.”
그러자 김자점이 기다렸다는 듯 나서며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한양에 계실 때는 효자시고 생각도 바르셨지만 심양에 가신 이후부터는 사람이 바뀌셨어요.”
눈가를 찌푸린 심기원이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일흔두 살의 고령으로 원로인 호조판서 이명이 낮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안팎으로 나라가 뒤숭숭한데 우리끼리 싸워서야 되겠소.”
“흠흠.”
“으음.”
나이가 많다고 몇 번이나 벼슬을 내려놨지만 그때마다 인조가 친히 다시 불러들일 정도로 신임이 두텁고 다른 신료들의 인망마저 큰 이명이었기에 천하의 김자점과 심기원도 한발 물러서 줬다.
“아직 세자 저하께서 오시려면 시간이 있으니 그때까지 주상 전하가 오해를 푸실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이명이 그렇게 정리를 하자 심기원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김류와 김자점 역시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다만 떫은 감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짓기만 했다.
대신들이 이렇게 갑론을박하는 사이, 숙원 조씨의 거처에서는 높은 교성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호호호! 그게 정말이더냐?”
“네. 틀림없습니다, 마마.”
숙원 조씨는 상궁이 전해 준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아 한껏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소현세자가 한양에 귀국하게 됐다고 했을 때만 해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게로구나. 하긴 주상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데, 그토록 교만한 태도를 보인 세자를 고이 놔두실 리가 없지.”
그동안의 이간질로 인해 부자 관계가 아무리 나빠졌다곤 해도 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숙원 조씨에게 제일 큰 숙적은 뭐라 해도 소현세자다.
다행히 한양을 떠나 심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는 인조의 총애를 등에 업은 조씨가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지만, 세자가 돌아오면 안 그래도 그녀를 요망한 계집으로 여기고 있는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터.
게다가 조정의 원로대신들이 정통 왕위 계승자인 소현세자를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숙원 조씨에게는 소현세자의 귀환이 일생일대의 대위기나 다름없었다.
하나 소현세자가 돌아오면 그를 한시적이지만 근신 상태에 두겠다는 인조의 뜻이 전해지자마자 조정이 발칵 뒤집힌 것과는 반대로 숙원 조씨에게는 하늘이 편을 들어 준 것만 같아 절로 어깨춤이 춰질 정도였다.
“잘되었습니다, 마마. 이제 세자께서 돌아오시더라도 아무 걱정도 할 것이 없습니다. 두 손 두 발을 다 결박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힘이 있어 마마께 대적하겠사옵니까.”
“호호, 그렇지. 차라리 심양에 있던 시절이 더 나았더라며 후회하게 될 것이야.”
조씨는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도록 머릿기름을 묻힌 풍성한 머리칼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애지중지하는 보석함을 꺼내 열었다.
“오늘은 특별히 더 공들여서 치장을 해야겠구나.”
그러면서 조씨는 후궁에 처음 들어와 인조를 모신 후 선물로 받았던 비취색 귀고리와 비녀를 들었다.
“어때, 잘 어울리느냐?”
“궁에서 제일로 아름다우신 마마께 뭔들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흥,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오만한 표정으로 대꾸한 조씨는 보석함 제일 아래에서 손톱만 한 은색 가락지를 하나 꺼내더니 상궁에게 던졌다.
“내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이니 너에게 주마. 좋은 소식을 가져와 준 상이니라.”
조씨는 아무렇게나 내던졌지만 언뜻 봐도 상당히 값어치가 나갈 듯한 귀중품이다.
상궁은 행여나 조씨의 마음이 바뀔세라 허둥거리며 가락지를 주워 들고는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옵니다, 마마!”
그러나 조씨는 상궁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시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제 됐다, 그만 나가 보거라.”
“네.”
문이 스르륵 닫히고 홀로 남은 조씨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면서 사내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오른 자리인데 절대 끌려 내려갈 수 없지.”
이렇게 한양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을 때 당사자인 소현세자는 심양 관저를 정리하고 영구 귀국을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짐은 북경으로 가져가야 되니까 따로 빼놔.”
“먼 길을 가야 되니까 부서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으싸.”
일꾼들이 짐을 싸서 소달구지 위에 차곡차곡 올려놓는 걸 보고 있던 소현세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성 밖에 있는 농장은 어떻게 됐소?”
그러자 대빈객 박황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봉황상단에 운영권을 넘겼습니다.”
“잘했소.”
예친왕이 농장을 계속 운영해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현실적으로 심양 관저가 옮겨 가는 상황에 직접 관리를 하는 건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도현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결정 내린 것이 봉황상단에 맡겨 운영을 하도록 하고 북경으로 옮기는 관저에 수익금 육 할을 주기로 했다.
이러면 힘들게 가꾼 농장을 청국에 넘기지 않아도 되고 운영권을 주는 대신 봉황상단에서 상당한 금액의 돈을 넘겨받아 그걸로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예들의 몸값을 내주고 귀환 행렬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빈 일손은 봉황상단에서 다른 조선인 노예들을 구해 채워 넣은 후 이 년간 열심히 일하면 자유를 줄 계획이었다.
그동안 자금은 충분히 있어도 청국의 눈치 때문에 노예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애써 외면해야 했지만 이렇게 하면 마음 놓고 많은 동포를 구해 낼 수 있었다.
“북경에 가서도 불편한 것이 없도록 짐을 꼼꼼히 챙겨 주시오.”
“예.”
“그리고 내가 없더라도 대빈객이 봉림대군을 옆에서 잘 보살펴 주시오.”
“염려 마십시오, 저하.”
“그대만 믿겠소.”
시강원 소속 관리들도 세자와 함께 모두 귀환해야 하지만 박황은 소현세자의 부탁으로 일부 신하들과 함께 북경에 가서 도현을 보좌하기로 했다.
똑똑하고 씩씩한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청국에 혼자 남아 있어야 된다는 것에 소현세자는 미안하고 걱정이 됐다.
그때 세자전 소속 내관인 최형외가 옆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하, 봉황상단에서 사람이 찾아왔사옵니다.”
“봉황상단?”
“예.”
“지금 어디에 있지?”
“집무실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일이 생겨서 그러니, 여긴 대빈객이 알아서 정리해 주시오.”
“알겠사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의아한 마음이 든 소현세자는 몸을 돌려 급히 세자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장태범 봉황상단 총관이 온돌방에 앉아 있다가 급히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예를 갖췄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농장 운영권 때문에 며칠 전 인사를 와서 안면이 있던 소현세자는 편히 있으라는 듯이 한 팔을 살짝 내젓고는 상석 자리에 앉았다.
“장 총관이라고 했지?”
“그렇사옵니다.”
“서 있지 말고 앉게.”
“예.”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될 소현세자였기에 장 총관은 평소와 다르게 약간 긴장한 얼굴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지 않나. 고개를 들게.”
“하지만…….”
“괜찮아. 동생인 봉림대군이 거느린 수하면 내 식구나 마찬가지이니 편히 대하게.”
재차 소현세자가 권하자 장 총관은 한쪽에 서 있는 최 내관의 눈치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상체를 들었다.
“서로 얼굴을 보니 편하고 좋잖아.”
“황공하옵니다.”
“농장 문제는 다 정리가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일로 날 찾아왔나?”
소현세자의 물음에 장 총관은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가서 옆에 놓여 있던 비단 보자기를 살짝 앞으로 밀며 대답했다.
“대군마마께서 세자 저하께 전해 드리라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봉림대군이?”
“예.”
북경에 있는 도현이 자신한테 뭔가를 보냈다고 하자 소현세자는 의아한 얼굴로 최 내관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최 내관은 비단 보자기를 들어 소현세자 앞에 가져와서는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었다.
안에는 옻칠이 된 제법 커다란 나무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누런 황금빛을 뿜어내는 금원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충 봐도 족히 수만 냥은 넘을 것 같았다.
“이게 뭔가?”
엄청난 거금에 소현세자가 눈이 동그래져서 묻자 장 총관은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이제 한양에 가시면 이리저리 돈을 쓰실 일이 많으실 거라며 대군마마께서 준비를 하신 겁니다.”
“허허. 이런…….”
“시간이 촉박해서 십만 냥밖에 넣지 못했습니다.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한양에 있는 저희 봉황상단 지부로 연락을 주십시오. 그럼 바로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걸로도 충분하다네. 나 때문에 갑자기 돈을 준비한다고 수고가 많았겠군.”
“아닙니다.”
말을 하며 소현세자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도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앞에 있는 돈 상자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동생한테 잘 쓰겠다고 전해 주게.”
“예, 저하.”
며칠 뒤 소현세자 부부는 관저 식솔들과 농장에서 일하던 조선 출신 노예 수백 명을 데리고 귀향길에 올랐다.
비단 옷과 장신구, 다른 귀중품 등은 먼저 챙겨 마차에 실었지만 움직이는 인원이 많은 만큼 각자의 짐을 등에 지고 정리하는 데만도 며칠이 걸렸다.
떠나는 당일 아침에도 넓은 마당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짐마차와 말 그리고 함께 한양으로 가는 사람들이 나와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세자 부부를 마중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단장을 마친 장씨 부인은 곱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린 강빈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아, 자넨가.”
강빈은 장씨의 목소리를 듣고 밝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어쩐지 들뜬 기색에 볼에는 홍조까지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장씨 부인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강빈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얼굴에 그리 드러나는가? 나도 아직 한참 모자라는군. 이런 때일수록 체통을 지켜야 하는데…….”
“괜찮지 않습니까. 저라 해도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기뻐서 며칠은 잠을 설칠 것 같은데요.”
“아. 미안하네.”
한양으로 돌아가는 세자 부부와는 달리 도현은 계속 청국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황도가 심양에서 북경으로 바뀌었으므로 장씨 부인 역시 도현을 따라 다시 관저를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귀한 신분인데도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하는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런데 그 앞에서 고국에 간다고 마냥 좋아하기만 했으니 윗사람이 되어서 미처 배려가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에 강빈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무슨 사과를 하십니까? 세자빈 마마께서 제게 잘못하신 것도 없는걸요.”
강빈의 마음을 눈치챈 장씨는 부드럽게 미소를 띠고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
“어차피 심양에 있으면 낭군님을 만날 수도 없으니 북경에 가는 게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들 두 사람이라면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걸세.”
강빈은 장씨의 손을 꼭 붙잡고 마음 굳세게 먹으라는 듯 당부했다.
“마마, 이제 출발하실 시간이옵니다.”
상궁의 목소리에 퍼뜩 주위를 둘러보니 대충 정리가 끝난 듯 짐을 짊어 멘 장정들과 보따리를 든 궁녀들이 나란히 서 있었고 마차와 말 들도 출발할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관저에서 나온 소현세자는 장씨와 함께 있는 강빈을 발견하고 옆으로 다가와 살짝 눈인사를 보냈다.
“세자 저하.”
조씨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소현세자는 그럴 것 없다는 듯이 작게 웃고는 말했다.
“나중에 북경에 가서 봉림대군을 만나면 안부 전해 주시오. 떠날 때 이야기를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군요.”
“네에. 꼭 전하겠습니다.”
“그럼 강빈, 이만 갑시다.”
소현세자의 재촉에 강빈은 사뭇 아쉬운 듯이 장씨를 돌아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
우렁찬 구호 소리와 함께 행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장씨 부인은 그 뒷모습을 눈부시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대문을 마차가 통과하는 순간 세자 부부의 마음속엔 기쁨과 회한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지만, 장씨 부인의 심정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언젠가 저 문을 나서는 일이 있다면 그건 조선으로 돌아갈 때뿐이라고 생각했건만.
“마님…….”
장씨 부인을 모시는 상궁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안타까운 듯이 불렀다.
“이 관저도 쓸쓸해지겠군. 나름대로 정이 들었는데 아쉽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북경엔 대군마마께서도 계시고, 대륙의 오랜 수도였던 만큼 구경하실 것도 많아서 지루하지 않으실 겁니다.”
“훗. 자네가 날 위로하는 겐가?”
“아, 아닙니다. 어찌 감히 제가…….”
행여나 장씨의 기분이 상했을까 싶어 상궁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강빈이 걱정하는 건 그렇다 쳐도, 궁녀들에게까지 위로를 받다니 대체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만 됐다. 어차피 며칠 후엔 우리도 떠나야 하니까 나머지 가재도구랑 짐 정리나 하자꾸나. 사람은 떠날 때 마무리를 깔끔히 해야 하는 법이다.”
“네, 마님.”
장씨는 바람에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매만지면서 북경이 있을 방향의 먼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서방님마저 안 계셨다면 이 상황을 견디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현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속이 따뜻한 느낌으로 가득 채워지며 든든해지는 것을 느낀 장씨는 궁녀들을 재촉하며 돌아섰다.
하북성과 산동성, 산서성을 차례로 점령한 청군은 진군을 멈추고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밀어붙여서 최소한 강북 지역은 모두 장악하고 싶었지만, 병력도 부족하고 반란군에 북경이 함락되며 갑자기 시작된 전쟁이라 이것저것 부족한 것이 많아 더 이상은 무리였다.
대신 예친왕은 반쯤 불에 탄 자금성 재건에 착수하며 점령지 안정과 청국의 중심을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겨 오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했다.
그와 동시에 아무리 청군이 용맹하고 전투력이 뛰어나다지만 드넓은 대륙을 순수한 여진족 전사들만으로 점령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항복한 한족 중에 충성심이 높은 자들을 골라 한인팔기를 구성했다.
순혈을 흐린다며 장수들 사이에 약간의 반발이 있었지만 이미 흡수한 몽고족들을 팔기에 편입한 선례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추진됐다.
“한족으로 팔기를 만든다고?”
“예. 그 이야기 때문에 지금 북경성 안이 떠들썩합니다.”
특유의 친화력을 이용해 자금성에서 일하는 고용인들로 이루어진 정보망(?)을 가진 칠현이 알려 준 소식에 무예 수련을 하고 있던 도현은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 내며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움직임이 상당히 빠르군.”
대번에 예친왕의 의도를 파악한 도현은 원래 역사보다 청나라가 더 빨리 대륙을 장악해 나가는 것 같아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주민들 분위기는 어때?”
“아직은 청나라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서 약간 부정적이지만 일부 투항한 한족 병사들은 기인旗人이 되려고 벌써부터 여기저기 손을 쓰는 모양입니다.”
기인이란 팔기군에 속한 병사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청나라가 가진 무력의 핵심으로 일종의 지배 계층에 속했다.
“팔기가 되면 신분이 보장되고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지니 그럴 수밖에.”
수건을 칠현에게 건네주며 도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걸로 한족을 두 패로 분열시키고 서로 반목하게 해서 앞으로 지배층이 될 여진족에게 감히 덤벼들지 못하게 만들 토대가 갖춰지겠군.”
“아 참! 그리고 새로 관저로 쓸 저택 정리가 모두 끝났다고 언제든 들어가도 좋답니다.”
“그래? 안 그래도 자금성 안에 있으니까 이것저것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잘됐군. 머뭇거릴 것 없이 오늘이라도 바로 옮기자고.”
“알겠습니다.”
예친왕과 청군 지휘부가 머물고 있어 정보를 알아내기는 편했지만 반대로 도현의 움직임도 낱낱이 파악되기에 그동안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김덕술과 박태철 두 위사가 있었지만 청군 병사들이 연무장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전쟁에 나온 거라 챙길 짐도 얼마 없었기에 도현은 바로 예친왕을 찾아가 새 관저로 가겠다고 이야기하고는 거처를 옮겼다.
황제 바로 아래 직위인 승상이 살던 곳답게 새 관저는 상당히 넓고 화려했는데, 전체적으로 야트막한 담을 경계로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되어 있고 작은 건물들을 빼고도 삼 층 이상의 전각이 일곱 개나 됐다.
얼핏 둘러봐도 심양 관저보다 두 배 이상 큰 것 같았다.
도현을 비롯해 이십 명도 안 되는 인원뿐이라 썰렁한 느낌마저 들었다.
끼이익.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진 전각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고 내부를 살펴보자 칠현이 따라와 입을 열었다.
“약탈이 벌어졌을 때 여기도 반란군 놈들한테 다 털려서 남아 있는 물건이 거의 없습니다. 일단 급한 대로 김 지부장을 통해 대군마마의 거처와 저희들이 사용할 곳에만 집기를 들여놨습니다.”
“잘했어. 그나저나 관저 식구들은 언제쯤 북경에 도착한다고 했지?”
“안전을 위해서 청 황제가 움직일 때 동행한다고 했으니까, 빨라도 가을이나 돼야 될 겁니다.”
“그렇군.”
아내인 장씨와 얼마 전 태어난 아기가 보고 싶었지만 거리도 멀고 중간에 패잔병과 마적 떼가 들끓었기에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새 관저를 둘러보고 있을 때 대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위사들이 본능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가며 경계 자세를 취할 때 낯익은 얼굴의 사내가 도현을 보고 꾸벅 인사를 해 왔다.
“대군마마, 안녕하십니까?”
“자네는 해산객잔 주인 아닌가. 이름이…… 그래, 맞아. 오삼돌이라고 했지.”
도현의 말에 오삼돌은 커다란 배를 흔들며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마께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자금성에서 나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당분간 시중 들 인원을 데려왔습니다.”
마침 일손이 필요했던 도현은 반색을 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됐군.”
“다들 조선인이고 저희 상단 식솔이니 믿고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도현이 쳐다보자 오삼돌 뒤에 서 있는 열 명의 남녀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까마득하게 높은 신분인데도 불구하고 도현이 먼저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자 사람들은 놀란 목소리로 얼른 대답했다.
“예. 옛.”
“자! 그럼 해가 떨어지기 전에 어서 짐부터 옮기자고.”
“네.”
도현의 말에 사람들은 위사와 함께 가져온 짐을 하나씩 옮겨 정리한다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북경 관저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로사리오
거처를 옮긴 지 이틀쯤 지났을 때 봉황상단 북경 지부장인 김하방이 일꾼으로 위장해 은밀히 도현을 찾아왔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대군마마?”
칠현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김하방의 인사에 도현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자네가 신경을 써 준 덕분에 잘 있었네.”
“보내 드린 일꾼들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다들 성실하고 일을 잘하더군.”
“다행입니다.”
한쪽 팔을 들어 자리를 권한 도현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나?”
온돌이 아닌 중국식 방이라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은 김 지부장은 품속에서 여러 번 접혀진 종이를 하나 꺼내 도현 앞에 내려놨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일을 다 끝냈습니다.”
“벌써 말인가?”
“숫자가 적어서 빨리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접혀진 종이를 펼치자 북경과 텐진에 거주하는 선교사들의 이름과 신상 내력이 자세히 적혀 있었는데 김 지부장의 말처럼 모두 열두 명밖에 안 됐다.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도현은 로사리오라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로마 교황의 지시를 받고 파견된 가톨릭 선교사인 데 비해 로사리오라는 사람은 특이하게도 원양무역선 선원이자 뛰어난 화포 기술자였다.
칠현이 가져다 놓은 차를 마시며 조용히 기다리던 김 지부장은 도현이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자 덧붙이듯 말했다.
“서양인들을 찾으신다면 멀리 강남에 아오먼(마카오)이라는 곳에 가면 수백 명이 모여 산다고 합니다.”
김 지부장이 말하는 곳은 바로 마카오澳門였는데 이미 백 년 전인 명나라 가정제 때 포르투갈이 땅을 빌려 자리를 잡고 비단과 도자기, 금, 은의 중계무역을 하며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었다.
“언젠가는 한번 가 봐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렵고. 그것보다 로사리오라는 자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 봐.”
잠시 기억을 더듬은 김 지부장은 알고 있는 걸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들하고 달리 이력이 특이해서 저도 흥미롭게 생각한 인물입니다. 무역선 선원 출신이자 화포 기술자로 천진에 주둔하던 명나라 수군 병기창에서 최근까지 일하다가 황제가 강남으로 달아나면서 버려졌습니다.”
화포 기술자라는 말에 도현은 눈을 반짝였다.
“지금은 뭘 하고 지내지?”
“처자식과 함께 포구 근처에 있는 집에서 머물며 아오먼으로 가는 배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했어?”
“예. 한족 출신 여자와 혼례를 치르고 세 살 먹은 딸과 그 위에 아들도 하나 있더군요.”
“그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김 지부장.”
“예.”
“가서 로사리오를 데려와.”
처음에는 왜 낮도깨비처럼 생긴 것들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조사를 하면서 조금씩 그들이 가진 지식이 얼마나 유용한 건지 깨달은 김 지부장은 도현의 지시에 바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싫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끌고 오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도움을 받아야 되는데 처음부터 껄끄럽게 관계가 만들어지면 안 되지. 가급적이면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머리를 굴려 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그냥 놔둬. 대신 그들이 가진 기술 서적이 있으면 최대한 구해서 가져오도록 해.”
“네.”
종교에 대한 편견은 없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오면 자칫 전통적인 유교나 불교와 충돌하며 내부적으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도현은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물론 로사리오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었는데, 아니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선교사와 접촉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김 지부장에게 회유 작업을 맡겼던 도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바꿔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게 김 지부장을 중간에 끼는 것보다 이쪽의 진실성을 보여 줄 수 있고 상대가 필요한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파악할 수도 있었다.
예친왕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심한 감기가 걸려 집 안에서 쉰다고 거짓말을 했다.
계속 자금성 안에 있었다면 속이기 어려웠겠지만 따로 떨어져 나와 있고 일꾼들이 모두 한편이었기에 꾀병을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텐진으로 가지 않고 일부러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아픈 척 연기를 했다.
“어쩌다가 한여름에 고뿔이 걸리셨소이까?”
병문안 겸 진짜인지 살피러 온 만월개의 말에 상체를 일으켜서 침대에 앉은 도현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무예를 수련하고 흘린 땀을 식히려고 밤에 목욕을 했더니 다음 날부터 으슬으슬 몸이 떨리고 춥더군요.”
“저런, 그래서 여름이라도 몸을 너무 차게 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소.”
걱정해 주는 척하지만 진심이 전혀 담기지 않은 표정에 도현은 일부러 만월개를 향해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침이 얼굴에 튄 만월개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거, 마안하오이다.”
“흠흠.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도현이 얼른 사과를 하자 얼굴이 벌게진 만월개는 화가 났지만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옆에 있던 칠현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침을 닦아 냈다.
그 모습에 도현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면서도 계속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으니 난 이만 가 보겠소이다.”
“그러시겠소? 아 참, 예친왕 전하께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주시오. 콜록!”
“알겠소. 그럼 몸조리 잘하시오.”
말을 하며 도현이 한 번 더 기침을 하자 또 침이 튈까 봐 화들짝 놀라 뒤로 피한 만월개는 인사도 대충 하고는 급히 방을 나갔다.
“큭큭큭. 청국 관리라고 만날 목에 힘을 팍 주고 다니더니 꼴좋다.”
만월개를 배웅하고 돌아온 칠현은 혼자 침대 위에 누워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도현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당연하지 저놈 잘난 척하는 게 얼마나 눈꼴 시렸는데.”
“하긴 저도 그랬어요.”
“만월개까지 다녀갔으니까 이제 더 이상 찾아올 사람이 없겠지?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도현은 고급스러운 비단 옷을 벗고 미리 준비해 놓은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없는 동안 들키지 않게 연기 잘하고 있어.”
대역을 맡아 관저에 남게 된 칠현은 아쉬운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네. 네.”
“그러면 집 잘 보고 있어.”
“제가 무슨 집 지키는 똥개예요!”
“갔다 올게.”
“저 없다고 괜히 엉뚱한 사고나 치지 마세요.”
“내가 애냐?”
툴툴거리는 칠현을 남겨 두고 약 올리듯 한쪽 손을 들어 흔들어 준 도현은 뒷문을 이용해 은밀히 관저를 빠져나갔다.
자신의 부재를 감춰야 했기에 일부러 위사들을 그대로 관저에 놔둔 도현은, 얼마 전에 와서 합류한 박영식 대장과 호위대 대원 열 명만을 데리고 곧장 천진으로 향했다.
꼬박 반나절 동안 말을 달려 도착한 천진은 도시 규모에 비해 상당히 조용하고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숭정제를 따라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수군함대와 돈 많은 상인들이 모두 강남으로 피난을 떠나 버려 빈껍데기만 남았다.
도시에는 돈은 물론이고 어디 갈 곳도 없는 빈민들만 잔뜩 남아 하루하루 힘들게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천인대 하나가 와서 점령만 하고 가 버렸지 아직 청국 조정에서 관리가 한 명도 파견되지 않아 치안마저 어지러운 상태였다.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객잔에서 쉬시고 내일 찾아가시지요.”
말을 타고 달려오느라 뿌연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도현은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기에 안내역으로 김 지부장이 붙여 준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저쪽으로 가시면 깨끗하고 음식 맛도 좋은 곳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로 가세.”
“예.”
사내를 따라 말을 몰아가자 객잔이 하나 나왔는데 제법 규모가 크고 깨끗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에 서 있던 점소이 하나가 도현 일행을 보고는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말고삐를 잡았다.
“며칠 쉬어 가야 되는데, 방이 있느냐?”
도현의 말에 도현 일행을 재빨리 훑어본 점소이는 싹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개나 준비해 드릴까요?”
“붙어 있는 걸로 세 개를 다오.”
“다 들어가시려면 큰 방으로 해야 되겠죠?”
“그래.”
“일 층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걸로 머무는 동안 말 먹이를 든든하게 챙겨 줘.”
도현이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은자를 하나 던져 주자 점소이는 입이 귀에 걸려서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제일 좋은 걸로 먹여서 살을 토실토실 찌워 놓겠습니다.”
“녀석.”
넉살 좋은 점소이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일행과 함께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실내에는 절반 정도 자리가 채워져 있었는데 도시 분위기 때문인지 다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을 둘러본 박영식은 만약의 경우 재빨리 밖으로 피할 수 있게 입구 바로 옆자리로 도현을 이끌었다.
인원이 많았기에 탁자 세 개를 차지하고 앉자 아까 입구에서 봤던 점소이가 찻주전자를 들고 왔다.
“식사도 하시겠어요?”
앞에 있던 박영식이 쳐다보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방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것도 귀찮으니까 지금 먹도록 하지.”
“예.”
“여기서 제일 잘하는 음식이 뭐야?”
본능적으로 도현이 결정권자라는 걸 알아차린 점소이는 양손을 비비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숙수님은 북경 제일루에서 일하셨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 음식이 전부 맛있지만 그중에서도 잉어찜이 제일입니다.”
“그럼 그걸로 줘.”
“술도 가져다 드릴까요?”
“간단히 한 잔씩들 해.”
그러자 박영식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탁자마다 한 병씩 죽엽청으로 갖다 줘.”
“네. 죄송하지만 선금입니다.”
박영식이 돈을 건네주자 점소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주방으로 뛰어갔다.
곧이어 탁자 위로 음식이 날라져 왔는데, 간장에 졸인 마늘과 종이처럼 얇게 썰어 새큼한 맛이 나는 무, 신선한 나물 등의 작은 반찬들이 먼저 깔리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잉어찜이 올라오자 뜨끈하게 올라오는 김과 함께 확 퍼지는 맛있는 향기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모처럼 건배나 한번 하지.”
도현이 먼저 잔을 들어 올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흥겨운 표정으로 손을 한데 모아 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을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한 남자가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상당히 큰 키에 하얀 얼굴 그리고 금색 곱슬머리는 중국 전통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상당히 이국적이었는데, 서양인이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기에 도현은 단번에 그가 자신이 찾아온 로사리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곧장 계산대에 앉아 있는 주인한테로 간 로사리오는 한참을 뭔가 하소연하듯 대화를 나누었다.
박영식도 로사리오를 발견했는지 약간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 저자는…….”
“맞아. 이거 뜻밖이군.”
“가서 데려올까요?”
잠시 고심을 한 도현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아니, 일단 내버려 둬.”
“예.”
그사이 이야기가 다 끝났는지 로사리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침울한 얼굴로 돌아서 객잔 한쪽 구석에 앉았다.
그러고는 안주도 없이 독한 죽엽청을 연신 들이켰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현은 다른 손님한테 음식을 가져다주고 지나가던 점소이를 조용히 불렀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그건 아니고 물어볼 게 있는데…….”
귀찮을 만도 했지만 말먹이 값을 두둑이 받아서 그런지 점소이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저쪽에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 보이지.”
시선을 옆으로 돌린 점소이는 로사리오를 보고는 알은척을 했다.
“아! 노虜씨 아저씨요.”
“저 사람 성이 노야?”
“그건 아니고 따로 이름이 있는데 말하기가 어려워서 다들 그냥 노씨라고 불러요.”
“그렇구나.”
아무래도 노虜 자가 포로, 화외化外 사람,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고 로사리오의 이름 첫 글자와 비슷하기에 그냥 노씨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근데 노씨 아저씨는 왜요?”
약간 경계하는 듯한 얼굴로 점소이가 묻자 도현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야기를 했다.
“아까 보니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해서 그래.”
그러면서 은자 한 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잠시 망설이던 점소이는 냉큼 은자를 챙겨 소매 주머니에 넣고는 불쌍하다는 듯 로사리오를 힐끔 쳐다보며 사정을 이야기해 줬다.
“보시다시피 한족이 아니라 양이洋夷잖아요. 듣기로 원래 바다를 오가는 큰 무역선 선원이었다고 해요. 어쩌다가 여기에 정착을 하게 돼서 얼마 전까지 수군 병기창에서 일을 했는데, 난리가 나고 북경이 반란군에게 함락되면서 그만 일자리를 잃고 말았어요.”
“저런.”
여기까지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도현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맞장구를 쳐 줬다.
“그래서 가족을 데리고 양이들이 모여 산다는 아오먼(마카오)이라는 곳에 가려고 배편을 구하려다가 그만 못된 놈들한테 사기를 당해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다 빼앗기고 그때부터 사기꾼을 찾으러 다니는데, 벌써 도망쳤지 아직 여기 있겠어요.”
“그렇구나.”
도현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주방 쪽에서 점소이를 부르는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이! 뭐 하고 있어? 손님들 기다리신다.”
“이크.”
잠깐 얘기한 사이에 어느새 내갈 음식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점소이는 어깨를 움츠리며 답했다.
“지금 가요! 죄송해요, 그럼 전 이만…….”
“아, 그래. 수고해.”
점소이가 꾸벅하고 허둥지둥 반대쪽으로 사라지자 도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여전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로사리오에게 시선을 준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십니까?”
“내일 찾아갈 필요 없이 지금 만나 보려고.”
그러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마, 마마.”
놀란 박영식은 따라 움직이려는 대원들에게 손짓을 해서 그냥 있게 하고는 황급히 도현을 뒤쫓아 갔다.
로사리오에게 간 도현은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에 묻지도 않고 털썩 앉았다.
“당신 뭐야?”
약간 붉어진 얼굴로 상대가 쳐다보자 도현은 로사리오의 잔을 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나도 한 잔 주시오.”
“놀아 줄 기분이 아니니까 저리 꺼져.”
조금 어눌했지만 분명한 어조의 명나라 말로 로사리오가 눈을 부라렸지만 도현은 태연하게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따랐다.
“까칠하기는…….”
쪼르르르.
“크으. 쓰다.”
무례한 도현의 행동에 로사리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게!”
“그렇게 앞뒤 못 가리고 덤벼드니까 멍청하게 사기나 당하지.”
“……!”
순간 멈칫한 로사리오는 도현을 노려보며 경계하듯 말했다.
“너 누구야!”
의자 등받이에 삐딱한 자세로 몸을 기댄 도현은 잔에 술을 새로 따라 로사리오 앞에 놔두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괜찮은 일자리가 하나 있는데 해 볼 생각이 있나?”
이리저리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내자 막 화를 내려던 로사리오는 물론이고 옆에서 불안한 얼굴로 지켜보던 박영식까지 깜짝 놀랐다.
“무슨 수작이야?”
“속고만 살았나? 하긴 뭐, 얼마 전에 사기를 당했다니 의심할 만도 하지.”
“방금 처음 봤는데 당신이 날 어떻게 알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너무나도 당당한 도현의 태도에 약간 기세가 꺾였지만 그래도 날 선 시선으로 째려보며 로사리오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로사리오 밸른, 에스파니아 발렌시아 시 출신이고 원양 무역선 선원이자 제법 실력 있는 화포 기술자로 얼마 전까지 천진에 주둔하는 명나라 수군 병기창에서 홍이포 제작 일을 맡아 했고, 한족 아내와 자식 둘이 있으며 최근 사기를 당해서 주머니 사정이 아주 안 좋음. 이 정도면 당신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에 대해서 샅샅이 알고 있는 듯한 도현의 말에 로사리오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원하는 게 뭐야?”
“아까 말했잖아, 널 고용하고 싶다고. 병기창에서 일할 때보다 더 많은 봉급과 가족이 안전하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주지. 어때?”
최근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많이 궁핍했던 로사리오는 도현의 제안에 솔깃했지만 얼마 전 사기를 당한 것도 있어서 경계를 쉽게 풀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보다 말투가 확연히 달라졌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소?”
상대가 끌려 한다는 걸 눈치챈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제법 묵직해 보이는 비단 주머니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계약금이야. 이 정도면 내 진심을 확실히 보여 준 거라 생각해. 당분간 여기서 머물고 있을 테니까 제안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으면 찾아와.”
거기까지 말한 도현은 멍하니 돈주머니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로사리오를 놔두고 의자에서 일어나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마마, 그러다가 저자가 돈만 챙겨서 달아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맞은편에 앉은 박영식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도현은 태연하게 잉어찜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인물이었으니 그냥 액땜했다고 생각하면 돼.”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박영식은 정색을 했다.
“설마 시험을 하시는 겁니까?”
“뭐, 겸사겸사.”
즉흥적인 행동이었지만 상대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된 도현은 이런저런 수를 쓰지 않고 바로 직접적으로 영입을 제안하는 동시에 로사리오의 인성을 시험해 보는 거였다.
만약 여기서 박 대장이 걱정하는 것처럼 주머니에 든 돈을 욕심낸다면 나중에 영입을 했다가 조직에 더 큰 피해를 입히기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두세 수 앞을 내다보고 행동했다는 걸 깨달은 박영식은 앞에 있는 도현이 새삼스럽게 더 대단해 보였다.
한편 난데없이 돈주머니를 앞에 두게 된 로사리오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끈을 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헉!”
진짜 안에 돈이 들어 있을지도 의심스러웠지만 그래 봤자 몇 푼 안 되는 철전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번쩍거리는 은전이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 왔다.
“노 아저씨, 왜 그러세요?”
안절부절못하는 태도가 눈에 띄었는지 지나가던 점소이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자 로사리오는 황급히 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품에 집어넣었다.
“아, 아무것도 아냐.”
“……?”
점소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거라면 바로 요 근처에 의원이 있으니 불러 드릴까요?”
“괜찮다니까!”
“그래도…….”
“이봐, 여기 주문 안 받나?”
“아, 예! 지금 갑니다.”
마침 다른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점소이가 물러가자 로사리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혹시 주머니 안에 은전이 가득 들어 있는 걸 점소이가 봤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지나친 걱정이었는지 별다르게 그를 눈여겨보는 기색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는 곳에서 이런 큰돈을 놔두고 사라지다니.
로사리오는 도현 일행을 찾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그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곳에 묵고 있다고 했으니 아마 이 층에 올라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따라가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일어서는데, 품속에서 묵직한 돈주머니의 무게가 느껴지자 로사리오는 우뚝 발을 멈춰 세웠다.
이만 한 돈이 있으면 지금보다 좀 더 큰 집을 살 수도 있고, 아이들이 원하는 장난감도 마음껏 사 줄 수 있다.
아니, 그것보다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마카오로 가는 배표를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도 저도 다 안 되면 고국, 에스파냐로 돌아가는 수도 있으니 선택의 길은 언제든지 열려 있었다.
“이 돈만 있으면…….”
로사리오는 돈주머니를 숨겨 놓은 왼쪽 가슴 아래에 손을 가져가 꾹 누르면서 이 층 복도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그는 발길을 돌려 객잔을 나섰다.
지금 바로 돈주머니를 돌려주는 것은 굴러든 호박을 걷어차는 것만 같아서 쉬이 마음이 안 내켰던 탓이다.
하지만 뚜렷한 이유도 없이 큰돈을 가지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져 절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져 집집마다 밥을 짓는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오는 가운데, 허름한 주택가 한편에 로사리오의 집이 있었다.
원래는 이것보다 더 번듯한 집에 살았지만 명나라가 흔들리고 북경을 빼앗겨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가 되자 관청에서 일하고 있던 로사리오 역시 실직 상태가 되었다.
외국인이지만 한족 여인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룬 로사리오는 어떻게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남들과는 다른 외모 탓에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고,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급기야 원래 살던 집을 팔게 되었다.
“…….”
로사리오는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남자가 되어서 가족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집 앞에 서서도 차마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여보?”
그때 문이 활짝 열리면서 머리 수건을 둘러쓴 아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왔으면 들어오시지, 뭐 하고 계세요?”
“아니, 그냥.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배고프죠? 얼른 씻고 자리에 앉으세요.”
아내는 로사리오의 손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겉으로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집이었지만 일단 한 발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빛을 발하는 등불과 온기가 로사리오의 온몸을 감쌌다.
값이 싼 대신 거의 폐가 직전의 수준이었던 집이 그래도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나아진 것은 전부 다 아내가 열심히 쓸고 닦고 한 덕분이다.
안으면 한 팔에 쏙 들어올 만큼 체구가 작고 여린 아내지만 다람쥐처럼 열심히 왔다 갔다 하며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로사리오가 대충 얼굴과 팔다리를 씻고 오자 아내는 벌써 하얀 쌀밥을 담은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반찬을 나르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최근엔 계속 보리나 조를 섞은 밥만 먹었지 하얀 쌀밥은 오랜만이었기에 로사리오가 묻자 아내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봤어요. 마침 시장에 싱싱한 생선이 싸게 나와서 그것도 하나 사고, 당신 좋아하는 고기도 구웠으니 맛 좀 봐 봐요.”
그러면서 아내는 소금을 뿌려 간을 한 생선 구이와 조림 그리고 두툼하게 썬 소고기를 로사리오 쪽으로 내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은 밥을 든든하게 먹어야 힘을 쓴다잖아요.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아, 목말라요? 물을 아직 안 내놨네.”
로사리오는 평소답지 않게 말이 많아진 아내의 모습을 보고 어딘지 이상하다고 느꼈다.
“잠깐만, 여기 앉아 봐.”
억지로 손을 잡고 옆에 앉히자 아내는 까만 눈동자로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요?”
“날 생각해서 이렇게 차려 준 건 고마워. 근데…… 돈이 필요했을 텐데, 어디서 난 거야?”
“아, 그거 말예요.”
아내는 별걸 다 물어본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답했다.
“옆집 아줌마한테서 돈을 좀 빌렸어요. 남편이 도박을 했는지 뭘 했는지 몰라도 목돈이 생겼다기에 부탁했더니, 선뜻 빌려 주더라고요.”
그 말에 로사리오는 굵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동네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들 주머니 사정이 고만고만한 편이었다.
아무리 눈먼 돈이 생겼다 해도 일단 자기 입에 풀칠하는 게 더 급하지, 남한테 빌려 줄 여우가 있으면 여기 살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됐죠? 이 손 좀 놔요.”
아내는 생글 웃으면서 부드럽게 로사리오의 손을 떨쳐 낸 뒤 부엌으로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로사리오는 아내가 왜 자기한테 거짓말을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그럴듯한 이유 하나 떠올리지 못하고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무래도 직접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속이 개운하지 못할 것 같아 부엌 쪽으로 향하는데,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여보?”
“아!”
아내는 로사리오를 보고 황급히 돌아섰지만 그가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리게 하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뭐야? 왜 혼자 울고 있었어?”
“야, 양파 껍질을 까다가 눈이 매워서 눈물을 흘린 것뿐이에요.”
하지만 도마 위에는 양파는 고사하고 아무것도 올라와 있지 않다.
왜 자꾸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어 로사리오가 아내의 얼굴을 살펴보는데 순간 살짝 흘러내린 수건 사이로 비치는 짧은 머리카락을 보고 그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잠깐, 이거 뭐야? 머리카락이 왜 이래?”
로사리오가 수건을 옆으로 홱 벗기자 탐스럽게 출렁거려야 할 긴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사내아이처럼 빡빡 깍은 동그란 머리통만이 드러났다.
“보, 보지 말아요.”
아내는 부끄러워하면서 로사리오의 손에서 머리 수건을 빼앗아 얼른 뒤집어썼다.
그러곤 한참을 주저하다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시장에 가면 여자 머리카락을 사고파는 상인이 있어요. 길고 결이 좋은 머리카락일수록 값을 더 쳐준다고 해서…….”
“그래서 머리카락을 잘라 돈을 받은 거야?”
“네.”
아내는 로사리오의 눈치를 보다가 머뭇머뭇 그를 껴안았다.
“너무 화내지 말아요. 어차피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니까…… 그보단 당신이 잘 먹고 힘을 내 주는 게 더 좋아요.”
“바보같이. 나 때문에…….”
로사리오는 까끌까끌한 아내의 머리를 만지면서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걸 억지로 참았다.
“기껏 차려 놓은 밥이 식겠어요. 얼른 가서 먹어요, 네?”
아내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안쪽 방에서 아이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아~, 어디 있어? 나 배고파.”
“조금만 참아. 자, 여기 앉고.”
아내는 아이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 준 후 로사리오를 바라보았다.
“여보…….”
“응, 알았어.”
비록 밥이 제대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앞에선 무슨 말도 할 수 없었기에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배를 채웠다.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저녁을 먹은 뒤, 아내가 안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있는 동안 대문 밖으로 나온 로사리오는 하늘에 휘영청 밝게 뜬 달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품속에서 느껴지던 돈주머니의 무게가 지금은 너무나 무거워서 마치 돌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사리오는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서 은전 하나를 꺼내 든 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게 달하고 똑같군.”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로사리오는 결국 돈주머니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가족을 위해서 못할 게 뭐 있겠어. 삶을 살면서 인생을 바꿀 기회가 딱 세 번 온다는데, 이번이 그중 하나일 수도 있잖아?’
설령 그게 정체도 모르는 사람의 수상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로사리오는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제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로사리오는 아침때가 지나자마자 도현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찾아갔다.
빗자루로 객잔 앞을 쓸고 있던 점소이는 로사리오를 보고 알은척을 했다.
“어? 노씨 아저씨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어제 나랑 이야기를 나눴던 공자님은 일어나셨냐?”
“공자님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점소이는 이내 누굴 말하는 건지 눈치채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그 인심 좋은 분 말씀이세요.”
“그래.”
“그분들이라면 벌써 일어나셨죠.”
“지금 어디 계시지?”
“아마 방에 있을걸요.”
“방이 어디야?”
“이 층 오른쪽에 있는 방 세 개를 쓰고 있어요.”
“고맙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황급히 객잔 안으로 들어가는 로사리오의 모습에 점소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청소를 했다.
이 층으로 올라간 로사리오는 점소이가 알려 준 대로 가다가 복도에 검은색 무복을 입은 호위대 대원 두 명이 검을 들고 서 있는 걸 보고는 멈칫했다.
“저, 저기…….”
번뜩거리는 눈빛에 기가 죽은 로사리오가 머뭇거리고 있자, 어제 미리 도현에게 언질을 들었던 대원들은 몸을 돌려 방문을 살짝 두드렸다.
똑똑.
“무슨 일이야?”
문이 열리며 박영식 대장이 얼굴을 내밀자 왼편에 서 있던 대원이 눈짓으로 엉거주춤 선 로사리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보십시오.”
“흐음.”
로사리오를 아래위로 훑어본 박영식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예.”
크게 숨을 들이마신 로사리오는 용기를 내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탁자 앞에 앉아 있던 도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로사리오에게 시선을 줬다.
“결정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왔군.”
그러자 로사리오는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받아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도현은 짐짓 차분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날 따르면 여길 떠나야 되고 명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객잔으로 찾아올 때 어느 정도 각오를 했는지 자칫 힘든 질문일 수도 있었지만 로사리오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어차피 여길 떠나려고 했고 명나라와의 인연은 절 버렸을 때 이미 끊어졌습니다.”
미련이 전혀 없다는 듯이 단호한 로사리오의 태도에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앞으로 걸어가서 로사리오에게 한쪽 손을 내밀며 말했다.
“Vamos a hacer un mejor.”
“……!”
에스파냐어로 정확하게 도현이 잘해 보자고 말하자 로사리오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얼떨결에 악수를 했다.
“어, 어떻게 저희 나라 말을 하실 줄 아십니까?”
“후후후. 앞으로 더 놀랄 일이 많을 거야.”
묻는 것에 대답을 제대로 해 주지 않고 도현은 로사리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목적을 달성했고 감시의 눈길 때문에 관저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었기에 도현은 다음 날 바로 북경으로 돌아갔다.
로사리오 일가는 며칠 뒤 주변 정리를 끝내고 이웃들에게는 아오먼(마카오)로 간다고 속이고는 봉황상단 배를 타고 웅도로 떠났다.
거기서 이미 마련된 병기창에 소속되어 화포의 개량과 생산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생긴 능력인지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여러 가지 언어를 읽고 들을 수 있었던 도현은 심양에 있는 식솔들이 북경으로 오는 걸 기다리며 김 지부장이 구해 온 서양 기술 서적을 꼼꼼하게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
오랜 볼모 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영구 귀국을 하게 된 소현세자 부부는 벅차오른 가슴을 안고 압록강을 건넜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건 아버지인 인조의 차가운 냉대였는데 환영 행사는 고사하고 신하들이 돌아온 세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까지 철저히 막았다.
거기다가 대궐에 들어오자마자 귀국 인사조차 받지 않고 바로 오랜 친우인 명나라를 버리고 청국에 협조했다는 죄를 물어 동궁전에서 근신하라는 벌을 내렸다.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동궁전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손발이 묶여 갇히게 됐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미 숙원 조씨와 김자점 일파가 충동질해 인조가 노골적으로 견제를 하는 상황이었기에 신하들도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히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소현세자 부부는 숙원 조씨에게 포섭된 궁인들한테 온통 둘러싸여 마치 넓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섬처럼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다.
심양을 떠나올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인조가 이렇게까지 철저히 냉대를 할 줄은 몰랐던 소현세자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진심을 몰라주는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부빈객 박노를 비롯해 함께 귀국한 시강원 관리들이 가혹한 처사라며 상소를 올렸지만, 인조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고 오히려 심양에 있으면서 세자를 올바르게 이끌지 못했다며 좌천시키거나 벼슬을 거둬 갔다.
“후우.”
책을 읽으려고 펴 놨지만 도통 글자에 눈이 안 가는지 소현세자가 우울한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자 한쪽에 서 있던 내관 최형외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하.”
“꿈에서도 그리던 한양 땅에 돌아왔는데 어찌 심양에 있을 때보다 더 마음이 울적하고 외로운지 모르겠구나.”
“이런 때일수록 더 마음을 굳건하게 잡수셔야 됩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바마마께서 간신배와 여인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제대로 진실을 못 보고 계시니 너무 답답해.”
“지금은 오해를 하시고 계시지만 언젠가는 저하의 마음을 알아주실 겁니다.”
최 내관이 애써 좋게 이야기했지만 소현세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 때가 정말 오기는 할까.”
“저하…….”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는 최 내관은 마치 자신이 냉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때 문밖에서 젊은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생이옵니다, 저하.”
“흠흠. 들어오게.”
남생이라고 이름을 밝힌 내관이 개다리소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소현세자와 최 내관은 그가 개다리소반을 내려놓는 동안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궁내의 인물들 중 숙원 조씨의 입김이 미치지 않은 자가 거의 없으니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출출하실까 봐 시원한 수정과와 약과를 준비했습니다.”
“음.”
하지만 소현세자는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앞에 놓인 그릇엔 손 하나 대지 않았다.
“…….”
혹시 이상한 약이라도 섞었을까 싶어 남생이 방을 나간 후에 몰래 최 내관을 통해 버리려던 소현세자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질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고 있느냐?”
소현세자의 당연한 물음에 남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착한 얼굴로 답했다.
“다 드시고 나면 그릇을 치워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
본래 상을 들이고 나면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다.
내관이 옆에서 먹는 걸 지켜보는 건 법도도 아닌 데다, 굳이 그러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숙원 조씨의 힘이 강하다 해도 아랫것이 이리 무례하게 굴 정도로 얕보였나 싶어 소현세자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남생을 노려보는데 그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굳이 먹여야 하겠다면 못 먹을 것도 없지.’
오기가 발동한 소현세자가 약과를 하나 손에 드는데 그 밑에 작게 접힌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종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을 리는 없을 테고, 이게 뭔가 싶어 소현세자가 남생을 바라보니 그가 눈을 깜박이면서 슬쩍 머리를 숙였다.
의혹에 찬 눈길을 보내면서도 궁금증을 참지 못한 소현세자는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펼쳐 내용을 읽었다.
그냥 안부를 묻는 평범한 글이었지만 소현세자는 종이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이건……!”
놀란 이유는 바로 쪽지를 보낸 이가 봉림대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이걸 어떻게?”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소현세자의 언성이 높아지려고 하자 김남생은 황급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낮게 말했다.
“지난번에 잠시 귀국하셨을 때 봉림대군 마마께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사옵니다.”
“그럼!”
“종종 이렇게 서신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김남생이 도현의 사람인 걸 알게 된 소현세자는 답답하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최 내관도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궐 안에 같은 편이 있다는 것에 크게 힘이 됐다.
잠시 뒤 김남생은 깨끗이 비워진 개다리소반을 가지고 나갔고 도현의 편지를 따뜻한 눈빛으로 몇 차례나 되풀이해서 읽은 소현세자는 불에 태워 증거를 없앴다.
이후로 소현세자는 김남생을 통해 바깥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숙원 조씨는 근신을 받게 만들어 소현세자를 좁은 동궁전 전에 가둬 놓은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보다 확실하고 근본적으로 걸림돌을 치워 버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수상한 조짐은 없지?”
비단 보료 위에 앉은 숙원 조씨의 물음에 측근인 김 상궁은 머리를 조아리며 얼른 대답했다.
“예. 동궁전에 있는 궁인들이 모두 마마님을 따르는 이들로 채워져 있는데 어찌 감히 딴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숙원 조씨는 아랫것들이 방심하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
“영악한 소현세자가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더 철저하게 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마마.”
그때 바깥에서 궁녀가 손님이 왔다는 걸 알렸다.
“마마, 이 의원이 왔사옵니다.”
“오, 들라 해라.”
“그럼 전 나가 있겠사옵니다.”
“그래.”
고개를 숙인 김 상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미닫이문이 열리며 관복을 입은 이형익이 안으로 들어와 숙원 조씨 앞에 엎드렸다.
“부르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어떻게, 내의원 생활은 할 만한가?”
“예. 마마님이 보살펴 주신 덕분에 편히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충청도 대흥 출신으로 침술에 일가견이 있던 이형익은 숙원 조씨가 추천을 해 준 덕분에 벼슬을 받고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가 대궐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의술만큼이나 눈치가 빠른 이형익은 대궐에서 숙원 조씨의 눈 밖에 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알았기에 더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대를 부른 건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시킬 일이 있어서네.”
은근한 말투에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이형익은 약간 굳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낱 의원에 불과한 제가 마마님께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만 할 수 있는 일이야.”
“…….”
뭔가 위험한 느낌에 이형익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듣기로 세자가 학질(말라리아)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하던데?”
“네. 그래서 내의원에서 학질에 효능이 좋은 소시호탕을 아침저녁으로 달여 올리고 침도 놔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괜찮아질 것 같나?”
소현세자와 숙원 조씨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형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어렵지 않게 완쾌되실 겁니다.”
학질(말라리아)은 모기에 의해서 전염이 되는데 오한과 열이 나고 땀을 많이 흘려 갈증을 심하게 느끼고 주기적으로 발작까지 일어났다.
이러다가 심하면 사망에까지 이르는 아주 무서운 병이었다.
하지만 치사율이 높은 열대지방 말라리아와 달리 온대지방에 속하는 조선에서는 면역력이 약한 어린아이나 노인이 아니면 대개 치료가 됐다.
“그렇단 말이지.”
팔을 대고 있던 베개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던 숙원 조씨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형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세자의 병은 자네가 맡아서 치료하게.”
“예?”
이미 치료를 하고 있는 의원이 있는 갑자기 자신과 교체를 하라니 이형익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가 말씀입니까?”
“그래. 세자가 병에 걸렸는데 의술이 뛰어난 자네가 맡아 빨리 완쾌할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나?”
“그, 그렇지요.”
“그리고 이게 학질에 좋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구해 온 거니까 세자가 먹는 탕약에 넣도록 하게.”
말을 하며 숙원 조씨는 주먹만 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바닥에 살짝 던져 줬다.
조심스럽게 끈을 풀고 비단 주머니 안에 든 내용물을 살펴본 이형익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이건!”
그걸 보며 숙원 조씨는 차갑게 말했다.
“의원이니까 어떻게 써야 되는지 나보다 잘 알 거야.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 아무 염려하지 말도록 해.”
비단 주머니에 든 것은 바로 비상砒霜이라 불리는 독극물이었다.
비석砒石에서 채취하는 이 독극물은 치료용으로도 쓰이지만 자주 복용하면 소화기 장애, 피부염 등이 일어날 수 있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으면 언어장애와 혼수상태 그리고 복통을 일으키고 끝내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물질이었다.
이런 걸 줬다는 건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손을 덜덜 떨며 이형익이 안절부절못하자 숙원 조씨는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
“왜 대답이 없어?”
“너무 엄청난 일이라…….”
“그래서 지금 못하겠다는 겐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형익은 여기서 삐끗 말을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죽은 목숨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아닙니다.”
“그저 탕약에 몰래 넣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 어려울 것이 없잖아.”
“하지만 세자 저하께 올리는 음식과 탕약은 모두 독이 없는지 검사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올가미에서 벗어나 보려고 이형익이 애를 썼지만 숙원 조씨는 걱정 말라는 듯이 한쪽 손을 내저었다.
“동궁전에 있는 궁인들 대부분이 내 사람이니 그건 염려 말게.”
이쯤 되면 더 이상 핑계 댈 거리가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거듭한 이형익은 한 십 년은 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뒤를 봐주신다는 말씀, 믿겠습니다.”
“일이 벌어지더라도 지금처럼 대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아무 염려 말게.”
“알겠습니다.”
나중에 토사구팽을 당하는 건 아닌지 불안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이형익은 비단 주머니를 다시 끈으로 묶고는 소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숙원 조씨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날 오후 숙원 조씨가 말한 대로 인조의 지시에 따라 소현세자를 치료하던 의원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형익으로 교체됐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신하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있었지만 이형익은 총애를 받아 인조의 몸을 살피는 자였기에 크게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다들 그러려니 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도현에게 지시를 받고 이형익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봉황상단 한양 지부장 서상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다.
“담당 의원이 교체됐다고 했나?”
서 지부장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관복 대신 폭이 좁은 갓에 두루마리를 걸친 평상복 차림의 김남생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주상께서 직접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군요.”
“이것 참, 일이 공교롭게 됐군.”
서 지부장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턱을 쓰다듬었다.
도현이 남다른 혜안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제 와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얘기한 대로 일이 척척 진행되는 걸 보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진작부터 이형익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내막을 아직 모르는 김남생이 그리 묻자 서 지부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야기하자면 기니 내 나중에 일러 줌세. 어쨌든 앞으로 자네가 더 신경을 써 줘야겠어.”
“이형익이란 자가 그리 위험한 사람입니까?”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뭐,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고만 말해 두지.”
서 지부장은 물고 있던 담뱃대를 흔들어 재를 탁 털어 냈다.
“그자가 동궁전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해야만 하네. 특히 탕약 같은 걸 달일 때는 자네가 꼭 붙어 있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세자 저하께도 조심하라고 말씀드려 주게. 너무 과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궁중에선 믿을 사람이 몇 없으니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해. 지금 병간호는 누가 하고 있나?”
“최 내관이 하루 종일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흠. 그분도 연세가 있으실 텐데 충심이 대단하시군.”
“덕분에 저도 안심하고 이렇게 밖에 나올 수 있었지요. 내관으로서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틈만 나면 물어뜯으려는 이리 떼로 가득한 궁중 안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소현세자에게 적어도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이 한 사람은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그렇지. 이거 받게나.”
서 지부장은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옆에 있는 궤짝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탁자 위에 올려놓자 절그럭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김남생이 물었다.
“차후 이것저것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테니 미리 챙겨 주는 걸세.”
그리 말하며 서 지부장이 보라는 듯 주머니를 들어 손으로 탁탁 쳤다.
정확한 액수는 몰라도 제법 두둑하니 꽤 큰돈이란 것을 깨닫자 김남생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마뜩지 않은 듯 말했다.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 없습니다만…….”
“됐으니 그냥 받아 두게. 딱히 자네한테 주는 뇌물 같은 건 아니니까. 단순히 필요 경비일 뿐이야.”
사실은 김남생에게 주는 일종의 수고비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리 말하면 조금 꺼려 하는 걸 알았기에 일부러 가볍게 돌려 말했다.
“알겠습니다. 남으면 거스름돈은 안 드려도 되겠죠?”
막상 돈을 주면 넙죽 받아 챙기는 주제에 또 노골적으로 쥐여 주는 건 싫다 하니 참 번거로운 성격이라 생각하면서 서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무 오래 궁을 비울 수 없다 하며 김남생이 방을 나간 뒤, 반쯤 식은 차를 마시며 뭔가를 생각하던 서 지부장은 손뼉을 짝짝 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를 불러들여 무언가 귓속말을 속닥거렸다.
여름의 불볕더위가 조금씩 물러가고 밤에 부는 바람이 서늘하다 느껴질 무렵의 동궁전은 매우 아름답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와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의 색이 어우러져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절로 시조 한 곡 정도는 읊을 정도로 멋진 경치였건만, 막상 동궁전에 가까이 가 보면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고 불안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끄응.”
아직 낮에는 꽤 더운데도 불구하고 몇 겹이나 되는 이불을 겹쳐 덮고, 이마에는 물을 적신 수건을 올린 소현세자가 신음성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저하.”
낮이건 밤이건 잠도 자지 않고 곁을 지키는 바람에 깜박 잠이 든 최 내관이 그 소리를 듣고 반응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신지요?”
“후우. 방이 왜 이리 추운가? 불은 제대로 때고 있느냐?”
그 말에 최 내관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현세자가 학질에 걸려 앓아누운 뒤부터 계속 춥다고 하는 바람에 불을 너무 때워 방바닥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운 판인데 그걸 느끼지도 못하다니.
그만큼 몸 상태가 안 좋다는 뜻이라 최 내관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네, 저하. 행여나 불씨가 꺼질세라 내관과 궁녀 몇이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어찌해서 이리 몸이 떨리는가? 혹시 창문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가 직접 창을 닫고 오지요.”
말하지 않아도 창문은 며칠째 닫혀서 열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열려 있는 창문을 닫는 척 시늉을 한 최 내관이 돌아와 보니 소현세자는 이미 눈을 감고 다시 선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깊게 잠들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선잠을 자다가 깨곤 하니 몰라보게 얼굴이 수척해졌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도 열이 심하게 나서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무의식적으로 춥다고 중얼거리니, 그 모습이 차마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최 내관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소현세자의 이마에 올린 수건을 꾹 짜고 다시 새 수건을 찬물에 적셨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문밖에서 상궁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최 상다(내시부에 속한 당하관 정삼품 벼슬의 명칭) 어른.”
“무슨 일인가?”
“내의원에서 의원이 탕약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시간을 가늠해 본 최 내관은 탕약을 올릴 때가 됐기에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들여보내게.”
“예.”
미닫이문이 열리고 의원 복장을 한 이형익이 나무 쟁반에 탕약이 든 사발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걸 힐끔 쳐다본 최 내관은 양손으로 누워 있는 소현세자의 팔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저하.”
“으음. 왜 그래?”
“탕약 드실 시간이옵니다.”
“벌써 그렇게 됐어.”
“네.”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소현세자는 처음 보는 의원이 앞에 서 있자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자넨 누군가?”
그러자 이형익은 허리를 살짝 숙이면서 대답했다.
“새로 저하의 병환을 돌보게 된 내의원 의원 이형익이라고 하옵니다.”
“이형익?”
“예.”
귀국하기 전에 도현한테 이형익이라는 의원을 조심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소현세자는 아픈 와중에도 눈을 내리깔며 상대를 봤다.
그러다가 이형익이 들고 있는 탕약에 시선을 주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뭔가?”
“소시호탕小柴胡湯이라고 하온데 발열과 오한에 좋은 탕약이옵니다.”
“그래.”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 소현세자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내려놓고 가게.”
“상세를 파악해야 되니 탕약을 다 드시는 걸 보고 괜찮으시면 맥을 한번 잡아 보겠사옵니다.”
“됐네. 피곤하니까 다음에 하게.”
“하지만…….”
말을 듣지 않고 이형익이 머뭇거리자 더 의심이 된 소현세자는 온화한 평소 성격과 달리 버럭 화를 냈다.
“싫다니까! 내 말이 우습게 들려!”
와장창!
언성을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현세자가 팔로 쟁반을 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탕약이 든 사발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약을 먹기 싫어하는 건 이해가 가도 이렇게까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줄 몰랐기에 이형익은 물론이고 최 내관까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윽.”
안 그래도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갑자기 흥분한 탓인지 순간 소현세자가 몸을 휘청거리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최 내관이 그를 황급히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저하?”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니 걱정 말게.”
하지만 소현세자의 안색은 창백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최 내관은 바닥에 흩어진 사발 파편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를 이부자리에 억지로 눕히고 아직도 멍하니 서 있는 이형익을 향해 돌아섰다.
“미안하지만 세자 저하께서 많이 예민해지신 듯하니 지금은 잠시 나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예.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이형익 역시 지금 이 상태에선 아무것도 못 하겠다 싶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갈 때까지 고집스럽게 등을 돌리고 있던 소현세자는 문이 탁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저하, 아무리 그래도 이번엔 너무 심하셨습니다.”
쪼그려 앉은 최 내관이 날카롭게 갈라진 사발 파편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자 소현세자가 홱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대체 뭐가 말인가? 저자가 바로 호淏(봉림대군의 이름)가 조심하라 일렀던 그놈 아니더냐!”
“저하.”
“뻔히 내 목숨을 노리러 온 줄 아는데 그 이상 뭘 어찌하란 말인가? 탕약 안에 약재를 갈아 넣었는지 독약을 넣었는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그러면서 소현세자는 아직도 분이 덜 풀린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내 비록 지금은 힘이 없어서 이러고 있다 하지만 정체도 모를 것을 주면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네. 알아먹었으면 앞으로 저놈의 얼굴을 내 앞에 보이게 하지 말게!”
“하지만 그는 정식으로 명을 받고 배치되어 온 사람입니다. 함부로 그를 내쳤다간 또 무슨 소문이 돌지 모릅니다.”
원래 총명한 소현세자이기에 아무리 병 때문에 몸이 안 좋다고 해도 그 정도쯤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못 참겠다는 듯, 그는 이불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소현세자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을 아플 정도로 잘 아는 최 내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말했다.
“일단 오늘 드실 탕약은 먼젓번에 있던 의원에게 부탁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게.”
소현세자가 지친 표정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눕자, 최 내관은 남은 파편들을 마저 다 주운 후 조용히 문을 닫고 사람을 시켜 의원을 불러들였다.
재료를 넣고 탕약을 달이는 모습까지 신중하게 지켜본 뒤 직접 사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온 최 내관은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소매에 감춘 은침으로 독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했다.
다행히 은침이 변색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을 확인한 최 내관은 자리에 누운 채 뒤척거리고 있는 소현세자에게 새로운 탕약이라며 사발을 앞에 내려놓았다.
“꼼꼼하게 확인했나?”
“안심하십시오.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았고, 독을 구별하기 위한 은침도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놈은?”
“저하께 단단히 혼이 났으니 일단 돌아간 것 같습니다.”
“흥. 그렇다면 됐어.”
꼬치꼬치 캐물어 본 뒤에야 안심한 듯 눈초리를 누그러뜨린 소현세자는 탕약을 받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약이란 건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쓰기만 하고 말이야.”
“단 약과라도 하나 올릴까요?”
“아니, 필요 없어. 오늘은 꽤 피곤하군. 잠시 눈을 붙여야겠어.”
“예, 쉬십시오.”
빈 사발과 상을 들고 뒤로 물러선 최 내관은 이불을 덮고 누운 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소현세자를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 뒤, 그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등불을 끄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한편 큰 곤욕을 치르고 쫓겨나듯 밖으로 나온 이형익은 앞으로 일이 순탄치 않을 것 같은 느낌에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그때 숙원 조씨의 심복인 김 상궁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됐죠?”
잠시 망설이던 이형익은 동궁전에도 숙원 조씨의 눈과 귀가 깔려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현세자와 있었던 일이 알려질 것이기에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게…… 어찌 된 건지 저하의 경계가 너무 심해 탕약조차 올리지 못했소이다.”
그러자 김 상궁은 입술을 삐죽이며 차갑게 말했다.
“마마님께서 들으시면 아주 실망하시겠군요.”
“어떻게든 방도를 마련할 테니 조금만 참아 달라고 김 상궁이 옆에서 말을 잘 좀 해 주시오.”
“글쎄요.”
상대가 눈을 흘기며 말끝을 살짝 흐리자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걸 눈치챈 이형익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내의원 약제실에 인삼 이십 년 근 스무 뿌리가 들어왔는데 요즘 김 상궁의 몸이 허한 것 같으니, 내 두 뿌리를 갖다드리겠소.”
이십 년 근 인삼 두 뿌리라면 족히 수백 냥의 가치가 있었다.
그걸 아는 김 상궁은 약간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흠흠. 알았어요. 하지만 마마님께서는 참을성이 없으시니 하루라도 빨리 서두르는 것이 이 의원을 위해서라도 좋을 거예요.”
“고맙소이다.”
“그럼.”
마치 자신이 숙원 조씨라도 되는 것처럼 목에 뻣뻣하게 힘을 준 김 상궁이 몸을 돌려 사라지자 이형익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제길!”
욕이 절로 나오고 아니꼬웠지만 자신이 숙원 조씨의 줄을 잡고 있는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는 소현세자 때문에 이형익은 비상이 든 탕약을 먹이는 건 고사하고 동궁전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소현세자의 병세가 차츰 나아져 가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숙원 조씨는 직접 인조에게 세자가 호의를 무시하고 그가 보낸 의원을 문전박대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안 그래도 세자에게 너무 가혹한 벌을 내렸다며 선처를 요구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고 있어 심기가 불편했던 인조는 크게 화를 내며 당장 소현을 불러들였다.
병세가 나아졌다고 해도 바깥출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국왕이자 아버지인 인조가 부른다는 말에 소현세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내전으로 갔다.
“전하, 세자 저하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예.”
상선의 대답과 함께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자 병색이 완연한 소현세자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인조 앞에 섰다.
“아바마마, 그동안 잘 지내셨사옵니까.”
심양에서 돌아오고 거의 두 달 만에 부자가 만나는 거였지만 인조는 아픈 아들을 걱정하기는커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소현세자를 보며 노기 띤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듣자하니 내가 보내 준 의원을 내치고 다른 이를 데려와 치료를 받고 있다던데 사실이냐!”
“……예.”
대답과 동시에 인조는 서탁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저, 전하.”
다행히 소현세자가 맞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뒤편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한쪽에 시립해 있던 상선은 화들짝 놀라 인조를 바라봤다.
“왜, 내가 약에 독이라도 타라고 지시라도 했을까 봐 그런 거냐!”
“아닙니다.”
“그럼 이유가 뭐야?”
찻잔에 맞을 뻔했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고 의연하게 앉은 소현세자는 고개를 들어 인조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대답했다.
“원래 있던 의원이 지어 주는 약이 저한테 더 잘 맞아서 그런 겁니다.”
“흥! 핑계는 좋군.”
인조가 느끼기에, 소현세자는 숙일 줄 모르고 매번 말대꾸를 하며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는 것이 정말 마음에 안 들고, 어쩐지 잘난 아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열등감과 반발심에 소현세자를 더 구박했다.
콧방귀를 낀 인조는 핏발이 선 눈으로 소현세자를 노려봤다.
“지금부터는 무조건 내가 보내 준 의원에게 치료를 받도록 해라. 이건 어명이야!”
“아바마마.”
“만약 또다시 내 말을 무시한다면 그때는 국왕을 능멸한 죄로 엄히 다스릴 테니까 알아서 하라!”
왕을 능멸한 죄는 죽음이었다.
너무한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소현세자한테서 고개를 돌린 인조는 한쪽 손을 내저으며 차갑게 말했다.
“난 더 할 말이 없으니까. 그만 나가 봐라.”
그러자 인조의 앞이었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한 소현세자는 서러움을 폭발시켰다.
“소자가 그렇게 미우십니까!”
“뭐야!”
“아무리 그러셔도 피로 이어진 부자지간인데 간신배의 말에 현혹되시어 절 이렇게 박정하게 대하시다니, 너무하십니다.”
“이놈이!”
인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발대발하며 소현세자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소리쳤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큰 사달이 날 것 같은 생각에 상선이 황급히 다가와 흥분한 인조를 말렸다.
“학질 때문에 세자 저하께서 정상이 아니시니 이해를 하십시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서 저놈을 끌고 나가!”
“알겠습니다. 최 내관.”
방 안에서 들리는 고성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최 내관은 상선이 부르자마자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세자 전하를 동궁전으로 모셔 가게.”
“네.”
다급한 상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최 내관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 원망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소현세자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저하고 가시지요.”
“소자의 마음을 몰라주시니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이런 고얀 놈이 있나!”
“뭐 하나!”
상선의 재촉에 최 내관은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소현세자를 억지로 데리고 방을 나갔다.
소현세자가 갔지만 분을 쉽게 못 가라앉히겠는지 비단 보료 위에 앉은 인조는 씩씩 숨을 거칠게 내쉬며 연신 주먹으로 옆에 있는 팔걸이를 내려쳤다.
“감히…….”
나인들을 시켜 깨진 찻잔 조각을 깨끗하게 치운 상선은 그런 인조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몸이 안 좋으신 데다 감정이 격해지셔서 말이 잘못 나온 것일 테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전하.”
“세자를 두둔하려고 들지 마. 이걸로 그동안 평소 세자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게 됐어.”
“전하…….”
엉킨 실타래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감정의 골이 깊어져만 가는 부자의 모습에 상선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한편 소문이 빠른 대궐답게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에 있었던 일은 순식간에 안팎으로 쫙 퍼졌다.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조선이기에, 평소라면 아무리 억울해도 아버지에게 대든 소현세자가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숙원 조씨의 치마폭에 싸여 인조가 심할 정도로 아들을 냉대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에, 여론은 오죽했으면 그런 말까지 했겠냐는 식으로 동궁전에 유리하게 형성됐다.
그러자 더 화가 난 인조는 소현세자의 근신 기간을 반년으로 늘리고 이형익 외에는 어떤 의원도 동궁전에 출입할 수 없도록 했다.
오한에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앉아 있던 소현세자는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한탄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정말 너무하시는구나.”
“이번에는 저하께서 실수하셨습니다. 억울하고 서러우신 건 알지만 그 자리에서 울분을 털어놓기보다는 참으셨어야지요.”
최 내관의 충언에 소현세자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나도 후회하지만 그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네.”
“옆에서 지켜보는 저도 답답한데 당사자인 저하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훗날을 위해서는 참으셔야 됩니다. 옛말에 참을 인忍이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알겠네.”
“그건 그렇고 앞으로 다른 의원이 동궁전에 들어올 수 없게 돼서 큰일입니다. 당장은 오늘 저녁부터 올릴 탕약조차 없으니…….”
최 내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소현세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아바마마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그러자 최 내관은 깜짝 놀란 얼굴로 황급히 반대를 했다.
“이형익이 누군지 몰랐다면 모를까 숙원 조씨의 하수인이나 마찬가지인 자에게 저하의 몸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차라리 제가 탕약을 구해서 올리겠습니다.”
최 내관의 말에 소현세자는 정색을 했다.
“그러다가 잘못되면 어명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상관없습니다. 저하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허울뿐인 세자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을 위해 목숨도 기꺼이 내놓으려는 최 내관의 모습에 소현세자는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안 될 일이야. 최 내관마저 내 옆에 없다면 난 누굴 믿고 이 험난한 시간을 이겨 내라는 건가?”
“저하.”
“그냥 이형익 그자에게 치료를 받겠네.”
“하지만…….”
“허튼짓을 못하도록 자네가 옆에서 지켜보면 되지 않겠나.”
인조를 만난 이후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약간 허허로운 소현세자의 태도에 최 내관은 안타깝고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제가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할 테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그래. 자네만 믿겠네.”
최 내관이 결연한 얼굴로 말하자 소현세자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날 오후부터 이형익은 동궁전에 들어가 소현세자를 치료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동궁전에 발을 들이는 그 순간부터 최 내관이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좀처럼 빈틈을 발견하지 못하는 가운데, 시간만 계속 흐르자 급기야 숙원 조씨의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다.
“대체 뭘 하는 거야!”
와장창!
숙원 조씨가 던진 찻잔이 반대편 벽에 맞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오른쪽으로 한 발만 더 움직였어도 저걸 정통으로 맞았을 이형익은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움츠린 채 납작 엎드려 호소했다.
“소, 송구합니다, 마마.”
“변명은 필요 없어! 내가 그렇게 고생해서 멍석까지 다 깔아 줬는데도 왜 아직까지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겐가!”
“하오나 마마, 최 내관의 감시가 너무 심해서…….”
“그깟 놈이 뭐라고 벌벌 떨어! 설마 나보다 일개 내관이 더 무섭다는 게야?”
뽀얗게 백분 가루를 뿌린 숙원 조씨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매서워지자, 이형익은 벌벌 떨면서 마치 구원이라도 청하듯 옆을 힐끔 쳐다봤다.
웬만하면 아까 찻잔이 깨졌을 때 누구라도 놀라서 무슨 일인지 들여다보기라도 하련만, 숙원 조씨가 어지간히도 무서운 건지 아니면 이런 일이 하도 비일비재해서 무덤덤해진 건지 장지문 바깥은 조용하니 사람이 서 있는 기척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하늘 끝까지 치솟은 숙원 조씨의 분노를 혼자 감당하게 된 이형익은 바닥에 연신 이마를 찧으면서 애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마! 반드시 며칠 안에 해결책을 생각해 낼 테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숙원 조씨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서탁에 손바닥을 탕 내리치고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틀이네. 딱 이틀간만 기다려 줄 테니 그 안에 처리하도록 해!”
그러고 나서 그녀는 돌연 눈을 빛내며 이형익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만약 기일을 넘기면 그때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네.”
“……!”
의미심장한 숙원 조씨의 말에 이형익은 다만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도망치듯이 거처를 뛰쳐나온 그는 그길로 곧장 내의원에 있는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하나 찰거머리 같은 최 내관이 탕약을 조제할 때는 물론이고, 내의원에서 들여오는 재료도 그 출처를 꼼꼼히 따지는 한편 다른 사람이 안 볼 때 몰래 은침으로 독성 검사를 하기까지 하니 도저히 소현세자에게 극약을 먹일 방도가 없었다.
밥도 먹지 않고 고민하다가 잠시 바람이나 쐬어 머리를 맑게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비척비척 기어 나오는데 내의원에서 마침 약재 정리를 하고 있던 동료가 그를 보고 깜짝 놀라 말을 걸었다.
“아니, 자네 얼굴이 왜 그 모양인가?”
“어? 아아…… 최근 입맛이 없어 통 먹지를 않았더니.”
“동궁전 일이 힘든 모양이로군. 하긴 요즘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으니 나라도 숨이 턱턱 막힐 걸세.”
동료는 혀를 쯧쯧 차면서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어야지, 하고 괜한 오지랖을 떨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 두게나…… 이크.”
힘이 없어서 비틀거리던 이형익이 발을 살짝 헛디디면서 책상 위에 어질러져 있던 약재들 위로 손을 짚자 동료가 허둥거리며 다가왔다.
“자네, 진짜 괜찮은가?”
“끄응.”
“얼른 손이나 털게.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나! 설마 손바닥에 상처 같은 건 없겠지?”
예사롭지 않게 당황하는 동료의 모습을 보고 이형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해야 가루일 뿐인데 왜 그리 놀라나?”
“일반 약재가 아니라 독극물이니까 그렇지.”
“뭐? 아니, 그런 걸 위험하게 왜 사방에 늘어놓고 그래!”
이형익이 정색을 하면서 손을 탈탈 털자 동료는 그 모습이 우스운 듯 껄껄 웃었다.
“위험하니까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시간에 한가한 틈을 타 정리를 하는 거지.”
그러면서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음흉한 미소를 띠며 말을 걸었다.
“요놈들이 이래 봬도 대단한 물건일세. 사람 몸속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급성중독을 일으켜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아주 소량만 쓰면 오히려 약이 되기도 한다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내의원에서도 보관하고 있는 거 아닌가.”
“뭐 어쨌든 독극물을 다룰 땐 항상 주의해야 해. 얼마 전에도 저잣거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 사건에 요게 사용됐다는 거 아닌가.”
동료는 흰색에 곱게 빻아진 가루를 가리키면서 몸서리를 쳤다.
“며느리가 유산을 노리고 시어머니를 독살했는데, 그 수법이 하도 악랄해서 관원들마저 치를 떨었다지.”
“이건 비상 아닌가. 된장국에 타서 먹이기라도 했나?”
“아니. 시어머니랑 며느리가 함께 삯바느질을 하고 살았는데, 이 시어머니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밥도 다 제 손으로 해 먹어서 좀처럼 비상을 먹일 수가 없었다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게 바늘 끝에 독약을 발라 놓는 거였지. 왜, 바느질을 할 때 보면 아무리 일에 익숙해도 무의식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자주 찌르게 되지 않나.”
“……그런 방법이!”
독약을 음식물에 타거나 섞어서 먹이는 방법밖에 생각해 내지 못했는데, 그런 식으로 직접 몸에 찔러 넣는 수도 있었나 싶어 이형익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럼 완전범죄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들통이 난 겐가?”
“멍청한 남편이 술에 취해서 자랑거리 삼아 떠들어 댔다지 뭔가. 하하! 그러니까 사람은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게야.”
동료는 그저 재밌는 화젯거리라는 듯 말했지만 이형익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뭐야, 이런 얘기에 관심 있나?”
“아니, 난 이만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자네도 너무 오래 있진 말게나.”
“어차피 대충 다 정리가 끝났으니 나도 좀 이따 돌아갈 걸세.”
이형익은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에서 번뜩 스쳐 지나간 생각을 조심스레 곱씹었다.
“오늘 당직은 누구야?”
“아, 내가 하지. 어차피 집에 돌아가 봐야 애가 칭얼거려서 제대로 잠도 못 자니까.”
“그러고 보니 자네 집에 애가 벌써 셋이었지. 막내가 이제 돌을 갓 지났던가?”
“음. 어린애들만 있으니 장모님이 와서 많이 도와주고 그런다네. 그러니까 아내도 괜찮을 거야. 나도 하루 정도는 편안하게 발 쭉 뻗고 자고 싶고.”
“하하! 그 마음 이해하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부지런히 약재를 정리해 서랍장에 집어넣은 동료는 힘내라며 등을 툭툭 두드려 주고선 내의원을 나갔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지라 이미 반 이상은 집에 돌아간 뒤였고, 혹시 밤중에 의원이 필요할 가능성 때문에 돌아가면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 몇 명이 남아 있긴 했지만, 다들 방에서 한숨 자거나 느긋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굳이 나와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형익은 조심스레 문을 닫고서 지난날 숙원 조씨에게서 받은 비상을 품에서 꺼내 물과 함께 섞어 약간 희석시켰다.
“이거라면 틀림없어.”
비상은 사람 몸속에 조금씩 축적되어 중독 초기에는 그냥 움직이는 것이 무겁고 귀찮아지며, 입맛이 떨어질 뿐이지만 나중에 가서는 확실하게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독약이었다.
민간에서는 쥐약 같은 데에도 많이 쓰이기 때문에 내의원에서 흘러나왔다고 출처를 정확히 짚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게 아니기에 누가 먹였는지 범인을 특정하기 힘든 것도 장점.
그러하기에 숙원 조씨도 이형익에게 비상을 건네준 것이지만 여태까지는 최 내관 때문에 한 번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며 이형익은 비상을 희석시킨 액체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 침구 끝에 살짝 묻혔다.
탕약에는 손을 쓸 수 없지만, 직접 몸속에 찔러 넣는 침에 독을 묻혀 중독시키는 발상은 최 내관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할 터.
이형익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동료들에게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억지로 평정을 가장하며 잠을 청했지만, 결국 다음 날 아침이 올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야 말았다.
다시 날이 밝자 조심스레 비상을 묻힌 침을 챙긴 이형익은 비단 보자기에 약재와 치료 도구를 싸서 동궁전으로 갔다.
입구를 넘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최 내관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오늘은 좀 늦었소이다.”
“이것저것 새로 챙길 약재가 있어서 지체가 됐습니다.”
“새 약재라…… 그게 뭔지 볼 수 있겠소?”
최 내관의 말에 이형익은 순순히 한쪽 손에 들고 있던 보자기를 풀어 가져온 약재를 보여 줬다.
“아무래도 원기가 부족하신 것 같아 인삼과 황기를 챙겨 왔습니다.”
의술을 잘 모르는 최 내관이었지만 두 약재가 몸에 좋다는 건 알았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예.”
소현세자를 간호하기 위해서 배치된 의녀에게 약재를 건네주고 탕약을 달이도록 한 이형익은 최 내관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병세가 많이 호전돼 지난번처럼 솜이불을 두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소현세자는 최 내관을 따라 들어오는 이형익을 보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벌써 침 맞을 시간이야?”
“네.”
“반갑지도 않은데 이런 일은 빨리도 찾아오는군.”
퉁명스러운 말에 이형익이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지만 최 내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소현세자 옆으로 가 상의를 벗는 걸 도왔다.
“이쪽으로 누우십시오.”
“알겠네.”
윗도리를 벗은 소현세자가 비단 보료 위에 엎드리자 이형익은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는 옆에 앉아 침통에서 침을 꺼내 들었다.
“그럼 시침을 시작하겠습니다.”
“빨리 끝내도록 해.”
“예.”
짧게 대답한 이형익은 등에 위치한 혈자리를 따라 새끼손가락보다 긴 침을 하나씩 꽂아 갔다.
혹시 몰라 처음에는 정상적인 걸 사용하던 이형익은 세 번째부터 비상을 묻힌 침을 꺼내 들었다.
다른 것과 달리 비상 때문에 침 끝이 약간 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힐끔 옆을 살핀 이형익은 다행히 최 내관이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아 보이자 재빨리 침을 혈자리에 찔러 넣었다.
“으음.”
서두르다 보니까 약간 통증이 생겼고 이맛살을 찌푸린 소현세자는 고개를 돌리며 짜증을 냈다.
“제대로 못 해.”
“죄송합니다.”
“에잉.”
“조심 좀 하시오.”
최 내관도 한 소리를 했지만 긴장을 한 이형익은 대충 머리를 끄덕이고는 얼른 다음 침을 놨다.
그렇게 모두 열두 개의 침을 꽂았는데 그중에 여덟 개가 비상을 묻힌 것이다.
바로 발작을 일으킨다면 범인이 누구인지 들키는 꼴이었기에 약간 희석을 시켰는데, 그래도 상당히 농도가 높아 이대로 몇 번 더 시침을 받는다면 중독 현상을 일으키며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평소보다 신경을 더 집중해서 그런지 이형익은 식은땀까지 살짝 흘렸다.
그러자 최 내관이 의심스러운 듯 그를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땀까지 흘리고 왜 그러시오?”
“아, 요즘 세자 저하의 치료에 신경을 쓰느라 조금 과로를 한 모양입니다.”
“…….”
뭔가 찝찝했지만 딱히 수상한 걸 발견할 수 없었기에 최 내관은 달리 추궁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형익의 행동을 더 신경 써서 지켜봤다.
그렇게 일각이 지나자 이형익은 애써 태연한 얼굴로 등에 꽂아 둔 침을 하나씩 회수했는데, 이때는 이미 끝에 묻혀 놓은 독소가 몸속에 다 흡수되어 변색된 것도 사라지고 없었다.
바로 뜸까지 떠서 혈이 잘 돌게 한 이형익은 어느새 다 달여진 탕약을 소현세자가 마시는 것까지 보고는 동궁전을 나왔다.
돌담을 돌아 동궁전이 안 보이는 곳까지 온 이형익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 냈다.
“후우. 됐어.”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입안에 침이 바싹 마르고 다리에 힘이 없을 정도였다.
이걸로 소현세자한테는 미안하지만 숙원 조씨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다음 날도 이형익은 비상이 묻은 침을 놨고 저녁 무렵 혼자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던 소현세자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됐다.
“헉헉.”
“저하, 왜 그러십니까?”
“수, 숨이 안 쉬어져.”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이불을 움켜쥐고 몸부림치는 소현세자의 모습에 최 내관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의원을 데려와!”
“예, 옛.”
최 내관과 함께 들어온 김남생은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 나갔다.
발작이 일어날 걸 예상하고 동궁전에 머물고 있던 이형익은 소란이 벌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고개를 돌린 최 내관은 하필 처음 도착한 의원이 이형익인 걸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기에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나도 모르겠소.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진다고 하시오.”
이리저리 상태를 살피는 척 한 이형익은 품속에서 작은 환약을 하나 꺼내 소현세자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다급한 상황에서도 본분을 잊지 않은 최 내관이 이형익의 팔을 붙잡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게 뭐요?”
“숨구멍을 넓혀 호흡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약입니다.”
“혹시 모르니 검사부터…….”
최 내관의 말에 이형익은 일부러 정색을 하며 겁을 줬다.
“한시가 급한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저하를 살리고 싶으면 어서 팔을 놓으시오.”
“으음.”
어떻게 해야 될지 망설일 때 누워 있던 소현세자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다.
“커컥. 컥.”
그 모습에 최 내관은 팔에서 힘을 뺐고 가까이 다가가서 앉은 이형익은 환약을 소현세자의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목울대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려 소현세자가 환약을 삼키도록 했다.
“이제 살아나실 수 있는 거요?”
최 내관이 초조한 얼굴로 묻자 이형익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아직 저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데 침이라도 놔 드려야 되는 것 아니오!”
“침은 위험할 수도 있고 급한 대로 약을 드셨으니까 곧 호흡이 좋아질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태평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 당장 기댈 수 있는 의원이 이형익뿐이었기에 최 내관은 앓는 소리를 내며 소현세자를 쳐다봤다.
“끄으응.”
얼마 뒤 이형익이 처방한 환약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힘겹게 이어 가던 호흡은 편안해졌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고열과 구토 그리고 환각 증세까지 보이며 병세가 갈수록 심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형익이 먹인 환약은 치료제가 아니라 비상과 아편을 섞은 걸로 몸속에 들어가 독성을 더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되자 겨우 인조의 허락을 받아 다른 내의원 소속 의원들까지 데려와 소현세자를 치료했지만 이미 손을 쓸 시기를 놓쳐 버렸다.
결국 소현세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새벽을 넘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 돼!”
얼마 전 선교사를 통해 구한 서양 기술 서적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도현이 소리를 지르며 깨자 옆에서 같이 졸고 있던 칠현이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왜, 왜 그러세요?”
잠이 덜 깼는지 약간 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도현은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꿈이었네.”
“악몽이라도 꾸셨나 봐요?”
눈을 비비며 칠현이 하는 말에 도현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 내며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형님이 산발을 한 채 나타나 날 부르시는데 얼마나 애처롭고 가여운지…….”
“세자 저하께서요?”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한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설마요.”
아닐 거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워낙 꿈이 불길해 칠현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냐. 형님이 학질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찝찝했어.”
웅도를 거점으로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하는 봉황상단 통해 한양에서 일어나는 일은 나흘 정도면 도현에게 다 전해졌다.
그 덕분에 소현세자가 병에 걸려 누워 있고 이형익이 치료를 맡았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도현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문 밖에서 박영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박영식은 인사도 대충하고 허둥거리며 입을 열었다.
“큰일 났습니다.”
안 그래도 불길한 꿈을 꿔서 기분이 찝찝하던 도현은 박영식의 말에 순간 심장이 털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큰일이라니?”
“세자 저하께서 급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뭐!”
충격적인 소식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사실이야!”
“예. 방금 봉황상단에서 지급으로 전해진 소식입니다.”
“학질에 걸렸다고 하지만 못 고칠 병도 아닌데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아직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병세가 많이 호전됐었는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시고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시고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도현이 몸을 비틀거리자 옆에 있던 칠현이 깜짝 놀라 그를 부축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으음.”
“일단 좀 앉아서 안정을 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도현도 잘못될까 봐 걱정이 된 칠현이 쉴 것을 권했지만 그는 괜찮다는 듯이 한쪽 팔을 내저으며 박영식을 쳐다봤다.
“형님이 돌아가실 때 치료를 한 의원이 누구지?”
“이형익이라는 자입니다.”
“확실해?”
“네. 마지막에는 다른 의원들도 합류를 했지만 그 전까지는 주상 전하의 지시에 따라 그자가 세자 저하의 치료를 전담했다고 하니 틀림없을 겁니다.”
대답을 들은 도현은 분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놈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군.”
그러면 배후는 숙원 조씨가 틀림없었고 인조는 소현세자를 헤치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방조한 거였다.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최 내관과 서 지부장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속상한 마음에 괜히 애꿎은 박영식한테 화를 쏟아 낸 도현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나 고함을 내지르며 울분을 폭발시킨 것도 잠시, 이내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은 도현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모두 나가 있어. 혼자 있고 싶으니까.”
혈육을 잃은 도현의 마음을 이해하는지라 박영식은 말없이 뒤로 물러섰지만 칠현은 차마 발이 안 떨어지는 듯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마마,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비록 아랫사람이긴 하지만 도현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칠현은 어찌 보면 형제 같은 사이이기도 했기에 이렇게 힘들 때 그를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은 그 어떤 연민과 이해도 거부한다는 듯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결국 칠현까지 방을 나가고, 혼자 남게 된 도현은 쓰러지듯이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지만 함께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어느새 진짜 형제처럼 진한 정을 느낀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사실에 도현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자연히 숙원 조씨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뼈에 사무쳤고 어떻게든 복수를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형님의 그림자로 조용히 살고 싶었건만, 당신은 절대 건드리지 말았어야 될 맹수를 깨운 거야. 앞으로 땅을 치고 이번 일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마치 숙원 조씨가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도현의 눈에선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뒤통수치기
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집무실 밖을 서성거리는 가운데 도현은 식사도 하지 않고 밤새 집무실에 혼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충격과 분노에 흥분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감정이 가라앉자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일을 도모해야 하지만, 조선을 개혁시켜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거나 핍박받지 않는 강대국으로 키우려는 꿈을 가진 든든한 동지였던 소현세자가 급사한 이상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숙원 조씨와 김자점이 다음 목표로 도현을 노릴 것이 분명했다.
이걸 막아 내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도현이 세자 자리를 이어받고 조선의 국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우선은 상대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견제부터 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한 도현은 고개를 들어 칠현을 불렀다.
“칠현이, 게 있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칠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마마.”
“지금 당장 예친왕부에 사람을 보내 섭정과 약속을 잡아.”
갑자기 예친왕을 만나러 가는 것이 의아했지만 도현이 충격에서 벗어나 평상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보이자 칠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예.”
“그리고 지시할 것이 있으니까 장 총관을 불러들여.”
“알겠습니다.”
청나라가 천도를 하자 봉황상단도 따라서 본점을 옮겨 현재 장 총관은 북경에 와 있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봉황상단도 비상이 걸려 있었기에 언제든 도현의 호출이 있으면 바로 달려갈 수 있게 대기하고 있던 장 총관은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관저로 들어왔다.
온돌방이 아니라 중국식으로 되어 있는 집무실에 들어온 장 총관은 대뜸 바닥에 엎드리며 죄를 청했다.
“죽여 주십시오, 마마.”
“일어나게.”
“아닙니다. 마마께서 그렇게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셨는데 세자 저하를 지켜 드리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만들었으니 목숨으로도 이 죄를 다 씻지 못할 겁니다.”
침통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는 장 총관을 보며 도현은 엄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그럼 무책임하게 도망칠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일해 형님의 꿈을 이루고 흉수들한테 복수를 해야지, 이게 무슨 약한 모습이야!”
“마마.”
“못난 꼴은 그만 보이고 어서 일어나.”
슬픔이 더 클 텐데도 의연하게 이겨 내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다독이는 도현의 모습에 장 총관은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손짓을 해서 맞은편 자리에 장 총관을 앉힌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고, 지금부터는 상황이 악화되는 걸 막아야 하네.”
“뭐든지 하교만 하십시오.”
“우선 아바마마를 등에 업은 숙원 조씨가 독주를 하지 못하게 제동을 걸어야 해.”
“그럼 세자 저하께서 급사하실 때 치료를 맡았던 이형익을 물고 늘어져 조씨의 파렴치한 죄상을 꼭 밝혀내면 어떻겠습니까?”
분연한 장 총관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건 상책이 아니라 하책이야. 이형익은 그저 숙원 조씨의 독수에 걸린 꼭두각시에 불과하니 여차하면 꼬리를 자르고 오리발을 내밀겠지. 게다가 자칫 잘못하면 형님이 싫다는데도 억지로 그를 동궁전에 보낸 아바마마를 의심한다며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 그러지 않는 게 좋아.”
“그럼 마마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은 여론이 중요해. 형님께서 돌아가신 이상 세자 자리가 비게 되었는데,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지. 내가 나서지 않아도 반드시 대신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걸세.”
“……?”
“그리고 숙원 조씨는 자기 소생을 세자 보위에 올리려고 하겠지. 그걸 위해서 여태까지 온갖 악행을 저질러 왔으니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것만은 막아야 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말한 도현은 앞에 있는 장 총관을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숙원 조씨 쪽에서 먼저 움직이기 전에 신료와 사대부 들을 부추겨서 날 세자로 밀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머리가 똑똑한 사람답게 도현의 뜻을 알아차린 장 총관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한양에 서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선수를 빼앗기면 그때는 지금까지 애써 준비한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수밖에 없으니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돼.”
“예.”
결연한 얼굴로 대답한 장 총관은 몇 가지 더 은밀히 지시를 받고는 서둘러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칠현이 들어와 섭정과 약속이 잡혔다고 하자 도현은 바로 관저를 나와 예친왕부로 향했다.
자금성 바로 옆에 있던 명나라 고관대작들의 저택 여섯 개를 합쳐서 증축한 새로운 예친왕부는 가지고 있는 권세를 보여 주듯 아주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커다란 전각만 무려 열 개가 넘고 예친왕이 머무는 곳은 높이가 오 층이나 되어 창문을 열면 북경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끝도 없는 돌담과 마차 두 대가 그대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큰 정문은 방문자들을 절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정문에는 팔기군 중 하나로 예친왕의 친위대 격인 백기단 병사들이 살벌한 기세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마부석 옆에 조선왕실을 뜻하는 봉황기를 단 마차가 달려오자 병사들이 경계 자세를 취하며 앞을 막았다.
“멈추시오!”
“워워!”
마부가 고삐를 당겨 마차를 세우자 허리에 검을 찬 하급 군관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가왔다.
“어디서 오는 마차인가?”
상전인 예친왕의 권세를 믿고 그러는 건지 황도에서 이두 마차를 탈 정도면 제법 행세깨나 하는 인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급 군관은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
아니꼬웠지만 괜히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었기에 마부 옆자리에 타고 있던 칠현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조선 관저에서 왔습니다.”
“누가 타고 있지?”
“둘째 왕자님이신 봉림대군께서 타고 계십니다. 섭정 전하와 약속이 잡혀 있는데, 연락을 못 받으셨나 봅니다?”
원래 이런 자들은 더 큰 권력을 보여 주면 찍소리도 못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친왕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하급 군관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뒤로 돌린 하급 군관은 괜히 부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문을 열어 드리지 않고 뭣들 해!”
“예. 옛.”
잠시 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좌우로 열리자 도현을 태운 마차는 그대로 왕부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중하게 말한 집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도현은 오늘로써 두 번째인 접견실 내부를 스윽 훑어봤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전각과 저택보다 한층 더 호화롭고 웅장한 실내 장식을 무심한 눈빛으로 훑은 도현은 고리가 달린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탁 트인 하늘 아래 끝없이 늘어서 있는 자금성의 위용이 한 폭의 멋들어진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언제 봐도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할 정도로 넓은 자금성이지만 도현은 반대로 예친왕의 권세가 황제와 필적할 정도로 높아졌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창틀에 몸을 기댔다.
자금성은 황제의 위신과 권력을 대변하는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기에 항상 올려다봐야 하는 존재이지, 내려다보거나 비슷한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하기에 아무리 나라에 공을 세우고 부를 쌓아도 자금성보다 더 높은 건물을 세우지 못하는 것인데, 예친왕은 보란 듯이 바로 옆에서 황제와 비슷한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의 야망을 단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만약 그가 섭정왕이 아니었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현이 눈부신 듯 바깥 경치를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인기척이 들려 뒤를 돌아보니 예친왕이 안으로 막 들어오고 있는 참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전하.”
청국식으로 도현이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취하자 예친왕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이리 와서 앉게.”
“네.”
값비싼 향나무 원목으로 만들어진 사각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자 아까 안내를 해 줬던 집사가 인삼차를 갖다 놓고는 한쪽에 조용히 섰다.
“자네한테 이야기를 듣고 계속 이것만 마시고 있는데 아침마다 일어날 때 개운하고 힘이 나는 것이 아주 효과가 좋더군.”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예친왕은 허리에 차고 있던 비단 주머니에서 남초를 꺼내 담뱃대에 채워 넣고는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순간 하얀 연기와 함께 담배 특유의 냄새가 풍겼는데 예친왕이 피고 있는 남초는 얼마 전 도현이 선물로 준 거였다.
“역시 남초는 조선에서 재배한 것이 최고란 말이야. 그런 걸 보면 이 차도 그렇고 조선은 땅이 좋은 것 같아. 안 그런가?”
“이번에 수입해 온 것들 중에 특상품이 있는데 나중에 몇 상자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고맙네.”
담뱃대를 한 모금 길게 빨았다가 내뿜은 예친왕은 앞에 있는 도현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갑자기 날 보자고 한 건가?”
그러자 정색을 하며 자세를 바로 한 도현은 약간 침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실은 오늘 한양에서 기별이 왔사온데 형님인 소현세자께서 급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깜짝 놀란 예친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소현세자가 죽었다니 그게 사실인가?”
“예.”
“허어. 이런 일이…… 얼마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때만 해도 아주 건강했었는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가?”
혹시 무슨 흑막이 있는지 탐색하듯 눈을 번들거리며 묻자 도현은 괜히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학질에 걸려 치료를 받다가 갑자기 병이 악화돼서 그만…….”
“저런.”
그래도 심양에 머물며 많은 친분을 쌓았기에 예친왕은 짧게 혀를 차고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어찌 됐건 그런 일을 당하다니 상심이 크겠군.”
“지금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 마음 이해하지. 참 영민하고 우리 쪽과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는데, 아깝게 됐어.”
예친왕의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눈을 반짝인 도현은 넋두리를 하듯 말했다.
“형님이 돌아가신 것도 슬프지만 이 일로 인해 그동안 애써 쌓은 양국 간의 우호 관계가 훼손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예상대로 예친왕이 얼굴을 굳히며 묻자 도현은 마치 실수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게 예친왕의 관심을 더 끌었다.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속 시원히 이야기를 해 보라.”
재촉에 도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북경 공략에 참가하기 전 형님께서 조정에 서신을 보내, 이제 명과 관계를 정리하고 청나라를 새로운 패자로 인정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소현세자가 청에 우호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주장을 드러내고 국왕에게 건의까지 했다는 것은 미처 몰랐던 예친왕은 약간 놀라면서도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나?”
“네.”
“정말 아까운 사람을 잃었군.”
“지금 생각하면 그것 때문에 고초를 많이 겪었습니다.”
무례하게 생각될 정도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추는 도현에게 예친왕이 물었다.
“무슨 고초 말인가?”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명나라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작자들이 형님을 공격해서 물어뜯는 바람에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타앙!
“무어라? 그럼 그 무지몽매한 자들의 이름을 대라.”
격분한 예친왕이 탁자를 내리치자 도현은 반대로 뒤로 한발을 빼듯이 말끝을 흐렸다.
“워낙 그 수가 많아 딱히 누구라고 하나 집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러며 도현은 예친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형님께서 국왕 자리를 이어받으셨다면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뜯어고치셨겠지만, 일이 이리되는 바람에 모조리 헛된 바람이 되어 버렸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하다가 다시 표정을 바꿔 말했다.
“행여나 그자들이 자신의 욕심만 내세워 자질도 없는 엉뚱한 자를 세자 자리에 앉혀,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
예친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다면 몰라도 강남으로 내려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중인데, 후방인 조선의 정세가 불안해진다면 청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더군다나 북경을 함락시켰다고 하지만 이자성과 장헌충같이 수십만의 군세를 거느린 반란군이 아직 버젓이 남아 있어 아직 화북 지역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예전부터 두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건 어려운 일이었는데, 특히나 청나라처럼 인구가 적은 국가는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거기다 조선군은 지휘부는 무능할지 몰라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단련된 강군이고, 화포까지 잘 다뤄 상대하기 어려운 군대였다.
“얘기는 잘 들었네.”
예친왕은 담뱃대를 황동 재떨이에 탁 쳐서 다 태운 남초 찌꺼기를 버리고는 등을 뒤로 기대며 평소와 같이 거만하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보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최대한 빨리 조선으로 보낼 조문단을 꾸리라고 명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섭정 전하의 마음 씀씀이에 조정 대신들도 모두 고마워할 겁니다.”
이야기가 일단락됐음을 안 도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했다.
배웅은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예친왕이 손을 들어 올렸고 도현이 자리를 뜨자 이윽고 조용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새로 남초 가루를 채워 넣은 담뱃대를 입에 물고 한참 고심을 거듭하던 예친왕은 눈을 매섭게 번뜩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것 참, 뒤통수를 까이기 싫으면 자신을 세자 자리에 앉혀 달라 이건가……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봉림대군을 절대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그걸 어렵게 만들었다.
아니, 봉림대군 스스로 먼저 조선의 내부 사정을 까발리면서 예친왕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새롭게 대륙의 패자로 떠오른 청나라 섭정이 조선 국왕도 아니고 둘째 왕자에 불과한 봉림대군에게 휘둘린다는 것이 어처구니없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예친왕은 봉림대군을 경계하고 항상 지켜볼 수 있는 곳에 두려고 했었다.
그날 오후 측근들을 소집한 예친왕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알리고 차후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의논했다.
“감히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들이 있다니. 섭정 전하 저한테 팔기군 두 부대만 주시면 바로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오겠습니다.”
상석에 앉아 있던 예친왕은 야골타의 말에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왜 그렇게 생각이 없어! 그게 가능했다면 이러고 있지도 않을 거잖아.”
괜히 나섰다가 야단을 들은 야골타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만월개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는 조선을 손보는 건 무리입니다.”
“조선이 명나라와 유대 관계가 깊은 건 저도 알고 있지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저희하고 가까운데 설마 무모한 짓을 벌이겠습니까? 전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고 싶은 욕심에 일을 부풀려 말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청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 용골대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평소 도현과 사이가 안 좋은 야골타는 방금 혼이 났으면서도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음험한 봉림대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요.”
그러자 만월개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말했다.
“물론 그런 의도도 있겠지만,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이 기본적으로 명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무엇보다 재조지은이라고 해서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남으로 간 숭정제가 도와 달라는 칙령을 보내면 아무리 친청파가 권력을 쥐고 있어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재조지은이 뭐요?”
“거의 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해 준 은혜라는 뜻인데, 과거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해 준 것을 말하는 겁니다.”
설명을 들은 용골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그리고 내가 알기로 명군이 출병한 건 왜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북경까지 몰려올까 봐 나선 것이고, 지원병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군량미만 축낸 데다 실제로 적을 무찌른 건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들로 알고 있는데, 그걸 은혜라고 아직까지 고마워한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이해가 안 가지만 사실입니다.”
“거참.”
“으음.”
후금 시절부터 사신으로 조선을 드나들던 만월개였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침음성을 흘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빨리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조선이 뒤를 친다면 상당히 곤욕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주력이 대부분 만리장성을 넘어와 있어 만주가 텅 비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용골대와 무장들의 표정을 심각해졌다.
실제로 의주 근처에 전진 배치해 인조와 신하들을 두렵게 만든 부대는 겉만 번지르르하지 팔기군에 편성되지 못한 질이 떨어지는 이 선 급 병력이었다.
그 때문에 명나라를 공략하면서도 예친왕을 비롯한 청군 지휘부는 혹시나 조선군이 국경을 넘지나 않을까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그렇다고 화북 지역에서 주력을 빼내 압록강 쪽으로 옮길 수도 없었기에 예친왕의 고민이 깊어졌다.
“어쩌면 좋겠나?”
좌중을 둘러보며 예친왕이 물었지만 다들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찬 예친왕은 만월개에게 시선을 줬다.
“쯧. 자네가 조선통이니 이야기를 해 봐.”
시선이 자신한테 모이자 만월개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흠. 제 생각에는 조선 내부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는 저희에게 우호적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해서 하루빨리 한양으로 보내야 될 것 같습니다.”
“역시 그 방법뿐인가?”
이맛살을 찡그린 채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한참을 고심하던 예친왕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대륙 장악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될 때이니 어쩔 수 없지. 황상께 말씀드려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을 받을 수 있게 준비하도록.”
“옛.”
예친왕의 지시에 수하들은 머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 찾아봤지만 결국 도현이 의도한 대로 청국 조정이 움직이게 됐다.
회의를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온 만월개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중을 나온 집사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일찍 오셨습니다.”
“그래.”
손을 살짝 내저은 만월개는 곧장 안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손님은 아직 서재에 계시지?”
“예.”
정원을 가로지른 만월개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혼자 차를 마시고 있던 장 총관이 얼른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혼자 지루하지 않으셨소?”
“정원이 잘 꾸며져 있어서 그걸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나도 정원이 마음에 들어서 이 저택을 선택한 거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을 보며 만월개가 자랑하듯 이야기를 하자 장 총관도 맞장구를 쳐 줬다.
“역시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아부인 줄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으며 만월개는 장 총관과 서재 가운데 있는 의자에 마주 앉았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장 총관이 조심스럽게 묻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만월개는 상당히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만간 황궁에서 칙사가 갈 거요.”
“그럼!”
“이런저런 의견이 많았지만 내가 섭정께 강하게 주장해서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을 받을 수 있도록 했소.”
긴장한 채 이야기를 듣던 장 총관은 얼굴을 활짝 펴며 만월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도현은 직접 예친왕을 찾아가 자신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유도하면서 동시에 섭정이 조선 내부 사정에 밝은 만월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장 총관을 보내서 미리 지지를 부탁했다.
그런 이유로 아까 끝난 회의에서 만월개가 도현이 유리하도록 의견을 제시한 거였다.
“이건 약소하지만 이번에 도와주신 것에 대한 답례입니다.”
말을 하며 장 총관은 옆자리에 놔둔 작은 궤짝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뚜껑을 열었다.
궤짝 안에는 누런 금원보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얼핏 봐도 수만 냥은 되어 보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금원보를 본 만월개는 얼굴 가득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장 총관은 계산이 확실해서 좋다니까.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시오.”
“그러겠습니다.”
궤짝을 챙기는 걸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지었지만 장 총관은 끝까지 미소 띤 얼굴로 만월개를 상대했다.
대업을 앞두고 후방이 흔들리는 걸 원치 않았던 예친왕은 일단 결심이 서자 신속하게 움직여 도현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께서 드시옵니다.”
내관의 외침과 함께 궁녀들이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어 주자 관복을 입고 선 도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넓은 대전에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많은 관리들이 도열해 있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색 비단을 따라 바로 정면에는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좌에 어린 순치제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섭정인 예친왕이 근엄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양옆에 늘어서 있는 청국 관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도현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황궁 예법에 따라 황제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숙인 도현은 황좌를 네 걸음 정도 앞두고 멈춰 서서는 양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청국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도현이 인사를 했지만 어린 황제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이 자리가 따분하고 귀찮은지 하품만 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예친왕이 대신 입을 열었다.
“봉림대군은 고개를 들라.”
도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예친왕은 자못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조선으로 떠났던 소현세자가 병을 얻어 안타깝게도 세상을 버린 것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하지만 세자라는 중요한 자리를 이대로 비워 둘 수 없기에 황제 폐하의 뜻을 받아 다음 계승권자인 봉림대군을 조선의 세자로 책봉冊封하려고 한다.”
“황공하옵니다.”
“봉림대군에게 책봉서를 하사하라!”
한쪽에 서 있던 대전 내관은 예친왕의 지시에 앞으로 나와 비단 두루마리를 양손으로 바쳐 조심스럽게 도현한테 건네줬다.
책봉서를 받은 도현은 그대로 고개를 세 번 숙이며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걸로 봉림대군이 조선의 세자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선언하노라!”
예친왕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치는 걸 들으며 도현은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에 책봉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책봉식이 모두 끝났다.
책봉식이 가진 의미를 생각하면 상당히 간소하게 끝났는데 아무래도 자신들의 일이 아닌 조선의 세자를 임명하는 일이고 갑자기 결정되다 보니까 여러 가지로 준비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식이 끝나자마자 순치제는 유모한테 안겨 대전을 떠났고 도현도 예친왕을 따라 자금성 내에 있는 조용한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축하하네.”
“다 예친왕 전하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일이 있다고…… 그것보다 이제 세자가 됐으니 조선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나?”
귀국 이야기가 나오자 도현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형님 일도 있고 가능하면 저도 그러고 싶지만 황제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황제라고 해 봐야 이제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이니 결국 도현의 말은 앞에 있는 예친왕의 의중을 묻는 거였다.
능구렁이 같은 모습에 예친왕은 잠시 정말 도현을 이대로 조선으로 보내도 될지 망설였지만 이미 세자 책봉까지 해 준 마당에 계속 붙잡고 있는 것도 우스웠기에 미련을 접었다.
“이미 승낙을 하셨으니 그건 걱정 마시게.”
“정말이십니까?”
“그러네.”
“이렇게 기쁜 일이…… 감사합니다.”
“반대도 있었지만 양국이 지금처럼 우호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어렵게 결정을 내린 것이니, 그걸 명심해 주게.”
“물론입니다.”
은근슬쩍 세자 자리에 앉혀 줬으니 반항하지 말고 내부를 잘 단속하라며 압박을 준 예친왕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며칠 뒤에 조선으로 조문단을 보낼 건데, 이왕이면 그때 함께 귀국하는 것이 어떤가?”
도현은 예친왕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 전 조금 늦게 출발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아무튼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능한 한 편의를 봐줄 테니 부담 가지지 말고 이야기를 하게.”
“예.”
그 뒤로 얼마간 소소한 대화를 나눈 도현은 예친왕에게 인사를 하고 자금성을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탄 도현은 등을 뒤로 기대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흥! 누굴 죽이려고.”
실제로 귀국을 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았지만 무리를 한다면 조문단과 함께 북경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면 여러 가지로 편한 점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거절한 건 인조와 사대부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인조의 허락도 없이 청나라 황제에게 세자 책봉서를 받았으니 순서가 거꾸로 됐을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과 국왕을 무시한 것이 되어 상당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조문단이라고 하지만 청국 관리들과 함께 마치 점령군처럼 한양에 들어간다면 자칫 큰 반발을 사게 될 가능성이 컸다.
반면 이제 명 대신 청나라 황제가 조선의 왕위 계승을 주관한다는 걸 조야朝野(조정과 민간)에 심어 줄 수 있으니 예친왕이 이런 제안을 한 거였다.
이런 꼼수를 모를 리가 없는 도현은 조문단이 가고 나서 약간 시차를 두고 북경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도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혼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관저에 도착하자 부인을 비롯한 식솔들이 입구에 모두 나와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 책봉을 받으신 걸 경하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박황의 말에 열 명 남짓한 관저 소속 관리들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부인인 장씨도 다소곳한 모습으로 축하를 해 줬다.
“축하하옵니다.”
“고맙소, 부인.”
고개를 숙이며 살포시 미소를 지어 주는 부인의 모습에 도현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타지에서 함께 고생한 일종의 동지들이었기에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일일이 다 인사를 받은 도현은 안채에 위치한 전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석에 자리를 잡은 도현은 모여 있는 관리들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먼저 머나먼 타지에서 그동안 고생들이 많았소. 형님인 소현세자를 잃는 아픔이 있었지만 내가 그 뒤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다 경들 덕분이오.”
소현세자 이야기가 나오자 대빈객 박황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한양에서 벌어진 일도 그렇고 저희들이 제대로 보필을 하지 못한 것 같아 그저 죄스러울 뿐입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그러자 도현은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관리들을 따뜻하게 다독여 줬다.
“어찌 그대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자책하지 말고 각자 얻은 교훈을 머리에 새겨 놓도록 합시다.”
“알겠사옵니다, 저하.”
“그리고 한 가지 더 경들에게 알려 줄 희소식이 있소.”
궁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관리들을 향해 도현이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내년 설날은 조선에서 보낼 수 있을 것 같소.”
“……!”
“설마?”
처음에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해하던 관리들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도현을 쳐다봤다.
“섭정인 예친왕에게 귀국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소.”
“오! 이렇게 기쁜 일이…….”
볼모 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다들 뛸 듯이 기뻐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향수병을 앓으며 가족을 그리워했기에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북경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짐을 싸게 돼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니 고생들 해 주시오.”
“이런 고생은 몇 번이든 할 수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하하하! 맞습니다.”
“귀국 준비는 박 대빈객이 맡아서 해 주시오.”
도현의 말에 박황도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관리들이 일단 돌아가자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장씨 부인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서방님, 한양에 돌아가게 됐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게 묻는 장씨 부인의 볼에는 십 대 소녀처럼 발그스레한 홍조가 떠올랐고,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얼굴에 바로 드러날까, 생각하며 도현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 부인의 손을 잡아 옆에 끌어 앉혔다.
“나중에 내 직접 말해 줄 요량이었는데, 소문이 바람보다 더 빠른 모양이로군.”
“아까 관리들이 나가면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장씨 부인은 도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인가요?”
“음. 그동안 신세진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처리해야 할 일도 조금 남아 있으니, 당장 오늘내일은 무리더라도 이번 달 안으론 출발하게 될 거요.”
“……!”
장씨 부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잘됐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청나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정에 인사차 들렀을 때 이제 가면 언제 또 얼굴을 볼 수 있겠느냐며 눈시울을 붉히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였기에 이미 속으로 각오를 굳히고 있던 장씨 부인조차 눈물을 참지 못하고 한없이 고귀한 신분인데도 남의 나라로 떠나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한탄했었다.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도 살아생전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던가.
그런데 이제 당당히 세자 책봉까지 받고 금의환향하게 되었다니 장씨 부인은 그저 굵은 눈물방울만 뚝뚝 떨어뜨렸다.
“울지 마시오. 모처럼 생긴 좋은 일이라 활짝 웃어 줄 거라 생각했건만.”
“죄송해요. 기쁜데도 이리 눈물이 나니 부끄럽습니다.”
도현은 다 이해한다는 듯 장씨 부인을 안고 등을 톡톡 토닥였다.
한편 눈엣가시 같았던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희희낙락하고 있던 숙원 조씨는 북경에서 전해진 소식에 발칵 뒤집어졌다.
당장 김자점을 거처로 불러들인 숙원 조씨는 연신 손바닥으로 서탁을 내려치며 앙칼진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청나라 황제가 봉림대군에게 세자 책봉을 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숙원 조씨가 마치 아랫사람을 추궁하듯 몰아붙이자 울컥 속에서 뭐가 치밀어 올랐지만 상황이 안 좋은 만큼 김자점은 애써 화를 참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도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방심하고 있다가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어요.”
“그래서 감탄만 하고 있을 거예요. 빨리 대책을 세워야 될 것 아니오!”
“이미 황제에게 책봉서까지 받았다는데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상께서 승인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세자 행세를 하다니 난 절대 인정할 수 없어요!”
절차에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명나라를 밀어내고 새롭게 대륙의 패자로 떠오른 청국 황제가 승인했다면, 아무리 인조라도 뒤집기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숙원 조씨가 쌍심지를 켜고 억지를 부리자 김자점은 짜증이 났다.
“그럼 어쩌겠다는 겁니까?”
“당장 주상 전하께 말씀을 드려 세자 책봉을 무효로 돌려야지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잘못했다가는 황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큰 벌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숙원 조씨가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자 김자점은 정색을 하며 겁을 줬다.
“김상헌과 최명길 두 대감처럼 되고 싶은 건 아니시겠지요.”
“으음.”
순간 얼굴이 창백해진 숙원 조씨는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김상헌이야 원래부터 골수 척화파의 거두로 미운털이 박혔었지만 최명길은 주화파의 수장으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적극 권했을 정도로 청나라와 관계가 나쁘지 않았었다.
하지만 명나라와 내통을 했다는 이유로 심양에 끌려가 지금까지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대신들도 이렇게 힘없이 내주는 처지에 그녀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숙원 조씨는 겁이 나는지 살짝 꼬리를 내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소이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요. 아쉽지만 이번에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보다 조만간 청나라에서 조문단이 온다는데 그것부터 해결해야 될 겁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같아 심통이 난 숙원 조씨는 입술을 삐죽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거야 영전靈前을 보여 주고 적당히 뇌물이나 좀 쥐여 주면 끝날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태평한 숙원 조씨의 모습에 김자점은 내심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이 들은 정보를 이야기해 줬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청국에 있는 제 지인이 알려 온 정보에 의하면, 이번 사절은 단순히 조문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죽은 소현세자의 사인에 대해서 조사를 하는 임무도 함께 받았다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숙원 조씨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게 정말이에요?”
“네.”
“도대체 누가 그런 지시를 내린 거랍니까!”
“섭정을 맡고 있는 예친왕이 직접 명령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섭정인 예친왕이 관련되어 있다면 아무리 뇌물을 많이 준비해 놨어도 소용없을 가능성이 컸다.
이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숙원 조씨는 창백해진 얼굴로 김자점을 쳐다봤다.
“아니, 예친왕은 왜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혹시라도 저들이 이번 일에 마마님과 제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아내면 골치 아파진다는 겁니다.”
주도권을 잃는 것 정도가 아니라 잘못했다가는 세자를 시해한 죄로 사약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숙원 조씨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의심을 하더라도 확증을 잡지 못하도록 꼬리를 잘라야지요.”
“꼬리라면…….”
김자점은 뱀처럼 눈을 차갑게 번뜩이며 말했다.
“이형익만 사라진다면 저희와 연관된 끈이 모두 끊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쪽에서 자기를 버릴 조짐이 보이면 이형익, 그자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러니까 입을 열 여유를 주면 안 되겠지요.”
“암살을 하겠다는 건가요?”
약간 놀란 얼굴로 숙원 조씨가 쳐다보자 김자점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침 의금부 감옥에서 풀려나 집에서 근신을 하고 있다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흐음.”
소현세자가 급사를 하자 가장 큰 비난을 받고 있는 자는 바로 치료를 담당했던 이형익이었다.
조선 시대의 관례로 보면 왕이나 세자가 병을 얻어 죽게 되면 담당 의관이 책임을 지고 멀리 귀향을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찌 된 건지 의금부에서 며칠 갇혀 있은 걸 제외하고는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는데 심지어 인조는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사인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연사도 아니고 병세가 호전되어 가다가 갑자기 악화되어 급사했다는 걸 고려하면, 이건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이것 때문에 저잣거리에는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해 의도적으로 죽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고, 삼사三司(조선 시대 언론을 담당하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지칭하는 것)에서 이형익을 벌하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인조는 어쩜 이럴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절로 나올 정도로 장례 절차마저 간소하게 하며 서둘러 소현세자의 존재를 지우려고 했다.
아무튼 그런 상황 속에 논란의 핵심인 이형익은 내의원 의관 자리를 계속 유지한 채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손에 낀 옥가락지를 매만지며 잠시 고심하던 숙원 조씨는 이내 표독스러운 얼굴로 앞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판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그러자 김자점은 씨익 미소를 짓고는 살짝 머리를 숙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뒤처리는 깨끗하게 하셔야 됩니다.”
“물론이지요.”
이로써 이형익의 운명이 결정됐다.
대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 김자점은 집사에게 명해 누군가를 은밀히 불렀다.
“대감마님, 안악골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들여보내게.”
“예.”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냉막한 인상의 건장한 젊은 사내였는데, 전체적으로 아주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사내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찾아뵙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동안 잘 지냈나?”
“그럭저럭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약간은 건방져 보이는 말투였지만 김자점은 신경 쓰지 않고 피식 미소를 짓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가 해 줄 일이 하나 생겼네.”
“말씀하십시오.”
“이형익이라고, 요즘 저잣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니 잘 알 걸세. 그자를 처리해 줬으면 해.”
그러자 사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앞에 있는 김자점을 쳐다봤다.
“이거 아주 위험한 냄새가 풍기는데요.”
“호위도 없고 고작 의원 하나 죽이는 거니까 위험할 일은 없어.”
“그냥 평범한 의원이 아니고 얼마 전 급사한 세자와 관련이 된 인물이니까 문제지요.”
사내의 말에 김자점은 옻칠이 된 궤짝에서 엽전 꾸러미를 집어 앞으로 던졌다.
쩔그렁.
“착수금으로 하고 일이 끝나면 그만큼 더 주지.”
얼추 이백 냥은 되어 보이는 거금이었다.
“역시 대감님은 통이 크십니다.”
능글맞은 얼굴로 사내가 엽전 꾸러미를 챙겨 넣자 김자점이 다짐을 하듯 이야기를 했다.
“일이 끝나면 당분간 지방으로 내려가 조용히 있어야 될 게야.”
“염려 마십시오. 포청 할아비가 와도 찾지 못하게 아주 바짝 엎드려 있겠습니다.”
“좋아. 급하니까 이틀 안에 끝내 주게.”
“예.”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사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사내의 정체는 한양 저잣거리에서 일명 작두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본명은 도철이고, 조선의 신분제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에 속하는 백정의 자식인데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왈패 무리끼리 시비가 붙어 패싸움을 하다가 사람을 찔러 죽여 포도청에 갇혀 있는 걸 김자점이 빼내 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졌는데, 그 이후로 지금처럼 은밀히 처리해야 될 더러운 일이 있으면 돈을 받고 도철이 해결해 줬다.
김자점을 만나고 나온 도철은 그날로 수하들을 풀어 이형익의 집과 주변을 조사했다.
이야기를 들은 대로 하인 몇 명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호위가 없자 도철은 바로 믿을 수 있는 수하 세 명을 데리고 다음 날 밤 담을 넘었다.
탁!
“저쪽이 안방이라고 했지?”
“예, 형님.”
족제비처럼 생긴 사내의 말에 주위를 살핀 도철은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빼 들고는 조심스럽게 안방을 행해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라오는 수하들도 하나같이 검을 들고 있었는데 전혀 긴장하지 않는 걸 보면 사람을 여러 번 죽여 본 자들이었다.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올린 번듯한 집이었지만 건물이라고는 달랑 세 개뿐인 아담한 구조였기에 안방을 찾는 건 아주 쉬웠다.
“여깁니다.”
“쉿!”
수하의 말에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갖다 댄 도철은 이내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이익.
사방이 고요한 밤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도철은, 목표인 이형익이 이부자리에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걸 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깨워.”
“네.”
도철의 지시에 족제비 사내는 검을 집어넣고는 발로 이형익을 툭툭 찼다.
“으음.”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할 뿐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족제비 사내는 자리끼(밤에 마시기 위해 잠자리 머리맡에 놔두는 물)로 놔둔 대접을 집어 들어 얼굴에다가 물을 확 뿌렸다.
촤악!
“어푸푸. 뭐, 뭐야?”
물을 뒤집어쓰고 짜증을 내며 상체를 일으킨 이형익은 그때서야 방 안에 수상한 이들이 들어와 있는 걸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웬 놈들이냐!”
하인들을 부를 요량으로 일부러 크게 고함을 지르자 도철은 들고 있던 검을 이형익의 목에 갖다 대며 짧게 혀를 찼다.
“쯧! 바로 뒈지고 싶은 모양이지.”
“헉.”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헛바람을 삼킨 이형익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도철을 보며 사정했다.
“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오.”
“듣자 하니 엽전을 제법 모았다고 하던데 우리랑 좀 나눠 써야겠어.”
“오해요. 한낱 의원 나부랭이가 무슨 돈이 있겠소이까.”
돈 욕심이 많은 이형익이 오리발을 내밀자 도철은 미간을 찡그리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이 살짝 살을 파고들며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자 기겁을 한 이형익은 양손을 비비며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기 병풍 뒤 궤짝 안에 돈이 들어 있습니다.”
도철이 눈짓을 하자 수하 두 명이 재빨리 병풍을 걷어 내고는 숨겨져 있던 궤짝을 가져왔다.
베개보다 조금 더 큰 궤짝은 뭐가 들어 있는지 건장한 장정이 들기에도 힘들 정도로 무게가 많이 나갔다.
궤짝에 달려 있는 자물쇠를 본 도철은 검날로 이형익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열쇠.”
그러자 이형익은 아까운 듯 약간 머뭇거리다가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꺼내 줬다.
철컥.
자물쇠가 풀리고 궤짝을 열자 엽전 꾸러미가 가득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목, 이거 제대로 한몫 잡았는데요.”
엽전 꾸러미를 하나 집어 들면서 족제비 사내가 희희낙락하며 말하자 도철도 입꼬리를 씨익 위로 말아 올렸다.
“챙겨.”
“예.”
수하들이 궤짝을 챙겨 드는 걸 보고 다시 고개를 바로 한 도철은 앞에 있는 이형익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돈은 잘 쓰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이형익은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사, 살려 주기로 했지 않소이까.”
“그러고 싶은데 윗전에서 네가 거치적거린다는군.”
“서, 설마…….”
그때서야 단순히 재물을 노리고 들어온 이들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이형익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나 나나 비슷한 처지라 동정이 가지만 어쩔 수 없어. 대신 고통 없이 죽여 주지.”
“안 돼!”
최후의 발악을 하듯 이형익이 소리를 쳤지만 도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방문이 부서지며 검은색 야행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뛰어 들어와 도철의 검을 막았다.
채챙!
“이것들은 뭐야!”
도철이 눈을 부라리며 외치자 새로 나타난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힐끗 너무 놀라 바지에 오줌을 지린 채 주저앉아 있는 이형익을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
“전부 제압해.”
“옛.”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흑의인들은 일제히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도철과 수하들도 들고 있던 무기를 휘두르며 맞상대를 했다.
“다 없애 버려!”
챙! 챙! 챙!
“으악!”
“큭.”
삽시간에 안방은 양쪽이 맞붙어 싸우는 싸움터로 변했는데, 무기를 막 휘둘러 대는 도철 패거리와 달리 흑의인들은 제대로 무예를 익힌 것처럼 동작이 아주 깔끔하게 날카로웠다. 숫자도 흑의인들이 다섯 명으로 두 사람이나 더 많았기에 금방 주도권을 잡고 도철 패거리를 몰아붙였다.
몇 번 검을 부딪치지도 않아 도철 패거리들은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는 무기를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끝까지 저항하던 도철도 흑의인이 내지른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고 무릎을 꿇었다.
“으으윽.”
신음을 흘리며 넘어져 있는 도철을 내려다보면서 검을 집어넣은 우두머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다급한 상황이라 뛰어들기는 했지만 이제 어쩌지요?”
“어쩔 수 없지. 안가로 다 데려간다.”
“이놈은 가슴을 다쳐서 살기 어렵겠는데요.”
고개를 돌리자 도철 패거리 중에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누워 있는 게 보였는데 내장이 다 보일 정도로 상처가 깊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빨리 보내 줘.”
“네.”
우두머리의 말에 부하는 검을 심장에 박아 넣어 고통을 없애 줬다.
“가자.”
흑의인들은 쓰러져 있는 도철 패거리와 이형익을 어깨에 들쳐 메고는 방을 나갔는데 바닥에 있던 돈 궤짝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마지막에 남은 우두머리는 이형익한테서 빼앗은 호패를 죽은 사내의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한쪽에 있는 기름등잔을 쓰러뜨려서 깨고는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불은 순식간에 이부자리로 옮겨붙으며 크게 번져 갔고 그걸 본 우두머리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과 함께 담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매캐한 연기와 타는 냄새에 잠에서 깨어난 이형익의 가족과 노비들은 안방에 난 불을 보고 화들짝 놀라 허둥거렸다.
“부, 불이야!”
“어서 물을 떠 와.”
급히 우물에서 물을 떠 와 뿌렸지만 불길이 잡히기는커녕 순식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키고 활활 타올랐다.
“주인어른은 어디 계신 거지?”
“안에서 못 빠져나오신 거 아냐?”
“아이고. 영감!”
뒤늦게 이형익이 보이지 않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불길에 휩싸인 본채를 쳐다봤다.
이웃 사람들까지 모두 몰려나와 진화에 나선 덕분에 불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지만 본채는 기둥만 몇 개 남고 시커멓게 타 버리고 말았다.
잔불을 끄며 이리저리 잔해를 뒤지던 노비들이 안방에서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하나 발견했다.
도철이 데리고 있던 왈패 중 하나였지만 얼굴과 몸이 심하게 훼손됐고 품에서 반쯤 탄 호패가 나오자 사람들은 그 시신의 주인을 이형익이라고 생각했다.
하얀 천을 덮어 씌워 놓은 시신을 붙잡고 이형익의 가족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주위에서 구경하던 이웃 사람들은 비명횡사한 소현세자가 찾아와 벌을 내린 거라며 수군거렸다.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 있던 김자점 집안의 하인은 슬금슬금 뒤로 빠져 얼른 이 소식을 알렸다.
“이형익이 죽었다고?”
김자점이 담뱃대를 입에 물고는 비스듬히 앉아서 묻자 아까 이형익의 집 앞에 있었던 하인이 몸을 엎드린 채 대답했다.
“예. 불에 탄 시신의 몸에서 호패가 나왔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 김자점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 봐.”
“네.”
하인이 밖으로 나가자 김자점은 손짓으로 한쪽에 시립해 있는 집사를 가까이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불을 내서 살인을 감추다니, 무식한 왈패인 줄 알았는데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군. 아주 깔끔하게 처리를 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지금 바로 포청에 사람을 보내서 죽은 자가 정말 이형익이 맞는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신중한 성격답게 하인한테 보고를 받았지만 김자점은 다시 한 번 포청을 통해 죽은 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가족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 상태인 데다 딱히 자세히 수사를 할 이유가 없었던 포도청에서는 품에서 나온 호패를 가지고 이형익이 죽었다는 확인을 해 줬다.
거기다가 도철이 보냈다는 사내 한 명이 잔금을 받으러 오기까지 했기에 김자점은 이형익이 살아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자들인가?”
봉황상단 한양 지부장인 서상수의 물음에 흑의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그냥 집만 감시하라고 했더니 엉뚱한 일을 벌였군.”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는 이형익과 도철 패거리를 본 서상수가 미간을 찌푸리자 흑의인이 변명하듯 이야기를 했다.
“저희도 처음에는 그냥 지켜만 보려고 했는데 저자들이 목표를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후우. 나도 알고 있네. 그냥 답답한 마음에 해 본 말이야. 그건 그렇고 조장은 어디 있는 건가?”
“아, 예. 그게…….”
시선을 받은 흑의인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서 지부장은 얼굴을 굳히며 재차 행방을 물었다.
“어서 말하게.”
“실은 김자점을 확실히 속여야 한다고…….”
“그래서?”
“저기 있는 왈패 대신 잔금을 받으러 갔습니다.”
“뭐야!”
서 지부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 문이 열리며 산동성에서 도현이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흑치영이 들어왔다.
“어? 일찍 오셨네요.”
“자네 지금 어딜 다녀오는 건가!”
화가 난 듯 서 지부장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지만 흑치영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병조판서 집에 갔다 왔는데 이야기를 못 들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거길 왜 갔냐고!”
“일을 시켰는데 저 도철이라는 왈패가 돈을 받으러 안 오면 뭔가 잘못됐다고 의심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마무리까지 확실히 하고 온 거지요. 아마 김자점은 이형익이 살아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할 겁니다.”
틀린 행동은 아니었지만 너무 무모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아 서 지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김자점이 속아 넘어가든가?”
“처음에는 저놈이 직접 오지 않은 걸 의아해했지만, 발목을 다쳐서 거동이 불편하다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더군요.”
“꼼꼼한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의외군.”
“원래 그런 자들이 평범한 곳에서 허점을 보이는 법 아닙니까.”
“하여튼 다시는 그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도록 하게. 행여 김자점이 수상하게 여겨 자넬 붙잡았으면 어쩔 뻔했나.”
엄한 목소리로 서 지부장이 말하자 흑치영은 양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다 때려눕히고 도망치면 되지요. 제가 한 힘 하지 않습니까.”
“끄으응.”
살짝 얼굴을 구기며 앓는 소리를 낸 서 지부장은 더 이야기를 해 봤자 자기 속만 터질 것 같다는 생각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중에 김자점과 숙원 조씨를 공격할 때 유용한 패로 쓸 수 있으니까 일단 저들은 아무도 모르는 안가에 가둬 놓도록 하게.”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네.”
“그게 뭡니까?”
“조만간 도련님이 오신다고 하네.”
북경에 있는 도현이 귀국한다는 소식에 흑치영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정말입니까?”
“그래. 늦어도 설날 전에는 오실 거라고 하더군.”
“이런 기쁜 일이.”
“도련님이 오시면 앞으로 자네가 활약할 일이 많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이 좋을 거야.”
“하하하! 물론입니다.”
흑치영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한편 인조는 파발을 통해 도현이 청나라 황제에게 세자 책봉을 받았다는 걸 전해 듣고는 노발대발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병자호란 이후 군신 관계를 맺었다고 하지만 감히 나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마음대로 세자를 정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얼굴을 벌겋게 상기시킨 채 인조가 호통을 치자 호출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측근들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건 날 업신여기는 처사가 아닌가!”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맞사옵니다.”
영의정인 김류를 포함한 측근들이 애써 진정을 시키려고 했지만 인조는 앞에 있는 서탁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당장 북경에 사신을 보내 세자 책봉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게!”
인조의 말에 측근들이 기겁을 했다.
“전하, 그건 너무 과한 처사이시옵니다.”
“황제가 직접 내리고 섭정인 예친왕의 인장까지 찍힌 칙명이온데 그걸 거부한다면 자칫 청나라와 큰 마찰이 생길 수도 있사옵니다.”
화가 나서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인조도 측근들의 이야기를 듣자 머뭇거려졌다.
하지만 국왕의 체면상 방금 한 말을 뒤집는 건 신하들에게 면이 안 서는 거였기에 바로 철회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럼 이대로 굴욕적인 지시를 받아들이자는 건가?”
인조가 약간 누그러진 모습을 보이자 측근들은 이때다 싶어 얼른 입을 열었다.
“나쁘게만 보시지 마시고 순서가 조금 잘못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순서상 봉림대군께서 돌아가신 소현세자의 뒤를 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청국에 책봉 허가를 받아야 되는 걸 빨리 처리했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측근들의 이야기대로 서열상 도현이 가장 세자 자리에 근접한 데다 소현과 달리 그동안 눈 밖에 나는 일을 한 적이 없어 인조도 내심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는데, 바로 새로운 강대국인 청나라가 자신을 조선의 왕으로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친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를 그렇게 냉대하고 숙원 조씨의 암수를 은근슬쩍 모른 척하며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왕좌를 지키기 위한 거였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또 청나라가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세자를 책봉해 도현을 귀국시킨다니 불안하고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나라가 왕위 계승에 관여한 사실보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노심초사하는 거였다.
“으음.”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고심을 한 인조는 칙명까지 왔는데 여기서 반발을 해 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판단에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들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오.”
“물론이옵니다, 전하.”
인조가 계속 고집을 피웠다면 자칫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큰 외교적 마찰로 번질 수도 있었던 일이 잘 마무리가 되자 측근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인조의 재가를 받으면서 이제 도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세자가 됐다.
더 늦으면 겨울이 되어 여행길이 험난해지는 걸 고려한 도현은 조문 사절단이 떠나고 정확히 보름 뒤에 관저 식솔들을 이끌고 북경을 출발했다.
관저 전체가 이동하는 것이다 보니까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오십 개가 넘고 수행원만 사백 명에 육박하는 아주 큰 행렬이 만들어졌다.
조선으로 가기 전에 비밀 거점으로 만들어 둔 웅도에 들르려고 마음먹은 도현은, 북경 성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육로를 따라 이동하는 행렬에서 떨어져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항구인 천진에 가서 장 총관이 준비해 놓은 배를 탔다.
“이제 웅도가 보일 겁니다.”
선장의 말에 따라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니 이른 아침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웅도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 오는 것도 꽤 오랜만이군.”
시간이 이리 흘렀나, 하며 도현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배와 섬과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자 이젠 눈으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착장에 가까이 다가갔는데, 주위 시설이 몰라보게 발전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인원이 나와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웅성거리는 모양새에 도현이 말했다.
“다들 저기서 뭘 하는 거지?”
“아마 저하를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요.”
당연하다는 선장의 말투에 도현은 깜짝 놀라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고작 나 하나 때문에?”
“고작이라니요. 저하께서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덕분에 섬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 사람들이 주민의 태반인데요. 당연히 다들 저하께 이렇게나마 은혜를 갚고 싶을 겁니다.”
“허, 그것참.”
도현은 기쁘고도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배가 선착장에 정박하고, 길쭉한 나무판자가 내려졌다.
선장의 재촉을 받아 도현이 일행의 선두를 맡았는데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군마마시다!”
“어서 오십시오, 마마!”
간혹 가다 누가 옆자리를 찌르며 이젠 마마가 아니라 세자 전하라고 불러야 한다고 정정하는 말소리까지 들려 도현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주민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데, 그동안 웅도에 머무르면서 섬 관리를 총괄하고 있던 임봉기 행수가 앞에 나와 그를 맞이했다.
“웅도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 합니다, 저하.”
“임봉기 행수.”
아는 얼굴이 나타나자 반색을 지은 도현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네도 오랜만이로군. 반갑네.”
“저야말로 저하를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임봉기는 먼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가 안내하겠다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자연스럽게 인파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작은 길 같은 게 만들어졌다.
산에서 야생화 같은 걸 따 오기라도 했는지 도현 일행의 머리 위로 꽃잎까지 뿌리면서 환영하는 주민들에게 웃음으로 인사하면서 도현은 그의 뒤를 따라 웅도에 오면 항상 묵게 되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 행수가 항해에 피곤할 테니 준비해 둔 거처에서 쉴 것을 권했지만 괜찮다고 한 도현은 바로 본부 건물에 있는 회의실에서 각 부서장들에게 현황 보고를 받았다.
“제가 먼저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해상 교역을 담당한 유돌석 행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가운데 앉아 있는 도현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임경업 장군께서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철수하면서 잠시 중단됐던 해상무역은 새로 호위 함대가 구성된 작년부터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보유한 선박은 판옥선 여섯 척과 교역선 서른 척으로 올해만 총 칠십만 냥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막연히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고 짐작만 하고 있었지 구체적인 액수를 몰랐던 다른 간부들은 엄청난 액수에 놀란 얼굴로 술렁거렸다.
“대단하군.”
“칠십만 냥이라니…….”
당시 조선의 일 년 조세수입이 상평전으로 오륙백만 냥 전후인 걸 고려하면 일개 상단이 칠십만 냥이나 되는 수익을 올렸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장 총관을 통해 이미 보고 받았던 내용이었지만 도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유돌석 행수의 노고를 치하했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이익을 올리기 힘들었을 텐데 고생이 많았네.”
“저하께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일이 있다고. 그건 그렇고 주로 곡물 거래를 통해 이익을 올렸다고 들었는데, 맞나?”
유 행수는 자랑하듯 설명했다.
“예. 거듭된 전쟁과 흉년에 청국 내 곡물 가격이 폭등한 데 반해 강남 지역은 풍년이 들어 거의 폭락 수준으로 값이 떨어져 중간 차익을 많이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
“그리고 저하께서 지시하신 일도 성과가 있었습니다.”
“아오먼(마카오)에 가 보라고 한 것 말인가?”
“네.”
도현은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큰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됐나?”
“말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유 행수가 손짓을 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상단 점원들이 여러 물건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제일 먼저 꺼내 든 건 조총鳥銃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맞춰서 떨어뜨릴 수 있다고 이름이 붙여진 조총은 일 미터 정도의 길이에 유효사거리가 백오십 미터 정도 됐는데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순식간에 도성까지 빼앗기도록 만든 원흉이었다.
당시에는 큰 충격을 안겨 준 무기였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도 조총을 자체 생산하게 되면서 지금은 무과 과목 중 하나로 시험을 볼 만큼 많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총을 본 사람들은 약간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거 조총 아니오?”
“이곳 병기창에서도 소량이지만 생산되고 있는 걸 굳이 먼 아오먼까지 가서 가져올 필요가 있소?”
그러자 유 행수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조총을 긴 회의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야기를 했다.
“겉보기에는 기존 무기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건 유효사거리가 백칠십 보로 늘어났고 무게 또한 일곱 근에서 다섯 근으로 줄어든 개량형입니다.”
모여 있는 간부들 대부분 군사적인 지식보다는 상업에 더 밝은 사람들이라 설명을 듣고도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직접 조총을 구해 오라고 지시를 내렸던 도현과 무관 출신으로 북경 지부장에서 새롭게 호위 함대 지휘관으로 옮긴 김하방은 눈을 반짝이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게 정말이오?”
“확인해 보십시오.”
유 행수가 자신 있게 말하자 도현의 허락을 받은 김하방은 조총을 집어 들어 꼼꼼히 살펴봤다.
“으음. 사정거리는 쏴 봐야 알겠지만 무게는 확실히 기존 것보다 가볍고 방아쇠도 훨씬 부드럽군요.”
“자네가 보기에 쓸 만한 것 같나?”
도현이 진지한 얼굴로 묻자 김하방은 조총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볍고 사정거리가 길다면 야전에서 유리하기는 하지요. 이건 한 정에 가격이 얼마나 됩니까?”
“양이들한테 구입한다면 상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대략 청은 서른 냥은 할 겁니다. 물론 자체 생산을 한다면 이것보다 비용이 낮아지겠지요.”
유 행수의 말에 김하방은 머리를 살짝 내저었다.
“성능이 우수한 건 맞지만 현재 만들어지는 조총과 가격 차이가 두 배나 난다면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 같은 경우에는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조총을 쓰는데 이때에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배에 타고 싸우는 거라 무게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거리도 이십 보 정도는 승패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겁니다.”
“하긴 개량형을 비싸게 주고 열 정 사는 것보다 기존 조총을 스무 정 배치해서 화력을 강화하는 게 더 효과적이겠습니다.”
“그렇지만 자체 생산을 한다면 가격이 떨어져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 행수가 반발하듯 말하자 도현은 병기창 책임자인 박호에게 시선을 줬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겠나?”
“자세히 살펴봐야 확실한 걸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양이들이 쓰는 조총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있으니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생산 가격은 크게 떨어지지 않을 것 같군요.”
박호가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도현이 찾아내 포섭한 로사리오였는데 현재 웅도 병기창에서 장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왜 그렇지?”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다고 해도 대량생산 체제가 갖춰지지 않으면 단가를 줄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바로 결정을 내렸다.
“성능은 좋지만 분명 문제점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일단 배치하는 건 보류하기로 하지. 대신 병기창에서는 개량 조총을 연구해서 기존 무기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해.”
“예.”
기대했던 것보다 개량 조총에 대한 호응이 적어 아쉬웠지만 전혀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유 행수는 다음 물건을 보여 줬다.
“다음은 양이들이 쓴 서적들입니다. 지시하신 대로 기술과 항해에 관계된 걸 중심으로 구해 왔습니다.”
어린아이가 한 명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큰 궤짝에는 두꺼운 책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는데 저걸 어디다 쓰냐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간부들과 달리 도현은 마치 금은보화를 가져온 것처럼 크게 기뻐했다.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정말 고생했어.”
“아닙니다.”
개량 조총에서 약간 의기소침해졌던 유 행수는 도현의 칭찬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깨를 활짝 폈다.
그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병기창은 잘 돌아가고 있나?”
“지난달에 두 번째 용광로를 완성했고 일꾼도 마흔 명으로 늘어나 이제 매달 각종 구경의 화포 스무 문과 조총 쉰 정을 생산해 낼 수 있게 됐습니다.”
“기대한 것보다 적군.”
“죄송합니다.”
“생산량을 더 늘릴 수는 없을까?”
“일꾼들의 숙련도가 올라가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만 그래도 현재 보유한 설비와 인원으로는 표시가 확 날 정도로 늘리는 건 어려울 겁니다.”
지금 병기창에서 만들어 내고 있는 수량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계획보다 일찍, 그것도 세자가 되어 조선에 돌아가는 데다 상대인 숙원 조씨와 김자점 일파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기에, 도현은 최악의 경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병의 무장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이제 제법 길게 자란 수염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고심을 한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매달 화포 서른 문과 조총 백 정을 만들려면 지원을 얼마나 더 해 줘야 되지?”
“그러려면 용광로를 하나 더 만들어야 되고 숙련된 일꾼도 보충되어야 합니다. 또 가장 중요한 철괴와 석탄도 지금보다 많이 필요하겠지요.”
한마디로 돈이 엄청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임 행수.”
“말씀하십시오.”
옆에 있던 임봉기가 고개를 돌리는 걸 보며 도현이 지시를 내렸다.
“비상금으로 보관하고 있는 거 있지?”
“예.”
“그걸로 병기창에서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줘. 숙련된 일꾼은 여기서 구하기 어려우니까 내가 한양에 가면 임경업 장군을 통해 관아에 속한 장인들을 몰래 보내 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들어줄 테니 내년 설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도록 하고 신형 조총 연구도 계속해 주기 바라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각 부서의 보고가 이어졌고 도현은 격려와 함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거나 새로운 목표를 할당해 줬다.
보고가 모두 끝나자 도현은 모여 있는 간부들을 천천히 쓸어 보며 힘이 가득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지만 자네들이 흘리는 땀 한 방울이 조선을 살찌우고 번영으로 이끄는 밑바탕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금 더 힘을 내 노력해 주게.”
그러자 간부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저하.”
가운데 앉은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든든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
상단 창고와 병기창, 사병 훈련소를 차례로 방문해 소속된 인원들을 격려해 준 도현은 수행원들을 다 떼어 내고 혼자 조용히 웅도를 둘러봤다.
그동안 몰라볼 정도로 많이 변한 모습에 도현은 감탄과 자부심을 느꼈는데, 나무판자로 어설프게 지어 놓았던 건물들은 이제 모두 섬 안에 있는 벽돌 공장에서 구워 낸 벽돌로 튼튼하게 새로 만들어졌다. 주민도, 꾸준히 청나라에 잡혀 있는 조선인 노예들을 구해 내서 데려와 이제 오천 명에 육박하는 대식구가 됐다.
“와아아!”
“이쪽으로 차.”
“여기야!”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가던 도현은 창고 옆 공터에서 어린아이 한 무리가 짚으로 만든 공을 차며 놀고 있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골대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서로 몸을 부딪쳐 가며 공을 주고 뺐고 하는 것이 재밌는지, 아이들 사이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옛날에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 내기 축구를 하곤 했던 추억이 떠올라 흐뭇한 얼굴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시야 한편,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앉아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이제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 어디서 주워 왔는지 길쭉한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선 흙바닥에 뭔가를 그렸다가 지웠다가 하고 있었는데 꾹 다문 입술이 꽤나 고집스러워 보였다.
뭘 그리고 있나 싶어 뒤로 슬쩍 다가가 훔쳐보려는데 사람의 기척을 눈치챈 소년이 홱 돌아보는 바람에 움찔했다.
“뭐예요?”
경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불퉁하게 말한 소년은 재빠르게 발로 그리고 있던 그림을 슥슥 지우고 도현을 노려보았다.
“아니, 뭘 그리 열심히 그리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냥 낙서예요.”
그러고 나서 소년은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도현이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질 않자, 소년은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직 볼일이 남았어요?”
“딱히 볼일은 없단다. 나도 너처럼 애들 노는 걸 구경하고 있을 뿐이야.”
“한가하네. 일 안 해요? 멀쩡한 어른이 낮에 빈둥거리다니 한심해요.”
“입이 맵구나, 너.”
꼬맹이가 제법 맹랑하다고 생각하며 도현은 아예 소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냐, 아니면 공놀이를 싫어해?”
“아저씨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말하기 싫다는 티가 팍팍 나는 소년의 태도에도 도현이 아무 말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자, 결국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쟤들이 날 싫어하니까 놀이에 안 끼워 주는 거예요.”
“뭐야?”
“그렇지만 나쁜 애들은 아녜요. 딱히 날 괴롭히는 건 아니니까.”
“흐음. 다투기라도 한 거냐?”
“아뇨.”
소년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가 무섭대요. 괴물이라고, 같이 놀면 병이 옮을 거래요.”
“병이라니…….”
또래 아이들에 비해 햇볕에 많이 타지 않은 듯 피부가 좀 하얀 편이긴 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소년이었다.
혹시 말하기 힘든 집안 사정이 있나 싶어서 도현이 머뭇거리는데 소년이 길게 자란 앞머리를 쓱 걷어 올렸다.
“……!”
“봐요. 아저씨도 놀랐죠?”
소년은 항상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다시 앞머리를 내려 푸른 눈동자를 가렸다.
“말해 두지만 이건 병이 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이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지만 아빠가 눈이 파래요. 그래서 나도 그런 거라고요.”
그 말에 짚이는 게 있던 도현은 소년에게 물었다.
“혹시 네 아빠 이름이 로사리오니?”
“어? 아저씨, 우리 아빠를 알아요?”
‘역시나.’
로사리오에게 어린 자식이 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런 고충을 겪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긴 서양인과 동양인의 혼혈이니 외모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오히려 이 소년은 어머니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듯 동양인과 비슷한 외모였다.
게다가 콧대가 높고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나중에 나이를 더 먹으면 여자깨나 울릴 미남으로 자랄 가능성도 충분했다.
다만 차별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눈동자색이 푸르다는 것.
만약 현대였다면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남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차별을 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한 시대다.
안쓰러운 마음에 도현이 손을 뻗어 머리칼을 쓰다듬자 홱 뿌리칠 것 같던 소년도 왜인지 얌전한 기색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때 와 하고 함성이 울리더니 하늘 높이 뜬 공이 데굴데굴 굴러 와 도현의 발치에서 멈췄다.
“죄송해요!”
아이들 몇 명이 공을 쫓다가 도현과 함께 있는 소년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아이들과 소년을 번갈아 본 도현은 문득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공을 툭 차올렸다.
“와아!”
도현이 무릎으로 공을 툭툭 차다가 가슴으로 쳐 올려 오른발 왼발 번갈아 가면서 트래핑을 하자, 아이들이 신기한 듯 입을 헤벌리고 쳐다보았다.
한 번도 공을 바닥에 떨어트리지 않은 채 발끝에서 무릎으로 그리고 머리로 통통거리며 묘기를 부리자, 아이들은 물론이고 소년조차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존경심이 섞이는 게 느껴졌다.
“웃차.”
한때 여학생들한테 잘 보이려고 친구들이랑 공 다루는 재주를 연습한 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훗, 내 솜씨도 아직 녹슬지 않았군.”
괜히 혼자 좋아서 중얼거리는데 순식간에 아이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소란을 부렸다.
“아저씨, 최고!”
“또 해 줘요! 네?”
옷자락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졸라 대는 아이들을 겨우 달랜 도현은 공을 들고 공터 한복판으로 가 말했다.
“좋아. 우리 편을 나눠서 노는 게 어때? 날 상대로 공을 뺏을 수 있으면 나중에 맛있는 과자를 사 주마.”
“우와아아!”
“대신에 조건이 있어.”
도현은 한쪽 눈을 찡긋하고 아직 아이들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소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희들은 열 명도 넘는데 나는 혼자잖아. 그건 불공평하겠지? 그러니까 난 쟤랑 같이 한편을 먹으마.”
도현은 소년의 손을 잡고 끌어다가 자기 옆에 세웠다.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서 주춤거리다가 결국 놀고 싶다는 욕심이 더 강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하나 둘 셋 하면 시작이야!”
다시 즐거운 환성이 하늘을 뒤덮었고, 도현은 나이도 신분도 잊은 채 아이들과 어울려 땀을 흘렸다.
모래 먼지를 흩날리며 뒹구는 사이 아이들은 금세 친해져서 서로 꺼리던 것도 잊은 채 소년과 어깨동무를 하거나 넘어진 걸 일으켜 주기도 하면서 몇 년 지기 친구처럼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실컷 논 뒤에 약속했던 대로 아이 몇 명에게 돈을 쥐여 주고 먹을 걸 사 오라고 시킨 도현은, 킬킬 웃으며 우물가에 앉아 시원한 물을 떠먹었다.
“역시 애들은 체력이 대단하다니까.”
그렇게 놀았는데 아직도 부족한지 이젠 나뭇가지로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도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던 소년 역시 지금은 완전히 융화되어 얼굴에 진흙을 치덕치덕 바르고 까르륵 맑은 웃음소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이젠 걱정할 것 없겠지.”
딱히 큰 싸움을 했던 것도 아니니 사소한 계기만 있으면 금방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역시 애들은 어른들의 사정 따위 상관없이 저렇게 노는 게 제일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그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고 슬쩍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도현은 판옥선을 타고 웅도를 떠나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안동(지금의 단둥)으로 갔다.
그곳에서 며칠을 머문 뒤 육로를 이용해 드넓은 만주벌판을 가로질러 온 관저 식솔들과 합류한 도현은 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들어갔다.
일 년 전 소현세자 부부와 함께 잠시 귀국을 했었던 도현과 달리 부인인 장씨를 비롯해 대부분의 관저 식솔들이 짧게는 이 년부터 길게는 칠팔 년까지 조선 땅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거였기에 다들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고, 일부는 땅바닥에 입을 맞추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번에도 가는 길마다 백성들이 몰려나와 열렬히 귀환을 환영해 줬는데, 수년간 청나라에서 힘든 볼모 생활을 한 측은감과 많은 의혹을 남기고 급사한 소현세자의 일까지 겹쳐 관심이 더 뜨거웠다.
인조는 이런 백성들의 반응을 상당히 거슬려 했지만 청나라 조문단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소현세자 때와 달리 제지하지 않았고 한양에서는 작지만 환영 행사까지 열어 줬다.
대궐에 들어간 도현은 이제 세자빈이 된 부인 장씨와 함께 대전으로 가서 아버지인 인조에게 인사를 드렸다.
“아바마마, 그동안 강녕하셨사옵니까?”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은 도현의 말에 인조는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듯 퉁명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빨리 뒈졌으면 좋겠느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됐다. 너야말로 청나라에서 잘 먹고 편히 지냈는지 얼굴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 세자 자리에 오르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더냐?”
“아바마마.”
“인사는 이 정도면 됐으니까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싸늘하게 말한 인조가 보기 싫다는 듯이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자 대전에 있던 신하들과 장씨 부인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가운데 도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의연하게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아 앞에 있는 인조를 보며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제가 아바마마의 심기를 거슬렸다면 죄송합니다. 부모의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
항상 뻣뻣해서 정이 안 가던 소현세자와 달리 도현은 바짝 엎드리며 먼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자 인조는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돌렸던 몸을 바로 했다.
그걸 본 도현은 속으로 자신의 계획이 먹혀들어 간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일부러 침통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불초 소자, 아바마마께 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그게 뭐냐?”
도현이 손짓을 하자 입구 쪽에 서 있던 칠현이 양손에 비단 두루마리를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와 상선한테 건네줬다.
상선은 그걸 다시 인조에게 내밀었는데 묶여 있는 끈을 풀어 보고는 깜작 놀라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아니, 이건 청국 황제의 옥쇄가 찍힌 세자 책봉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책봉서를 앞에 있는 서탁에 내려놓은 인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도현을 쳐다봤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그러자 도현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자금성으로 불려 가 청 황제에게 세자 책봉서를 받기는 했지만, 조선의 지존은 아바마마이시니 넘겨 드렸다가 다시 정식으로 하사받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마 청 황제도 그렇게 하라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제게 책봉서를 잠시 맡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먼저 도착한 조문단이나 따로 사절을 보내도 됐기에 이건 인조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인조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걸 눈치 못 챌 리 없었지만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서 가져온 거라며 도현이 자신의 체면을 세워 주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책봉 문제 때문에 대궐 분위기가 살얼음판이었는데 도현이 단번에 그걸 풀어 버리자, 모여 있던 신하들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역시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저희가 오해를 했었나 봅니다.”
“아무리 청 황제라도 전하의 권위를 무시할 리가 있겠사옵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신하들까지 동조를 해 주자 가운데 앉은 인조는 헛기침을 하며 굳어 있던 표정이 풀어졌다.
“흠흠. 그런가?”
“아바마마께서 첩지를 내려 주시지 않는다면 그게 어찌 진정한 세자라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 말이 결정적이었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아무리 청나라 황제가 책봉을 해 준다고 해도 인조가 승인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는데, 이건 자신의 위치를 불안하게 생각하는 인조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내가 세자의 마음을 오해한 것 같구나.”
말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을 뿐만 아니라 인조가 봉림대군이 아닌 세자라고 도현을 지칭하자, 신하들은 놀란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아니옵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시게 만든 제가 송구스럽사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며 고개를 숙이는 도현의 모습에 인조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얼마 전 슬픈 일이 있었으나 나라의 후계를 세우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 세자 자리는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다. 경들은 영의정을 중심으로 하루빨리 세자 책봉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서둘라!”
인조의 지시에 신하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다시 도현에게 시선을 돌린 인조는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으니 세자 부부는 나와 함께 내전으로 가자꾸나.”
“예.”
이것 또한 얼굴조차 보지 않고 동궁전에 감금하다시피 한 소현세자에 비하면 상당히 다른 대우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인조를 따라 도현과 장씨 부인이 대전을 나갔고, 그걸 보며 신하들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부분 책봉에 관계된 일이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전에서 물러난 신하들은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김자점도 의정부 건물 회의실에 측근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갈모 형제라고 하더니 봉림대군이 저렇게 똑똑하고 체세에 밝은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한번 고집을 피우면 당해 낼 사람이 없는 주상 전하를 단번에 설득해 버리다니, 옆에서 보고 있자니 정말 소름이 돋더이다.”
위에서 덮어 쓰는 우모(비가 올 때 쓰는 모자)를 갈모라고 하는데, 모양이 위가 좁고 아래가 넓게 만들어져 있었다.
즉 갈모 형제란 형보다 아우가 낫다는 말로 죽은 소현세자보다 도현이 더 뛰어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김자점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상황에서 책봉서를 넘겨줘 주상 전하의 마음을 돌리다니,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들인 김련의 물음에 김자점은 답답하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머리까지 똑똑한 호랑이란 말이다.”
“아. 예.”
“그런 줄도 모르고 세자 자리에 오르도록 하다니 큰 실수를 한 것 같군.”
“그럼 지금이라도 막는 것이…….”
숙원 조씨의 아버지로 딸의 후광을 받아 정삼품 우승지를 맡고 있는 조태징의 말에, 김자점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짜증을 냈다.
탕!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시오! 이미 청나라 황제에게 책봉서를 받았고 방금 대전에서 주상 전하도 재가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제동을 건다는 말이오!”
“그렇기는 하지만 숙원 마마께 말씀을 드리면…….”
“딱하오이다. 숙원 마마라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요?”
“주상 전하의 총애가 크시니 잘 이야기를 드린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보시오, 우승지.”
“네.”
“아무리 주상 전하께서 숙원 마마를 아끼시지만 이미 신하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신 걸 쉽게 번복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설사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청나라의 반발은 어떻게 할 거요? 아마 모르긴 해도 당장 한양에 와 있는 사신들이 황명을 거역하는 거냐며 따지고 들 것이오.”
“그건…….”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깊이 생각을 하지 못한 조태징은 김자점의 지적에 우물거리며 꼬리를 내렸다.
다른 측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다들 얼굴을 굳혔다.
그걸 보며 김자점은 정색을 한 채 이야기를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봉림대군 아니, 세자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지금부터라도 바짝 긴장하고 행동을 예의 주시해야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김자점의 말에 측근들은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냥이를 피하려다가 더 무서운 범을 깨운 건 아닌지 김자점은 시종일관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인조의 지시에 따라 세자 책봉식은 신속하게 준비되어 도현이 귀국한 지 이레가 되는 날 성대하게 거행됐다.
“저하, 이제 가실 시간이옵니다.”
왕실 예법에 따라 왕세자의 예복인 칠장복과 칠류관을 갖추고 방에 앉아 있던 도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긴장을 풀고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동궁전 소속 궁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도현에게 예를 갖췄다.
“오르시지요.”
내관의 말에 도현은 마당에 내려져 있는 연(임금이나 세자가 타고 다니는 가마)으로 걸어가 설치된 의자에 앉았다.
“출발!”
도현을 태운 연은 동궁전을 나와 오늘 책봉식이 열리는 인정전으로 향했다.
원래 세자 책봉이나 즉위식 같은 국자적인 중요 행사들은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열렸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경복궁이 불타 잿더미가 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인정전에서 거행되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인 인정문이었다.
붉게 칠한 기둥에 커다란 지붕을 얹힌 인정문은 존재만으로도 상당한 위압감을 줬다.
연에서 내린 도현은 입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의관을 살펴보고는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행사장을 향해 역사적인 발걸음을 옮겼다.
“세자 저하, 납시오!”
수문관의 커다란 외침을 들으며 대문을 통과하자 이 층으로 지어진 인정전 앞에 국왕인 인조가 높다란 월대에 왕비인 장렬왕후와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좌우에는 품계석을 따라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들이 잔뜩 늘어서서 도현을 바라봤다.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에 위축이 될 만도 했지만, 도현은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면서도 위엄 넘치는 걸음으로 가운데 깔린 박석을 밟으며 나아갔다.
대전에서 꼬장꼬장한 인조를 순식간에 구워삶는 걸 보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신하들은, 긴장이 될 텐데도 의연하고 차분함을 잃지 않는 도현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쪽에 있던 종친들도 세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도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도현 때문에 자기 아들을 세자 자리에 올릴 절호의 기회를 놓친 숙원 조씨는, 도현이 걸어가는 내내 표독스러운 얼굴로 그를 째려봤다.
따가운 시선에 도현은 힐끗 숙원 조씨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러자 숙원 조씨는 세자 자리를 빼앗긴 것도 분한데 자신이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익.”
“마마, 왜 그러십니까?”
뒤에 서 있던 김 상궁이 눈치를 보며 묻자 숙원 조씨는 찬바람이 쌩하고 부는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아무것도 아니야.”
급히 준비된 행사라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많은 데다 얼마 전 소현세자가 급사하는 슬픈 일까지 있어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치러지는 책봉례였다.
하지만 이미 청국 황제의 재가를 받았고 인조에게도 인정을 받아 도현이 세자가 되는 것에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을 정도로 정통성을 완벽하게 인정받았다.
이건 향후 도현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됐는데, 힘없는 둘째 왕자라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조선 국왕의 후계자이자 이인자로 거듭나게 됐다.
단순히 신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이제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명분과 힘을 가지게 된 거였다.
이건 도현 개인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수히 많은 수하들한테도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도현에게도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조카들의 존재였다.
원래 세자가 죽었을 경우 그 아들이 자리를 계승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 자식이 아예 없다면 또 모르겠지만 엄연히 똑똑하고 신체 건강한 아들이 두 명이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신하들 사이에 세손 중 한 명이 세자위를 이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숙원 조씨의 방해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갑론을박 논의를 하고 있는 사이, 엉뚱하게도 청나라에서 도현한테 책봉서를 하사해 버린 거였다.
때문에 청국과 인조의 승인을 받아 전통성을 확보했다지만, 도현은 정상적인 계승 서열을 무시하고 세자가 됐다는 큰 약점을 가지고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건 실제 역사에도 효종이 죽을 때까지 아킬레스건이 됐고 소현세자의 자식과 아내인 강빈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원인이었다.
어느새 월대 앞에 다다른 도현이 허리를 숙였다가 펴자 인조의 손짓을 받은 도승지가 큰 소리로 책봉 교서를 읽었다.
“모두들 들으라. 과인이 하늘을 뜻을 이어받아 왕좌에 오른 지 벌써 어언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외침과 사건을 겪으며 백성들을 위해 노력했지만 과인의 덕이 부족하여 아직도 힘들게 사는 이들이 많다고 하니,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이럴 때 사대부와 백성들을 이끌어 줘야 될 왕실이 얼마 전 소현세자의 급사로 오히려 걱정과 우려를 안겨 주고 있으니, 민망하고 죄스럽도다. 그래서 오늘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아 문무백관과 만백성의 근심을 덜고 아울러 종묘사직을 튼튼하게 하고자 한다. 세자는 학문을 갈고닦아 성군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경들과 백성들은 과인의 뜻을 따라 세자가 바른길을 가게 인도하고 최선을 다해 보필하도록 해야 될 것이다.”
낭독이 끝나자 도승지는 내관들의 도움을 받아 죽책문과 고명문 그리고 세자인을 비단 천이 깔린 쟁반에 들고 아래에 있는 도현에게 건네줬다.
도현은 정면에 앉아 있는 인조에게 큰절을 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세 가지 물건을 받아 들었다.
세자인은 세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이고, 죽책문은 대나무를 줄로 엮어 만든 책에다가 세자로 책봉한다는 내용을 적은 일종의 임명장이었다.
마지막으로 교명문은 세자가 되면 주의해야 될 것들이 적힌 훈계문이었다.
이 세 물건을 가져야만 진정한 조선의 세자가 됐다고 할 수 있었는데, 도현이 그것들을 손에 쥐자 늘어서 있던 신하들이 일제히 천세를 외쳤다.
“주상 전하. 천세!”
“세자 저하. 천세!”
뒤로 돌아선 도현은 두 팔을 들어 올리고는 목이 터져라 천세를 외치는 신하들을 굽어보면서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에 입술을 꽉 다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책봉식이 끝나자 도현은 곧바로 종묘宗廟로 가서 선조들에게 새롭게 조선의 세자가 되었다는 걸 고했다.
이곳 역시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광해군이 중건한 것이다.
참배를 하고 다시 대궐로 돌아와서는 인조와 종친들에게 훈계를 듣고 청에서 온 사신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금방 가 버렸고 도현은 자정이 넘어서야 동궁전으로 돌아와 파김치가 된 몸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세자가 됐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욕심 많은 인조가 실권을 혼자 꽉 틀어쥐고 하나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도현은 부인과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인조와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오후 늦게까지 시강원 학사들에게 학문을 사사받는 아주 따분하면서도 바쁜 생활을 이어 갔다.
갑시부터 시작해 해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은, 무예를 익혀 나름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던 도현을 녹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몇 시진이나 똑바로 정좌를 하고 앉아 유교 경전을 배우는 강론 시간은 그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 강론을 맡은 학사가 서책을 덮으며 말하자 도현은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수고들 했소.”
“아닙니다. 그럼 내일 또 뵙겠사옵니다.”
학사들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고 얼마쯤 지났을까 의젓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도현은 양팔을 위로 쫙 뻗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갸갸갸. 지겨워 죽는 줄 알았네. 이거 뭐 현대의 고3 수험생은 저리 가라 할 정도잖아.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왕이 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로 업무가 많다니…… 이런 힘든 자리를 어떤 미친놈들이 반란까지 일으켜서 가지려고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앞으로 쭉 이런 생활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자 도현은 벌써부터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피곤이 몰려와 보료 위에 축 늘어져 있을 때 칠현이 달달한 수정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또 그러고 계십니까?”
“너도 내 처지가 돼 봐.”
힘이 쏙 빠진 도현의 말에 칠현은 측은하단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는 쟁반을 서탁 위에 올려놨다.
“하긴 저 같으면 벌써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겁니다.”
“그것 봐.”
“일어나셔서 이건 좀 드셔 보세요.”
“귀찮아.”
누워서 한쪽 손만 까닥까닥 내젓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질러져 있는 서책을 정리하며 말했다.
“조금 이따가 저녁 문안을 가셔야 되잖아요.”
“에구. 그렇지.”
비실비실 상체를 일으킨 도현은 사발을 들어 수정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단 게 들어가니까 좀 살 것 같네.”
“그렇죠.”
빈 사발을 쟁반에 내려놓은 도현은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궁전 정리는 다 끝났어?”
“예. 김 내관의 도움을 받아서 궁인들을 다 회유했습니다.”
“이제 좀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겠군.”
세자 교육과 대궐 생활에 적응하는 데 바쁘기도 했지만, 도현이 책봉식 이후 조용히 엎드려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곳곳에 깔려 있는 숙원 조씨와 김자점의 눈 때문이었다.
뭘 하나 하려고 해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루도 안 돼 모두 두 사람한테 보고가 되니 마음껏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를 살펴봐도 대부분의 황제와 왕이 바로 옆에서 시중을 드는 궁인들에 의해서 독살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도현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주변을 청소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대궐 전체를 정리하고 싶었지만 현재로써는 그럴 여력이 없었기에 일단은 동궁전부터 손을 댔다.
다행히 지난번 잠시 귀국했을 때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김남생이 있어서 예상했던 것보다 작업이 쉬웠는데, 상황에 따라 돈을 쥐여 주거나 궁 밖에 있는 가족을 돌봐주는 식으로 회유를 하자, 거의 대부분의 궁인들이 넘어왔다.
물론 회유가 안 되는 자들도 몇 명 있었지만 이미 주변이 모두 이쪽 편이라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존재가 됐다.
오히려 도현은 이들을 통해 역정보를 흘려 숙원 조씨와 김자점을 혼란에 빠뜨릴 음흉한 계획을 세웠다.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 새벽부터 일어나서 해야 되는 문안 인사와 지겨운 유교 공부에 치여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얼마나 힘드냐면 숙원 조씨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과로로 죽이려는 음모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공부를 하기 싫다고 하면 난리가 나겠지?”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끄으응.”
얼굴을 구긴 채 앓는 소리를 내는 도현을 보면서 칠현이 바깥소식을 전달했다.
“박 대장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서 지부장의 도움을 받아 도성 밖에 거점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잘됐군.”
대궐에는 함부로 사람을 들일 수 없었기에 그동안 호위를 맡았던 박영식과 떨어져야 됐다.
대신 도현은 다른 임무를 맡겼는데 호위대 대원들과 함께 도성 근처에 머물고 있다가 유사시에 바로 달려와 그를 돕도록 했다.
“대원들은 몇 명이나 들어왔어?”
“아직은 거점을 확보하는 단계라 얼마 안 되고 다음 달에 웅도에서 백 명이 두 패로 나눠 올 거랍니다.”
김자점이 집에서 부리는 젊은 남자 노비 숫자가 오십이 넘는 걸 생각할 때 적게 느껴지지만, 모두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았고 강력한 조총으로 무장해 만약의 경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더 데려오는 건 무리겠지?”
“아무리 포도청이 허술하다고 하지만 깊은 산골도 아니고 도성 근처에 장정 수백 명이 우글거리는 걸 들키지 않고 속이기는 어렵겠지요.”
“하긴.”
아무리 세자라고 해도 무장한 사병 수백을 몰래 키우는 건 충분히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인 데다 숙원 조씨와 김자점이 호시탐탐 자신을 물어뜯으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기에 도현은 아쉽지만 생각을 접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셔야 될 시간입니다.”
창밖으로 붉게 노을이 지고 있는 걸 본 도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알았어.”
한편 귀국 첫날 대전에서 인조를 상대하던 모습이 워낙 강렬했기에 동궁전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숙원 조씨와 김자점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도현이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무런 낌새도 안 보인다는 거야?”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왕실 어른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시강원 학사들과 공부를 하시는 것이 다였습니다.”
“은밀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제대로 감시를 하고 있는 것 맞아?”
숙원 조씨가 짜증을 내면서 소리치자 동궁전 소속 내관인 송말호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머리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세자 저하의 행동을 모두 살피고 있지만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못 믿겠다고 억지를 피우는 숙원 조씨의 모습에 송말호는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덤벼들 수는 없었기에 화를 참으며 애써 항변했다.
“다시 돌아가서 게으름 피우지 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확실히 세자를 감시해!”
“예.”
계속 앉아 있으면 무슨 불벼락이 떨어질지 몰랐기에 송말호는 숙원 조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을 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숙원 조씨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말했다.
“하여튼 하나같이 쓸모가 없다니까.”
그러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함께 있는 김자점을 쳐다봤다.
“병판이 보시기에는 어때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뭘 묻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김자점의 모습에 숙원 조씨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세자 말이에요. 금방이라도 뭔 일을 벌일 것 같더니 이렇게 조용한 것이 더 수상하지 않아요?”
“가만히 있어 주면 저희한테는 좋은 것 아닙니까.”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짜증이 난 숙원 조씨의 언성이 살짝 높아지자 김자점은 그때서야 상대와 시선을 맞추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뭔가 찝찝하지만 세자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저희가 먼저 일을 벌이는 건 여의치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대로 계속 있자는 말입니까?”
“당분간은 그러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늙은 너구리답게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김자점과 달리 숙원 조씨는 뭐가 그렇게 초조한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다그쳤다.
“그러다가 덜컥 주상의 건강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아직 정정하시니 삼사 년은 끄떡없으실 겁니다.”
“주상의 나이 때는 하루하루가 다른 법인데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고 누가 보장을 한답니까!”
“…….”
자꾸 인조의 건강을 걱정하는 숙원 조씨의 모습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챈 김자점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전하의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겁니까?”
순간 멈칫하며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숙원 조씨를 보고 김자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함께 일을 헤쳐 나가려면 서로 감추는 것이 없어야 되는데, 마마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섭섭하다는 듯이 말하자 숙원 조씨는 요부답게 금방 표정을 바꾸고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오해예요. 진작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을 뿐이에요.”
“그럼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가능하면 혼자 알고 싶었지만 김자점이 눈치를 챈 이상 더 숨기는 것도 어려웠고, 어찌 됐건 당분간은 둘이 손을 잡아야 했기에 숙원 조씨는 비밀을 알려 줬다.
“주상께서 예전부터 가지고 계신 지병이 있다는 건 병판도 알고 있을 거예요.”
“예.”
인조의 지병은 오래된 것으로 가끔씩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과 가려움증에 며칠씩 국정을 중단하기도 했었다.
“그동안 보약과 침술로 그럭저럭 건강을 유지했었는데, 얼마 전부터 급격하게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대전에서 열리는 어전회의를 거르는 경우가 많고, 열린다고 해도 예전에 비해 빨리 끝내고 인조가 쉽게 피로한 기색을 보인 것이 떠올랐다.
여러 가지 징후가 있었는데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 걸 자책하며 김자점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어의 말로는 길어 봤자 일 년이라고 했어요.”
숙원 조씨의 말에 김자점은 둔기를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걸로 그동안 숙원 조씨가 조급해하면서 도현을 빨리 끌어내리려고 한 것이 모두 다 설명됐다.
“큰일이군요.”
“그러니까 남 좋은 일을 시키지 않으려면 세자를 없애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이제 세자를 죽이자는 이야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는 숙원 조씨의 모습에 김자점은 머리가 아팠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도현을 제거해야만 됐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으니…….”
“지난번처럼 독살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쉿!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다 내 측근들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그것보다 청나라에서 온 사신들도 모두 돌아갔으니 지금이 일을 벌이기 딱 좋은 때인 것 같은데 병판 생각은 어때요?”
예친왕에게 소현세자의 죽음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온 청국 사신들은 여러 가지 의혹을 발견했지만, 열쇠를 쥐고 있는 내의원 소속 의원 이형익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고 숙원 조씨와 김자점의 뇌물 공세에 넘어가, 어영부영 시간만 때우다 자연사로 결론을 내리고는 얼마 전 북경으로 돌아갔다.
“깔끔하고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연이어 급사로 죽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김자점이 별로 내켜 하지 않자 숙원 조씨는 눈가를 찡그리며 다그치듯 말했다.
“그럼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가 세자한테 모든 다 빼앗기자는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만…….”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남들 눈치를 보며 머뭇거릴 여유가 없어요. 주상의 병세가 알려지기 전에 어떻게든 세자를 끌어내리고 어서 우리 숭선군을 왕좌에 앉혀야 된단 말입니다.”
숭선군 이징은 숙원 조씨의 자식이자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었는데, 위로 누이인 효명 옹주가 있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권력의 원천인 인조가 사라지고 척진 도현이 왕위에 오른다면, 김자점으로서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즉위와 동시에 제일 먼저 숙청 대상에 올라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에 어떻게든 막아야 될 처지였다.
고심을 하던 김자점은 꺼림칙한 것이 없지 않았지만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습니다.”
그러자 숙원 조씨는 반색을 했다.
“잘 생각했어요. 어차피 우리는 한 배를 탄 운명이잖아요.”
“맞습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손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김자점의 물음에 숙원 조씨는 독사 같은 눈을 번득이며 이야기를 했다.
“이 의원이 살아 있었다면 일이 쉬웠을 테지만 아쉽게도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으니 이번에는 내명부 사람을 써서 처리를 할 생각이에요.”
“내명부라면?”
“이미 수라간水刺間에 손을 써 뒀으니 병판은 아무 염려 말고 나중에 신료들이 엉뚱하게 죽은 소현세자의 자식들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미리 정리를 해 주세요.”
수라간은 국왕과 왕실 식구들이 먹는 모든 음식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숙원 조씨의 말은 곧 식사에 독을 넣어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세자 저하께도 기미 상궁이 있는데, 가능하겠습니까?”
“후후후. 내가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일 것 같아요? 동궁전에 있는 궁인들은 다 내 입김이 들어간 아이들이니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어요.”
자신만만해하는 숙원 조씨를 보며 김자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내명부의 수장은 계비인 장렬황후였지만 인조의 총애를 등에 업고 숙원 조씨가 대궐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왕비인 장렬황후는 아무런 실권도 없이 지아비인 인조도 거의 만나지 못하고 거의 유폐되다시피 경춘전景春殿에 앉아 허수아비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자점은 숙원 조씨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마마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하루가 급했던 숙원 조씨는 그날 오후 바로 수라간을 책임진 상궁을 불러서 소현세자 때처럼 비상이 든 주머니를 건네줬다.
단번에 약을 다 털어 넣어서 죽인다면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고 뒤처리 또한 골치 아파지기에, 숙원 조씨는 도현이 먹을 음식에 조금씩 비상을 넣어 중독시키도록 했다.
물론 여유가 많이 없었기에 그 기간은 한 달을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계획대로 일이 진행될지는 미지수였다.
탁탁탁!
치이이익.
인조와 왕실 식구들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은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재료를 조리하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가 밖에서부터 진동을 했다.
하얀 김이 솟아오르는 냄비 앞에서 국자를 휘젓는 궁녀가 있는가 하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열심히 아궁이를 지피는 어린 궁녀까지 다들 모여 손을 바쁘게 놀리는데, 그중에서도 키가 크고 뱃살이 두툼한 상궁이 허리에 손을 딱 댄 자세로 서서 여기저기 지시를 내리고 다녔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수라간에서 마치 대장군인 양 궁녀들을 진두지휘하는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펴보다가, 조금이라도 요령을 피우고 눈치를 살피는 사람을 발견하면 단번에 불호령을 내렸다.
갖가지 색깔의 야채로 멋을 내고 그릇 위에 가지런히 담아 준비된 상에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상궁은, 주르륵 늘어선 칠첩반상들 중 하나를 찍어 물었다.
“그게 동궁전으로 가는 것이냐?”
“그렇습니다만…….”
이제 갓 어린 티를 벗은 궁녀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궁은 상 위에 놓여 있는 찬들을 주의 깊게 살피더니, 크고 작은 반찬 그릇들 중 하나를 집어 올렸다.
“이건 빼고 다른 걸 내오너라. 세자 저하께선 입맛이 까다로운 분이 아니셔서 특별히 가리시는 게 없지만, 저번에 보니 이 나물은 거의 손도 안 대셨더구나.”
“알겠습니다.”
매일 하루 세끼 상을 준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꿰게 된다.
이런 식으로 중간에 찬을 바꾸는 것쯤이야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별반 의심도 하지 않고 궁녀가 그릇을 받아 들어 물러가자, 상 주위에는 상궁 하나만이 남게 되었다.
저마다 제 할 일이 바빠 아무도 이쪽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상궁은, 저고리 안쪽에 숨긴 작은 향낭을 꺼내 하얀 가루를 국 안에 솔솔 뿌려 넣었다.
숙원 조씨가 동궁전에 들일 음식에 타라고 명령하며 건넨 비상은 따끈한 국물에 섞여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향낭을 도로 품속에 넣은 상궁은 빨리빨리 움직이라며 궁녀들을 재촉하고선, 약간의 죄책감이 섞인 눈빛으로 동궁전에 올려 보낼 상을 힐끔 쳐다보다가 모질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하, 진지 드실 시각이옵니다.”
수라간에서 올려 보낸 상이 도착하자, 밖에서 내관이 알렸다.
무료한 표정으로 서책을 읽고 있던 도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표지를 덮고 자세를 바로 했다.
궁녀들이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방 안에 상을 들고 들어와 제일 먼저 기미상궁에게 보였다.
젓가락으로 반찬들을 하나씩 먹으며 맛을 보던 기미 상궁은 제일 마지막으로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국에 수저를 대었다.
하지만 국물을 약간 떠서 입술만 축였을 뿐, 삼키지 않고 재빨리 입가를 훔친 기미 상궁은 도현에게로 몸을 돌려 허리를 굽혔다.
“이상 없사옵니다.”
“이리 가져오너라.”
도현이 손짓하는 것과 동시에 기미 상궁의 허락을 맡은 궁녀들이 차례차례 상을 내려놓았다.
밥 먹을 때만큼은 마음 편하게 있고 싶다는 도현의 뜻에 따라 궁녀들과 기미 상궁까지 모두 자리를 물러가자, 방 안에는 믿을 수 있는 측근이자 말 상대도 겸해서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칠현만이 남았다.
“어디 보자.”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앞에 놓고 수저를 손에 든 도현은 아직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한 칠현을 향해 가끔씩 약 올리는 말장난까지 치며 맛있게 배를 채웠다.
어느 것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게 없어 혀가 호강을 하는 듯했으나, 유일하게 국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혼자 드시면 맛있으세요?”
“아, 맛있다. 사람 사는데 제일 중요한 도락 중에 하나가 바로 먹는 거라고 하지 않느냐.”
“치잇.”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도현 곁에서 시중을 드니 한양에 돌아오고 나서부턴 자유 시간이라곤 거의 없는 칠현인지라, 안 그래도 까칠한 성격이 더욱 도를 더하는지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실쭉하게 떴다.
“맘 같아선 따로 네 상도 차리라고 하고 싶지만, 궁중 법도가 엄한 걸 어쩌겠어.”
“처음부터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았거든요?”
“계집애처럼 삐치지 말고.”
도현은 고기를 다져 만든 산적 그릇과 식후 입가심용인 약과를 칠현 쪽으로 밀었다.
“순 반찬뿐이잖아요. 이래 가지고 어디 제대로 밥 먹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내일부터 밥을 곱절로 달라고 하든가.”
“됐습니다. 저하께서 남달리 밥을 많이 먹는다고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요.”
그러면서 못 이기는 척 약과를 입에 문 칠현은 소맷자락에서 가느다란 은침을 꺼내 들었다.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국에 은침을 담그니 끝이 새까맣게 변색되는 걸 보면서, 도현과 칠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묵묵히 밥을 먹었다.
“역시나.”
“그러네요.”
칠현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물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알아서 처리해. 그렇다고 아무 데나 갖다 버리지 말고.”
그러면서 도현은 묵묵히 젓가락을 놀렸다.
“저쪽이 계속 이런 식으로 귀찮게 구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겠군. 호락호락 당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똑똑히 깨우쳐 줘야겠어.”
“전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밥만 먹을 수 있게 되어도 좋겠습니다.”
“넌 머릿속에 밥 생각밖에 없지?”
“저하께서 좀 전에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도락 중에 하나라고 하셨잖아요!”
“알았다, 알았어.”
버럭 하는 칠현에게 계속 밥이나 먹으라며 젓가락을 까딱거리는 도현의 얼굴엔 미소가 서렸지만, 그 눈빛은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숙원 조씨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독이 든 음식이 올라오기 전에 이미 도현은 상대가 꾸민 음모를 낱낱이 다 알고 있었다.
바로 아까 수라간에서 음식이 들어왔을 때 검사를 했던 기미 상궁이 그에게 독이 들어 있다는 걸 귀띔해 주었다.
세자가 되자마자 제일 먼저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보필하는 동궁전 궁인들을 회유한 효과가 바로 나타난 것이다.
숙원 조씨 입장에서는 비상을 먹이기 위해 독을 검사하는 사람한테 그냥 모르는 척 넘기라고 은밀히 지시를 내린 거였는데, 그게 모든 사실이 도현에게 알려지는 치명적인 결과를 냈다.
아무튼 수라간에서 독이 든 음식을 올리는 족족 모두 시궁창에 버려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숙원 조씨는 도현이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조태징
자신을 독살하려 했는데 상대를 그냥 내버려 둘 정도로 점잖은(?) 성격이 아닌 도현은 서 지부장에게 지시를 내려서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어허. 잘 먹었다.”
도현이 볼록 튀어 나온 배를 두드리며 숟가락을 내려놓자 궁녀들이 들어와 상을 가지고 나갔다.
독을 쓴 걸 알게 된 이후부터 도현은 일부러 더 음식을 깔끔하게 먹어 치워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벌써 보름째가 되어 가는데 발작은커녕 약간의 낌새도 보이지 않으니 숙원 조씨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것 때문에 거의 매일 숙원 조씨에게 불려가 들들 볶인 수라간 책임자는 처음과 달리 음식에다가 비상을 한 움큼씩 집어넣었지만 도통 반응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
도현의 물음에 문을 닫고 가까이 다가온 칠현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준비가 다 끝났고 내일부터 상소를 올릴 거라고 합니다.”
“우암 선생도 참여했겠지?”
“네. 처음에는 거절하셨지만 박황 대빈객께서 직접 충북 황간까지 내려가셔서 설득하셨습니다.”
우암 선생은 바로 노론의 영수이자 뛰어난 문인으로 당대 모든 사대부들에게 존경을 받던 송시열宋時烈을 지칭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직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봉림대군의 사부를 맡은 인연이 있었는데, 현재는 병자호란 이후 좌절감에 고향으로 낙향해 학문과 제자 양성에 몰두하고 있었다.
“큰 신세를 졌군.”
“아무튼 내일 상소가 접수되면 사헌부가 아주 발칵 뒤집어지겠습니다.”
기대가 된다는 듯이 약간 들뜬 얼굴로 칠현이 말하자 도현 씨익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헌부가 아니라 대궐 전체가 들썩일 거야.”
“아무튼 제대로 복수를 하게 됐습니다.”
“내가 원래 받은 건 확실히 돌려주는 성격이잖아.”
“그렇죠.”
쏟아지는 상소에 기겁할 숙원 조씨와 관리들을 떠올리며 도현은 얼굴 가득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아침 육조 거리에 위치한 사헌부 건물 앞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의관을 정갈히 갖춰 입고 갓을 쓴 양반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그 모습에 주위를 지나던 평민들은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무슨 일로 양반님네들이 저렇게 몰려 있는 거지?”
“글쎄.”
“뭔 난리라도 난 거 아냐?”
불과 몇 년 전에 청나라 팔기군한테 한양이 짓밟힌 아픈 경험이 있기에 이런 소동이 벌어지면 더 안절부절못했다.
“이 사람아,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하긴 그런 일이라면 벌써 봉수대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겠지. 그나저나 뭔 일인지 궁금하구먼.”
중년인은 친구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괜히 기웃거리다가 치도곤이나 당하지 말고 어서 우리 갈 길이나 가자고.”
“양반들 일에 끼어들어 봤자 좋은 일이 없지. 그래, 가세.”
그렇게 평민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가운데 보신각종이 울리자 닫혀 있던 사헌부 건물 문이 열렸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양반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민원 접수나 방문객을 상대하는 일을 맡은 관리는 떼로 몰려온 양반들을 보고는, 약간 위축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충청도에서 올라온 송 아무개요.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릴 것이 있어서 왔소.”
무리의 우두머리인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한 양반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하는 말에 관리는 슬쩍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다른 분들도 같은 일로 오신 겁니까?”
“그렇소.”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사람이 송 아무개라고 밝힌 중년인 옆에 있다가 대답하자 관리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시다면 관청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주상 전하께 올리는 상소는 대궐로 가셔서 승정원에 접수를 시키시면 됩니다.”
시골 양반들이 관청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온 거라고 생각한 관리의 말에 젊은 양반이 약간 화가 난 듯 입을 열었다.
“누가 그걸 몰라서 여길 찾아온 것 같소!”
“그럼…….”
“상소를 하는 대상이 승정원 관리인 우승지인데 어찌 그리로 가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
“지금 우승지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헉.”
당당하게 대답하는 젊은 양반과 달리 관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삼품 당상관인 고위 신료를 고발하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우승지를 맡고 있는 자가 바로 인조의 총애를 받는 숙원 조씨의 아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관리가 기겁을 하는 것이다.
왜 하필 자신이 있는 날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한탄을 하며 관리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뒤편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 이명한이었다. 등청하는 길에 양반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걸 보고 무슨 일인지 살피러 온 것이었다.
“대감.”
직속상관의 등장에 관리가 얼른 허리를 굽히자 손을 살짝 들어 받아 준 이명한은 근엄한 어투로 말했다.
“아침부터 양반들이 여길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그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될지 잠시 망설이던 관리는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승지 대감에 대한 상소를 올릴 것이 있다고 찾아왔습니다.”
“우승지라면 조 대감 말인가?”
“예.”
순간 미간을 찌푸린 이명한은 시선을 돌려 결연한 얼굴로 서 있는 양반들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이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자네, 우암 아닌가?”
“오랜만입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이명한과 달리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송시열은 차분한 어투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 같은 척화파에다가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송시열이 낙향한 이후에도 가끔씩 서신을 주고받곤 했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들으셨다시피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리러 왔습니다.”
“상소를?”
“네.”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는 송시열과 달리 이명한은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로 놀랐다.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현실에 좌절하고 낙향한 그가 몇 년 만에 한양으로 올라온 것도 사건이었지만, 노론의 영수로 많은 양반들의 지지를 받는 송시열이 나섰다는 건 정국에 엄청난 파장을 예고하는 사건이다.
살짝 얼굴을 굳힌 이명한은 앞에 있는 송시열을 보며 말했다.
“뭘 상소한다는 건가?”
“어차피 알게 될 테니 말씀을 드리지요.”
이명한의 나이가 더 많았기에 송시열은 존대를 했다.
“주상을 보필하는 본분을 저버리고 우승지 조태징 대감이 사람들에게 온갖 뇌물을 받는 건 물론이고 매관매직까지 하며, 심지어 상소를 모두 주상께 올려야 하는데도 이해관계에 따라 중간에 없애 버리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있기에, 이를 탄핵하고자 합니다.”
“으음.”
숙원 조씨를 등에 업은 조태징의 비리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그걸 송시열이 수면 위로 드러내려는 거였다.
“쉽지 않은 일이네.”
숙원 조씨를 의식한 이명한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자 송시열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맹의 도리를 공부한 선비로서 불의를 보고 그냥 못 본 척 넘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문현답이군. 우담 자네를 보니 내가 부끄럽네.”
“대감께서 그동안 조정이 바른길로 가도록 많은 노력을 하신 걸 알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니 고맙군.”
미소를 지어 보인 이명한은 고개를 돌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관리를 보며 말했다.
“상소를 받게.”
별 볼일 없는 시골 선비로 생각했던 사람이 유명한 대학사인 송시열이라고 하자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놀란 관리는 이명한의 말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 하지만…….”
망설이는 관리의 모습에 눈가를 찡그린 이명한은 엄한 목소리로 재차 지시를 내렸다.
“관리의 부정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은 사헌부가 당연히 할 일이 아닌가!”
그러자 관리는 이제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거, 저 때문에 대감이 곤란해지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송시열의 말에 이명한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닐세. 그동안 조금은 잊고 지냈던 초심을, 자네 덕분에 다시 깨닫게 됐네. 괜찮으면 나랑 같이 안으로 들어가 차나 한잔 하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어떤가?”
“그러지요.”
함께 온 제자에게 뒷일을 맡긴 송시열은 이명한을 따라 그의 집무실로 갔고, 관리는 양반들이 가져온 상소의 접수를 받았다.
그걸 시작으로 충청도뿐만 아니라 전라도와 경상도등 각지에서 양반들이 올라와 사헌부에 상소를 냈다.
첫날에만 무려 오백 통이 넘는 상소가 접수됐는데, 이걸 처리하느라 사헌부 소속 관리들은 아무런 일도 못하고 여기에만 매달려야 했다.
상소가 천 통 아니 만 통이 들어온다고 해도 그냥 무시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송시열을 포함한 사대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사들이 여기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거기다가 이명한이 수장으로 있는 사헌부까지 나서서 조태징의 비리를 조사하고 나섰다.
그러다 보니 숙원 조씨 쪽에서 손을 쓸 새도 없이 상소와 조태징의 비리 내용이 임금인 인조에게 모두 보고됐다.
아무리 총애하는 숙원 조씨의 아버지였지만 비리 내용이 너무 심했고, 상소에 이름을 올린 명사들의 무게감에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이명한을 비롯한 척화파들이 들고일어나 조태징의 행태를 비난하자 일이 점점 커졌다.
탕!
“그러게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화가 많이 났는지 손바닥으로 서탁을 세게 내려치며 소리치는 숙원 조씨의 모습에 호출을 받고 달려온 조태징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게, 조심한다고 했는데…….”
“노력했다는 것이 이거예요!”
“흠흠.”
날카롭게 째려보며 숙원 조씨가 하는 말에 조태징은 무안한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자점이 끼어들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승지도 반성을 하고 있을 테니 이제 그만하시죠.”
“흥.”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지만 어찌 됐건 아버지였기에 숙원 조씨도 더 이상 다그치지 않고 이쯤에서 멈췄다.
“지금 해야 될 건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빨리 이번 일을 봉합하는 겁니다.”
“주상께서는 뭐라고 하세요?”
“대전에서 따로 말씀은 하시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을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으음.”
다른 사람들을 아래로 보며 권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임금인 인조의 눈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신은 여러 명의 후궁 중 하나로 추락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숙원 조씨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걸 보며 내심 주제도 모르고 마구 설쳐 대더니 꼴좋다는 비웃음을 지으며 김자점이 입을 열었다.
“전하를 편하게 해 드리시려면 아무래도 마마님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결자해지라고 우승지가 자리에서 물러나 근신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 마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조태징을 보고 숙원 조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미우나 고우나 같은 핏줄이기도 했지만 조정 내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내보내야 된다는 것에 숙원 조씨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미련을 보이자 김자점은 약간 차가운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선택은 마마님의 몫이지만 송시열을 포함한 재야 거두들이 이번 상소에 이름을 올렸고 대사헌인 이명한을 비롯한 척화파들이 전하를 들볶고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
아무리 총애를 한다고 해도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최악의 경우 조태징이 문제가 아니라 인조가 자신을 버릴 수도 있었다.
살벌한 궁중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올라온 여인답게 김자점이 이야기하는 뜻을 파악한 숙원 조씨는 손으로 치맛단을 꽉 움켜쥐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냥 조용히 지방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그자들은 뭐 주워 먹을 것이 있다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건지…….”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아버지인 조태징을 보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상황이 이러니까 잠시 집에서 쉬고 있으세요.”
“저보고 벼슬을 내놓으라는 겁니까!”
“그럼 이렇게 있다가 다 같이 망할까요!”
숙원 조씨의 일갈에 조태징은 목을 움츠리며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해지면 다시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까 그때까지 나서지 말고 죽은 듯 지내세요. 제 말 알겠어요?”
아쉬웠지만 숙원 조씨의 서슬에 조태징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꼭 자리를 만들어 주셔야 됩니다.”
“후우. 염려 마세요.”
끝까지 못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숙원 조씨는 이내 정색을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제 만족해요?”
“우승지한테 따로 감정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드린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흥! 됐으니까. 뒷수습이나 확실히 해 줘요.”
김자점은 쌀쌀한 숙원 조씨의 말을 여유 있게 받았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우승지 조태징은 숙원 조씨가 말한 대로 거론된 죄목이 다 사실은 아니지만 정국을 어지럽히고 인조를 근심스럽게 했다며 스스로 사직했다.
안 그래도 숙원 조씨 때문에 어떻게든 무마시키려고 했지만 쏟아지는 상소와 척화파 신하들의 처벌 요구에 슬슬 한계점에 와 있던 인조는 반색을 하며 얼른 사직서를 수리했다.
“우승지가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이번 문제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것이 어떻겠나?”
인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사헌 이명한이 나서며 반대 의견을 냈다.
“지금까지 드러난 죄상만 해도 삭탈관직은 물론이고 사판에서 삭제하고 멀리 귀향을 보내도 부족한데, 고작 사직서 한 장으로 용서해 주다니 그건 아니 되옵니다.”
“맞사옵니다.”
“이번에 일벌백계를 하여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법을 우습게 알고 또다시 이런 일이 재발할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쯤에서 끝냈으면 좋겠는데 이명한과 척화파 신하들이 계속 물고 늘어지자 인조는 살짝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때 왼편에 앉아 있던 김자점이 입을 열었다.
“그 죄라는 것이 이렇다더라 하는 의심만 있을 뿐이지 명확한 증거가 드러난 건 얼마 없지 않소?”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김자점이 딴죽을 걸자 이명한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국문을 정식으로 열어 우승지의 죄를 밝히자는 거외다. 만약 억울한 것이 있다면 여기서 다 드러날 것이 아니오!”
옆에 있던 대사간 조경도 이명한의 말을 거들었다.
“우승지를 위해서도 의혹을 남겨 두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런데 자꾸 여기서 묻으려고 하니 더 의심을 사는 것이오.”
마지막 말은 마치 자신을 보고 하는 것 같아 인조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렇게 상대가 계속 강경하게 나오자 김자점은 승부수를 띄웠다.
“대사헌이 원하는 대로 국문을 열었다고 칩시다. 가뜩이나 돌아가신 소현세자에 대한 헛소문이 저잣거리에 돌아 민심이 흉흉한데 숙원 마마의 아버지인 우숭지 문제까지 불거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진실 여부를 떠나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자칫 불충한 마음을 품는 자들이 나올지도 모르오. 그런데도 일을 크게 벌려야 되겠소!”
그러자 분위기에 밀려 잠자코 있던 주화파들이 김자점의 이야기를 두둔하고 나섰다.
“병조판서의 말씀처럼 이런 상황에서 국문을 여는 건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경쟁 관계에 있는 김자점이 척화파와 대립하는 걸 보며 내심 흐뭇한 표정을 짓던 우의정 심기원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자 슬쩍 격론에 끼어들었다.
“병판이야말로 상황을 너무 확대해석 하는 것 아니오?”
심기원을 보며 한쪽 뺨을 실룩인 김자점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설마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했을 것 같습니까?”
“근거라…… 그게 뭐요?”
김자점은 맞은편에 있는 척화파들을 스윽 쓸어 보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돌아가신 소현세자에 대한 유언비어는 물론이고 이번 우승지의 일까지 모두 뒤에 청과 싸우기를 원하는 사림 세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폭탄 발언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조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외쳤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자 이명한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면서 부인했다.
“아니옵니다. 저희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이건 모함입니다.”
“그따위 망발을 내뱉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소!”
척화파들이 발끈하자 인조도 약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김자점을 쳐다봤다.
대전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김자점은 약간의 동요도 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상경하라는 주상 전하의 말씀에도 번번이 거절을 하고 낙향해 있던 송시열과 여러 학사들이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상소를 올려 이번 사건을 촉발시킨 것도 수상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데려온 젊은 선비들이 술집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떠들다가 포도청에 갇혀 있는데도 내 이야기가 틀렸다는 겁니까?”
“……!”
순간 이명한을 비롯한 척화파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송시열과 학사들은 조태징이 저지르는 온갖 비리를 보다 못해 상경한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포청에 잡힌 선비들은 자세한 사정을 몰라도 금기시되는 소현세자 문제를 거론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치명타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운데 앉아 있던 인조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크게 소리쳤다.
“감히 날 능멸하다니!”
소현세자 문제는 인조에게 치부와 같은 거였기에 자칫 잘못하면 이걸로 엄청난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그걸 잘 알기에 척화파들은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하려고 황급히 변명을 늘어놨다.
“혈기왕성한 선비들이 술김에 저지른 실수일 겁니다.”
“전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참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척화파의 기세를 꺾어 놓으려고 마음먹은 김자점은 불에 기름을 붓은 이야기를 했다.
“이게 다 내명부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벌어진 일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전하께서 고심을 거듭한 끝에 봉림대군 마마를 국본으로 세우셨는데 거기에 복종을 하지 못하고 반발하는 이들이 있으니, 어찌 민심이 조용하길 바라겠습니까?”
김자점이 누굴 지목하는 건지 깨달은 신하들은 모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놀란 신하들과 달리 인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병판 말이 맞아. 이미 새로운 세자가 정해졌는데 강빈이 대궐에 남아 있다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즉시 사저로 내보내고 세자빈 자격도 박탈하도록 하라!”
“저, 전하!”
“할 말이라도 있나?”
“얼마 전 지아비를 잃고 아직 슬픔을 이겨 내지 못한 강빈 마마께 너무 가혹한 처사이시옵니다.”
대사간 조경이 선처해 줄 것을 간언했지만 인조는 단호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왕실의 법도를 바로 세우자는 건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건 내명부의 일이니 경들은 간섭하지 말라.”
“하오나…….”
“그럼 경들은 한 나라에 세자빈이 두 명이나 있는 상황을 계속 놔둬야 된다는 건가!”
인조의 호통에 신하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지금 상황이 정상이 아니긴 했다.
강빈 때문에 도현이 책봉식을 거치고 정식으로 세자가 됐는데도, 부인인 장씨는 아직 세자빈에 오르지 못하고 계속 예전 품계인 풍안부인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인조의 말대로 세자빈이 둘이나 있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었지만 문제는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너구리 같은 김자점은 교묘히 인조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강빈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려 자칫 자신한테도 불똥이 튈 수 있었던 조태징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는 수완을 보였다.
인조의 명이 정해지자 강빈은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황급히 달려온 궁녀들이 손발을 주물러 주고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올려 주는 등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강빈은 아직도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지 몇 번이고 내관에게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정녕 전하께서 그리하라 하셨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마마.”
강빈의 참담한 표정을 보니 어명을 전하러 온 내관조차도 딱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는지라 다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자신들이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지금 당장 짐을 꾸리셔야 날이 저물기 전에 사가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어서 서두르시지요.”
차가운 내관의 말에 강빈은 가냘픈 몸을 휘청거리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 버텼다.
소현세자라는 든든한 버팀목을 잃었을 때부터 앞날이 그리 밝진 않으리라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당당한 사대부의 여식으로서, 세자빈으로서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고 각오도 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막상 모질게 내치려는 인조의 태도를 눈앞에 맞닥뜨리니 역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알겠네. 주상 전하의 명이시니 따를 수밖에 없지.”
강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상궁에게 눈짓을 했다.
“자네가 적당히 알아서 짐을 챙겨 주게. 당장 갈아입을 옷가지만 몇 개 추리면 되니 시간은 얼마 안 걸릴 걸세.”
뒷말은 상궁이 아니라 가만히 서서 강빈이 궁을 나가는 것만 기다리고 있는 내관에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제일 오랜 시간 곁에서 모셨던 상궁이 눈물을 훔치며 일어서려고 하는데 강빈이 손짓으로 불러 세웠다.
“아이들 옷은 화려하지 않은 것으로 골라서 챙기게. 궁을 벗어나면 그런 건 짐만 될 테니까.”
“네, 마마.”
인사를 하고 방을 물러나려던 상궁은 내관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강빈 역시 내관이 상궁의 앞을 가로막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의아해 물었다.
“왜 그러는가?”
“마마, 죄송합니다만…… 아기씨들은 궁에 남겨 놓으라고 주상 전하께서 명하셨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강빈은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이하여……!”
탄식과도 같은 말을 내뱉으며 강빈은 손으로 바닥을 탕탕 내리쳤다.
“아비는 죽도록 미워했어도 손자는 곁에 두시겠다고? 하! 청에서 돌아오자마자 문안 인사를 드렸을 때도 아이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안아도 주지 않으셨는데, 어찌하여 없던 정이 하루 이틀 만에 샘솟았다 하시더냐!”
강빈은 손톱 끝이 파고들어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너무하시다, 너무하셔! 왜 이리도 모질게 구십니까!”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하자던 남편을 허무하게 잃은 것도 분통이 터져 잠 못 이룰 지경인데, 하물며 며느리는 궁 바깥으로 쫓아내면서 자식까지 떼어 놓겠다 하니, 강빈 역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화를 쏟아 내었다.
“마마, 진정하십시오!”
그러나 내관은 큰 목소리로 고함치며 오히려 강빈은 윽박질렀다.
“더 이상 말씀하시면 능멸죄가 됩니다. 아무리 마마라 해도 그만한 중죄를 저지르고선 살아 나가실 수 없사옵니다!”
“네, 네 이놈”
강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손가락만 쳐 든 채 부들부들 떨 뿐 말을 잇지 못했다.
항상 자애롭고 침착하던 강빈이 이렇게까지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라 궁녀들도 어찌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그때 마룻바닥을 우당탕탕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어머니!”
“도와주셔요! 이자들이 저희를 억지로 끌고 가려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뛰어 들어온 것은 장남인 석철과 둘째 석린이었다.
석철은 올해 열두 살, 석린은 여덟 살로 둘 다 아버지인 소현세자를 닮아 선이 가늘고 성격이 온후하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석린은 강빈의 품으로 와락 안겨들어 울음을 터트렸고, 그나마 나이가 더 많은 석철은 금방 주위 분위기를 파악한 듯 적개심 어린 눈빛으로 내관을 노려보며, 어머니를 보호하듯 앞에 떡 버티고 섰다.
“이게 무슨 무례냐! 냉큼 썩 꺼지지 못할까!”
그러자 내관은 뒤이어 쫓아 들어온 자들을 보고 이 정도 일 처리도 못하느냐는 듯 혀를 쯧 차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휴우. 여봐라.”
인조의 명을 받든 내관은 애초에 그가 끌고 왔던 다른 젊은 내관들과 뒤늦게 두 아이를 쫓아온 궁녀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두 분 마마를 강빈 마마에게서 떼어 놓아라. 하나 옥체에 상처가 가서는 안 될 것이니라.”
“예!”
그러자 젊은 내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석철과 석린을 들어 올리고 억지로 잡아당겼다.
“어머니!”
“안 돼! 이놈들!”
아직은 어린 나이인지라 아무리 반항을 해도 젊은 청년들의 힘을 당해 내지 못했다.
석린이 새된 소리로 어머니, 어머니 하고 악을 질러 대자 이성을 잃은 강빈이 품에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지만, 도리어 궁녀들에게 손발을 억압당해 허공만 허우적거렸다.
“마마를 놓지 못할까, 이 못된 것들!”
“닥치시오! 주상 전하의 어명이신데 감히 항명을 하려는 겐가!”
강빈을 가엽게 여긴 궁녀들이 그들을 말리려고 했지만 사나운 윽박지름에 움찔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아이들이 강제로 끌려 나가자 강빈은 넋이 나가 그 자리에 엎드린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마.”
상궁이 옆에서 몇 번이나 불렀지만 강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곧 출궁하실 시간이오. 앞에 가마를 준비해 놨으니 얼른 마마를 모시고 가게나.”
가차 없는 내관의 말에 상궁은 더 시간을 끌었다간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험한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선 강빈을 재촉해서 억지로 일으켰다.
“마마, 기운 내십시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강빈은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기만 했다.
몸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두 사람이 겨우 부축을 해서 밖으로 나오자 세자빈이 탈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가마가 덜렁 놓여 있었다.
복장이 터질 정도로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겨우 강빈을 안에 앉혀 놓고, 상궁과 어린 궁녀 하나만이 겨우 짐을 챙겨 따라 나왔다.
둘 다 손에는 급히 싸맨 듯한 보따리 하나씩만이 들려 있어 행색이 너무나 조촐했다.
내관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내자, 가마꾼들이 말없이 가마를 들어 올렸다.
좌우로 흔들리는 가마 속에서 강빈은 하염없이 눈물만 주르륵주르륵 흘리다가, 창문 틈 사이로 엿보이는 궁궐의 모습을 바라보며 너무나도 무상하고 잔인한 세상사에 한탄하여 그저 마지막으로 보았던 소현세자의 모습만을 떠올렸다.
“어찌 됐느냐?”
측근인 김 상궁은 숙원 조씨의 물음에 허리를 숙이며 얼른 대답했다.
“방금 대궐을 떠나 사가로 갔사옵니다.”
“그래. 호호호! 그동안 눈엣가시 같더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구나.”
한쪽 손으로 입을 가르며 간드러지게 웃음을 터트린 숙원 조씨는 이내 정색을 하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늙은 너구리처럼 보통 약삭빠른 머리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상황을 역전시키다니, 병판도 제법이야.”
그러면서 숙원 조씨는 또 뭔가를 꾸미는 듯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이번 일로 그녀는 욕심 많고 잔머리만 굴리는 자로 생각했던 김자점에 대한 평가를 몇 단계 위로 올리면서 동시에 자신이 지금처럼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됐다.
한편 동궁전에 있던 도현은 칠현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어. 이것 참! 일이 이렇게 되다니, 형수님과 조카들에게 정말 면목이 없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전혀 예상 밖의 결과인데요.”
칠현 역시 굳은 얼굴로 동조를 했고 도현은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상대를 너무 쉽게 생각했어.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이번에는 완전히 당한 거야. 괜히 나 때문에 엉뚱한 피해자가 나온 것 같아 미안하구나.”
도현이 너무 자책을 하는 것 같아 보이자 칠현이 옆으로 위로를 했다.
“일이 이상하게 풀렸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강빈 마마께서 겪으셔야 되는 일이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어. 조카들은 어디에 맡겨졌지?”
“일단 중전 마마께 보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럼 계속 중전께서 보살피는 거야?”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상께서 강빈 마마에게 보내 드릴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 같으니, 당분간은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도현은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한탄하듯 말했다.
“아무리 간신배와 여우같은 숙원 조씨에게 눈과 귀가 다 가려지셨다고 하지만, 어미와 자식 사이의 천륜을 억지로 끊고 떼어 놓으려고 하시다니, 아바마마께서 너무하시는군.”
그러자 칠현이 기겁을 하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조심하십시오. 아무리 동궁전 궁인들을 저희 쪽으로 거의 다 포섭했다지만 벽에도 귀와 눈이 있는 곳이 바로 대궐입니다. 행여나 그런 이야기가 주상 전하께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감옥이 따로 없군. 알았으니까 그만해. 그건 그렇고 형님 이야기를 하다가 술집에서 잡혔다는 선비들이 진짜 있는 거야?”
“예. 포도청에 확인을 해 본 결과 사실이었습니다.”
“쯧.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일이 이렇게 꼬이는 데 큰 빌미가 됐기에 도현은 혀를 차며 함부로 혓바닥을 놀린 선비들에게 짜증을 냈다.
그때 칠현이 약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조사를 하던 중에 뭔가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걸리는 거라니?”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 함께 있던 주모와 다른 손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에는 선비들이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누군가 먼저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거론하며 시비를 걸었다고 합니다.”
순간 뭔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도현은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며 다급히 물었다.
“그럼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번 사건을 벌였다는 거야?”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포도청에 잡혀 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런 사실은 싹 빠지고 시비를 걸었던 인물들의 존재가 지워진 걸 보면 뭔가 구린내가 풍기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한참 동안 혼자 생각을 정리한 도현은 이내 이를 부드득 갈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자점 이 개자식이 날 물 먹인 거군.”
“병판이요?”
단번에 배후를 찍어 내는 도현을 보고 칠현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그는 눈을 형형하게 번득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 줬다.
“배후 세력 어쩌고 하면서 대전에서 제일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바로 김자점이잖아. 거기다가 사건을 맡은 포도청의 수장인 포도대장도 그자의 수족이고 말이야. 이 정도면 답이 나오지 않아?”
“그렇군요.”
설명을 들은 칠현도 김자점 쪽으로 무게가 실리는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얄팍한 수를 쓰다니.”
“지금이라도 함정이 있었다는 걸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칠현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무 소용없을 거야.”
“잘하면 상황을 다시 역전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김자점이 금방 거짓이 드러날 정도로 허투루 처리했겠어.”
“하지만 증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도현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증인이라…… 뭐 일반적인 경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이번에는 아니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전하께서 진실이 밝혀지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야.”
“예?”
“생각해 봐. 이게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또다시 정국이 혼란 속에 빠져들며 조태징의 처벌과 함께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올 텐데, 그러고 싶으시겠어? 아마 아바마마도 어느 정도는 김자점이 술수를 부렸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실 거야. 그런데도 모르는 척 눈을 감으시는 걸 보면 의도를 짐작할 수 있잖아.”
“끄으응. 그렇군요.”
“결국 형수님과 조카들만이 억울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지.”
마지막 말을 하며 도현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의 짐작대로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있던 인조는 정국 주도권을 틀어쥐는 선에서 더 이상 문제를 확대하지 않았고, 김자점도 조금 더 욕심을 낼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 상대가 깊이 파고들면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 슬쩍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척화파 역시 문제가 커지면 경우에 따라 자칫 사화士禍(조선 시대에 신료 및 선비들이 반대파에 몰려 화를 입는 사건)로 번질 수도 있었기에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조태징 문제를 덮기로 했다.
그렇게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지자 포도청에 잡혀 있던 선비들은 곤장 서른 대라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났다. 그리고 송시열을 비롯해 상소를 올리기 위해 상경했던 선비들도 얼마 있지 않아 한양을 떠나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번 사건은 완전히 마무리가 됐다.
위기를 무사히 넘긴 숙원 조씨는 이번 일의 일등공신인 김자점을 처소로 불러 크게 치하했다.
“그런 묘수를 쓰다니 정말 감탄했어요.”
“다 마마님께서 어려운 결단을 내려 주신 덕분입니다.”
“아니에요. 병판께서 나서 주지 않았다면 아버님께서 사직을 했다고 해도 일을 수습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과찬이십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김자점을 보며 숙원 조씨는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느낀 건데, 병판과 내가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띄워 주는 건지 김자점은 살짝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듣자하니 병판의 손자 중에 영특한 아이가 하나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김자점은 약간 당황해하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이야기를 했다.
“네. 세룡世龍이라고, 제법 총명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름이 세룡이었군요. 그 아이와 우리 효명孝明을 짝지어 줬으면 좋겠는데, 병판의 생각은 어떤가요?”
“옹주 마마를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담이 큰 김자점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앞에 있는 숙원 조씨를 쳐다봤다.
“지금도 관계가 나쁘지는 않지만 앞으로 큰일을 함께해 나가려면 서로 진짜 가족이 되는 게 좋지 않겠어요.”
혼인 동맹을 제안하는 거였다.
아직 어린 자식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희생시키는 것 같아 비정하게 느껴졌지만, 솔직히 혼인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다.
혼인을 해서 가족이 되면 서로 단단한 끈으로 연결되는 거니 지금보다 관계가 끈끈해지고 믿을 수 있었다.
김자점 입장에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 진짜로 혼인이 성사된다면, 국왕인 인조와 사돈을 맺는 거니까 권력이 더 커질 거고 나중에는 효명 옹주의 오빠인 숭선군을 왕으로 올려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다.
숙원 조씨도 도현의 등장과 이번 조태징의 비리 사건으로 흔들리는 권력을 단단히 다지고 김자점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 것이다.
또 아무리 인조가 아끼는 여식이라고 하지만 상황에 따라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 옹주의 신분이었는데, 김자점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지게 되면 남은 인생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테니 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김자점의 손자와 효명 옹주의 혼인은 양쪽한테 다 이득이 되는 거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으로 계산을 다 끝낸 김자점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주상 전하께서도 허락하신 겁니까?”
“아직 말씀을 드리지 않았지만 명망 높은 집안인 병판과 사돈을 맺는다면 흔쾌히 수락하실 거예요.”
숙원 조씨의 말에 김자점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부족하지만 제 손자를 사위로 삼으시겠다니, 집안의 영광입니다.”
“그럼 승낙하시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숙원 조씨는 방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앞으로 잘해 봐요, 사돈.”
“네.”
사돈이라는 말에 김자점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숙였다.
숙원 조씨는 미적거리는 것 없이 그날 저녁 바로 처소를 찾아온 인조에게 혼인 이야기를 꺼냈다.
“혼인을 시키자고?”
“네, 전하.”
마시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은 인조는 그다지 탐탁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이도 아직 어린데 벌써 혼인을 시키는 건 너무 빠르지 않나?”
“아니옵니다. 일반 사대부 집안에서도 어린 신랑 신부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도…….”
인조가 말끝을 흐리며 내켜 하지 않자 숙원 조씨는 주전자를 들어 빈 잔에 술을 따르면서 이야기를 했다.
“병조판서라면 조상 대대로 벼슬을 지내 왔고 바로 윗대는 강원도 관찰사까지 지낸 아주 뼈대 있는 집안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정도라면 우리 효명의 시댁으로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옵니다.”
“그건 그래도 나이가 너무 어리잖소.”
예쁘게 여기는 자식인 효명 옹주를 일찍 시집보내기 싫었던 인조는 여전히 싫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걸 눈치챈 숙원 조씨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효명이 애교를 못 보게 되실까 봐 그러시는 거지요?”
“흠흠.”
“시집을 보내더라도 사위와 함께 자주 대궐에 들어와 인사를 하라면 되잖습니까.”
“출가외인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될까?”
“전하께서 찾으시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흐음.”
인조가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숙원 조씨는 쇄기를 박는 말을 했다.
“그리고 저 흉측한 청국 오랑캐들이 매년 공녀를 요구하고 있는데, 행여나 우리 옹주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일반 백성들의 딸이 공녀라는 명목으로 청나라에 수없이 끌려갈 때는 못 본 척 넘어갔던 인조였지만, 아끼는 효명 옹주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하자 정색을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건 절대 안 돼!”
“그러니까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기 전에 효명을 시집보내 버리면 청국도 어쩌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 고심을 하던 인조는 다행히 아직은 그런 요구가 없었지만,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실제로 효종 일 년 청나라 황족인 구왕이 조선에 공주를 자신의 배필로 달라고 요구하면서 논의 끝에 종친인 금림군 개윤의 딸을 양녀로 받아들여 의순 공주로 봉해 보낸 치욕적인 일이 있었다.
기대와 달리 용모가 아름답지 않자 구왕은 의순 공주를 구박하며 방치했고 얼마 후 역모에 휩쓸려 구왕이 몰락하자, 황제의 지시에 따라 부하 장수에 넘겨지는 아픔을 겪었다.
나중에 금림군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런 사실을 알고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황제에게 간청해 겨우 귀국했지만, 죽을 때까지 홀로 불행한 삶을 보내야 했다.
“좋아. 혼인을 진행하도록 해.”
“역시 전하밖에 없습니다.”
품에 안긴 숙원 조씨가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자 인조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냐?”
“예.”
한편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에서 일하는 궁녀를 통해 도현의 귀에 들어갔다.
“김자점의 손자와 효명 옹주를 혼인시킨다고?”
“예. 숙원 조씨가 주상 전하를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전 역사에서 있었던 일이라 크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현 상황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밀착되는 건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서로 사돈을 맺고 사이좋게 조선을 말아 먹겠다 이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도현을 보며 칠현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혼인을 못 하도록 막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바마마께서 딸을 시집보내겠다는데 무슨 수로 그걸 막아.”
“그건 그렇지만…….”
“섣불리 나섰다가는 지난번처럼 역풍을 맞게 될지도 몰라.”
“……예.”
칠현은 숙원 조씨와 김자점이 밀착되는 걸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내심 찝찝했지만 도현의 말에 관심을 끊었다.
“이 문제는 일단 지켜만 보기로 하고, 지난번에 내가 지시한 건 어떻게 됐어?”
“내일 밤에 명월관이라는 기생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 놨습니다.”
중요한 일인지 도현은 눈을 반짝이고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비밀은 철저히 유지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서 지부장과 흑치영의 도움을 받아서 꼬리가 생기지 않도록 확실히 처리를 해.”
“네.”
다른 때보다 더 보안에 신경을 쓰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도 덩달아 긴장을 하며 대답했다.
다음 날 밤 저녁상을 물린 도현은 평상시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니, 잠자리에 든 척만 했는데 눈에 확 띄는 세자복 대신 일반 사대부들이 입는 한복에 두루마리를 걸치고 머리에 갓까지 쓴 도현은 마찬가지로 변복을 한 칠현과 함께 처소를 몰래 빠져나왔다.
“여깁니다, 저하.”
낮게 외치는 목소리를 따라 재빨리 뛰어가자 역시 붉은색 위사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박태철과 김덕술이 어두운 담벼락 아래 서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저희도 이제 막 도착한 참입니다.”
도현은 혹시 누가 나가는 기척을 알아차리지 않았는지 동궁전 쪽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후문 쪽에 미리 손을 써 놨습니다. 가시지요.”
박태철이 앞장을 서고 김덕술이 뒤를 지키는 모양으로 일행은 재빨리 어둠 속에 숨어 이동했다.
마당에 피워 놓은 횃불에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담벼락에 딱 붙어 한참을 가니, 궁문 경비를 맡은 위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서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건지 도현이 궁금하단 얼굴로 쳐다보자, 박태철이 벌떡 일어나서 위사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냥 태연한 표정으로 뒤를 따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김덕술이 조용히 속닥이는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어. 밤늦게 고생들 하는군.”
박태철이 밝은 목소리로 알은척을 하자 처음엔 누군지 몰라 경계하던 위사들도 얼굴을 알아보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나으리 아니십니까?”
“나으리는 무슨, 다 같은 위사 아닌가. 말을 낮추게나.”
박태철이 친근한 태도로 그리 말하자 위사들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에이, 그래도 두 사람은 세자 전하께서 자주 부르시니 어디 우리들하고 같은가. 혹시 나중에 더 출세할지도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미리미리 윗사람처럼 모시는 연습을 해 둬야지.”
말은 그리해도 위사들의 표정에 질투심이나 시샘 같은 감정은 드러나지 않아서 원래 친한 사이끼리 농담하는 거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뒤에 같이 있는 청년들은 누군가? 낯선 얼굴인데…….”
“아, 미처 소개를 못 했군. 내 조카들일세. 우리 누님들이 시집간 이후로 각각 아들을 하나씩 낳았는데, 나이만 비슷하지 얼굴은 형부를 꼭 빼닮아서 서로 완전 딴판이라네.”
“정말 그렇군. 하기야 사촌끼리는 안 닮은 경우도 흔하지.”
호기심 서린 눈빛으로 위사들이 살펴보자, 칠현은 혼자 괜히 찔끔해서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도현은 당당하게 입가에 웃음까지 띠면서 마주 보았다.
“허, 고놈 참 맹랑할세. 아, 그럼 아까 낮에 말했던 아이들이 바로 이 녀석들이로군.”
“그래. 곧 있으면 집안에 큰 제사가 있는데, 누님들 말을 전하러 심부름 왔다가 마침 오랜만에 얼굴을 봤고 해서 이야기 좀 하다가 이리 늦었지 뭔가. 지금쯤 집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저런, 집에 걱정을 끼치면 안 되지.”
“이미 밤이 늦었으니 집까지 데려다 줘야 하긴 할 텐데, 정문으로 나가기가 좀 그래서 말이야. 편의 좀 봐줄 수 있겠지?”
“그럼. 자네한테 신세 진 것도 많으니, 그 정도쯤이야.”
“고맙네.”
박태철은 위사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미안한 얼굴로 덧붙였다.
“내가 궁에서 일하다 보니 집안 식구들하고 연락해야 할 일이 있어도 자주 나가지 못해 불편했는데, 마침 이 녀석들도 다 컸고 하니 가끔씩 나한테 전할 말을 들고 찾아올 걸세. 알아서 내 숙소로 찾아올 테니, 다음에도 얼굴 보면 통과시켜 주게나.”
“뭐, 자네 조카들이라고 하니 신분은 믿을 만하겠지. 좋아.”
설마하니 박태철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위사들은 웃는 낯으로 흔쾌히 허락했다.
“자네들한테 피해 안 가도록 이른 새벽이나 밤에만 오라고 단단히 일러 놓겠네.”
“그렇게 해 주면 우리야 고맙지. 윗분들한테 들키면 괜히 잔소리나 들을 테니 말이야.”
위사들은 껄껄 웃으면서 일행이 지나갈 수 있도록 조용히 문을 살짝 열어 주었다.
생각 외로 손쉽게 궁궐을 빠져나온 도현은 히죽거리며 박태철에게 말했다.
“조카와 삼촌이라? 용케 그런 핑계거리를 생각해 냈군.”
“죄송합니다, 저하.”
“뭐라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조금 번거롭지 않나? 그냥 돈 몇 푼 쥐여 주고 입을 다물게 하는 편이 더 빠를 텐데.”
“그리하면 저하의 정체에 대해 저들이 궁금해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김덕술이 저하의 명을 따르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 소문이 퍼지면 금방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이 새어 나갈 염려도 없고, 또 앞으로도 종종 저하께서 바깥에 나가실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박태철에 이어 김덕술도 거들 듯이 말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궁궐 곳곳에 숙원 조씨의 눈과 귀가 있으니 조심하면 할수록 좋지.”
그러고 나서 일행은 서로 비밀을 공유하듯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미 잘 때가 한참 넘은 시각이라 주위에는 불 꺼진 민가가 대부분이었고, 인적 또한 끊긴 지 오래라 멀리서 순라꾼들이 순찰을 돌면서 딱딱 치는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이 매우 조용했다.
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밝은 달을 등불로 삼아, 길을 아는 박태철과 김덕술의 등만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 붉고 푸른 등을 환하게 밝힌 저택이 나타났다.
격조 높은 사대부의 집이라도 되는 양 기와를 올린 지붕 끝자락은 여인의 버선발처럼 둥글게 위로 향해 있고, 불을 환하게 밝힌 정원엔 손질이 잘된 정원수와 꽃이 만발했으며 정자 주위로는 연꽃이 위로 둥둥 떠서 넓게 잎을 펼치고 있는 작은 호수까지 만들어 놓았다.
방금 전 지나쳐 온 민가는 모두가 자는 듯 찍소리 하나 나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는데, 이곳은 마치 별세상인 것처럼 밝고 화려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행이 저택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가마가 한 대 도착했는데, 멋들어지게 수염을 기른 젊은 양반 하나가 푸른 장포를 펄럭거리며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머리를 틀어 올린 기생이 뛰쳐나와 그에게 안기는 모습까지 보였다.
“저 아가씨는 마치 선녀같이 예쁘네요.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인가 봅니다.”
“아서라. 너한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니까.”
“칫. 보고 감탄하는 것도 안 됩니까요?”
궁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궁녀들 중에서도 제법 얼굴이 고운 아이가 있긴 하지만, 비빈들 앞에서 화려하게 치장할 수는 없으니 수수한 옷차림에 미모가 묻히는 반면, 한껏 분을 찍어 바르고 입술을 빨갛게 칠한 기생의 모습을 보니 설레는 모양이라 도현은 피식 웃어넘겼다.
“하루 종일 여기서 서 있을 게냐? 얼른 들어가자.”
도현이 박태철과 김덕술을 데리고 저택 문간을 넘자 반들반들 윤이 흐르는 백색 저고리에 옥빛 노리개를 차고, 자수를 놓은 풍성한 치맛자락을 한 손에 말아 쥔 여자가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다소곳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아까 언뜻 보았던 기생보다는 나이가 많은 듯싶었으나 여염집 아녀자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피부가 하얗고 움직이는 모양새도 조용조용한 것이 마치 교양 있는 양반집 부인 같았다.
하지만 살짝 미소를 띠거나 눈웃음을 칠 때마다 언뜻언뜻 흘러나오는 색기가 요염해, 과연 이런 쪽 장사를 하는 여인네다운 기색이 엿보였다.
“남촌에서 오신 선비님들이십니까?”
“그러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일행께서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셔요.”
“그래?”
“네. 이제 다 오셨으니 주안상을 마련해 올릴까요?”
“아니, 됐네. 먼저 할 얘기가 있으니 나중에 필요하면 부르지.”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여주인은 사락사락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일행을 저택 안쪽으로 안내했다.
바깥채 쪽에는 누군가가 연회를 벌이고 있기라도 하는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호쾌하게 웃어 젖히는 사내와 아양을 떠는 여자의 목소리가 섞여 나와 소란스러웠지만, 여주인을 따라 점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소음은 약해지고 정원수의 가지가 바람에 스쳐 쏴아쏴아 흔들리는 소리만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원하신 대로 양쪽 방을 다 비워 놓았으니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네.”
“별말씀을요.”
등불을 마루 위에 내려놓은 여주인이 얘기가 끝나면 다시 불러 달라며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김덕술이 불이 켜져 있는 방문을 밀어젖혔다.
안에는 곰처럼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혼자 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는데, 기다리는 동안 목이나 축이라며 갖다 놓은 찻잔과 주전자에도 전혀 손을 댄 흔적이 없어 사내의 우직한 성품을 대변해 주었다.
이미 사람이 오는 기척을 알아차리고 있었는지 놀란 표정 하나 없이 박태철과 김덕술을 차례대로 쳐다본 사내는, 이내 도현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찬찬히 일어나 절을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자 저하. 소인 이관이라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