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 꼭 한 번 잡숴 봐(1)
해운 바닥에서 국적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 그저 돈을 따라 국경 없이 온 세계를 싸돌아다닌다고 할까?
이젠 절친이 된 비아 형제. 그들이 이끄는 스파이더그룹은 이탈리아 사람이 모나코에 본사를 뒀지만, 계열사들은 미국에 놓고 뉴욕증시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국적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참 애매한 회사다.
이제 곧 도착할 러쉬쉬핑도 마찬가지다.
중국인인 게디 리 회장이 캐나다에서 사업을 시작해 캐나다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본사는 홍콩에 있고, 뉴욕증시에 상장했다. 100척이 넘는 컨테이너선 상당수는 카리브해 조세피난처에 둔 SPC들이 보유한 것으로 돼 있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돈 많은 사업가들한테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건 그저 마케팅 수단인가 싶기도 하고……. 이 사람들 돈을 뽑아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서적 교감? 경제적 이익? 마초미?
이런저런 고민 와중에 손님 데리러 김해공항으로 달려간 의전용 럭셔리 세단이 회사에 도착했다.
영접은 김태우 본부장이 맡았다. 상대가 이사급인 만큼 회장인 아버지가 나서기엔 격이 안 맞았다. 의전은 이렇게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 별 것 아닌 듯하지만, 몇백억짜리 계약이 왔다갔다하기도 한다. 러쉬쉬핑의 국적이 모호해서 국민의례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유일조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유일조선에서 영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태우 부사장입니다.”
“이리 성대하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러쉬쉬핑에서 신조선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닐 퍼트입니다. 제 옆에 분은 선박관리본부장을 맡은 알렉스 라이프슨입니다.”
“반갑습니다. 유일조선에서 잡무를 담당하고 있는 유연성 이사입니다.”
누가 봐도 미국인들 싫어할 것처럼 보이는 캐나다인처럼 생겼다. 뭐랄까, 대자연의 위로를 받는 평온한 인상이지만, 아이스하키에서 지면 광분할 것 같은 느낌이 느껴진다고 할까?
묵직한 악수를 나누고 나서 손님맞이 기본 코스인 조선소 견학에 들어갔다.
내가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견학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육상건조만 전문으로 하는 적당한 크기의 조선소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주 달라졌다.
확 넓어진 부지에서는 쉴 새 없이 선박블록들이 트레일러에 올라 이동하고 있고, 골리앗 크레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안벽 바깥에선 초대형 크레인들이 플로팅 도크와 바차타를 추고 있고, 우리의 자랑인 초대형 도크들에서는 용접 소리가 요란히 울려 퍼졌다.
“유일조선이 이 어려운 시기에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고 했는데, 실제로 목격하니 빅3가 부럽지 않을 정도군요.”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우리 회사를 포함시켜 빅4라고 부른답니다.”
“오호. 그럴 만도 하겠군요. 유일조선의 지난해 연말에 있었던 빅 이벤트의 주인공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하하. 지난해 수주 1위라는 성적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죠.”
“훌륭한 시설에서 우수한 품질의 선박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러쉬쉬핑은 유일조선이 제시하는 여러 솔루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깊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그에 관한 얘기는 야드를 충분히 둘러보시고 나누는 거로 하겠습니다.”
성질 급한 라이프슨과 페이스 조절하는 김 본부장의 대화가 한참 이어졌다.
김 본부장은 2014년까지 일감이 꽉 차 있다느니, 에코십에 관심을 보이는 선주들이 많아 골치가 아프다느니, 운운하며 상대방의 조바심을 이끌어냈다. 라이프슨도 장단을 맞추며 흥분하는 몸짓으로 김 본부장을 설레게 했다.
안 친한 사람들이 서로 칭찬하며 물고 빨아주는 저 어색한 모습. 이 동네 문법으로는 대충 막회집 가서 아나고에 소주 까면서 호형호제해야 하는데, 서로 격식들 차리느라 고생들 많네.
나도 옆에서 조용히 있는 닐 퍼트 이 사람 빨아주면서 비즈니스 대화나 나눠야겠다.
“닐 이사님. 아부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 유일조선의 롤모델이 러쉬쉬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가 들어도 아부처럼 들립니다.”
“아부가 아닙니다. 70년대 조그마한 선주사였던 러쉬쉬핑이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컨테이너선주사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러쉬쉬핑의 성장 비결을 잘 연구해서 우리도 세계 제일의 조선사가 될 생각입니다.”
“잡무 담당 이사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성공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농담으로 잡무 담당이라고 했더니, 진짜로 믿는 이 순박한 놈을 봤나. 근데 농담이 딱히 농담이 아닌 것이 좀 서글프기도 하네. 오늘 이 사람들 접대하느라 시간 뺏겼으니 잡일이 얼마나 쌓여있을라나.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까 정말 아부인 것 같군요.”
아 나. 사람이 살다 보면 사색에 빠질 수도 있는 거지. 성질 한 번 되게 급하네.
“러쉬쉬핑의 성공비결은 잠꼬대로 할 정도로 머리에 박혀 있습니다. 남들이 단기수익에 심취해 스팟시장에서 선박을 굴릴 때, 러쉬쉬핑은 고정운임으로 장기용선계약에 집중하지 않았습니까? 해운업처럼 변동성이 심한 분야에서 안정성을 추구하는 모습, 참 감명 깊었습니다.”
“우리 회사에 대해 알아보긴 한 모양이네요. 우리의 방문에 맞춰 벼락치기 공부한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시군요. 러쉬쉬핑이 1위로 올라선 것에 대해 직원들끼리 토론회를 열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흐음. 유일조선이 우리에 대해 그렇게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괜한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그래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근데 토론회를 열 정도였나? 당연히 구라지. 그냥 약 좀 팔아본 건데 안 믿길래, 농약 한 번 쳐 봤어. 하여간 예리한 녀석일세.
이번엔 예리한 녀석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유일조선이 대형선 건조를 위해 대규모 설비투자에 나선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투자 결정 이후에 금융위기가 터졌는데도, 계속 밀어붙인 이유가 있습니까? 뭐 결과적으로 좋은 결정이었지만, 당시에는 판단이 달랐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금융위기, 그거 참 아찔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결정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닌 이상 진행하는 것이 맞죠. 여러 가지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는데, 최악의 상황에서도 문제가 없다고 나왔습니다.”
“오호. 그 최악의 상황이 금융위기에 비견할 만한 겁니까?”
“금융위기보다 더 최악으로 상정했었죠. 러쉬쉬핑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리스크 관리에 강점이 있습니다. 잘 나가는 회사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금융위기보다 더 최악인 상황까지 가정했다라……. 대단하십니다. 그 상황에서도 수익창출이 가능하다는 것도 대단한데, 그 정도로 리스크 관리를 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군요.”
말만 하지 말고 박수를 쳐.
기업 운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스크 관리라고 본다. 불확실성을 얼마나 배제하느냐가 관건이지. 그걸 잘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회귀하는 것이다. 후후.
잠깐의 대화로 틱틱거리던 닐 퍼트가 온화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약발이 먹히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약에 취하게 만들어줄 때가 됐어.
“혹시 최악의 상황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본 이유에 대해서는 안 궁금하십니까?”
“어떻게 질문해야 잘 물어봤다고 소문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고민을 해소시켜 드려야겠네요. 우리의 리스크 해지는 기술력에 있습니다.”
“에코십을 얘기하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에코십의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기만 한다면 금융위기 할애비가 와도 두렵지 않을 자신이 있었죠. 에코십도 에코십이지만, LNG추진선도 가히 혁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LNG추진선……. 벌써부터 대화가 본론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어디 시장통에 가서 세꼬시에 대포 한 잔 끼얹으면서 얘기를 나누면 딱 좋겠는데 말이죠.”
“스시가 참 당기긴 하지만, 오늘은 캐나다노로 만족하겠습니다.”
“캐나다노요?”
“우리 캐나디언이 마시는 커피를 감히 아메리카노라고 할 수 없죠. 그 건방진 사우스 파크 놈들, 비버나 데려가라지.”
그래, 러쉬와 비버를 가진 캐나다인이여. 커피나 마시러 가자.
회의실에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모였다. 러쉬쉬핑 직원들에 비해 살짝 부족한 갑빠는 정한호 상무의 참석으로 서로 동률이 됐다. 이제 꿀릴 것 하나도 없으니, 약장사 제대로 해 보자고.
러쉬쉬핑의 닐 퍼트가 먼저 운을 뗐다. 김 본부장은 다 받아낼 의지를 내비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컨테이너선 시장에서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 바람은 머스트라인에서 출발했지만, 바람을 일으키는 힘은 유일조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힘이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하하. 아주 잘 오셨습니다. 우리가 아무한테나 바람을 불어넣어 주지 않지만, 세계 1위 컨테이너선주사인 러쉬쉬핑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우리는 유일조선의 솔루션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메가 컨테이너선, 에코십, LNG추진선 등등.”
“에코십은 그 위력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에코십을 확보한 스파이더그룹이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자료를 내고 있지요. 그건 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지요?”
“스파이더그룹의 유별남은 이 업계의 화젯거리이죠.”
내 절친 비아형제. 세계 최초의 에코십이라는 LR탱커 2척으로 아주 뽕을 뽑는 중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용선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면서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다. 내년 초부터 84척짜리가 순차적으로 인도되니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아주 잘 하는 짓이야. 그 덕에 우리 회사로 에코십 발주하겠다는 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있다니까. 일감 꽉 찼으니까 내후년에나 보자고 돌려보내기 바쁠 정도야.
김 본부장이 여세를 몰아 마이크를 강하게 쥐었다.
“메가 컨테이너선! 해운과 조선업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지요. 2만TEU급으로도 경제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죠. 2012년 말부터 인도할 예정인데, 그 배가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면 이 바닥 문법은 달라질 것입니다. 하하.”
“저희도 머스트라인의 움직임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 결국엔 메가 컨테이너선의 확보 경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누가 한 번에 더 많은 물량을 실어나느냐의 싸움이 될 텐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한 걸음이 LNG추진선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에코십이 될 것입니다. IMO의 환경규제가 우리를 옥죄고 있습니다. 미지의 영역에 먼저 발을 딛는 자가 승자가 되는 법이지요. 우리는 그 솔루션으로 LNG추진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민이 그 지점에 있습니다.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는 고민 말이죠. 다만, LNG추진선이 상업적으로도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하하. 얼마 전에 도시상선에서 LNG추진 LNG선을 발주한 사실이 있습니다.”
“LNG선과 일반 상선은 의미가 다르죠.”
이거 뭐 대화가 예상대로 흘러가네. 이쯤에서 정 전무가 나서서 시원하게 약을 팔아주면 딱일 텐데……. 역시나.
“LNG추진선 개발을 총괄한 정한호 부사장이 친절하게 설명해 줄 것입니다. 정 전무, 마이크를 잡아주시죠.”
“허허.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무도인 느낌이 물씬 나는 정 전무가 마이크를 잡자 러쉬쉬핑 직원들이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역시 만두귀의 위력은 전 세계 두루 통하기 마련이다.
“LNG추진선, 사실은 이중연료 추진선이죠. 오염물질 배출이 가장 심한 구동을 LNG로 대체하는 방식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제가 무엇이냐? 컨테이너선일 경우 적재량 감소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저희가 확인한 정보로는 최대 5000TEU까지 적재량이 줄어드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5000TEU요? 허허허. 누가 그런 그릇된 정보를 전달했습니까? 당장 징계를 내려야겠습니다.”
“그럼요?”
“500TEU! 고작 500TEU 밖에 줄어들지 않습니다. 엄청난 연비와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환경지킴이! 그런데도 적재용량 차이는 기존 컨테이너선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허허.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따, 이 양반 초반부터 약물 거하게 빠셨네. 머리가 지끈거리느니 죽게 생겼다느니 하면서 온갖 엄살 다 부리더니 이리 허세를 부려? 유일조선이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직원답다. 난 캐나다노나 마시고 있으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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