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68)
68화 – 기다리고 기다리던 진짜 위기 (3)
통영에 자리한 선호조선에 고함소리가 가득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환율이 1000원 넘을 일이 없다고 얘기해 놓고 이제 와서 이럴 줄 몰랐다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사장님, 사정은 딱하지만, 저희는 계약서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달에 만기 되는 건 계약환율 945원으로-
“이 새끼야! 지금 장난해? 손해 보면 책임지겠다고 해놓고! 뭐? 계약서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사장님, 제가 책임지겠다고 한 건 그만큼 확실하다는 문학적 표현이지요. 제가 뭐라고 책임을 지겠습니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 끊어. 계약이고 나발이고 난 못 줘. 알아서 해!”
-아휴,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그런다고 얼렁뚱땅 넘어갈 문제가 아니에요.
꽝.
선호조선 최 사장은 수화기를 내던졌다.
2년 전에 체결한 200만 달러짜리 키코 계약이 만기를 앞두고 독 묻은 사과로 변해 버렸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은행 놈들이 저리 안면 몰수하고 나오니, 폭발 직전의 마그마 그 자체였다.
“박 상무!”
“네, 사장님.”
“이거 어떻게 해야 해?”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이번 건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줄줄이 만기 날짜 다가오는데, 전부 다-”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이번 건만 해도 400만 달러야! 400만 달러를 200원씩 손해 보면서 팔아야 한다고!”
“죄송합니다.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나마 환율이 올랐으니까 선수금 들어오는 걸로 손해를 벌충할 수 있습니다.”
“벌충? 지금 해운사들 어떤지 몰라? 자고 일어나면 스팟 운임 떨어지는 거 안 보여? 하아. 미치겠다.”
최 사장은 화를 낼 기운조차 잃어버렸다. 직원들한테 분풀이해 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올해는 신조선 시장 진출 5년 만에 매출 5000억 원 돌파가 확정된 희망찬 한 해였다. 영업이익도 작년보다 10% 이상 좋아졌고, 대형선 건조를 위한 1조 원대 대규모 투자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6월에 BDI가 1만2000포인트에 근접했다가 하락세로 돌아섰을 때만 해도 너무 뜨거워 잠시 소나기가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9월로 접어든 지금 BDI는 4000대까지 떨어졌다. 해운 시황이 빙하기에 들어서면서 회사로 찾아오는 선주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환율도 개판이 되면서 절대 손해 볼 일이 없을 것이란 키코가 말 그대로 폭탄이 돼 버렸다.
최 사장은 환 헤지도 안 하고 깡으로 버티는 경쟁사 유일조선을 비웃었던 것이 얼마나 비루한 짓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때 유일조선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물어나 봤다면…….
수주잔량이 93척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25억 달러에 달하지만, 그게 해결책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미 여기저기서 전화와 이메일이 답지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공정 지연되는 걸 트집 잡고 있습니다. 선수금 안 돌려주면 바로 런던해사중재로 보내버리겠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당장 팀 꾸려서 출장 보내. 가서 죽이든 살리든 무조건 막아!”
꽝.
“뭐? 인도시기를 1년 연장해 달라 했다고?”
“상황이 급변해서 배를 받기 어렵답니다. 1년 뒤에 무조건 인수할 테니 관리 좀 잘 해달라고 합니다.”
“선수금을 40% 밖에 못 받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60%는 인수할 때 한꺼번에 지불하겠답니다.”
꽝.
“아니, 배를 다 만들었는데, 왜 안 가져가는 거야?”
“일단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고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아니, 진짜 다들 왜 이래? 우리는 땅 파서 먹고 사나! 이러다간 다음 작업까지 줄줄이 밀린다고!”
꽝.
하루에도 몇 번씩 책상을 내리쳤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선호조선은 매출 5064억 원에, 영업이익 412억 원을 기록했지만, 환차손과 선물거래손실로 560억 원이 털리며 적자로 전환됐다. 희망찬 해인 줄 알았던 2008년이 나이트메어였을 줄이야.
안타깝게도 그것이 시작이었다.
키코 손실은 매년 늘어났고, 잇따른 계약취소와 연기 등으로 매출은 뚝뚝 떨어졌다. 신규 수주는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은행에서 보증을 서주지 않아 계약이 무산됐다.
고정비가 높은 조선업 특성상 매출 감소는 엄청난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를 악물며 버티던 선호조선은 결국 3년 뒤에 매출보다 많은 2000억 원에 달하는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법정관리 신청서에 도장을 찍었다.
채권단이 된 은행들은 청산가치가 회생가치보다 높게 평가된 것을 근거로 청산을 결정하고 선호조선의 전부를 뜯어 팔기 시작했다.
유일조선과 같은 해에 신조선 시장에 진출했던 선호조선. 유일조선과 자웅을 겨루던 세계 14위 조선사는 그렇게 통영 앞바다에 수장됐다.
***
유일조선 유홍철 회장은 아침마다 배달된 신문을 쳐다보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지 몰랐다.
미국 4대 투자은행이라는 리먼브러더스가 결국 파산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로 매일 전쟁통을 겪는 기분이었다.
티비 틀 때마다 광고를 내보내던 그 유명한 AIG가 무려 850억 달러라는 막대한 구제금융을 받는다는 얘기에는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다.
“여보, 우리는 괜찮은 거지?”
“우리 아들이 신기가 있나 봐. 이런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았나 싶어. 연성이 덕분에 우리는 아무 피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셔.”
강서연 전무의 든든한 말에도 유 회장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여러 연구소에서 긴급하게 발표한 보고서들은 비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올해보다 내년이, 내년보다 내후년이 더 힘들 것이란 전망들.
“키코야 우리가 가입을 안 했으니까 넘겼다고 해도, 지금 시황 자체가 문제라 이 말이야. 이거 봐. 작년 구주항로 물동량이 13%나 증가했는데, 올해는 1%대 증가에 그칠 것이라잖아. 내년에도 그 정도 수준이고. 배는 올해, 내년 쏟아져 나올 텐데…….”
“우리는 그래도 꽉 차진 않았어도 2012년까지 일감을 확보해 놨잖수. 수주야 급감하겠지만, 기존 계약들 관리 잘 하면서 버티면 될 것 같아.”
“머스트 그놈들 계약해지 못 하게 잘 붙들어 놔야 해. 아무래도 감이 안 좋아. 살짝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야.”
“아휴, 걱정 좀 그만 하라니까 그러네. 김 본부장 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계약서 뜯어고친 것이잖아? 우리 잘못 아닌 이상에야 계약해지 못 하니까 걱정 말어. 어째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애처럼 그러니. 쯧쯧.”
“하늘 같은 남편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하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쓸데없는 걱정할 시간에 현장 나가서 직원들 일 잘 하고 있는 지나 보고 와. 저 배 좀 봐. 아주 하루 종일 앉아만 있으니까 배가 안 나오고 배겨?”
유 회장은 30년 넘게 지속 된 아내의 구박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걱정했던 대로 심각한 위기였다면 저런 구박은 안 나왔을 테니까.
배꼽까지 끌어올린 바지를 보면서 배가 나오긴 나왔다는 자각이 깃들 시점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저 벨소리인데도 긴급하게 들리는 느낌이란.
“아이고, 임 회장님! 무슨 일이길래 이 시간에 전화야?”
-형님, 저 좀 살려주십쇼. 진짜 죽겠습니다.
“요새 힘들다는 소문은 듣긴 했네만…….”
-형님. 은행장들 좀 알잖아요? 얘기 좀 잘 해 줘요. 진짜 이번 위기만 넘기면 탄탄대론데, 미쳐버리겠어요.
“아니, 그러니까 내실 좀 다지라고 했잖아. 회사를 그렇게 키워놓고 이제 와서 수습하려고 하면 그게 되겠어? 그래서 얼마나 필요한 거야?”
-2000억이요. 아니, 우선 급한 대로 120억만 있으면 되는데……. 직원들 월급은 줘야 할 것 아니요. 에휴. 아니, 은행 이놈들은 대출 걱정 말라더니, 상황이 안 좋아져서 힘들다고 해 버리니…….
“은행 놈들 말만 믿고 사업을 벌이면 되나. 허허.”
-형님. 좀 부탁합니다. 대출만 성사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우리 수주잔량만 30억 불이잖아요. 그것만 처리하면 되는데…….
“알았어. 근데 나라고 뭐 힘이 있나. 일단 전화는 돌려볼 테니까, 수주한 것들이나 잘 마무리할 생각해.”
유 회장은 칠산그룹 임 회장의 다급함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칠산그룹. 칠산해운으로 돈을 번 임 회장은 IMF 때 회사 수집에 나서며 40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그룹으로 키워냈다.
영남에 WBT그룹이 있다면, 호남엔 칠산그룹이 있다고 할 정도로 아주 잘 나갔던 회사였지만, 조선업에 뛰어들면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조선소를 가동하려면 계속 돈을 들이부어야 하는데, 주력사인 칠산해운이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아버렸다.
“누군데 그래요?”
“어, 칠산그룹 임 회장. 위험하다 위험하다 하더니, 돈줄이 막힌 모양이야.”
“거긴 그럴 것 같았어. 내가 봤을 땐 거긴 힘들어. 괜히 도와준답시고 이것저것 알아봐 주다가 구설수에 오르지 말고, 우리 할 일이나 합시다.”
유 회장은 단호하게 잘라내는 아내에게 살짝 서운함을 느꼈다. 조선업 진출을 선언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서 선박 발주해 준 고마운 사람에게 너무 야박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또 속으로 야박한 것 아니니 어쩌니, 그런 생각하지 말고.”
“허허. 아니 뭐…….”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그런 소리도 안 했어. 그렇게 돌려막기를 했는데, 그나마 오래 버틴 거지. 당신 말대로 우리야 위기에서 비켜나 있긴 해도 남들 도와줄 만큼 여유 있는 건 아니니까 괜히 애먼 생각하지 말아요.”
귀신이 들러붙었나. 아주 그냥 찍소리도 못하겠네. 유 회장은 오지랖 부리다 아내한테 잔소리 듣느니 현장이나 돌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서 바지를 치켜 올리는데-
“아유 쫌! 배바지하지 말래두! 영감탱이됐다고 동네방네 소문 다 내고 다녀 아주.”
아들이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잔소리 총량 법칙이 있어서 어떻게든 들어야 할 잔소리는 다 들어야 하니까, 그냥 마음 편히 지내라는 말.
유 회장은 고집스럽게 바지를 추켜 올렸다.
***
-연성아! 터졌어! 터졌다고!
폴더를 여는 순간 미국에서 소리 지르는 동명이가 홀로그램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아휴, 귀 아파라.
“내 고막이 터지겠다 이 자식아.”
-야, 진짜 대박이야. AIG가 구제금융 받는 거 알지? 난 혹시나 AIG도 지급불능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역시 미국이야! 하하.
게거품 물어가며 어머니를 설득해 얻어낸 150억 원이 루보라는 은인을 만나 300억 원으로 뻥튀기됐다. 그렇게 보무도 당당하게 미국으로 넘어간 내 돈은 위기상황에서 꿀을 쪽쪽 빨아가며 개성장했다.
얼마냐고? 미국 정부로부터 엄청난 구제금융을 받은 AIG와 골드만삭스가 토해낸 돈은 자그마치 14억 달러. 미쳤다, 미쳤어.
그래서 얼마냐고? 지금 당장 환전해서 들여오면 1조6000억 원이지만, 환율 고점 찍는 내년 2월에 들여오면 2조 원이야! 미쳤다, 정말 미쳤어.
흥분하지 말자. 저거 내 돈 아니다. 난 그저 우리 회사 1등하는 걸로 만족할래. 저 많은 돈은 1등 미션에 보조수단일 뿐이야. 진정하자.
돈 지랄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부푼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동명아. 그 돈 잘 운용해. 내년에 원화 가치 떨어질 때 데리고 올 테니까.”
-야야. 그게 전부가 아니야. 키코 풋옵션 사들인 거 있잖아? 거기도 꽤 짭짤해.
“그건 삼촌네 회사로 들어오는 거지?”
-응. 마일드자산운용이 위탁하는 거로 해 놨으니까. 환율이 이 상태로 가면 아마 내후년까지 계속 돈 들어올 거야.
“오케이. 그 돈은 바로 우리 회사로 넘기자고. 넌 이제 유일조선 대주주인 검은 머리 외국인이 되는 거야. 그리고 내가 저번에 얘기해 놨던 프랑스 GTT 인수도 슬슬 알아보고.”
-아, 맞다. GTT! 거기 30% 지분 가진 핼먼 말이야. 거기도 지금 투자손실 장난 아니거든. 저번에 안면 텄으니까 이번에 다시 한번 가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볼게.
“아직은 비쌀 때니까 운만 띄워놔. 내년부터는 유럽도 콜록콜록 죽어 나갈 거니까, 그때 제대로 시작하자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회장님. 하하. 이제 우리 연성이 갑부네, 갑부야.”
“너도 보너스 두둑하게 챙겨. 우리 이제 선의로 소고기 사주는 사람이 되자고.”
선의는 삼겹살까지라고? 돈 많으면 투쁠도 선의로 사줄 수 있다고! 후후.
동명이에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적당히 구라 쳐가면서 건네주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아직도 돈 벌 기회가 많으니 계속 강조하면서 세뇌시켜야지.
세상은 넓고 돈 벌 기회는 많다. 암 그렇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