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98)
98화 – 일감은 던져졌다
유일조선 곽호신 부장은 또다시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국을 떠나 덴마크와 독일을 오고 가며 지낸 지 어언 2년. 이제 귀국하나 싶었는데, 더 있으라고? 유연성 이사는 여전하구나 싶으면서도, 좋은 기회를 계속 제공해 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조금 더 있는 것이 낫겠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회사를 위해서나 여기 계속 머무르는 것이 낫겠지?
때마침 맨디젤의 틸 린데만이 술잔 두 개를 들고 찾아왔다.
“미스터 가학! 서로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됩니다.”
“저번에 본사로 작별인사하러 갔는데, 출장이라 자리에 안 계셔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그 아쉬움이 남았는지 이렇게 재회하는군요.”
“본사 찾아왔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중국 출장 중이었지요. 요새 중국의 돌풍이 무섭습니다. 우리 라이선스 생산 업체만 5개 업체나 됩니다.”
“그렇군요. 이번 출장도 중국업체 심사 때문인가요?”
“말도 마십시오. 돌풍만 무서웠습니다. 속내를 살펴보니까, 나 참. 라이선스를 주긴 했는데, 이거 생산을 하게 하는 것이 맞는지……. 형편없이 준비해 놓고 우리 제품을 생산하겠다고 하니, 기가 막히더군요. 한국업체들만 같으면 흥분할 일도 없죠.”
곽 부장은 린데만의 말이 많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2년 전만 해도 할 말만 하는 전형적인 무뚝뚝 게르만이었는데, 지금은 LA 시절에 눈물 젖은 햄버거를 먹은 그 사람 느낌이 더 강하다.
각오가 더 굳건해졌다. 어렵게 만든 인연을 이렇게까지 발전시켰는데, 조금 더 머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바빠지겠습니다. G타입 엔진을 장착한 첫 선박이 반년 뒤에 인도되면, 이 업계가 뒤집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길 바랄 뿐이죠. 미스터 가학이 그동안 보여준 열정과 헌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국에 가서도 논의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 바라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진짜는 내년이죠. 아마 내년엔 우리의 역작인 LNG추진엔진을 장착한 선박이 반드시 발주될 것입니다. 정말 기대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미스터 가학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죠. 한국에서도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못 들은 척 계속 운을 띄우는데도 정말 못 알아먹고 잘 가란 소리만 하는 린데만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방심한다 싶으면 여지없이 사방이 꽉 막힌 스타일로 돌아오는 것이 천상 독일 사람이다 싶었다.
곽 부장은 결정타를 날리기로 했다.
“미스티 린데만. LNG추진엔진 이후는 무엇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수소를 이용한 연료전지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기술적인 문제도 있으니 당분간은 쉽지 않겠죠.”
“가스가 LNG만 있는 건 아니죠.”
린데만이 꽉 막힌 독일놈에서 코리아 패치가 적용된 게르만으로 변신했다. 저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것은 머리가 번쩍였다는 뜻일 테다.
“미스터 가학! 혹시 차기 개발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월급쟁이가 쉴 틈이 어디 있습니까? 개발 끝나면 다음 걸 준비해야죠. 우리 같은 엔지니어들의 숙명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렇다면 또 다른 가스추진엔진으로?”
“LPG도 있고, 메탄올, 에탄올, 암모니아 등등. 다양하죠. 그리고 이건 그냥 뜬소문인데, 미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요.”
“미국이요? 금융위기보다 더한 것이 터진단 말입니까?”
“아니요. 그랬다가는 진짜 다 망하죠. 하하. 미국에서 셰일가스 개발 움직임이 거세다고 합니다. 아마 몇 년 안에 세계 1위 산유국이 될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부산물이 엄청나게 나온다고 하는데, 가스를 연료로 해도 경제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믿을지 모르겠다. 유 이사가 구라라고 해도 그럴싸하게 풀어내면 믿는 법이라면서 셰일가스 얘기를 꺼내라고는 했는데……. 미국이 세계 1위 산유국이 된다고? 그걸 누가 믿어?
“으음. 미국 셰일가스 얘기는 저도 듣긴 했습니다. 어떻게 될진 아직 모르겠지만, 그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기도 하죠. 뭐 미국에서 셰일가스 생산량이 대폭 증가한다고 해도 양키들이 그걸 수출할 일은 없겠지만요.”
“미국이 가스 수입을 줄이면 그만큼 LNG 가격이 떨어지겠죠. 그럼 당연히 가스를 연료로 하는 운송체 개발이 속도를 낼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인즉, LNG 말고도 다른 가스를 활용한 엔진 수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대로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길은 지속적인 개발뿐이죠. LPG추진엔진, 에탄올추진엔진 등등. 무궁무진합니다. 하하.”
“그것참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제가 본사로 가는 즉시 검토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까 미스터 가학은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맨디젤이, 우리 미스터 린데만이 손을 내민다면 잡지 않을 수 없죠.”
린데만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곽 부장은 그 손을 잡으면서 생각했다. 40대 첫 생일도 여기서 보내겠구나.
마침 저기 유연성 이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사님! 뭐 하고 오셨길래 이리 홀쭉해지셨습니까? 좀 전까지만 해도 안 그랬던 같은데요.”
“하하. 번뇌와 집착을 내려놓고 왔더니 달리 보이나 봅니다. 아, 이분이 맨디젤 린데만 수석입니까?”
“아, 서로 인사하시죠.”
곽 부장은 유 이사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유 이사가 신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는데, 좀 전에 자신이 했던 얘기라 린데만이 지루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장님, 어째 대화가 막히는 기분입니다. 이 사람 인성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하. 걱정 마시죠. 이미 얘기 잘 끝냈습니다. 아마 저는 여기 1년 정도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이고, 그럼 건배하셔야죠. 안 그래도 제가 우리 부장님 소개팅도 알선 중입니다. 부장님 앞날에 무궁한 발전만 있기를!”
곽 부장은 술잔을 비우고 다짐했다. 일하는 곳이 어디인지가 뭐 중요하랴, 내가 재미있게 일하고, 만족하면 그만이지. 빵쪼가리도 먹다 보니까 익숙해지더라 뭐.
***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것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이래 봬도 꽤나 과묵한 사람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죽고 나서 다시 살아나 보니까 언젠가부터 쉴 새 없이 떠들며 입가에 거품 무는 사람이 됐어.
참, 먹고 살기 힘들어. 이번 생은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가 나를 이렇게 바꿔놓을 줄이야. 그래서 난! 계속 떠들어야 해!
이번엔 누구냐.
“아이고, 우리 킴 벤딕스 페테르센 사장님!”
GSF 프로젝트 일원이자, 덴마크의 S급 기자재업체인 올보르그의 사장 아니신가! 우리와 함께 개발한 기자재 생산을 위해 우리나라에 공장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복덩이 아니신가!
“미스터 유가 바빠 보여서, 내 차례는 언제 오나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몸뚱이가 하나뿐인데, 이거 분신술이라고 익힐 걸 그랬습니다.”
“제가 한국을 한 번 찾아가야 했는데, 저도 요즘 짬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뭐 이렇게라도 만났으니 됐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저 표정. 무슨 일일까?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어림짐작이라도 해 놔야 대화가 술술 풀리는 법이지.
올보르그는 우리의 에코십 건조에 있어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뭐 어쩌겠어. 작년에 35척이나 발주 선물을 안긴 머스트가 올보르그의 기자재를 써야 한다고 꼭 집었으니 겸상해야지 뭐.
배를 짓는데, 기자재업체가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으면 불편한 것도 많고, 쓸데없는 지출도 많은 법. 그래서 저번 방문 때 합작법인 설립을 제안했고, 저 사장은 대환영이라고 만세를 불렀었다.
그 이후에 몇 차례 협상이 진행됐고, 5대5로 800억 원을 투자해 부산에 생산기지를 만들기로 얘기를 끝냈다.
궁예질 결과 대충 감이 잡힌다. 당장 돈 때려 넣어야 하는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좀 쪼들린다는 것이겠군.
“두 달 뒤에 우리나라에 오셔서 계약식 하실 텐데, 뭐 급하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최종 합의 전에 얘기할 것들이 좀 있습니다.”
“할 얘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하셔야지요. 우리가 어떤 사이입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말씀하세요.”
“그게……. 요즘 분위기가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뭐 지금이야 아무 문제 없지만, 앞으로가 문제죠. 지금 조선소에 계약취소가 엄청납니다. 취소물량이 300척이 넘는다는 얘기도 있고, 난리도 아닙니다.”
“위기는 극복하는 맛이죠. 우리가 여기 모인 것도 함께 지혜를 모으자는 취지도 있죠.”
“그렇긴 하죠…….”
이 정도로 못 들은 척하면서 애를 태웠으니까 이제 귀담아줄 타이밍이다. 비즈니스는 밀당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법이라니까.
“혹시 우리 합작법인 때문에 고민이 많으십니까?”
“아이고, 뭐…….”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우리가 그저 비즈니스 관계는 아니잖아요. 저는 브라더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사장님께서는 그리 생각 안 하시나 봅니다. 이거 좀 섭섭하네요.”
“아휴, 아휴. 그런 게 아닙니다. 실은 우리 이사회 노인네들 때문에요.”
“어딜 가나 훈수질이 문제죠. 투자 가지고 뭐라고 하나 보죠?”
“우리 이사회 노인네들이 난리도 아닙니다. 이 시국에 3000만 달러 투자가 웬 말이냐고 아주 들들 볶습니다.”
“투자 자체가 부담입니까, 아니면 투자 금액이 부담입니까?”
“하하 뭐. 아무래도 후자죠. 저는 조선 강국 사우스 코리아에 생산기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스터 유의 제안은 아주 그뤠이트하고 빠서내딩이에요. 그걸 무산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결국 지분을 조정하자는 말씀이군요?”
“사업이라는 것이 언제든 변수가 나오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논의할 여력이 있겠습니까?”
아이고, 좋다. 이래서 미래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야. 우리 합작법인이 앞으로 얼마나 잘 나갈지 모르니, 내가 연기 좀 해 주면서 떠안는 척해야지 뭐.
저 사장이야 앞날이 불투명하다고 생각해서 투자에 머뭇거리는 것이겠지만,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거야.
사장님요, 앞으로는 에코십이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어요. 그것뿐이야? 가스추진선도 급속도로 늘어나요. 거기 들어가는 기자재가 한두 개야? 그 짭짤한 걸 반띵하기 무척 아까웠는데, 아주 좋아요.
“우리도 여력이 없긴 한데, 올보르그와 한 식구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패밀리가 힘들어하는데, 고충을 들어줘야죠. 지분 비율 조정에 대해서 원하는 걸 말씀해주세요. 부담 갖지 마시고, 편안하게.”
“역시 제 맘을 알아주는 사람은 미스터 유뿐입니다. 하하. 다른 건 다 그대로 두고, 지분만 살짝 조정합시다. 8대2 정도?”
“아, 그렇습니까?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라 9대 1을 얘기하면 어쩌나 고민했습니다. 하하. 8대 2라면 뭐 고민할 것도 없겠습니다. 제가 귀국해서 최대한 빨리 결론을 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유일조선 실세인 거 아시죠?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아이고, 이거 고마워서 어쩐답니까?”
“고맙기는요. 패밀리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죠. 그래도 뭐 마음 씀씀이가 걸린다면, 특허 몇 개 공유해 주면 좋겠지만…….”
“그거야 뭐, 차차 논의해 봅시다. 우리 편의를 봐주는데 저도 최대한 도움을 드려야죠.”
아휴, 나란 인간, 가증스러워. 뻥카로 섯다판 먹어놓고 개평도 안 주겠다는 이 마음 씀씀이를 안다면 얼마나 감동을 받겠나. 역시 비즈니스는 누가 더 구라를 그럴싸하게 치느냐의 싸움이라니까.
그렇게 머스트라인 라스 울리히 사장 취임 축하연 겸 GSF 프로젝트 참여기업들의 친목도모 행사가 선물꾸러미 가득 안은 채로 끝났다.
우리 노조위원장 아재는 기어코 노래를 불렀고, 김태우 본부장도 질 수 없다며 마이크를 잡으며, 분위기를 통영 안정리 호산그린나래아파트에 사는 최씨 할아버지의 팔순 잔치로 만들어 버렸다.
부끄러워하는 우리와 달리 저쪽 사람들은 노사가 이리 팀워크가 좋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 찬사가 수주 증가로 이어지길 간절히 기대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휴, 피곤하다. 입도 아프고 정신도 없고.
“위원장님은 하나도 안 피곤해 보입니다?”
“피곤할 일이 뭐 있습니까? 내내 놀고먹기만 했습니다. 하하. 앞으로도 언제든 불러만 주면, 바로 노래 일발 장전하겠습니다.”
“위원장 선거에서 노래 실력으로 당선된 겁니까?”
“하하. 제가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어겠습니까? 그냥 가서 노사가 화합해서 납기 지연되는 일 없이 배 잘 짓겠다고만 말하면 싱겁지 않습니까? 반주로 노래도 좀 곁들여줘야 짭쪼름하니 맛이 좋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외만 나가면 봉인됐던 힘이 저절로 풀리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얌전히 일만 하던 사람이 인간 노래방이 되질 않나, 끽해야 시 낭송이나 하던 사람도 갑자기 필 받아서 어깨춤을 들썩이지 않나. 다들 회사 잘 되라는 마음 하나는 별이 다섯 개야.
유럽을 돌면서 한바탕 일을 저질러놨으니, 이제 수습은 사랑하는 우리 직원들 몫이지. 열심히들 해 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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