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89)
00489 양지로 쫓겨난 남자 =========================================================================
“그게 정말인가!”
비시는 죽다 살아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새카맣게 죽어가던 얼굴이 딴 사람이 된 양 밝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비시뿐만이 아니라 비서실장 및 백악관 보좌진도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예! 파울러 시티에 무사히 피난했다고 합니다! EIS 현장 요원이 멩크 형무소에서부터 잘 보필한 것 같습니다!”
최윤이 살아 있었다니. 비시는 삼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까 괜한 감정이 덩달아 솟아난다.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인간은 살아 있었으면 살아 있다고 소식이라도 좀 전해주면 뭐가 잘못 된다고…….”
“통신 중개소 파괴 때문에 파울러 시티는 현재 유무선 통신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EIS 요원이 갖고 있는 위성 통신기 등도 일절 쓸 수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그래도 어떻게 용케 연락이 닿았군.”
“요원이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게 우연히 잡혔답니다. 현재 EIS에서 구조팀을 보냈다고 합니다.”
비시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라디오 방송?”
“예. 연락 수단이 없어서 단파 송출이 가능한 라디오 송신 장비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아마 야지에서 임시로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라디오 방송이면 누구나 다 들을 수 있지 않나?”
“그렇…….”
보좌관은 그제야 비시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낯빛이 변했다.
“탈옥한 토미 에슨이 방송을 들었다면 어찌 되나? 최윤 박사의 신변에 위해가 되지 않겠나?”
“즉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비시의 우려는 한 발짝 늦은 것이었다. 칠드그린은 그레이브스의 라디오 방송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구조팀을 꾸려서 즉시 현장 투입을 명했다.
“라디오 방송을 우리만 들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토미 에슨과 옛 CIA가 최윤 박사의 목숨을 노릴 거라 생각해라. 러시아가 선수를 쳐서 최윤 박사를 더 찾기 어렵게 만들 것을 대비해라. 한탕을 노리는 범죄자들이 최윤 박사를 노리고 몰려들 것을 경계해라. 닥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행동해라. 알겠나?”
“예!”
“건투를 빈다.”
EIS는 전투 헬기 10기를 동원했다. 혹시나 싶어서 인근 미군 기지에 비상경계 요청도 했다.
‘토미 에슨, 러시아…….’
토미 에슨은 탈옥을 한 이상 어떤 식으로든 끝을 보려고 할 것이다.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면 반드시 다시 나타나고자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토미 에슨은 차라리 괜찮다. 그래봐야 테러리스트, 공권력을 철저히 동원하면 그는 절대 힘을 쓸 수 없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 아닌가.
문제는 러시아다.
‘불곰 녀석들이 어떻게 나오느냐가 변수다.’
러시아의 정보 능력을 보건대 그레이스의 방송을 분명히 입수했을 것이다. 혹한의 불곰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를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프다.
러시아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미연방을 갈라놓으려 할 것이다. 해체가 안 된다면 못해도 두 개 이상의 별개 연방으로 나누려 할 게 틀림없다.
최윤의 죽음이라는 오해는 서부 주정부의 분리를 앞당기는 방아쇠가 되었다. 근데 최윤이 살아 있다면? 러시아는 결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최윤을 제거하는 것은 러시아로서는 하책이다. 유지웅과 갈라설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하지만 최윤의 신병을 확보해서 ‘당분간’ 숨기는 것 정도는 괜찮다. 그 정도는 설령 발각된다 하더라도 유지웅도 이해할 것이다.
“국내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스파이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게. 특히 아이오와 주를 중심으로.”
“알겠습니다.”
“오리건 주 주민투표는?”
“현재 투표 진행 중입니다. 앞으로 8시간 후면 투표가 끝나고 개표에 들어갑니다. 개표 완료까지 예상 시간은 약 18시간 정도입니다.”
“적어도 개표 개시 전까지는 베링 해역 금지 조치를 풀어야 한다.”
최윤이 무사한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 유지웅에게 알릴 것이냐, 지금 미리 알릴 것이냐. 그것은 전적으로 백악관이 판단해야 할 문제다. 생존 사실을 미리 알리면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 그 사이에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더 고약하게 변한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하기에 칠드그린은 구조팀이 출동한 사이에 최윤의 신변에 무슨 일이 발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것은 그만큼 바짝 긴장하라는 뜻이다.
‘일단 가보고는 해야겠지.’
칠드그린은 전화기를 들었다. 백악관은 ‘최윤의 생존이 추정된다.’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타이밍을 잡아야 하는 입장이지만, 자신은 다르다. 바로 이런 역할을 위해 정보기관의 부국장이면서, 유지웅의 의지를 따라온 것 아니었던가.
그러나 몇 번이나 통화 시도를 한 그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지고 말았다.
“왜 전화를 안 받으시지?”
거듭해서 통화를 시도했지만, 계속 부재중이었다.
* * *
‘라디오를 들었다면 분명 부국장님이 사람을 보내줄 거야.’
그레이브스는 꾸준히 방송을 했다. 단파를 이용한 방송이라 전파 도달 범위가 짧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러 번 방송했으니까 분명히 한 번은 성공하지 않았을까?
토미 에슨 탈옥 사실을 모르는 그레이브스는 속마음은 나름 태평했다. 최윤이 죽었다는 오해 때문에 조국이 난처함을 겪고 있지만, 생존 사실이 알려지면 다 해결될 문제다.
또 한 차례 방송을 마친 그레이브스는 식수를 배급받기 위해 거처를 나섰다. 피난을 갔는지 주인이 없는 집의 빈 창고인데 생각보다 머무르는 사람이 적다. 그래도 미어터지는 본 건물보다는 차라리 널찍한 창고가 백 배 나았다.
“응?”
식수를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레이브스는 뭔가 불길한 느낌에 멈칫 했다.
‘아는 얼굴을 본 거 같았는데?’
그레이브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모퉁이에서 지나친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사람이 미어터지는 파울러 시티에서는 식수나 식량 배급 같은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불필요하게 이동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 세 남자의 옷차림이 피난민치고는 너무 깨끗했다. 마치 이곳에 갓 들어온 외부인처럼.
‘어엇!’
그 중 가운데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그레이브스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프로다. 의심을 사지 않게 당황한 표정을 얼른 감추고, 태연하게 가던 방향으로 걸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서 못 알아본 모양이다. 다행이야.’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설마 했는데 저들은 자신과 같은 방향을 가고 있었다. 그레이브스는 확신했다.
‘라디오 방송을 들었어!’
욕지거리가 나왔다. 연방 정부나 FBI는 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기에 옛 CIA 잔당들이 저렇게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단 말인가?
아무리 저들이 수배 중도 아니고, 혐의가 없어 얌전히 은퇴 생활을 누리고 있다지만, 이 시기에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최윤 박사님을 노리고 있다!’
다행히 저들은 정확한 위치는 아직 잘 모르는 듯했다. 그들과 떨어져서 먼저 거처로 돌아온 그레이브스는 숨이 넘어갈 듯이 최윤을 잡아끌었다. 낮잠을 자고 있던 최윤은 영문도 모른 채 그에게 팔을 잡혀서 끌려나왔다.
“왜 이러십니까? 무슨 일이세요?”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합니다.”
“도망? 이제 곧 구조대가 오지 않습니까?”
최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자신이 범죄자도 아니고, 미국 땅에서 왜 도망을 간단 말인가? 곧 있으면 구조대가 올 텐데?
그레이브스는 짧고 굵게 설명했다.
“오다가 옛 CIA 잔당을 발견했습니다! 최윤 박사님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방송을 녀석들도 들은 모양입니다!”
“옛 CIA 잔당이요?”
그제야 최윤의 안색도 변했다. CIA라면 그도 이를 바드득 갈고 있다. 효웅산업 빌딩에 비행기 테러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뿐이었던 친구 휘버 박사를 암살한 자들이니.
“바로 벗어나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둘은 일단 급한 대로 거처를 벗어났다.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도망치는데 잠시 후 뭔가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렸다.
“우리 거처를 찾은 모양입니다!”
지금쯤은 녀석들도 다급해졌을 것이다. 녀석들도 머리가 있다면 EIS가 구조팀을 보냈으리라고 예상할 테니까. 그러나 그레이브스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이 도시를 떠나야 해요!”
“그보다는 차라리 정부 청사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아니면 적당한 곳에 숨어서 구조를 기다리던가요.”
“아닙니다! 이 도시를 벗어나야 합니다! 무조건 이 도시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합니다!”
최윤은 숨이 차도록 뛰다 말고 이상함을 느꼈다. 그레이브스의 설명이 무슨 예언처럼 들렸던 것이다.
옛 CIA 잔당이라고 해봐야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공권력을 내세운 EIS한테는 상대가 안 될 텐데? 적당히 시간을 벌면서 피해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최윤은 일단 그레이브스의 판단을 존중했다. 이쪽 분야에서는 그가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베테랑이다. 그가 저러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피난민으로 바글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도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량도 없이 두 다리로만 도시를 벗어나는 것은 힘에 벅찼다. 무엇보다 책상머리에서 펜대나 굴리는 사람답게 최윤의 체력이 저질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저기로 숨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레이브스가 가리킨 곳은 지하 수로였다. 최윤은 더욱 의아해졌다.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또 지하 수로에 숨자고 하다니?
일단 시키는 대로 수로 뚜껑을 열고 사다리를 내려갔다. 하수구 악취가 지독하게 밀려왔다. 당연한 소리지만 지하 수로는 텅 비어 있었다.
숨을 고르고 난 뒤 최윤이 물었다.
“CIA 잔당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하지만 미친놈이 하나 끼어 있었습니다. 제가 아주 잘 아는 놈입니다.”
“미친놈이요?”
“트위스트라고, 예전에 잠시 제가 밑에서 부하로 일한 적이 있는 놈입니다. 임무 완수를 위해서라면 아주 물불을 가리지 않는 꼴통입니다. 그놈은 분명히 이번 일에 그냥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봤자 아무 공권력도 없는 전직 CIA 요원 아닌가?
“녀석들은 분명히 제 방송을 듣고 달려온 게 틀림없습니다. 당연히 EIS나 연방 정부도 방송을 듣고 사람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녀석들은 우리를 잡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를 잡지 못하면 아마…….”
쾅! 콰과과광! 콰과광!
멀리서 엄청난 폭음이 들리며 수로 전체가 무너질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최윤은 재빨리 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레이브스는 얼른 그의 몸을 덮어 떨어지는 파편을 맞지 않도록 보호했다.
폭발의 여운이 가셨다. 최윤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굉음의 크기와 땅이 흔들린 정도를 보아하니 엄청 큰 폭발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할 녀석입니다. 그래서 도시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겁니다.”
“설마, 핵배낭이라도 터트린 건가요?”
“그러고도 남을 놈입니다.”
트위스트 베이트. 옛날 CIA에서도 알아주던 꼴통이다. 그놈 밑에서 개고생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놈이 얼마나 꼴통인지 알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꼼짝없이 죽었으리라.
============================ 작품 후기 ============================
“도망쳤다고? 그럼 도시를 날려버려.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
이게 바로 샤(cia) 스타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