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640)
00640 회장님은 태업 중 =========================================================================
비비 인형은 피즈한테 선물하려고 산 특별 주문 제작품이었다. 가격은 둘째 치고 세상에 딱 하나 밖에 없는 상품이다. 열 손가락까지 모두 정교한 관절이 들어가 있어, 50cm 밖에 안 되는 크기임에도 인간과 흡사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처럼 부드럽게 춤을 추는 것 자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 아니, 불가능해야 한다!
‘내가 무슨 헛소리를!’
유지웅은 뺨을 짝짝 치며 정신을 차렸다. 비비 인형은 긴 금발을 휘날리며 부드럽게 춤을 추고 있었다. 손끝 하나하나까지 우아함이 넘치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유지웅은 비비 인형의 춤에서 슬픔을 닮은 어떤 어두움을 느꼈다. 마치 장송곡에 맞춰 춤추는 듯한, 장엄하면서도 무거운 춤사위였다.
그는 얼른 보호막을 쳤다. 안전을 확보하자 마음이 든든해지며 안심이 되었다.
“넌 뭐냐? 어떻게 된 거야?”
일단 그는 대화를 시도했다. 그 순간 비비 인형이 춤추던 동작을 딱 멈췄다. 우아하게 멈춰선 인형은 고개를 들어 유지웅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저는 RPX-1, 또는 블리츠랭크입니다.”
순간 유지웅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아니, 지금 이 미친 인형이 무슨 헛소리를 한 거야?
“뭐, 뭐야! 말도 안 돼! 헛소리하지 말고!”
“사실입니다. 저는 RPX-1, 또는 블리츠랭크입니다.”
“말도 안 돼! 블랭은 분명히 우리가 처치했다고!”
“저 또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RPX-1, 또는 블리츠랭크입니다. RPX-1, 또는 블리츠랭크의 기억과 자아를 갖고 있습니다.”
돌로 만들어진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이럴까? 인형의 목소리는 여자 특유의 고음이면서, 한편으로는 거칠고 딱딱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만들어진 기계음이 억지로 인간의 감성을 흉내 내는 듯한, 기괴한 모순이 가득찬 음색이었다.
“말도 안 돼!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잠깐! 설마!”
유지웅은 퍼뜩 아까 방치돼 있던 블루 결정체를 떠올렸다. 그러고 기억났다. 블랭을 잡고 나온 블루 결정체를 최윤에게 맡기지 않았던가? 혹시 그 결정체가?
‘그럼 블랭이 부활? 인형의 몸으로?’
얼추 말이 된다. 빛으로 변한 블루 결정체가 비비 인형에 흡수되었고, 그 블루 결정체가 블랭의 기억과 자아를 보관하고 있었다면? 그래서 블랭이 비비 인형으로 부활한 것이라면?
‘하지만 그게 가능해?’
블루 결정체가 괴수의 혼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블루 결정체는 그저 죽은 뒤에 녀석들이 남기는 에너지원일 뿐이다. 이런 게 가능할 수가 있을까?
“RPX-1, 시스템 가동을 시작합니다. 백그라운드 파일 로딩 중……. 로딩이 끝났습니다. 사용자 인식을 시작합니다. 귀하의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뭐, 뭐라고?”
“‘뭐뭐라고’는 올바른 이름이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용자의 올바른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내 이름? 유지웅인데?”
“사용자 이름으로 유지웅을 등록합니다.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잠깐, 뭐 하는 거야?”
“RPX-1 시스템 모듈 첫 가동에 따른 사용자 인식 과정을 진행 중입니다.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사용자 이름으로 유지웅을 등록해도 되겠습니까?”
유지웅은 얼떨떨했다. 지금 비비 인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언뜻 눈치를 보자니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사용자 등록 같은 거라고 하지 않는가?
‘이거 윈도우 새로 깔면 사용자 이름 물어보는 뭐 그런 거 아니야? 해도 되려나?’
정황을 보면 블루 결정체에 담겨 있던 블랭의 자아가 비비 인형에 흡수돼서 다시 가동을 시작한 것 같다. 유지웅은 일단 질러 보기로 마음먹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다시 처치하면 그만이다. 화이트 몹도 무찔렀는데, 블랭쯤이야.
“그래. 등록해라.”
“등록합니다. 저장 중……. 등록을 마쳤습니다. 사용자 컴퓨터의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컴퓨터?”
“저를 말합니다.”
이거 완전히 윈도우 설치할 때랑 절차가 비슷한데? 유지웅은 갸우뚱하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하지? 블랭이라고 해? 아니면 블리츠랭크?’
그는 흘끗 비비 인형을 바라보았다. 꼿꼿이 선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어딘지 애처롭다. 그러고 보니 생긴 건 건드리면 툭 하고 부서질 듯한 비비 인형이 아닌가? 거액을 들여 특별히 주문 제작한 수제품이라 생긴 것도 귀엽고 예쁘다. 여기에 블랭, 블리츠랭크라는 이름은 너무 안 어울리는데?
“오리나.”
“확인했습니다. 사용자 유지웅이 정한 컴퓨터 시스템의 이름은 오리나입니다.”
“그런데 방금 뭐 한 거냐? 사용자를 정하고 네 이름을 정하는 건 왜 하는 건데?”
“RPX-1 시스템 가동을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소프트웨어 베이스에 새겨진 명령어이기 때문에 제가 거역하지 못합니다.”
“잠깐, RPX-1에 기본 소프트웨어를 설치한 회사가 혹시……?”
“주식회사 마이크로소프트입니다.”
“켁!”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나더라니! 그럴 줄 알았어!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 유지웅은 잠시 헷갈렸다. 컴퓨터가 사용자로 등록을 한다는 의미는 하나뿐이지 않은가? 특히나 인간과 흡사한 자아를 갖춘 이런 시스템이라면?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제부터 사용자 유지웅은 시스템 오리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마스터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명령? 좋아, 아주 좋아. 나 이런 거 엄청 좋아해.”
유지웅은 RPX-1, 아니 블랭, 아니아니 오리나를 폐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흡족했다. 역시 좋은 것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넘치지 않는다니까. 이 녀석으로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
“근데 너 힘은 어느 정도나 돼? 약하지 않아?”
“저는 전기적 신호 및 파장 제어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자체적으로 발할 수 있는 물리력은 매우 낮습니다. 그러나 전기적 신호 및 파장 제어를 이용하면 매우 강한 물리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 작은 머신을 이용해서 괴수들을 세뇌해서 조종했던 뭐 그런 거?”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른 괴수를 조종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한 물리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단 그에 따른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매개체? 그럼 지금은 못 보여주겠네? 그런 게 없으니까?”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 매개체의 요건을 갖춘 물체가 존재합니다. 사용자가 승인한다면 매개체를 저의 부속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매개체가 있어? 그것도 지금 여기에? 유지웅은 자신의 결정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도 상상하지 못한 채, 무심코 허락하고 말았다.
“그럼 한 번 해봐.”
“승인 확인했습니다. 구체를 매개체로 부속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소요 시간 약 3분.”
“뭐, 뭐야! 잠깐! 잠깐!”
구체라는 말에 뭔가 하다가 문득 옆을 돌아본 유지웅은 사색이 되어 만류했다. 아니지? 설마 아니지? 직경 50미터짜리, 저 크고 아름다운 폐쇄 모듈을 설마 매개체로 삼겠다는 건 진짜 아니지?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입니다. 이미 개시한 부속 작업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 안 돼! 저거를 뜯어갔다가는……!”
얼마나 열심히 레이드해서 최윤한테 만들어준 건데! 블루 결정체가 무려 250개나 들어간 물건이란 말이다! 저거 하나 만들려고 레이드를 250번이나 해야 했다고!
오리나는 허공에 뜬 채 두 팔을 폐쇄 모듈로 뻗고 있었다. 팔에서 뻗어 나온 빛이 폐쇄 모듈과 오리나를 연결한 채 파르스름한 파장을 뿜어냈다. 거대한 구체, 폐쇄 모듈은 오리나의 빛에 감응하듯이 웅웅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번쩍!
섬광이 터지며 앞을 가렸다. 유지웅은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팔로 눈을 막았다.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그라지자 유지웅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 좌절이 서렸다.
“어, 어디 갔어!”
그는 다급히 폐쇄 모듈을 찾다가 오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손 위에서 폐쇄 모듈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폐쇄 모듈은 직경이 1미터로 줄어든 상태였다. 생김새도 무언가 변했다. 마치 기계로 만든 공 같다고 해야 할까.
폐쇄 모듈이 본래 있던 자리에는 뜯겨진 전선만 기계 시체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유지웅은 절망해서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아, 최윤이 징징거리는 걸 어떻게 들어야 하지? 이대로 그냥 잠적할까?
“매개체의 출력을 측정합니다. 스캐닝 중……. 판독 완료.”
“……그래, 그 비싼 모듈을 뜯어서 매개체로 삼은 소감이나 한 번 말해봐라.”
“매개체는 가상의 레드 결정체급 출력을 지녔으나, 제조 기술의 불안정함으로 본래의 출력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매개체의 출력을 100% 그대로 낼 수 있습니다.”
“뭐? 100%라고?”
유지웅은 화들짝 놀랐다. 폐쇄 모듈은 250개의 블루 결정체를 병렬 연결하여, 인위적으로 레드 결정체급 출력을 낼 수 있게 한 설비였다. 결정 에너지의 흐름과 구조, 변화 패턴을 시뮬레이션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정도 출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허나 풀파워를 낼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설계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를 담는 그릇의 내구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기술력의 부족함이었다. 최윤도 늘 그 점을 아쉬워했다.
헌데 지금 100%를 그대로 낼 수 있다고 했다. 그 점만 해도 무척 대단한 것이다. 잠깐, 그런데 그것보다는 다른 게 더 문제가 될 것 같은데?
“너, 그럼 혹시 레드 결정체급 매개체가 생겼으니 이제 화이트급 괴수라도 된다는 거냐?”
“이론상 동일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유지웅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브라우니 팔아버릴까?”
* * *
“에너지의 완벽한 제어가 가능하다면 인류는 또 한 번 전혀 다른 세상을 살 기회를 누리게 됩니다. 니트로 교수, 당신은 그 격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어요.”
최윤은 니트로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썩 내키지 않은 태도를 보였던 니트로는 학문적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이 완전히 변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는 최윤이 핵물리학에 나름 정통한 것에 크게 놀라워했다.
“결정체학 박사가 뭐가 아쉬워서 핵물리학을 따로 공부했습니까?”
“가렌 박사님을 보고 느낀 게 많았어요. 그래서 따로 시간을 내서 열심히 공부했지요. 아직 많이 부족해서 간신히 박사 정도 수준 밖에 못 됩니다.”
니트로는 최윤이 핵물리학에 관심이 깊은 것을 기꺼워하면서도, 그게 제안한 연구 합작은 경계 반응을 나타냈다.
“폐쇄 모듈이 절실한 건 아닙니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결정 입자의 흐름 따위는 그려낼 수 있어요.”
“그러나 폐쇄 모듈이 있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요. 니트로 교수님의 공적을 나누겠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설비를 쓰지 않는 시간에 마음껏 자유롭게 쓰셔도 됩니다.”
“그렇게까지나…….”
“뛰어난 과학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지원할 수 있다면 그보다 보람찬 일이 없지요.”
최윤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니트로는 결국 마음이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최 소장님도 부디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광입니다.”
정혜주와 레지나는 두 사람이 서로 굳은 악수를 나누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악수를 풀고 최윤이 말했다.
“이왕 이리 된 김에 바로 폐쇄 모듈을 보러 갈까요?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으시죠?”
“네. 꼭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일단 마음을 연 니트로는 처음의 그 도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순진무구한 천재 청소년 과학자 그 자체였다.
넷은 V-23을 타고 30분도 걸리지 않아 세종시 연구단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회장님!”
“아하하, 최 소장님. 일단 제 말을 먼저 들어보시는 게…….”
“으아아아아악!”
누군가 폐쇄 모듈을 뜯어간 흔적만 남아 있는 연구실 풍경에 최윤은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해 버렸다. 의식을 잃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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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고통받아라, 니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