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112)
*
오전과 오후에 걸쳐 두 과목의 전공구분시험이 끝났다.
언젠가 추는 그때의 기억을 이런 식으로 회상하기도 했는데.
‘피를 말리는 기분, 이란 말 알지?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거 이번에 첨으로 알았다.’
피를 말리는 기분.
저 부스 안에서 얼마나 짝짝 말라가는지, 입안이 다 마른 것으로도 부족해 몸속의 피가 졸아드는 것 같았다고.
그럼에도 무어든 간에 끝은 있는 법.
전공구분시험이 끝난 뒤 조금 숨통이 트이나 했더니, 곧바로 기말고사가 시작되었고.
‘전공구분시험 일정 때문에 한 주 미뤄지긴 했지만, 과제는 원래대로···.’
매우 야속하게도 교수들이 학생의 사정을 봐주는 법은 없었다.
뭐 하나 빠짐없이 내주는 과제는 물론, 그 사이 사이 기말고사 대비를 위한 스터디까지 진행해야 했으니.
‘추 녀석은 피를 말리는, 이라는 표현을 예로 들었지만.’
나는 ‘눈코 뜰 새 없다’라는 관용구가 그냥 관용구가 아닌, 진짜로 피부로 와닿는 2주를 보내야 했다.
그 사이 CVC프로덕션에서 한 건의 추가 번역 의뢰가, 함영사에서 모처럼 소설책 검토가 들어왔지만.
그것마저도 전부 거절해야 할 정도로 바빴으니까.
[여간 거절하는 법이 없으신데, 지금 박 선생님이 엄청 바쁘시긴 한가 보네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지요.]CVC프로덕션의 한기준 실장은 그런 답장을 보내왔으며.
[아, 정말요? 하긴 통대 1학년 2학기 말이 제일 바쁠 시기라고 듣긴 했어요. 검토는 다른 분에게 맡길 테니 부담갖지 마시고···.]내가 원고에 워낙 관심이 많아 보여서였기 때문일까.
함영사의 윤주하 팀장은 그냥 여유 있을 때 읽어보라며 전자원고를 첨부해 보내줬는데,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방학 때 읽어야지.’
여하튼.
그렇게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는 2주가 정신없이 흐른 뒤, 마침내 그 모든 것의 결과가 나왔다.
지난주 수업 때 기말고사 시험지를 돌려받았고, 오늘이 드디어 종강일 전날.
1학년 2학기 성적이 나오는 날인 동시에···.
“전공구분시험 결과가··· 나왔네.”
통대 포털에 들어가자, ‘2학기 성적 조회’와 ‘1학년 전공구분시험 결과 조회’가 떡하니 메인에 떠 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2학기 성적 조회부터 클릭했다.
[한명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학기 : 1학년 2학기]한 과목 클릭할 때마다 해당 과목의 점수가 나오는 식.
[불한 정치외교통역 : A+한불 산업경제통역 : A+
한불 과학기술 번역 : A+]
···좋아, 아주 좋아.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주제별 발표 및 시사 토론 : A+불한 산업경제 번역 : A+
주제 특강 : A+]
···이제 마지막 한 과목, 만이 남은 상황.
어느새 손발이 차가워진 것을 느끼며 마지막 과목을 클릭했다.
[동시통역 입문 : A+]“···!”
잠시 내 눈을 믿지 못하다가 이내 탄성을 질렀다.
우오오오였나 우와아아아였나,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첫 사냥에 성공한 원시인처럼 내면의 기쁨을 온전히 소리로 쏟아내자.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며 추성원이 들어왔다.
“···촨용아. 인간적으로 아침엔 조용히 하자.”
아침이 아니라 낮 12시였지만.
자다 깼는지 추 자식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팩 성질을 내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나 저러나.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이제 남은 것은 전공구분시험 결과뿐.
···당연히 붙었을 거라 확신하기는 하지만.
‘10년 전, 이 순간을 아예 경험조차 못하고 학교를 떠났던 기억이 있어서일까.’
괜스레 가슴이 울컥해지는 기분으로 클릭하자, 전공구분시험 결과가 나왔다.
[1학년 2학기 전공구분시험 합격자 명단 (*성적순 정렬)]···‘성적순’으로 정렬되었다는 명단의 맨 위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내 이름 석 자.
···
생각했던 대로 레아와 은새가 2위, 3위를 다투고 있고.
거의 모든 과목을 균등하게 잘하는 권세미가 4위였다.
그렇게 죽 명단을 훑어내려가는데.
“···.”
일곱 번째로 적힌 이름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추성원]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 이 자식 봐라.”
그렇게 우는 소리를 해대더니, 어쩌니 저쩌니 해도 결국 추는 실전에 강한 타입이다.
언제였더라.
회귀 전, 남들은 도박이라고 했던 프로젝트에 과감하게 투자해 성공한 추성원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좀 그래, 진짜 중요한 순간엔 지는 법이 없다니까?’
평소 PC방에서 같이 게임할 때는 맨날 지다가도, 판돈이 크게 걸린 판에서는 이긴다는 것.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남은 명단을 훑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의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으니.
[송하늬]“이야, 송하늬 붙었네.”
본인이 떨어지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를 바 없다며 불안해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턱 쏘라고 해야지, 픽 웃으며 축하 문자를 보내려던 그때.
‘어? 근데···.’
수용이 형의 이름이 명단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로부터 이틀 뒤.
12월 4주차 월요일을 기점으로 1학년 2학기가 종강한 바로 다음 날.
나와 동기들 몇 명-
추, 수용이 형, 서이준, 은새, 레아, 송하늬 등은 로익과 그 밴드 멤버들이 주축이 된 클럽 파티에 초대받아 온 참이었다.
“형은 기분 좀 나아졌어요?”
내 물음에 수용이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평소 중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던 터, 모두가 당연히 붙을 거라 예상했지만.
“나아지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냐.”
본인만큼은 떨어진 것이 놀랍지 않은 듯했다.
스스로 돌이켜봐도 시험에서 실수를 너무 많이 했다며, 당연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는 수용이 형.
“안 그래도 번역과가 더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긴 했거든. 그렇게 애매한 상태에서 에라 모르겠다 시험을 치른 건데···.”
이 시험 결과가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준 셈이라 치고, 번역에 좀 더 집중하겠다는 수용이 형.
속은 쓰리겠지만, 그럼에도 좌절하는 법 없이 새로이 다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보다 오늘은 축하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잖냐.”
시험 결과도 결과이지만, 오늘 이 자리는···.
“로익 형, 축하해.”
그래.
다름 아닌, 로익이 혈육을 찾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으니까.
‘비록 어머니는 생사 여부를 파악 못했지만.’
같은 기관에 맡겨졌다는 여동생과 연락이 닿았고, 지난주에 여동생과 만났다는 것이다.
“축하합니다!”
“진짜 너무 좋은 소식이야.”
“내가 다 막 가슴이 두근두근한 거 있지?”
모두에게 둘러싸인 로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한국인이고 프랑스인이고 할 거 없이, 그가 이제까지 폭넓게 알아온 수많은 친구들이 진심 어린 축하 인사를 건네는 중.
“Merci milles fois(진짜로 너무 고마워). 완전, 진심.”
“이 형 이거 봐라, 그새 못 본 사이에 한국어가 줄었네.”
낄낄거리는 추와 어깨동무를 한 채, 로익 역시 진심이 가득한 웃음을 터뜨렸다.
– I need you more than anything in my life···.
머리 위 스피커에서 프랑스 출신의 일렉트로닉 뮤지션 다프트펑크의 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클럽 안 여기저기서 프랑스어가 들려왔다.
「À cause de tout ça, quoi···.」
「Hmm, pas vraiment···.」
「Ouais, elle a dit qu’elle irait···.」
지난번 로익의 생일파티에서 봤던 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지만.
“나도 모르는 얼굴도 많아.”
“그래?”
“응. 어차피 이런 파티엔 친구의 친구들까지 다 데려오니까.”
나와 로익은 맥주병 하나씩 들고 서서 벽에 기댄 채로 얘기를 나누는 중.
로익이 클럽 앞쪽을 가리켜 보이며 말을 이었다.
“노래방 기계 있는 거 보여?”
그곳에 자리한 것은 노래방 기계 한 대와 간단한 공연을 할 수 있는 미니 라이브 무대.
이따 11시부터 어쿠스틱 공연을 할 거니, 오늘은 밤을 새고 간다는 각오로 놀고 가라는 것.
“그래. 그건 그렇고, 여동생과 만난 거 다시 한 번 축하해.”
그 말에 로익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어, 진짜로.”
동생과 처음 만난 날.
자신과 연결된 사람이라는 걸 한눈에 보자마자 깨달았다는 것.
“내 안의 텅 빈 무언가가 채워진 감각이라고 하면 적절하려나?”
그제서야 자신이 이 세상과 강력하게 연결돼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동생을 찾고 나니까 자신의 양부모와 양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뒤늦게 체감이 되더라는 것.
“아 그리고 찬영아.”
“응?”
“너한테 특별히 고마워해야 할 게 있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이 오지 않아 눈을 크게 뜨자.
“사실 여동생이 날 찾아낼 수 있었던 건 말이지, 다 니가 나왔던 또찬영 영상 덕분이야.”
“···너튜브 말이야?”
눈을 휘둥그레 뜨자 로익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요즘 너튜브에서 완전 인기 많았잖아? 그걸 우연히 본 여동생이 또찬영 다른 영상도 찾아보다가, 나랑 같이 나온 ‘보이는 라디오’ 영상을 봤다 하더라고.”
거기에 같이 출연한 로익을 보고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을 받아 관심을 가졌고.
웹서치를 해보고는 부모를 찾는 중인 한국인 입양아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사연이 본인의 사연과 너무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더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양기관 측에 수소문해보았고, 어찌 어찌 연이 닿아···.
“···그렇게 우리 둘이 남매라는 걸 확인하게 된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등 뒤로 쫙 소름이 돋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 좋은 소름이.
“고맙다 찬영아. 진심으로 고마워.”
로익이 나를 가볍게 포옹했다. 대꾸할 말을 쉽사리 찾지 못하더 나는 그의 등을 몇 차례 툭툭 쳐주고 나서야 이렇게 말했다.
“고맙긴. ···두 사람이 만날 인연이었으니까 만난 거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로익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해 보였다.
“그래, 인연. 그런 게 정말로 있긴 한가 봐.”
그런 단어가 아니라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적이라고 덧붙이는 로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또찬영 현상에도 순기능이 있었네.’
···그것도 아주 의미 있는 순기능 말이다.
비록 내 얼굴이 웃긴 짤로 만들어져 웹상을 영원히 떠돌아다니게 되기는 했지만.
로익이 여동생을 찾았다는 그 기적에 비한다면,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닐까.
*
한 시간쯤 더 지나자 파티 분위기가 제법 무르익었다.
처음만 해도 조금 어색해하던 동기들은 자기 집 안마당마냥 활개를 치며 즐기는 중.
그러다 누군가가 노래방 기계를 틀어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너 없는 지금도~ 눈부신 하늘과~”
저기, 애들 노래한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노래방 기계 쪽으로 다가가는 로익.
어느새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꽤 모여 서 있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이렇게 노래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분위기네.’
나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신이 난 추도 앞에 나가 빅뱅의 을 부르고 들어왔는데, 흥과 끼를 타고난 스타일답게 노래도 꽤 잘하는 편이었다.
“이준이! 서이준 노래해라!”
「Jun, chante!(준아, 노래해!)」
멍하니 서 있던 서이준은 프랑스인 친구들에게 끌려나갔다.
그가 무슨 노래를 선곡할지 다들 기대하던 그때, 노래 제목이 화면에 떴다.
[너에게로 가는 길]두두두-
드럼 소리와 함께 시작된 이 노래는, 본인과는 몹시 어울리지 않는 의 주제가.
“뜨거운 코오트를 가아르며~ 너에게 가고 있으어~”
···의외로 서이준은 음치였다.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지 열창하는 가운데, 옆에 선 추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거의 ‘ㅋㅋㅋㅋ’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수준이랄까.
“아, 미치겠다 크크크.”
“얼굴은 무슨 발라드 왕자 같이 생겨 가지고 완전 의외네.”
수용이 형도 피식피식거리는데, 문득 주변을 돌아본 추가 말했다.
“야, 근데 지금 나만 웃긴 거냐? 나한테만 웃기게 들리는 거냐고.”
“아니, 웃긴 거 맞아.”
내가 대꾸하자 추가 여자들이 모여 있는 한구석을 가리켜 보였다.
“웃겨 죽겠는데 쟤들은 왜 홀딱 빠진 얼굴을 하고 있어?”
“음, 시각에 속는 중이지.”
우리 동기들은 아니고, 로익의 지인으로 보이는 프랑스 여자들이 서이준을 보며 꺅꺅거리고 있었다.
「C’est qui ce mec(저 남자 누구야)?」
「Il est vraiment canon(존잘이다)!」
「Trop hot(섹시해).」
그 대화를 멍하니 듣던 추가 다시 한 번 서이준을 바라보았다.
“외치고~ 싶어~ Crazy for you~”
음정 박자과는 상관없이 자유로운 노래를 선보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인생 넘 불공평한 거 아니냐?”
“그걸 이제 알았냐.”
낄낄거리며 추에게 대꾸하던 그때, 서이준의 노래가 끝났고.
다음은 누가 할래? 라고 묻는 분위기에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