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126)
온 정신을 노트북 화면에 집중한 채 메일 제목을 클릭했다.
정말로 레아 신이 보낸 것이 맞았다.
[제목 : 찬영 씨 잘 지내요?] [프랑스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안 그래도 안부가 궁금했는데 얼마 전 TV에서 찬영 씨 얼굴이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후략)]과연 레아답게 이모티콘이나 농담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점잖은 메일이었다.
누가 보면 회사 동료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중하달까.
그러나 그러한 담담한 말투 너머에서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묘한 친근감이 느껴졌다.
“음···.”
나는 메일의 후반부를 몇 차례나 다시 읽어보았다.
그녀는 최근 어느 통역 의뢰를 받고 나갈지 말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내가 프랑스까지 가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모습에 많은 자극을 받았고, 그래서 자신도 한 번 해보려고 한단다.
[저도, 이번엔 눈앞의 벽을 한 번 깨보려고요.] [그냥··· 찬영 씨 덕분에 용기를 내게 되었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그럼 나중에 한국 돌아오면 봐요.
···그 마지막 문장이 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걸까.
후우,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그렇다면··· 한국은 오전 8시겠네.’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하기는 좀 이르긴 하지만, 평소 6시 기상을 칼 같이 지키는 그녀라면 한창 활동할 시각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민한 뒤, 국제 SMS를 작성했다.
[레아 씨, 박찬영인데요. 혹시 지금 스카이브로 음성채팅할 수 있어요?]···보내버렸다.
국제 SMS는 건당 165원이 청구된다는 문자가 곧바로 날아왔고.
답문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그렇게 몇 초가 더 지났을까.
지이잉- 하는 핸드폰 진동과 함께 문자가 왔다.
[네, 가능해요. 바로 들어가 있을게요.]···하.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나는 곧바로 스카이브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
레아가 찬영에게 메일을 보낸 것은 딱히 대단한 연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사실, 그가 프랑스로 떠난 이후 기숙사는 매우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어디 적적하다뿐인가.
찬영이 없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여름방학과 비교해 크게 다른 것도 없는데도, 괜히 이곳에 있는 게 재미없게 느껴졌다.
‘그냥, 매일 얼굴 보던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것뿐이야.’
찬영과는 주5일 수업을 함께 듣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2회 스터디까지 함께하던 사이가 아닌가.
그런 그가 곁에 없으니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뿐이라고, 레아는 애써 자신을 설득했다.
게다가 그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것은 자신뿐이 아닌 듯했다.
“스터디, 시작하죠.”
“그래요. 오늘 주제는···.”
찬영이 떠난 뒤 서이준과 단둘이 하는 스터디는 ‘사무적’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두 사람은 사담은 전혀 나누지 않은 채, 순전히 서로의 통역 평가만 나눈 뒤 스터디실을 나서기 일쑤였다.
그러다 지난 주, 찬영이 나오는 에르메스 편이 방영된 후.
서이준이 처음으로 스터디 외의 얘기를 꺼냈다.
“찬영이 그 자식 에르메스 통역한 거 봤어요?”
그는 본인답지 않게 몹시 흥분한 기색으로 미쳤다, 완전 날아다니더라 하며 온갖 칭찬을 쏟아냈다.
이준의 말을 가만히 듣던 레아가 한마디했다.
“···그거 보니까 엄청 자극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최근 나갈지 말지 고민하던 통역 의뢰가 있었다고 덧붙이자.
서이준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찬영이가 그런 얘길 들으면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보라고 할 것 같은데, 안 그래요?”
“···그럴 것 같아요.”
그때 처음으로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메스 통역에 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고 레아가 일어나려던 순간.
서이준이 아, 하며 덧붙였다.
“레아 씨, 이건 내 오지랖일지도 모르겠는데.”
“네?”
“잘못하면 찬영이, 놓칠지도 몰라요.”
“···?”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씩 웃었다.
“아니, 여기서야 다들 찬영이 놈 노안이라고 놀리면서 재밌어하지만.”
자신이 유학하던 때도 그랬고, 프랑스에서는 건장하고 남자답게 생긴 타입이 그렇게 인기가 많다는 것.
잠시 두 눈만 깜빡이며 아무 말도 못하던 레아는 가까스로 이렇게 물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아, 그렇게 나오면 딱히 할 말이 없긴 한데.”
서이준은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제가 이런 쪽에 촉이 좋거든요. 게다가 전 1년 내내 두 사람을 곁에서 지켜봤잖아요?”
“···.”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그럼 이만”이라며 레아보다 한 발 앞서서 스터디실을 나갔다.
그날 저녁.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레아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가슴속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고, 서이준에게서 들었던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전 1년 내내 두 사람을 곁에서 지켜봤잖아요?’
그가 지켜본 자신들의 모습은 어땠던 걸까.
아니, 자신을 바라보는 찬영의 눈빛은 어땠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작성한 뒤 몹시도 충동적으로 보내버렸다.
[메일 발송이 완료되었습니다.]메시지가 뜬 것을 보니 뒤늦게 후회가 되었지만, 발송 취소도 안 되는 상황.
그 탓인지 그날 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내다 새벽에 간신히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평소처럼 공부하던 중, 문자가 날아왔다.
‘뭐지?’
···그것은 찬영이 보낸 문자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당장 들어가겠다는 답문을 보낸 후, 곧바로 노트북 앞에 가 앉았다.
스카이브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설치하고, 헤드셋까지 껴가며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자.
[‘박찬영’ 님이 대화를 신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머리로 생각하기도 전.
손가락이 먼저 ‘네’를 눌렀다.
*
처음만 해도 괜한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누군가와 음성 채팅을 하는 데는 영 익숙지가 않으니까.
‘음성 채팅이 뭐야, 여자와 사적인 통화를 하는 것 자체도 너무 오랜만이지.’
···그런 나의 걱정과는 달리, 레아 신과의 통화는 생각 외로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처음에는 나의 에르메스 통역 이야기, 그다음에는 그녀가 새로 받았다는 통역 의뢰 이야기.
그렇게 통번역 관련 이야기로 시작해, 화제는 서서히 사적인 영역으로 옮겨왔고···.
‘어? 벌써 30분 넘게 통화했네.’
시계를 안 봤다면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을 터였다.
그리고 우리는 방금 막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둘이서 통화하는 게 자연스러울 줄 상상도 못 했다고.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물론 레아 씨와는 많이 친해지긴 했지만, 솔직히 음성 채팅 요청하면서 속으로 긴가민가했거든요.”
-정말요? 전 찬영 씨가 모두랑 워낙 대화를 잘 나누니까, 저와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음, 그게 막 그렇진 않은데.”
물론 그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공적인 관계, 일 관계의 대화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막힘 없이 흘러나오니까.
하지만···.
“레아 씨는 좀 달라요.”
막 편하게,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라고 말하자.
헤드셋 너머에서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요.
“어, 안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 건 아니죠?”
-아뇨, 전혀요. 오히려···.
그 사이의 망설임.
말이 나오기 전까지의 공백이 신경 쓰여 가슴속이 간질거렸다.
-약간은, 특별 취급받는 것 같아서 좋아요. 저한테도 찬영 씨는··· 아무나가 아니니까요.
“···.”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간질거리는 감각을 넘어선, 그 이상의 무언가가 가슴속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
-찬영 씨가 한국에 돌아오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 저돌적인, 아니 몹시도 솔직한 말에 나는 잠시 대꾸할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한 박자 뒤에야 이렇게 말했다.
“···저도요.”
그렇게.
무려 한 시간을 넘긴 후에야 통화가 마무리되었다.
여전히 얼떨떨한, 그러나 몹시 기분이 좋은 채 책상에서 나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무나가 아니다, 라는 그 말이 뭐 그렇게 대수라고,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
연애를 아예 안 해본 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 모든 과정이 어색하게 느껴졌을 뿐.
내가 아직 누군가에게 이런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달까.
“추 녀석이 봤으면 당 수치 폭발이니 어쩌니 같은 소릴 했겠네···.”
입꼬리가 절로 막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문득, 그녀가 내게 하고 싶다는 말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나도 할 말이 한가득이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하기 전.
내 안에서 제대로 정리를 마친 뒤에 꺼내야 한다.
통화를 마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도 심장이 여전히 동요하는 가운데.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
그렇게 전날만 해도 분명 빨리 귀국하고 싶었건만.
다음 날 아침, 호텔을 나서자마자 온 사방에서 휘날리는 ‘앙굴렘 페스티벌’ 배너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은 쑥 들어가고 말았다.
[Bienvenue à Angoulême, ville de BD(만화의 도시, 앙굴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Le 9ème art : la BD(9번째 예술, 만화)]“와···.”
호텔이 시내에 자리한 덕분에 페스티벌 현장까지는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
나는 소박하고 정갈한 시내를 걸으며 탄성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 곳곳에 만화 벽화가 자리해 있네.’
땡땡이나 아스테릭스 같은 유명 만화 캐릭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이 앙굴렘에서 태어났다는 나바라 왕비 마르게리트까지 만화 형식으로 그려놓았다.
한국만화박물관 근방에서 주로 진행되는 우리나라의 부천국제만화축제와는 달리, 앙굴렘 페스티벌은 이 도시 전체에서 진행되는 식.
그래서 이 축제 기간 동안만 ‘BD 버스’라 불리는 버스가 돌아다니는데, 앙굴렘 페스티벌 패스를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무료로 탈 수 있다.
‘이 앙굴렘 페스티벌이 이탈리아의 루카 코믹스 앤 게임스, 일본의 코믹마켓과 더불어 세계 3대 만화 축제라고 했던가.’
그런 곳에 내가 와 있다니, 그것도 심지어 통역사로 일하러 와 있다니.
새삼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만화 팬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들 얼굴에 기대감과 흥분이 가득한 것이, 나한테까지 그 생동감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아, 이게 바로 드릉드릉하다는 기분일까.’
총 4일에 이르는 페스티벌 기간.
보통 원데이패스나 4데이패스를 끊어서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이 기간 동안 진행되는 행사가 워낙 많다 보니 미리 미리 체크해서 무얼 둘러볼지 정해놓는 게 필수라고 한다.
‘그리고 나는 어제 이미 체크해놓았지.’
오늘 통역은 두세 시면 끝날 테니, 그 후에는 온전히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는 터.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티에리 센터장에게 문자를 보냈고, 곧바로 답문이 왔다.
하하. 조금 격하다 싶은 환영의 표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현장에서 한국 웹툰작가들을 인솔 중이라는 프랑스어 코디네이터의 연락처를 보내주었다.
[미리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누고들 계시지요. 저는 한 시간 후에 미팅 장소에서 합류하겠습니다.]*
잠시 후.
나는 한국 웹툰 작가들 무리와 합류했다.
미리 만나서 이들의 주요 관심사를 파악하고, 티에리 센터장과 무슨 얘기를 나눌지 알아두는 것.
통역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서는 지나쳐서는 안 될 준비단계이니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과 티에리 센터장님 사이의 일대다 미팅 통역을 맡은 박찬영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을 얘기하자, 돌연 작가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진짜로? 진짜로 그 박찬영··· 맞죠?”
“네?”
“또찬영!”
나는 아하하,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진짜네요! 또찬영이다!”
“실물이다 실물!”
“완전 대박.”
“넘 반가워요!”
대부분이 20~30대 정도로 보이는 작가들이 나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래도 내이버 메인화면에 뜬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이런 반응이 나오리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들으려니 민망해하고 있는데.
이들을 인솔하는 프랑스어 코디네이터가 웃으며 말을 붙였다.
“티에리 센터장님께 박찬영 통역사님 얘기 많이 들었어요.”
“센터장님이요? 무슨 얘기를?”
내 통역에 관해서 얘기하신 건가 하고 은근 기대감에 젖어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웹툰 작가 중 한 명이 잽싸게 대답했다.
“통역사님이 오타쿠라고 하시던데.”
“···네?”
멍하니 대꾸하자 웃음기 띤 얼굴로 또 다른 작가 한 명이 말을 받는다.
“그래서 저희가 알려드렸어요. 한국에선 오타쿠란 말을 좀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으니, 그렇게 표현하시는 건 안 좋을 수 있다고.”
그 말에 나는 진심으로 안심했다.
“하하, 잘하셨네요.”
역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라 그런지 다들 센스가 있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대신.”
웹툰 작가의 이어지는 말에, 문득 불안해졌다.
“덕후라고 하시는 게 낫다고 알려드렸죠.”
“···.”
···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