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knight in a fantasy novel RAW novel - Chapter 63
63. 찰나의 추억(1)
무도회에서는 남자가 여성에게 춤을 신청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이글, 이글, 이글.
내 주변 모든 젊은 귀족들의 눈에서 뜨거운 열기가 이글거린다.
‘정신 차려! 거긴 지옥이야.’
물론 소리 없는 내 외침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욕망과 야망에 이성을 잃은 그들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 무리 같았다.
‘마족은 아니지만 고위 마족 못지않은 힘을 가졌으니…….’
지금의 아스카는 거의 무적이다.
♬~♩~♪
어느새 무도회를 장식하는 연주가 울렸다.
수많은 귀족들이 왕궁으로 몰려왔고, 젊은 귀족 영애는 정성껏 꾸미고 왔다.
하지만 연주가 시작되었음에도 그녀들은 나서지 않았다.
그녀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무도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마치 밥상머리 순서를 따지듯이 귀족 영애들은 아스카가 먼저 춤을 추기 전까지 어떤 교태도 부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
분홍빛 드레스에 루비 같은 붉은색 눈동자. 인형을 보는 듯한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
백금발의 머리는 평민들이나 하는 짧은 단발이었지만, 전혀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적이며 세련돼 보인다.
아마 이 무도회가 끝나면 모든 귀족 영애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짧게 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외모의 격에서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아스카에게서 나오는 여왕의 기품이 이곳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
“크흠!”
“왜 이렇게 떨리지……?”
방금만 해도 여왕에게 춤을 신청하려고 안달이던 귀족 청년들이 머뭇거렸다.
아스카는 말없이 무도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카리스마에 악단들이 연주를 실수하기도 했다.
“에휴, 저 성격이 어딜 가나 했다.”
나는 아스카가 왜 저렇게 접근 금지 기운을 풍기는지 눈치챘다.
또각, 또각, 또각.
조용한 왕궁 무도회장에 내 구두 소리만 또각또각 울렸다.
짙은 회색의 기사 제복에 검은색 예식 망토. 짧은 남색 머리에 여왕과 같은 붉은색 눈동자.
넓은 어깨와 탄탄하고 날씬한 몸. 무엇보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
나를 바라보는 귀족 영애들의 눈동자가 몽롱해진다.
남자 귀족들은 시기와 주눅 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공주님, 당신과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철저한 예법에 맞춘 군더더기 없는 동작.
“허락하노라.”
내 춤 신청을 받은 아스카는 마침내 무도회장을 압박하던 힘을 풀었다.
“휴우~.”
“갑자기 숨쉬기가 편해졌어.”
♬~♩~♪
조용했던 무도회장이 다시 떠들썩해졌다. 멈췄던 연주가 다시 즐겁게 울려 퍼졌다.
내 왼손은 아스카의 손을 잡았고, 오른손은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연주에 맞춰 나와 아스카가 무도회장 가운데에 섰다.
첫 춤이다 보니 귀족들 중 누구도 춤을 추지 않고 나와 아스카의 춤을 구경했다.
아스카는 각성하면서 몸도 성숙해졌다. 그래서 키가 전보다 자라 있었다. 그래 봤자 내 가슴팍에 이마가 간신히 닿을 정도지만.
“춤도 굉장히 잘 추는구나.”
“공주님이야말로.”
“나야 어마마마로부터 받은 게 있으니까.”
솔직히 나도 신기하다.
무도회 전날 만약을 대비해 연습해 둔 것이 전부였다. 역시 사기캐적인 몸이다.
“저…… 계속 오라버니로 있어 줄 수 있겠느냐?”
아스카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오빠라 불러도 돼.”
“오빠는 오글거려서 더 이상 무리다. 오라버니가 편해…….”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 후, 예전의 철없던 아스카는 더 이상 없는 거 같았다.
하루아침에 너무 성숙해진 여동생을 보는 기분.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애매하다.
“그나저나 그 많은 기억들을 전수받았는데, 정신적으로 괜찮은 거야?”
아스카가 각성했든 말든, 단둘이 있을 때는 그냥 편히 말해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얘한테 존대하는 것은 어색하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여동생에게 존댓말을 하는 기분이다.
아스카는 그런 내 태도가 오히려 좋은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전혀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기억들이라 크게 지장은 없다. 비유를 하자면, 필요할 때마다 서재에서 찾아 쓰는 식이다.”
인터넷 검색 같은 것일까?
“그래도 전처럼 철없이 빼액거리는 것은 도저히 못 하겠다. 오라버니를 오빠라고 부르면서 투정 부리는 것도…….”
지금의 아스카에게 과거의 아스카는 흑역사 그 자체인가 보다.
“정말 내가 그때 왜 그랬던 것인지…….”
자신의 흑역사를 떠올린 아스카의 귀가 붉어졌다.
“빼앗은 힘은 괜찮고?”
어쩌면 그녀의 인격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직 전부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했다. 8할 정도의 힘은 봉인해 놨다. 아마 죽을 때까지 다 소화하지 못할 것이야.”
고작 2할의 힘이 이 정도라니!
“그 힘을 다 쓰지 않는 것이 좋은 거야.”
‘앞으로 아스카에게 잘해 줘야겠군.’
속마음은 말과 달랐다.
각성한 아스카는 내 마음속에 대 율카네스 전용 히로인이 되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 발암에 구제 불능이던 아이가 이렇게 성장할 줄.
잘 성장한 딸, 혹은 철이 든 여동생을 보는 기분이다.
“그런데 혹시 10년 전 아르미다츠 반정과 관련된 기억도 전승받았어?”
“그건 받지 못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때 기억은 공백이다.”
아르미다츠 왕실에서 있었던 진실은 작가놈이 원작에서도 끝내 떡밥을 회수하지 않았다.
후반부에 로지가 어떤 경로로 그때의 진실을 알긴 했다.
하지만 직후 멘털이 터져서 제대로 된 설명 없이 뇌절에 뇌절을 치다가 완결을 내 버렸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오히려 너무 많은 기억을 받지 않아 다행일 수도 있어.”
‘마족 여왕. 이런 부분은 아주 꼼꼼하군.’
내 속마음을 모르는지, 아스카는 싱긋 웃었다. 그녀를 보는 내 눈에 담긴 감정을 좋게 해석한 모양이다.
어느덧 연주는 절정으로 흘렀다. 연주에 맞춰 나와 아스카의 춤도 절정이 되었다.
보통 이만큼 춤을 추면, 여자든 남자든 숨이 거칠어져야 한다. 물론 아스카와 나는 평온했다.
♬~♩~♪!!!
연주가 끝났고
짦으면서도 긴 무도회의 첫 춤이 끝났다.
아스카가 아쉽다는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와 떨어졌다.
처음 춘 상대와 이어서 계속 춤을 추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나와 아스카의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춤이 끝나자, 무도회의 연주가 다시 처음부터 은은하게 흘렀다.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 영애들이 부채를 흔들며 끈적한 시선을 뿌린다.
부채로 가린 입에는 수없이 연습했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공주님, 저는 헨리콧 백작가의 차남…….”
“공주님, 저에게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처음 아스카의 기백에 눌렸는지 아스카에게 춤 신청하는 남자들의 수는 크게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용기 있는 귀족 자제들이 아스카에게 도전했다.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귀족 영애들이 뜨거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3초 이상 눈 마주치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다.
‘좀 더 놀다 갈까?’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육체적인 충동 때문에 이상한 풍문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 이만 떠나 볼까?’
혹시나 아스카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해서 참석한 무도회였다.
저렇게 장성한(?) 아스카를 본 이상 이젠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으응?!”
귀족 영애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왕궁을 나서려는 내 눈에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저 아가씨가 왜 저기 있어?’
그러고 보니 본래 아스카의 곁에 있어야 할 그녀가 오늘따라 유독 보이지 않았었다.
‘비번인 줄 알았더니 여기 있을 줄이야…….’
폰테임의 여기사가 하라는 호위는 안 하고 무도회장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것도 하늘빛 드레스를 입고서.
짧게 잘랐던 붉은 머리카락은 가발을 이어 붙였는지 길게 땋았다.
늘 검만 휘두를 것 같았는데, 얼굴에 칠한 화장을 보니 의외로 수준급이다.
다른 사람들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눈앞의 레이디가 카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폰테임의 여기사는 부끄럽고 어색한 얼굴을 부채로 가렸다.
그러면서 눈은 계속해서 나를 힐끔 쳐다본다.
진짜 이름은 따로 있겠지만, 이렇게 꾸민 카인은 굉장히 예뻤다.
이미 몇 명의 남자 귀족들이 그녀에게 춤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설마, 나와 춤추고 싶은 건가?’
나를 향한 애처로운 눈빛.
저 눈빛을 거절하면 두고두고 귀찮아질 것 같았다.
‘그것이 정 소원이라면.’
안 그래도 지금까지 묵묵히 일해 준 것에 감사를 표해야 했다.
어떤 의도로 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가까이 가자, 그녀의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사방에서 그런 그녀를 질투하는 귀족 영애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나를 질시하는 남자들의 시선도 따갑다.
“레이디, 저와 함께 춤을 출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네?! 네!”
카인은 붉어진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무도회의 외진 곳에서 나와 그녀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녀의 춤 솜씨는 흐트러짐 하나 없다. 과연 기사의 신체에서 나오는 운동신경이다. 능숙하진 않지만, 실수도 없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춤을 추면서 나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카, 카디나, 카디나 샤인.”
‘그게 본명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렌슬렛에 찾아온 샤인 가문의 여식은 이 여자인 것 같다.
“샤인이라, 제가 아는 동료 중에 카인 샤인이라는 방랑 기사가 있습니다.”
“그, 그런가요? 저와 성이 같다니 이런 우연이…… 하하하…….”
“아아, 서로 모르는 사이시군요? 머리색과 눈동자 색도 같아서 가족인 줄 알았는데.”
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카디나를 지긋이 내려다보자, 카디나가 내 눈을 슬그머니 피한다.
“정말 모르는 사이인가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그게……!”
데구르, 데구르.
카디나의 짱구 돌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기분이다.
“사, 사실 카인 샤인은 저의 사촌 동생입니다. 그…… 워낙 역마살이 심해서 방랑 기사로 있었는데 용병까지 하고 있다니……. 숙부에게 말해야겠네요, 하하하…….”
없는 가족 관계까지 만드는 카디나의 노력이 애처롭다.
그래, 장난은 여기까지.
“그런데 저는 카인 샤인이 용병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는데요? 카인 경.”
“히이익!”
꽈직!
“!!”
내 말에, 깜짝 놀란 카디나의 스텝이 엉켰다. 엉킨 그녀의 구두 굽이 내 발등을 찍었다.
“크윽! 일단 저기 발코니로 가서 얘기하지, 카인 경.”
“……네.”
발등에 금이 간 것 같았다. 발이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절뚝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를 끌고 발코니로 향했다.
발코니에 배치된 의자에 앉은 나는 구두를 벗었다.
어느새 탱탱 부은 발이 아파 왔다. 그걸 본 카디나의 얼굴이 안절부절못한다.
우우웅~.
물론, 내 손에서 발휘된 치료 마법으로 금세 나았지만.
“카디나 샤인이 본명이야?”
“예…….”
“뭐, 여자의 몸으로 용병 일을 할 바엔 남장하는 게 속 편하긴 하지.”
나는 왕궁 밖 전경을 보았다.
왕궁에서도 무도회가 한창인데 수도라고 조용하란 법은 없다.
수도의 일반 백성들도 오늘 하루만은 밤새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었다.
“무도회는 왜 나온 거야?”
“그, 그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카디나.
“됐어. 그렇게 말 못 하는 거면 사연이 있겠지.”
거친 일을 하지만, 그녀도 여자다. 당연히 이런 곳에 나와 보고 싶었겠지.
“감사합니다.”
“대신, 한 가지만 제대로 확인하자.”
“……네.”
“네가 여기 온 거, 폰테임 후작가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내 말에 카디나의 두 눈이 지진이 난 것처럼 크게 흔들린다.
“…….”
“전에 렌슬렛에서 검을 맞댔던 붉은 머리의 여기사, 바로 너잖아?”
내 추궁에 카디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 줄 몰랐다.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덥석, 척.
나는 고개 숙인 카디나의 턱을 한 손으로 잡았다.
“!!”
그리고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떨리는 카디나의 푸른 눈이 나의 붉은 눈과 맞닿았다.
“이 부분을 밝히지 않으면 나는 당신과 함께하지 못해, 카디나.”
내 진지한 말에 카디나는 뭔가 결심을 했는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녀의 양손은 주먹을 쥐었는데, 얼마나 힘을 줬는지 부들부들 떨 정도다.
이윽고 카디나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더니, 쪼옥!
그녀의 입술과 나의 입술이 포개졌다.
“?!”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