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22
122
교전을 관전하던 토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라노의 발치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또렷한 형상을 갖춘다.
암살자를 상징하는 대표 스킬, 「환영정위」다.
사령술사는 다급히 의념을 흘려보냈다.
‘이스라, 절대 응전하지 마세요.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라노가 양팔을 겨드랑이에 끼우더니, 고개를 비틀었다. 동시에 그림자 역시 고개를 기울이고.
토드의 말이 닿기도 전에 암살자는 표범처럼 뛰쳐나갔다.
투타타타탕—!!!
철판 두드리는 소리가 격렬하게 울려 퍼진다.
기관총처럼 단숨에 맹공을 쏟아부은 라노는 제자리에서 한 걸음씩 움직이며 이스라의 검격을 피해냈다.
안광을 가늘게 뜬 파멸의 기사가 의념에 응답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순 없네. 토드. 그랬다간 저 계집이 자네를 잡으러 갈 걸세.】
이 게임에서 상성 관계는 빌드나 장비 세팅에 따라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단순히 보면 기존의 도적-마법사-전사 구도를 답습한다. 고전 RPG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게 의도였으니까.
그러나 환영정위가 발동된 상태에서 암살자는 모든 수치가 2배로 상승한다.
완성된 캐릭터 앞에선 상성조차 무의미하다.
라노는 명백히 규격을 넘어선 강자다.
그녀는 여태껏 사용하던 스틸레토 대신, 창백한 빛의 샴쉬르를 역수로 쥐고 있었다. 소모품이 아닌 주 무장까지 꺼내 들었다는 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승부를 보겠다는 의미.
‘이스라가 버틸 수 있을까?’
토드는 초조하게 침을 삼켰다. 엄밀히 이스라는 정석적인 탱커라기보단, 근접 딜러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녀가 구가하는 검술도 수동적인 방어나 회피보다는 적극적인 공세에 치중되어 있다.
단숨에 피해를 몰아넣는 암살자를 상대론 삐끗했다간 곧장 죽음이다.
이스라가 결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인은 위치를 사수하겠네.】
‘······알겠습니다. 3분. 3분만 버티세요.’
환영정위는 토글형 스킬이다.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양의 마력을 소모한다.
암살자는 마법사 계열이 아닌 만큼, 최대 마력이 많지 않다. 그만한 마력 소모를 오랫동안 감당할 수 없었다. 레벨 99의 스펙을 감안해도 길어봐야 3분 정도.
‘지금부터 제 지시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라노의 몸이 흐릿해졌다.
‘암살자의 칼은 그냥 맞아주고, 최대한 그림자의 공격을 막는 데 집중하세요!’
이스라는 몸을 틀지 않고, 정면에서 파고드는 거뭇한 칼날을 막아 세웠다. 샴쉬르가 그녀의 어깨를 찔렀다.
터엉!
다행히 본체의 공격은 갑주에 튕겨 나갔다.
이스라는 그림자의 칼날을 받아내곤, 거칠게 그림자를 몰아냈다.
환영정위는 본체보단 그림자가 가하는 고정 피해가 핵심이다. 라노의 칼날을 피하진 못하더라도, 고정 피해는 갑주의 방어력으로 무시할 수 없다.
토드는 이스라가 파멸의 기사로서 자체적으로 지닌 내구력을 믿었다.
5초.
‘그림자는 본신과 반대로 움직입니다. 마력은 충분하니 검기는 최대한 강하게 유지하세요. 그림자만은 놓쳐선 안 됩니다.’
【알겠네!】
망자의 안광에 열의가 맺혔다.
파멸의 기사는 암살자의 공격을 갑주로 받아내며 그림자의 움직임만큼은 철저히 봉쇄했다.
타타탕!!
변함없이 가공할 속도다. 거의 번개처럼 희번덕대는 인영을 좇느라 토드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10초.
곡도가 갑주와 목 사이의 틈새를 노리고 들어온다. 이스라는 급히 팔을 들어 막곤, 그림자의 칼날을 쳐냈다.
콰지직!!
손목을 보호하는 부위가 절개되었다. 파멸의 기사가 발을 구르며 장검을 세차게 휘두르자, 그림자와 본체가 동시에 물러났다.
다시 라노의 몸이 그림자처럼 흐릿해진다.
물결친 환영이 좌우로 동시에 이스라를 압박했다.
안광을 번뜩인 파멸의 기사는 오른발부터 내딛는 쪽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후웅!
그녀의 선택은 정답이었다. 이스라의 검격에 환영의 흐릿한 어깻죽지가 찢겨나갔다.
그러나 라노의 샴쉬르는 팔꿈치에 적중했다. 폴드론을 뚫고 들어온 칼날에 이스라의 팔이 삐걱댔다.
【흠!】
파멸의 기사는 안광조차 깜빡이지 않고 힘껏 팔을 끼워맞췄다.
뚜두둑!!
30초. 드디어 읽었다.
숨도 쉬지 않고 둘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토드가 눈을 번뜩였다.
‘정면 하단에서 찌르기 들어옵니다. 막고, 올려치세요.’
터엉!!
샴쉬르가 반 바퀴 돌아갔다. 이스라의 단호한 응수에 라노가 휘청인 사이, 그림자가 쇄도했다.
‘좌측으로 두 걸음. 흘려보내고 칼자루로 밀어내기.’
간격을 유지한 채 내딛는 발걸음에 도리어 그림자가 빨려 들어왔다. 검날을 부여잡은 이스라는 그림자를 가볍게 타격했다.
뻐억!!
형체가 없는 그림자라도, 검녹색 휘광은 유효타로 들어간다.
40초.
토드의 지시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본체는 무시합니다. 어깨로 받아주고, 뒤에서 들어오는 상단 베기 막으세요. 아마 모습을 감출 건데, 천장에서 옵니다. 머리 보호한 다음, 사선으로 걷어내세요.’
파멸의 기사는 지시를 이행하기에 충분한 그릇이었다. 이번에도 샴쉬르가 갑옷 상부를 긁고 지나갔으나, 어차피 망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몸을 튼 이스라는 암살자의 움직임에 현혹되지 않고 그림자에만 대응했다.
카앙——!
그림자의 급습이 또 한 번 막혔다. 이번엔 검녹색 기운이 그림자를 베었다. 점점 신형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우측 벽면!’
콱!!
【크으!】
워낙 신출귀몰한 움직임에 이스라가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바닥 찍고, 측면에서 찌르기 흘려내세요.’
【무릎 꿇어라!!】
투지를 실은 파멸의 기사가 묘실의 바닥을 힘껏 내리찍었다.
콰앙——!!
묘실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과 더불어 이스라를 중심으로 판석들에 실금이 생겼다.
바닥에서 암습을 준비하던 그림자가 튕겨 나간다. 장검을 바로잡은 이스라는 라노의 일격을 막아 세웠다.
카가가각——!!
맞부딪친 곡도와 장검 사이에서 불꽃이 일었다. 환영정위의 버프를 받은 라노가 미세하게 밀어내는 형국이었으나, 이스라는 굳이 힘으로 맞상대하지 않고 물러섰다.
1분 경과.
비스듬히 샴쉬르를 세운 라노가 중얼거렸다.
“···움직임이 달라졌네?”
【하, 하! 하. 무릇 기사라면 모든 환경과 상대를 상정한 싸움법에 통달해야 하는 법! 네놈 같은 시정잡배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건 일도 아니다!】
연신 이스라를 훑어내리던 라노는 특히 투구 속 안광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차게 타오르는 녹색 불꽃 속에서 암살자는 그 배후에 도사린 존재를 인지했다.
그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흐··· 계속 소환수 뒤에 숨어있겠다, 이거지?”
토드는 라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다가, 그녀가 품에서 꺼내든 물건에 집중했다.
벨트에서 풀려나온 은사(銀絲)가 휘리릭, 손아귀에 잡히더니 바닥에 흘러내린다.
흔히 암살 도구로 활용하는 와이어의 일종이었다.
‘중무장한 상대론 소용없을 텐데, 왜?’
의아해하던 토드는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태껏 라노의 사지에만 주목하고 있었다. 암살자가 보이는 특유의 움직임은 그가 플레이하던 시절과 동일했다.
비록 시간이 흐른 뒤라 좀 더 정교해진 느낌이 물씬 풍겼으나, 어차피 모니터 너머로 모션을 보고 반응하던 시절과 직접 눈으로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예측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스라의 눈을 빌린다면 후자가 더 쉽다.
그런데 미처 라노의 시선은 의식하지 못했다.
어느새인가 그녀는 이스라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스라 뒤에 숨어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자신의 시선을.
‘이스라! 달려드세요!’
토드의 명령에 이스라는 의문을 품지않고 즉각 돌진했다.
‘어떻게든 저 실을 휘두르는 것만은—’
뚜둑!
끊어지는 소리.
마지막으로 본 것은 라노가 허공을 향해 은사를 휘두르는 장면이었다.
뜨끈한 액체가 코를 타고 흘러내린다.
의식을 갈무리한 토드는 황급히 수중의 망자를 확인했다.
‘계약이 끊어진 건 아냐. 그런데 이스라와 나를 잇는 마력을 일시적으로 차단했군.’
정말 미세하게 이어진 마력 가닥을 찾아내고, 그걸 끊어낼 줄이야.
토드는 입술을 곱씹었다.
‘···그간 나만 성장한 게 아니겠지. 저 녀석들은 계속 여기서 살아왔을 테니.’
남은 시간 1분 30초.
이제 토드의 개입은 요원해졌다.
미약하게 이어진 결속 너머, 이스라가 동요하는 감정이 전해진다.
“산시아, 부탁합니다.”
“네. 스승님.”
토드는 손을 펼쳐 산시아를 향해 피의 업을 흘려보냈다. 점점 여인의 육신이 뒤틀리더니, 연약한 살갗을 찢어발기고 흉포한 맹수가 튀어나왔다.
네 발로 내달린 산시아가 즉각 합세했다.
묘실에서 울리는 진동이 거세졌다.
1분 40초.
—크아아아!!
광오한 울림에 토드조차 휘청였다.
발톱의 파공음, 이스라의 갑주가 철컹대고, 살점 저며내는 소리, 으르렁대는 산시아의 울음, 비산하는 파편과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부식.
그 속에서 토드는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날렵한 발재간을 구별했다.
‘아직 지상의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나?’
성인들의 유해는 이스라처럼 결속이 그리 강하지 않아서, 시야가 공유되지 않는다. 수녀원을 습격했다면 아마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다.
원군을 요청하러 갔다던 로이니스는 어디에 있는 건지.
토드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2분이 지났다.
뼛조각들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산시아의 주문일 것이다. 여전히 암살자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빗나갔다.
2분 10초. 묵직한 금속 따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2분 20초. 포효한 산시아가 암살자를 덮쳤으나, 연기 터지는 소리와 더불어 재빠르게 벽을 탄다.
2분 30초.
2분 40초.
2분 50초.
‘······3분.’
주변이 고요해졌다.
사령술사는 자신의 손바닥을 긋곤, 넋의 거울 위에 피를 뿌리며 읊조렸다.
“내가 그대를 부르노라. 여기 기거하는 혼령들에게 호소하나니···”
스릉.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쉿.”
청색 샴쉬르가 은은한 빛을 뿌린다. 어둠 속에서 암살자가 미소를 그렸다.
“일어나.”
순순히 몸을 일으킨 토드는 양손을 든 채로 석관에 앉았다.
라노가 태연히 담뱃대를 꺼내 드니, 그림자가 그녀를 대신해 부싯돌을 긁었다.
볼을 쭉 빨아들이던 암살자는 연기를 뱉으며 토드를 훑어내렸다.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레벨 50도 안 됐네. 어떻게 주인이 소환물보다 약할 수 있냐?”
토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보시다시피 사령술사의 전력은 하수인으로부터 비롯되니까요.”
인상을 찡그린 그녀는 연신 꼴꼴거리며 연기를 머금었다.
“너, 여기 온 진 몇 년 됐냐?”
“아마 올해로 16년 차였던가요.”
콜록거린 라노가 담뱃재를 털어내며 인상을 썼다.
“그것밖에 안 됐다고? 씨팔, 사기캐잖아? 밸런스 좆망겜이네.”
이건 좀 억울했다.
“여기서 10년간은 교회의 추적을 피해 다니느라 은거했습니다. 그 외에 5년은 기본기만 수양하고, 생존에만 급급했고요.”
라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그간의 성장세가 불과 1년 만에 벌어졌다는 거네?”
“활동하기에 좋은 여건이 갖춰진 뒤에 본격적으로 나선 거죠. 제국을 비롯해 온 땅이 혼란스러우니까요.”
녹색 눈동자가 사이한 빛으로 일렁였다.
“이럴 때일수록, 저나 당신이나 암약하기에 적합한 시기이지 않습니다.”
암살자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건 그래. 요즘만큼 장사가 잘 되는 때도 없어. 그렇지 않아도 너 말고도 밀린 의뢰가 많아. 돌아가면 또 일해야 해. 죽은 녀석들도 새로 뽑아야 하고.”
“나름 바쁘신 분이군요.”
가만히 연기를 흘리던 라노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대공이 널 눈여겨보고 있어.”
그녀가 가리키는 대공은 토드도 익히 알고 있는 자다.
황소대공 콘라트. 차기 황위를 노리는 주장자.
쾨흘링 분쟁과 에다리크의 소동을 모의한 원흉.
하나 같이 자신과 정적 관계에 있는 제후들을 견제하기 위한 모의였겠지만, 의도치않게 토드가 죄다 분쇄했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벌이신 계획에 제가 죄다 훼방을 놓았으니, 적잖게 성가시겠지요.”
라노가 샐쭉하게 웃었다.
“맞아. 그래서 내가 온 거야.”
라노는 비스듬히 단검을 세우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도 대공은 네 능력을 인정했어. 나처럼 그 녀석을 따라. 누구보다도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는 놈이야.”
“···흑마법사들과 대놓고 협력 관계에 있는 분에게 황제 자격이 있다고 보십니까?”
대번에 그녀가 코웃음 쳤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선악의 구분 따위는 없어. 왜 흑마법사들이 암암리에 살아있는지 알아? 교회가 어느 정도 묵인했기 때문이야. 그 녀석들은 교회가 손대지 못하는 더러운 치부를 기꺼이 처리해주거든.”
손가락을 들어 올린 라노가 토드를 가리켰다.
“네가 속한 교단은 순전히 정치적 이해에서 멀어졌기에 지워진 거야. 아마 당시에 공동의 적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만큼 여긴 모든 게 이해관계에 따라 돌아간다고.”
토드의 뒤에 선 그림자가 칼자루를 빙글빙글 돌렸다.
“네가 원하는 건 사령술사 집단의 재건이라며? 대공은 서부 대교구의 지지를 받고 있어. 네가 그 녀석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너를 정식으로 공표하고, 다른 마탑들처럼 제국 내 기관으로 지정해줄 거야.”
“흠,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데요.”
“콘라트 그 녀석이 좀 음흉한 구석이 있어도, 신의만큼은 절대적으로 지켜. 그래서 따르는 놈들이 많지. 어차피 그 녀석한테 붙으면 엔딩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다니깐?”
토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엔딩이요?”
“그래. 이 세상의 종점 말이야. 너도 플레이어잖아? 네게도 주어진 사명 같은 게 있을 거 아냐. 그걸 달성하면 모든 걸 이룰 수 있다고.”
선명한 미소가 맺힌 라노와는 대조적으로, 토드의 눈은 점점 가라앉았다.
“······그걸 위해서 콘라트와 협력하라는 겁니까? 흑마법사나 사교도를 비롯해 무저갱을 추종하는 자들은 반드시 척결해야 합니다. 그들은 지옥의 도래를 간절히 원합니다.”
토드가 단호하게 읊조렸다.
“그들과는 공존해선 안 됩니다. 이 세상이 멸망할 텐데요.”
이에 라노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 바야?”
“예?”
히죽 웃은 암살자가 뇌까렸다.
“어차피 결말을 보고 나면, 난 이 세상을 뜰 텐데. 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이, 거지 같은 몸뚱이를 벗어나서라도.”
“······어째서요? 이 세상,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 라노가 반문했다.
“여긴 가짜야. 전부 허상이라고. 아무리 그럴싸하게 꾸며놨더라도, 진짜를 모방한 열화판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자신의 손을 번갈아 보이며 중얼댔다.
“난, 이 역겨운 몸의 감각조차 믿지 않아. 엄연히 진짜 나는, 남자였어. 난 이 살덩어리에 갇혔다고. 그러니까 난 나가야만 해.”
입가를 비튼 라노가 속삭였다.
“내가 진짜라고 믿는 건, 오롯이 생각하고, 의심하는 나 자신의 의식이야. 그 외에 다른 건 믿지 않고, 생각할 가치도 없어.”
“···그렇군요.”
사뭇 자신을 응시하는 암살자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난 네가 가짜라고 생각했어. 어설프게 흉내 낸, 누군가의 농간이라고 여겼거든. 근데 직접 보니··· 아직 좀 부족하지만, 시간만 지난다면 나보단 못하더라도 엇비슷한 위치까진 올라설 수 있을 거야.”
검날을 거둔 라노가 덧붙였다.
“합리적으로 생각해. 콘라트와 손을 잡고, 빠르게 여길 마무리 짓고 결말로 나아가자고. 정 이 세상이 마음에 든다면,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난 돌아갈 테니, 넌 여기 남아 입맛대로 새로운 세상을 주무르던, 알아서 하라고.”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어때? 너와 나, 콘라트까지 합세한다면 게임 끝이야.”
라노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흘렸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토드가 입을 떼었다.
“당신의 제안은 극히 효율적입니다. 당신은 이미 초월자의 경지에 이른 존재이니, 당신과 대공의 조력이 더해진다면 앞으로 황권을 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도 수월해지겠죠.”
제안이 통했다고 생각한 건지, 라노는 그림자까지 거둬들였다.
그걸 지켜보던 토드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정적들이나 주요 지휘관들은 내가 닦아줄 테니, 전투에선 네 소환수들을 동원하면 상황은 금방···”
신나서 지껄이는 라노를 향해 토드가 단호히 묵살했다.
“허나 거절하겠습니다.”
손을 내밀었던 라노가 우뚝 멈춰섰다.
“뭐?”
사령술사는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전 이 세상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제겐 여기가 진짜고, 제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로 넘쳐나는 곳입니다.”
표정이 굳은 암살자는 담뱃대를 꺼트렸다.
“오픈월드에 정말 결말이 필요할까요? 그렇게 효율을 따져가며 종지부를 찍어야 할까요?”
점점 가시화되는 살기 때문에 솜털이 돋을지언정, 토드는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이 세상이 계속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고로 당신을 비롯해 콘라트 대공의 제의는 거절하겠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때론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토드에게 있어선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러했다.
이 자리에 선 두 광인은 서로의 배치(背馳)를 명확히 확인했다.
입가를 씰룩인 라노가 손을 까딱였다.
“정 우리를 방해할 생각이라면, 여기서 뒤져.”
토드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좆까. 아, 이미 깠던가? 가엾게도.”
라노가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이 씨발 새끼가···!”
‘둘라한.’
암살자의 기척 감지도 마력이 남아있을 때나 가능하지. 라노는 그녀의 배후에 접근한 망자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목 없는 몸뚱이가 마르커스의 모가지를 쥔 채 선언했다.
【광명이 여기 있으라!】
눈부신 섬광이 라노와 토드 사이를 가로막았다.
카앙!!
샴쉬르가 코앞에서 가로막혔다.
진짜, 0.1초라도 늦었다면 죽었다.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이제 라노가 느낄 한기보다 더하진 않을 거다.
“시원한 곳에 보내드릴 테니, 가서 머리나 식히고 오시길.”
토드는 피로 얼룩진 넋의 거울을 움켜쥐곤, 라노의 앞에 겨눴다.
으직.
암살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허우적대는 무수한 손아귀가 그녀를 향해 엄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