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62
162
헤젤슈마흐 가문은 뿌리가 오래된 만큼 방계 혈족 또한 방대하다. 그럼에도 직계 일족의 권세가 워낙 대단했던 탓에 가문 내에서 가주인 리케르트의 입김은 여전했다.
이에 따라 가신 회의는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회의실을 나선 무리들은 저들끼리의 회담에선 어김없이 속내를 드러낸다.
“···수렵제로 후계자를 발탁하겠다니. 기어코 리케르트가 노망이 난 모양이야.”
알데릭 제국백이 서슴없이 험담을 늘어놓았다.
비록 그의 일가는 직계에서 멀찍이 떨어진 탓에 피는 옅지만, 선대에서 줄을 잘 탄 덕분에 가문 내에선 리케르트 다음으로 권세가 막강한 제후였다.
특유의 처세술 때문에 혹자는 그를 가리켜 사자 핏줄에서 난 여우라 평하곤 했다.
그가 앞서 포문을 열자, 가솔들이 일제히 리케르트를 성토했다.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이성의 시대인데, 우리가 북방 야만인들도 아니지 않습니까!”
“신록의 기사가 나타났다니. 원. 차라리 뒷산에 용이 날아와 가축들을 물어 죽였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지.”
표면상으론 리케르트의 입지가 절대적일지 몰라도, 가문 내에선 상속 문제를 두고 불만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미련하게 후처를 들이지 않고 어영부영 세월만 보내더니,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릴 줄은.”
후계자를 안배하지 못한 것은 영주로서 죄악이다. 암암리에 그의 귀추를 두고 무성한 소문이 이어졌으나, 수렵제를 개최하겠다는 선언은 그들로서 그리 달갑진 않았다.
“아무리 리케르트가 대공령의 군주라도, 이는 지엄한 상속법을 능멸하는 처사요! 원래라면 그의 조카이자 라눌프의 아들인 파르지발이 대공위를 상속하는 게 마땅하지 않소이까.”
친척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눌프는 우리에게 고분고분한데다, 파르지발은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덕성을 지녔지.”
그들은 정통성은 갖췄으나, 위세가 한미한 파르지발을 가주로 앉히고 요량껏 주무를 계획이었다.
“그깟 요술로 자아낸 숲이 피어났다고 해서 제국 대공위의 후계에 정통성을 부여해주나?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그게 가능했다면 황제 자리도 버섯에 취한 드루이드 놈이 떠드는 헛소리로 뽑지 않았겠소.”
면전에선 웃는 낯으로 굽신대던 자들도 열렬하게 리케르트를 곱씹어댔다.
“그나마 남은 딸자식 중에 장녀가 약혼을 하루 앞두고 도망쳤다더만. 어떻게든 리케르트가 이를 수습하려 가신을 닦달했는데, 이젠 생사도 모르는 모양이라지.”
“쯧쯧, 벌써 과년한 처녀라고 하지 않았던가? 철부지가 따로 없군. 나라도 정신이 나갈 법도 해. 기껏 아벤츨라우 궁중백 같은 유력자와 주선해놨는데, 판이 엎어졌으니.”
가만히 화제를 경청하던 알데릭이 입을 열었다.
“우리로선 리케르트와 궁중백의 화합이 수포가 된 건 환영할 일이다. 어쨌거나 수렵제가 당면한 이상,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파르지발이 수혜를 입도록 도와야만 한다.”
좌중을 돌아본 알데릭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자네들도 내 의중에 동의하리라 믿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어르신, 좀 전에 리케르트의 차녀가 저택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수렵제에 데려갈 용병을 물색하는 모양인데,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얼굴을 찌푸린 제국백이 중얼거렸다.
“알레시아라고 했던가. 그 녀석도 제 아비를 닮아 맹랑한 구석이 다분하다고 들었네.”
“그래 봐야 별반 위협이 되진 못할 겁니다. 이미 콘라트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은 자자하지요. 제국에서 어지간한 실력자들을 그가 황금으로 죄다 쓸어갔는데, 마땅히 남은 인물이 없을 겁니다.”
입맛을 다신 알데릭은 침음을 흘렸다.
“속단할 순 없네. 헤젤슈마흐의 대공녀가 사람을 모은다면 따를지도 모를 일이지 않나.”
다른 가신이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리케르트는 자신이 직접 신록의 기사로부터 계시를 받아 수렵제를 주최하였으니, 원천적으로 과정에 개입하진 않겠다고 했지요. 그렇다고 이를 우리가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는 노릇이고요. 어쩌면 수렵제를 빌미로 그 계집한테 상속권을 물려줄 계획일지도 모릅니다.”
모두의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은밀히 그의 기사가 속삭였다.
“각하. 그간 리케르트가 칩거했던 탓에 대공령 외곽과 인접한 봉역들은 적잖게 소란스럽다고 합니다. 약탈자들까지 떼 지어 돌아다니고 있다 하니, 명하신다면 ‘사소한 소란’으로 몰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수하의 말에 알데릭이 반문했다.
“가뜩이나 리케르트가 장녀까지 잃었는데, 생각이 있다면 호위대를 단단히 갖춰두지 않겠나. 섣불리 행동하지 말게. 자칫하다간 자네나 나나 그놈에게 목이 달아날 수 있어.”
제국백의 신중한 태도에 기사가 재차 답했다.
“콘라트 대공 전하께서 직접 선별하신 인원들입니다. 제아무리 헤젤슈마흐의 직속 호위대라 하더라도, 권역을 벗어나면···.”
말꼬리를 흐린 기사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이에 알데릭은 굳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황소대공이? 그 작자가 뭐하러 우리에게 호의를 베푼단 말인가.”
입술을 달싹인 기사가 혀를 놀렸다.
“소식통에 따르면 아벤츨라우 궁중백은 약혼이 급작스럽게 결렬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있다 하더군요. 그가 대공녀의 신병을 원하는 모양입니다.”
“그걸 알고 대공이 접근한 모양이로군.”
“일단 차녀를 볼모로 잡아두면 라이히슈타크에서 그를 압박할 수 있고, 자연히 수렵제에서 파르지발과 경쟁할 상대도 배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국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맹랑한 계집이 입을 열기라도 했다간? 리케르트라면 자기 딸을 구해내기 위해서 대공과 궁중백을 상대로 동시에 전쟁도 불사할 위인이라네.”
“추후 궁중백의 병력들이 대공녀를 구출하는 식으로 모의하고, 리케르트와 협상을 벌일 계획이시랍니다. 일단 수렵제가 종결된 뒤에, 각하께서 가신들과 더불어 그를 압박한다면 당해낼 재량이 없을 겁니다.”
“설마 그 작자들이 흑마법사들은 아니겠지?”
알데릭의 우려에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듣기론 흑마법과 일절 관련 없는 전문적 용병대라고 합니다. 대공께서 신뢰할 만한 이들이라면야.”
“···허면 그 계집의 동선은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행선지를 장담할 수도 없는데.”
기사가 눈웃음을 그리며 속삭였다.
“대공녀의 수행단 중에 미리 사람을 심어뒀습니다. 연락 수단은 진작 갖춰놨지요.”
둘의 은밀한 모의에 가신들의 시선이 쏠려있었다. 알데릭이 손을 까딱였다.
“···이 건은 최대한 은밀히 처리하게.”
“예. 각하.”
방문을 나선 기사는 복도에서 창틀을 열어젖혔다. 휘파람을 불자 밖에 있던 전서매가 그의 팔뚝에 날아들었다.
부리에 고깃덩이를 물려준 그는 발목에 쪽지를 달아주곤, 매를 날려 보냈다.
창틀은 조용히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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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스름이 남아있는 모래사장에 유유히 범선 한 척이 닻을 내렸다.
“여기가 슈빈슬라우 백국이오! 동쪽으로 틀어서 올라가면 헤젤슈마흐 대공령이니 알아서들 찾아가시게!”
선원의 외침에 쇠렌이 히죽 웃었다.
“고마워이! 코발레프! 잘 돌아가라고!”
토드는 물에 젖은 망토 자락을 추켜올리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배가 빠르긴 하군요. 설마 사흘 만에 북해를 가로질러 도착할 줄이야.”
고개를 끄덕인 쇠렌은 주섬주섬 허리춤에 집어넣었던 지도를 꺼냈다.
“일찍 도착하긴 했어도, 가는 길에 마차를 구하지 못하면 일정이 빠듯할 거요. 헤젤슈마흐 대공령은 어지간한 왕국만큼이나 드럽게 넓은 땅이니!”
“그럼 서두릅시다.”
그런데 쇠렌이 헛웃음을 흘리며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사령술사 양반. 기사 나리는 당장 움직일 형편이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보니 이스라는 경배를 올리듯 모래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어억.】
투구 속 안광이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거기에 연신 몰려오는 물결에 해초나 모래까지 끼얹은 탓에 정말 다 죽어가는 시체가 따로 없었다.
“이스라, 괜찮습니까?”
【우욱···! 배는··· 비열한 해적이나 천박한 선원 놈들이나 타는 것이다! 무릇 기사라면, 평생 땅을 딛고 살아가야 하거늘···】
“음, 아직 헛소리하는 걸 보니 상태가 그리 최악은 아닌가 봅니다. 그래도 걷는 건 힘들어 보이네요.”
머리를 긁적인 쇠렌은 이스라를 훑어내렸다.
“거참, 덩치도 상당한 양반이 엄살은. 생전에 물가 쪽이랑 인연이 없는 지역에 살았던 모양이오?”
그러고 보니 헤젤슈마흐 대공령은 내륙에 있다. 물가라고 해봐야 강이나 호수가 고작이었을 거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이스라가 무릎을 꿇었다. 파멸의 기사가 결연한 어투로 읊조렸다.
【토드, 본인을 여기 버리고 가게···!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하지 않았나! 본인은 추후 블루레이를 꺼내 합류할 테니···】
토드가 혀를 차며 그녀를 부축했다.
“그랬다간 화염에 휩싸인 말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질 겁니다. 쇠렌 씨, 좀 거들어 주세요!”
“환장하겠구먼. 이래서야 도착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쓰러지는 게 빠를 거요! 이런, 젠장. 보통 무거운 게 아닌데···!”
사실상 토드의 빈약한 근력으론 도움이 되지 않았던 탓에 실질적으로 이스라를 질질 끌고 가는 건 쇠렌의 몫이었다.
겨우 모래밭을 벗어나긴 했으나, 두 사내의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진땀을 훔친 쇠렌은 꾸깃꾸깃 구겨진 파멸의 기사를 풀밭애 내던져두곤 술병을 비웠다.
“여긴 일반적인 농민들이나 상행이 다녀가는 길목이 아뇨. 이쪽 동네도 동부 변경만큼이나 흉흉한 동네라, 뭔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귀를 기울여보니 칠흑빛 갑옷 속에선 낮게 신음만이 들려왔다.
···이미 죽은 듯하다.
토드는 투구 위에서 천천히 향로를 흔들었다.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어차피 안개가 금방 걷힐 것 같진 않으니, 우릴 감춰주겠죠.”
토드와 달리 주변에 자욱한 안개가 꺼림칙한지, 쇠렌은 어깨를 떨었다.
“반대로 누가 접근해와도 모른다는 거잖소. 옘병, 술을 마셔도 으시시한 느낌이 떨어지질 않네.”
타앙!!
불현듯 울려 퍼진 총성에 즉각 쇠렌은 몸을 엎드렸다. 토드도 이스라 옆에 바짝 누워 바삐 눈알을 굴렸다.
얼굴이 창백해진 쇠렌이 낮게 외쳤다.
“이런, 씨벌. 설마 우릴 노리고 쏜 건 아니겠지?!”
주변의 감각에 집중한 토드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가늠했다.
“···거리가 꽤 있습니다. 소리를 들어보니 흔히 쓰이는 화승총은 아닌 것 같은데요?”
도적들이 노획했던 물건이나 이리공 수하의 병사들이 운용하던 화기에 비하면 총성에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황급히 바위 뒤로 잽싸게 몸을 날린 쇠렌이 말했다.
“일단 총이 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야. 요즘 시대엔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도 납탄 한 발이면 대갈통이 따이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어느새 초록빛 안광이 허공에서 사납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진정한 기사라면, 그깟 야만적인 무기에 굴복하지 않는 법!!】
“이런, 씨팔! 깜짝야!”
비명을 토해낸 쇠렌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가 가슴팍을 부여잡은 채 헐떡였다.
“제기랄! 거! 기사 양반! 그리 눈 좀 부리부리하게 치켜뜨지 마쇼! 불알 떨어지는 줄 알았네!”
쇠렌의 하소연에 이스라는 그의 어깨를 억세게 두드렸다.
【하, 하! 하. 장물아비. 자네는 목청이나 줄이는 게 좋겠군! 그랬다간 적들에게 우리의 위치를 드러내는 셈이 아닌가?】
이스라의 말에 쇠렌이 불안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저, 적? 설마 저쪽을 상대하겠다는 거요? 몇 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총성이 들려온 쪽은 잠잠해졌으나, 미세한 소음이 간간이 바람에 실려 있었다.
“···운이 좋다면 저들 중에 말을 끌고 온 자도 있을지 모를 일 아닙니까. 시간 단축도 할 수 있겠지요.”
불길한 미소를 흘린 사령술사는 향로의 뚜껑을 열었다.
사아아···
흐릿한 향연이 그들 위로 덧씌워진다.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
지금은 솔마르가 아닌, 자애로운 어머니께서 보살피는 시간이다.
“무슨 상황인지. 한 번 가봅시다.”
짙은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번뜩이는 두 쌍의 녹광에 쇠렌은 울상을 지으며 엉금엉금 따라갔다.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 보니 반파된 마차가 한 대 있었다.
‘피비린내.’
주변엔 온통 쓰러진 자들의 육신이 널브러져 있었고, 말은 죄다 죽어 있었다.
마차에서 무언가를 빼내고 있는지, 내부에 있는 인원이 다섯. 주변을 지키는 놈이 열 명.
그 외에 거리를 벌리고 수풀 쪽에서 엄폐하고 있는 놈이 열댓 가량.
쇠렌도 몸을 낮춘 채 숨을 죽인 가운데, 돌연 이스라가 어깨를 들썩였다.
【우욱.】
아직 뱃멀미 기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세한 소음에 즉각 저쪽도 반응했다.
‘이스라!’
순식간에 막대한 양의 마력이 이스라의 검에 흘러 들어간다.
파멸의 기사는 본능적으로 쥐고 있던 장검을 내리그었다.
타앙!!
검날로 총탄을 튕겨낸 이스라는 뒤뚱대며 마차로 달려갔다.
타타타탕!!
갑옷에 맞은 탄환들이 불똥을 튀기며 지면에 나동그라진다. 비록 상태 이상으로 인해 움직임이 날래진 않았으나, 이스라는 타고난 내구력으로 총탄 세례를 거뜬히 받아냈다.
저들은 총신이 비정상적으로 긴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이스라가 달려들자 곡도를 뽑아 응수했다.
채앵!!
‘어라? 의외로 좀 버티네.’
생각보다 근접전에도 능한 상대였다. 특유의 날랜 움직임으로 곧잘 맞서는가 싶더니, 그래도 파멸의 기사를 당해낼 순 없었다.
콰직!
이스라가 마차 쪽 인원을 소탕하는 사이, 수풀 쪽에서 대기하던 놈들이 접근했다.
손도끼를 거머쥔 쇠렌은 그들의 걸음걸이를 보곤 경악했다.
“이런, 썅. 엘프들이잖아!”
“요즘은 엘프들이 장총을 들고 마차를 습격하는 모양이죠?”
덤벼온다면 토드로선 환영할 따름이었다.
도망치는 놈들을 쫓는 수고를 덜어주는 셈이니.
“저쪽은 칼질만 100년 넘게 한 연놈들이라고! 이래서야 도망칠 수도···!”
총알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제압할 의향이었는지 몰라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장생종이라면 노화보단 이게 낫겠지.’
토드는 품에서 넋의 거울을 꺼냈다.
“영원한 청춘을 구가하는 족속이라도, 죽음은 숙명이니.”
널찍한 보폭으로 성큼성큼 달려오던 엘프들은 고스란히 사후세계의 바람을 뒤집어썼다. 그들은 대번에 엎어져 벌벌 떨었다.
인간보다 생명력이 강해서인지, 곧바로 죽진 않는 모습이었다.
사령술사가 턱을 까딱였다.
“처리해주세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 쇠렌은 도끼를 내리쳤다.
파각!
쇠렌이 차례로 제압된 엘프들의 머리통을 까부수는 사이, 토드는 무릎을 굽힌 채 시신으로 다가갔다.
“내가 그대를 부르노라. 부질없이 스러진 망혼···”
아직 수풀 쪽에 한 놈이 남아있었다.
토드는 급히 손을 뻗어 시체에 붙어있던 척추뼈와 내장을 모두 일으켜 세웠다.
타앙!
총탄에 얻어맞은 시신이 움찔거린다. 어찌나 위력이 대단한지, 하마터면 갈빗대를 뚫고 그 뒤에 엄폐했던 토드까지 맞을 뻔했다.
‘저지력이 대단한 만큼, 재장전은 포기한 건가? 극단적인 물건이네.’
저격에 실패한 걸 확인하자 놈은 즉각 달아났다. 제 딴엔 엘프라고 숲이라면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일어나라.”
비스듬히 몸을 일으킨 엘프의 시신에 연녹색 불빛이 맺혔다.
추격은 제 동료들에게 맡기고, 토드는 마차 쪽으로 다가섰다.
“이스라, 그쪽은 다 정리됐나요?”
【곧 끝나네!】
카앙!
“카학! 끄르르극···!”
청명한 금속음과 함께 가래 끓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검을 뽑아낸 이스라가 한숨을 돌렸다.
【휴우, 이놈들. 칼잡이인지, 춤꾼인지 도통 모르겠더군. 이리 경망스럽게 검을 휘두르는 놈들은 처음 봤네.】
“쇠렌에 따르면 엘프 검객들이라 하더군요.”
【과연! 풀만 주워 먹는 귀쟁이 놈들답게 몸놀림은 잽싸나, 손아귀 힘이 부실하였네! 본인에겐 당해낼 수 없지! 무릇 기사라면 건강하게 고기로 몸을 보강해야 하는 법!】
그렇다기엔 본인은 망자라서 물도 입에 대지 않는, 금식주의자 수준이지만 그러려니 했다.
“마차 안쪽은 살펴봤습니까?”
【으음, 안에 있던 놈들도 소란을 듣곤 전부 튀어나온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본인이 먼저 진입하지!】
말릴 새도 없이, 이스라가 마차 안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딱 봐도 귀족 집안에서 내온 마차네. 규모가 상당한데.’
내장이 찢어진 채 널브러진 시체 때문에 미처 살피지 못했는데, 피로 절은 바퀴살 한가운데에 사자 머리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엘프 시체라는 수확에 싱글벙글하던 토드의 입가에 긴장감이 어렸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이스라, 잠깐···!”
피로 얼룩진 마차 속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인이 한 명 있었다.
【토드, 다행히 생존자가 남아있더군!】
이스라의 쩌렁쩌렁한 목청에 팔에 들려있던 여인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친 파멸의 기사가 안광을 이글거렸다.
【하, 하! 하. 아가씨! 걱정 마시게! 본인은 그대를 곤경으로부터 구해주러 왔다네! 그대는 이제 살았네!】
어지간한 장정을 압도하는 체구.
공포스러운 외형의 흑색 갑주.
거기에 엘프들을 도살하느라 온통 피칠갑을 한 몰골까지.
눈을 부릅뜬 여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저 정도면 비명이 아니라 사자후인가.’
이스라가 들쳐메고 나온 여인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대범하게도 이스라의 뺨을 후려갈겼으니까. 하지만 묵직한 투구를 걸치고 있었던 탓에, 도리어 여인의 손목이 돌아갔다.
【하, 하! 하. 아가씨답지 않게 제법 당찬 여인네로군!】
그 사이 여인은 다시 축 늘어진 채 혼절했다.
사자대공에겐 두 딸이 있었다고 한다.
‘골 때리네.’
이스라의 품에서 기절한 여인은 영락없이 그녀와 같은 금발 머리에 이목구비마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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