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71
171 [삽화]
난자당한 육편이 중얼거렸다.
“너··· 바보야? 상식적으로 이걸 전부 봐놓고, 자신을 부정하겠다고?”
안광을 좁힌 이스라는 발치에 흩어진 살점 쪼가리들을 노려봤다.
【흠, 역시 요술로 만들어진 존재라 그 상태로도 말할 수 있는 건가?】
그녀가 한숨을 흘렸다.
“난 요술로 만들어진 환상 따위가 아니야. 일라리스. 나는 너의 기저에 있던─”
콰가각!!
칼날이 지면을 휩쓸었다. 이 기묘한 공간에 천장이나 바닥이 있을진 의문이었으나, 어쨌거나 파멸의 기사는 조각난 잔해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죽은 주제에 나불대지 말라! 이미 죽었으면 순순히 퇴장하란 말이다! 네년은 망자도 아니고, 허깨비에 불과하지 않나!】
“네가 기사 행세를 한다고 해서 현실의 관습이 해결되니? 그건 검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터진 내장과 눈알들이 어둠 속을 굴러다닌다.
“아직도 철이 들질 않았어.”
속삭임에 이스라가 코웃음 쳤다.
【본인은 기사다. 그런 복잡한 문제는 본인이 신경 쓸 바 아니다!】
“정말 시체가 되면서 머리까지 썩어버린 모양이구나. 저돌적이고, 단순무식하고. 아이처럼 생떼만 부리고.”
파멸의 기사는 건틀렛을 부여잡은 채 대꾸했다.
【어리석은 건 오히려 네년이다. 기사가 우둔한 것이 뭐가 나쁘지?】
이스라는 발치에 굴러온 눈알을 짓밟아 터뜨렸다.
【적을 향해 돌격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기사가 이것저것 겨를을 가린다면 언제 공격한단 거냐!】
그녀는 끊임없이 짓밟고, 파괴했다.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아이는 무모하고, 무지하지. 두려움이 학습되지 않았기에 용맹하다!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사란, 아이와 같다! 이는 기사도 전집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나마 남은 파편마저 갈가리 분쇄되고 있음에도, 그녀는 거듭 속삭였다.
“아버지는 너가 살길 바라셨어. 끝내 네게 주어진 의무마저 저버리고, 도망친 뒤의 결말을 봐. 넌 죽어버렸잖아.”
【아니.】
어둠 속 안광이 세차게 이글거렸다.
【죽은 건 너뿐이다. 쾨흘링에서 죽은 건 헤젤슈마흐 대공가의 여식이었던 일라리스다.】
“나는 곧 너인데, 어떻게 나만 죽을 수 있어? 너의 말은 순 앞뒤가 맞지 않아. 너의 모습과 같아. 썩어버린 불결한 모습으로 고결한 기사 행세를 하는 너. 여인의 몸으로 기사가 되려는 네 애잔한 몸부림처럼. 모순덩어리야.”
핏물로 덕지덕지 얼룩진 칼날을 들여다보던 이스라는 거기 비친 모습을 목격했다.
흑색 갑주로부터 풍기는 위용.
번뜩이는 안광. 명백히 산 자완 거리가 먼 공포스러운 형상.
【본인은 사령술사의 부름에 응하여 죽음마저 극복했다. 그 자리에서 여인은 죽고, 그 잔재로부터 죽음의 기사가 새로이 일어섰다.】
피 웅덩이 속에서 이스라는 나직이 선언했다.
【본인의 사명은 기사로서 세상에 맹위를 떨치는 것. 이를 위해 본인은 사령술사와 협력할 뿐이다. 더는 본인에게 생전을 들먹이지 마라.】
그녀가 장검을 거뒀다.
【본인에게 무가치한 것들이니.】
“그렇구나.”
타악.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이스라가 걸치고 있던 흑색 갑주와 장검마저 사라졌다.
칠흑 같은 어둠마저 익숙한 풍경으로 변모해 있었다.
별궁의 회랑.
순백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자신.
문득 손을 들어 목덜미를 훑어보니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진다.
“너는 자신이 기사라고 주장하지만, 순전히 네가 이뤄낸 것이라곤 없어. 그 무거운 갑옷은 가문의 소유였고, 죽음을 거스르는 힘은 사령술사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꽃다발을 쥔 여인이 이스라의 앞으로 다가섰다.
“하물며 넌 검기마저 사령술사의 마력을 빌려 일으키잖아. 널 둘러싼 모든 건 가짜야. 자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굴고, 막연히 기사 흉내를 낼뿐인, 가짜.”
파멸의 기사는 환상에서 보았던 사자대공의 말을 떠올렸다.
‘검을 수십 년간 수련하더라도, 범인의 경지를 넘는 건 극히 일부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네가 오롯이 가진 진짜가 있었어?”
‘장병기의 극의에 이르려면 생사의 순간을 극복해야만 한단다. 이러니 누구나 무구의 달인이 될 수 있겠더냐?’
검기는 사선을 넘나든 이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깨우칠 수 있는 극점.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죽음은 전쟁터에 나서는 전사의 숙명이다. 대부분은 현실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고꾸라진다.
쾨흘링에서 죽어간 떠돌이 기사의 말로 역시 그랬다.
이 가혹한 땅에선 흔해빠진 죽음.
“하물며 지금의 네겐 검도 없어. 모두 네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지. 너를 규명하는 모든 것들이.”
일라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망자를 어루만졌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쾨흘링에서 끝났어. 일라리스. 이젠 꿈에서 깨어날 시간···”
망자의 입꼬리가 삐뚤어졌다.
【본인은 쾨흘링에서 이리공을 베었다. 북쪽의 동토에선 태고의 힘을 간직한 전사들을 대적했고, 거인, 악마, 흑마법사, 뭐든지 간에! 본인을 가로막는 것들은 징벌했다! 나약한 필멸의 육신이라면 해내지 못했을, 본인의 위업이란 말이다!】
여인의 손을 쳐낸 망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본인을 일라리스라 부르지 말라. 어리석은 계집아.】
무구의 달인으로 거듭나려면 육신과 검술을 극한까지 단련하는 것으로 모자라, 생사의 순간도 극복해야 한다고? 돌이켜보니 이미 자신이 모두 해낸 것들이다.
그걸 인지하니 어느새 자신의 손엔 육중한 대검이 잡혀 있었다. 자루를 틀어쥐니 혼탁한 녹염이 뱀처럼 흘러나와 검신을 휘감는다.
불결하지만, 세차고, 사납다. 이스라는 이 불꽃을 자신의 수족처럼 익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히죽 웃은 이스라가 중얼거렸다.
【토드가 한시름 덜겠군. 이젠 구태여 그의 힘을 빌려 갈 필요도 없으니!】
아른거리는 불꽃 앞에서 여인이 주춤거렸다.
“너, 너···”
과연. 저 허깨비는 자신이 피워 낸 불꽃을 두려워했다. 검기는 요술쟁이들의 주문뿐 아니라, 실체가 없는 존재들도 베는 힘이라고 했었지.
【흐.】
촤악!!
단칼에 머리가 날아간다.
성가신 상대는 가볍게 베었으나, 주변엔 온통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가득했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아닌, 든든한 갑주가 매여 있었다.
자신의 진실된 모습. 진정한 나.
눈자위를 번뜩인 파멸의 기사는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 하! 하. 여기 있는 모든 것들도 눈속임일 터! 모두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우지끈! 쾅!!
츠바이헨더에 맺힌 화염이 번뜩일 때마다 벽이 무너지고, 복도를 장식한 모든 것들이 소각된다.
망자는 가슴 한편에 쌓여있던 울분마저 모조리 태웠다.
자신이 자행한 화염과 잔해가 만족스러운지 파멸의 기사는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불길 속에서 진정 자신은 자유로웠다.
자신은 살아있는 게 틀림없노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스라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꿈틀거리던 잔해가 희미하게 대꾸한다.
“······그래도, 넌. 기사가 될 수, 없어. 파괴와 피를 자행하는 건, 살육자, 에 불과해.”
피로 얼룩진 얼굴이 조소했다.
“마땅히, 기사라면. 서약을 맹세한, 숙녀가 있어야 하잖아. 이건,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기사도 소설에서도 매번, 등장하는 내용이고. 하물며, 넌. 여인인데, 같은 여인을, 사랑할 수 있겠어? 하물며 그 부패한 몸뚱이로···?”
그녀의 빈정에 이스라는 건틀렛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독한 계집 같으니!’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울화가 치민다.
다분히 고지식한 자신의 통념상으로도, 분명 숙녀가 없다면 기사도 존재할 수 없다.
예상외의 복병에 안절부절못하던 이스라는 허공에서 나풀거리는 무언가를 목격했다.
일찍이 자신을 진흙더미로부터 끌어올려 준 연녹색 끈. 안광을 좁힌 파멸의 기사는 천장을 향해 훌쩍 뛰어올랐다.
콰앙!!
검으로 천장을 부수는 모습에 여인이 허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긴 네 심상인데. 그걸 부쉈다고. 저렇게 막무가내일 수가···.”
천장 너머에 갇혀있던 이를 데려온 이스라가 히죽 웃었다.
【역시 자네일 줄 알았네, 토드! 헌데 왜 하필 거기 끼어있었던 건가?】
너덜너덜해진 망토를 걷어낸 사내가 한숨을 흘렸다.
“말도 마세요. 여긴 제 힘이 미치는 곳이 아니라 그런지, 어떻게든 저를 들여보내지 않으려 거부하더군요.”
【하, 하! 하. 자네도 본인 못지않게 곤경을 치렀던 모양이군!】
고개를 끄덕인 토드는 목 없이 바닥을 뒹구는 시신을 보곤 기겁했다.
“그런데, 저건 뭡니까?”
대답 대신, 이스라는 당당히 토드를 가리켰다.
【본인이 수호하기로 서약한 자가 여기 있다. 사령술사 토드다!】
“······?”
온통 화염으로 가득한 잔해, 이스라와 똑 닮은 여인의 주검.
토드로선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대강 이쪽 상황을 보니 마무리에 다다른 것으로 보였다.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맞습니다. 네.”
여인의 머리가 미소를 흘렸다.
“그를 사모하니?”
화들짝 놀라 토드의 눈치를 살피던 파멸의 기사는 이내 헛기침을 하곤 점잖게 답했다.
【사령술사와 본인은 그런 사이가 아니다! 우리는 우정과 신의로 맺어진 관계이니! 그는 본인을 기사로 서임해줬고, 본인은 그에게 오십 년의 충성을 맹세했다! 이 정도면 서약의 맹세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나!】
사령술사와 어깨동무를 한 파멸의 기사는 여인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어떠냐! 간악한 계집이여! 아직도 본인더러 기사의 자격이 부족하다 트집 잡을 수 있겠느냐?】
물끄러미 이스라를 응시하던 여인이 낮게 속삭였다.
“······너는 불꽃처럼 선명한 확신을 품고 있구나.”
잔해를 삼킨 불길이 도리어 거세진다.
허상이 분명할 텐데, 살갗에 아른거리는 열기에 토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스라는 버거워하는 사령술사를 묵묵히 품에 가뒀다. 영 모양새가 빠지긴 하지만, 갑주의 서늘함 덕에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화염은 천천히 여인의 잔재를 삼켰다.
순백의 드레스는 잿더미로 화하고, 살점과 유골을 태운다.
“비단 서약자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윽고 여인의 머리가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잔재는 여기 남겨두고, 이만 떠나가렴. 파멸의 기사, 이스라.”
마지막 잔해가 불길에 삼켜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이 또 일변했다.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엔 홀연히 진녹빛의 도끼창이 놓여 있었다.
어지간한 장정보다도 자루가 길고, 육중한 도끼날과 뾰족한 창끝이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크흠, 이만 저는 놓아주시겠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스라는 결박하듯 단단히 옭아매던 양팔을 풀어줬다.
【아, 실례했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죠.”
토드의 제안에 이스라는 홀린 듯이 신록의 할버드를 집어 들었다.
“마상 전투에서 사용하면 딱 맞겠는데요?”
【실로 그렇군! 이만한 장병기라면 상대와 말을 동시에 베어낼 수 있겠네!】
감격한 눈빛으로 무기를 살피던 이스라는 돌연 안광을 깜빡였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작게 물었다.
【허, 헌데. 토드. 자네는··· 장막 너머에 갇혀있지 않았나?】
“예. 여긴 의식계의 일종입니다. 신록의 기사가 당신에게 권능을 걸어 자아낸 세계지요. 넋의 거울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저조차 간섭하는 게 쉽지 않았을···”
복잡한 설명이 길어질 듯하여, 이스라는 잽싸게 그의 말을 끊었다.
【험험! 본인이 궁금한 건, 자네도 여기서 투영되던 환상을 목격했냐는 거네.】
건틀렛을 꼼지락거린 이스라는 안광을 떨며 되물었다.
【자네도··· 보았는가?】
왜 안 봤겠어요. 의식계 틈에 갇혀있어 조금 불편하긴 해도, 관전은 충분히 할 수 있었지.
하지만 토드는 컨셉질의 달인으로서 상호 간의 암묵적인 매너를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의 컨셉은 지켜줄 것!
“음, 워낙 의식계를 수호하는 기제들이 탄탄하더군요. 그놈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주는 게 전부였죠.”
바짝 긴장하던 이스라는 할버드까지 떨구며 깊이 안도했다.
【그, 그랬나! 자네가 목도하지 못했다니 다행이군! 정말 지독하고 끔찍한 환영이었네! 본인 같은 불멸의 기사여서 망정이지, 자네처럼 유약한 사령술사였다면 찰나도 견디지 못했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네!】
애써 웃음을 참은 토드는 태연히 답했다.
“그랬군요. 그나저나 시련도 끝났는데, 여긴 어떻게 빠져나가는 걸까요?”
【그건 본인도 모르겠군. 애당초 이곳에 출구가 있는 지도 의문이네.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인 듯한 곳이니 말일세.】
이스라가 바닥에 굴러다니던 투구를 집어 들려던 순간이었다.
“일라리스······?”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토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사자대공이 왜 여기서 나와?’
리케르트는 멍한 표정으로 이스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건, 그가 걸친 갑옷과 망토엔 온통 그을음과 파손된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장검에 맺힌 붉은 검기가 사납게 이글거리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까지 전투를 벌였던 정황이 여실했다.
‘···난 넋의 거울을 이용해 최대한 의식계를 우회하여 심부까지 도달했는데. 설마 그 무수한 방어 기제들을 직접 뚫고 여기까지 내려온 건가?’
사람의 무의식은 미로처럼 얽힌 심해와 다를 바 없었다.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진 아무도 모른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영영 깨어날 수 없다.
토드도 영혼과 밀접하게 엮인 넋의 거울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진입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 사내는 그걸 자그마치 무력으로 돌파한 것이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하필이면 이스라가 투구를 뒤집어쓰기 직전이었다. 의식계에 진입한 사자대공은 이스라의 맨얼굴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아무리 안광이 맺혀있고, 머리칼을 단발로 잘라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평생 지켜봐 온 혈육의 눈썰미를 속일 수 있겠는가.
‘어쩌지.’
토드는 초조한 눈빛으로 부녀를 살폈다.
사자대공이 재차 떨리는 입을 열었다.
“이, 일라리스. 정녕 살아있던 거냐?”
그의 물음에 이스라가 투구를 뒤집어썼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파멸의 기사는 안광을 번뜩이며 대꾸했다.
【당신의 딸은 죽었다. 유감을 표하지.】
이스라, 그게 무슨 소리니.
사령술사의 다리가 휘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