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72
172
대공이 낮게 신음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곳에선 갑옷을 감추어주던 망토가 없었다. 심상이기에 존재감을 은폐하던 주문도 걷힌 뒤였다.
대공 앞에 선 존재는 고위 망자 특유의 섬뜩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무엇보다 압권은 투구 속에 또렷하게 맺힌 연록빛 안광.
도저히 산 자라고 볼 수 없는, 인외의 형상이었다.
비록 형상은 달라졌을지라도 그토록 고대하던 혈육과의 재회였다.
여러모로 복받쳐 올랐는지, 대공은 애써 목에 엉겨 붙는 감정의 잔재를 억누르려는 모습이었다.
“자식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아비만 살아있는 게, 내 죄와 부덕함 때문인 줄만 알았다.”
세차게 흔들리는 대공의 동공과 달리, 망자의 눈빛은 잠잠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로군. 허나 분명히 말하겠다. 그대가 알던 이는 죽었다.】
대공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이해하기 어렵구나. 분명 그 갑주는 내 딸이 사라졌던 날, 같이 모습을 감췄던 유물이다. 오로지 사자의 후예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고에 보관되어 있었지!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어찌 네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이냐?”
점차 격앙되려는 기미가 보이자 토드는 슬며시 의념을 흘려보냈다.
‘이스라, 여긴 심상입니다.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니, 가급적이면 사자대공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강자입니다.’
미소 지은 망자가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이 갑주는 어느 유약한 여인이 본인에게 남긴 유산이다.】
듣지 않겠다는 듯, 대공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일라리스, 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마. 네가 살아있다면 그만이다! 미처 널 헤아리지 못한 내 잘못이야!”
도무지 서로의 어귀가 들어맞을 기미가 없다.
부녀의 대화를 지켜보던 토드는 직감했다.
이건 필시 파국이다.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은데, 파멸의 기사나 대공이나 어느 쪽이든 간에 섣불리 끼어들었다간 폭발할 것만 같다.
일대에 흐르는 기류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헤젤슈마흐 대공. 여인의 몸으로 기사를 선망한 자가 있었다.】
이스라의 말에 대공이 동요했다.
【그는 미련하게도 제 분수를 알지 못하고, 갑주에 자신의 형상을 숨긴 채 떠돌이 기사 신분으로 쾨흘링 지역의 분쟁에 참여하였다.】
“······쾨흘링. 동부 권역령이라면.”
【거기서 당신이 알던 자는 전사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이었지. 본인은 그 잔재로부터 일어난 존재이노라.】
눈동자를 굴린 대공은 이스라 뒤에 서 있는 토드를 노려봤다.
“하워드, 네놈···! 떠돌이 의사치곤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도, 알레시아를 구해낸 은인이라 눈감아줬거늘.”
그도 대강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제국 동부에 사령술사가 거닌다는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졌으니까.
【본인은 파멸의 기사, 이스라다. 오롯이 사령술사 토드 셰우드만을 섬기지. 본인은 그의 검이다.】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은 것인지, 대공이 되물었다.
“그럼에도 넌 끝내 여기로 돌아오지 않았더냐! 여긴 네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고개를 저은 이스라는 신록의 할버드를 들어 보였다.
【이 징표가 보이는가? 본인은 신록의 기사가 내리는 시련을 모두 통과했다. 본인이 이곳으로 찾아온 까닭은 순전히 명예를 구하기 위함이었을 뿐. 이 여정의 사명은 완수되었으니, 본인은 다른 투쟁을 찾아 떠날 것이다.】
이스라의 답변에 대공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바닥을 향해 늘어트렸던 칼끝이 서서히 올라온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붉은 기류가 흘렀다. 아지랑이처럼 보이던 자취는 어느새 불길처럼 아른댔다.
토드도 충분히 각오하던 상황이었다.
‘순순히 대화로 풀릴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
항상 내 팔자가 그렇지 뭐.
마력은 충분했다.
“······처음부터 날 기만하려던 것인가? 사령술사.”
토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의도는 추호에도 없었습니다. 전하.”
이를 갈아붙인 리케르트는 검으로 이스라를 가리켰다.
“저 꼴을 보고도 그렇게 지껄일 수 있더냐!!”
심상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강렬한 노호(怒號).
괜히 사자라는 별칭이 주어진 게 아닌가. 토드는 침을 삼켰다.
“장장 2년 동안 찾아 헤맨 딸자식을 내 앞에 저런 몰골로 끌고 와놓곤, 실성하여 자신마저 부정하고 있는데!”
실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버님.
제가 생각해도 그토록 아끼시던 따님과 겨우 재회했는데, 자신이 그쪽 딸이 아닌 기사라고 떠들어대면 속이 터질 수밖에요.
이스라가 안광을 가늘게 떴다.
【본인더러 실성했다고? 본인은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정신과 강철같은 이성을 단단히 견지하고 있거늘!】
토드는 재빨리 분개하는 파멸의 기사를 가로막았다.
“전하,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전하의 심경을 소인이 어찌 감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상황엔 사정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망자는 사망의 충격으로 인해 생전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대공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 간교한 입을 다물라! 사특한 자여! 네놈이 어두운 술법을 부려, 저 아이의 정신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더냐!”
다행히 심상이라 식은땀이 나진 않지만, 목덜미의 서늘한 감각만큼은 생생했다.
“오해입니다. 맹세컨대 저는 전하의 따님께 어떠한 정신 간섭을 사용하지···”
토드를 두둔할 생각이었는지, 이스라가 거들고 나섰다.
【쯧쯧, 저자 역시 세간의 인식만으로 자네를 폄훼하는 자였군! 실로 편협하고, 무지한 자로다! 토드가 본인에게 직접적으로 사용했던 주문들은 순전히 수복을 위함이었다!】
어감에서 불길함을 느꼈는지, 대공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복이라니···.”
아무래도 수복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람에게 통용되진 않는다. 상식적으론.
그녀를 말리기도 전에 이스라의 파멸적인 입은 목소리를 뱉은 뒤였다.
【본인은 필멸성을 극복한 존재! 전투 중에 입은 부상도, 소실된 부위가 있더라도 사령술사의 주문 덕분에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귀족 여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면 정숙함이다. 하물며 지체 높은 자제들이라면 외간 사내에게 살을 드러내는 것조차 꺼리는 게 당연한 일.
대공의 심상치 않은 얼굴색을 본 토드는 팔꿈치로 이스라를 두들겼다.
“이스라, 이스라. 그건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될 것 같은데요.”
파멸의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토드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지껄였다.
【그대는 사령술사가 본인을 핍박하리라 착각한 모양인데, 본인과 토드는 여정의 온갖 고초와 풍파를 더불어 이겨낸 동지이다!】
불똥이 이는 대공의 눈동자.
“그간 여정을 함께했다고.”
무섭다. 진짜 무섭다.
그는 정말 눈빛만으로 누군가를 찢어 죽일 듯한 기세였다.
이스라의 의도는 이해가 간다.
여태껏 그녀도 자신과 함께하면서 사령술사라는 이유만으로 핍박받는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으니, 진절머리가 날 지경일 터.
기사도를 추종하는 이스라로선 선의로 말미암은 자신의 의도가 곡해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거다.
‘근데 이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다 못해 정유차로 들이박는 것 같은데.’
어깨를 들썩인 파멸의 기사는 자랑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다! 기사도 전집에 따르면 그야말로 범인들은 못 볼 꼴을 다 본 사이라고 할 수 있지!】
못 볼 꼴.
여러 의미를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이스라가 ‘범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걸 보면 그간 자신과 겪은 여정이 범상치 않았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였겠지.
다만 이스라 특유의 직설 화법이 지나치게 가미되었다. 너무 직설적이다 못해, 정제되지 않은 날 것에 가깝다.
설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는 기사도 문학만 즐겨 읽은 결과물일까.
청자에 따라선 충분히 곡해할 만한 여지가 있다.
“······.”
대공은 침묵했다.
다시 이스라 뒤로 물러선 토드는 마력을 끓어 올렸다.
표정을 굳힌 리케르트가 낮게 중얼거렸다.
“사령술사. 지금 이 상황에선 도무지 네놈의 진의를 헤아리기 어렵군.”
어깨너머로 번들거리던 적광이 장검에 깃들었다.
“나는 한때 사랑하던 여인을 잃었지. 그걸로도 모자라, 내 미련함 탓에 그녀가 남긴 소중한 유산을 잃었다.”
검기의 정제되지 않은 사나움은 사뭇 이스라의 것과 닮아 있었으나, 거기 담긴 사념은 여태껏 토드가 보아온 어느 유형화된 기운보다도 짙고, 강렬했다.
‘최소 100m. 그 간격 안에 접근을 허용하면 죽는다.’
이게 정녕 인간이 흘릴 수 있는 박력인가? 대악마에게서조차 느끼지 못했던 위협에 토드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장검을 세운 리케르트가 속삭였다.
“네가 어떤 모습이라도, 다신 널 잃지 않으마. 내 딸. 일라리스.”
사자대공 리케르트. 레벨 90.
글귀를 목격한 순간, 토드는 지체 없이 등을 돌렸다.
동시에 대공의 신형도 사라졌다.
물질계의 현상을 모방한 세상이지만, 지축이 뒤집힌다.
장검을 거머쥔 거구가 한줄기 섬광처럼 보였다. 달려오는 것이 아닌, 그와 토드 사이의 공간이 시시각각 압축되어 쏟아지는 듯했다.
‘이걸··· 이스라가 맞설 수 있을까?’
찰나의 갈등. 그리고 사령술사의 하수인은 명령 없이도 그의 충직함을 몸소 보여줬다.
콰앙─!!
뒤에서 밀려오는 충격파에 토드는 바닥을 뒹굴었다. 주변에 널려있던 잔해들이 온통 가루로 변해 사방으로 나부낀다.
“헉, 허.”
토드는 가쁜 숨을 토해냈다.
심상은 정신을 옮겨온 공간이기에 여기서 죽으면 동일하게 현실에서도 죽는다.
정신력이 강인하다면 아마 반신불수에 그치겠지만···
‘그게 더 최악이야.’
좀 전에 미리 확인해봤지만, 환상이 종료된 뒤로 모든 권능은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차고 있던 유물들도 덩달아 딸려온 상태.
검녹색 휘광에 휩싸인 츠바이헨더가 사자대공의 칼날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공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라리스···! 네가 어째서···?”
안광을 사납게 밝힌 파멸의 기사는 검을 맞댄 채 읊조렸다.
【본인은 사령술사 토드의 기사요, 그에게 50년의 서약을 맹세했다.】
50년. 그 말에 일순간 리케르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는 거리를 벌린 토드를 노려봤다.
“저놈이···!”
아무래도 머리에 피가 몰린 상태라 서약이 아닌 가약으로 알아들은 것 같은데, 다시금 오해라고 전해주고 싶었다.
아마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보아 원만히 전달되진 못할 것 같다.
자루를 돌려 칼날을 밀어낸 이스라는 대공을 향해 일갈했다.
【그대가 그에게 위해를 끼치려 한다면, 본인은 그가 지닌 무력의 대변자로서 그대를 베겠다.】
안광을 번뜩인 딸은 제 아비를 향해 칼날을 겨눴다.
【그대의 딸은 유약했지. 그래서 본인이 친히 그녀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부녀가 같은 운명을 맞고 싶은 게 아니라면, 물러나라.】
충혈된 눈자위를 부릅뜬 대공이 처절하게 절규했다.
“으아아아!!”
그가 거칠게 장검을 휘어잡았다.
“정녕 사악한 요술쟁이 종자가 내 딸을 죽은 것도 아닌, 저주받은 존재로 만들어놓곤, 육신으로도 모자라 영혼까지 희롱했구나!!”
안광을 찡그린 파멸의 기사가 싸늘하게 말했다.
【내 주인을 모독하지 말라.】
주인이라는 한마디가 결정타였다.
대공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왜 사령술사에겐 침묵 계열 주문이 없을까.’
대공이 포효했다.
“하워드!! 내가 사자라 불리는 이유를 똑똑히 알려주마!!”
선공을 가한 건 파멸의 기사였다.
정면으로 달려든 이스라는 그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카앙!!
가뿐히 튕겨낸 대공이 재차 성토를 쏟아냈다.
“여아로 하여금 제 부친을 대적도록 부추기다니! 구주께서 네놈의 패륜적 방종을 용서할 거라 생각하느냐!!”
이제 해명하기엔 글러 먹었으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글쎄요. 전하. 어쩔 수 없지요. 저도 부녀간의 감동적인 재회가 이렇게 되는 건 바라지 않았는데···.”
부웅─!!
무시무시한 파공음에 대공이 황급히 몸을 틀었다. 연이어 파고든 이스라는 퍼멀로 대공의 손목을 찍곤, 상단으로 올려 그었다.
촤악!!
“어린 자제분의 꿈을 무참히 짓밟아 놓으시곤, 이제 와서 딸에게 지극한 아버지 행세라니.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닥치지 못할까!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일─”
콰직!
어깨를 맞부딪친 이스라는 그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대공이 눈동자를 치켜뜬다.
“크으!”
그는 가까스로 장검을 비틀어 이스라의 검로를 빗겨 세웠다. 치명상을 피했을 뿐이지, 엇나간 검은 고스란히 옆구리를 긁고 지나간다.
“옛날의 그 따님을 생각하시면 큰코다치실 겁니다. 앞서 이스라가 말했듯이, 저와 그는 다른 이들이 감히 상상도 못 할 여정을 헤쳐나왔거든요.”
의도적으로 말끝도 올려주고.
“함께.”
얄미운 미소를 흘리는 사령술사의 모습에 재차 대공의 안면이 울긋불긋해졌다. 그러나 그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상단을 노리고 들어오는 분노의 베기에 대공은 신속히 검날을 쥐고 방어했다.
쩌엉!!
칼날을 섞은 것만으로 대공이 주춤거렸다.
리케르트가 강하다곤 하나, 결국 인간.
“돌아온 장녀분의 성장을 몸소 체험해보시지요.”
생각 외로 매서운 공세에 리케르트가 쩔쩔맸다.
이스라는 죽음의 기사를 상회하는 고위 망자. 근력으론 밀리지 않는다.
게다가 레벨의 격차가 있어도 그의 중요한 약점이 노출된 이상, 토드는 희미한 승산을 엿봤다.
“잘 컸어요.”
아버지들은 유독 아들은 몰라도, 딸에겐 꼼짝 못 하는 경향이 있더라.
리케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토드는 그를 향해 노화를 시전했다.
동시에 이스라의 검이 솟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