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15
215
인간성을 잃고 있다.
마땅히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니라 몰랐던 걸까.
“표정을 보아하니 대강 눈치는 까고 있었나 보다?”
“아뇨.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고? 네가 뭘로 변할지 모르는 일인데?”
강가의 물안개와 더불어 내성의 첨단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일대를 드리운다. 어슴푸레한 음영 너머로 망자들의 진녹색 눈동자가 드문드문 일렁였다. 외성뿐만 아니라 내성까지도 방어 구조물을 짓기 위해 하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령술에 심취한 제 선학들을 생각해보면, 필멸성의 상실이랄게 그리 이상할 것도 아니라서요.”
“네크로맨서들은 죄다 최종 트리가 리치로 수렴하니 별 감흥도 없다고.”
슬쩍 클라우스를 곁눈질하던 라노는 영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음··· 가급적이면 종족값은 인간으로 못 박아두고 가는 게 제 철칙인데, 그게 깨지는 건 좀 유감이긴 하네요. 그래도 새로운 경험이니 괜찮지 않을까요?”
“뼈마디만 남은 몸으로 누리는 영생에 가치가 있다고 믿어?”
토드는 낄낄거리며 말에서 내렸다. 내성을 지키던 하인들이 공손히 고삐를 받아들곤 마구간으로 말을 끌고 갔다. 그들에게선 미미한 방부제 냄새가 났다.
“일개 인간이 이만한 군세를 부리려면 치러야만 하는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내성 앞에선 네크로폴리스의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어머니의 화신을 형상화한 거미 동상 아래 검은 물결이 넘실거린다. 투구 사이로 아른거리는 안광이 비칠 때마다 비로소 물결을 이루는 점 하나하나가 병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란스러운 인부들과 달리, 병사로 선별된 하수인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정적을 유지했다.
【창!】
파멸의 기사가 내지르는 호령 하에 죽은 자들이 녹슨 창대를 세웠다. 슬어버린 창날은 저지력을 기대하기엔 부족했지만, 파상풍을 유발하기엔 충분했다.
【방패!】
모든 하수인을 용아병이나 백골 근위대처럼 그럴싸한 장비로 무장시킬 순 없다. 장비만큼이나 하수인들의 출신지도 제각각이었다. 참칭파 휘하의 반란군이었거나, 추종자 잔당, 변경군, 스칼바냐르 출신 용병에 이르기까지.
그럼에도 거미 깃발로 결속된 하나의 의지가 그들을 한데 묶는다.
압도적 숫자와 극도의 단합.
망자의 군단이 불러일으키는 전율에 라노는 침을 삼켰다.
“···이래도 막는 게 쉽진 않을걸.”
“그래도 해볼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죠.”
“그 새끼는 교회의 수장을 자처하면서 의도적으로 악마들이 깽판치는 꼴을 묵인했어. 네가 몇 놈을 때려잡고 나서야 그 무거운 궁둥짝 들고선 너만 잡으러 쫓아오고 있다고.”
라노가 낮게 속삭였다.
“어쩌면 네 변화와 그놈 속셈이 관련 있을지 몰라.”
“여러모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차라리 힘을 합친다면 무저갱의 군세도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을 텐데.”
“아니. 안톤, 그 새끼가 지껄이는 걸 너도 뻔히 들었잖아. 그놈은 지가 벌이는 짓이 이 땅을 구하는 길이라 믿고 있어. 캐리병 말기, 아니지··· 영웅병에 단단히 걸렸다고.”
성전사의 눈에 맺혀있던 살의가 여전히 생생했다. 놈이 사령술사를 포함해 자신까지도 살려두지 않으리란 건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라노는 단단히 학을 떼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독한 병이야. 그건 죽지 않고선 못 고쳐.”
“왜 꼭 다들 자기가 신이 되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요?”
“글쎄다. 못 해봤으니까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러는 너야말로 해본 것처럼 말한다?”
“신의 자리가 만능이었다면 애당초 이 땅이 그리 결점으로 가득하지도 않을 테고, 우리 같은 종복들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셨겠죠. 흔히 피조물들이 생각하는 전능자라기보단, 이것저것 시달릴 구석 많은 공무원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조금은 만민의 존경을 받는······. 적어도 토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흐, 저렇게 동상까지 세울 정도로 지극한 놈이 신성 모독은 거리낌 없이 하냐. 그쪽 신께서 뭐라 하진 않으시던?”
피식 웃은 토드가 너스레를 떨었다.
“어머니께선 관대하신 분이라 이 정도는 눈감아주십니다.”
슬그머니 소매에서 기어 나온 손가락이 거미 형태로 뭉쳐진다. 성이 조금 나셨는지 손목을 툭툭, 때렸지만 놀라울 정도로 효과는 없었다. 물끄러미 투정을 지켜보던 라노가 실소했다.
“적어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분보단 나으시네. 네 말마따나 공무원 같은 존재라면, ‘지엄하신’ 태양은 직무유기 중인 거잖아.”
토드는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피조물들의 시름을 외면하실만하신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사정이 있으시겠지만··· 아무래도 신변상의 문제가 생기신 것 같습니다.”
예배당 지하에서의 기억을 더듬어본 라노가 나직이 뇌까렸다.
“솔마르가 모종의 이유로 부재 상태라면, 안톤 그놈이 어떻게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속셈일지도 모르겠어. 일부러 네가 힘을 축적하길 기다렸다가, 살찌운 돼지 잡아 죽이듯이 경험치만 날먹하는 거지.”
일전에 카셀미어 주교후를 비롯해 교회의 고위층들은 대략적인 화신의 정체를 아는 듯했다.
‘흩어진 편린이라.’
그걸 모아 완성하는 방법이 또 다른 자신의 살해란 말인가? 토드는 쓴웃음을 흘렸다.
“···암살자의 승리 조건이 다른 화신들의 살해였던가요.”
움찔거린 라노가 볼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어.”
“당신이 저를 한 번 찌르지 않았습니까. 저에 대한 살해 조건은 충족됐나요?”
라노는 눈을 까뒤집은 채 자신의 의식을 탐조하는 듯했다. 업을 헤아리는 게 남들에게 저리 보일 수도 있다니. 새삼 시선을 의식해서 행동하길 다행이었다.
“···사망 판정이라 그럭저럭 달성된 것 같은데.”
“그럼 남은 건 성전사뿐이네요.”
“정말 해치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라노의 어조는 푸념에 가까웠다. 희미하게 웃은 토드가 말했다.
“아직도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게 소원입니까? 엔딩을 본 후의 보상이 정말 신으로 거듭나는 거라면, 더 대단한 것들을 누릴지 모를 텐데요.”
질색한 라노가 손사래 쳤다.
“아, 됐어. 그런 호사까진 바라지도 않아. 내가 보기에 그건 ‘소원 한 가지를 말하거라’―라고 물었는데 그럼 넉넉하게 소원 7개 정도 들어달라고 부리는 꼴이라고. 그랬다가 뭔 봉변을 치를 줄 알고?”
그녀는 낮게 속삭였다.
“난 그것만으로 족해. 이젠 중세니, 판타지 세상이니, 다 지긋지긋하다고.”
암살자가 이따금 자신을 별종 취급하듯이 바라보는 태도를 새삼 알 것만 같았다. 사령술사 역시 그녀를 바라보는 관점이 일치했다.
“그러는 너는? 공무원 자리에 관심이 없다면, 네 소망은 뭔데.”
토드는 양팔을 펼친 채 답했다.
“전 단지 이 땅을 향유하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흑색 학파가 온전히 자리를 잡고 난 뒤엔··· 은퇴하고 떠날 생각이고요.”
“기껏 일궈놓은 자리를 내버려 두고 떠나겠다고? 어디로?”
“기반을 일궈놓을 때야말로 재미가 있는 법이죠. 완성된 뒤엔 흥미가 식지 않습니까. 듣기론 여기도 사막 너머에 미지의 땅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사령술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자아냈다.
“거기야말로 진정 경험해본 적 없는 컨텐츠이니, 체험하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요.”
기가 차는지 암살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난 죽어도 널 이해 못 하겠다.”
“저야말로.”
정말 동일한 영혼에서 갈라져 나온 존재라고 할 수 있기나 한 걸까. 어쩌면 삶의 궤적이 어긋난 시점에서 동일인이라고 규명하긴 어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줄곧 토드를 가리켜 가짜라고 씹어대던 라노도 어느 시점에선가 특유의 말버릇이 사라졌다.
그녀 역시 상호 간의 경계가 모호해졌음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
【에벨푸르트 인근에서 성전군이 아이단 원수가 이끄는 제국군과 에덴트라흐 주교후령의 병력을 궤멸시켰다고 합니다.】
눈살을 찌푸린 토드가 탄식했다.
“저런. 생존자는요?”
스트레이커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순록대공이 죽었다니. 오드람이 슬퍼하겠는걸. 마찬가지로 안면이 있는 카셀미어 대주교의 죽음 역시 유감이었다.
【성전군의 전력은 중무장한 다수의 기사단과 보병 연대가 주축입니다.】
“다소 고전적인 구성이군요.”
【화포는 일절 운용하지 않거니와, 이렇다 할 화기마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대 전장의 추세를 정면으로 역행하는 집단이었다. 열병기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성전사와 사제만으로 편성된 클래식이라. 컨셉 하나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하, 하! 하. 실로 기사도 정신에 부합하는 자들이로군! 오로지 피와 강철에 의한 정정당당한 싸움만을 추구한다니!】
파멸의 기사는 안광을 이글거리며 외쳤다.
【비록 적이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진정 명예롭도다! 우리도 질 수 없네! 당장 화약과 대포 따윈 강둑에 묻어두고 출병하는 건 어떤가?】
단칼에 기각했다.
“최대한 우회 기동을 저지하도록 창벽을 두텁게 쌓아두고, 최대한 판가우에서 경대포를 공수해야겠네요.”
판가우와 연락을 도맡고 있는 클라우스가 양피지를 꺼내며 물었다.
【수량은 어느 정도 배치하시겠습니까?】
“못해도 50대 이상. 가능한 한, 전부 보내달라고 하세요.”
대번에 이스라는 침울한 빛으로 중얼거렸다.
【명예롭지 못하다······.】
“그랬다간 우리가 진짜 집니다. 이스라. 명예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전장의 꽃은 기사이거늘! 에잉. 사특한 사령술사다운 사고방식이로군. 별수 없지.】
이스라는 포병이 전력의 주축을 이루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어찌 흑색 학파의 명운이 걸린 싸움에서 낭만만 추구하겠는가.
기사도 대포알에 맞으면 죽는다.
“네크로폴리스의 요새화는 마무리되었지만, 여긴 우리의 기반이 되는 곳입니다. 어디까지나 최종 방어선으로 삼아야지, 이대로 전화에 휩쓸리면 추후 흑색 학파의 존속이 위태로워집니다.”
스트레이커가 안광을 번뜩이며 되물었다.
【허면 주군, 수성의 이점을 포기하고 출병하시렵니까?】
고개를 끄덕인 토드가 지도를 짚었다.
“예. 우리가 주요 전장으로 삼을 곳은 쾨흘링입니다.”
쾨흘링.
저지대와 구릉으로 가득한 제국의 동부 변경.
자신의 모든 서사가 시작된 곳. 마찬가지로 종지부 역시 이곳에서 찍는다.
“우린 온통 늪과 진창으로 가득한 이 땅에서 성전군의 발목을 잡고, 지연시키고, 그들의 모든 역량을 최대한 소모시킬 겁니다. 절대 온전히 네크로폴리스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겠죠.”
혀를 내두른 파멸의 기사가 중얼거렸다.
【실로 비열하고, 치졸한 방식이로다.】
“명예로운 패배보단 비겁한 승리가 낫지 않습니까.”
【하, 하! 하. 물론이다! 본인은 한 번 죽어본바,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지!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
상대는 열병기 배제라는 페널티를 안고도 회전에서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였다.
더욱이 사제들로만 구성된 성전군이라면 특유의 사기 증진 버프를 비롯해 온갖 축복을 두루 갖췄을 게 분명하다.
‘쾨흘링은 내게 익숙한 땅이지.’
소수의 척후대나 겨우 통과할 오솔길이나 보급 부대가 오갈 만한 길목은 속속 꿰뚫고 있다.
약자가 강자를 꺾으려면 수렁으로 끌어들여야만 한다. 보다 내게 유리하고, 상대방은 장기를 활용하지 못하는 환경으로.
지도를 살피던 토드는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 위에 군영을 세우고, 적을 유도합시다.”
토드가 지목한 지점을 살피던 스트레이커가 당혹스러운 눈빛을 드러냈다.
【주군, 거긴 호수 위입니다.】
히죽 웃은 토드는 탁자 위에 놓인 잔을 흔들며 속삭였다.
“쾨흘링은 초겨울에도 눈이 많이 내리죠. 중앙에서 행차하신 교회분들도 그걸 알까요?”
여섯 번째 손가락에 찬 서리 반지가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잔에 담긴 물은 하얗게 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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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하게 쌓인 눈길 위로 새겨진 발자취가 이내 자취를 감췄다. 살갗을 에이는 한기에 곳곳에서 필멸자들의 숨결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변경의 기후가 익히 괴팍하다곤 들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선두를 맡은 성전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바짝 굳어 있었다.
가뜩이나 잿빛 하늘에 숲길까지 경유하자니 주변이 어둑했다. 드문드문 기수들이 치켜든 성구가 횃불처럼 쾨흘링의 어둠을 밝혔다.
“사령술사처럼 음험한 놈들이 도사릴 만한 땅이군.”
엄격한 군율로 통제되는 성전군이나, 거듭되는 행군은 무거운 입을 절로 떼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웃 권역을 다스리던 공작이 늑대인간으로 변했댔나? 소문이 흉흉할 만도 해. 여긴 저주받은 게 틀림없어.”
간신히 들릴 정도로 속삭여도 대화를 나누기엔 충분했다. 일대는 온통 눈송이 바스러지는 소음을 제외하곤 극도로 고요했다.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곳은 처음이야. 듣기론 마귀들의 침공도 덜했다던데··· 그 전에 이미 쇠락한 것 같아.”
젊은 성전사가 주의를 시켰다.
“쉿, 지금 우리 사명은 이교도의 절멸이다. 우선시할 사항 외에 세속의 사정은 언급하지 말게. 형제.”
고개를 끄덕인 성전사가 발을 옮기려던 찰나, 어느샌가 희끄무레한 안개가 사방에 퍼지고 있었다.
‘기이하다. 포도주라도 물에 탄 것처럼 안개가 저리 혼탁하게 퍼질 수 있단 말인가.’
위화감을 인지함과 동시에 저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음이 성전사의 신경을 자극했다.
“적이다!”
쩌저적···.
갑옷 위로 서리 끼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린다.
안개가 그를 감싸고, 파도가 밀어닥치듯 장막 너머 감추어졌던 것들이 이빨을 드러낸다.
【캬아악!!】
불시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개별 무력이 우수한 성전사들답게 대열은 흔들리지 않았다.
뒤틀린 피조물들은 다소 손쉽게 제압되었다.
그러나 단발성에 그쳤다면 굳이 파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리라.
“또 옵니다!”
“당황하지 마라. 신앙의 형제들이여. 구주께서 우릴 주시하시니, 우리의 적들은 갈대처럼···”
성전사들을 독려하던 주교는 말문이 막혔다.
물결이 밀려온다.
【끼릭, 끽. 끽!】
【뜨, 뜨거운. 살점. 배고파. 춥다.】
영원한 허기로 가득 찬 물결이. 끝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