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6
026
토드는 한참 동안 대치했다.
태양과 눈싸움을 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없다지만, 어째서인지 눈이 따갑지 않다.
어떠한 답이나 별도의 이적도 없었다.
빛의 궤적은 한결같이 촛대를 가리킬 뿐.
시선을 거둔 토드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원작에서 묘사되던 신들은 현상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직접적으로 현존하진 않으나, 은연중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식의 두리뭉실한 서술만 있었다.
그렇다면 게임이 실체화된 세상에서, 초월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망자들이나 영가들이 생김새가 흉악하긴 해도, 엄연히 그들은 인식의 울타리 안에 있는 실체.
이지를 벗어난 존재들에 대한 상상은 그 행위만으로도 껄끄럽다.
토드가 익히 아는 ‘그분’은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변덕스럽고, 까탈스럽고, 지나치게 피조물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시긴 하다.
반면에 태양의 신, ‘솔마르’는 여러 분야를 관장하지만, 엄연히 군신의 성격이 강했다. 과거 이 땅에는 여러 옛 신들을 모시는 신당이 가득했으나, 그는 자신의 열성 신자들을 이끌고 강대했던 만신전들을 정복하여 명실상부한 주신으로 군림했다.
어버이 신은 자애와 거리가 멀다.
하물며 사령술사로서 빛의 신당에 머무르는 게 그리 달갑지 않다.
한낱 피조물이 신의 저의를 헤아리려 드는 것도 우습다만, 진정 빛의 신이 사령술사에게 호의를 베풀어 도우려고 할까?
글쎄.
그럴 거였으면 자신을 5년 동안이나 지독하게 쫓아다니던 심문관 놈더러 좀 진작에 계시라도 내려줬어야지.
이곳은 교회조차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변방.
어쩌면 악은 악으로 제압한다는 생각으로 둘을 공멸시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이로운 일일 테지.
아니면 토드가 과민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은 그저 환청을 들었고, 우연히 폐허가 된 예배당에서 이걸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마음 편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쭈뼛거리며 손을 뻗던 토드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쪽이 먼저 내어준 거니, 쓰는 건 제가 알아서 하는 겁니다.”
여전히 대답은 없다.
광선은 무심하게 쓸쓸한 예배당을 어루만진다.
햇살을 등진 사령술사는 촛대를 챙기곤 쫓기듯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지만, 토드의 손에 들린 촛대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밝기가 눈에 띌 정도라 옷자락으로 덮고 천막에 들어가려는데, 병사가 그를 불렀다.
“토드님.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전술 회의입니다.”
아무래도 이 물건을 살펴보는 건 조금 미뤄둬야 할 것 같다.
“안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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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수는 약 4500명으로 추산됩니다.”
기병대장의 보고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번보다 늘어났다고? 빌어먹을, 멜다비어에 저만한 장정이 있소?”
“뜨내기 용병들을 죄다 끌어모았겠지.”
“그놈들을 붙잡아놓을 돈은 어디서 났고? 기껏해야 동물 가죽이나 벗겨먹어 연명하던 놈들이···”
“나야 모르오. 여긴 널린 게 산이니, 그중에 한 곳은 금맥이 있을지도.”
너흰 다 틀렸어. 이 머저리들아.
가신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꾸만 실소가 나오려 한다.
이웃 봉역의 세태도 모를 정도로 저들이 무능한 것인지, 아니면 카리나의 정보력이 생각외로 뛰어난건지.
옆을 돌아보니 카리나 역시 몰래 혀를 차고 있었다. 아무래도 둘 다인 것 같다.
“적들은 뮌파흐와 담로우 사이의 숲에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여기서 10km 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멜다비어 주의 지도에 자를 대보던 크리슈토프가 중얼거렸다.
“행군을 한다면 어림잡아 2시간 반 정도 걸리겠군.”
“특기할 점이라면 편성된 병력 중에 용병들이 줄어들고, 그라워볼프 가문의 직속 사병들이 대거 합류했습니다.”
깍지를 끼고있던 하인리히가 물었다.
“허면 드워프 용병대의 동향은 어찌 되었던가.”
“비록 가까이 접근하진 못했지만, 난쟁이들의 군기나 산양, 황소 따위를 보진 못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하인리히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리공도 어지간히 수세에 몰렸나보오. 하긴, 이 빈궁한 땅에서 그만한 봉급을 계속 지불할 여력이 있을리 만무하지.”
크리슈토프가 아래 쪽에 있는 마을, 담로우를 짚었다. 그는 포진도에 대고 왼손으로 감싸는 시늉을 했다.
“양측이 행군을 개시한다고 가정했을때, 예상되는 교전 지역은 이곳의 평탄한 길목이 되겠지. 담로우의 뒤쪽에는 호수가 있소. 우리가 좌익에 힘을 실어 적들을 압박한다면 능히 놈들을 몰아넣을 수 있을 거요.”
즉각 하인리히가 반박에 나섰다.
“좌익에 힘을 실어주면 필연적으로 중앙과 우익에 부담 가는 진형이네. 하물며 우리는 적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요.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겠다고?”
“화포가 없다면 경기병 운용에 제약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적들에겐 마법사가 없으니, 우리는 명백히 화력에 있어 우위를 점하고 있소. 중앙의 대형을 빡빡하게 구성하면 될 일이오.”
“가당치도 않군. 여기는 얼마든지 병력을 산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탁 트인 개활지요. 이전처럼 적이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줄 리 만무하다만.”
병력 전개를 두고 크리슈토프와 하인리히 간에 팽팽한 대립이 오갔다.
토드는 자신을 변칙적인 노림수에만 기발한 것이지, 군사적 역량은 부족하다고 여기는지라, 다소 흥미롭게 경청하고 있었다.
“오히려 적들이 마법을 고려해 병력을 퍼트린다면 고마울 따름이오. 사방에 흩어진 보병들을 발 빠른 기병대로 각개격파하는 그림이 하인리히 자네의 머리로는 잘 그려지지 않는 모양이군.”
크리슈토프의 비아냥에 하인리히가 싸늘히 코웃음 쳤다.
“우리가 직전에 승전을 거뒀으나, 그마저도 한 번뿐이네. 비록 요행으로 이리공을 패퇴시키긴 했어도, 여태껏 그자가 전장에서 보였던 교활함을 잊었나?”
자리에서 일어선 하인리히가 지도의 하단을 강하게 두들겼다.
“더군다나 혹여 적의 예비대가 뮌파흐 쪽에서 우회한다면, 역으로 아군의 우익과 중앙이 순식간에 궤멸될 위험도 있네. 이 정도는 상상력이 빈약한 무지한이라도 충분히 전략의 허점을 간파할 수 있을 거라 보이네만.”
조소를 흘리는 하인리히를 향해 크리슈토프가 눈을 부라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검으로 쉬지 않고 합을 주고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토드로선 팝콘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
“자네의 개요대로 병력을 전개하려면 우리는 모든 가용 병력을 동원해야 하네. 크리슈토프 경. 게다가 자네가 좌익을 맡겠다는 건 중앙과 우익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전공을 독차지하겠다는 탐욕 때문이 아닌가?”
크리슈토프 쪽에 선 가신들이 반발했다.
“망상이 지나치군!”
“중상모략도 정도가 있소이다! 하인리히 경!”
지지 않고 하인리히 휘하의 가신들도 맞선다.
“우리는 예비대를 운용할 여유가 없거늘, 적의 유동적인 대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오!”
“경의 말씀은 타당한 지적이었다! 왜 도리어 화를 내지?”
싸움 구경은 흥미롭다.
하지만 의미 없는 소모성 논쟁이 늘어질 기미가 보이자, 토드가 하품을 흘렸다.
문득 토드가 눈앞에 있는 잔을 마시려는데, 크리슈토프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자신을 응시하던 크리슈토프가 언뜻 미소를 흘렸다.
그는 다시금 하인리히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래, 여전히 병력이 부족하지. 마지스터 에스터리츠가 계시지만, 개활지에서 산개한 병력을 상대로 광역 주문의 효과도 반감되고.”
크리슈토프가 손을 들어 토드를 가리켰다.
“하지만 우리에겐 사령술사가 있지 않은가. 그가 부리는 망자들은 충분히 그 간극을 매꿔줄 수 있다.”
뜬금없이 화두가 이쪽으로 옮겨온다.
“사령술사 토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프론지 성채에서 패배했을 거요. 비록 그는 죽은 자들을 이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군공을 부정할 수 있소?”
잠시 말문이 막힌 하인리히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장에서 망자들과 더불어 출정하라는 소리인가?”
“그의 도움을 받아놓고 이제 와서 명예니, 신앙의 문제니 이딴 소리를 지껄일 생각은 꿈도 꾸지마시오. 하인리히. 계속 그딴 정신머리로 논쟁이나 벌였다면, 이리공이 우리 시체를 개밥으로 던져줬을 테니. 사령술사는 이미 야전에서 자신의 진가를 충분히 입증했소.”
“도의를 따지기 이전에, 야전에서 사령술사의 망자들이 진정 효용성이 있는지 따지는게 우선이네. 크리슈토프! 전투가 끝난 뒤에도 망자들이 계속 날뛰던건 잊었나? 놈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들과 다를바없지. 그런 놈들과 더불어 등을 맞대고 싸우겠다고?”
하인리히의 수족, 휴그 역시 거들고 나섰다.
“설령 여기서 합의가 이루어진다한들, 별개로 전투에 나서는 병사들도 따를지는 의문이오. 망자들은 존재만으로 적군 뿐만 아니라, 아군의 사기도 저해시킬 수밖에 없소.”
꽤 예리한 지적이다.
전장에서 망자를 운용할 때의 필연적인 한계를 잘 파고들었다.
크리슈토프도 그걸 알고 있기에 침음을 삼켰다.
이쯤에서 슬슬 끼어들어야겠군.
“여러분의 지적은 타당합니다. 아무리 제가 변경백 각하의 용인 덕에 종군한다 한들, 본능적으로 송장을 꺼려하는 생리적 한계를 이기는건 쉽지 않은 일이지요.”
토드가 기병대장을 향해 물었다.
“뮌파흐와 담로우, 어느 쪽이 더 인구가 많았습니까?”
졸지에 양측의 시선이 쏠리자 기병대장이 엉겁결에 답했다.
“뮌파흐가 대략 50호, 담로우가 35호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위쪽 마을이 300구, 아래쪽은 210구 정도인가.
계산을 마친 토드가 지도를 짚었다.
“그렇다면 위에서부터 치면서 내려오는 게 어떻습니까. 오늘 밤, 저는 도팅하임의 사망자들을 소생시킬 겁니다. 좌익이 빠르게 적을 몰아내면, 추가로 뮌파흐에서 숫자를 충원하여···”
그의 손끝이 반원을 그리듯 전장이 될 지형을 가로지른다.
“담로우에 도달, 도합 600기가량의 망자들과 더불어 적과 교전하는 우익에 합세합니다. 이러면 적어도 전력은 비등하지 않습니까?”
“자네가 별동대로 기동하겠다는 건가?”
크리슈토프의 물음에 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군과 인접하여 싸우느니, 차라리 적의 후방에서 맞붙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인리히 경의 말씀대로 일정 수 이상의 망자들은 제가 통제할 수 없긴 하지만, 적들과 붙여놓는다면 알아서 소진될 테죠.”
하인리히가 팔짱을 낀 채로 따지고 들었다.
“죽은 자들을 멋대로 살리겠다고. 비록 우리가 도의를 저버렸다곤 하나, 그것만큼은 내가 쉽게 흘려듣기 어려운 불경한 내용이네. 누가 자네에게 그럴 자격을 부여했는가?”
사령술사가 미소지었다.
“누구도, 제게 자격이나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부름에 응답한 자들만을 일으킵니다.”
“하! 자네는 마치 죽은 자들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음험한 요술로 그들을 사로잡을 뿐 아닌가?”
그를 바라보던 토드는 나직이 물었다.
“하인리히 경. 당신은 구주 솔마르께서 말씀하신 영혼의 불멸성과 구원의 언약을 믿으십니까?”
하인리히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네가, 지금, 내게··· 신앙에 대해 논하려 드는가?”
사내의 눈동자에 진노가 넘쳐흐른다.
그에 비하면 잔잔히 가라앉은 토드의 눈.
“저는 천상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저조차 신께서 안배하신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분이 전능하지 않다면, 어찌 이 땅에 버젓이 악을 놔두셨겠습니까.”
“그래서 경전에 심판의 날이 예고되어 있지 않은가!”
느긋하게 고개를 까딱인 사령술사의 혀가 매끄럽게 움직인다.
“그렇지요. 하물며 묵시록의 내용마저 잘 숙지하신 분이, 어찌 영혼의 존재는 부정하십니까? 왜 사자들에게 목소리가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장내가 고요해졌다.
여태 틈만 보이면 승냥이 같이 끼어들고, 호시탐탐 딴지를 걸던 이들이 눈치를 살핀다.
누구도 섣불리 토드의 아가리 풍둔술을 상대할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다.
“경도 알다시피, 이리공이 자기 봉역의 신민들을 이교의 신에게 봉양한 정황은 명백합니다. 아직도 그들의 한 맺힌 성토를 외면하시렵니까.”
“매우 불쾌하군. 지상에서의 악행은 마땅히 사후에 신께서 벌하실 일이다! 감히 흑마법사 따위가 심판의 대행자를 자청하려 들어?”
토드는 고개를 저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겐 어떠한 자격도 없으며, 누군가의 뜻을 섭행할 의도 또한 없습니다. 허나 누구도 다른 이의 목숨을 거두어갈 자격 또한 신께서 부여하지 않으셨죠.”
밖에서 홀연히 몰아닥친 바람에 군막이 흔들렸다. 사령술사가 읊조렸다.
“불우하게 죽어간 이들의 영혼이 이 일대를 떠돌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마땅히 이리공에게 목숨값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요. 그들의 미련을 해소해주고, 숙원을 이룬 영혼을 구천으로 인도하는 것.”
토드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게 제가 마땅히 행하는 일입니다.”
“가증스럽긴, 순 궤변이다! 생명의 순리를 역행하는 것이 어찌 영혼의 구원인가! 도리어 네놈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억울한 영혼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게 아닌가?”
품을 뒤적인 토드가 은촛대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글쎄요. 이건 제가 전소한 마을의 예배당에서 방금 찾아낸 것입니다만.”
손에 침을 바른 그는 차례로 탁자 위에 켜진 초를 꺼트렸다.
토드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가신들은 곧 경탄을 금치 못했다.
어두워진 군막 속에서, 불을 붙이지 않은 은촛대가 홀연히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어둠 속에 놓인 그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 오오···.”
“성물이다···.”
은은하게 흩뿌리는 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리는 이들도 있었다.
파문을 일으키는 하인리히의 동공을 향해 사령술사가 돌을 던진다.
“진정 신의 뜻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하인리히 경.”
그가 신음했다.
“이, 어찌.”
불경함으로 지탄받는 사령술사가, 버젓이 신의 손길이 미친 물건을 가지고 왔다.
도무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에 하인리히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녹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미련 품은 영가들은 지상을 배회합니다. 영영 심판을 받지 못하고 생애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지요. 이미 그 자체가 형벌이나 다름없습니다. 차라리 그들을 옭아매는 집착의 굴레를 풀어주고, 마땅히 죄가 있다면 구주께서 판단하시도록 기회라도 제공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상대의 동공이 흔들리고, 숨이 빨라졌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티도 역력하다.
“그걸, 감히 누가 판단···”
애석하게도 하인리히는 이미 덫에 걸렸다.
눈앞의 표상이 버젓이 있는데, 또 의심한다면 도리어 자신이 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꼴이다.
적막을 깨트린 건 변경백이었다.
“다시 불을 켜게.”
하인리히는 자리에 힘없이 앉았다.
“신의 손길이 닿은 물건은 이교도나 마귀들이 감히 손댈 수 없다. 익히 우리가 아는 자명한 사실이지. 그렇지 않나?”
변경백이 토드를 응시했다.
“허나 토드는 버젓이 아무런 위해를 입지 않았네. 사령술사의 행적을 쉽사리 용인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나, 적어도 신께선 이교의 영매와 결탁한 이리공과 견주어 봤을 때, 죄질은 적의 수괴가 더 깊다고 여기신 게 분명하네.”
창칼이나 고위 마법보다 강력한 효력을 지닌 것.
시대를 지배하는 통념이다.
고작 빛나는 촛대로 인해 사령술사의 궤변이 설득력을 얻고, 변경백의 발언에 권위가 실리고 있지 않은가.
“크리슈토프의 안건을 수용하겠다. 단, 형평성을 위하여 작전을 발의한 크리슈토프가 우익을 책임지고, 에두아르드와 보데빈이 보병진과 용병대를 편성하여 중앙을, 하인리히가 좌익을 이끌도록 하게.”
크리슈토프가 얼굴을 찡그렸지만, 적어도 에두아르드는 그의 파벌에 속한 인물이었으므로 불만을 삼켰다.
“마지스터 에스터리츠, 중앙에서 아군의 조력을 부탁드려도 되겠소?”
카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자연히 모두의 눈동자가 토드를 향한다.
“토드, 자네는 마을의 희생자들을 일으켜 적을 타격하게. 단, 안식을 바라는 자는 구태여 일으키지 않도록 하게.”
토드가 고개를 조아렸다.
“반드시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겠습니다.”
“각 지휘관은 휘하 백부장에게 작전 개요를 전달하고, 1시간 내로 내게 전투태세에 대한 보고를 올리게. 이만 폐회하도록.”
자리에서 일어선 변경백이 외쳤다.
“나는 존귀한 황제 폐하로부터 변경주의 통치권을 위임받았거늘, 이리공은 명분 없는 분쟁을 일으켜 나의 재산과 권리를 침해하고, 무고한 신민들을 이교도의 제물로 희생시킨 거로도 모자라, 자신의 신하들을 괴물로 빚어냈네.”
그가 힘주어 말했다.
“나 또한 불경한 마법사를 수하로 들였으니, 어찌 허물이 없으리오. 허나 어느 쪽의 죄질이 깊은지는, 결국 주께서 전투의 결과로 답하실 거라 믿노라.”
가신들의 눈빛이 비장해졌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음, 아직도 이런 거엔 면역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팔에 살짝 닭살이 돋아서, 자꾸만 긁적거렸다.
옆에서 카리나가 옆구리를 슬쩍 꼬집은 뒤에야 멈췄다.
하나둘 천막을 빠져나가는 와중, 토드가 변경백에게 다가갔다.
“각하, 잠시.”
“무슨 일인가?”
“저와 에스터리츠 양, 셋이서만 긴히 할 얘기가 있습니다.”
변경백이 턱을 까딱이자, 잠자코 가신들을 비롯한 병사들이 물러났다.
헛기침한 토드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촛대를 가리켰다.
“저 촛대는 은으로 만들어진 성물입니다. 특히 어두운 술법으로 빚어진 피조물들에게 효과적이죠.”
신성력, 은제. 야수 상대로 유효.
동시에 뜻 모를 불길함을 느꼈던지, 변경백의 이마가 좁혀졌고, 곧장 토드의 의도를 파악한 카리나는 눈으로 욕했다.
하지 마, 하지 마! 이 미친놈아!
그러나 저 악독한 주둥이를 말릴 순 없다.
“저걸 녹여서 검에 바릅시다. 촛대가 꽤 큼직하니, 두 자루 정도는 도금할 수 있겠군요.”
세상에.
카리나가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