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7
027
말문이 막혔던 변경백은 겨우 입을 열었다.
“성물을 녹이자니. 별안간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이 촛대에는 천상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막연히 관상용으로 두기엔 아깝지 않습니까.”
사제가 있었다면 면전에서 이단 선고를 때려도 할 말이 없는 발언이다.
변경백이 한숨을 흘렸다.
“사령술사··· 저들 앞에서 대의를 증명하는 증거로 기껏 성물을 제시해놓고, 이걸 파괴하겠다는 건가?”
“뭐, 성물의 보존 여부야 대충 중요한 곳에 보관해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죠. 게다가 내일 있을 회전에서 늑대인간들이 대거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자신의 코를 두들겨 보이는 토드.
“야수들은 특히 후각이 매우 예민하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공이 의도적으로 야전에서 화기를 배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게 성물을 녹일 만한 사유가 되진 않네.”
토드가 못박았다.
“아니요. 각하. 우린 저걸 사용하지 않으면 내일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의 손이 지도를 가리켰다.
“적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솔들을 호위할 병력까지 전부 끌고 온 거만 보더라도 그렇지요. 이리공은 내일, 자신이 예비해둔 모든 수를 동원할 겁니다.”
“적병 사이에 야수들이 숨어있다 한들, 마지스터 에스터리츠의 화염에 취약하지 않겠나.”
“여태껏 놈이 내보낸 늑대인간들은 피라미에 불과합니다. 진정 혈족의 인자를 깨우친 개체는 화염만으로 죽지 않지요.”
“이리공이 회전에서 전력을 다할 거라는 건 자명하네만, 어찌 성물까지 해체해야 겨우 대적할 만한 괴물이 나올거라 자신하나?”
“잘 생각해보시지요. 각하. 당초 이리공이 분쟁을 일으킨 명목은 쾨흘링 땅에 대한 소유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봉토 점거뿐만 아니라, 관리 역시 중요한 일이지요.”
음영진 사령술사의 눈동자에 녹색 빛이 어린다.
“그런데 놈은 봉역을 불태웠습니다. 기이한 일이지요. 하지만 이리공은 자신의 봉역마저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게 단순히 광인의 기행일까요?”
토드의 곁눈질에 카리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 이곳을 조사해본 결과, 학살당한 주민들은 인신공양의 제물로 희생된 정황이 명백해요. 저와 사령술사가 공동으로 내린 결론입니다.”
재빨리 토드가 거들었다.
“애초에 그는 봉토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게 아닙니다. 각하. 그라워볼프 가의 기행이 오래전부터 지속되었다고 하셨지요. 그들의 핏줄에 내려오는 힘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불가피하게도 더 많은 제물이 필요했을 겁니다.”
변경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핏줄에 내려오는 힘이라니.”
토드가 낮게 속삭였다.
“분쟁이 벌써 넉달동안 진행되었지요. 예의 이리공 수하에 있는 주술사가 처음부터 개입했다면, 적지 않은 인간의 피가 제물로 바쳐졌을 겁니다. 이제 최후의 일전이 머지않았으니, 전황을 뒤집을 수만 있다면 거리낌 없이 내보일 겁니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에 변경백이 잔을 들이켰다.
여태 의심스러운 정황들은 충분히 축적되었다.
변경백은 무겁게 입을 뗐다.
“자네와, 마지스터의 권능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가?”
동시에 카리나와 토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입술을 곱씹던 카리나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라이칸스로프가 있다면, 저도 쉽사리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비틀거린 변경백이 탁자를 짚었다.
과연 승산이 있긴 한 건가?
지금이라도 빠져나간 가신들을 다시 불러들여야 할지, 갈등했다.
이젠 섣불리 물러나기도 어렵다. 이미 적지 깊숙이 진군했다.
“현재로선 이리공 본인이 라이칸스로프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겠지요.”
변경백이 탄식했다.
“디트마흐 놈이?”
“예. 여태 죽은 늑대인간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해보니, 피를 매개로 발현되는 방식이더군요. 아마 직접적인 혈통을 계승한 이리공이야말로 수혜자로서 적격이니까요.”
토드가 히죽 웃었다.
“허나, 이 또한 호재입니다. 각하.”
“호재라니.”
인상을 구긴 변경백을 향해 토드가 손을 까딱였다.
“제국의회에서 제정한 상속법에 따르면, 제국 내 권역에 속하는 봉토의 주인은 ‘신앙을 추종하며, 황권을 준수하는 필멸자 인간’이어야만 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자네의 저의를 이해하기 어렵네. 지금 맥락에서 상속법과 연관성이 있나?”
미소지은 토드가 속삭였다.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각하.”
비교적 풀기 쉬운 축에 속하는 수수께끼였는데, 변경백은 도무지 알아차리질 못한다.
순순히 답을 알려주는 건 재미없는데.
혀를 찬 토드가 입을 열려던 차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카리나가 말했다.
“필멸자, 필멸자 인간···. 만약 이리공이 라이칸스로프가 된다면, 상속법에서 규정하는 제후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돼. 라이칸스로프는 불사에 가깝고, 인간 또한 아니니까.”
토드가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이리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선택된다면? 그 주술사가 라이칸스로프가 될 수도 있는거 아냐?”
“절대 그럴리 없습니다. 혈통으로 전래되는 힘은 제한적으로 계승되기에 직계 후손이 아닌 이상, 받아들이는게 구조적으로 불가합니다.”
눈을 좁힌 카리나가 재차 반문했다.
“그, 이리공에게 자식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식솔이 대신 힘을 받을 수도 있잖아.”
“어떻게든 가문을 존속시키고는 싶으니, 이리공도 저리 필사적이겠죠. 가문의 후사인 장남은 아마 별도의 장소에 있을 거고, 예의 영애는 외부에 노출시킨 적이 없을 정도로 지극정성이잖습니까. 이리공 외에 인물은 없습니다.”
비로소 변경백의 눈이 커진다.
쯧쯧, 이리 아둔해서야.
“아마 이리공이 이 분쟁을 위해 안배해둔 힘은 아니겠지만, 궁지에 몰렸으니 어쩔 수 없이 나설 겁니다. 야수가 된 이리공을 쓰러트린다면, 자연히 그의 봉역을 몰수할 명분도 획득하고, 학살의 책임을 물을 수 있죠.”
이 정도면 휘하에 사령술사를 들인 것보다 더한 과실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짓누른 변경백이 물었다.
“사후 처리를 제쳐두고, 우선 그놈을 어떻게 쓰러트릴지가 문제 아닌가.”
토드는 태연히 촛대를 가리켰다.
“그러니 이걸 사용해야지요.”
“···신께서 그걸 허락하리라 보나?”
어깨를 으쓱인 토드가 답했다.
“뭐, 괜히 이걸 내려주셨을까요. 관상용으로 방치하느니, 차라리 쓰임새가 있을 때 긴히 사용하는게 온당한 처사 아니겠습니까. 성물로 주조한 병기가 마물을 쓰러트린다면, 주께서 용서까진 몰라도 용인까진 해주시겠지요.”
변경백은 양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사회적 물의, 신성 모독,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목들을 갖다 붙여도 할 말이 없으리라.
그럼에도 토드의 뻔뻔한 태도에 마땅히 응수할 만한 방책 또한 없다.
갈등하던 그가 한숨을 흘리듯 힘겹게 뱉었다.
“뜻대로 하게.”
토드가 촛대를 집어 들었다.
“솜씨좋은 대장장이가 필요합니다.”
“언질을 해두지. 이만 나가보게.”
가뜩이나 주름진 중년 사내의 골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변경백은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절실해보였다.
토드가 카리나를 향해 손짓했다.
“에스터리츠 양! 갑시다.”
“나, 난 왜.”
“그야, 기왕 성검을 만드는데, 마법사의 주문도 몇 개 새겨넣어야죠.”
카리나가 아연실색했다.
아니, 일단 사령술사가 주조를 발인한 시점에서 이미 성검이 아니라 마검 아닌가?
게다가 자연스럽게 또 자신에게 잡일을 맡기려는 저 뻔뻔함까지!
“너, 아니다······.”
이젠 구태여 입 아프게 딴지를 걸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저놈은 ‘우리 공동의 적에게 결정타를 입힐 무기를 만드는 일인데, 크게 보면 넓게 에스터리츠 양에게도 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둘러댈 게 뻔하다.
이젠 하도 많이 들어서 저 간악한 사령술사의 화법조차 예상할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정말 치가 떨린다!
괜히 따져봤자 또 나만 열받을 텐데.
한편 그런 카리나를 지켜보던 토드가 실소를 흘렸다.
“에스터리츠 양에겐 독심술이 따로 필요 없겠군요.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다물고 걷기나 해.”
하여튼 놀리는 맛이 다분하다.
물론 줄타기는 적당히 해야 하는 법.
입이 근질거렸지만, 겨우 걸어 잠근 토드는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카리나의 살기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지, 괜히 뜨끈뜨끈한 것 같다.
사령술사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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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의 난해한 요구에 병기공은 난감해했다.
“촛대를 녹여 검날에 은 도금을 하라니. 땜질만 17년 해봤는데, 이런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소.”
“아마 순도는 높아서 문제없을 겁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오. 허, 참.”
굳이 성물이라는 사족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심상치않은 은촛대의 생김새에 병기공이 경계하고 있었으니.
“당신이 사령술사라는 건 익히 들었소. 은의 성질을 알긴 하오? 의외로 무른 편이라, 누구도 이걸로 무구를 만들지 않소.”
“통짜 은으로 칼날을 만들 필요까진 없습니다. 날 위에 덧씌우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거기다 화염 주문을 부여할 홈도 필요하고요.”
끄응, 신음을 삼킨 병기공이 촛대를 철괴와 겨주어 봤다.
“대충 쇠꼽떼기 갖다 대고 망치질만 한다고 쓸만한 놈이 나오는 줄 아쇼? 검은 괜히 병기의 꽃이 아뇨. 양날의 무게도 균등하게 잡아야 하고, 을만큼 불숨을 넣어줄지도···”
가만히 그의 불평을 들어주던 토드가 조소를 흘렸다.
“각하께선 당신이 군영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라고 판단하셨기에, 제가 여기 온 겁니다.”
병기공의 부리부리한 눈썹이 꿈틀거린다.
“이리공의 휘하에 늑대인간이 있습니다. 그놈들을 상대하기 위한 무기지요.”
팔짱낀 병기공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그래서, 느닷없이 찾아와놓곤, 나더러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마법을 새길 자리까지, 하나하나 까다로운 작업인데, 촉박한 시간 내에 하라고?”
토드가 이빨을 드러냈다.
“못하시겠다면야. 더 솜씨 좋은 대장장이를 찾아가야겠군요. 각하의 안목이 틀렸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가 촛대를 회수하려 하자, 병기공이 몸을 돌렸다.
“젠장, 누가 안한댔소? 단지 작업이 귀찮고, 성가실 뿐이야! 나 말고 어떤 놈팽이가 이걸 할 수 있다고. 무슨!”
눈동자를 이글거린 병기공이 토드를 향해 삿대질했다.
“내 승질머리 긁으려는 수작이 뻔하다만, 슈테판 놈 체면을 보아 해주는 거요!”
툴툴거린 병기공은 뒤뚱뒤뚱 모루로 걸어갔다. 지금 보니 그는 비교적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풀무를 달군 병기공이 중얼거렸다.
“킁! 슈테판, 그놈 할애비가 우리 집안에 베푼 보은만 아니었어도, 이 고생은 안했을텐데.”
외형보다 꽤 연배가 있는 걸로 보였다. 아무래도 순수 드워프 혈통은 아닌 것 같고, 피가 섞인 게 분명했다.
변경백 가문과 무슨 내력으로 엮인 건진 모르겠지만, 병기공은 곧잘 능수능란한 솜씨를 선보였다.
여기가 제대로 된 작업장도 아니고, 군영에 차려진 임시 공간이었음에도 작업에 지장이 없는 걸로 보아 그가 숙련된 대장장이라는건 틀림없었다.
치익···!
새빨갛게 달궈진 촛대가 녹아내리는 광경에 카리나가 속삭였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애초에 신벌이 내릴 거였으면, 진작에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까요. 에스터리츠 양.”
토드의 지난 행적을 돌아보면 절로 납득이 어렵진 않았다. 불안한 눈길로 제련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단지 속에서 완전히 용해된 은이 반짝거렸다.
병기공이 감탄했다.
“대체 이런 걸 어디서 가져왔나? 이건 평범한 은이 아닌 것 같은데···!”
“글쎄요.”
“흐으음, 칼날에 덧씌운다고 했나? 그래도 은을 도금했다간 칼날이 물러질 수밖에 없네. 아마 충격을 버티지 못할 거야.”
“내구성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차라리 부서진 파편이 타격점에 파고든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병기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날 끝을 새로 접붙여야겠군. 살은 파고들되, 최대한 안쪽에서 깨져나가도록.”
쉴 새 없이 망치를 두들기고, 불똥이 튀긴다.
토드는 이곳의 열기가 견디기 버거웠으나, 홍염 마탑에서 자란 카리나에겐 온풍기 정도의 화력에 불과했던지 구석에서 요령 좋게 졸고 있었다.
소음이 상당했음에도 잘 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친 병기공이 완성된 검을 내려놓자, 토드는 팔꿈치로 카리나를 찔렀다.
“으겍?!”
괴상한 신음에 토드가 헛기침했다.
“저 아가씨가 빨간 마탑에서 왔다는 마법사인가? 은으로는 화기를 버티지 못하니, 구리를 조금 섞어놨네.”
과연. 모든 준비가 끝났다.
“훌륭합니다. 인간 대장장이들은 못 따라갈 대단한 솜씨군요. 자, 에스터리츠 양? 마법 부여를 거행해주시지요.”
코웃음치는 병기공과 별개로, 어째 카리나는 선반에 올려놓은 장검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토드가 이마를 좁혔다.
“에스터리츠 양, 혹시···”
땀 한 방울 안 흘리던 카리나의 이마가 촉촉해진다.
“기다려봐···!”
뭔가 마력을 일으키기는 하는데, 좀처럼 홈에 자리잡지를 못한다.
계속 쩔쩔매는 모습에 토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흠. 보통은 대단위 광역 주문을 시전하는 게 칼날에 주문을 부여하는 것보다 어렵지 않습니까?”
“시끄러! 집중에 방해되니까, 재촉하지 마. 얼굴에 불길을 쏟아버리기 전에.”
까칠하시군.
홈을 축으로 삼은 마력이 무늬를 그리듯 흘러내린다.
그러나 진척도가 터무니없이 더디다.
기껏 병기공의 솜씨 덕분에 시간을 절약했는데, 이러다가 날밤 다 새울 지경이었다.
인고의 시간 끝에 비로소 카리나는 낭송을 마무리지었다.
열기를 피해 물러서있던 토드는 작업의 결과물을 확인하고는 기겁했다.
“에스터리츠 양. 대체 뭔 짓을 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