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31
031
폭우에 잠긴 들판은 하나의 거대한 늪이 되었다. 전위에 나선 투사들에겐 악몽이었다.
칼을 휘두르려다가 자빠지기 일쑤였고, 발목이 묶여 허우적대다가 상대와 더불어 넘어져 목이 꺾이고, 힘이 빠져 수렁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익사하기도 했다.
늑대인간들조차 기동성이 저해되니, 그저 생김새만 조금 다른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재수가 없어 마법사의 불꽃에 휘말리지 않는 이상, 모두가 하염없이 몸부림치는 아수라장.
불현듯 흉포한 포효가 모두의 고막을 터뜨렸다.
지지부진한 대치의 종막을 고하는 울림이었다.
목청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새긴 야수가 신형을 드러낸다.
멀리서도 확연한 존재감에 이를 목격한 가신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곧바로 정체를 알아본 변경백은 탄식했다.
“디트마흐···! 진정 이걸 원한 거였나? 네 저주받은 핏줄의 힘에 심취하는 게?”
곰보다 육중한 거구가 달린다.
순식간에 들판을 가로지른 짐승이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악-!!
장정의 체구에 맞먹는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허리 위로 아무것도 없었다.
일격에 열댓 명을 날려버린 야수는 거침없이 수렁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파각, 빡, 콱!!
팔을 뻗으면 새빨간 물보라가 솟구치고, 누비는 곳마다 갈기갈기 해체된 살 쪼가리들이 튀겼다.
놈은 움직이는 것이라면 눈에 걸리는 대로 죄다 찢어발겼다.
누구를 믿고, 어떤 깃발을 따르는 지마저 무의미하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하자, 너나 할 것 없이 양측의 병사들은 어떻게든 진창을 빠져나오려 발악했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급히 달려온 기수가 비보를 전했다.
“각하! 좌측의 아군이 패퇴했습니다! 다수의 적이 밀고 들어옵니다!”
“하인리히 경은 어디로 갔는가?”
다른 가신의 물음에 기수가 고개를 저었다.
“정녕 그 작자가···!”
전투가 거듭되면서 아군의 진형이 우측으로 쏠린 형태였다.
초조하게 전황을 살피던 변경백이 외쳤다.
“놈을 향해 집중적으로 사격해라! 남아있는 화살을 죄다 쏟아부어!”
난전 양상이 되면서 사격을 자제했지만, 이젠 망설일 것도 없다.
변경백은 넋 나간 채 서 있는 기사를 향해 일갈했다.
“당장 크리슈토프에게 증원을 요청하게!”
야수를 향해 화살이 빼곡하게 떨어졌다.
파바바바박-!!
“악!”
“겍.”
놈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반경에 있던 병사들은 화살에 꿰여 죄다 숨이 끊어졌다.
정작 야수는 한가운데에 의연히 서 있었다.
놈은 손을 들어 갈기에 막힌 화살을 부러뜨렸다.
―크르륵···!
놈이 한바탕 몸을 털자, 털에 들러붙은 화살이 우수수 떨어진다.
한 발도 뚫지 못했다.
고개를 치켜든 짐승의 눈동자가 언덕 위, 이 알량한 졸개들의 통솔자를 향한다.
곧장 이쪽을 노려보는 눈빛에 변경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리는 한참 멀지만, 어째서인지 놈의 숨결이 코앞에 와닿는 것만 같다.
대검을 거머쥔 야수가 뒷발을 굽힌다.
“오, 온다.”
어느 기사의 중얼거림.
지면을 박찬 짐승이 접근해온다.
사람을 작물 갈아엎듯 해체하는 모습에 병사들의 다리가 벌벌 떨렸다.
아예 창대를 떨구고 주저앉은 자들도 있었다.
부사관들이 동요하는 병사들을 닦달했다.
“위치 지켜! 흩어지지 마라! 끝까지 진형을 갖추-”
우지끈!!
몸이 터졌다. 맥없이 날아간 사지가 사방에 흩어졌다. 여태 마주쳤던 짐승들과 격이 다른 돌파력이었다.
대검으로 휩쓸고, 짓뭉갠다.
견고하게 구축한 대형이 무너지는데 3초도 안 걸렸다.
저런 존재에게 감히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보였다.
부, 부, 부우-!
옆에서 울려퍼진 나팔에 야수의 고개가 휘번득, 돌아갔다.
겨드랑이에 창을 걸친 기병들이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기어가는 병사의 머리통을 뽑은 놈이 콧김을 흘렸다.
―크릉.
이미 수차례 기동을 펼친 탓에 군마들도 적지 않게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기병대는 돌격을 감행했다.
용맹함인지, 무모함인지 결판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려친 대검이 선두에 선 기수와 말을 동시에 갈라버렸다.
연이어 들이닥친 창이 놈의 어깨와 등을 찔렀지만, 고작 휘청이는 정도.
사납게 울부짖은 야수가 군마를 걷어차자, 목이 부러져 고꾸라졌다.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기사를 향해 놈이 죽은 말을 내던졌다.
콰직!!
군마 두 마리는 한 덩어리의 파편이 되어 뒤엉켰다. 그 밑에 깔린 기사의 시신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유효한 타격은 몰라도, 놈의 화를 돋우는 덴 성공한 모양이었다. 핏발을 세운 야수의 이목은 다시금 점찍어줬던 사냥감을 향했다.
더는 병사들을 잡아두기 어려울 정도로 변경백군의 전투 의지가 무너졌다.
당장 그들을 붙잡아놓을 부관들부터가 도망치고 있었으니.
“각하! 피신을!”
피신? 이미 늦었다.
고작 말 따위론 저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돌파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기병의 저지를 위해 박아둔 말뚝마저 모조리 갈아엎고, 그 뒤에 있던 궁병들이 갈가리 찢겨나간다.
수백 명의 병사를 앞세워 막아내겠다는 건 알량한 생각이었다.
한낱 인간의 힘으론 항거할 수 없는 재해가 다가오는 기분이다.
거침없이 뚫고 들어오는 야수를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돌연 놈의 발치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콰아악!!
떨리는 손을 뻗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마법사.
‘변경백이 죽어선 안 돼.’
아직은···!
습기가 완연한 환경은 그녀에게 극도로 불편한 환경.
적지 않게 지친 상태였지만, 얼마 남지 않은 마력 한 줌마저 끌어올렸다.
여태껏 화살이나 창칼에도 꿈쩍 않던 놈조차 화염은 다소 껄끄러웠는지, 야수가 주춤거렸다.
눈가를 일그러트린 짐승이 불길을 응시했다.
열기가 제법 사납다.
그러나 치명적이진 않다.
가늠이 끝난 야수는 발을 굴렀다.
다급히 카리나가 낭송을 이어나가고, 야수가 내달리는 방향 앞에 공기가 응축된다.
무릎을 굽힌 짐승이 급격히 몸을 틀었다.
쾅-!!
‘피했어?’
당황한 카리나가 불꽃 쐐기를 쏘아냈다.
불똥에 스친 어깨가 그을렸지만, 놈을 멈추진 못했다.
평소와 달리, 주문 시전에 충분히 공을 들이지 못한 탓일까? 화력이 떨어진다.
재차 「혹점폭발」. 이번에도 놈은 간발의 차이로 주문의 피격 범위를 비껴나갔다.
「유황비」는 간지럽다는 듯이 그냥 몸으로 받아내고, 「불기둥」은 애꿎게 빈 땅만 쓸고 있다.
저렇게 몸놀림이 재빠른 놈 상대론 자신의 주력 주문들이 유효하지 않다.
주문 하나하나 사전 동작이 지나치게 큰 탓이다.
문제점은 인식했으나, 뾰족한 수가 마땅치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순간에도 야수는 거리를 바짝 좁히고 있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곱씹은 카리나는 스쳐 지나가듯 봤던 주문의 구절을 떠올렸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필사적인 사고 끝에 도출된 한 수.
“타오르는 장벽이여!”
화아아악-!!
불길로 만들어진 벽이 야수의 앞에 몰아닥친다.
장벽을 훑어보던 놈은 힘껏 지면을 박차고 장벽의 건너편으로 넘어왔다.
쿠웅-!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파훼당했다.
굴하지 않고 카리나가 재차 낭송을 덧붙이려 했으나, 마력이 아닌 핏덩어리가 한 움큼 올라왔다.
그녀가 길게 탄식했다.
“아아···.”
최후의 방어선인 기사들이 몸을 내던졌지만, 죄다 짓이겨져 침묵했다.
이제 슈테판 변경백과 야수 사이엔 아무도 없었다.
놈과 마주 본 슈테판은 야수의 눈동자에 맺힌 명백한 적의를 읽었다. 놈은 올곧게 자신만을 노리고 있다.
외형이 완연히 인외를 벗어난 짐승의 형상일지언정, 한 줄기 이성만은 붙들어 쥐고 있다는 건가?
애초에 그걸 이성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마는.
슈테판이 조소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디트마흐.”
이렇게까지 내몰려서 얻을 대가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평생토록 대립해온 숙적은 대답할 만한 상태가 아닌 듯 보였다.
―그륵···
피로 얼룩진 대검이 지면에 내려앉는다.
변경백 역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걸로 대화는 족했다.
누구도 말릴 새 없이, 야수가 냅다 달려들었다.
변경백이 놈의 옆구리에 칼날을 꽂아 넣었으나, 육중한 몸집으로 깔아뭉갠다.
말에서 튕겨 나간 변경백은 야수와 동시에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대검을 놓친 짐승이 발톱으로 변경백을 마구 헤집어놨다.
그가 찬 갑주가 발톱을 막아주곤 있으나, 피투성이가 된 변경백은 비명조차 흘리지 못했다.
손을 치켜든 야수가 변경백의 얼굴을 향해 발톱을 내지르려던 차에, 등에 칼이 박혔다.
콰악!!
―캬아악!
불의의 일격을 가한 건 다름 아닌 크뤼거였다.
몸이 벌벌 떨리고 있음에도 검을 놓치지 않은 건 가상했으나, 야수가 팔을 휘둘러 벌레 쳐내듯 크뤼거를 떨쳐냈다.
이제 더 지체할 수 없다.
야수가 돼버린 디트마흐는 온몸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자신의 밑에 깔린 변경백을 향해 양손을 내리쳤다.
“쿨럭···”
슈테판이 입에서 피를 왈칵 토해냈다.
어째서인지 그가 즐거운 듯이 입가를 히죽이고 있었다.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의문을 품은 순간, 야수는 자신의 양팔을 붙들어 쥐고 있는 손가락들을 목격했다.
온몸에 묻어있던 핏물이 꿈틀거리며 놈을 감싸고 있었다.
또, 방해꾼.
―캬아아악!!
“구하러 왔습니다. 각하. 조금 늦었나요?”
야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낯빛이 창백한 사내가 홀연히 말을 몰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목숨을 거둔 놈들 중, 가장 신체적으로 저열하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쓰러질 것처럼 유약해 보였다.
그럼에도 짐승의 본능은 경종을 울린다.
“이스라, 우선 저분을 구출합시다. 싸움은 그다음입니다.”
누구 맘대로 그리 지껄인단 말인가?
핏발을 세운 야수가 몸을 비틀려다가,
쿵!!
옆에서 들이받는 충격에 나가떨어졌다.
【제법 묵직하군! 핀스터, 머리뼈는 괜찮느냐?】
―푸르릉!
뼈만 남은 군마가 다소 불만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실례하겠소! 변경백!】
“크학!”
바닥에 쓰러진 변경백을 거칠게 잡아올린 이스라는 그를 안장에 태웠다.
어째 뼈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난 것 같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음, 아마 반쯤 불구가 되겠지만, 그래도 목숨은 건진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하지 않겠소? 하, 하. 하!】
등을 두들기자, 군마가 재빨리 뒤로 빠져나갔다.
뚜둑, 툭!!
그 사이, 귀찮게 물고 늘어지는 「업의 손아귀」를 모조리 끊어낸 야수가 울부짖었다.
―크아아악!!
저걸 힘으로 풀어버리는 건 또 처음 보네.
분명 축적된 피의 업이 상당해서 지속 시간이 10초는 더 유지되어야 하는데.
가공할 힘이다.
혀를 내두른 토드가 읊조렸다.
“달려들어라.”
그의 호령에 망자들이 사방에서 덮쳤다.
도팅하임, 뮌파흐, 야영지에서 추가로 끌고 온 송장들 전부.
야수가 있는 힘껏 휘둘러 쳤다.
콰지직!!
어떠한 기교도 없이, 극히 투박한 몸짓.
놈이 움직일 때마다 망자들이 열 구씩 쓸려나갔다.
꽈직, 퍼억!
주먹질에 머리통이 으깨지고, 발톱에 스치면 창자가 와르르 쏟아진다.
몸에 닿기도 전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모습에 기가 찰 정도였다.
‘물량을 다 쏟아부어도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은데.’
마음을 굳혔다.
하급 망자들의 저열한 기량을 감안하면 아무리 ‘토대’를 골라 망자들에게 버프를 넣더라도, 지금과 형편이 달라질지 의문이었다.
토드가 망자들을 물러세우고, 죽음의 기사가 그들 사이를 해치고 나왔다.
【반갑소, 그라워볼프 공작. 본인은 사령술사 토드를 섬기는 죽음의 기사, 이스라요.】
―크르릉!!
【하, 하. 본디 무인들의 싸움에 앞서 어떠한 방해도 없어야 하거늘. 본인의 주인은 그런 예절에 무지한 사특한 자인지라,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길 바라오.】
즉각 야수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대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전신의 힘을 실어 내리찍는다!
궤적이 단순하지만, 이런 몸이 된 이후로 누구도 받아내지 못한 일격.
틀림없이 저 괴상한 기사를 토막 내리라 예상했는데, 야수의 동공이 흔들렸다.
카앙-!!
연녹색으로 이글거리는 칼날이, 육중한 대검을 막아 세웠다.
팽팽하게 휘청일지언정, 부러지지 않았다.
【허어, 어찌 소개 중에 공격하다니! 하긴, 짐승에게 무인의 도리를 기대한 게 본인의 실책이겠소.】
꿈틀.
야수의 눈매가 비틀렸다.
맞댄 칼날에 힘을 주어 밀어낸다.
츠카가각-!!
상대는 검을 밀어 세워 옆으로 흘려보냈다.
마치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한다.
【강맹한 일격이로다! 과연 어마어마한 힘이로군. 역시 필멸자의 육신으론 낼 수 없는···】
시끄러운 지껄임이 신경을 긁는다.
칼날을 빼낸 야수가 대검을 망치처럼 휘둘렀다.
쾅, 쾅, 쾅! 쾅! 쾅!!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라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굉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죽음의 기사와 야수의 공방은 세련된 솜씨로 합을 주고받기보단, 무식하게 힘을 투사하는 막싸움에 가까웠다.
어찌나 무시무시한지, 검이 충돌할 때마다 부는 풍압에 야수의 갈기털이 거세게 휘날린다.
【하, 하하. 하하하!!】
이스라의 광소에 오히려 야수가 주춤댈 정도였다. 악에 받친 짐승이 더욱 거세게 그를 몰아붙였으나, 이상하게 힘으로 압도하기가 어려웠다.
투구 너머 맺힌 안광이 이글거린다.
【더 해보시게. 더!】
비틀린 집념마저 느껴지는 시선이다.
패배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인지, 무모할 정도로 힘 싸움을 피하지 않고 맞서온다.
자꾸만 싸움을 이어갈수록 어째서인지 점점 밀리는 건 이쪽.
대검을 바로 세운 야수가 종단으로 검을 휘둘렀다가,
카앙!!
곧바로 어깨를 향해 찔러넣었다.
꽈드득-!
왼쪽 견갑이 으스러진다.
나직이 침음을 흘린 죽음의 기사가 야수의 배를 베었다.
―캬악!!
야수가 한발 물러섰다.
평범한 날붙이론 흠집조차 못 내던 육신이거늘, 선명한 검상이 복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거세게 고개를 흔든 야수가 으르렁거렸다.
검날이 부딪칠 때마다 새하얀 불꽃이 일었는데, 번번이 야수의 팔을 태우거나, 얼굴을 덮쳤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기사와 야수가 끊임없이 격돌했지만, 번번이 피해를 입는 건 야수였다.
―크륵!
주둥이에서 침을 뚝뚝 흘린 야수가 거칠게 호흡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알 수 없는 위화감.
자꾸만 움직임이 굼떠지고, 무언가가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기분이 든다.
해소하지 않으면 패배한다.
이 꼴이 되어서까지 패배할 순 없다.
야수가 이빨을 갈았다.
으드득···!
저 빌어먹을 검이 문제인가?
거슬리긴 해도,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자꾸만 칼날을 튕겨내는 갑옷?
아니, 아니다.
죽음의 기사를 노려보던 짐승의 시선이 문득 그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아까 봤던 말라깽이 놈.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가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그래. 슈테판 놈이 음험한 마법사를 데리고 있었지.
간단한 사실조차 잠시 망각할 정도로 이 저주스러운 육신은 정신을 잠식한다.
우선 저 뒤에서 수작을 벌이는 요술쟁이를 찢어발기면, 그 졸개들은 알아서 자멸할 터.
―크릉···!
디트마흐는 억지로 부여잡은 대검을 내려다봤다.
그라워볼프 가문을 이끄는 자임을 증명하는 표상.
평생토록 손에서 놓아본 적 없는 자신의 애병.
비대해진 손과 발톱으론 검을 쥐는 게 여의치 않다.
잡졸들을 상대론 문제가 없었으나, 저 기사를 상대론 오히려 제약으로 작용했다.
핏물로 범벅이 된 칼날 너머, 디트마흐는 야수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선조들이 축적한 업보는, 자신의 대에서 종결지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라워볼프의 핏줄은 파멸한다.
짐승에게 어찌 무구가 필요하단 말인가.
육신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니, 병장기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속박일 뿐.
이미 많은 대가를 지불했는데, 여기서 더 머뭇거릴 것도 없다.
눈을 질끈 감은 디트마흐는 손아귀에서 대검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편린마저 해방이다.
두 발로 서 있던 라이칸스로프는 비로소 짐승답게 앞발을 내려앉았다.
이를 지켜보던 토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2페이즈가 있네?’
그렇다고 여기서 ‘노화’의 시전을 멈출 수 없다.
그랬다간 이스라가 곧바로 밀린다.
앞으로 애지중지 키울 소환수를 여기서 잃을쏘냐.
거기에 전장엔 이리공의 병력을 저지하기 위해 추가로 망자들까지 풀어놓은 상황.
여기서 물러났다간, 기껏 기울어진 전세가 뒤집힌다.
사뭇 달라진 기세에 이스라 역시 장검을 틀어쥔다.
―크아아!!
울부짖은 놈이 펄쩍 뛰어오른다.
달려드는 야수를 응시하던 이스라의 머릿속에 기사도 전집의 무수한 가르침이 펼쳐졌다.
자세가 흐트러진 적을 상대하기에 최적화된 상대법이 무엇이었나.
죽음의 기사는 교본의 내용에 충실했다.
무릎을 굽힌 이스라가 침착하게 하단을 노리고 칼을 올려 벴다.
서걱!
확실하게 베었다. 칼날이 살을 가르고 지나가는 감각이 선했다.
그런데 기꺼이 살점을 내준 놈이 자신에게 파고들지 않고, 지나치는 게 아닌가?
이런 상황은 기사도 전집에 없었는데!
【이···!】
급히 내려쳤다.
놈이 발톱으로 튕겨냈다.
카앙!
한계까지 도달한 칼날이, 기어코 깨진다.
산산조각 난 파편이 고스란히 몸에 파고들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내달린다.
목표는 거슬리는 요술쟁이.
그다음이 슈테판이다.
서약병들이 토드를 둥글게 에워쌌으나, 야수의 발톱에 속절없이 와르르 부서졌다.
마검에 일격을 허용하면서 상반신이 온통 걸레짝이었음에도, 기필코 자신만은 죽일 작정이다.
놈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코앞까지 다가온 발톱을 응시하면서 토드가 중얼거렸다.
“씁, 이번 건 좀 아프겠는데.”
지난번엔 빗길을 뚫고 가다 산비탈에서 굴러 낙사였지. 정말 저주 받은 균형 감각이야. 그래서 그 뒤론 절대 도보로 산행을 타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반년 정도였나?
그래도 이 정도면 개복치치곤 꽤 오래 살았다.
죽음은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괜히 잡생각으로 사고를 딴 곳으로 돌리는 이유가 있었다.
추돌 사고의 순간에 몸을 긴장시키면 그나마 충격을 상쇄할 수 있듯이, 토드 나름대로 정신적 장벽을 세우는 절차인 셈.
발톱이 두개골을 뚫고 들어온다.
심호흡하자.
“후······.”
콰지직!!
사령술사의 상반신이 걸레짝처럼 휘갈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