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32
032
확실하게 죽였다.
분리된 몸뚱어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내내 신경을 거스르던 탈력감이 걷힌다.
역시 원흉은 이놈이었다.
주인을 잃어 분개했는지, 주변의 망자들이 달려들었으나 간단히 내쳤다.
이제 달아난 슈테판 놈의 숨통을 끊어야···
카앙!!
―크릉.
발톱과 맞부딪친 칼날, 투구 너머 안광이 동시에 이글거린다.
저 기사에게선 산 것 특유의 자취가 없다.
거칠게 호흡하지도 않고, 땀을 흘리지도 않으며, 피는 식어 있다.
주인을 잃은 수족이 몸부림쳐봐야 곧 스러질 허깨비.
기꺼이 검을 받아낸 야수가 발톱을 내질렀다.
카각!
육신의 제약을 벗어던진 일격이 철판을 헤집었다. 충격에 리벳이 끊어졌다. 불편하지만, 움직일 수 있다.
동시에 칼날이 야수의 팔등을 긁었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손목이 잘렸을, 예리한 공격.
얼굴을 찡그린 야수가 급히 팔을 내뺐다.
검에 맺힌 불길 탓인지, 생채기의 회복이 유독 더디다.
자세를 굽힌 이스라가 다시 파고들었다.
사선으로 내리긋는 발톱. 어깨를 비틀어 피한다. 장검이 번뜩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캬아악!!
괴로운 비명을 토해낸 야수가 이스라의 팔을 터뜨릴 양 움켜쥐었다.
뚜두둑!!
왼팔이 통째로 으스러진다.
안광을 조금 찡그렸으나, 비명은 없었다.
이스라는 머리로 짐승의 턱주가리를 힘껏 받아버렸다.
터엉!
놈의 고개가 휘청인다.
손을 향해 칼을 꽂아 넣었다.
손바닥을 꿰뚫은 채로 검자루를 돌리자, 야수의 두꺼운 왼손이 뜯겨나갔다.
뜨드득···!
격통에 짐승의 눈이 돌아갔다.
완전히 격노에 휩싸인 짐승은 최소한의 방어는 도외시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짐승과 죽은 기사가 뒤엉켰다.
살점이 파여나가고, 철판이 뒤틀린다.
사지가 비틀려도 멈추지 않는 박투에 감히 누구도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점점 야수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투구의 안광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검에 새겨진 열기가 제 살마저 집어삼키고 있음에도 끝끝내 놓치지 않는다.
얼마 못 가 허물어질 줄 알았는데, 물러섬이 없었다.
왜 쓰러지지 않지?
제 주인도 죽었는데, 저 피조물은 여전히 동작하는가.
짐승이 물었다.
―어떻게. 그륵, 움직이는가.
이스라가 삐뚤어진 투구를 다잡았다.
【오, 말하는 방법을 까먹은 줄 알았네.】
비틀거린 짐승이 주춤댔다.
―주인도 없는, 인형이. 크릉!
【허어, 주인이 없다니.】
탄식한 이스라는 바닥에 끌리던 장검을 다잡았다. 그러곤 상대를 향해 나직이 던지는 되물음.
【확실한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분명 놈을 짓이겨놨다.
얼굴을 구긴 야수가 다시 달려들려던 차에, 돌연 전신의 갈기가 곤두섰다.
어디선가 음산한 바람이 감돈다.
허물어진 살쪼가리 속에서 목걸이가 녹색 빛을 뿌렸다.
일어나라.
피 웅덩이 속에서 속삭인다.
먼지와 진흙을 해치고 뼈대만 남은 손이 올라왔다.
턱뼈만 남은 잔해가 다시금 읊조렸다.
일어나라.
온전히 형태가 남은 살점들은 망자로 다시 일어나고, 그렇지 못한 유해들은 육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그러나 죽음의 기사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첨언하자면 수평적 계약 관계네. 그건 알아두게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치고 나간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이스라가 칼날을 찔러넣었다.
놈이 간신히 피하자, 이스라는 각반으로 무릎을 힘껏 가격했다.
다리가 꺾인 찰나의 틈을 노려 상단을 올려 벤다. 칼이 눈가를 그었다.
그 사이, 앙상한 손가락들이 모여들어 웅덩이의 가운데를 가리켰다. 부글부글 끓어오른 덩어리가 부피를 점점 키워나가더니, 형태를 갖췄다.
―캬아악!!
왼눈을 잃은 야수가 비명을 토해냈다.
반사적으로 내리친 팔에 철판이 끼기긱, 거리며 떨어져 나간다.
팔꿈치 관절부가 완전히 구겨졌다. 더불어 반대편으로 꺾인 팔도 덤이었고.
혀를 찬 이스라가 힘을 주어 손목을 돌렸다.
뚜두득!
섬뜩한 소리가 울렸지만, 죽음의 기사가 태연히 중얼거렸다.
【한층 낫군.】
놓치지 않는다.
이스라가 끈질기게 야수를 물고 늘어지는 사이, 피막을 해치고 나온 형체가 눈을 떴다.
목걸이의 빛은 꺼졌지만, 전신의 마력은 충만했다.
경지 상승은 마력을 회복시켜주지 않지만, 죽었다 살아나는 건 또 별개거든.
이쪽도 2 페이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이 야수를 가리켰다.
사아아···
―···!!
털이 하얗게 세기 시작한다.
다시금 손끝을 휘감는 무력감에 야수가 다급히 이스라를 내치려 했으나, 휘청인 몸이 삐걱댄다.
한쪽 눈을 잃은 탓에 평형 감각이 잡히질 않았다.
이스라 역시 자세를 굽혔다.
놈의 몸이 앞으로 바짝 쏠렸다.
온 힘을 다해, 친히 일으켜 세워주자.
콰득!!
장검이 야수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죽음의 기사가 히죽 웃었다.
【마검의 힘이다.】
―그르륵, 크아악!!
놈이 거세게 발버둥친다. 이스라는 힘을 주어 칼을 밀어넣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검에 맺힌 불길조차 놈의 털가죽을 태우진 못했다.
그렇다면 속살마저 열기를 견딜 수 있을까.
토드로부터 빌려온 마력이 검신에 스며들고,
폭발했다.
콰아아앙!!
화마가 순식간에 둘을 집어삼켰다.
후폭풍이 어찌나 거센지 멀리서 맞붙던 망자들과 병사들까지 쓸려나갈 정도였다.
온몸을 녹여버릴 듯 엄습하는 열기.
더군다나 내장을 찢어발기며 박힌 파편에 야수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불길 속에서 신형이 아른거리는 가운데, 반쯤 녹아내린 건틀렛이 야수를 움켜쥔다.
【오오, 제법 뜨겁군!】
―끼갸아악!!
【하, 하. 하! 허나 본인의 열의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니!】
이스라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뜩인다.
광기에 가까운 집요함에 야수조차 몸서리쳤다.
불길 속에서 둘의 신형이 발버둥치는 가운데, 돌연 둘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몰려든다.
그리고 벼락이 득달같이 죽음의 기사를 내리쳤다.
쩌렁-!!
갑옷을 휘감은 전류가 끊임없이 문양과 반발하며 푸른 전격을 튀겼다.
【이, 이. 건, 건. 좀, 짜, 짜, 릿, 한, 데, 데!】
지나치게 짜릿한 게 아닌가 싶었다.
겨우 고열을 견디던 망자에게 낙뢰는 치명적이었다.
이스라가 몸을 벌벌 떠는 사이, 야수가 주둥이를 벌렸다.
콰직!!
우악스러운 치악력에 투구가 우그러진다. 놈이 고개를 비틀자, 덩달아 목이 거꾸로 돌아갔다.
【이런.】
거머리처럼 들러붙던 이스라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야수가 발을 굴렀다.
주변을 둘러보니 망자들이 접근해온다.
회색 갈기는 온통 그을려 벌겋게 벗겨진 살이 훤히 드러난 데다, 가슴팍에 꽂힌 칼날이 시시각각 이글거린다. 야수는 입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렸다.
격통 속에서 사령술사를 노려보던 야수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되살아난 사령술사가 입을 떼기도 전에 놈은 황급히 몸을 돌려 달아났다.
야수의 꽁무니를 바라보면서 토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훼방을.’
그토록 우려하던 주술사의 개입. 교활하게도 놈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야수는 순식간에 전장을 이탈했다.
불이 붙은 거구를 막아 세울 정도의 용담을 가진 자는 없었다.
비척비척 걸어나온 사령술사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안구는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청각이나 촉각도 문제 없고.
문득 입 안을 훑는데,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미각은 상실. 아마 후각도 잃은 거겠지.’
일시적인 반동일지, 영구적일진 모른다. 게다가 왼쪽 새끼손가락은 구부러진 채로 펴지질 않았다. 더불어 찢어졌던 가슴팍과 머리에서 느껴지는 환통까지.
저번에 낙사했을 땐 일주일 동안 절름발이 신세였던 걸 감안하면 사후 경과는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면······.’
가급적이면 안 죽는 게 낫지만, 마력이 고갈된 시점에서 죽음은 불가피했다.
넝마가 돼버린 상의는 입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망자가 건넨 망토를 걸친 토드는 바닥에 널브러진 이스라에게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죽음의 기사가 떠들었다.
【아, 사령술사. 역시 살아있을 줄 알았네. 하마터면 본인도 감쪽같이 속을 뻔했지.】
“제가 죽은 척하기에 일가견이 있지요.”
거꾸로 돌아간 머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음. 역시 사특한 사령술사답게 비장의 한 수는 있으리라 예상했었네. 그럼 자네는 계속 살아날 수 있는 건가?】
“아뇨. 매달 그믐달이 차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사용 횟수를 충전하려면 눈물의 업을 적지 않게 요구한다.
【그럼 이제 여분의 목숨은 없는 셈이군. 그나저나 본인의 목을 좀, 돌려주겠나? 반대 방향을 보고 있자니 불편하군.】
토드의 손짓에 망자 셋이 달라붙어 이스라의 투구를 부여잡았다.
원체 열기가 강했던 탓에 투구를 부여잡은 망자들의 손이 문드러질 정도였다.
끼기긱-
【아, 이제 좀 낫군! 자네는 좀 괜찮은가?】
여전히 상반신이 날아갈 당시의 여파로 인해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정신을 잃지 않고 몸을 가누는 게 용할 정도였다.
토드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흉갑을 탁탁 털어낸 이스라가 거들었다.
【하, 하! 하. 유약한 요술쟁이들이 자네 같은 호탕함을 갖춰야 할 텐데 말이네.】
둘의 시선이 발을 질질 끌며 다가오는 카리나를 향했다.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너···”
죽었잖아.
뒷말을 삼킨 카리나는 침을 삼켰다.
토드가 어깨를 으쓱일 뿐, 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우물거린 카리나는 굳이 캐묻지 않고 한숨을 흘렸다.
“이리공이 도망쳤어.”
“여전히 놈의 몸에 검이 박혀있습니다. 그걸 빼내려면 적잖게 애를 먹겠죠. 그 전에 쫓아가서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본 카리나가 힘겹게 눈썹을 좁혔다.
“···지금 아군한테 추격할 여력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한바탕 야수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양쪽 모두 진형이 와해되어 사방에 뿔뿔이 흩어져있었지만.
“저들을 기다려줬다간 시간이 너무 지체됩니다. 저희만으로 쫓아가야겠지요.”
“가능하겠어?”
“적도 수괴가 치명상을 입은 이상, 적잖게 혼란스러울 겁니다. 그 틈을 파고듭시다.”
그래도 최소한 뒤를 수습할 사람은 있어야 한다. 토드가 곧장 변경백을 찾아 나섰다.
수레에 실린 변경백은 겨우 숨이 붙어 있었다.
호위병들이 달라붙어 수시로 붕대를 감고 있었다.
비싼 갑주와 타고난 근골이 아니었다면 진작 절명했겠지.
그러나 원활한 지시를 내릴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다음 지휘권자가 누굽니까?”
“···나요.”
가신들 사이에서 크뤼거가 걸어 나왔다.
그는 얼굴의 반쪽을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크뤼거, 당신이?”
“작위의 우선 상속자는 나의 숙부인 하인리히지만, 그가 여기 없는 이상···.”
눈가가 욱신거리는지, 크뤼거가 말꼬리를 흐렸다. 주위의 가신들이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모습에 토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침을 삼킨 크뤼거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나는 서자요.”
이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니. 속으로 토드가 탄식했다.
‘모계 쪽의 피를 더 짙게 물려받았나?’
어쩐지 잔뜩 지친 안색의 크뤼거를 찬찬히 살펴보니, 그 위로 변경백의 얼굴이 겹쳐진다.
한 10년 정도 더 늙으면 더 비슷하겠군.
“실례했습니다. 저는 달아난 야수를 추격할 생각입니다.”
크뤼거가 신음했다.
“지금 병력을 붙여줄 여유는 없소. 병사들도 지친 데다가, 전열을 수습할 필요도 있소.”
“이해합니다. 저는 단독으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단독으로? 너무 무모한···”
토드의 뒤에는 망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공허했으나, 두려움이나 피로 따위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당신에게 숫자는 의미가 없었지. 그렇다면 즉각 출정하면 될 일인데, 굳이 내게 고하러 온 저의가 뭐요.”
“경께선 병력을 잘 규합한 뒤, 이리공의 성채로 병력을 이끌고 와주시면 됩니다.”
“놈이 성채로 도주했을 거라 확신하는 거요?”
“예. 야수로 영락했을지라도,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 여기는 본거지만은 잊지 않았을 테죠.”
“···이리공의 성채는 방비가 제법 두터운 편이오.”
“뭐, 성채로 침투할 계략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게든 획책해보겠습니다.”
다른 이가 지껄였다면 웃어넘길 만용이겠으나, 발언의 당사자가 사령술사라면 무게감이 사뭇 다르다.
이쪽이 손해 볼 만한 구석은 없었기에 크뤼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당신의 요행이 성공했으면 좋겠군. 이 분쟁을 종결지을 결정타가 될 테니.”
토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행운을 빌겠소. 사령술사.”
다른 가신들 역시 눈치를 살피다 짧게 목례를 해왔다. 반문하거나 딴지를 거는 자도 없었다. 꼬리를 만 개처럼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사령술사의 행차를 배웅할 뿐.
뒤돌아선 토드가 피식 웃었다.
들판 곳곳에서 벌어지던 산발적 교전도 점차 그치는 추세였다.
이스라가 입을 열었다.
【저자의 말마따나, 요새화된 성채를 돌파하는 건 쉽지 않을 걸세. 하수인들은 사다리를 오르기엔 굼뜨고, 조직적으로 움직일 만한 지성이 결여되어 있네.】
“저도 정면으로 요새에 부딪힐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럴 땐 장기를 살려야죠.”
죽음의 기사의 안광에 아리송한 빛이 깃든다.
온통 전사자로 가득한 들판을 헤매던 토드는 적절한 대상을 찾아냈다.
낙마했는지, 목이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하사관. 곧장 토드가 방울을 흔들었다.
“내가 그대를 부르노라.”
덩달아 그의 주변에 있던 부하들마저.
비틀대며 일어선 망자의 앞에다 대고 토드가 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낮게 신음한 망자가 중얼거렸다.
【으, 으··· 파울, 루스.】
“좋네. 파울루스. 소속은?”
【거너렉 백작 휘하, 장창 선봉대.】
“고향은 어디신가.”
【으, 으. 퇴각 명령. 목이 아프다. 집결. 한기. 으, 통솔자. 괴물. 갈증.】
망자는 고장 난 기계처럼 의미 없는 조합의 단어들을 되풀이했다.
토드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군.”
이스라는 영 마뜩잖은 투로 속삭였다.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게 아닌가? 본인은 저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네만.】
“이 정도면 하급 망자치곤 훌륭하지요.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인지 기능이 크게 손상되지도 않았고, 말도 나름 잘 하지 않습니까.”
토드가 손을 까딱이자 망자들이 다가와 파울루스의 꺾인 목을 맞춰주고,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거기에 분칠까지.
비록 안색이 창백하긴 했어도, 갓 죽어서 그런지 위화감이 크지 않았다.
“이 녀석이 우리에게 문을 열어줄 겁니다.”
토드가 손뼉을 쳤다.
망자의 텅 빈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자, 파울루스. 따라 해보게. 문을, 열어라.”
【문··· 열어···.】
토드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군. 다만 목소리에 너무 힘이 없네. 좀 더 자신감 있게!”
【그으, 문, 열어···!】
좋은 기백이다.
막타치기 직전이었는데 도망을 쳐?
지옥 끝까지 따라간다.
///
험준한 골짜기 사이에 그라워볼프 공작가의 본거지, 슈피어슐로트 성채가 있다.
다만 성곽 위를 지키는 병사들 사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아무런 기별이 없죠?”
“뭐가.”
“벌써 출정한 지 이틀이나 지났잖습니까. 이쯤 되면 우리한테도 후속 명령이 와야 하는 거 아녀요.”
고참병이 인상을 구겼다.
“전투의 향방이 그리 쉽게 결정 나는 줄 알어? 어차피 우리 임무는 여길 지키는 거야.”
침을 삼킨 풋내기 병사가 성채 쪽을 돌아봤다.
“요즘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잖습니까. 군영에 괴물들이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
“저번에 성안에서 울음소리도 같이 들으셨잖아요. 우리가 뭘 지키고 있는 건지, 아님 같이 갇혀있는 건지···.”
“인마,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충성을 맹세한 건 사람이지, 괴물이 아니잖습니까···! 듣기론 시체를 되살리는 흑마법사까지 끼어들었다는데, 신의 징벌이 틀림없습니다요!”
벌벌 떨리는 뒤통수를 후려갈긴 고참병이 일갈했다.
“이런, 제기랄. 입 다물어. 새꺄! 너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기나···”
쿵!!
발밑이 울리는 굉음에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쿵!
황급히 고개를 내밀어보니 집채만 한 늑대가 연신 성문을 들이받고 있었다.
쿵!
덩달아 밑을 확인한 풋내기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히익! 괴, 괴물이다!”
“이런 시발. 가서 종 쳐! 종 치라고! 사수 대기!”
그 와중에 짐승은 쉴 새 없이 성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연신 비틀대면서도 기세가 흉흉해 금방에라도 허물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급히 쇠뇌를 겨눈 일부가 방아쇠를 당겼다.
―크륵!
어깨에 화살이 꽂히자, 비틀거린 야수가 성벽 위를 노려본다.
시선을 마주친 병사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나직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다들 무기를 거둬라.”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짐승의 뼈들이 달그락거렸다.
쿵···.
“성문을 열게.”
“아치발트님. 성문을 열었다간!”
“어떠한 해도 없을 걸세.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게.”
아치발트는 비교적 최근에 기용된 가신이었으나, 워낙 공작이 신임했던 터라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권위가 실려 있었다.
쿵!!
“병사, 열어.”
육중한 도르래가 올라간다.
성문이 젖히자, 거리낌 없이 야수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엉거주춤 서 있던 짐승은 주변을 살피다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아무도 다가설 엄두조차 못 내는 가운데, 아치발트가 서슴없이 짐승 앞에 마주 섰다.
그을린 기색이 역력한 몸뚱이, 가슴팍에 박혀있는 칼자루. 찢어진 살갗에서 핏물이 떨어진다.
라이칸스로프의 경이로운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
주술사가 혀를 찼다.
“이래도 그릇으론 턱없이 부족했나. 기골과 상관없이 혈통의 발현이 관건이었군.”
쓰러져있던 야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치발트···.
그가 미소지었다.
“그래도 제 발로 돌아오다니. 기특하군. 디트마흐.”
주술사가 대동한 전사는 곤봉을 치켜들었다.
뻑!!
“죽이진 마라. 귀하신 몸이니. 지하실로 끌고 가.”
머리통을 흠씬 내리친 전사가 투덜거렸다.
“젠장, 저 덩치를 끌고 가라고? 가죽만 벗겨서 옮겨도 한세월이겠구만.”
“돈을 받았으면 할 일은 해야지. 위쪽 동네에서 멱따고 돌아다니는 것보단 낫잖나.”
“킁, 누가 뭐랬나. 이제 슬슬 여기도 떠야 하는 거 아냐? 포위당하면 빠져나가는 게 쉽진 않을 텐데.”
“의식은 금방 끝날 테니, 오늘 밤 안에 떠날 준비나 하시게.”
웬 훼방꾼 때문에 일이 다소 엇나간 건 큰 실책이었다.
‘쯧, 기껏해야 유물 가지고 설치는 놈일 텐데, 왜 우릴 방해하는 건진 모르겠다만···.’
마침 오늘이 보름이다.
억지로 계승시킨 디트마흐가 이 정도였으니, 피가 발현된 영애라면 기대 이상이겠지.
이것만 건져도 충분한 소득이었다.
어차피 아치발트를 제지할만한 중역은 아직 전장에서 돌아오지도 못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그들을 몰아세운 거지만.
///
그렇게 성채의 소동이 일단락되려는 차에, 일련의 무리가 접근했다.
창대에 다소 지저분한 이리 깃발이 휘날린다.
선두의 전령이 앞으로 나섰다.
“아군이다! 성문을 개방하라!”
어째서인지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