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91
091
【오랜 꿈을 꾼 기분일세.】
이스라는 안광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군.】
“좋은 꿈이었습니까?”
【글쎄···. 잘 모르겠네.】
토드는 오른팔의 파여나간 살점을 메꿨다. 안치소가 성업을 이루면서 개인 의뢰가 아닌, 시의회에서 처형장의 시신들을 보내주는 일이 잦았다. 덕분에 시신 수급은 문제가 없었다.
가위로 실을 잘라내고, 마력으로 방부 처리까지 더하면 봉합이 마무리된다.
“대부분의 망자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육신은 남겨진 잔재에 불과하니까요.”
【영혼이 날아갔기 때문인가?】
토드는 왼팔을 둘러보며 답했다.
“글쎄요. 다만 당신같이 비교적 자아가 명확한 고위 망자들은 다를지도 모릅니다.”
노래조차 부르지 못할 정도로 정서조차 결여된 영가들. 어찌 보면 망자라는 존재는 실로 딱한 이들이다.
그에 비하면 이스라는 형편이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으나,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은 변함없다.
【흥. 시시한 서생들이나 떠들어대기 좋아할 만한 어려운 문제로군.】
적어도 파멸의 기사는 아직까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토드는 살갗을 감싸는 아마포를 모두 교체하고, 알코올로 소독한 뒤에 마감했다.
“자, 이스라. 투구도 벗으셔야죠.”
여태껏 수복 중엔 군소리 한마디 않던 이스라는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꼭 그래야만 하나?】
“안면 쪽에 상처는 없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흠···.】
“어서요. 벌써 해가 중천입니다. 일단 수복을 마무리 지은 뒤에 갑주를 비롯한 장비들도 수리하고, 방부 용품들도 사러 가야지요. 수복을 하느라 비축해둔 밀랍도 떨어졌답니다.”
망설이는 파멸의 기사를 향해 토드가 쐐기를 박았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시장의 민심을 시찰하는 건 기사의 의무라고, 누군가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사특한 사령술사다운 간교한 언변이로다!】
마지못해 투구끈을 푼 이스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변함없이 말끔한 인상이다.
파멸의 기사로 거듭나면서 두드러진 변화가 있다면 안광이 더 깊어졌다고 해야 할까.
망자로서 격이 상승함에 따라 섣불리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느껴진다. 이런 모습이 오히려 부자연스럽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어우러진다.
‘아. 머리칼 끝에 피가 좀 묻어있네.’
아마 차양의 틈새로 흘러 들어간 핏방울이 튀긴 모양이었다. 무심하게 솜으로 닦아낸 토드와 달리, 이스라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그 외에 다른 상해는 없는지 얼굴을 꼼꼼히 살피는 토드의 모습에 이스라는 건틀렛을 으스러트릴 것처럼 힘을 주었다.
핏기가 없는 얼굴은 변함없이 창백했다.
돌연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대자 파멸의 기사가 새된 비명을 토했다.
【히익!】
“잘 들리십니까?”
손가락을 튕겨대는 행동에 이스라는 이를 갈았다.
【잘 들리네···.】
“반대쪽은요?”
【이상 없네.】
빙긋 웃은 토드가 물러섰다.
“감각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니 다행이군요! 이만 외출 준비나 합시다.”
확실히 죽음의 기사였던 시절에 비하면 수복이 훨씬 수월하군. 이 맛에 하수인 키우는 거지.
싱글벙글한 토드와 달리 이스라는 못마땅한 빛이 역력했다. 곧장 갑주에 손을 가져다 대려 하기에 토드가 만류했다.
“그건 수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허면 본인은 무엇을 입고 밖에 나가란 말인가?】
“그 상태로 나가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요.”
비교적 무난한 복장이었다. 셔츠에 조끼, 바지 차림이라면 크게 위화감을 느낄 구석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스라는 크게 반발했다.
【무릇 기사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네! 평시에도 무장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기본적인 마음가짐이거늘!】
파멸의 기사는 완고했다. 이 부분만큼은 이스라도 타협할 수 없는지, 결국 토드도 그녀의 고집에 굴복했다.
“음··· 그럼 안치소에 있는 여벌의 갑옷을 입어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불편하긴 하겠다만, 별수 없지. 어차피 수선이 마무리될 때까지만 입을 것이니.】
투구는 따로 수리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그대로 눌러썼지만, 그 외에 다른 부위들은 되는 대로 모아온 것들이라 제각기 크기가 달랐다.
덕분에 이스라는 철판 쪼가리들을 걸친 채로 엉거주춤 걸어 다녔다.
그럼에도 파멸의 기사는 신체를 가릴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는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도 화살 2발 정도는 받아낼 수 있겠군. 이 정도면 불의의 기습이 들어오더라도 대응할 정도는 되겠지.】
다소 엉성한 이스라의 차림새를 보곤 산시아가 속삭였다.
“스승님, 정말 저 꼴로 내보낼 생각이신가요?”
토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이 원하니 어쩔 수 없지요.”
발을 옮길 때마다 연신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들린다. 이스라는 자진해서 자신의 갑주가 든 상자를 집어 들었다.
【자, 어디로 가면 되나! 대장간은 어디 있는가?】
“시의회 근처에 있다고 합니다. 거기가 장인들이 모인 골목이라 하더군요.”
【그렇군! 어서 안내하게!】
토드는 입구 쪽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마르커스를 향해 말했다.
“그럼. 마르커스. 외출하는 동안 잘 부탁합니다.”
그는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에서 한 치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불경한 사령술사의 소굴에, 시체로 살아난 흑마법사들 무리라니.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베고 싶은데.】
“어허. 안되는 건 아시죠?”
여전히 마르커스는 몸뚱이와 머리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검을 잡으려는 마르커스의 머리와 어떻게든 떼어놓으려는 둘라한의 몸뚱이.
오른손이 제멋대로 목덜미를 찰싹찰싹 때려대자 마르커스가 인상을 구겼다.
【나갈 거면 빨리 나가라. 꼴도 보기 싫으니.】
“원하시는 대로.”
히죽 웃은 토드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판가우답지 않게 유독 화창한 햇볕이 내리쬔다. 슬슬 초봄의 기운이 사방에 완연히 피어오른다.
여느 때처럼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스라에게 몰렸지만, 완연히 흑색 갑주를 차려입었던 때와 다소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정작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철컹. 철컹.
【흐흠. 역시 기사는 갑옷을 갖춰야 기품이 사는 법.】
몸에 맞지 않는 갑옷을 걸친 채 팔자걸음으로 걷는 모습은 영락없이 기사 흉내를 내려는 애송이처럼 비쳤다.
간혹 이스라를 보곤 낄낄거리는 이들도 있었으나, 생각외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독 골목길이 부산스러운 느낌이군요.”
【날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겠나? 이럴 때가 아니면 이곳 주민들이 언제 이리 볕을 만끽하겠나.】
“분명 따로 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이 성인을 기념할 만큼 독실한 곳도 아닐 텐데.”
물결을 오가는 뗏목 사공들이 합을 맞춰 콧노래를 불러댄다.
병사 한 놈을 만들려면, 농노 세 놈이 필요하다네. 한 놈은 먹을 빵을 만들고, 한 놈은 계집을 대주고, 한 놈은 대신 지옥을 간다네.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불길한 내용의 노래들을 연이어 불렀다.
“아까부터 길거리에 갑옷을 입은 자들이 더러 있군요.”
산시아가 나직이 물었다.
“북부에서처럼 뭔가 소요 사태라도 있는 걸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묘하게 도시가 들뜬 거로 봐서는··· 아마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이스라는 대뜸 지나가던 행인을 부여잡았다.
【이보게. 잠시 말 좀 묻지. 도시에 뭔일이 있길래 주변이 온통 소란스러운 겐가?】
이스라를 돌아본 사내는 히죽 웃었다.
“아, 자네도 참전할 작정이야?”
【참전이라니.】
“그야 지금 광장에 징집관이 오지 않았나. 자네도 거기 가서 삯이나 받으려고 그렇게 차려입은 거 아니었어?”
【흠흠. 본인은 따로 소속된 곳이 있어서 말이네. 무슨 일이기에 여기 징집관까지 왔단 말인가?】
머리를 긁은 사내가 대꾸했다.
“듣기론 에베르호펜에서 왔다던데. 밑동네 변경백이 또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모양이야. 젊어서 용병 일을 한 번쯤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살아서 돌아올 수만 있다면야.”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은 남자는 골목 너머로 비틀대며 사라졌다.
이스라가 안광을 좁혔다.
【에베르호펜이라면···.】
“슈테판 변경백의 본거지이지요. 그의 신변에 모종의 사건이 생긴 모양입니다.”
산시아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켄젤슐리텐 일가와는 이리공의 악연으로 엮인 곳이었으니.
파멸의 기사는 갑주가 실린 상자를 받쳐 들며 중얼거렸다.
【근처 도시에서 장정까지 모을 정도라면, 개전이 머지않았다는 의미겠군.】
“그러겠지요.”
어째서인지 이스라는 신이 난 기색이었다.
【어서 가세나! 이 김에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군!】
광장 한쪽에 있는 교수대 쪽에 긴 나무 탁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토드에겐 익숙한 깃발이 걸려있고, 변경백령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관리가 커다란 장부에 신병으로 등록한 자들의 이름을 받아적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노련해 보이는 사내부터 여드름쟁이 소년, 물건 들 힘이 남아있는지 모를 노인까지 다양한 군중이 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교수대에는 저번에 토드가 처치했던 흑마법사들의 몸뚱이가 내걸려 있었다.
시체 앞에서 기꺼이 자기 이름이 적히려 안달하는 사람들. 그들을 비웃거나 브랜디 한 모금 내주며 격려하는 이들.
토드는 묵묵히 삶과 죽음의 교차로를 지나쳤다.
“산시아. 이쯤에서 갈라섭시다. 부탁한 물품들은 기억하고 있죠?”
“네. 스승님.”
방부에 필요한 물품들은 대체로 향신료들이나 꿀, 약초 따위였다. 작업장들이 있는 골목과 반대편에 있었다.
“저희는 의뢰 접수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 물건을 구하는 대로 먼저 들어가세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좀 전에 보았던 광경이 마음에 걸리는지,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치였으나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광장의 열기 탓인지 작업장들이 즐비한 골목도 그에 못지않게 소란스러웠다. 여기저기서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대고, 흥정하느라 말싸움을 벌이는 목청들이 우렁찼다.
“여기군요.”
【확실한가? 여긴 문을 닫고 있는 것 같네만.】
“이곳은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작업장은 아니거든요.”
토드는 문 옆에 걸린 종을 흔들었다. 꽤 오랜 말미를 두고 기다린 뒤에야 문이 열렸다. 뒤뚱뒤뚱 걸어 나온 난쟁이가 눈매를 좁혔다.
“장의사 토드 하워드입니다. 라즐 씨의 안내를 받고 왔는데요.”
고개를 까딱인 난쟁이가 되물었다.
“장의사? 난 이렇게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염쟁이는 처음 보는데.”
토드는 유유히 미소를 흘렸다.
“안목이 좋으시군요.”
표정을 찡그린 난쟁이가 손을 까딱였다.
“일단 들어오슈. 우리 영감님이 아직 술이 안 깨서, 좀 기다리셔야 할걸.”
내부는 영락없는 드워프 공방이다. 조상의 혈통에 대해 구구절절 기록해놓은 석판이나, 몇백 년 묵은 명패, 영주에게서 받은 훈장이나 먼지도 안 닦은 유물 따위가 굴러다니는 찬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판가우뿐만 아니라 규모가 있는 도시에선 어지간하면 드워프들이 수공업 쪽은 꽉 잡고 있는 분야였다. 대장장이 조합에도 소속되어 있는지, 조합원을 의미하는 망치와 연장 깃발도 걸려있었다.
자리에 앉은 토드와 이스라를 향해 난쟁이가 물었다.
“에일? 아니면 맥주? 포도주 따위는 없으니 꿈도 꾸지 말고.”
“저는 괜찮습니다.”
【본인도 사양하겠네.】
코웃음 친 난쟁이는 맨손으로 술병 마개를 뜯었다. 그런데 술을 까기 무섭게, 안쪽에서 누군가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얼레? 저 영감이 웬일이래.”
“파스티다! 이놈아! 누가 손님 면전에서 술 처마시랬나!”
노인은 땅딸막한 체구임에도 목소리만은 카랑카랑했다. 난쟁이는 아무렇지 않게 술병을 단숨에 비우며 대꾸했다.
“여태껏 취해서 나자빠졌던 양반이 무슨.”
“뭐가 어째!”
“아, 귀청 떨어지겄어. 얼른 와서 일이나 받으쇼! 이 사람들이 요즘 부쩍 유명해지려는 작자들이여.”
“장의사 하워드입니다. 이쪽은 제 기사, 이스라입니다. 어르신이 판가우의 명장, 가우트리트. 맞으시지요?”
파스티다의 정강이를 걷어찬 대장장이는 토드 앞에 마주 앉았다.
“그래. 내가 가우트리트다. 시의회에서 일하는 놈들 무기는 도맡아서 만들고 있지. 네놈을 라즐이 좋게 보는 것 같던데.”
“과분하게도. 그렇습니다.”
이스라를 돌아보던 대장장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기사라는 작자가 왜 그리 해괴한 것들을 걸치고 있나?”
【크흠, 원래 입고 있던 갑주가 파손됐네. 이것들을 수리해줬으면 하네만.】
이스라가 발치에 있던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자, 즉각 가우트리트는 눈동자를 번뜩이며 갑주를 훑어 내렸다.
“으음, 음··· 음.”
연신 갑주를 비롯해 판갑을 뒤적이던 대장장이는 의미 모를 한숨을 거듭했다.
“수리하기 어려우시겠습니까?”
퍼뜩 고개를 든 드워프가 볼을 씨근거렸다.
“아니. 그건 아냐. 왠지 눈에 익은 것 같아서 살펴봤는데···”
토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의심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네놈, 이 갑옷. 어디서 구한 거냐?”
그러자 이스라가 답했다.
【그 갑주는 본인이 정당하게 소유했던 장비일세. 문제라도 있나?】
그 말에 대장장이의 표정이 더욱 괴상해졌다.
“이걸 정당하게 소유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
즉각 토드가 읊조렸다.
“이스라.”
순식간에 자리를 박찬 이스라가 파스티다를 제압했다. 어느새 토드가 꺼내든 손거울에서 망령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드워프를 바라보며 토드가 나직이 속삭였다.
“주변에 감시하고 있는 놈이 있는지 확인해라.”
유유히 건물 밖을 빠져나간 망령들이 일대를 샅샅이 훑고 돌아왔다. 적어도 엿듣고 있는 귀는 없다.
“가우트리트 씨.”
“어. 어?”
“갑주와 관련해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사령술사는 정중한 투로 속삭였다.
평소 그의 철칙대로, 입가에는 미소가 선명했다. 눈은 서늘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