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조짐(2)
대낮부터 술에 취해 떠들던 이들은 바로 황 화백 무리.
JK가 후원한 전국대회에서 김민준을 밀어주려던 이들이었다.
“솔직히 2년 전, 전국대회 일은 우리가 완전히 물 먹은 거 아니었습니까. 지나고 나니 제대로 당한 거였어요. 뒤통수를 크게 맞았던 거라고요.”
“그랬죠. 생각할수록 웃기는 것들 아닙니까. 심사위원으로 모신다고 매달릴 땐 언제고, 사람을 개망신을 줘도 유분수지. 이건 기업의 횡포입니다. 문화예술인에 대한 탄압이에요!”
“맞습니다. 엄연히 예술가의 영역이 있는 법인데, 자본이 그걸 흔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이거, JK가 각성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96년, 전국대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며 승승장구했던, 그 일로 또 한 번의 도약을 노렸으나 오히려 거꾸러졌던 이들이 오랜만에 가진 회동이었다.
“하아.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김 화백님은 그래도 다행히 전시가 잡히지 않았습니까?”
“에이. 별 실속도 없는 화랑이에요. 강 화백님 소개로 하게 되긴 했는데, 그림을 얼마나 팔아줄지는 모르겠습니다. 빙빙 돌리며 앓는 소리만 하더라고요.”
“하기는, 요즘 분위기가 워낙 뒤숭숭하니.”
“IMF다 뭐다 난리 아닙니까. 배고픈 시절입니다. 큰일이에요.”
전국대회 심사위원에서 물러났던 이들에겐 각자의 추잡한 사정이 있었다.
드러나지 않을 거라 의심치 않던 일들이 노영국에 의해 밝혀졌고, 노영국은 대회에 잡음이 생기지 않게 조용히 심사위원직에서 물러나 달란 청을 해왔다.
권유의 형식을 취했을 뿐, 통보와 다름없었다.
잡아떼는 것도 소용없었다. 노영국은 정확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니 황 화백 무리는 당황도 되고, 괜히 일이 커질세라 숨기 바빴고.
그러나 잠시면 될 거라 생각했다.
몇 달만 몸을 낮추면 다시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고 활동하게 될 거라고.
운이 나빠 걸렸을 뿐,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는 담대한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하필 IMF가 터지면서 불안한 시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약속했던 전시는 속속 무산되고,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나마 학교에 연이 있는 이들은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지만 작품 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전업 작가들의 생활은 몹시도 궁핍해졌다.
후원 액수가 줄고, 여기저기 눈칫밥을 먹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불만과 화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니 눈에 불을 켜고 탓할 곳을 찾을 수밖에. 그리고 이들이 찾은 원망의 대상은 앞에선 입도 뻥끗 못 했던 JK 노영국과 전국대회였다.
96년 전국대회가 모든 불행의 시발점이었고 그 뒤로 되는 일이 없었다는 데에 동감했던 거다.
그렇게, 불만이 가득 피어오르는 테이블에 누군가 마른 장작을 하나 더 휙 집어 던졌다.
“근데,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소식이요?”
“무슨 얘기요?”
“그 아이 말입니다. 개인전을 연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테이블에 둘러앉은 황 화백 무리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 아이라면, 혹시 그때 대상을 받은 아이 말입니까?”
“설마요. 2년 전에 고등학생이었으면 이제 고작 스물 근처일 텐데, 개인전이 가당키나 한 얘깁니까?”
현실을 부정하는 말들. 그러나 진짜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눈빛들이 떨리고 있었다.
“나도 들었습니다, 그 소식.”
그리고 모임의 중심인 황정식 화백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 화백님도 들으셨다고요? 아니, 그럼 그게 진짜란 말입니까?”
“개인전이라니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소주잔을 기울이던 화백들이 시뻘게진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진정들 하세요. 나도 최근에 들은 소식입니다.”
흠흠. 황정식이 헛기침하더니 빈 잔에 시선을 뒀다. 옆에 앉은 후배가 날랜 몸짓으로 황 화백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노영국, 그 양반이 아주 해괴한 짓을 꾸민 모양이더군요.”
황정식이 노기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지나다가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몇 달 전인가부터 광화문이며 강남역이며 전광판에 한 번씩 영문을 모르겠는 그림이 걸리곤 했었는데.”
황 화백이 수현의 쇼케이스를 언급하자 몇몇 화백이 아, 아. 하며 생각나는 얼굴을 했다.
“그게 그 아이와 JK 노영국 부회장의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허어.”
“정말입니까?”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들의 레이더가 닿지 않는 곳에서 한참 전부터 전시를 목표로 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소식에 화백들은 실망과 충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뿐 아닙니다.”
황 화백이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며칠 전부터는 그 전광판에 커밍순이라는 글자와 날짜, 장소가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있습니다. 느낌이 쎄해서 알아보니, 하. 세상에.”
“설마, 그 애의 전시회를 홍보하는 겁니까?”
그나마 머리가 빠르게 도는 이가 상황을 짚자, 황 화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제 이틀 후면 그 애의 전시가 열리는 모양이더군요. 그것도 새롭게 단장한 일선아트센터에서 말입니다.”
“허.”
“아니, 그 애가 뭐라고 그렇게 대단하게 일을 꾸몄다는 겁니까?”
“당최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이런 밀어주기는 공정성에 위배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지금 먹고살기 어려운 와중에도 얼마나 많은 예술가가 자기 살을 깎아 먹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특정 신인을 밀어주는 식이면 다들 얼마나 상심이 크고 실의에 빠지겠습니까. 그럼 또 작품은 잘 나오겠습니까?”
명분을 찾고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난한 예술가들의 입장을 끌어들여 떠들었으나, 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추악한 질투심이 속에 가득 찬 것이었다.
황 화백 무리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대로라면 자기들의 자리가 더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가만두어서는 안 되겠다, 다급한 마음에 이런저런 말들이 튀어나왔고, 악의가 모여 더 큰 악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통탄할 일입니다.”
황 화백의 측근 하나가 비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술계에도 질서가 있는 법인데, 그 아이는 우리에게 인사 한번 하러 오지 않았어요. 이거 대선배들을 우습게 여기는 처사가 아닙니까.”
“어떻게, 지금이라도 불러들일까요?”
“아뇨,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전시까지 시간이 촉박하기도 하고요. 괜히 시끄러워질 수 있어요.”
“흠흠. 안타깝군요. 이 좁은 바닥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을지 생각이란 걸 해야 할 텐데. 그걸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나 봅니다.”
비겁한 작자들이었다.
JK와 노영국을 신나게 욕했으나 막상 맞서기 버거운 상대니 슬쩍 방향을 틀어 수현을 공격하기 시작한 거다.
명분은 충분했다. 프로의 세계로 입문하면서 원로들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는 괘씸죄.
게다가 수현을 혼내주면 JK와 노영국에게도 복수가 되는 셈이니 본보기로 삼기 좋겠다는 비열한 계산도 들어있었다.
“어쨌거나 이대로 묵인할 순 없죠. 버릇을 제대로 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 화백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판을 깔았고,
“마침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볼살이 두둑한 화백 하나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의견을 내놓았다.
***
“와. 엄청난데요.”
전시 하루 전.
수현이 일선아트센터에 도착해 그림들을 확인했다.
일선화랑은 JK의 투자를 받아 본격적인 리모델링과 증축에 나섰는데, 새롭게 단장한 가장 좋은 전시실을 수현에게 내주었다.
“개방감도 있고, 조명도 좋지? 입구는 자연광이 쫙 들어오게 설계했어. 그리고 좁은 복도를 지나면 확 분위기가 바뀌면서 마치 다른 세계에 진입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거야. 하하, 그게 작가의 세계인 셈이지.”
“네…….”
멋진 전시장이었다.
따뜻하면서도 깊은 맛을 풍기는 공간. 튀지 않아 배경이 되기에 적당했고, 그러면서도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우아한 분위기가 있었다.
접근성도 좋았다.
대로와 인접한 곳에 있어 지나는 사람 누구라도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전시를 하게 되다니.’
수현은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로 전시장을 쭉 둘러보았다.
입구에서부터 벽을 돌아 출구로 향하는 동선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수현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개인전을 제안받고 1년 10개월, 미친 듯이 달려온 시간이 거기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저건 윤범이 그림이고, 스티브의 솜사탕은 이쪽이구나. 영아의 헤드폰도 재밌게 그린 그림이었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포착한 소재들, 그리고 수현의 과거에 묻혀 있던 기억들은 크기가 다른 캔버스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자라 있었다.
처음엔 뭐가 될지 알 수 없던 씨앗들이 다른 향기와 모양을 하고 형태를 갖추게 된 거다.
“후우.”
수현이 심호흡했다.
최선을 다했다. 이제 내일이면 그림은 관객을 만나게 된다.
쇼케이스를 통해 수현의 작품을 몇 점 미리 보고 온 이들도 있을 거고, 처음 보는 사람도 있겠고.
짝짝짝.
그리고, 수현이 뭉클한 감상에 젖어있을 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선생님! 준! 스티브!”
제임스 리와 준, 그리고 스티브가 깜짝 방문을 한 거다.
“아니, 어떻게 오셨어요?”
“특별히 허락받았지. 강유진 관장한테 말이야.”
“에이. 허락이라뇨. 선생님은 언제나 환영인데요.”
수현이 손을 내젓자 강유진 관장도 펄쩍 뛰었다.
“어머, 제임스. 마지막 점검을 도와주겠다고 해서 내가 고맙다고 꼭 와달라고 한 걸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하하. 농담으로 한 말이에요. 와, 그나저나 전시장이 아주 멋진데요? 음. 물론 작품이 빛나서 더 그래 보이는 거겠지만.”
제임스 리가 날카로운 눈으로 전시장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그때마다 수현은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음. 좋네.”
다행히 특별히 걸리는 구석은 없는 모양이었다.
“입구 쪽 조명만 조금 밝기를 조절하면 좋겠어요. 작품에 확 집중이 되려면 밝기를 살짝 떨어뜨리는 게 좋을 것 같거든. 아, 누구한테 말하면 좋죠?”
“아, 데스크 쪽도 한 번 봐야 하지 않아? 도록이랑 엽서들은 넉넉하게 준비한 거죠?”
약간의 디테일을 짚어주는 정도. 고맙게도 제임스 리와 준이 전시장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살펴봐 주었다.
“음. 조명은 안 그래도 고민하던 참이었어요. 윤 실장님! 우리 입구 쪽 조명을 좀 낮추면 어떨까 싶은데, 지금 바꿔줄 수 있어요?”
그리고 강유진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챙겨가며 전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모두가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무사히 전시를 열게 된 것도, 그리고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도.
“고맙습니다. 정말 모두 고맙습니다.”
수현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진심 어린 인사를 전했다.
“어? 갑자기?”
“어유, 수현아. 한 작가님. 왜 이러세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인사였는지 다들 껄껄 웃어넘겼으나 수현의 얼굴은 진지했다.
“여러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런 전시회는 열 수 없었을 거예요. 알아봐 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조언과 격려를 해주시고,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가능했어요.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정말 많은 이의 도움과 응원이 있었다. 수현은 그걸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리도 고마워.”
그런데, 이들은 또 수현에게 고맙단 인사를 건넸다.
“내 제자가 되어줘서 고맙다, 수현.”
제임스 리가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던졌고,
“수현아. 내 눈이 제대로 맞았다는 걸 증명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함께 할 거지?”
강유진 관장은 눈을 찡긋하며 햇살같이 웃어주었다.
“날 그려줘서 고마워. 친구.”
그리고 스티브는 자신이 주인공이 된 그림을 가리키며 콧등을 찡그렸다.
“이건 정말 위로 그 자체야. 수현, 아마 전시가 끝날 즈음이면 정말 많은 사람이 너에게 고맙단 인사를 할 거야. 내기해도 좋아.”
정말 그럴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수현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전시회 오픈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