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6)
16화. 뜨거운 여름(2)
새로운 시작을 향한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이른 새벽, 수현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와아.”
동이 틀 무렵이었다.
사방은 고요하고 숙소 창밖으론 짙은 녹음에 싸인 갤러리가 보였다.
싱그러운 풀 내음. 부지런한 새들의 지저귐.
적막하고 평화로운 풍경에 수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르륵. 침대에서 벗어난 수현은 간단히 씻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후 계단을 내려와 작업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준비한 캔버스를 이젤 위에 올렸다.
‘뭘 먼저 그려볼까.’
섬네일(엄지손톱 크기의 스케치, 작품 구상 초기에 아이디어와 내용을 가볍게 그린 그림을 뜻한다)들을 모아둔 스케치북을 펼쳐 작업에 들어갈 주제를 고르던 수현이 짧게 숨을 고르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럴 땐 커피 한잔이 딱인데.”
몸은 고등학생이 됐지만 오랜 시간 지켜온 루틴은 어디 가지 않았는지 카페인이 절실했다.
마침 갤러리 복도에 정수기와 원두커피, 믹스와 티백들이 놓여있던 게 생각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쪼르륵-.
종이컵에 믹스 커피 두 봉지를 털어 넣고 적절한 농도가 될 때까지 따뜻한 물을 부었다.
사르륵 녹아든 커피가 기분 좋은 향을 풍길 때-.
“그거 맛있더라.”
언제 왔는지 스티브가 쓱 고개를 내밀고는 아침 인사를 건넸다.
“굿모닝. 잘 잤어?”
“어, 안녕. 너도 일찍 일어났네?”
“작업하러 나온 거지? 그럼 나 잠깐 네 그림 구경해도 돼?”
너무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림을 보여달란 말에 수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와, 이건 박선화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인데?
몇 년 후면 세계적인 거장이 될 스티브 맥퀸에게 내 그림을 보여준다고? 그것도 완성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수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라 아직 보여줄 게 없어. 그냥 구상 정도거든.”
“흠. 그래? 상관없는데.”
“아…… 그래도 나중에 뭔가 그려지면 보여줄게. 지금은 진짜 백지상태라.”
“너무 각 잡을 필욘 없어.”
“어?”
“구상, 주제, 생각, 그저 그림 얘기를 나누고 싶은 거니까.”
스티브는 간단한 아이스브레이킹 차원의 이야길 원할 뿐이라고 했지만 수현은 몇 번 더 완곡하게 거절하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만하면 위기를 잘 모면한 거라 생각했는데-.
“수현, 그림은 잘 돼가?”
“수현. 얼마나 그렸어? 오늘은 스케치만 하는 거야?”
“수현! 저녁엔 몇 시까지 작업해? 나 놀러 가도 돼?”
그 뒤 점심시간과 휴게시간, 화장실로 가는 복도에서까지 수현은 몇 번이나 스티브와 마주쳤고, 그때마다 스티브는 그림을 언제 볼 수 있냐는 질문을 지치지도 않고 던져왔다.
……얘, 혹시 친구가 없나?
아니면, 호기심이 강한 스타일인가? 그것도 아니면, 새로 들어온 신인의 역량을 확인하려는 텃세 같은 거? ……설마, 아니겠지?
당황한 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스티브가 싱긋 웃으며 수현에게 다가왔다.
“여기 또래는 우리 둘뿐이야.”
“어?”
“다 늙다리들이라 그간 재미없었거든.”
정말로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스티브.
“게다가 어젠 내 얘기만 하느라 네 얘길 못 들었잖아.”
“무슨 얘기?”
“음. 그냥 너는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뭘 그리고 싶은지 그런 것들 말이야. 무엇보다 한국이나 일본의 고등학생들은 입시 미술에 매일 수밖에 없을 건데, 강유진 관장님이 특별히 픽한 신인이라니 엄청 궁금해지더라고. 분명 뭔가가 있다는 얘기일 테니까.”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냥 가능성을 잘 봐주신 거지.”
수현이 손사래 치자 스티브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아직 여러모로 어설퍼. 정리도 덜 됐고. 머릿속에 떠오른 걸 제대로 표현하려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계속 고민하는 중이거든.”
“와.”
수현의 말에 스티브가 입을 떡 벌렸다.
“너, 진짜 예술가가 맞구나?”
“어?”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이 바닥에 빈 깡통들이 얼마나 많은데. 텅텅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뭔가 꽉 차 있는 척. 대단한 걸 하는 척하는 사람들이 진짜 질리게 많거든.”
스티브가 고개를 저어가며 말했다.
“그런데 넌, 남에게 보여지는 것보다 네 작품의 본질이 뭔지 먼저 고민하는 거잖아. 그것도 머릿속에 떠오른 구상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라니, 와. 나 이렇게 감동적인 말은 너무 오랜만에 들어.”
“어?”
“어쨌든 그런 거야 차차 부딪쳐갈 일인 거고, 그래서 뭐야?”
“뭐가?”
“너를 고민하게 하는 거, 네 주제가 뭔데?”
“아, 주제? 그게…… 시선이야.”
어쩐지 흥분한 스티브에게 말려든 기분이었지만 수현은 가볍게 웃으며 자기가 그려나갈 주제를 밝혔다.
“시선?”
“같은 걸 보더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다른 걸 느끼게 되잖아.”
“오, 그 차이를 나타내는 그림이라 이거지?”
“응. 정확하게는 격차와 간극에서 느껴지는 감상이라고 해야 하나? 뭐, 여튼 그래.”
“그럼 섬네일만 보더라도 충분하겠는데?”
“어?”
“나, 더 궁금해졌어. 네 그림.”
얘가 원래 이런 애였나?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스티브의 얼굴에 수현이 한 번 더 당황했다.
과거엔 그와 마주친 일이 없었지만 소문을 접할 기회는 종종 있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아니랄까 봐 극도로 예민하고 괴팍한 성격에 기인에 가까운 행동을 일삼는 별종이란 루머와 일화들.
그건 전부 부풀려지고 과장됐던 걸까?
아니면 얘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고약해진 건가?
반짝이는 눈으로 싱글싱글 웃는 지금의 얼굴로는 그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타인에겐 별 관심 없는 인물이라 들었는데-.
“보여줘.”
스티브는 수현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말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어?”
“설마 너, 그림을 보여주는 일이 어색한 건 아니지?”
“어, 어. 그게…….”
정곡을 찌르는 말이긴 했다.
과거 수현은 입시 때를 제외하곤 자기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일이 거의 없었다.
다시 돌아온 후엔 애써 바꾸려 노력하는 부분이었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스티브의 재능 앞에 자신의 그림을 펼쳐야 한다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그래.”
“뭐가?”
“어?”
“어차피 네 방에만 두고 볼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잖아.”
스티브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수현을 설득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대단한 화가의 초기 구상도 어린애가 한 낙서처럼 보이는 게 많은데 뭐. 평가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랑 이런 대화를 나누면 앞으로 네가 작업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도움?”
되묻는 말에 스티브가 어깨를 쭉 펴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 봬도 내가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고 있잖아.”
“……그거야 잘 알지.”
“흠…… 뭐, 내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내 눈이 나쁘진 않단 얘길 하려는 거야. 여기저기서 대단한 작가들과 교류도 꽤 했고. 그러니까 네가 고민하는 지점에 도움이 될 답을 내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
수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스티브 맥퀸은 이름값을 하는 인물이었다.
재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가진 재능의 크기를 확실히 알고 있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
건강한 자존감이라는 게 이런 건가. 수현이 새삼 감탄할 때였다.
“어우, 근데 나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스티브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 왜?”
“생각해 보니까 내가 누구한테 이렇게까지 그림을 보여달라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다들 내가 누군지 알면 그림 좀 봐달라고 귀찮게 했지, 내가 보자고 쫓아다닌 적은 맹세코 없거든.”
“아, 그래.”
빤히 쳐다보는 스티브의 눈빛에 결국 수현이 두 손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오예.”
드르륵.
잠시 후, 수현이 작업실 문을 밀었고 스티브가 성큼성큼 수현의 이젤을 향해 걸어가더니 의자에 내려놓았던 섬네일 스케치북을 넘겨보았다.
그리고-.
“거봐. 좋잖아!”
음식을 씹기도 전에 맛있다를 외치는 먹방 채널의 유튜버처럼 스티브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아직 두서없는 아이디어들이야.”
“아냐! 이건 재밌어! 정말 흥미롭다. 시선이라고 해서 어떤 건가 했는데 이런 작업을 하려는 거였구나. 햐, 역시. 강유진 관장님이 꽂힐 만했네.”
당황스러울 정도로 쏟아내는 칭찬. 수현이 어색한 표정을 짓자 스티브가 진지한 얼굴로 수현을 돌아보았다.
“너, 확실히 나랑은 다르구나.”
“응?”
“난 거친 편인데, 넌 부드러워. 따뜻하고.”
“강렬하지. 네 그림은.”
“아냐. 어떻게 보면 네가 더 강렬해.”
“내가?”
“어. 그리고 내가 성격이 좀 까칠한 편이거든?”
스티브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칭찬이 후한 사람도, 빈말하는 성격도 아니야. 그런데 이건 진짜 괜찮아. 정말 좋아 보인다구.”
“어, 고마워.”
“긴장 풀고 재밌게 그려봐. 편하게. 그리고 더 진행되면 보여주고. 나도 너한텐 언제든 내 작업실을 열어줄 테니까.”
빈말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고민되는 말들을 스티브는 계속해서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겸손하고 초심을 지키려는 건 좋은데 신인이라고 너무 주눅들 필요 없어. 만만하게 보였다간 친절한 척 다가와서 자존감을 망가뜨리거나 네 걸 훔쳐 가려는 사람도 생길 거라. 이 바닥, 정말 별별 인간이 다 있거든.”
“……어?”
마치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스티브의 조언에 수현이 흠칫 놀랐다. 스티브는 그런 수현을 보고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내 경험담이기도 해.”
“경험담이라고?”
스티브 같은 작가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놀랍지만 섣불리 묻긴 또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뭐, 그 얘긴 차차. 중요한 건 이런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마음을 좀 독하게 먹어야 한단 거야. 그나저나 수현이 너, 2주 동안 스케치만 할 건 아니지?”
스티브가 수현의 자리를 쓱 훑어보며 물었다.
궁금증이 일만도 했다. 단기 입주가 급하게 정해지는 바람에 스케치북과 캔버스, 연필과 목탄 외엔 다른 화구를 준비하지 못했던 거다. 다른 작가들의 자리와 비교해볼 때 수현의 자리는 무척이나 썰렁했다.
“나중엔 유화로 작업하긴 할 건데, 먼저 아크릴로 해보려고.”
“오, 좋지. 속도감을 내기엔 좋은 재료니까. 그런데 화구들은?”
“음. 안 그래도 사러 가야 해.”
“그래? 어디로?”
“남대문으로 가보려고. 거기 큰 화방이 있거든.”
나중에야 어디서건 구하기 쉬워지지만, 이때만 해도 제대로 된 화구를 사려면 남대문으로 가는 게 보통이었다.
“와, 남대문? 나 안 그래도 거기 궁금했는데.”
스티브가 눈을 반짝 빛냈다.
“너만 괜찮으면 나도 따라가도 될까?”
“너도?”
“어, 마침 재료 살 것도 있고, 한국에 와서 제대로 구경 같은 걸 못 해봤거든.”
“아, 그런데.”
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친구들이랑 같이 가기로 미리 약속해둬서.”
“오, 그럼 더 좋지. 어떤 친구들인데?”
“학교 친구들이야. 한 명은 윤희란 애고, 한 명은 너도 알 거야.”
수현이 입을 막 떼려는데.
“아, 그 선화라는 애?”
스티브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썩 마음에 드는 멤버는 아니지만 할 수 없지. 가자. 언제 출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