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42)
42화. 첫 수업(2)
잠시 후.
“수현이 너, 몇 살이라고 했지?”
감상은 뜻밖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어.”
수현이 순간 당황했다.
고등학교 1학년, 아직 새해가 오진 않았으니,
“한국 나이로 열일곱이요.”
서둘러 헤아린 답을 말하자 제임스 리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열일곱이 어떻게 이런 감정과 표현을…….”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스케치.
그러나 주제 의식은 뚜렷했다.
무엇보다 이글거리는 감정의 표현들은 10대의 것으로 보기에 농밀하고 깊이가 있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계기가 있었니?”
제임스 리가 다시 질문을 던졌고, 수현은 그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번엔 제법 긴 답을 내어놓았다.
교환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과 그로 인해 떠올랐던 추억들. 그걸 그리고 싶어졌던 기분 같은 것들을.
“그래. 감정을 끄집어내는 법을 배운 거구나. 예술가에겐 아주 중요한 훈련이지.”
혼잣말처럼 몇 마디 중얼거린 제임스 리가 수현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컨디션 괜찮니?”
“어, 네.”
“사실 수업은 내일부터 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이 기분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잠깐만 그려볼까?”
제임스가 미소 지었고, 수현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다시 일주일 후.
“아이고, 삭신이야.”
준의 집으로 돌아온 수현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또 이 시간이네.”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작업실에서 돌아오면 항상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었다.
“제임스 리가 아침형 인간일 줄이야.”
경험하고 보니 제임스 리에겐 의외의 구석들이 많았다.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일 것 같았는데 규칙적이고 반듯한 성격인 게 무엇보다 놀라웠고.
“이래서야 한국보다 더 빡빡한데.”
수현이 피곤한 눈을 비볐다.
기숙사 생활을 한 덕에 한국에선 7시 반에 일어나도 하루를 넉넉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 여기선 매일 6시에 기상해야 했다.
체력을 기르기 위한 조깅, 샤워 후 아침 식사, 그리고 8시면 곧장 작업실로 가 그림을 그렸고, 정오엔 오전에 그린 그림을 평가받은 후 오후 과제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점심 식사, 이후엔 다시 그림에 열중했다.
다시 세 시 반엔 티타임을 가졌는데 제임스 리, 준과 함께하거나 다른 손님이 더해지거나 따로 휴식을 보내기도 했다.
4시부터 5시 반까지 그림을 마무리하고 이후엔 쉬거나 전시, 책, 음악회 활동으로 인풋을 해야 했고.
“노잼이다, 노잼.”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수현도 일탈을 즐기거나 자극적인 걸 찾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임스 리처럼 규칙적인 삶을 지향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수업이 체계적인 건 굉장히 도움이 되니까.”
수현은 애써 이 생활의 장점들을 떠올렸다.
제임스 리는 감정을 제련하고 표현하는 방법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데생 실력을 한 단계 올리는 훈련법이나 새로운 재료와 기법, 테크닉 같은 것들도 섬세하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수현의 실력을 늘게 했고.
‘툭툭 던지는 말들도 무게감이 상당하단 말이지.’
수현이 오늘 레슨 시간에 들은 제임스 리의 말들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십 번, 수백 번을 그려도 질리지 않는 주제가 있을 거야. 뮤즈에게 영감을 받아 끊임없이 그림을 그린 화가들처럼 말이야.”
“질리지 않고 계속 그릴 수 있는 소재 말이죠?”
“응. 내가 볼 때 이번 수현이 가져온 ‘창’도 그런 소재가 되기에 충분해. 문제는…….”
제임스 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너처럼 생각한 예술가들이 이미 꽤 있었단 건데.”
처음엔 말뜻을 얼른 이해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습작으로 넘길 거면 이 정도도 충분해. 그런데 자꾸 욕심이 난단 말이지.”
제임스 리가 정확하게 목표를 드러냈다.
“앞으론 오리지널리티를 살릴 방법을 고민해보자.”
“네?”
[창>이란 소재는 접근성이 쉽고 상상력을 자극해 이미 많은 예술가가 다룬 것이었다.때문에 다른 예술가의 그림과 겹치는 스케치가 나오기 쉬웠고.
물론 주제를 정하고 구체화하고 완성해가는 여정을 배우는 데만 의의를 둔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
‘하지만 욕심이 생긴다거나 오리지널리티를 찾자는 말은 더 높은 목표를 세우자는 소리겠지.’
수현이 침을 꼴깍 삼켰다.
수현이 포착한 그림에 확실한 훅을 만들자는 건 이 그림을 단순한 습작이 아닌 전시가 가능한 작품으로 발전시키잔 얘기였던 거다.
‘대체 뭘 보고 이런 얘길……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수현이 조금 당황하며 스케치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동안, 제임스 리가 몇몇 이름을 노트에 적어 내밀었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처음 보는 이름도 있을 거야. 다들 창을 테마로 그림을 그렸거든. 괜히 피하기보다는 분석해서 참고하는 게 도움이 될 거야. 너와 어떤 점이 비슷하고 다른지 확실히 알게 될 테니까.”
“네, 고맙습니다.”
긴장으로 굳은 수현의 얼굴을 본 제임스 리가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 저녁 시간은 어떻게 보내니?”
“네?”
“이왕 런던에 온 거 많은 걸 경험하고 가야지. 게다가 여긴 쇼디치잖아. 당장 문을 열고 나가면 둘셋 중 한 명은 예술가일걸?”
“아. 하하. 그렇죠.”
“혼자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동시대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해. 꽉 막혔던 벽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시원하게 뚫리기도 하거든.”
“네.”
“내가 준 리스트의 화가들은 다른 대륙에 있거나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라 만나기 어렵겠지만, 문밖의 사람들은 네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교류할 수 있잖아? 시도해봐. 전전긍긍. 혼자 초조해하지 말고.”
“네. 그럴게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막막하기도 했다.
제임스 리야 어디에서도 환영받고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인물. 그러나 낯선 이방인인 수현에겐 거리에 나가는 것도 떨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래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용기를 내 볼 필욘 있겠지.’
침대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굴리던 수현이 벌떡 일어났다.
“나가보자.”
생각해 보니 수현도 이 거리에서 벌써 인연을 맺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
“피터 아저씨 꽃집 옆 건물이야. 와서 이걸 보여주면 돼.”
일주일 전, 우연히 길에서 만난 그래피티 작가 마크.
수현은 그 애에게 받은 스프레이 통을 들고 거리를 서성였다.
스티브도 함께였다.
“피터네 꽃집이면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님 그 애가 대충 얘기했을 수도 있지. 어쨌든 길에서 마주친 애라며.”
스티브의 도움을 받아 꽃집은 찾았는데, 그 옆 건물이 어딜 가리키는지 헷갈렸다.
왼쪽으로 선 건물은 출입이 금지된 폐건물이었고, 오른쪽 건물은 상가로만 이루어져 예술가들의 아지트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거다.
“춥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그러게. 다음에 다시 올까?”
아쉬움에 몇 번 더 주변을 서성이던 수현이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어? 너? 왔구나?”
누군가 반갑게 달려와 수현의 어깨를 툭 쳤다.
마크였다.
“안 오는 줄 알았어. 그날 이후로 며칠이나 기다렸는데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아, 미안. 좀 바빴거든.”
“흐음.”
마크가 수현의 얼굴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들어와. 마침 다들 모이기로 한 시간이거든. 잘됐네.”
“아, 근데 일행이 있어.”
수현이 스티브를 가리켰다.
“얘도 그림 그리는 친구야. 같이 가도 될까?”
“그래?”
가늘게 뜬 눈으로 스티브를 바라보던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 친구라면 이상한 놈은 아니겠지. 좋아. 같이 들어 와.”
‘깔끔한 레스토랑인줄 알았더니.’
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선 마크를 따라간 수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 안으로 들어간 마크가 주방을 지나 창고 문을 열더니 건너편 문을 열고 다시 좁은 복도로 안내한 거다.
“와, 여긴 무슨 미로 같은데?”
“원래는 뒷문이 있는데 얼마 전에 고장이 났어. 안에선 열리는데 바깥에선 꼼짝을 안 하거든. 다행히 레스토랑 주인아저씨가 수리할 때까지 이쪽 통로를 쓰게 해주셨어. 전에 우리가 벽화를 그려준 일이 있어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 올리며 자랑을 늘어놓는 마크. 저절로 보조개가 생기는 걸 보니 벽화를 그리는 일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저기야.”
복도 끝, 골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크의 말대로 다른 멤버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던 모양이었다.
“오, 다들 와 있었네?”
마크가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자 또래로 보이는 애들이 고개를 들고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오, 누구야? 새로운 얼굴인데?”
“그러게. 마크가 여기에 다른 사람을 데려온 건 처음이잖아? 그것도 여자애를 말이야.”
“이리로 앉으세요. 여기가 제일 깨끗한 자리거든요.”
놀리는 말들에 마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바보들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멍청이들아. 내가 말했잖아. 지난번 거리에서 여자애한테 도움을 받았다고. 그리고 여기 남자애도 있어! 안 보여?”
“몰라. 남자애는 흔하잖아. 관심 없다고.”
“그나저나 그게 정말이었어?”
“당장 다음 날에 찾아올 거라고 하더니 아무 일도 없어서 뻥인 줄 알았지.”
“맞아. 있지도 않은 친구 얘길 지어서 한 줄 알았더니.”
어쩐지 수현이 없는 자리에서 한바탕 수현의 이야기가 있었던 분위기. 수현은 멀뚱히 서 있다가 애써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 반가워. 난 한수현이야. 한국에서 왔고.”
“오, 수욘. 반가워.”
“진짜 네가 마크를 도와줬어? 네가 그 지니어스야?”
“스프레이 통에 사인이 그려져 있던 건 어떻게 알았어?”
“맞아. 궁금해. 마크가 그날 돌아와서 우리한테 그 얘길 해줬거든. 근데 자기 스프레이 통을 아무리 세워봐도 사인이 나타나지 않더라고. 그래서 우린 그냥 지어낸 얘긴 줄 알았어.”
“멍청이들이. 내가 그런 얘길 괜히 왜 지어내?”
마크가 씩씩거렸고, 수현이 활짝 웃으며 마크의 화구박스를 가리켰다.
“원한다면 다시 해볼까?”
“뭐, 나는 상관없어.”
마크가 입을 삐죽거렸고, 나머지들은 어서 보여달라며 환호했다. 수현이 천천히 스프레이 통을 배치하며 그날처럼, 스프레이 통 옆면에 마크라는 글자가 드러나게 했다.
“세상에, 진짜였네?”
“와, 너무 신기하다. 그러니까 그가 이 사인을 해뒀다는 거잖아?”
“흥. 그렇다니까. 형은 날 특별하게 생각한 게 분명해.”
“그래그래. 안 그래도 오늘 돌아오면 직접 물어보자고 했었잖아.”
왁자지껄 떠드는 애들은 자유롭고 밝아 보였다. 경계심을 보이거나 어두운 면도 없었고.
“너도 그림을 그린다고 했지?”
마크보다는 몇 살 위로 보이는 남자애가 수현에게 말을 걸었고,
“런던엔 언제까지 있는 거야?”
“어디에서 머무는데?”
그를 시작으로 다른 애들도 질문을 쏟아냈다.
“아, 여기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내가 머무는 숙소가 있어. 앞으로 20일 정도 더 머물다가 갈 거고.”
“오, 20일이면 꽤 긴데?”
“한국에서 왔다고 했지? 한국은 어떤 곳이야?”
마크를 도운 친구라는 데서 온 호감이었을까, 원래 사교적인 아이들인 걸까. 애들은 핫초코며 비스킷 같은 걸 수현에게 내밀며 끊임없이 질문을 이어갔다. 짧은 영어는 수현이, 좀 길고 빠른 질문은 스티브의 도움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음. 비행기로 반나절 정도 가야 도착하는 곳이야. 혹시 88 서울 올림픽 알아?”
그런데, 차근차근 대답해주던 수현의 눈이 일순 경직됐다.
“잠깐만, 마크. 저 그림, 누가 그린 거야?”
그래피티 작가들의 아지트답게 어지러운 그림들이 잔뜩 그려진 벽.
그중 한 부분에 수현의 시선이 제대로 꽂혔다.
“어? 우리 형이 그런 건데, 왜?”
“형? 정말 저 그림을 네 형이 그렸다고? 네 형이 누군데?”
수현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