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99)
99화. 진로(1)
“실컷들 놀았지?”
“아니요오오!”
“아직이요오오!”
도살장에 끌려온 소들 같았다.
수학여행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일상. 원래의 패턴으로 돌아가 학업과 실기에 매진해야 하는 현실에 처하자 아이들은 있는 힘껏 처지를 부정하며 포효했다.
“졸려요오오!”
“선생님! 우리 너무 피곤해요.”
“맞아요. 진도도 다 나갔는데 좀만 쉬면 안 돼요?”
“첫사랑 얘기해주세요!”
솔직히 지리 선생님의 첫사랑 따위가 궁금할 리 없었다. 선생님도 애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고.
“자자. 책들 펴고 꿈에서 깨라. 여긴 현실이다. 이놈들아, 이제 너희가 입시생이야!”
“으아아아! 말도 안 돼!”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고개를 저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음 주 수요일인 11월 13일, 고3 수험생들이 수능을 치르게 되면, 지리 선생님의 말대로 이제 2학년이 본격 입시반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후, 은근 긴장은 되네.’
날이 제법 쌀쌀해졌다.
창밖으로 거센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나무에 매달려 있던 이파리들이 떨어져 이리저리 나부꼈다.
그래도 근성 있는 나뭇잎들은 어떻게든 버티며 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게 입시란 바람 앞에 맞서는 수험생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일주일 후 실시되는 97 수능은 한참 뒤까지 역대 최고 불수능으로 불린다.
400점 만점으로 치러지는 첫 시험이기도 하고, 영역을 넘나드는 통합 문제가 출제되는 등 수험생들을 당황하게 할 변수와 함정이 곳곳에 숨어 있어 그야말로 혼란을 야기하게 되는 것.
만점자가 한 명도 없는 몇 안 되는 수능이기도 하거니와, 만점자는커녕 전국 수석이 370점대의 점수라는 점에서 더 설명이 필요 없어지는 시험이다.
‘당시 예체능계 전국 수석이 330점 대였나…….’
수현이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었다.
백현대, 한국대, 세인대, 경성대, 대현여대.
국내 탑5 안에 드는 미대에 합격하려면 실기 성적이 A, 내신이 1등급이라 할 때 수능점수 280점 정도가 커트라인이란 말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물론, 1년 뒤엔 완전히 뒤바뀌고 말지만.
97학번을 꿈꾸는 고3 학생들의 속을 뒤집어놓은 불수능은 1년 뒤, 허무할 정도로 물렁한 물수능으로 바뀌어 버리거든.
‘물론 그건 그거대로 혼란이었지.’
수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년엔 당연히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점수가 아무것도 아닌 점수가 되어버린다.
280점을 받아봐야 예체능계 상위 5% 안에 드는 정도니 안정권에 들어가려면 300점 이상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니,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
나중에야 데이터가 잘 정리되고 분석 자료도 많아지지만, 90년대 말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으니까.
그냥 알음알음, 눈치껏 모은 자료에서 나온 말들이 그랬다.
‘어쨌든 방심하지 말고, 침착하게.’
수현이 지리 선생님의 판서를 노트에 옮겨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대회 특전으로 특차 입학이 확정된 상황이었지만, 수현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시험에 임해볼 생각이었다.
***
“서양화 전공 상담실로 이동하래! 1반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
고3 수능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2학년 교실로 한파가 들이닥쳤다.
“으아아.”
“가자아.”
“흐어엉…….”
어제부터 미술과 전원이 전공 선생님과 심층 상담에 들어갔다.
3학년이 돼도 2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전공에 따라 실기 반이 운영되겠지만 몇몇 애들은 이번 상담을 통해 특정 대학 준비반에 들어가게 된다.
백현대, 한국대, 세인대, 경성대, 대현여대.
상위권 대학들은 스타일이 확고하기 때문에 미리 목표 학교를 정하고 그에 맞는 준비반을 따로 운영하는 거다.
입시는 특차와 정시. 정시는 다시 가, 나, 다, 라 군으로 나뉘어 4번의 시험을 볼 수 있는데 경쟁하는 학교들은 같은 군에 묶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세인대와 경성대는 가군, 백현대와 한국대는 나군, 대현여대와 상현대는 다군. 이런 식으로.
그러니 가, 나, 다, 라군에서 입시 유형이 그나마 비슷한 학교들을 묶어 실기 시험을 준비했고, 보통은 백현대 반, 한국대 반, 세인대 반 식으로 특별반이 편성됐다.
이런 입시 공략은 꽤 오래된 것이라 예비반인 2학년들도 손바닥 들여다보듯 꿰고 있었다.
덕분에 애들은 상담 전, 어느 대학을 목표로 할지, 그리고 어느 반에 들어가면 좋을지 대강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게 선생들의 평가와 일치하면 별 탈 없이 어느 반에 들어갈지가 그 자리에서 정해졌다.
어쨌거나 상담 속도는 꽤 빠르게 진행됐다. 그렇게 수현의 차례가 됐다.
드르륵.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간 수현은 잠시 후, 깜짝 놀랐다.
담당인 김윤수 선생과만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는데, 문이 다시 열리더니 미술과장 조재환과 양진우 교장이 들어온 거다.
“어, 어. 앉아요. 앉아.”
엉거주춤 일어나는 수현과 김윤수에게 양진우 교장이 활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이고. 이제 고3이라 그런가. 얼굴이 핼쑥해진 것 같네. 수현아, 너도 그래도 긴장은 되지?”
어릴 때 자주 본 친척 어른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는 양진우 교장.
수현은 순간 헷갈렸다.
내가 양진우 교장과 접점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하하. 그래도 넌 행운이지. 고3 올라가서 내신 등급이 갑자기 8등급이 되지 않고서야, 대학 입학은 따놓은 당상인데. 그것도 어디 보통 대학인가? 백현대, 세인대, 한국대. 최고 명문 중에 맘에 드는 곳 아무 데나 골라갈 수 있잖아. 허허. 부럽다, 수현아.”
껄껄 웃는 양진우 교장.
그 바람에 미술과장 조재환과 김윤수 선생도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우리 수현이는 어느 대학이 마음에 드나?”
조금 부담스러운 구도와 질문.
그러나 수현은 정해두었던 대답을 꺼냈다.
“백현대와 세인대 중 한 군데로 고민하고 있어요.”
“호오. 그래.”
이번엔 양진우 교장뿐 아니라 조재환과 김윤수도 관심을 보였다.
백현대와 세인대.
두 학교 모두 명문 중의 명문.
백현대는 종합대학으로 공대와 교대 쪽이 유명한데, 가장 대표적인 건 미대였다.
미술대학에만 무려 11개 과, 미대 인원이 3천 명이나 돼, 백현대라면 누구나 저절로 미대를 떠올릴 정도였으니까.
그림 좀 그린다는 애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꿈의 미대.
훌륭한 교수진과 커리큘럼은 물론, 인원이 많아 졸업 후 작품 활동을 하거나 관련 분야에 진출해 자리를 잡기도 수월했다.
백현대 미대 출신이라면 일단 믿고 보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팽배했다.
그리고 세인대.
아직은 관망하는 분위기나 곧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대가 될 거라 평가받는 학교였다.
수현이 알던 과거에도 세인예술대는 97년 권인호 교수가 학과장에 오르며 백현대와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미술대학으로 성장한다.
유학이 필요 없는 교수진과 커리큘럼을 내세워 차별화를 시도한 세인대.
그 자부심과 자신감은 입시 전형에서도 느껴졌는데, 타 대학들이 석고 데생과 전공 시험을 실기시험으로 볼 때, 세인예술대는 포트폴리오 평가와 창의성을 평가하는 2박 3일짜리 시험을 치르는 걸로 유명했다.
어쨌거나 둘 다 좋은 학교였고, 국내 대학에 입학한다면 둘 중 한 곳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게 수현의 생각이었다.
다만 중요한 건 타이밍이었다.
세인예술대가 급부상하는 건 2000년대 이후로 수현의 입학 시기와는 조금 맞지 않았다.
권인호 교수가 궁금하긴 했으나, 백현대에도 훌륭한 교수진이 있었고, 무엇보다 미대 안에 자극이 될 인재들이 수천 명이나 모여있을 테니 당장은 백현대가 조금 낫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러면서도 알고 있던 미래를 이미 몇 번이나 바꾼 것처럼 자신이 세인대로 가면 세인대의 부흥기를 조금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수현의 내면에서 엎치락뒤치락했다.
“둘 다 좋은 학교지. 우리 수현 학생이야 크게 준비할 것도 없고, 특차 시험도 형식적인 시험이 될 거라 그때 가서 차차 정해도 되겠어. 안 그렇습니까?”
수현의 생각을 떠본 양진우 교장이 두 선생에게 껄껄 웃으며 물었다.
“네. 사실 수현이라면 바로 유학을 떠나는 선택지도 있을 거고요.”
김윤수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유학은 따로 고민 안 해봤니?”
그 말에 수현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천천히요.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중간에 넘어가거나 졸업 후에 가는 게 어떨까 고민하고 있어요.”
세현예고 학생 중엔 국내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대신 곧바로 유학 절차를 밟는 애들도 있었다.
형편이 좋으니 가능한 선택지였는데, 그중 8할은 도피 유학 비슷한 것이긴 했다.
한국에서 아무래도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려울 것 같으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코스를 정하는 식이었던 것.
물론 수현은 결이 달랐다.
한국 어떤 대학의 입시도 어려움 없이 통과할 실력이 됐고, 이제 재정도 넉넉하니 선택은 그야말로 자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은 당장의 선택지엔 없었다.
“대학 생활을 제대로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첫 번째 이유는 선생님들 앞에서 밝힌 대로 미대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다.
과거 수현의 대학 시절은 무척이나 칙칙했다.
학과 수업을 따라가기도 버거울 정도로 아르바이트에 시달렸고, 나중엔 휴학계를 내고 학비를 벌었다.
지나고 보니 대학 시절 기억이랄 게 거의 없었다.
20대, 가장 뜨겁고 활기찬 나이.
시들시들한 꽃처럼 수현은 생기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엔 과거에 누려보지 못한 대학 생활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물론 유학을 가더라도 학창 시절을 즐길 순 있겠지만 낯선 땅, 새로운 사람들에 익숙해지는 데 또 에너지가 들 테니, 적어도 2년은 비교적 몸과 마음이 편안한 국내에서 못다 한 대학 생활을 누리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IMF.
96년부터 경기는 침체되고 있었다. 과거와 똑같이 금융위기가 오고 그로 인해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면 98학번이 될 수현은 다시 혼란스러운 상실의 시대를 경험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해외보단 국내가 낫겠다 싶은 부분도 생길 텐데, 그 시기 해외에 있던 유학생과 실력 있는 작가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대거 한국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물론 잠깐의 시기이고, 비바람이 그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겠지만, 수현이 예상한 2년 정도의 국내 대학 생활과는 그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
‘고 화백님, 강희연 작가, 그밖에 훌륭한 작가들이 98년부터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어. 아예 터를 잡은 사람들이 아니고는 유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졌을 테니까.’
수현이 과거 알았던 일을 떠올리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권인호 교수만큼이나 궁금하고, 만나고 싶던 작가들을 98년, 99년, 00년까지 한국에서 쉽게 만날 기회가 생긴다.
“뭐, 수현이야 혼자서도 워낙 잘해왔고, 똘똘하니까.”
“맞습니다. 수현인 걱정할 게 없죠.”
“그래. 학교마다 어떤 장점이 있고 특전이 있는지 선생님들이랑 자세히 상의하고, 또 JK 그룹이랑도 상의해 봐야지?”
고개를 끄덕이는 두 선생의 말에 양진우 교장이 몇 마디를 슬쩍 덧붙였다.
결국 JK그룹 얘길 꺼내는 걸 보니 수현이 그쪽과 얼마나 자주, 그리고 깊이 소통하고 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수현은 별 대답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마무리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저, 그럼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할까요?”
“어, 그래.”
“응. 가 봐.”
“하하. 한수현 파이팅!”
수현이 일어나자 양진우 교장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김윤수 선생이 수현에게만 눈을 찡그리며 신호를 보냈다.
‘……뭐지? 따로 할 말이라도 있으신 건가?’
수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교실로 돌아가는 척 다시 상담실로 돌아오자 김윤수 선생이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내가 아깐 말 못 한 게 있어.”
김윤수가 아까보다 한결 편안한 자세로 앉으며 말했다.
“수현이 너, 두 대학을 고민하는 이유가 정확히 뭐야?”
그제야 제대로 상담 교사 티를 내는 김윤수.
“혹시 권인호 교수님 때문이야?”
그리고 김윤수는 수현의 고민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