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n obsessed tyrant and a sleeping cat every night RAW novel - Chapter (84)
Chapter 84
내가 지내는 방으로 데려다준 킬리언은 나를 소파에 앉혀 준 후. 그의 방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사슴 조형물과 액자가 놓인 콘솔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만찬에 맞는 격식을 갖추기 위해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화려한 크라바트, 그리고 광휘로운 훈장들과 정교하게 세공된 견장이 달린 재킷을 입은 그는 평소보다 더 강인하고, 명화에서 막 튀어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어차피 그대가 이길 거야.’
내가 기젤라 부인에게 당하든 말든 내버려 둘 것처럼 대답하다가, 얼굴 빨갛게 익게 만드는 소릴 잘도 해 대다니.
다시금 떠오른 그의 속삭임이 귓바퀴를 간질거리며 울리자,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러든 것처럼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란 말이야.
“왜.”
콘솔 위에 놓인 벨을 누르고 돌아선 킬리언이 내게 다가오며 여상하게 물었다.
“아…….”
내가 계속 줄곧 그를 쳐다보고 있던 걸 들킨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황급히 고개를 젓고 화제를 돌리려는 찰나, 운 좋게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소파 가까이에 의자를 내려놓은 킬리언이 대답하자,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깍듯이 인사한 후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전하.”
“테라피 스톤을 가져와.”
“네, 준비하겠습니다.”
시종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할 말 있던 거 아니었어?”
“음, 밋시오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냉큼 화제를 돌려 대답했다.
킬리언이 유리창 너머의 밤하늘에 잠깐 시선을 던진 후 입을 열었다.
“캐번디시 부인이 어머니께 저녁 때쯤 당도했을 테니, 설명하고 있지 않나 싶은데. 어머니에겐 당황스럽고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생각될 수도 있으니 바로 보내지 않으실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그의 말이 옳았다.
나로선 한시가 급한 마음이지만, 엘리제 황후의 입장에선 밋시오가 내 꿈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일 것이다.
거기다 브륀힐트 공녀의 꿈이라 전한다면, 더더욱 그 공녀가 누구인지도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내 생각엔 그녀가 밋시오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밋시오의 그러한 일에 대해 어쩌면 알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예상일 뿐이었다.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내 편지도 함께 전했으니 곧 답신이 올 거야.”
“편지를 보내 놓으셨어요?”
“응. 아까 환복하기 전에.”
똑똑-
그의 대답을 듣기 무섭게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시종의 안내를 받는 하녀가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온열이 유지되는 마석으로 만들어진 판 위에 매끈하게 다듬어진 회색 스톤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만 가 봐.”
“네? 아, 알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던 하녀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시종도 놀란 눈치였지만 무어라 덧붙이지 않고 인사를 한 후 모두 나갔다.
“편지엔 밋시오를 보내 달라는 말씀만 하셨어요? 혹시…… 아!”
언제쯤 어머니를 뵐 수 있느냐 묻지 않았는지를 조심스레 꺼내 보려는 찰나, 발목을 쥐는 따뜻한 온기에 솜털이 쭈뼛 섰다.
킬리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발목을 살피고 있었다.
“무, 뭐 하시는 거예요?”
그가 발목을 감싸 쥔 채 구두까지 벗겨 내자 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고작 구두 하나 벗겨 낸 것뿐이라지만 꼭 발가벗은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많이 부었어.”
남이야 얼굴이 익든지 말든지, 그의 손길이 그대로 내 다리를 들어 테이블에 놓아두었다.
민망한 기분에 다리를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손안에 잡힌 이상 어림도 없었다.
그는 기어이 테이블 위에 내 다리를 고정시키고 내가 힘을 빼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그런 건 미, 미리 말해 주셔야…….”
“말하면. 혼자 하겠다고 했겠지.”
“……그렇지만.”
“내리지 마.”
킬리언은 발목 아래에 쿠션을 놓고 스톤을 꺼내 부은 곳에 댔다.
스톤은 전생에 아이스하키에 쓰이는 퍽과 유사한 형태였는데 좀 더 둥글게 다듬어진 모양새였다.
“내일은 사냥이 있어. 이른 아침에 나가야 해서 못 보고 갈 수도 있으니, 푹 쉬고 있어.”
그의 손가락이 부은 정도를 확인하듯 발목을 어루만지며 묵묵히 스톤과 함께 그러쥐었다.
“내가 올 때까지 걷지 않고 있으면 더 좋고.”
그가 살짝 내리깐 시선이 이렇게 섹시해 보여도 괜찮은 일일까.
왜 저 황태자는 필요 이상으로 잘생겨서 별것 아닌 행동에도 사람 심장을 뛰게 하시는지.
나는 이제 얼굴이 화끈하다 못해 귓불까지 뜨거워져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가만히 내 발목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 온 신경이 팽팽히 당겨지는 것 같았다.
등줄기가 긴장돼 허리가 꼿꼿이 서고, 어떻게 있어야 어색하지 않게 보일지 도무지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레네트.”
불현듯 들려온 킬리언의 음성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네?”
“간식 가져오라 할까.”
“……왜요?”
“뭐든 더 많이 먹었으면 좋겠어.”
이 야심한 밤에 웬 간식을 말하나 싶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반쯤 내리뜬 그의 붉은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굳게 다문 입술 새로 착잡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 뭐든 잘 먹고 있잖아요. 디저트도 좋아하구.”
“알아. 그러니까 좀 더 가져오라고 하는 게 어떨까.”
“아까 만찬에서도 그 많은 음식을 끊임없이 먹었는데요……?”
“그렇더라도 너무 말랐어.”
많이 먹고 살 안 찌면 좋은 거죠, 뭐.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간 냉랭한 반응이 이어질 것 같아 관뒀다.
대신에 아까 식사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이 생각나, 다시 입을 열었다.
“어…… 혹시 식사할 때 제 표정이 안 좋았어요?”
킬리언이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봤다.
“아까 전하께서 갑자기 앞으로 둘이서만 먹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제가 불편한 내색을 보였나 해서요.”
“전혀. 그들과 같이 식사하게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의 무덤덤한 대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방금 자신의 아버지를 ‘그들’이라는 범주 안에 집어넣어 말했다.
식사하는 내내 달라붙어 있던 아버지와 기젤라 부인을 보던 그의 표정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차분해 보였지만, 역시 그의 기분이 좋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 해.”
회상에 잠겨 있는 찰나 내 발목을 지그시 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악력이 실려 다분히 의도적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손길이었다.
“우, 왜 그러세요?”
“다른 생각 하지 마.”
“무슨 생각이요?”
“여기 말고 다른 생각.”
허어, 생각도 마음대로 하면 안 되나.
“그건 너무 억지시잖아요”
“그래도 싫어.”
“……왜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였다.
다른 생각에 잠긴다고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니잖아?
“제가 잠깐 다른 생각에 빠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왜 그러면 안 돼요?”
“…….”
“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잠자코 내 발목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곧 내게 시선을 던졌다.
“쓸데없는 상념이었을 테니까.”
“아닐 수도 있죠.”
“그대는 얼굴에서 다 드러나.”
“제가 아니라면요?”
“그럼 말해 봐. 무슨 생각 했는데.”
어, 그건 곤란한데.
차마 기젤라 부인이 아버지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전하가 신경 쓰였어요, 라는 말을 그에게 꺼낼 수는 없었다.
“어…….”
“말하기 어렵다면 불필요한 생각이었을 확률이 높지.”
“사람이 늘 쓸모 있는 생각만 하고 살 순 없다구요, 전하. 때로는 득이 되지 않는 상념에 빠질 수도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걸 떠올리는 게 어때.”
“가령 어떤 걸요?”
그가 쥐고 있는 내 발목이 신경 쓰여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킬리언의 말을 경청하려 노력했다.
“내가 제안한 결혼이라든지.”
“…….”
“혹은 혼인이라든지.”
“!”
이렇게 훅 들어오신다구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입이 반쯤 벌어진 나와 달리, 킬리언은 여상한 얼굴로 스톤들을 교체했다.
“그건……. 전하께서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하셨잖아요. 전하는 결혼을 쉽게 결정하실 수 있는 입장일지 모르지만, 전 아니라구요.”
“어렵게 결정한다고 해서 결과가 더 좋아지는 건 아닐 텐데.”
물론…… 나도 안다. 그는 내가 하겠다고 하면 일사천리로 준비할 방도를 마련할 게 빤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저런 느긋한 표정을 짓는 거겠지.
“……아무튼 사흘간 시간을 주신댔으니까 결혼에 대해선 그때 말씀드릴 거예요.”
나는 그에게 미처 할 수 없는 말들, 그의 제안을 듣고 성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떠올렸던 것들을 다시 돌이켰다.
결혼이라고…….
그런 건 이 세계로 떨어진 이후 살아남는 게 급해서 꿈꿔 본 적도 없고, 감히 꿔 볼 수도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내가 그와 결혼하면 바네사는……?
원작의 수순대로 두 사람은 만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드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아무나 결혼해도 상관없는 황태자의 쉽게 내린 결단으로 옳다구나! 하고 아내의 자리를 냅다 차지할 순 없지 않겠는가.
거기다 내년이면 그들이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질 텐데.
나는 이런 상황에 무책임하게 아무나와 해도 된다고 말한 킬리언이 얄미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그 순간 킬리언이 내 발목을 쥐고 있던 손을 빠르게 떼며 자못 심각한 눈빛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어느새 연약한 생명체를 감싸듯 조심스레 움켜쥐고 있던 그의 커다랗고 강인한 손이 긴장한 것처럼 허공에 뜬 채 뼈마디가 불거져 나와 있었다.
아파서 그런 게 아닌데…….
나는 찡그렸던 인상을 황급히 풀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주저하는 사이 대답을 종용하는 그의 눈빛에 나는 재빨리 입을 달싹였다.
“그냥 좀 피곤해서요.”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며 말하는데, 킬리언이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고된 하루라 그럴 수 있다 여기는 것도 같았다.
그가 이윽고 차임벨을 눌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종에게 레네트 공녀의 목욕물을 받아 놓으라 지시하는 게 들렸다.
”쉬어.“
하녀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본 후 일어선 킬리언이 내게 인사했다.
* * *
레네트의 방문을 닫고 나온 킬리언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후…….”
그는 이마를 짚은 채 잠시 고개를 숙였다.
괜한 소릴 했다.
몰아붙인 탓인지 레네트는 갑자기 말수가 줄고 앙증맞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깊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사흘간 시간을 주신댔으니까 결혼에 대해선 그때 말씀드릴 거예요.’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가히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하긴, 처음 그가 제안했을 때 말문이 막혀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입만 벙긋대던 그녀는 꼭 길 잃은 어린 짐승처럼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놀람을 넘어선 충격이 가득한 그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내부에 걷잡을 수 없는 조바심이 솟구쳤다.
다그쳐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건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다시 들어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할까도 싶었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을 돌이켜 사과한단 말인가.
그녀에게 결혼을 말한 것을 그는 조금도 돌이키고 싶지는 않았다.
“…….”
그러나 레네트가 눈을 새치름하게 밑으로 내리떴을 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뻔했다.
여린 체구의 그녀가 겁을 먹거나 부담을 느껴 그대로 다른 생각을 품게 될까 봐 심장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긴. 누가 들어도 갑작스럽고 어처구니없을 소리지 않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킬리언은 입 언저리가 딱딱하게 굳은 채 답답함을 느꼈다.
어디 도망가면 어쩌지.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전하.”
레네트의 방 복도를 지키고 서 있던 시종이 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킬리언은 시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레네트의 방을 한 번 더 돌아봤다.
다시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레네트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것만은 존중해 줘야 했다.
“공녀를 잘 지키도록 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고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