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개와 늑대의 시간 (7)
“이놈들, 정말로 미친 거 아닙니까?”
괴링이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황당하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
“식민지에서 그 난리가 터졌는데 갑자기 프랑스 상륙이라니. 이놈들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괴링의 말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 지브롤터 해협, 수에즈 운하가 기뢰로 도배되고 인도,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라크, 북아일랜드에서 일제히 봉기가 일어난 마당에 난데없이 프랑스 상륙을 준비 중이라니.
이쯤 되면 정말로 처칠이 치매에 걸린 게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스럽다.
보통은 이런 상황일수록 집안 단속에 집중하지 않나?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칠이 어째서 지금 이 상황에 프랑스 상륙을 시도하려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식민지에서 일어난 분란으로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우니, 당분간 대규모 작전은 힘들 것이라고 우리가 방심하고 있으리라 여겼겠지.
그리고 그것을 역이용한다는 게 처칠의 발상일 테고.
영국의 프랑스 침공이 바짝 다가온 이상,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영국의 상륙에 대비해 프랑스 북부 해안의 방비를 강화하는 것.
“룬트슈테트 원수에게 전하시오. 언제 영국 놈들이 상륙을 시도할지 모르니 바짝 긴장하라고. 특히 전에 말했던, 적의 상륙지점으로 예상되는 곳을 각별히 주의하라고.”
“알겠습니다, 총통 각하.”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프랑스로 추가 병력을 보내는 안에 대해서 여러 안건이 나왔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해 프랑스로 보내는 일은 논의조차 없었다.
지금의 병력만으로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을지 간당간당한 데다 동부전선에서 프랑스까지 가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따라서 서부전선에 보낼 증원군은 독일 본토에 주둔 중인 부대 중에서 선별하기로 했다.
많은 부대가 후보로 선출된 가운데 라이헤나우가 말했다.
“자유 러시아군을 프랑스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유 러시아군 말이오?”
“예. 창설 자체는 최근이지만, 군단 구성원 대부분이 소련군 포로 출신이라 전투 경험이 있으니 나름의 전투력도 기대할 수 있고 이번 기회에 러시아인들의 충성도도 확인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유 러시아군 창설 자체는 크게 반대하지 않아도, 이들의 충성도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며 동부전선 투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원 소속인 소련군 진영으로 도주할 우려가 있는 동부전선과 다르게 서부전선에는 그럴 걱정이 없으니 투입해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라이헤나우의 주장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소련군 포로들로 구성된 동방부대(Osttruppen)는 연합군과 전투는커녕 마주치는 즉시 항복하거나 도주하기 바빴지만, 지금은 독일이 패망해가던 1944년이 아닌 1942년이니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더기로 투항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나쁘지 않군. 블라소프에게 즉시 프랑스로 이동할 채비를 갖추라고 명령하시오.”
“예, 총통 각하.”
그렇게 자유 러시아군 소속 육군 제1군단의 프랑스 파견이 확정되었다. 제2군단과 공군은 아직 편성 중이라 프랑스 파견에는 제외되었다.
프랑스는 자국의 정예부대를 동부전선에 보낸 탓에 그나마 전투부대다운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는 병력이 고작 6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도 자국 군대의 전투력을 기대하지 않는 모양인지 이들을 최후방에 배치하기로 한 룬트슈테트의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동부전선에 파견된 프랑스군은 미약하지만 그래도 나름 제 몫을 하고 있다는 것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에 파견된 프랑스군은 프랑스군 중에서도 가려서 뽑은 인원들인 데다 국방군이 대여한 장비도 있기에 직접적인 비교는 곤란했다.
같은 국군이어도 수기사와 후방 동원사단을 동급으로 취급할 수 없듯이.
서부전선에 관한 논의가 끝난 다음에는 한동안 동부전선 소식에 묻혔던 발칸반도 소식이 도마에 올랐다.
“아프베어의 보고에 따르면 크로아티아 정부는 자국 내에 준동 중인 파르티잔의 진압에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요들은 공산 파르티잔들의 토벌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크로아티아 정부와 군의 사정에 관해 설명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로부터는 그런 보고는 없지 않았나?”
“지금까지 크로아티아 정부는 자체적으로 진압 가능하다고 여겨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만, 크로아티아 자원지대의 보호를 위해선 조기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기네들 선에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파벨리치는 이제까지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공산 파르티잔들이 본격적으로 준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로 그나마 규모도 작고 무장도 빈약해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군이 동부전선으로 파병을 나감에 따라 전력에 공백이 생겼고, 그 틈을 타 파르티잔들은 서서히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파르티잔의 구성원들은 우스타샤의 추방정책에 반발한 세르비아인들이 다수였지만, 정작 이들 파르티잔을 이끄는 수장은 크로아티아인이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역사에서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이끌고 추축국과 싸워 전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된 친구다.
그래도 다행인 건 현실 역사에서 벌여졌던 우스타샤의 학살을 철저히 막고 점령지에서 온건책을 펴도록 종용한 덕에 파르티잔의 세력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대략 6만 명 정도? 6만 명이 적은 숫자는 아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역사에서 8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파르티잔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확실히 적은 게 맞다.
이 6만 명이라는 수치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있는 파르티잔들을 전부 합친 수치지만, 파르티잔들의 주 활동무대는 크로아티아인 데다 이들이 독일로 통하는 철로를 파괴하고 크로아티아산 광물의 독일 유입을 방해하고 있는지라 크로아티아 정부만 믿고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독일과 전쟁 상태에 돌입한 영국이 우릴 엿 먹이기 위해 파르티잔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면 그때는 상대하기 더 곤란해진다.
따라서 파르티잔들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미리 싹을 잘라둘 필요가 있었다.
“다음 안건은 내일로 시행 예정인 체펠린 작전의 준비현황에 대한 보고입니다.”
***
1942년 8월 13일
소련 마그니토고르스크
1743년에 세워진 마그니토고르스크는 18세기 말 철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러시아에 널린 흔하디흔한 촌동네였다.
그러나 철광이 발견되고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흔한 촌동네에 불과했던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조금씩 체급이 커지더니 1929년 여름부터 대규모 채굴이 시작되자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소련의 국민경제 5개년 계획의 집중개발도시로 지정되어 1930년대에 어마어마한 발전을 거듭한 마그니토고르스크는 1942년 시점에서는 소련에서 손꼽히는 공업 도시이자 소련 철강업의 중심지로 등극했다.
오늘도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즐비한 공장에는 수만 명의 노동자가 전선에 보낼 무기를 만들고, 철광의 노동자들은 철광석을 캐냈다.
총알이 왔다 갔다 하고 매일같이 포격과 공습이 이어지는 최전선에는 비비지 못해도 이곳에서도 나름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배급품이 전보다 줄긴 했지만, 공업도시인 덕에 최우선 물품 지급 도시로 지정된 덕에 당장 먹고 사는 데 큰 불편은 없었고 주민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각종 무료공연이 열려 고된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의 심신을 달래주었다.
오늘도 마그니토고르스크에선 무료 발레공연이 열렸다.
그 유명한 볼쇼이 발레단이 관중석을 가득 메운 청중에게 ‘백조의 호수(Лебединое озеро)’를 선보이는 와중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마그니토고스르크 상공에 나타났다.
손님들의 정체는 서른 대의 Me264 시베리아 폭격기였다.
Me264의 항속거리는 6500km. 바트만에서 마그니토고르스크를 왕복하기에 적당한 수준이었다.
바쿠 유전 공습으로 공습에 대한 경각심이 전보다 높아지긴 했지만, 전선에서 멀리 동떨어진 후방의 도시에서 공습은 전방의 도시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라면 몰라도 카잔, 페름, 스베르들롭스크처럼 전선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도시들에 독일 폭격기들은 닿을 수 없었다.
바쿠 공습 이후로 해당 도시들에도 공습 대비훈련이 몇 번인가 시행되었지만, 도시의 물자 생산을 방해하고 주민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 이후로는 한 번도 행해지지 않았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역시 마찬가지.
그랬기에 도시 주민들은 공습이 시작되기 전까지 태연하게 일상을 즐겼다.
방공부대들이 있지만, 후방 중의 후방인지라 소수였고 이들도 이렇게 먼 후방까지 독일군 폭격기가 올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경계를 게을리하고 있었다.
소련 영공을 지나는 Me264 30대가 처음 목격되었을 때도 소련군 방공부대는 훈련 중인 아군 폭격기들로 지레짐작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그들의 나태함은 마그니토고르스크에 거대한 재앙이 되어 돌아왔다.
“폭탄 투하!”
마그니토고르스크 산업단지 상공에 도착한 시베리아 폭격기들은 일제히 폭탄창을 개방했다.
Me264 한 대당 최대 3톤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고 소련에 조금이라도 더 큰 피해를 주기 위해 폭격기들은 한 대도 빠짐없이 한계치까지 폭탄을 탑재하고 임무에 나섰다.
도합 90톤의 폭탄과 소이탄이 마그니토고르스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공습경보가 울렸을 때는 이미 공습이 시작된 뒤였다.
아직도 공장에서 작업 중이던 노동자들은 지하 방공호로 미처 대피할 틈도 없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탄 무더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무너지는 천장의 잔해에 깔려 으스러졌다.
폭탄의 위력도 충분히 강력했지만,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시민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겼던 것은 소이탄이었다.
물을 뿌리면 화재가 진압되는 일반 폭탄과 다르게 소이탄이 일으킨 화재는 물을 뿌려도 좀처럼 사그라드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뿌린 물이 기화되어 소이탄의 인화성 물질이 사방팔방으로 튀면서 불길이 더 거세지는 악영향이 나타났다.
대공포대가 한발 늦게 불을 뿜었지만 25mm와 37mm 대공포로는 Me264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들보다 구경이 큰 76mm, 85mm 대공포들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같은 전방 도시들에 집중적으로 할당된 탓에 후방의 도시들은 위력도 약하고 사거리도 짧은 빈약한 대공포들로 적들과 절망적인 사투를 벌여야 했다.
폭탄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쏟아낸 폭격기들은 즉시 고도를 올리며 전속력으로 현장에서 이탈했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인근 공군 기지에서 이륙한 전투기들이 도주하는 독일기들을 추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최신예 전투기들은 죄다 전방에 배치된 탓에 후방 공군기지에는 I-16 같은 구식 전투기들밖에 없었고, 이들의 저열한 성능으로는 고고도에서 비행하는 Me264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따라잡았다고 한들 I-16에 탑재된 ShKAS 기관총의 빈약한 화력으론 Me264를 격추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성능 차이로 출격에 나섰던 소련 조종사들은 얼마 못 가 쓸쓸히 기수를 돌려야만 했다.
조국의 도시를 불태운 적들에게 아무 짓도 못 하고 유유히 보내야만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
1942년 8월 14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
바쿠 유전 공습 소식만큼은 아니었지만, 마그니토고르스크 공습은 크렘린의 공산당 수뇌부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겼다.
최전선에서 마그니토고르스크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2360km. 그 먼 거리를 날아와 공습을 가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말은 즉 마그니토고르스크보다 서쪽에 자리한 도시들은 전부 사정권이라는 소리였다.
다음은 어느 도시 차례가 될까? 페름? 우파? 카잔? 쿠이비셰프?
마그니토고르스크 공습 자체로도 충격적이었지만 스탈린을 더 분노케 한 것은 공습 자체보다 공습이 있기 전까지 그 누구도 독일 폭격기들이 소련 영공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공군은 뭘 했길래 파쇼들의 폭격기가 우리 도시를 불태울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소, 송구합니다, 서기장 동지.”
분노한 스탈린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자 수데츠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성을 반쯤 잃은 스탈린과 눈을 마주쳤다가는 그대로 돌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에.
이번 공습으로 마그니토고르스크 공업단지의 7할이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고, 420채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며 8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
소련 전체의 산업역량을 놓고 보면 큰 피해는 아니었지만, 마그니토고르스크 상공에 나타난 독일 폭격기들의 숫자가 고작 삼십여 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피해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번 공습으로 인민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안전할 줄 알았던 후방조차 공습을 받자 인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내린 이동 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떠나 시골로 피난하는 인민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그라드, 카잔에 이르는 소련 각 도시에서 인민들의 피난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냉철한 성격의 현실주의자였던 스탈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마그니토고르스크 폭격 소식은 인민들에게 퍼질 대로 퍼진 터라 정보를 통제해도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즉시 전국에 허가없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도시를 떠나면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반역행위로 간주하겠다고 발표하게.”
“예, 서기장 동지!”
“수데츠 동무, 이번은 넘어가겠지만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동무는 지금 당장 소비에트의 각 도시를 방어할 계획에 대해 의논하고 그 결과물을 보고서로 만들어서 제출하시오. 최대한 빨리 제출하는 게 좋을 거요.”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그래도 수데츠는 운이 좋았다.
당장 공군에 쓸만한 장교들이 얼마 없는 탓에 그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나고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인력이 넉넉한 육군과 다르게 공군과 해군의 규모가 육군보다 작은 것도 있고, 노비코프를 처형하면서 공군 고위 장교들을 여럿 처형한 탓에 지휘 상 공백이 타 군종보다 컸다.
그랬기에 스탈린은 수데츠에게 구두경고로 책임을 마무리 지었다.
별을 달 정도의 머리가 있는 자라면 다음은 없다는 것을 알 테니 여기서 더 뭐라고 해봤자 본인 입만 아플 뿐이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 공습의 후처리도 머리 아프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키예프는 사실상 포위당했고-키예프 포위의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스탈린 그 자신이었지만-스몰렌스크와 레닌그라드 입구에도 독일군이 당도해 도시를 포격 중이었다.
병사들은 기름이 부족해 도보로 전선까지 이동해야 했는데, 도시를 탈출하는 피난민 행렬이 병력의 이동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아 작전에 애를 먹고 있었다.
스탈린은 인민들의 피난을 금지하고 병사들을 도와 전투에 임할 것을 지시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피난민들로 인해 병력의 이동이 지체되는 일도 막고, 전투에 동원할 인력도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피난민들이 입을 고난을 생각하면 그도 가슴에 켕기는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조국 러시아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의 결정을 합리화시켰다.
어차피 지금은 전시고, 전시에 모든 인민은 승리를 위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역사의 오랜 전통이기도 했고,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기도 했다.
특히 소련처럼 개인보다 전체를 중요시하는 사회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자신의 장남도 포병 대위로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거늘, 그저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 같은 ‘사소한’ 이유로 편의를 봐줄 수 없는 노릇.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것, 그것이 스탈린의 목표였고 소련의 목표였으며 소련이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