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승리를 향하여 (9)
1942년 9월 22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이거 참······ 여러모로 ‘걸작’이군요.”
오늘 자 다스 슈바르츠 콥스를 집어 든 브라우히치가 혀를 내둘렀다.
신문 일 면에는 눈 뜨고 보기에 민망한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시골 아낙네가 입을법한 옷을 입고 죽은 눈으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티토.
사진 제목은 ‘파르티잔의 두목 티토의 추악한 실체’.
차라리 티토는 그 현장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험한 꼴을 보지 않았을 터.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살아남았고, 자신이 선동한 파르티잔들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한 제물로 세워졌다.
“우리가 티토를 그냥 총살대로 보내 총살하거나 교수대에서 목을 매달면 빨갱이들은 놈을 순교자로 포장하겠지. 따라서 우리는 빨갱이들이 놈을 순교자로 만들지 못하도록, 녀석의 이미지를 제대로 씹창낼 필요가 있다네.”
공산주의자라면 서구권에선 멋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민복에, 러시아 털모자 우샨카나 붉은 별이 붙은 플랫캡을 쓰고 다닌다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티토는 깔끔하게 손질한 정복과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로 찍은 모습으로 자신을 흔하디흔한 공산주의자가 아닌, 멋을 아는 미중년으로 포장해 전쟁 기간 연합국 국민의 호감을 샀다.
그와 반대되는 위치에 있던 체트니크의 수장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세르비아 농민들에게 호응을 얻기 위해 일부러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다녔지만, 도적 떼 두목처럼 생긴 외형으로 연합국으로부터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았다.
실제로 체트니크가 저지른 짓도 연합국이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요소가 되었고.
따라서 그가 공산당으로부터 숭배받는 일을 원천차단하려면, 그의 이미지부터 망쳐야 했다.
아무리 포장하려고 해도, 포장하기에는 이미지가 너무 막장이라 역효과만 날 것 같은 이미지로.
“우선 여장부터 시작하지.”
파시즘에 맞서는 전사, 미중년 파르티잔 지도자로 알려졌던 티토가, 사실은 여장하고서 꼴사납게 도망치다가 생포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의 숭배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지간히 대가리가 깨진 놈들이라도 ‘이건 좀······’하겠지.
빨아도 하필이면 여장하고 도망치던 인간을 빠냐는 비아냥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일 테고, 취향이 그쪽이라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현실감을 올리기 위해 크로아티아 시골 아낙네들이 주로 입은 옷을 구해다가 분위기에 맞게 찢고 돼지 피를 뿌려서 티토에게 입혔다.
옷을 보자마자 놈은 눈치를 채고 지랄발광했지만, 결국 신문에는 녀석의 여장한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여기에 티토의 사생활이 입에 담지도 못할 정도로 추잡했다고 보도하는 걸세. 어차피 진실을 아는 자들은 죄다 벌집이 되거나 티토 옆방에 수감 됐으니.”
21세기에도 그렇고 20세기에도 소아성애자는 만인의 지탄받는 대상이다. 여기에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동성애까지 합치면?
‘공산당 지도자의 숨겨진 은밀한 취향!’
‘평소 여장하고 7~12세 아동들과 관계하는 것을 즐겨······’
‘최측근의 양심선언! 밤낮으로 울려 퍼지는 낯뜨거운 교성!’
임의로 지어낸 티토의 측근들과 호위병들의 증언까지 더해 현실성을 살렸다.
티토의 본거지에서 수백 개의 여성용 속옷과 포르노 잡지가 발견되어 수색하던 병사들이 혀를 내둘렀다는 소리도 첨가해주고, 증거사진들까지 실어주면 더욱 완벽하다.
인터넷이 없는 세상이라 대중들이 진실을 알 방법은 없으니, 한 번 지어내서 소문만 퍼뜨리면 그걸로 끝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을 넘어 유럽에서 티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단, 독일에 맞서 파르티잔 활동을 이끈 공산주의 지도자가 아니라 여장과 소아성애, 양성애를 즐긴 추악한 변태 싸이코의 이미지로 기억되겠지.
발칸의 골칫덩어리를 제거했으니 다시 시선을 동부전선으로 돌릴 차례.
T-34/85, La-5 등의 신무기를 투입하고도 소련군은 여전히 패퇴하고 있었다.
현재 아군은 그자츠크를 통과해 모자이스크로 진격 중이었다. 모자이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110km.
“총통 각하. 지금이야말로 모스크바에 폭격을 가해 빨갱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시기입니다.”
괴링과 리히트호펜은 모스크바 공습을 요청했다.
공습을 가해 적들의 방어시설들을 파괴하고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적기라고 주장하면서. 이전에도 이 둘은 모스크바 공습을 주장했지만 나는 시기상조라며 거절했었다.
모스크바 공습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소련의 사기는 개전 이후로 최악이며 아군은 모스크바의 근처까지 진격한 상황.
당연히 모스크바의 민심과 사기 역시 바닥일 테고 이러한 상황에서 아군의 공습이 가해진다면 그 충격이 어마무시할 것이다.
“좋네. 허가하지.”
***
1942년 9월 24일
소련 모스크바
독일군이 모자이스크로 진격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스크바에선 공포와 혼란, 무질서가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공산당이 내린 피난 금지령 때문에 시민들은 모스크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도시에 그대로 남아있어야 했다.
그 때문에 뇌물을 바치거나 몰래 도망을 쳐서라도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스탈린의 특명으로 NKVD와 스메르시가 돌아다니며 탈출자들을 색출해내 현장에 즉결처형했지만, 사람들의 탈출행렬은 계속되었다.
이에 스메르시는 처형에서 그치지 않고 본보기로 총살당한 이들을 나무나 전신주에 매달아 전시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민들과는 별개로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외국 공관들에겐 피난이 종용되었다.
모스크바를 떠난 외교 공관들은 쿠이비셰프에 자리를 잡았다. 모스크바에 자리한 정부 부서 또한 쿠이비셰프로 옮겨졌다.
하지만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남았다.
모스크바 방송에 나온 스탈린은 자신 역시 붉은 군대와 함께 모스크바에 남아 수도를 사수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스탈린의 선언으로 모스크바 시민들의 사기는 미약하게나마 상승했다.
동시에 시민들은 모스크바를 독일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각종 공사에 투입되었다.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많아서 노동이 힘든 어린이와 노약자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진지 구축에 투입되어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해야 했다.
스탈린은 이른 아침부터 새벽까지 업무를 보며 모스크바 방어선의 건설 현황을 보고받았다.
25만 명에 달하는 인민들을 투입한 덕에 방어선 구축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새로 방어선을 구축하자니, 그게 무슨 소리요?”
“서기장 동지, 지도를 봐주십시오. 모자이스크와 모스크바 사이에는 방어선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사이에 추가적인 방어선을 건설하지 않으면-”
“아니, 아니. 새 방어선을 구축할 물자로 기존 방어선을 보강하면 되지 않소. 추가적인 방어선을 만든다고 기존 방어선에 쓰일 물자와 인력을 빼면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가 된단 말이오.”
스탈린은 주코프가 세운 작전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새 방어선을 만들 물자를 기존 방어선에 써서 더 강력한 방어선을 만들면 되는데 왜 굳이 방어선을 따로 만들어서 물자와 인력, 시간을 낭비하느냐는 스탈린에게 주코프는 갖은 말로 설득을 시도했지만, 스탈린은 완강했다.
시베리아에서 끌어온 병력을 어디에 배치할지에 관해서도 둘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다.
주코프는 이들을 모스크바 외곽 방어선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모자이스크 방어선에 배치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유는 전과 동일.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모자이스크 방어선에 배치해 독일군을 막아내면 되는데 굳이 후방인 모스크바에 배치해 모자이스크 방어선이 돌파당하게 내버려 둬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주코프는 사람이 아니라 돌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을 시도해도 응답조차 없는 돌.
“원수 동지,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나도 설득을 시도해봤네만 워낙 완강하셔서 별도리가 없네.”
보다 못한 보로실로프가 나서서 설득을 시도했지만 이조차 먹히지 않았다.
“차라리 서기장 동지의 말대로 모자이스크 방어선 강화에 중점을 두는 게 어떻겠나?”
심지어 보로실로프조차 주코프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돌아버리겠군. 주코프는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빌어먹을, 사람 말을 듣지도 않을 거면 왜 이 자리에 앉혔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권한을 최대한 사용해 틈틈이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물자와 장비가 부족해 제대로 된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바쿠 유전이 가동하려면 최소 3개월은 더 필요한 데다 기름의 양이 적다 보니 장비와 물자의 수송에도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다.
기름, 특히 기름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놈의 기름 때문에 멀쩡히 운용할 수 있는 장비들이 버려지거나 회수에 실패해 전장에 방치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기름이 부족해 소련군이 유기한 장비를 독일군이 노획해 소련군을 향해 사용하는 일이 동부전선에서는 일상이었다.
그놈의 기름만 충분했어도 여기까지 밀리지 않았을 텐데······.
그때 공습경보가 울렸고, 경보가 울리고 1초 후 폭음이 울렸다.
주코프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갔다. 모스크바 어딘가의 거리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장 동지! 공습입니다! 얼른 방공호로 가셔야 합니다!”
개전 이후 최초로 모스크바가 공습받았다.
***
아무리 소련군, 특히 소련 공군이 개전 이후로 독일 공군에게 패배만 거듭해왔다곤 하나 모스크바에 깔린 대공망은 나름 강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마그니토고르스크 공습 이후 후방 도시들에 대한 독일의 추가 공습을 우려한 스탈린의 지시로 소련의 항공, 대공 전력은 분산되었고, 본래라면 모스크바에 배치되어야 했을 전력도 후방으로 배치되었다.
개전 이후로 모스크바가 한 번도 공습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소련군의 방심과 안일함에 일조했다.
모스크바를 가장 먼저 강타한 것은 V2 로켓이었다.
독일군은 열차에 로켓발사대를 설치해 전선 가까이 끌고 온 후 수십 발을 발사해 모스크바를 1차로 타격했다.
폭격기들의 공격을 예상했던 소련군에게 V2 공습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무엇보다 폭격기가 아닌 로켓이라 격추가 불가능한 탓에 대공포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 출격한 항공기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모스크바 상공만 빙빙 돌아다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기지로 복귀했다.
하지만 기지로 복귀한 조종사들은 조종석에서 내린 지 십여 분 만에 도로 조종석에 올라야 했다.
V2 폭격이 끝난 후, 폭격기들이 모스크바 상공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 밑에 사는 놈들은 전부 다 빨갱이들이다. 모조리 쏟아붓도록.”
“뒈져라, 빨갱이들아.”
공습이 끝난 줄 알고 방심하던 소련군과 모스크바 시민들의 머리 위로 폭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뒤늦게 모스크바 상공에 도착한 전투기들은 폭격기들의 호위를 맡은 독일 전투기들과 사투를 벌였다.
소련군 조종사들은 수도를 지킨다는 신념으로 타올랐지만,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적들은 Me262, Fw190D 같은 사기적인 성능의 괴물들.
소련 공군 최신형기인 La-5의 성능은 최대로 쳐도 Bf109G, Fw190A와 엇비슷한 수준인데, 그보다 몇 단계 위에 있는 독일기들의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폭격기들을 격추해야 할 전투기들은 호위기들에 쫓겨 사냥당하는 판국이었고 그 사이 폭격기들은 느긋하게 모스크바를 불바다로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다.
장장 2시간에 걸친 공습이 끝났을 때 모스크바 시내의 주요 공업시설과 철도역, 민간 거주구역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고 크렘린도 건물 일부가 손상되었다.
공습이 끝난 뒤에도 모스크바 시내의 분위기는 전쟁터 한복판을 방불케 했다.
불을 끄려는 소방대원들과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서 숨이 붙어있는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는 구조대원들 사이로 집을 잃은 시민들의 절규가 이어졌다.
스탈린이 내린 피난 금지령으로 모스크바에는 여전히 4백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살고 있었고, 자연스레 민간인들의 피해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들과 푹 꺼진 도로, 무너진 다리와 화염에 삼켜진 공장을 보며 모스크바 시민들은 머리에 공통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곧 다가올 대재앙의 전조이자 미래의 모스크바 모습이 아닐까 하고.
비단 시민들뿐 아니라 붉은 군대의 장병들, 심지어 반동분자들의 사보타주로부터 소비에트 연방의 법과 질서를 수호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NKVD와 스메르시의 일부 요원들조차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전쟁을 계속해나가는 것이 과연 소련에 있어 이득이 맞느냐고.
***
1942년 9월 25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모스크바 공습은 성공리에 끝났다.
총 200대의 폭격기들과 80대의 전투기들을 동원해서 모스크바를 공습한 결과 아군은 모스크바 시내 일대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아군도 피해가 없지 않아 폭격기 6대, 전투기 9대가 모스크바 상공에서 격추되고 수십 기가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지만, 예상범주 안이라 흘려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성공적인 공습에 고무된 괴링은 매일같이 모스크바에 공습을 퍼붓자고 제안했지만, 아군의 연료와 탄약 보유량을 생각하면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었기에 나는 모자이스크 함락 전까지는 주 1회로 한정 지었다.
V2도 있으니 굳이 폭격기를 이용한 직접적인 공습에 목을 매달 필요도 없었고.
“이제 곧 러시아에선 겨울이 시작될 거요. 넉 달이나 지속되는 러시아의 겨울을 나려면 동계장비가 필수적인데, 방한 물품의 보급은 잘 진행되고 있소?”
“물론입니다, 총통 각하. 이미 최전방 부대들은 모두 동복을 지급했습니다. 오히려 동복은 그만 보내주고 탄약과 연료를 더 달라는 요청이 쇄도할 정도라고 합니다.”
“대신 동맹국 군대들의 보급은 다소 지체되고 있어 아군에게 도움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그 부분은 잘 의논해서 합의점을 찾아보게. 당장은 우리 국방군과 SS에 보급하는 게 최우선이니.”
“그리고 자유 러시아군의 동부전선 투입 문제 말입니다.”
블라소프는 러시아의 해방이 러시아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만큼 자신이 지휘하는 자유 러시아군의 동부전선 투입을 지속적으로 요청해왔고, 특히 곧 있을 모스크바 전투에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이러한 블라소프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사흘 전부터 자유 러시아군의 동부전선 이송이 시작되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소련군에 도로 투항하는 머저리는 없지 않을까 싶을뿐더러 러시아인들이니만큼 겨울에 아군보다 더 적응을 잘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트기 위해 싸운다.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