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18)
앞으로도 계속
* * *
일행은 갖은 고생 끝에 설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깊은 새벽이었다.
“으잉? 뭐여. 살아 있었슈?”
자다 깬 촌장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는 하켄 뒤에 서 있는 면면을 살핀 뒤,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평범한 용병단인 줄 알았는데. 구성원이 살벌하구만.”
데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식사를 준비해주시오. 돼지나 소를 한 마리 잡아주면 좋겠소. 술도 필요하고, 씻을 수 있게 따뜻한 물도 챙겨주시오.”
촌장은 데일을 보며 움찔했다.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려 왔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에 겁먹어서는 카드라스에 터를 두고 살 수 없는 법이다.
“흠흠. 이 늦은 시각에 갑자기 돼지를 잡으라니. 마을 사람들을 다 깨우라는 거슈? 먹다 남은 수프를 줄 테니 그거나 먹으슈.”
데일은 자루를 하나 내밀었다.
촌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요. 돈? 허참. 동화 몇 개 준다고 내가 이 밤중에 고생을…….”
촌장은 주머니를 열었고, 그 안에 반짝이는 동전들을 확인했다.
촌장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돼지를 두 마리 잡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여보! 당신은 물 데워줘!”
그렇게 말한 촌장이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켄이 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저 노인네, 또박또박 말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하지만 그런 사소한 데에 신경 쓰기에는 일행은 너무 지쳐 있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부족한 마법사들은 바닥에 허물어졌고, 하켄이나 프라우처럼 단련된 전사들도 피로한 얼굴로 벽에 몸을 기댔다.
“따뜻한 물. 준비됐어요.”
“저랑 엘레나부터 씻을게요.”
에스델은 엘레나를 데리고 촌장의 부인을 따라갔다.
하루종일 익숙지 않은 갑옷을 입느라 잔뜩 땀이 나서, 당장 씻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데일은 무기를 바닥에 늘어뜨린 뒤, 헝겊을 꺼내 세심히 닦아주었다.
무기란 의외로 섬세한 도구다.
잘 관리해주지 않으면 중요한 순간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음! 언제나 무기부터 신경 쓰는 모습! 그야말로 전사의 귀감이군.”
작게 감탄한 프라우는 데일과 똑같이 무기를 꺼내, 잘 다듬어주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카락. 이번에는 자네를 사용하지 못해서 미안하네. 분명 다음에 활약할 기회가 있겠지. 아드마일. 언제나 그랬듯 훌륭했네. 파수꾼의 목을 꿰뚫었을 때는 매우 통쾌했다네. 뭐? 모두 내 검술 덕분이었다고? 하하! 이 친구. 아부는.”
조용히 검을 닦던 데일이 한마디했다.
“무기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대화는 안 하면 안 되나?”
“무슨 소리! 검의 마음을 듣는 건 훌륭한 전사의 덕목일세!”
“내 마검이 지금 네 머리를 쪼개고 싶다고 말하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하하! 농담도 참.”
그런 둘을 안드레이와 한스가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시오.”
“아니. 그런 시시껄렁한 대화를 듣다 보니,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모두 꿈처럼 느껴져서요. 사실 우리. 대단한 모험을 한 셈 아닌가요?”
멸망한 왕국의 보물고. 치명적인 함정들. 보물고를 수백 년간 수호자와 파수꾼.
그리고 아슬아슬한 탈출까지.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멋진 모험이었다고 추켜세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작 그 모험을 겪은 당사자들은 영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수백 년간 보물고에 갇혀 분노를 키워온 파수꾼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성기사의 난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성기사가 대체 왜 이곳에…… 그보다 그분들은 다 죽은 거겠죠?”
하켄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신앙심이 강하지 않은 그였지만, 교단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성기사와 그 병사들의 죽음은 꽤나 씁쓸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마젤이 끼어있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 마젤이 엘레나에게 다짜고짜 화살을 퍼부었던 것도.
“아무리 몸을 빼앗겼다고 해도…….”
“그건 이미 마젤이 아니다. 그 시점에서 마젤은 이미 죽었던 거다.”
“마젤은 왜 저희를 쫓아 이곳까지 왔을까요?”
“글쎄. 아마 쫓는 게 우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데일은 마젤이라는 사내에 대해 생각했다.
늘 침착하고, 관찰력이 뛰어나며, 놀랍도록 냉정한 사내였다.
데일과는 다른 의미로 차가운 성정을 지녔다.
그런 마젤이 상대가 데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추격했을까?
‘글쎄.’
의뢰를 고르는 것도 용병의 능력이고, 마젤은 뛰어난 용병이었다. 아마 자발적으로 온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데일의 주의를 끈 건 다른 부분이었다.
‘추격이 너무 빨랐어.’
마젤이 아무리 뛰어난 사냥꾼이라 해도, 누군가를 추격하는 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데일도 한때 추격 의뢰를 수행해봤기에 잘 안다.
‘만약 에스델이 수행을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우연히 발각되었고. 그때 부랴부랴 추격을 개시한 거라면, 시간이 더 걸렸어야 해.’
하지만 성기사는 곧바로 추격해왔다.
무슨 짓을 할지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마냥.
‘에스델에게 생각보다 많은 감시가 붙어 있었던 건가? 아니면…… 중간에 정보가 샜다?’
불현 듯 데일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인자하게 웃던 늙은 사제다.
오르단.
데일은 구체적으로 어디로 떠난다는 말은 안 했지만, 마젤 같은 사냥꾼을 이용하면 추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비약인가.’
물론. 근거는 없다. 그저 처음부터 오르단이 꺼림칙했기에 생긴 의심일지도 모른다.
데일은 사고를 계속 이어나갔다.
‘오르단이 정보를 흘려서 얻는 이득.’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오르단 역시 데일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가능성이다.
적당히 정보만 흘려도 교단 내의 광신도들이 알아서 분개해 데일을 처리하려 달려올 것이기에. 손쉽게 처리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다만 의문이 남기는 하다.
‘좀 더 세련된 방식을 쓸 수도 있지 않나?’
에스델과 데일은 이제 동료. 혹은 친우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사이다.
그런 데일을 에스델이 보는 앞에서 죽여버리면, 에스델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못해도 교단에 좋은 감정을 가지지는 않을 것 같다.
‘아니면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아닌 성기사를 제거한다?’
강력한 실력을 지닌 데일에게 성기사를 보내, 그를 죽음으로 모는 것도 하나의 가능성이다.
실제로 이번에 성기사와 그가 이끄는 병사 10여 명이 저 지하 깊은 곳에 잠들었으니, 교단으로서는 뼈아픈 손실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별로 교단에는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생각을 이어나가던 데일은 문득. 얼마 전 여신이 해주었던 말이 기억났다.
‘배신자를 조심하라.’
배신자. 그 명망 있고, 인자함을 그대로 그려낸 듯한 사제가 배신자라고?
선뜻 믿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딱히 근거랄 것도 없었고.
하지만 데일은 일단 마음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나중에 좀 더 의심스러운 정황이 보이면, 그때 생각해도 된다.
그때에 맞춰 촌장과 부인이 음식을 들고 왔다.
잘 잘라서 구운 돼지고기와 생치즈. 채소를 식초에 절인 반찬 따위였다.
투박하지만 든든함만큼은 보장된 식사.
몸을 씻으러 나갔던 엘레나와 에스델도 돌아왔다.
온종일 고생했던 터라 허기가 졌던 일행은 이내 고기를 열심히 뜯어먹었다.
술잔이 연거푸 돌면서 다들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직 어려서 술을 먹지 못하는 엘레나만이 부루퉁하게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경. 저도 한 잔만 마시면 안 돼요?”
“안 돼.”
데일은 이 부분에서는 절대 양보해줄 생각이 없었다.
시무룩해진 엘레나는 우유만 홀짝였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보물고에 대한 얘기로 흘렀다.
“자자. 이제 각자 뭘 받았는지 말해보자고! 일단 나부터.”
하켄은 손에 장갑을 들고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손등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에스델이 감탄하며 물었다.
“와아. 멋있네요. 유물 장갑인가요?”
“응! 굳게 마음을 먹으면, 손에 전해지는 충격을 흘려보낼 수 있는 장갑이라는데?”
“…….”
일행은 모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켄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하켄. 그건…….”
“사기꾼들이 물건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때 자주 사용하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강한 신념을 가지면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이 있다고 쳐봐. 만약 그 검이 방패에 허무하게 가로막히면? 그때는, 아. 안타깝게도 당신의 신념이 부족했군요. 이런 식으로 되돌려주는 거야.”
안드레이의 설명에 하켄이 눈을 부릅떴다.
“……그럼 나 사기당한 거야? 그래도 명색이 바이만의 보물고인데?”
엘레나가 발끈했다.
“그래요! 왕국의 보물고인데, 사기라뇨. 다만. 하켄과 굳은 마음은 별 관계가 없으니, 사용하기 힘들 거라는 데에는 동의해요.”
확실히.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하켄에게는 조금 과분한 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다음은 에스델의 차례였다.
“저는 이거예요.”
“검?”
에스델의 손에 들린 건, 고풍스러운 검집에 쌓인 한 손 검이었다.
사제로서 호신술을 교육받은 에스델은 검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지만, 에스델에게 꼭 필요하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미묘한 구석이 있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이 검. 검집에서 안 뽑혀요.”
“뭐?”
“꼭 뽑아야 할 때면 뽑힐 거라는데요.”
“뽑아야 할 때가 언제인데?”
“그건 저도 잘…….”
연달아 미묘한 물건이 나오자, 분위기가 빠르게 식었다.
괜스레 미안함을 느낀 엘레나만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뒤로도 일행은 각자 자기가 무얼 받았는지 얘기했다.
한스는 부유 마법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엘레나도 바이만 왕가의 마법 지식을 머릿속에 담아 나왔다.
안드레이는 천체 모형을 받았다.
밤하늘의 별자리에 따라 저절로 움직이는 마도구인데, 새로 마도구에 대해 연구할 게 생겼다고 안드레이는 기뻐했다.
프라우는 바람 정령이 깃든 부츠를. 마지막으로 데일은 망토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끝마쳤다.
“뭐. 그래도 소득이 나쁘지 않아.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보물고의 수호자가 호언장담했잖아? 지금은 조금 실망스럽더라도 나중에 도움이 되겠거니, 하고 생각해야지 뭐 어쩌겠어.”
안드레이의 위로에 하켄과 에스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일행은 양껏 먹고 마신 뒤, 테이블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모포를 깔고 드러누웠다.
배가 부르니 피로가 더 확 와닿아, 잠이 쏟아진 것이다.
일행은 서로 뒤엉켜 잠자리에 들었다.
데일은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뒤, 홀로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겨울 새벽. 자그마한 마을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데일은 품에서 용병 패를 꺼냈다.
구리로 만든 얇은 판에는 ‘마젤’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데일은 마젤이라는 사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언제나 냉철하다는 것과 똑부러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밖에 모른다.
마젤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이제 영영 알 길이 없게 되었다.
마젤은 파수꾼과 싸우며 마지막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별 생각 안 했을지도.’
죽음이 흔한 세계다. 그리고 용병이란 족속은 늘 죽음과 함께 걸어가는 이들이다.
아무리 실력자라도 운이 나쁘면 죽는다. 불운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일 뿐이라고, 마젤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데일은 얼어붙은 바닥을 건틀릿으로 파낸 뒤, 그 안에 마젤의 용병패를 떨어트렸다.
용병 길드에 전해줄까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이번 여정에서 그들은 성기사와 마젤을 만나지 않은 셈 치기로 했다.
그편이 여러모로 깔끔할 것이다.
‘일행에게도 그렇게 말해둬야겠군.’
데일은 파놓은 흙으로 다시 구덩이를 덮은 뒤, 둥그렇게 만들었다.
이 초라한 흔적이 마젤의 묘였다.
그때. 에스델이 문을 열고 나왔다.
“데일 경. 뭐 하세요?”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다. 잠에 든 거 아니었나?”
“프라우 경이랑 하켄이 너무 코를 심하게 골아서요…….”
에스델은 이를 으득 갈았다. 어지간히 짜증이 난 모양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에스델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텐데. 이것도 긍정적인 변화라고 봐야 할까?
에스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감탄을 흘렸다.
“와아.”
검은 도화지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빛과 어둠의 조화.
그 압도적인 광경에 둘은 입을 다물고, 한동안 말없이 감상했다.
같은 하늘을 보지만 느끼는 바는 다를 거다.
에스델은 아마 신에 대한 경외를 새삼 느끼지 않을까.
데일은…….
고향과. 그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떠올렸다.
짙은 매연이 가득한 도시의 밤하늘에는 별 하나 보기 어려웠다. 이런 풍경은 때때로 데일에게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는 이 세상의 이방인이라는 것.
혼자서만 주위에 동화되지 못하고 붕 떠오르는 감각.
그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이질감.
궁상떠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일에게도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아니. 이런 것도 아직 그가 사람이라는 증거이니 기뻐해야 하는 걸까?
둘은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에스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앞으로도 계속 이랬으면 좋겠어요.”
무슨 뜻일까. 성녀 후보로서의 중압감을 벗어던지고 이렇게 일행과 함께 모험하는 나날들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말하는 걸까?
세찬 바람에 에스델의 볼이 빨갛다.
데일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일행을 추격해온 성기사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았다. 에스델 나름대로 고심하고 있을 테니.
대신 데일은 말했다.
“날이 춥다. 들어가라.”
“……예. 데일 경도 늦지 않게 들어오세요.”
포근하게 웃은 에스델은 안으로 들어갔다.
데일은 홀로 앉아 멍하니 별을 바라보았다.
그날. 데일은 꿈을 꿨다.
꿈에서는 언제나처럼 조부와 보육원의 아이들이 나왔다. 즐거웠던 기억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기억의 마지막에. 지금껏 데일이 죽여서 그 생기를 흡수해온 이들이 나타났다.
용병, 도적, 죽어 마땅한 쓰레기들. 적어도 무고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데일을 둘러싸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원망도. 저주의 말도 없이 차가운 눈만 빛낼 뿐이었다.
‘또 시작이군.’
데일은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을 다시 한번 죽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