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53)
늪
* * *
데일은 펜던트를 쥐어보았다.
밤의 신성이 느껴졌다.
성물. 그것도 그저 그런 하급 성물이 아니라, 강력한 힘이 깃든 녀석이었다.
‘이런 곳에 성물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늪지대에 버려진 사원. 그 아래에 이런 물건이 파묻혀 있을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성물에서 풍기는 기운에 리자드맨과 라그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가장 크게 반응한 건 리치 무르하탈이었다.
“신이시여. 맙소사. 저는 백 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이런 강력한 성물은 살면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정도인가?”
“예. 틀림없습니다.”
“혹시 무슨 효과인 줄도 짐작이 가나?”
“그것까지는 저도 잘…….”
데일은 무르하탈에게서 시선을 떼고 초승달 모양의 펜던트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펜던드에서 뿜어지는 창백한 빛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데일의 의식이 문득. 펜던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다.
온 세상을 덮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초승달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
데일의 의식이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는 손에 쥔 펜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이 성물은 자신이 지닌 힘을 데일에게 알려준 것이다.
‘확실히. 대단한 물건이긴 하군.’
성물의 이름은 ‘밤의 펜던트’.
이 펜던트의 힘을 사용하면…… 한낮에도 밤을 불러낼 수 있다.
* * *
새옹지마라 했던가.
데일은 몇 가지 유용한 무기들을 잃었지만, 그보다 훨씬 강력한 성물을 손에 넣었다.
그는 밤의 펜던트를 목에 걸어 갑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것으로 이 사원에서 볼 일은 끝이 났다.
데일은 망토를 휘날리며 사원을 벗어났다.
그 뒤를 리자드맨 무리와 라그나.
리치 무르하탈과 그 휘하 언데들이 뒤따랐다.
무르하탈은 총명한 자였다.
데일이 좋든 싫든, 앞으로 한동안은 데일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앙상한 손을 비비며 물었다.
“주인님. 이제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역시 이 늪의 지배자가 되실 생각이겠지요? 아니면 인간들의 도시를 정복하는 것도 좋겠지요. 이 무르하탈이 지혜를 짜내보겠습니다. 이래 봬도 전쟁에 여러 번 종군해봤습니다. 참모나 책사로서 주인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이제 무르하탈은 이 흑기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다른 흑기사처럼 언데드의 본능에 잡아먹혀 멍청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잘 알았고.
‘게다가 여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정도면, 필시 대단한 자일 것이다.’
교단으로 치면 최고 성기사쯤 되지 않을까?
그런 데일에게 맞서는 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란 행위다.
무르하탈은 차라리 데일의 눈에 들기로 결심했다.
‘이런 흑기사가 꾸미려는 일은 분명 범상치 않을 것이다. 빛의 교단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제국을 무너트리라는 명령을 받았을까? 아니면 밤의 신도만을 위한 국가를 건설하라는 사명이 있을지도. 어느 쪽이든 미리 점수를 따놓으면 좋겠지.’
미리 좋게 보여놔야 훗날 데일이 성공했을 때 자신이 이인자로서 떵떵거릴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저 도마뱀 새끼들이 내 선배라고? 그럴 수는 없지!’
그토록 무시하던 리자드맨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무르하탈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데일의 신뢰를 사, 이 무리에서 서열을 높일 생각이었다.
그런 무르하탈의 불타는 안광에 리자드맨들은 불만스레 혀를 쉭쉭 내밀었다.
리자드맨들도 검님(마검)께 선택받은 이 강력한 부족장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무르하탈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해버렸다.
리자드맨들은 무르하탈을 보며, 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기습해서 죽여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뼈다귀 마법사와 이족보행 도마뱀이 서로를 향해 경쟁심을 불태우는 사이.
데일은 무르하탈의 질문에 답했다.
“어떡할까라…… 일단 늪지대를 벗어나야겠지.”
무르하탈이 곧장 굽신거리며 아부를 떨었다.
“과연. 주인님 같은 위대하신 분을 담기에, 이 늪지대는 너무나 작은 그릇이지요. 역시 제국을 무너트릴 생각이십니까?”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제국은 이미 멸망했다.”
“……예?”
“악마에게 이레네를 내주었고, 황제는 성을 하늘로 띄워서 도망쳤다.”
“허.”
믿기 어려운 얘기에 무르하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악마들이 위험한 존재라는 건 그도 알았다. 수십 년 전에는 전장에도 섰고, 그 두려움을 똑똑히 목도했다.
그 정도의 사령술사가 이런 늪지대에 은거한 건, 그런 두려운 존재와 마주치고 싶지 않겠다는 공포도 한몫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국이 멸망했다고?’
얘기하는 게 데일이 아니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저주를 먹여주었을 것이다.
“너도 느꼈을 것 아닌가. 여신의 힘이 약해졌다는 걸.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말이야.”
“……여신께서는 원래 대부분의 신도에게는 말을 걸어주시지 않으십니다.”
“어쨌든 일단 늪을 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데일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우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얻고. 동료들의 소식을 들은 다음, 데일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 과정을 간단하게 압축하면.
“악마를 죽여야지.”
“……예? 뭐, 뭐를 죽인다고요?”
“제대로 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라.”
데일은 무르하탈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악마를 죽인다. 너도 동참해야 하고.”
“어. 으.”
“잘 부탁한다. 앞으로 머리도 열심히 굴려주고. 책사, 무르하탈.”
악마를 죽이러 간다니! 제정신인가? 목숨이 두렵지 않은가?
속으로 절규를 내지르는 무르하탈이었지만, 입 밖에 흘러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질 때까지, 이 무르하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멀리 있는 악마보다는 가까이 있는 데일이 더 위협적이었다.
* * *
일행은 다시 북쪽으로 걸었다.
이틀간의 이어진 행군 속에서 딱히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불길한 사령술사와 리자드맨 무리. 그리고 흑기사와 엘프가 함께하는 이 무리를 습격할 간 큰 적은 없었다.
해가 졌을 때.
일행은 늪의 외곽에 도착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 나가면 드디어 단단한 땅이 있는 평야였다.
지긋지긋한 늪도 이제 끝이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다시 이동하겠다.”
“예, 주인님. 언데드를 부려 주위를 경계하겠습니다.”
“카룸.”
리자드맨과 무르하탈이 떠나갔고.
라그나와 둘만 남게 되었다.
라그나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 위에 요령 좋게 몸을 뉘었다.
그러고는 나무 사이로 드러나는 밤하늘의 한 자락에 총총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이 늪지대를 벗어난다.
어쩌면 헤어짐이 다가왔을 수도.
그래서 그런지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가 흘렀다.
그런 분위기를 깬 건 라그나였다.
“나는 이 늪이 좋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데일은 엘프들의 충동적인 성격에 익숙했다.
“이런 끈적한 곳을 좋아하다니. 취향도 별나군.”
“헤헤. 고맙다.”
“칭찬 아니다.”
배시시 웃은 라그나가 말했다.
“난 이 늪이 좋다. 새들이 지저귀는 것도 좋고, 벌레가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것도. 생명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다. 평생 이곳에서 살다가, 언젠가 이곳에 묻혀 죽고 싶다. 내 시체를 벌레와 동물들이 물어뜯어 먹어주면 좋겠다. 그 벌레와 동물을 또 다른 동물들이 잡아먹고, 그렇게 영원히 이 늪의 일부가 되고 싶다.”
데일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누가 보면 늪이 고향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꼭 태어난 곳만 고향이란 법은 없지 않나. 이곳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데일을 향해 라그나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데일. 이곳에서 나랑 함께 살자.”
프러포즈…… 는 아니다.
만약 라그나가 데일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면, 좀 더 저돌적으로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그게 엘프들의 방식이다.
라그나는 그저 동료를 원했다.
그리고 데일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싫어.”
단호한 대답에 라그나가 물었다.
“데일은 내가 싫나? 아니. 데일은 처음부터 나를 마음에 안 들어했었지. 혹시 데일은 엘프가 싫은 게 아닌가?”
“…….”
라그나는 엘프답게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파고 들어왔다.
그 눈동자에는 대답을 반드시 듣겠다는 열망이 빛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대충 무시하려든 데일도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하이엘프랑 이렇게 길게 대화한 게 얼마 만이더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데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항상 속에 품고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해본 적 없는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설산에서 방치되어 있었다. 그때 처음 나를 발견해 준 게 하이엘프 부족이었지. 좀 나사가 빠지긴 했어도,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언어를 가르쳐주고, 싸우는 법이랑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줬지.”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데일은 미숙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흑기사의 몸에 빙의했다고 해도 갑작스럽게 사람들을 숭숭 썰어버리는 인간 백정이 될 수는 없었다.
반년간 싸우는 법을 배웠다.
검을 쥐는 법부터 무기를 투척하는 것까지.
전사로서 필요한 모든 걸 전수해주었다.
그 당시 데일은…… 솔직히 그런 생활이 즐거웠다.
조부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이런 새로운 생활은 기이한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과거 같은 건 잊고. 설산에서의 생활을 진심으로 즐기게 되었다.
하이엘프들은 데일에게 또 다른 가족과 다름없었다. 그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었다.
게다가 데일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싸움의 재능이.
데일은 엘프들의 기술을 빠르게 흡수했다. 그는 금방 뛰어난 사냥꾼이자 전사가 되었다.
온 종족이 뛰어난 전사들인 하이엘프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익숙해지지 못하는 단 한 가지가 있었다.
“하이엘프들은 부족끼리 싸움이 빈번하더군. 나도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근데…….”
“근데?”
“적을 벨 수 없었다.”
그때의 데일은 지금보다 인간적이었다.
신념도 훨씬 강했다.
조부가 남긴 조언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런 데일에게 같은 사람을 베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반 언데드의 몸은 그런 부분에 전혀 거리낄 게 없었지만…… 데일의 이성이 허락하지 않았다.
데일은 사람을 죽이지 못했고, 생기를 흡수하지도 않았다.
사람의 시체에서 생기와 잔혼을 흡수하라니.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데일은 언데드의 본능이 발하는 갈증과 살의를 참아내며, 스스로의 도덕을 지키려 했다.
“적 하이엘프를 넘어트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차마 그 목까지 벨 수는 없었다. 나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말했지.”
“하지만 항복하지 않았겠군.”
하이엘프는 죽으면 죽었지만, 비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놈은 곧장 일어나 나를 공격했다. 내가 자기를 죽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거지. 그때 내 동료가 끼어들었고, 놈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그 역시 크게 다쳤고.”
“그렇군.”
그때부터였을 거다.
동료였던 하이엘프들의 반응이 냉담해진걸.
그날 이후 하이엘프들은 데일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거리를 두었다.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한참 상의하더니 데일에게 통보했다.
“나를 추방하겠다더군. 하루 안에 떠나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가족이라 생각했었던 이들의 배신. 하지만 데일은 그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구태여 설산을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자신이 더 잘하면 마음을 돌려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프들은 한번 뱉은 말을 꺾는 법이 없다.
하루가 지났고. 그들은 데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살기가 깃든 제대로 된 일격이었다.
데일은 이 세상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래도 갑옷으로 화살을 막아가면서 도망치니까 어찌어찌 살아지더군.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나를 계속 추격하면서 정령이랑 활로 죽이려 하더군. 마지막에는 직접 칼로 맞부딪혀 왔고 말이다.”
끝도 없는 침엽수림과 바닥에 무릎까지 오는 새하얀 눈.
거리를 두고 공격해오는 전투의 달인들.
데일에게는 가장 힘겨운 전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데일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나에게 유독 친절하던 엘프였지. 놈이 도끼를 들고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때 난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였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 녀석을 찌르고, 생기를 취하고 있더군.”
“……그렇군.”
그렇게 데일은 전사가 되었다.
“엘프를 싫어하냐 물었나? 글쎄.”
데일은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저 마주하는 게 두려웠을 뿐.
‘또다시 배신당할까봐 두려웠던 거지.’
똑같은 아픔을 겪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친해지기 전에 밀어내었다.
라그나도 그런 감정을 눈치챈 듯하다.
가끔 멍청하게 행동해도, 이 하이엘프는 놀랄 만큼 날카로웠으니.
시종일관 진지하게 듣던 라그나가 물었다.
“데일 이라는 이름도 그들이 지어준 것인가?”
“아니. 왠지 모르지만 내가 가까스로 설산을 벗어나려 할 때 일제히 그 단어를 외쳐대더군. 뭐. 내가 모르는 욕설 정도 되지 않겠나? 마음에 들어서 그냥 이름으로 쓰고 있었다.”
“흐음.”
라그나가 중얼거렸다.
“두려움이라는 녀석은 전사가 꺾어야 할 필생의 적이다. 무시무시한 적이지. 하지만. 조금만 달리 바라보면, 그 강력해 보이던 적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갑자기 뭔 소리지?”
“데일이라는 단어는 고대 엘프어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단어지. 무슨 뜻인지 아나?”
“뭔데.”
라그나가 힘을 주어 또박또박 외쳤다.
“위대한 전사!”
* * *
둘은 그 뒤로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데일이 침묵을 깬 건 한참 후였다.
“앞으로 강적들과 싸울 생각이다. 악마는 끔찍한 괴물들이지. 뛰어난 전사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데일이 라그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함께하겠나?”
지금껏 라그나가 했던 것과 정반대의 제안.
라그나는 데일과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입이 열리고 흘러나온 말은, 데일의 제안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라그나가 순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자라, 데일!”
“……그래. 너도 잘 자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늪을 사랑하던 하이엘프는 없었다.
데일은 라그나가 사라진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새 부하들에게 말했다.
“가자.”
“예, 주인님.”
“카룸.”
과거에 잠겨 있을 시간은 끝이다.
이제 늪을 벗어나 세상으로 돌아올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