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70)
하켄
* * *
“하켄! 하켄! 하켄!”
“인류의 영웅께 영광있으라!”
라만티스와의 결전이 머지않은 지금.
도시를 울리는 환호성은 도저히 끊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승리를 거두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에 하켄은 집무실에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끄으…… 거절했어야지 이 병신아!”
저 라만티스라는 악마 놈은 무려 1대1 결투를 선호한단다.
그 악마에게서 결투 신청이 날아왔을 때, 당연히 하켄은 거절하려 했다.
괜히 혼자 나섰다가 개죽음당할 일이 있겠는가?
문제는 주위 반응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하켄이 결투에 나갈 거라 단정을 짓고, 대뜸 하켄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결투를 받아들인다는 서신도 제멋대로 작성해버렸다.
하켄은 그런 분위기에 ‘있잖아 나. 무서워서 결투하기 좀 그런데?’ 라고 말할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병신! 병신! 병신! 이 병신!”
하켄은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힘껏 두드렸다.
남들이 늑대왕이다 뭐다 띄워줄 때 진작 그만뒀어야 했다.
자기 실력을 벗어난 허세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하티는 그런 하켄을 한심하게 쳐다보다, 아가리를 쩍 벌리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얌마. 너는 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어?”
하티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귀찮으니 말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시무룩해진 하켄은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아. 죽기 싫다.”
멍하니 중얼거리던 하켄은 자리에서 번뜩 일어났다.
“그래.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죽을 수야 없지. 일단…… 튀자.”
하켄이 도주를 결심한 그때.
똑똑.
바깥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하켄의 등골이 쭈뼛 섰다.
그는 급하게 목을 가다듬은 뒤, 억지로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누구지?”
“하켄. 나예요. 카일라.”
“아…… 들어와.”
안도한 하켄이 허락하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카일라가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느끼한 목소리는 어떻게 안 돼요? 들을 때마다 구역질 날 거 같아요.”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제대로 먹힌다고.”
카일라는 하켄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연한 일이다.
하켄의 온갖 추한 일면을 다 아는 그녀이니만큼 늑대왕이니 뭐니 하는 칭호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도 잘 알았다.
“배고플 것 같아서 샌드위치 좀 싸 왔어요. 맥주도요.”
“고마워. 설마 네가 만든 맥주는 아니지?”
“무슨 뜻이죠?”
카일라가 도끼눈을 뜨자 깨갱한 하켄이 ‘아무것도 아니야. 주는 대로 먹을게.’라며 중얼거렸다.
하켄은 넋이 나간 얼굴로 샌드위치를 와작와작 깨물었다.
카일라는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다, 물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다들 이미 하켄이 악마랑 결투할 거라며 들떠 있어요. 거의 축제나 다름없던데요?”
“윽. 그 정도야?”
“다들 힘든 시기잖아요. 거짓된 명성이라도, 하켄은 저들의 희망이니까요.”
어쩌면 하켄이 지금까지 들키지 않고 영웅으로서 칭송을 받은 건. 단순히 그가 거짓말을 잘했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힘든 시기에 사람들은 기댈 곳이 필요하다.
그때 마침 나타난 게 하켄이고, 사람들은 의심하기보다는 믿는 걸 택했다.
사람은 믿는 대로 보는 법이니.
“……사실 도망칠 생각이었어.”
“하켄답네요.”
“그야 당연하잖아. 악마랑 결투하라니. 나는 데일 경이 아니라고.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어.”
“안 걸리고 도망칠 수는 있어요?”
하켄은 말이 궁했다.
확실히. 도시에는 기사와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고, 도시 바깥에는 악마의 군세가 있다.
도망치기도 어려울뿐더러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힘들겠지.”
“거봐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결투를 포기하고 계속 수성에 임하겠다고 하는 게 어때요?”
“그럼 사람들이 전부 실망할 거야.”
“애초에 멋대로 기대한 사람들인데, 실망시키는 게 어때서 그래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면 나를 잡아다 산 채로 불태워 버릴 거야.”
“……그건 가능성 있네요.”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해가 져가고. 점점 그림자에 뒤덮여가는 세상 속에서 하켄과 카일라의 얼굴도 그림자에 파묻혔다.
한참 고민하던 하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결투에는 나가야겠어. 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왜요?”
하켄이 고개를 저었어.
“모르겠어. 살면서 이렇게 누군가한테 기대를 받아본 것도 처음이라 그런가?”
“싸우러 간다는 거예요?”
“적어도 도망은 쳐서는 안 돼.”
“늪지 마을 주민분들이 슬퍼할 거예요. 특히 퀼이라 했던가요? 그 친우분의 가족들은 더더욱이요.”
“그래도 싸워야 해. 차라리 싸우다 죽는다면, 영웅의 장렬한 죽음이라며 사람들이 단결할 수 있을 거야.”
카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하켄답지 않아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다리 엄청 떨고 계시잖아요.”
그녀의 말마따나, 하켄의 다리는 위태로울 정도로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만 좀 정신없이 굴라고 하티가 눈치까지 줄 정도다.
카일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한테까지 허세를 부릴 필요는 없어요.”
“허세 아니야. 정말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요 대체.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딨다고.”
“데일 경처럼 되고 싶어.”
카일라는 말을 멈췄다. 무관심하던 하티도 고개를 들어 하켄을 쳐다보았다.
“난 데일 경을 옆에서 계속 지켜봤잖아. 데일 경이라면 절대 여기서 도망치지 않았을 거야.”
“데일 경은 강하잖아요.”
“아니야. 경이 항상 이기는 싸움만 했던 건 아니야. 아무리 위험하고 패배가 뻔한 싸움이라도, 싸워야 한다면 물러서지 않았어. 그리고 이겨냈지.”
하켄은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데일과 수많은 모험을 이뤄내며, 승리를 이루어내던 영광의 나날들을.
하켄의 생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데일과의 모험은 이 보잘것없던 용병의 마음도 바꿔놓았다.
하켄은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내가 한심한 사람인 건 알아.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데일 경처럼 되고 싶어.”
“하켄…….”
“그냥 죽으러 가는 건 당연히 아니야. 나한테도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하켄은 품을 뒤져 장갑을 하나 꺼냈다.
새빨간 보석이 손등에 박힌,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갑이다.
“그건?”
“바이만의 보물고에서 얻은 물건이야. 마음을 굳게 먹으면 어떤 충격도 흘릴 수 있다는 전설의 장갑이지.”
슬쩍 눈치를 본 카일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기 아니에요 그거? 마음을 굳게 먹으라니. 너무 두루뭉술하잖아요.”
“어허! 사기 아니야!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생김새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결국. 하켄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도망칠 수 없다면 싸울 수밖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
결투 당일이 되었다.
하켄은 사람들의 앞으로 나섰다.
빨간 망토와 황금 투구. 비싼 갑옷을 걸친 하켄의 모습은 뭐랄까. 천박한 졸부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사람들에게는 그마저도 위대한 영웅의 면모로 보였다.
“하켄! 하켄!”
“꼭 이겨줘요!”
“늑대왕이시여! 우리를 구해주세요!”
사람들이 칭송했다.
그들은 하켄의 모습에서 희망을. 그리고 승리를 보았다.
정작 하켄의 뒷덜미에는 식은땀이 잔뜩 맺혀 있었지만.
“괜찮아요? 아니. 딱 봐도 안 괜찮아 보이네.”
“응.”
카일라의 말에 하켄이 짧게 답했다.
길게 얘기해봤자 두려움에 말만 더듬을 것 같았다.
“후회되죠?”
“……응.”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세요. 늪지 마을 주민들한테 얘기 들었어요. 소꿉친구가 죽은 걸 숨기고 몇 년이나 혼자 끙끙댔다면서요. 하켄은 그게 문제에요. 평소에는 눈치 없이 할 말 못 할 말 다 하면서, 꼭 중요한 말은 숨겨서 혼자 고생하잖아요.”
“……반박하기 힘드네.”
핀잔을 준 카일라는 하켄에게 권유했다.
“자. 하켄은 할 만큼 했어요. 괜히 가서 개죽음당하지 말고, 다 사실대로 말하세요. 설마 진짜로 불태워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리고 데일 경이 돌아왔을 때 하켄이 없으면 어떡해요. 데일 경이 슬퍼할 거예요.”
“그, 그치? 내가 죽으면 슬퍼하시겠지?”
“……아마도요?”
카일라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그래도 싸우기도 전에 도망칠 수는 없어. 그리고 나한테는 이 장갑도 있으니까.”
“후우. 아니다 싶으면 바로 물러나세요. 알겠죠? 약속이에요?”
“응…….”
고개를 끄덕인 하켄이 하티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가줄 거지?”
하티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혼자 가라는 뜻이었다.
“이, 이 의리 없는 늑대 새끼!”
“사령관님. 놈이 왔습니다. 약속 시간입니다.”
“그래. 나도 안다.”
부관이 오자 하켄은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라만티스가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라만티스는 양 진영의 정확히 가운데에 있는 빈 공터에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악마의 모습도 선명히 보였다.
2미터가 넘는 체구에 두 개의 머리. 네 쌍의 눈.
네 개의 팔.
돌처럼 보일 정도로 다부진 근육.
그 자체로도 이미 위압적인 생김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놈이 지니고 있는 ‘장신구’다.
라만티스는 온몸에 금색 줄을 칭칭 감고 있었는데, 그 금색 줄에는 눈, 귀, 코, 손가락 따위의 신체 부위가 빼곡히 꿰뚫려 있었다.
라만티스가 지금껏 이겨온 상대의 신체 일부분이었다.
“엄마야.”
그 끔찍한 광경에 하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껏 샘솟았던 용기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하켄은 꿋꿋이 걸어가 라만티스의 앞에 섰다.
라만티스의 두 머리가 동시에 물었다.
“네가 하켄인가? 늑대왕 하켄?”
“……그래.”
라만티스의 두 머리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흐음? 소문으로 듣던 거랑은 조금 다른데? 이 녀석이 우리 공세를 수차례나 저지해온 그 괴물이라고? 느껴지는 힘이 너무 적은데.”
“방심하지 마라. 방심하는 건 네 안 좋은 단점이다. 완벽히 힘을 숨긴 강자일 확률이 높다.”
“흐음. 하긴. 아니었다면 그런 명성을 얻지도 못했을 테니.”
라만티스가 전투 자세를 잡았다.
네 개의 팔에는 어느새 무기가 들려 있었다.
겉면에 날이 바짝 서 있는 둥그런 무기. 차크람이다.
“하켄. 강자에 대한 예우로, 네놈은 특별히 눈알을 뽑아내 심장 부분을 장식해주마.”
“……그거 눈물 나게 고맙네.”
“그럼 가겠다. 우리는 라만티스. 강자를 사랑하고 영원한 투쟁을 이어가는 자. 네놈의 목숨을 취하겠다!”
퉁!
라만티스가 땅을 박차자, 그 몸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더니 하켄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평범한 이라면 반응조차 못 할 움직임.
하지만 하켄은 데일과 함께하며 숱한 강자들의 싸움을 봐왔고, 그 자신의 실력도 크게 늘었다.
하켄은 타워 실드를 들어 올렸다.
쾅쾅쾅쾅!
네 개의 팔이 지닌 차크람이 연속해서 방패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엄청난 충격이 손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하켄의 몸이 계속해 뒤로 밀려났다.
‘생각보다 더 엄청나잖아! 이런 괴물을 데일 경은 어떻게 상대하고 있던 거야!’
공세에 나섰던 라만티스는 의아했다.
“왜 그러지 하켄?”
“실력을 숨기고 있군. 어서 네 본 실력을 드러내라.”
“감히 우리를 상대로 여유를 부리다니!!”
“진정해라. 쉽게 흥분하는 건 네 안 좋은 단점이다.”
라만티스는 하켄이 힘을 숨긴다고 제멋대로 오해했다.
그렇기에 견제의 의미로 가벼운 일격만 날릴 뿐, 본격적인 싸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하켄이 언제든 꺼낼 본 실력을 경계한 것이다.
물론. 하켄은 그런 견제를 막아내는 것만도 죽을 맛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싸움이 길어졌다.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뿐이지만, 지켜보는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호, 호각으로 싸우고 있다……!”
“역시 늑대왕. 악마랑도 호각으로 싸우다니.”
“저런 대단한 용병이 왜 과거에는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의 눈에는 인류의 희망이 악마와 단신으로 맞서는, 전설의 일부와 같은 광경으로 비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켄은 오직 한순간의 틈을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큰 거. 반드시 큰 게 올 거다.’
라만티스가 동작이 큰 공격을 퍼부을 때.
하켄은 유물 장갑을 사용할 생각이다.
강한 믿음만이 힘을 끌어낼 수 있다지만,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그것만큼 간절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한 번만 막아낸 뒤, 그 빈틈에 때려 박는다.’
하켄이 야심차게 준비한 건 바로 독이다.
데일이 두르핀을 상대할 때, 검에 독을 바르는 것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켄은 연금술사들에게 거금을 쥐여줘 강력한 독을 만들도록 시켰다.
상대가 빈틈을 보이는 순간. 하켄은 맹독이 듬뿍 발린 단검을 때려박을 생각이었다.
‘설령 악마라도 멀쩡하지는 못하겠지!’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다면?
최소한의 체면을 챙긴 셈이니, 그대로 달아나버린다는 게 하켄의 계획이다.
그런 다음에 자기가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노라 허세를 부린다면, 사람들은 믿어주겠지.
데일을 동경하지만 결코 데일은 될 수 없는 하켄의 하찮고도 비열한 계책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계책이 어느 정도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계속해서 가벼운 공격만 날리던 라만티스가 슬슬 조바심을 느낀 것이다.
“끝끝내 본 힘을 숨긴다는 건가? 대단한 인내심이군.”
“존중받을 만한 전사야.”
“그럼 이쪽에서도 전력을 다해야겠지!”
순간. 라만티스가 손에 든 차크람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라만티스는 바닥을 박찬 뒤, 공중에서 크게 돌며 빛나는 차크람을 휘둘러왔다.
‘온다!’
그토록 기다리던 동작이 큰 기술.
하켄은 방패를 힘껏 앞으로 내밀며 장갑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강한 마음! 강한 마음! 강한 마음! 강한 마음!’
무려 바이만의 보물고에 잠들어 있던 유물이다.
분명. 악마의 일격이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믿으며 하켄은 두 주먹에 불끈 힘을 줬고…….
쩡!!
“아?”
손에 든 방패는 차크람에 부딪혀 너무나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하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그럼 그렇지 뭐.”
이후 대처는 빨랐다.
하켄은 뒤로 휙 돌아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지? 유인인가?”
“……도망치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소문으로 듣기에 늑대왕은 절대 도망치지 않는 명예로운 전사라고 했다. 멋대로 추측하는 건 네 안 좋은 단점…….”
“도망치는 거 맞지?”
“벌레 같은 놈이!!”
그제야 속았다는 걸 깨달은 라만티스가 급하게 쫓기 시작했다.
“당장 멈춰!”
“너 같으면 멈추겠냐?!”
영웅과 악마의 신화적인 결투는 순식간에 쫓고 쫓기는 추한 추격전이 되어버렸다.
아군도. 적군도.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하켄은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악마의 걸음걸이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머지않아 따라잡힌 하켄에게 라만티스가 차크람을 휘둘렀고, 하켄은 황급히 바닥을 굴렀다.
부웅!
날카로운 차크람이 지나가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갔다.
조금만 늦었다면 잘려 나가는 건 머리였을 것이다.
얼굴이 새하얘진 하켄에게 라만티스가 으르렁거렸다.
“오늘. 이 대결을 우리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 기대를 이런 식으로 배신해?”
“우선 약속대로 네 눈부터 뽑아주마!”
“어어! 우리 말로 하자!”
하켄이 뭐라 말하든 라만티스의 손은 우악스럽게 가까워져 왔다. 저 뾰족한 손톱이 금방이라도 눈알을 파낼 것 같았기에, 하켄은 재빨리 외쳤다.
“데일 경! 데일 경을 만나고 싶지 않아?”
데일의 이름에 라만티스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가 흥미를 보였다.
“데일. 흑기사 데일?”
“그래. 대륙에서 가장 강한 전사지.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며. 그분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
“그놈은 두르핀과 함께 죽은 거로 알고 있는데?”
“하하. 당연히 헛소문이지. 경께서 폭발에 휘말려 상처를 입었는데, 그 때문에 잠시 그런 소문을 퍼트린 것뿐이야.”
하켄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무 말이나 쥐어짜냈다.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들기도 했다.
라만티스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녀석과는 싸워보고 싶었다.”
“얼굴이 잘생겼다지. 그 코를 잘라 장식할 수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래서? 그 데일이 어딨다는 거지?”
하켄은 입을 다물고. 눈알만 또르르 굴리다 말했다.
“어. 사실. 그게. 음. 사실 도시 안쪽에 있거든? 마침 부상이 다 나으셨으니까, 나를 그냥 살려보내주면 내가 데일 경을 데려 올…….”
“죽이자.”
“그래.”
다시 라만티스의 손이 하켄의 눈알을 뽑기 위해 가까워져왔다.
하켄은 소리를 질렀다.
“그, 그만! 애꾸눈은 싫어!”
“그럼 둘 다 뽑아주마.”
“어어? 저기 데일 경이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데일 경이라고!”
“멍청한 인간놈. 우리가 그런 한심한 수에 걸릴 것 같으냐?”
“얌전히 눈을…… 컥!”
퍽!
다음 순간. 라만티스의 몸이 튕겨 나갔다.
그의 등 한가운데에 큼직한 쇠화살이 박혀 있었다.
라만티스는 화살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다니? 배신인가?
이윽고 라만티스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 부하들을 뚫고 오는 한무리의 군세와 그 선두에 서서 발리스타를 직접 들고 이쪽을 겨냥하는 흑기사를.
“……흑기사?”
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