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55)
결투
* * *
공증인을 맡은 조피스 가주가 선언했다.
“본 결투는 양 신께서 지켜보고 계시며, 결투자는 명예를 지킬 것이고, 이 결투의 승패에 따라 패자는 모든 걸 승복해야 할 것이며, 이 이후 어떤 보복도 없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결투는 결투로 끝내라 이 말이다.
“나를 포함한 이 자리의 모두가 이 결투의 증인이니, 둘은 끝까지 명예를 잃지 않도록 하라.”
긴 선언 뒤에 조피스 가주가 물러났다.
크리스틴은 씩 웃었다. 유난히 하얀 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가 말했다.
“그라일 가문의 크리스틴.”
데일이 짧게 답했다.
“데일.”
크리스틴은 투구의 면갑을 내렸다. 눈구멍이 가로로 긴 일자를 그리는 투구였다.
그는 양손으로 은백색의 롱소드를 들었다. 시퍼런 예기를 풀풀 날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데일과 크리스틴은 각각 결투장의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정식으로 만들어진 결투장이 아닌, 간단한 목책으로 관중들과 선을 그은 조잡한 결투장이었다.
공간이야 넉넉하다지만…….
‘굳이 이런 곳을 택한 이유를 모르겠군.’
데일은 롱소드를 아랫배 쪽으로 당긴 뒤, 검 끝으로 상대의 머리를 겨누었다.
처음에는 일단 거리를 벌리며, 상대를 가늠해보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데일을 보며 히죽 웃더니, 목을 뚜둑 풀었다.
“그러면. 일단 가볍게 실력이나 볼까?”
그 순간.
크리스틴이 땅을 박찼다.
데일이 크리스틴을 다시 두 눈에 담았을 때. 그는 이미 데일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
부지불식간이었다.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 무시무시한 기동.
데일은 반사적으로 검을 곧추세웠다. 가로로 휘둘러진 롱소드가 데일의 검과 십자로 맞물렸다.
카가가가각!
강대한 힘이 검을 타고 전해진다.
데일은 검의 각도를 기울여 어떻게든 힘을 흘려 넘기려 했다.
하지만 상대가 더 노련하다.
힘껏 밀어치려는 듯이 굴던 크리스틴이 돌연. 검을 뒤로 힘껏 뺐다.
‘이런.’
데일이 균형이 앞으로 무너진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틴은 검을 위로 들었다. 검을 든 팔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한 것이다.
크리스틴은 그대로 내리쳤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 벼락같은 일격이다.
‘위험하다.’
데일은 급소를 피하기 위해 몸을 힘껏 뒤틀었다.
검이 그대로 데일의 왼팔을 가격했다.
단단한 갑옷과 검의 충돌.
검이란 무기는 본디 갑옷을 부수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다.
이번에는 달랐다.
찌그러지는 쪽은 오히려 갑옷 쪽이었다.
우득!
갑옷이 부서지며 안쪽의 육체가 드러났다.
크리스틴은 절묘하게 검의 각도를 꺾어 팔에 깊은 자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완전히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뒤로 힘껏 물러났다.
그대로 팔을 내주고 접근하려는 데일의 수를 간파한 것이다.
거리를 벌린 크리스틴이 비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언데드야. 너희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데일은 차가운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팔을 어루만졌다.
역시, 예상대로 강력한 적이었다.
‘특히 마력으로 인한 신체 강화가 골치 아프군.’
안 그래도 강한 신체가 한 번 더 강화되어, 예상을 초월한 힘을 발휘한다.
게다가 갑옷을 찢어발겨도 이 하나 나가지 않는 검.
절묘한 검술까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 재수 없는 기사는, 그 오만함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데일이 잠시 가만히 서 크리스틴의 움직임을 복기했다. 그러자 크리스틴이 이죽거렸다.
“어라. 혹시 벌써 겁먹은 거야? 그럼 곤란한데. 기껏 보러 와준 관객들을 즐겁게 해줘야지! 아니면. 조금 봐줄까?”
저 경박한 말들은 데일을 도발하기 위함일까?
그렇다면 성공했다.
늘 덤덤한 데일도,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데일이 다시 검을 앞으로 세우자, 크리스틴은 씨익 웃었다.
“그렇게 나오셔야지.”
크리스틴이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그 추진력은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데일도 동시에 앞으로 돌진했다.
중앙에서 둘이 맞부딪혔다.
일전과는 달리, 검과 검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캉! 카캉!
은백색과 흑색이 충돌할 때마다 허공에 불티가 튀었다.
빠르고 어지러운 공방전은 사람들의 눈을 현혹했다.
딱 그들이 기대하던 화려한 싸움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흘렸다.
“와아. 대, 대단한데.”
“막상막하 아니야?”
하지만 나름 실력을 갖춘 이들은 냉정하게 말했다.
“흑기사가 밀리는군.”
“응.”
데일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데일은 조금씩 손해를 보고 있었다.
크리스틴의 노림수는 시도하는 족족 성공하며, 데일의 반격은 철저히 가로막힌다.
농락당하는 기분.
그만큼 상대가 지닌 기교와 기술은 압도적이었다.
데일이 가진 검술은 실전을 통해 습득하고, 경험으로 벼려내었다면, 크리스틴은 정반대다.
경험은 부족하다.
하지만 긴 시간에 걸쳐 수많은 천재에게 개량되고, 발전해온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살인기술은 감히 데일이 넘볼만한 영역이 아니었다.
크리스틴의 검술은 예술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갑옷 이곳저곳에 상처가 늘어난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틈이 생기면 어김없이 그 빈틈을 찔러 들었다. 데일은 점점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일방적인 싸움.
하지만 이상한 점도 있었다.
‘왜 치명타를 안 날리지?’
크리스틴의 기량이라면 치명상을 만들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러지 않았다.
데일이 숨기고 있을 한 수를 경계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다기엔 크리스틴의 태도에는 너무나 여유가 넘친다.
비유하자면……. 마치 투우사 같다.
차근차근 소에게 상처를 입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투우사.
크리스틴은 지금, 데일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에리얼이 예견했던 그대로.
‘그렇단 말이지.’
아무래도. 어지간히도 얕보인 모양이다.
‘흐름을 바꿔야 한다.’
이대로 가면 천천히 패배로 걸어나갈 뿐이다.
좀 더 상대의 밑천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데일이 지닌 수를 써야만 한다.
데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이내 힘껏 펼쳤다.
샤아아아아!
검은 안개가 퍼져나가 데일과 크리스틴을 감쌌다.
크리스틴은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오호. 검은 안개……. 맞나? 하지만 아직 그 수준이 별로 대단치 않은 것 같은데?”
어둠 속에 녹아든 데일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홀스터에서 손도끼를 꺼내 그대로 투척했다.
캉!
“앝은 수를!”
크리스틴은 간단히 검을 휘둘러 도끼를 쳐냈다.
그의 민감한 감각은, 설령 시야가 제한되었어도 제 역할을 수행했다.
크리스틴은 청각에 집중했다. 안개를 가르고 쇄도해오는 날붙이의 소리가 들린다.
‘도끼는 속임수. 잠깐의 틈을 이용해 검을 찌른다? 너무 뻔하군.’
크리스틴은 여유 가득한 미소를 흘렸다. 검이 뻗어올 거라 예상되는 지점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 얼굴이 이내 당황으로 물들었다.
‘어?’
검이 뻗어온 건 맞다.
하지만 그 검을 잡고 있어야 할 데일이 없다.
‘아차. 이것도 속임수인가.’
설마 기사가 검을 버릴 줄이야.
크리스틴은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이미 데일이 양팔을 뻗어오고 있었다.
이미 보르단에게도 써먹었던 수.
하지만 크리스틴은 보르단 따위보다 아득히 높은 격의 실력자였다.
순간적으로 크리스틴의 온몸이 푸르게 빛났다. 마력으로 신체 전체를 강화한 것이다.
크리스틴이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데일에게 검을 내질렀다. 가슴을 노리는 궤적.
데일은 그냥 무시했다.
무시하고 왼손을 뻗어 크리스틴의 팔을 붙잡았다.
이윽고 크리스틴의 검이 데일의 흉갑을 부수고.
데일의 왼손에 덧쓴 유물 장갑에서 충격파가 나온 건 동시였다.
콰직!
둔탁한 소리. 안개가 걷혔다.
관중들은 비로소 공방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데일의 흉갑은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다.
다만. 워낙 단단한 부위인지라 그 속까지 드러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틴의 오른팔 부분의 갑옷 역시 조금이나마 찌그러져 있다.
마지막에 가슴을 가격당한 탓에, 손을 제대로 쥐지 못했다. 만족할만한 피해를 주지는 못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크리스틴이 원했던 완벽하고 여유로운 승리에는 흠집이 갔다.
그게. 크리스틴을 열받게 했다.
크리스틴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래. 봐주니까 기어오르는군.”
크리스틴의 두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피어오른 마력은 근육에 단단히 스며들었다.
신체를 강화하고 남은 마력은 눈을 통해 안광이 되어 흩어졌는데, 아이러니하지만 그 모습이 흑기사의 그것과 비슷했다.
다음 순간.
크리스틴이 바닥을 박찼다.
땅이 패이는 동시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크리스틴의 모습을 눈에 담았을 때는 이미 검이 데일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이미 반쯤 찌그러진 부위였다.
드득!
갑옷이 뚫리고, 선혈이 튀었다.
데일은 황급히 검을 주워 대처하려 했다.
하지만 검은 허공을 가르고. 이미 크리스틴의 몸은 데일의 등 뒤에 있었다.
‘어느새?’
촤악! 다시 한번 피가 튀었다.
데일은 곧바로 허리를 돌리며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크리스틴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쳤다.
사선에서 치고 들어오는 검격에 옆구리가 찌그러졌다.
“언데드야, 당혹스러운가? 그러게 나를 화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데일은 소리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마치 조롱하듯, 데일의 어깨 위에 머리를 붙이며 속삭였다.
“후회해도 늦었다. 이제부터 네 민낯을 드러내겠다.”
쐐액!
다리가 깊게 베였다. 데일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가뜩이나 피가 부족한데, 유물 장갑 탓에 생기까지 소모했다.
갈증. 갈증이 인다.
‘생기가 필요해. 생기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서? 가장 좋은 방안은 저 재수 없는 기사를 죽여 생기를 취하는 것이지만, 당장은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데일을 멀뚱히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정도면 딱 적당하군. 인간 흉내는 그만둘 때다.”
그러고는 데일의 몸을 쇠장화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마력으로 강화된 신체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월등히 벗어났다.
그대로 날아간 데일의 몸이 결투장을 나누는 목책과 부딪혔다.
쿵!
목책은 가볍게도 부서졌다. 그리고 데일은 한참을 더 굴러, 관중들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어, 어?”
“……엇.”
그제야 데일은 크리스틴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데일은 주위에 있는 관중들을 올려다보았다. 하나같이 벙찌고, 겁먹은 표정들이다.
그 두려움이 도리어 데일을 자극했다. 생을 탐하는, 언데드의 본능이 자꾸만 깨어나려 했다.
먹어.
내면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이전, 어딘가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흑기사는 아군을 죽여 회복했고, 적을 죽이다 또 상처를 입으면 근처에 있는 아군을 죽였소.
기억났다. 발튼과 나눈 대화다.
흑기사들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사며,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는 이유.
흑기사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다. 그건 데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점점 갈증이 심해진다. 본능이 이성을 억누르기 시작한다.
지금 데일의 상태는 위험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기를 취해야 한다.
점점 인간 데일이 아닌, 언데드 데일에 가까워져 간다.
‘안 돼.’
이 본능에 따라서는 안 된다.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다고 잘난 듯이 말해 놓고. 이렇게 굴복해버리면 안 된다.
차라리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던 찰나.
한 줄기 또렷한 음성이 데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데일 경.”
데일은 고개를 들었다.
관중들은 전부 데일에게서 달아났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에스델이 있었고, 하켄이 있었다.
둘은 데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에스델은 손가락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 있는 건,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반지.
억울하게 죽은 여사제에게서 받은 반지였다.
이게 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까. 검에 베이는 과정에서 주머니가 찢어진 걸까?
지금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에스델이 말하길, 이 반지에는 옛 영웅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 고결한 영혼을 가진 이에게 단 한 번, 강한 힘을 내려준다 했다.
데일은 반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바랐다. 지금 이 순간. 힘을 달라고.
반지에서 빛이 몇차례 반짝였다.
깜빡. 깜빡. 뚝.
빛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
“…….”
“…….”
침묵. 잠시 눈치를 살피던 하켄이 중얼거렸다.
“뭐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당황한 에스델이 중얼거렸다.
“바, 반지가 데일 경이 맘에 들지 않나 봐요.”
“…….”
떨떠름하게 반지를 쳐다보던 데일은 생각했다.
‘이놈의 유물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깐깐하게 나오는군.’
하지만 선택하는 쪽은 언제나 데일이다.
데일은 유물 장갑을 낀 손으로 반지를 쥐었다. 그리고 남은 생기를 한계까지 사용해, 그대로 충격파를 터트렸다.
콰앙!
주먹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이다. 오래된 반지 따위는 쉽게도 찌그러졌다. 그러자 그 안에 담긴 영웅의 영혼이 빠져나왔다.
데일은 곧바로 그 영혼을 부여잡았다. 있는 힘껏 흡수했다.
영혼이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마치 이것 놓으라는 듯, 격렬히 저항했다.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영혼을 취해 그 힘을 흡수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을 빨아들였다고 생각한 순간. 영혼의 저항이 끊겼다.
데일은 몸 안에서 맥동하는 강력하고 순수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데일은 확신했다.
잠시지만. 아주 잠시지만.
자신이 더 높은 격의 존재가 되었음을.
이제 반격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