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56)
결투
* * *
내면에서 거센 힘이 사납게 용솟음친다. 본디 데일의 힘이 아니다. 남에게서 억지로 뺏어온 힘.
그렇기에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데일은 걸음을 옮겼다. 결투장으로 돌아갔다.
“음?”
크리스틴의 미간을 좁혔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
분명, 크리스틴이 계획했던 건 데일을 한계로 몰아넣어, 그가 관중을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큰 혼란이 생겼을 때.
크리스틴이 적절히 끼어들어 사악한 이교도 기사를 베어내고, 시민들을 구출하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사람 몇이 죽거나 다치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다 자신의 명성을 위한 것인데.
한데.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
데일은 관중을 공격하지 않았다. 분명 신체는 한계에 몰려있을 터.
그 본능에 따라 생기를 탐해야 옳다.
‘자제했다고?’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이란 말인가? 사람조차 굶주리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데. 하물며 언데드는 어떨까.
하지만 데일은 참아내었다.
크리스틴의 머릿속에 언젠가 들었던 말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특별하다 해야 할지. 어쨌거나 방심해서는 안 될 상대입니다.
크리스틴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래. 확실히 특별하긴 하군.’
데일이 이쪽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왔다. 사위는 쥐가 죽은 듯 고요했다.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저 흑기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크리스틴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지금 저 앞에 다가오는 적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거리가 가까워진다.
크리스틴은 데일의 투구 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안광과 마주쳤다.
‘윽.’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충격에 빠졌다.
‘내가 겁먹었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는 자랑스러운 그라일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나, 천재라 불릴 정도의 재능을 타고났다.
하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의 재능을 시기한 두 형제는 사사건건 크리스틴을 견제했다.
밤중에 암살자가 찾아온 일이 수차례며, 음식에 독이 들어있던 적도 많다.
노골적인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지켜주지 않았다. 어머니를 어렸을 때 여의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 크리스틴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재능밖에 없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둘렀고, 뼈를 끊어내는 심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결국, 이 순간까지 다다랐다.
그렇기에 크리스틴은 겁먹지 않는다. 않아야만 한다.
크리스틴은 억지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데일에게 말했다.
“무언가 사특한 수를 쓴 모양이군. 하지만 서로의 기량 차이가 명백하다는 건 너도 잘 알 텐데?”
데일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검술로는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데일은 검을 손에서 놓았다.
“음?”
갑작스러운 행동에 크리스틴이 표정을 굳혔다. 데일은 그 투구 속에서 빛나는 눈을 응시했다.
저 위에서 깔보는 듯한 눈빛. 일단 그것부터 고쳐 주어야겠다.
데일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쿵!
강한 힘에 바닥이 내려앉는다. 다음 순간. 데일의 몸이 흐릿해진다.
크리스틴이 두 눈을 부릅떴다.
빠르다! 아니. 단순히 빠른 걸 넘어서…….
“이런!”
서둘러 정신을 차린 크리스틴이 검을 끌어당겼다. 이미 데일의 주먹이 가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콰앙!
주먹에서 났다기에는 너무나 둔탁한 소리와 함께 크리스틴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무슨 힘이!’
하체를 단단히 고정했는데도 도저히 버틸 수 없다.
크리스틴은 서둘러 균형을 잡으려 했다. 검술을 통해 배운 그대로.
하지만 데일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그대로 따라붙어 주먹을 연달아 내질렀다.
마치 길거리 무뢰배들의 그것처럼 되는 대로 휘두르는 주먹.
규칙성도 없고, 무의 미학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힘과 속도가 뒷받침되자, 무뢰배의 주먹은 그 어떤 검격보다 더 파괴적인 공격으로 변모했다.
“크윽!”
연타를 얻어맞으며 속수무책으로 밀려난 크리스틴이 이를 악물었다.
그 눈에 이제 여유라고는 조금도 없다. 비로소 데일과 같은 수준으로 내려와, 데일을 적으로서 증오하고 있었다.
데일이 중얼거렸다.
“좀 낫군.”
크리스틴이 이를 악물었다.
“한낱 언데드 주제에……!”
마력이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눈가의 안광이 짙어진다.
데일의 속도를 따라오기 위해, 마력을 한계까지 사용해 신체를 강화한다.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겠지만, 일단은 이겨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둘은 이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어지럽게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눈으로 읽어낼 수 없는 속도의 영역에서 공방을 시작했다.
주먹이 크리스틴의 머리를 가격한다. 검이 데일의 옆구리를 부순다. 주먹이 가슴을 후려친다. 검이 어깨를 베어낸다. 주먹과 검. 검과 주먹.
마지막 순간. 크리스틴의 검이 데일의 갑옷을 찢고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됐다!’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 데일이 갑자기 강해졌다 하나, 아직 기량에서는 자기가 한 수 위다.
이 싸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모를 것이다. 이겼다는 생각이 들 때야말로 가장 위험하다는 걸.
데일은 그걸 잘 알았다. 활용할 줄도 알았다.
“!”
사아아아!
투구의 눈구멍. 갑옷의 이음매. 그리고 검격에 찢어진 상처.
데일의 갑옷에 뚫린 모든 구멍에서 어둠이 피처럼 흘러내렸다.
검은 안개?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끈적하고 짙은 어둠이다.
크리스틴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당장 벗어나야…….’
하지만 어떻게? 둘 간의 거리는 좁고, 무기는 상대의 옆구리에 틀어박혀 있지 않나.
갈등하던 차에 마지막으로 도망갈 기회를 놓쳤다.
다음 순간. 어둠이 주위를 모두 덮었다.
크리스틴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눈을 떴는지 뜨지 않았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모든 소음과 시야가 차단된 압도적인 적막감.
끔찍한 공간이었다.
―크리스틴.
―넌 죽어야만 한다.
“이, 이게 무슨.”
어느 순간부터 귓가에 저주의 말을 뱉는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공기는 너무나 차가워 갑옷 위에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은 발버둥 치려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발을 딛고 선 단단한 땅이 어느새 늪이 되어 그를 집어삼켰다.
몸이 점점 늪 아래로 가라앉았다.
죽음 그 자체를 형상화한 늪이었다.
크리스틴은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댔다. 하지만 그럴수록 차갑고 어두운 늪은 그를 빠르게 삼킬 뿐이다.
크리스틴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이 적막을 깨고자, 일부러 소리 내 외쳤다.
“환각! 그래, 환각이다! 실제로 바닥이 늪이 될 리가 없잖아! 이 사악한 이교도 놈아! 이딴 수작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렇게 외친 순간. 그에 화답하듯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얼굴을 드러냈다.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습이 이상하다. 하나같이 뒤틀려 있다.
누구는 몸이 반 토막이 나 있고, 누구는 머리가 없다.
“뭐, 뭐야 너희들은. 썩 꺼져 괴물 새끼들아!”
크리스틴은 알지 못했다.
이 괴물들 역시 한때는 이름이 있었음을. 하시나, 하킴, 마일즈, 아바프, 검은 뱀 형제단, 마탑의 노예병, 용병 등등. 각자를 부르는 칭호가 있었음을.
하지만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게 빨려, 껍데기만 남은 괴물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알지 못한다.
그 역시 저들과 같은 처지에 처할 것이라는 걸.
괴물들은 이내 크리스틴에게 몰려들어 아가리를 벌렸다. 그대로 크리스틴을 산 채로 뜯어먹으며 그 생명을 취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크리스틴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외쳤다.
“아니야! 이 통증 역시 가짜다! 정신력으로 버티면 돼! 꺾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크리스틴이 미친 듯이 외쳐댔다. 괴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틴을 물어뜯었다.
귓가에는 계속해 저주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어서 너도 죽으라고. 저항을 그만두라는 말이 지나갔다.
크리스틴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이것만. 이것만 넘긴다면…….
그때. 정겨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포기하렴. 포기해서 편해지렴.”
“어……머니?”
너무나 그립고. 간절히 듣고 싶던 목소리.
환청이다. 꾸며낸 목소리다. 크리스틴은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아.”
위태롭게 크리스틴을 지탱하던 마음속 끈이 뚝 끊어졌다.
늪이 완전히 크리스틴을 집어삼켰다.
괴물들과 크리스틴은 가라앉았다. 저 깊은 곳. 죽음을 향해.
마지막 순간. 크리스틴은 멍하니 위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게 흑기사의 힘. 이건…….’
위험하다. 저 흑기사는 속에 위험한 괴물을 키우고 있다.
속으면 안 된다. 이 사실을 바깥에 알려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기회가 없다.
죽음이 그를 완전히 삼켰다.
“…….”
데일은 무심히 아래를 쳐다봤다. 어느새 어둠이 걷혔다. 바닥에는 크리스틴이 누워 있었다. 늪도 없고, 괴물도 없다.
핼쑥해진 시체가 있을 뿐이다.
마력이 신체를 보호해주었기 때문일까?
어둠 속에서 생기를 잔뜩 뜯어먹혔는데도, 비교적 시체 상태가 온전하다.
그 눈동자 역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숨을 쉬지 못해 질식한 사람처럼, 부릅떠진 두 눈은 공허하다.
철퍽!
데일은 크리스틴의 목 부분으로 손을 찔러넣었다. 그대로 움켜쥔 뒤, 생기를 흡수했다.
상대는 강한 적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어마어마한 생기와 잔혼이 흘러들어왔다.
만신창이였던 데일의 몸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찌그러지고 찢어졌던 갑옷이 수복되고, 신체 역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갈증이 가라앉았다.
머릿속을 뿌옇게 흐리던 충동들도 말끔히 사라졌다.
다시 태어난 기분.
생기를 모두 흡수한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광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데일은 멍하니 있는 조피스 가주에게 말했다.
“승패가 났소. 어서 결투 종료를 선언하시오.”
“아.”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조피스 가주가 급하게 외쳤다.
“스, 승자는 데일 경! 그리하여, 처음 선언한 대로, 엘레나 바이만에게는 무죄가 선고된다!”
데일의 승리. 하지만 광장을 떠나갈 듯한 갈채는 없다.
그야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무조건 이길 거라 생각한 크리스틴이 패배하고, 져야 했을 악역이 이겼으니.
좋아하는 건 도박으로 몇십 배의 이익을 낸 이들밖에 없었다.
하켄도 그중 하나였다.
“크하하하! 믿고 있었습니다 데일 경! 황실 기사단이니 뭐니 해도, 별거 아니……. 별거 아니진 않았지만, 데일 경한테는 안 되죠!”
에스델은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바, 반지를 부수다니. 그건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안에 깃든 영웅의 영혼은…….”
“지금은 없다.”
“지금은 없다라니…….”
프라우와 아이렉도 다가와 호들갑을 떨어댔다.
“맙소사. 세상에. 내가 지금껏 보았던 것 중 가장 멋있는 승부였네!”
“하하! 잘했네! 아주 잘해주었어! 오늘은 성대히 축하해야겠군!”
마지막으로 엘레나가 데일의 갑옷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고마, 워요.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어요.”
데일은 엘레나를 흘끗 내려다본 뒤, 툭 내뱉었다.
“꼭 갚아라.”
“네? 네, 네…….”
데일은 걸음을 옮겼다.
결투의 승자는 어떤 승리 소감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일 없이 그렇게 조용히 떠나갔다.
마치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떠나가는 데일을 사람들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망토와 가면으로 신분을 가린 2인조도 있었다.
그중, 직급이 낮아 보이는 여성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승……. 아니. 단장님.”
단장이라 불린 사내는 미소 지었다.
“흐음. 제법 훌륭하군.”
“예?”
여성은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가 아는 이 단장이라는 사내는 당최 누구를 칭찬하는 법이 없었다.
저렇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고.
“간만에 좋은 걸 봤어. 흑기사 데일이라. 기억해둘 가치가 있겠군.”
“그 정도인가요? 분명 봐줄 만한 싸움을 보여주긴 했지만.”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거다.”
단장은 관중석 이곳저곳에 시선을 주었다.
워낙 화제가 되었던 결투다.
상위 구역에서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온 건 이 둘만이 아니었다.
제법 권세를 자랑하는 고위 귀족도. 도시의 유력자도. 기사 가문의 일원들도 곳곳에 신분을 감추고 구경하고 있었다.
단장은 먼 거리지만 그들의 눈에 담긴 놀라움을 읽어냈다. 데일을 향해 보이는 흥미와 탐욕 역시 읽어냈다.
옆에 있던 여성이 물었다.
“마탑에서 가만있을까요? 공들인 일을 훼방 놓았는데.”
단장은 피식 웃었다.
“그놈들도 체면이라는 게 있다. 결투가 끝나자마자 복수를 하면 면이 안 살아. 그리고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없을 거다.”
“예?”
“결투 때 보지 않았나? 저 흑기사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 역시 따라주고 있다. 그야말로 변수 덩어리지. 내가 주문쟁이라면 저걸 굳이 건드느니, 그냥 모른척할 것 같군.”
여인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은 몸을 휙 돌리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자.”
여인이 그런 단장을 붙잡았다.
“아. 그 단장님. 크리스틴 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정식으로 단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입단이 예정되어 있던 사내가 아닙니까.”
“흐음.”
턱을 손으로 쓰다듬던 단장이 물었다.
“크리스틴이라. 그런 놈이 있던가?”
“…….”
그 눈을 마주친 여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 나의 기사단에 패배자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단장은 망토를 펄럭이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면서, 자꾸만 뒤로 고개를 돌려 데일을 살펴보았다.
아까부터 무언가가 맘에 걸린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이라 해야 할까.
‘투구를 뒤집어썼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단 말이지. 언제 만난 적이 있나?’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찝찝하다. 왠지 굉장히 중요하게 느껴지는데, 또 생각이 안 나는 걸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후자로 생각이 기울었다.
“자. 어서 돌아가자. 또 동쪽에서 말썽이라는구나.”
“예. 단장님.”
사소한 일에 일일이 신경 쓰기에는,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자리는 너무나 바빴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뒤로 돌려, 뒤쪽을 둘러보던 단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 * *
광장에서 상당히 떨어진 높다란 건물의 지붕 위.
지붕 위의 한 공간이 마치 커튼이 걷히듯 양옆으로 밀려났다.
왜곡된 공간 속에서 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특징 없는 노인. 특이한 건 그의 손에 들린 큼지막한 수정구다.
수정구 속에는 푸른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눈동자는 결투가 끝난 광장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노인은 눈동자가 광장을 볼 수 있도록, 앙상한 팔을 들어 수정구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눈동자는 그제야 만족한 듯. 중얼거렸다.
“실패했군. 바이만의 왕족이 마탑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이 도시의 파멸이 한 단계 더 가까워졌을 텐데.”
하지만 그 눈빛에 아쉬움은 없다. 오히려 어딘가 기꺼워하는 기색까지 있었다.
“하지만 천천히 다음 수를 준비하면 될 뿐이야. 내게 인내하는 법을 가르쳐준 건, 다름 아닌 당신이니까.”
그 눈동자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가, 좁쌀처럼 작아진 데일을 담았다.
그때. 수정구를 든 노인의 이마에 땀이 주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수정구가 무거워서 흘리는 땀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흥. 벌써 시간이 되었나.”
다시 공간이 커튼처럼 걷히며 노인의 모습을 가렸다.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