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85)
수여식
* * *
머지않았어요.
데일은 그 짧은 문장은 뚫어져라 쳐다봤다.
대체 누가 이런 글귀를 써 놓은 걸까.
혹시 만취한 취객이 술기운에 장난을 친 걸까?
어쩌면 장난기 많은 소년이 벌인 짓일지도 모른다.
또, 머지않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데일은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머지않았다라.’
왠지 데일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지면, 너무 과한 생각인가?
땡땡땡!
거리를 순찰하는 병사들이 울리는 종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조각상에서 눈을 뗀 데일은 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성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 인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기사가 데일에게 물었다.
“3구역은 어땠소.”
데일은 흘끔 도시를 보더니 말했다.
“바깥이랑은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았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곳은 별세계였다.
기사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한 감상이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그대로 떠나려 했다. 그런 데일을 기사가 붙잡았다.
“잠깐.”
“왜 그러시오.”
기사는 품을 뒤진 다음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익숙한 표지다.
요즘 상위구역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데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험. 험험.”
민망하게 헛기침한 기사가 말했다.
“내 딸아이가 참으로 좋아하는 책이오.”
“……그렇군.”
“그대 이름을 적어주면 내 딸이 아주 기뻐할 것 같은데. 부탁해도 되겠소?”
데일은 말없이 펜과 책을 받아들였다. 기사가 다급히 말했다.
“브레이든에게. 늘 행복하시오. 라고 적어 주시오.”
“……딸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험험.”
데일은 순순히 부탁받은 대로 해준 뒤, 걸음을 옮겼다.
카일라의 여관 앞에는 하티가 앞 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데일이 오자 하티가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크릉, 하고 낮게 울었다.
상위구역에 데려가지 않아 섭섭한 눈치였다.
데일은 하티의 갈기를 한차례 쓸어주었다.
“거기에 널 데려갔으면 기사들이 기겁을 했을 거다.”
하티는 알았다는 듯, 꼬리를 휙 휘둘렀다. 그런 하티를 두어 번 더 쓸어준 데일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한산한 실내. 카일라가 맞아주었다.
“오셨어요? 식사하시겠어요?”
데일은 고개를 젓고,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닫고 침대에 등을 기댔다. 조잡하게 만든 침대가 삐걱거렸다.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주제는 영웅들. 즉, 데일이 직접 키웠던 캐릭터들이다.
최고의 효율로 육성해 하나하나가 엄청난 성능을 뿜어내던 괴물들. 이보다 더 강하게 키울 수는 없다고 데일은 확신했었다.
‘그 당시에는 어지간히도 빠져 있었지.’
과거를 회상하다 보니, 어느 순간 기억이 선명해진다.
정신을 차렸을 때.
데일은 어느 좁은 방 안에 있었다.
익숙하고 어둡고 비좁은 방.
그곳에서 눈이 퀭한 폐인 같은 사내가 컴퓨터를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데일은 낯익은 얼굴의 사내를 보았다. 그건 데일이었다.
원래 데일의 모습.
사내는 그저 모니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데일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의 시작 화면에 그간 키워오던 캐릭터 넷이 당당히 서 있었다.
사내가 마우스를 딸칵 클릭했다.
그러자 경고문이 떠올랐다.
[정말로 캐릭터를 삭제하시겠습니까?]사내는 한참을 갈등했다.
마우스를 몇 번이나 왔다갔다 했다.
데일은 그런 사내의. 자신의 행동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 결말을 알지만 끝까지 지켜봤다.
긴 시간이 흐른 후.
사내는 끝끝내 캐릭터를 삭제하지 못했다.
* * *
도서관의 사서는 나름대로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도서관의 사서라는 직업 자체가 한번 취업에 성공하면 정년까지 잘릴 걱정이 없으면서, 일이 너무 힘들지도 않은 편이었다.
기껏 마법사가 되었으면서 그 능력을 썩히는 기분도 들었지만, 사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야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편하게 책이나 읽으며 사는 게 좋은 거지.’
사서는 자기 일에 대해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이었지만, 딱 하나 힘들어하는 게 있었다.
바로 고약한 성격의 노움 혼혈.
기록관 안드레이다.
사서는 안드레이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안드레이는 생활용 마도구 제작과 룬 문자, 기타 비 전투용 마법에 통달한 사내였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마탑에서는 젊은 나이에 마스터라는 직함을 받았으니. 실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다만, 안드레이는 비운의 천재였다.
악마와의 전쟁으로 모든 게 송두리째 변해버렸다.
모든 마법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빠르게 사람을 죽일 수 있냐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간 이어져 오던 마법사 윤리는 모두 사라졌다. 그 잔혹성 때문에 금지되었던 고대의 주문들을 부활시켰다.
살상력이 없는 마법은 쓸모없다는 소리를 들었고, 연구에 대한 투자는 툭 끊겼다.
비전투 마법사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공을 바꿔야만 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그러지 못했다.
마법사 특유의 자존심과 신념 탓도 있었지만, 안드레이에게는 전투 마법에 끔찍할 정도로 재능이 없었다.
공격용 마법은커녕, 마도구조차 살상력 있는 물건을 만들지 못했다.
안드레이는 곧,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게 되었다.
마스터라는 감투를 썼지만 발언권은 없다시피 했고, 그 어떤 젊은 마법사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아 했다.
안드레이가 마탑을 뛰쳐나와 도서관에 틀어박혀 역사책을 붙들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나이 든 이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안드레이에게 과거란 너무나 소중하고 되찾고 싶은 것이었으니까.
사서는 그런 안드레이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오래도록 인정받지 못한 마법사의 성격은 고약했다. 안드레이에게 익숙해질 때까지 사서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안드레이는 다가오는 사람을 모두 쳐냈다. 마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와도 같았다.
‘평생 친우 같은 건 없겠지.’
사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깨졌다.
사서는 다과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안쪽을 슬쩍 살폈다.
데일과 안드레이가 체스를 두고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안드레이가 박살나고 있었다.
“하, 한 수만 물러줘.”
“그 말만 몇 번째요.”
“마지막이니까. 응?”
“알겠소. 특별히 봐드리겠소.”
“……기왕 무르는 거 한 수만 더 물러주면 안 될까?”
사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고약한 안드레이님과 저렇게 친근하게 지내다니.’
웬만한 사람은 치를 떨고 도망갔을 텐데, 데일은 그러지 않았다.
안드레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건 물론, 제법 친근하게 대화까지 나누고 있었다.
노인을 상대하는 데에 익숙한 것 같았다.
사서는 그런 데일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의외로 사교성이 좋은 건가.’
지금껏 안드레이와 저렇게 친해진 사람은 드물었다.
사서는 데일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비결이 뭐지?’
사서는 쟁반을 들고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냈다.
안드레이가 휙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야.”
“두 분 드시라고 다과를 좀 가져왔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얘는 어차피 음식 안 먹어도 된다니까?”
안드레이가 데일을 향해 삿대질했다. 데일은 그러거나 말거나 사서에게 고맙다고 한 뒤, 찻잔을 받아들고 홀짝였다.
그 모습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를 홀짝이는 흑기사라니. 그것만으로도 역사책에 실리기 충분할 거다. 어차피 마실 필요도 없고, 맛도 못 느끼면서 왜 마시는 거야. 쓸모없는 행동이잖아.”
“사람이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게 뭐 이상한 행동이겠소. 그리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소?”
“뭐? 거참 이상한 놈이구만.”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심 데일의 말에 감명을 받은 듯했다.
특히,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가 마음에 남았다.
안드레이는 쓸모없는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였으니까.
기분 좋아하는 안드레이를 보며 사서는 왜 안드레이가 데일을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보기보다 좋은 사람일 수도…….’
그때. 데일이 말했다.
“자. 이제 내가 이겼으니, 약속을 지키시오.”
“크윽.”
“총 다섯 번 이겼으니, 다섯 개의 부탁을 들어주셔야 하오.”
“봐, 봐주면 안 될까?”
데일은 정색하며 말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오.”
데일이 뿜어내는 흉흉한 기세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수그렸다.
사서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냥 착각인가?’
안드레이가 불안하게 물었다.
“그래서. 부탁할 게 뭔데. 말해두지만, 너무 무리한 부탁은 못 들어줘.”
“그런 것 아니오.”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안드레이는 마도구에 일가견이 있는 것 아니오? 일전에 봤던, 스스로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양탄자는 굉장히 훌륭한 물건이었던 것 같은데.”
“흠. 흠흠. 내 마도구가 훌륭하긴 하지.”
기분이 좋아졌는지, 안드레이는 수염을 잡아당겼다.
말을 꺼낸 데일이 그 양탄자를 찢어버렸다는 건 까맣게 잊은 듯하다.
데일은 그런 안드레이에게 걸치고 있던 망토를 내밀었다.
“이걸 좀 봐주시오.”
“이건?”
“우연히 얻게 된 물건인데, 미약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소. 어떤 물건인지 감별해줄 수 있겠소?”
“흐음.”
안드레이는 망토를 눈 가까이에 가져다 대,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예사 물건은 아니군. 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들었는데, 일부러 힘을 숨겨놓은 모양이야. 물건의 원주인은 이걸 어디서 났다고 했지?”
“원주인도 모른다고 했소. 그저 가보로 물려받았다는 것밖에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거, 쉽지 않겠어.”
“어렵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소…….”
데일이 망토를 돌려받으려 하자, 안드레이가 망토를 휙 뒤로 뺐다.
그리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안드레이다. 마스터 안드레이. 나한테 불가능은 없어.”
“부탁해도 되겠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안드레이는 손에 녹색 빛을 뿜는 조그마한 구체를 들고 망토를 상세히 살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왜 그러시오.”
“이 문양. 보이나?”
안드레이가 망토의 중간을 녹색 빛으로 비추자, 검과 책을 양발에 짓밟고 있는 푸른 사자의 문양이 나타났다.
이 문양이 의미하는 건…….
“바이만 왕국.”
“그래. 마법깨나 좋아하던 놈들이지. 놈들이 만든 마도구라면, 과연. 범상치 않은 물건일 거야.”
마법과 검으로 유명한 바이만 왕국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유물이나 마도구는 평범한 물건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망토의 제작자가 마도구의 효과를 숨기길 원했다면, 그걸 파헤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안드레이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오로지 망토를 조사하는 데에만 시간을 쏟았다.
사서가 데일에게 말했다.
“기록관님은 한번 집중하시면 몇 시간이고 저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으세요. 심지어 누가 뺨을 때려도 신경 쓰지 않으신다니까요?”
“혹시 직접 때려보셨소?”
“……그럴 리가요.”
왜인지 대답에 뜸을 들인 사서가 쟁반을 들고 사라지려던 그때.
아래쪽에서 소란이 들렸다.
“으음?”
당황한 사서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호기심이 일은 데일도 그 뒤를 따랐다.
도서관에는 판금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쭉 도열해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사서가 중얼거렸다.
“화, 황실 기사단?”
황실 기사단. 제국에서 가장 강한 무력 집단 중 하나.
데일은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군.’
지금의 데일이 저 기사들과 1대1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선뜻 확신할 수 없었다.
저들은 강하다.
데일의 시선을 느낀 걸까.
황실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시선을 데일에게 향했다.
그중. 지위가 높아 보이는 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빛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운 사내였다.
기사는 데일의 앞에 다가와 물었다.
“가니아고스를 쓰러트린 흑기사 데일. 맞나?”
“그래.”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실 기사단원이 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데일이 묻자 기사는 엄숙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칙서다. 데일, 너에게는 훈장이 수여될 예정이다. 무한한 영광으로 알고, 훈장 수여식에 반드시 참석하도록.”
일방적인 통보.
데일은 칙서를 흘끗 살피며 생각했다.
‘훈장 수여식이라.’
왠지 또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