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94)
언데드
* * *
비가 내렸다.
아마도 북부에서 올해 내리는 마지막 비일 것이다.
북부의 겨울은 일찍 찾아온다.
이 비가 눈과 얼음으로 바뀌기까지는,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
눈이 내리고. 대지가 얼어붙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진정한 고난의 시작이다.
사람이나 몬스터나 지금 이 시기에 필사적으로 돌아다니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 비를 어느 기사가 멍하니 맞고 있었다.
빗방울은 뼛속까지 시리게 할 정도로 차갑지만, 이 기사는 그러한 감각을 모른다.
무엇이 차갑고. 무엇이 뜨거운지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
툭.
빗방울 하나가 투구에 떨어지더니, 이내 눈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공허하던 눈동자에 푸른 안광이 피어오르며 정신이 되돌아온다.
기사는 고개를 내려 자기 몸을 둘러보았다. 멈춘 심장. 새까만 건틀릿. 새까만 갑주.
등에 메인 무식하게 큰 대검이 꽂혀 있었다.
자신이 누구였더라?
기사는 고개를 내리고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게 흐릿하다.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 제대로 된 사고를 방해한다.
이성이 흐릿해지면 본능이 주도권을 찾는 법.
기사의 코에 기분 좋은 향이 흘러들어왔다. 피냄새다.
기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위에 펼쳐진 참상을 확인했다.
사방이 시체다.
비싼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시체들이 이곳저곳 널브러져 있었다. 한쪽에는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
기사는 머지않아 정답을 알아냈다.
자신.
기사는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시체에 다가가, 그 살점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마치 언데드나 몬스터처럼.
생기를 흡수하는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사는 직접 씹어먹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편이 더 만족감이 컸다.
긴 시간 이어진 식사를 마친 뒤.
기사는 습관적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포식했건만, ‘배부르다’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언데드 특유의 끝없는 공허함만이 가슴속을 맴돌았다.
더 필요해.
기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 많은 희생양을 집어삼켜, 더 강해진다. 그 본능을 충족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기사는 멈칫했다.
아니야.
단순히 먹고 사냥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건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었다. 이 차가운 땅에 찾아온 중요한 이유가.
“…….”
기사는 머리를 쥐어 싸맸다.
어떻게든 머릿속 안개를 헤집어, 기억을 끄집어내려 했다.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 안개가 걷히며 세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돌아간다.
기사는 그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돌……아간다.”
가을비만큼이나 차갑고, 무감정한 목소리였지만 일단 내뱉고 나니 한층 기분이 나아졌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그때. 기사의 허리에 메인 배낭에서 무언가가 웅웅 진동했다.
기사는 배낭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건 자줏빛을 내는 수정구였다.
사악하고도 강력한 힘이 깃든 수정구.
이게 뭐지? 왜 나한테 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왜인지 이 수정구를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알 것 같았다.
기사는 수정구를 손에 쥐고, 집중했다.
그러자 수정구에서 자줏빛 광휘가 주위를 덮었다.
빛은 대지로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기사가 뜯어먹고 남은 뼈다귀와 살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몇몇은 생전의 습관대로 검을 들었고, 또 몇몇은 무거운 갑옷을 거뜬히 버텨내며 움직였다.
기사는 되살아난 시체들에게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 뒤, 중얼거렸다.
“돌아간다.”
기사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구울, 스켈레톤, 좀비 등등. 갖가지 언데드들이 자기만의 속도로 기사를 따라나섰다.
개중에는 기사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낙오되는 언데드도 있었다.
기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낙오된 언데드들이 주위에 영향을 주어, 또 다들 언데드를 일으킬 거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는 희미해진 감정과 몸을 지배하는 본능에 따라 전진했다.
검은 사신이라는 별명의 흑기사는 그렇게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 * *
데일과 일행이 들른 마을은 숲 근처에 있다 해서 ‘숲 밑 마을’이라는 이름을 지닌 곳이었다.
50명이 정도 주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허름한 집이나 조잡한 목책을 보면 썩 여유 있는 마을은 아니었다.
에스델이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안심시켜준 뒤에서야, 도망갔던 주민들은 마을로 되돌아왔다.
에른스트는 촌장에게 부탁했다.
“우리 일행이 하루 묵고 갈 숙소를 내줬으면 좋겠는데. 아, 기왕이면 식사와 술도.”
“으음.”
“당연히 사례는 넉넉히 할 생각이다. 나는 다른 귀족과 달리, 공짜로 얻어먹을 생각은 없어.”
귀족의 피가 지금보다 더 고귀했을 시절.
평민들이 마을에 들른 귀족을 대접하기 위해 주머니를 털고 가축을 잡아야 했던 건 당연한 의무에 가까웠다.
성난 귀족의 병사들에게 칼을 맞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악마의 침공 이후 그런 일은 크게 줄었다.
이제는 귀족이라는 이름값이 예전만 못하기도 하거니와, 가난한 농가에도 칼 한 자루씩은 구비해놓는 시대다.
하루 무전취식을 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위험성이 너무 커졌다.
에른스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촌장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뭘 당연한 걸 가지고 생색내는 거지? 당연히 식사를 했으면 돈을 내야지.’
하지만 그걸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병사를 이끌고 온 귀족.
심지어 공포스러운 흑기사를 데리고 온 귀족에게는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촌장이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저희 마을은 보다시피 작은 마을이라, 여관도 없고, 숙소라 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대접하지 못할까 해서, 걱정했을 뿐입니다.”
“그, 그렇군. 마을에 여관이 없을 수도 있군.”
“예에…… 그. 일단 괜찮으시면, 도련님께는 저희집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으음. 촌장의 집이라.”
으레 촌장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크고 괜찮은 저택이기 마련이다.
촌장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
다른 사병들은 각각 나뉘어 다른 주민의 집에서 묵어야 할 것이다.
에른스트가 주저하는 사이. 시종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기왕이면 돼지도 한 마리 잡아주고요. 아. 일단 이것부터 받으세요.”
시종은 돈이 든 주머니를 재빨리 촌장의 손에 건네주었다.
상당히 묵직한 주머니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촌장의 손에 은화 한 닢까지 추가로 쥐여주었다.
“이건 개인적인 감사의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허. 허허. 뭘 이런 걸 다.”
주머니의 돈은 마을 주민들과 나누어야 하지만, 이건 촌장 개인에게 주는 돈.
반짝이는 은화를 확인한 촌장의 눈이 반짝였다.
언제 어디서나 뇌물은 먹히는 법이다.
시종이 말했다.
“병사들이 쉬고 씻을 수 있게 우선 따뜻한 물이랑 음식부터 준비해주시죠. 괜찮겠죠 도련님?”
“으응. 그렇게 해라.”
의례적으로 묻는 시종의 말에 에른스트가 동의하자, 촌장이 손을 비비며 답했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제 아내에게 물어보십쇼.”
그렇게 말을 남긴 촌장이 사라지고, 촌장의 늙은 아내가 자리를 대신했다.
갑자기 혼자 남게 된 촌장의 늙은 아내는 외지인들이 영 불편한지.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런 아내에게 에른스트가 부드럽게 물었다.
“촌장의 말대로, 이 근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어?”
“버, 벌어지는 일이라 하면?”
“몬스터의 동향. 언데드가 일어난 지역. 귀족들. 알고 있는 건 사소한 소문까지 전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으음. 알겠습니다.”
주저하던 여인은 하나둘 알고 있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언데드가 점점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과 몬스터들이 생각보다 더 기승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귀족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모여들고 있다는 것까지.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큰일이었지요. 몬스터에 이어 언데드까지 일어나다니. 마을이 몇 개나 사라졌는지 몰라요. 영주님은 몬스터를 막아내는 데에만도 급급했고요. 그런데 귀족분들께서 저희들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주시니,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더라고요.”
사실 귀족들의 의도는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지만, 결과적으로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에른스트가 물었다.
“혹, 귀족들끼리 다툼을 벌인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어?”
“으음.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귀족들끼리 싸움을 벌여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싸우지는 않을 거다.
그들도 기왕이면 자기가 경쟁자를 죽였다는 걸 숨기고 싶을 테니.
데일이 끼어들었다.
“시체가 발견되거나 하지는 않았나?”
“아, 으. 그게.”
데일의 질문을 받은 여인이 굳어버렸다.
에스델이 말했다.
“데일 경.”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한 데일이 말했다.
“나 대신 네가 물어봐라.”
“귀족들의 시체가 발견되는 일은 없었나요?”
똑같은 질문을 에스델이 하자, 다시 마음을 진정한 여인이 말했다.
“그, 그러고 보니 귀족분들의 주검이 가끔 발견되기는 하는데…… 그건 검은 사신의 짓이었습니다!”
검은 사신.
아까 겁에 질렸던 사내도 그 이름을 꺼냈었다. 이 주위를 배회하는 흑기사가 있다고.
데일이 말했다.
“그 얘기를 더 자세히 해달라고 물어봐라.”
“그 얘기를 더 자세히 해주시죠.”
여인은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 흑기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용뼈 산맥의 바로 아래에 자리한 사냥꾼 마을이다.
당시에는 몬스터가 자주 내려와 사냥꾼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산에서 웬 시커먼 기사가 내려오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엘프인 줄 알았답니다. 용뼈 산맥에서 하이 엘프가 내려오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니었다.
내려온 건 엘프보다 더욱 위험한 존재였다.
상대가 엘프가 아니란 걸 확인한 사냥꾼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며 화살을 겨누었다.
그런 경계심은 비단 상대가 이교도 기사여서만은 아니다.
“피 냄새. 온몸에서 피냄새가 진동했다고 하더라고요. 짐승을 해체하는 데에 이골이 난 사냥꾼들도, 그런 지독한 피 냄새는 처음이었데요.”
“그 뒤로 어떻게 됐나요?”
여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전부 죽었답니다.”
사냥꾼들은 전부 죽었다.
흑기사는 너무나 강했다. 사냥꾼들은 흑기사를 상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가장 처음에 도망친 어린 사냥꾼만이 목숨을 건졌다.
살아남은 사냥꾼은 도시에 가서 이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도시에서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산맥에서 내려온 몬스터를 신경 쓰기도 바빴던 데다가, 겁쟁이 사냥꾼이 도망친 걸 변명하고자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게 피해를 키웠다.
그 흑기사가 제대로 주목을 받고, 검은 사신이라는 별명을 얻은 건, 3개의 마을이 더 초토화되고 난 후였다.
이야기를 들은 데일은 곰곰이 생각했다.
‘흑기사라.’
흑기사.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 데일은 자기를 제외한 흑기사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심지어 밤의 신전에서도 흑기사는 보기 힘들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흑기사는 전선에 있다.
언데드의 본능에 반쯤 잡아 먹혀 살육만을 반복하는 그들이 적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전선뿐이었다.
‘그런 흑기사가 이곳에 나타났다라.’
전선에나 있어야 할 흑기사가 이 서북부에. 그것도 하필 몬스터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 맞춰 나타났다.
그리고 언데드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연이라고 여기기에는 공교롭다.
‘어쩌면 이번 혼란의 원인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내줄 집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감히 누구인 줄 알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어리둥절해 하던 일행은 촌장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보았다.
마을로 들어오는 네 대의 마차를.
마차에는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
‘이런.’
목적지가 같으면 결국 경로도 비슷하기 마련이다.
또 다른 귀족이 용병과 병사를 이끌고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곳은 작은 마을이다.
이미 15명이 찾아온 것만 해도 버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다.
즉.
어느 한쪽은 오늘, 지붕 아래서 편안한 밤을 보내는 걸 포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