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169
◈ 169. [Auto Play] 남부전선 이상없다
같은 시간.
대륙 남단. 괴수전선. 요새도시 크로스로드.
도시의 서쪽. 무덤터.
“…….”
정연하게 늘어선 무수한 묘비들 중 한 무덤 앞에 제국군복을 차려입은 장교 한 명이 서 있었다.
제국 마법병단 총대장이자, 황실에서 파견한 지원군의 대장.
‘칼바람’ 레이나였다.
옅게 불어오는 바람에 제국군 코트를 휘날리며 레이나는 앞의 묘비를 내려다보았다.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꾸깃.
레이나의 손에 들려 있던 담뱃갑이 우그러졌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날이, 벌써 15년 전.
한때 서로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절친했던 동료는 이렇게 차가운 땅바닥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 뒈질 줄은 몰랐네.”
레이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네 소원대로 남부긴 한데…….”
황량한 벌판 위에는 우두커니 세워진 삭막한 요새도시 하나만 보였다.
“물을 채운 수영장도, 근사한 리조트도 없잖아.”
레이나는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으려고…… 그때 그런 일을 한 거야?”
물어보지만, 대답은 없다.
레이나는 냉막한 시선으로 쥬피터의 묘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레이나는 새 담뱃갑을 뜯은 뒤, 한 개비만 꺼내어 입에 물고 나머지는 담뱃갑 째로 묘비 앞에 놓았다.
“이 맛도 더럽게 없는 거, 너랑 친해지려고 피우기 시작했는데…… 정작 넌 죽어서 끊고 지긋지긋하게 나 혼자 피우고 있네.”
레이나의 뇌리에 문득 쥬피터와 함께 했던 20년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어리고 찬란했던 그 젊은 날들이…….
“…….”
담배에 불은 붙이지 않고, 그렇게 한참 멀거니 묘비를 바라보는데.
“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펑퍼짐한 로브에 고깔모자를 눌러 쓴 젊은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흐릿한 화상이 남은 왼쪽 얼굴은 머리칼로 가렸고, 품에는 꽃이 몇 송이 들려 있다.
레이나는 쥬피터의 묘비 앞에 놓인 꽃병을 보았다.
매일 갈아주는 모양인데, 이 젊은 여자가 한 일인 모양이다.
“쥬피터의 손녀인가?”
“아니요.”
젊은 여자- 쥬니어는 차갑게 대꾸했다.
“딸입니다만.”
“…….”
미간을 좁힌 레이나는 이윽고 피식 웃었다.
“그래. 쥬피터가 그날 거두었던…… 카밀라 왕국의 생존자로군.”
“…….”
“나를 기억하나?”
레이나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서 쏘는 시늉을 하며 빵야- 소리를 냈다.
쥬니어는 불쾌하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을 기억하든, 망각하든, 무슨 상관이죠?”
“흐음?”
“나는 이미 엄마를 용서했어요. 그때 엄마의 상관이었던 당신에게도, 딱히 아무런 감정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쥬니어는 쥬피터의 묘비 앞으로 와서 화분의 꽃을 회수하고, 새 꽃을 꽂고, 물을 갈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던 레이나가 천천히 내뱉었다.
“너, 마법사로군.”
“…….”
“재능도 꽤 있고.”
쥬니어는 무시하려 했지만, 다음 말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하지만 죽어 가고 있구나.”
“……!”
“마법을 쓰는 걸 당장 멈추지 않으면, 얼마 안 남은 목숨도 불타 없어질 거야.”
화분 정리를 끝낸 쥬니어는 헌 꽃을 품에 들고 일어나서 레이나를 쏘아보았다.
“당신이랑은 상관없잖아요.”
“그렇지. 아무런 상관도 없지.”
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네가 죽으면 네 엄마가 슬퍼하지 않을까?”
“그것도 당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하하. 그래. 그야 그렇지. 그냥 아까워서 그래. 꽤 재능이 있는 거 같은데.”
레이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무덤터를 벗어나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봐, 쥬피터 딸.”
“……?”
“쥬피터는…… 어떻게 죽었지?”
쥬니어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마법사답게.”
“그렇군.”
레이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어.”
레이나는 터덜터덜 걸어서 이윽고 사라졌다.
그런 레이나의 뒷모습을 불만스럽게 흘겨보던 쥬니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쥬피터의 무덤을 마저 청소하기 시작했다.
***
크로스로드 도심.
연금술사 공방.
굳게 닫힌 공방의 문 앞에 서서, 갓핸드는 나지막이 목소리를 냈다.
“릴리님.”
“…….”
공방의 안에는 릴리가 분명히 있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갓핸드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불렀다.
“릴리님. 안에 계신 거 압니다.”
“…….”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릴리님…….”
묵묵부답인 릴리를 계속해서 부르다가, 갓핸드는 긴 한숨과 함께 이마를 문에 붙였다.
“릴리님, 저는 이제 크로스로드를 떠납니다. 애쉬 황자 전하께서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요.”
“…….”
“꽤 위험하고,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번이 제가 릴리님께 사과드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
“제발…… 사과의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짤막한 침묵 뒤.
드디어 문 안에서 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리 가요, 갓핸드. 당신이랑 대화할 생각 없어요.”
“릴리님!”
“당신은 거짓말쟁이에요.”
릴리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첩자였던 데다가, 나를 지키다 팔을 잃은 척했어. 내 죄책감을 당신의 목적을 위해 멋대로 이용했다고요.”
“…….”
“잠시나마 당신을 믿었던 내가 바보죠. 원래 엘프란 그런 종족이니까.”
문 안에서 킁! 하고 콧물 삼키는 소리가 났다.
“당신들은 언제나 거짓말을 일삼고…… 남을 속이고…… 배신하고…… 그런 종족이니까.”
“…….”
갓핸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첩자 신분을 숨겨서 죄송합니다, 릴리님. 부상을 부풀려 당신을 기망한 것도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영혼에 맹세코, 그날 밤 나눈 모든 대화는 진실이었습니다.”
“…….”
“릴리님. 제가 다른 무엇보다 죄송스러운 것은, 간신히 상처를 딛고 저희 종족에게 마음을 열어 주려던 당신에게…… 다시 상처를 드렸다는 점입니다.”
갓핸드는 조심스럽게 문 위에 손을 올렸다.
“다시 저희를 믿어 달라거나, 저를 용서해 달라거나,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단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릴리님.”
침묵하는 릴리에게 갓핸드는 숨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릴리님. 저와 제 부대원들은 이제 임무지로 떠납니다. 만약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때는 얼굴을 뵙고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굳게 닫힌 문을 향해 허리를 한 번 숙여 보이고, 갓핸드는 뒤돌아서서 터덜터덜 걸어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갓핸드를 기다리고 있던 바디백과 번아웃이 합류했다.
세 엘프는 망토의 후드를 뒤집어 쓰고 크로스로드 북문 쪽으로 사라졌다.
“…….”
끼이익.
살짝 문을 열고 그런 갓핸드의 뒷모습을 살피던 릴리가 쀼루퉁하게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
그때 공방 안에서 그런 릴리의 눈치를 보던 연금술사 조합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번에 의수 만들어 주고 할 때는 둘이 사이 좋아 보이더니, 지금은 왜 이래?”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어요…….”
“흐음.”
이윽고 조합장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뭐, 젊은 청춘 두 사람이 만나면 여러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지.”
“그런 거 아니거든요.”
“후회 남기지 말고 즐겁게 잘 지내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이제 갓핸드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공방 문을 다시 닫아 버리며 릴리는 투덜거렸다.
“흥이다, 내가 두 번 다시 엘프를 믿나 봐라…….”
***
영주 저택. 응접실.
“으어어어~”
에반젤린은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소파 위에 드러누운 채, 무릎까지 걷어 올린 종아리를 위아래로 쫑쫑거리며 흔들었다.
훤히 드러난 맨발이 산만하게 꼼지락댔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서류를 펼쳐두고 영주 업무를 대행하던 루카스는 그런 에반젤린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애송이. 복장이 왜 그래? 영주님 안 계신다고 바로 풀어지기야?”
“냅둬요, 아저씨~ 의욕이 안 난다고요.”
꼼지락거리기도 지쳤는지 그냥 축 늘어진 에반젤린이 꽁시랑댔다.
“선배님이 안 계시니까 파티원들은 각자 할 일 찾아서 틀어박혔지, 일반 병사 분들은 여전히 침울해하지, 게다가 황혼병단은 공식적으로 해산해 버렸고.”
“…….”
“황도에서 내려온 지원군 언니오빠들은 또 왜 그렇게 재수가 없는지. 봤어요? 목 뻣뻣~하게 세우고 시내 돌아다니면서, 이 시골 촌동네에는 극장이 없니 고급 식당이 없니 뭐니…… 우웩.”
혀를 쭉 내민 에반젤린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도시 사람들이 변경 무시하는 거 진짜 질색이에요. 우리가 변경에서 삽을 퍼니까 내륙 도시들이 안전하게 발전한다는 사실을 왜 모르나 몰라.”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정작 그러는 너도 이 촌동네 싫다고 상경했던 거 아니었나?”
“아니 뭐, 그땐 그랬긴 한데! 까도 내가 깐단 거죠. 촌동네 깔 권리는 촌동네 주민한테만 있는 거랄까?”
루카스는 에반젤린의 말을 웃으며 듣고 있었지만,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고민이 깊었다.
황도에서 파견된 지원군과 기존 크로스로드 병력 사이에는 벌써 알게 모르게 알력이 발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를 휘어잡아줄 사령관은 황도로 올라가 버린 상황.
레이나는 도시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모양이고, 기존 파티원들은 그런 지원군이 거슬리고……
양측의 신경전은 한동안 계속 이어질 전망이었다.
“에휴.”
에반젤린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선배님이 안 계시니까, 뭔가 크로스로드 전체가 멈춰 버린 느낌이에요.”
“…….”
“선배님, 돌아오시겠죠?”
뜬금없는 에반젤린의 말에 루카스는 눈을 치떴다.
“당연히 돌아오시겠지, 무슨 소리야.”
“하지만 그렇잖아요. 선배님은 황자이신 데다가, 능력도 출중하시다는 말이에요.”
에반젤린은 또랑또랑하게 목소리를 올렸다.
“이런 변경에서 괴수를 상대하며 험하게 구르실 이유가 없어요. 애초에 폐하께서 왜 내려 보내신 건지도 모르겠고.”
“…….”
“이번에 황도에 올라가신 김에, 영영 안 내려오실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루카스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에반젤린의 말에 허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대로 애쉬가 크로스로드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도시는…… 괴수전선은 어떻게 되는 거지?’
루카스와 에반젤린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안색이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애쉬가 돌아오지 않을 경우를 자신도 모르게 상상했기 때문이리라.
바로 그때였다.
타앙-…….
멀리서 흐릿한 총성이 울렸다. 마총의 발사음이었다.
루카스와 에반젤린 둘 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지?”
“시내 쪽인데요?”
재빨리 창문을 열고 밖으로 귀를 기울인 에반젤린은 이윽고 총성이 울린 방향을 특정해냈다.
“이 방향은…… 신전이에요.”
신전에서, 마총이 발사되었다고 하면…….
“데미안?”
루카스가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데미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