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277
◈ 277. [자유탐사] 적의 적 (2)
구출된 NPC 중에는 낯익은 이가 또 있었다.
“전하!”
쟈칼 가면을 쓴 거구의 남성이 내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상대를 알아본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쟈칼!”
5구역 던전 [불꽃 튀는 콜로세움]의 NPC 보스.
스테이지5 전에 만났던 검투왕 쟈칼이었다.
“살아 있었구나!”
“전하께서 구하러 오지 않으셨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겁니다. 모두 전하의 은공입니다.”
내 앞에 오자마자 쟈칼이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절 받으십시오! 으랏차!”
나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깍듯하면서도 까불거리는 그의 태도를 보니 반가웠다.
나는 그를 다독이고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셀렌디온의 흡혈귀 군단을 맞아 전투에서 패배한 뒤.
폐허가 된 콜로세움에서 나를 기다리며 세력을 복구하던 중, 루나레드의 웨어울프 군단에게 습격당해 여기로 끌려 왔다고.
‘어째 악몽 군단장들에게만 두들겨 맞았네.’
달리 말하면 악몽 군단장만 둘을 만났는데도 이렇게 사지 멀쩡히 살아 있으니, 쟈칼이 얼마나 강인한 이인지 증명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내가 그런 식으로 위로해 주자 쟈칼은 즉시 이렇게 부정했다.
“아뇨, 서열정리 당한 거죠. 뭐.”
“서열정리?”
“제가 이 동네 어지간한 보스급 괴물보다는 센데, 악몽 군단장들한테는 급이 안 된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아주 탈탈 털렸다며 쟈칼이 두 손을 휘저어 보였다.
“그마저도 본거지인 콜로세움이 아주 멸망해 버려서…… 이제 평범한 모험가 쟈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 모양입니다.”
본거지도 파괴당하고, 세력도 잃고. 자연스럽게 보스 보정도 사라지고.
이제 조금 강한 NPC 모험가 수준으로 내려온 쟈칼이었다.
어쩐지 근육도 빠진 것 같다며 투덜대는 쟈칼에게 나는 빙그레 웃어 주었다.
“어쨌든 살아서 보는 게 어디냐.”
“그럼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죠…… 아니, 여기는 지옥 같은 던전이긴 한데.”
쾌활하게 농을 던지는 그에게 나는 턱짓했다.
“쟈칼. 그럼 달리 할 일 없으면, 잠깐 내 일 좀 도와주지 않을래?”
놀란 쟈칼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외쳤다.
“물론입니다, 전하! 무엇이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이 쟈칼의 목숨은 이미 전하의 것이니까요!”
***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늑대굴] 던전을 더 공략할 수도 있겠지만, 구출해 낸 포로들을 안전한 곳에서 회복시키는 게 우선이었다.수십 명의 NPC를 데리고 베이스캠프에 돌아오자, 텅 비어 휑하던 베이스캠프에 단숨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이고~ 집 나갔던 멍청이들이 다 돌아왔구만.”
절단의 코코 할멈이 이 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나는 조용히 코코 할머니에게 다가가 주머니를 건넸다.
“이게 뭐니?”
“의뢰하셨던 물건이에요. 텔레포트 게이트 건설을 위한 재료.”
포로들도 구출했고, 텔레포트 게이트 건설 재료도 다 구해 왔고.
이번 여정 한 번에 사이드 퀘스트 두 개를 끝장냈단 말씀이지.
싱글벙글 웃는 나를 익살스럽게 흘겨보던 코코 할멈이 히죽 웃었다.
“요거요거 발랑 되바라진 애송이 황자가 제법이구만. 일처리가 번개 같아.”
“게이트 건설도 번개처럼 되면 좋겠네요, 할머니.”
“끌끌, 걱정 말어. 나도 성격이 급한 편이거든.”
코코 할멈과 빨리빨리-스피릿을 공유하며 나는 내심 반가움을 느꼈다.
저기 혹시 할머니 조상 중에 한민족이 있으신지……?
코코 할멈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아서자, 베이스캠프 곳곳에 NPC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고 망가진 건물과 움막 따위를 수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형벌부대와 그림자부대는 그 일을 돕고 있었고.
쿠일란과 갓핸드, 그리고 쟈칼과 베르단디.
넷은 모여 서서 서로 무어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쟈칼도 기묘하게 우리쪽 파티원들이랑 연이 있구만.’
쟈칼은 수인족 출신. 여기에 아이기스 특무대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 첩보부 요원이었다.
형벌부대와도 그림자부대와도 관계가 닿아 있는 것이다.
“…….”
인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종족의 고충은 그들 서로만이 이해할 것이다.
자기네들끼리 이야기하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몸을 뒤로 물렸다.
“읏트트트~! 어우, 뻐근해라.”
베이스캠프 바깥으로 나와서 기지개를 켜며 숨을 고르는데,
“애쉬.”
청량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누더기 같은 로브를 뒤집어쓴 백색 머리칼의 여인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순조롭게 해결한 모양이군.”
온화하게 말하는 여인의 얼굴에는 빙그레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마주 씩 웃어 주었다.
“무명!”
던전상인 NPC, 무명이었다.
살랑살랑 걸어온 무명은 베이스캠프 안의 다른 NPC들을 보며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무사한 것 같아 다행이다.”
“괴물 놈들에게 오래 붙잡혀 있던 것치곤 멀쩡하더라고.”
나는 무명의 피가 엉겨붙은 머리칼과, 흉하게 칼자국이 숭숭 난 로브 끝자락을 보고 말을 삼켰다.
“그렇군…… 네가 역병 군단을 공격한 거야?”
어쩐지 무언가 이상했다.
레이븐과 역병 군단 본대가 늑대굴을 함께 지키고 있었다면, 구출작전은 훨씬 더 어려웠을 텐데.
놈들의 군단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레이븐은 분신만이 나타났다. 덕분에 손쉽게 포로 구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놈들의 본거지를 공격해서, 그것을 방비하러 자리를 비웠다고 하면 말이 된다.
그렇다면 역시 무명이?
“맞다. 내가 놈들의 본거지를 습격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인정한 무명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 혼자 한 일은 아니다.”
저벅. 저벅.
무명의 뒤쪽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상대를 알아본 내 눈이 커졌다.
“너는……!”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온 남자는 긴 고깔모자에, 검은 음유시인 복장을 차려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흰색 웃는 가면.
손에는 회색의 긴 피리.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나는 놀라서 내뱉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
“예전에 통성명 하지 않았나, 애쉬?”
오랜만에 듣는 기깔 나는 저음의 목소리로, 남자는 재차 스스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크라운’이라고 불러달라니까.”
***
“이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피리 부는 사나이…… 크라운이 낮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지껄였다.
나는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그러게, 오랜만이긴 하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스테이지5 시작 전, 여기 베이스캠프를 점령하고 있던 이 자식과 부하들을 ‘죽일 때’였으니까.
“정말로 되살아났군.”
“말했잖나. 이곳 호수왕국의 신민(臣民)에게는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그의 가면 속에서 큭큭, 하고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영원토록 이곳 어둠 속에서 죽지도 못한 채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지.”
“……하지만 기어 다니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인데?”
나는 옷에 가려지지 않은 크라운의 맨살을 보았다.
온몸이 수포와 발진으로 뒤덮여 있다. 마치 실체화된 역병을 온몸으로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너도 역병 군단을 공격한 건가?”
“…….”
“이거 의외로군. 나는 그동안 네가 악몽 군단 소속인 줄 알았는데.”
스테이지2 때 난입했던 것도 그렇고. 베이스캠프 점거하고 우리 죽이려고 한 것도 그렇고.
100퍼센트 적대 NPC 세력이니까 악몽 군단과 한편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나?
“내가? 그 괴물들과 같은 존재라고?”
가면 속에서 크라운의 두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말을 삼가라, 플레이어.”
“…….”
“나는 이곳 호수왕국의 사람이다. 마지막 궁정악사이자 궁정어릿광대이며, 궁정마법사다.”
피리를 쥔 그의 손이 꽉 쥐어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나라가 다시 광명을 되찾는 것이다……. 그를 위해 필요하다면 악몽 놈들과도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악몽을 칠 수도 있는 것일 뿐.”
으르렁대던 크라운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무표정하게 선 무명이 그곳에 있었다.
“이번에는 이 ‘파수꾼’과 아주 우연히 서로의 목적이 겹쳤다. 그래서 함께 역병 군단을 공격했고…… 어쩌다 보니 그게 네게도 이득이 된 모양이군.”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요컨대, 이번에는 우리가 서로 적의 적이었다는 이야기군.”
나는 크라운의 얼굴을 마주보며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지낼 수는 없을까, 크라운? 적의 적끼리 서로 칼질할 이유가 없잖아.”
진심이다.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크라운과 그 부하들을 굳이 적대하고 싶지 않다.
결코 마음에 드는 새끼들은 아니지만, 죽지도 않는 놈들과 싸워봐야 이쪽 진만 빠지니까. 크라운이 악몽 군단 소속이 아니라면 더욱 더.
하지만.
“적의 적이라…… 그렇군. 우리의 관계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린 크라운이 나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애쉬. 하나 충고하마. 적의 적은 결코 아군이 아니다.”
“…….”
“이번에는 우연히 너를 도운 셈이 됐지만, 다음에는 다시 너를 죽일 틈을 노릴 수도 있다.”
역시 회유가 안 되는구만, 완전 적대 NPC…….
쓰게 쩝쩝 입맛을 다시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크라운이 고깔모자를 푹 눌러썼다.
“이러저러나, 기어코 호수왕국 심부까지 들어왔구나, 애쉬.”
“그래.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갈 거다.”
가장 깊은 곳.
최후의 스테이지가 있는 호수왕국 왕성을 향해.
클리어를 향해, 엔딩을 향해…… 나는 이 어둠 속을 쉬지 않고 걸어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호수왕국 심부는 네가 그동안 겪어 온 지옥과는 궤가 다른 마경이다.”
크라운은 비척거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역병에 당해 썩어가는 그의 몸에서 핏물이 줄줄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들쑤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않겠다. 이미 그런 말을 들을 단계는 지났으니까.”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길게 말씀을 늘이시는지?”
“……이 이상 더 들어오겠다면, 각오하고 들어오는 게 좋을 거다.”
“무슨 각오? 너를 한 번 더 죽일 각오?”
그렇게 이죽거리며 쏘아붙였지만, 크라운은 덤덤하게 충고를 내뱉었다.
“너 자신도 괴물이 될 각오.”
“…….”
“심부 깊은 곳까지 들어선 모험가들의 결말은 언제나 둘 중 하나였다.”
크라운은 휘청거리며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죽거나, 괴물로 살아남거나.”
“…….”
“이건 진심에서 나온 충고다, 젊은 황자. 또 마지막 경고이기도 하다. 아직 너는 늦지 않았다. 이곳 호수 바닥의 어둠 따위 잊어버리고, 지상에서의 축복받은 삶을 누리며 영위하도록.”
저벅. 저벅.
크라운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문득 니체의 유명한 어록이 생각났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싸움 중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기에.
“뉴비한테 너무 겁들 주시네, 진짜…….”
주먹을 틀어쥐고, 나는 입가를 틀어 올려 웃었다.
나는 내가 정한 길을, 내가 생각한 대로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너희가 뭐라 그러든 말든 멈추지 않는다. 절대로.
“……애쉬.”
그때 무명이 나를 넌지시 불렀다. 나는 날카로워져 있던 마음을 누르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무명은 로브 후드 아래로 싱긋 웃어 보였다.
“이번에 납치당한 친구들 구출은 나도 계속 시도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힘이 부족해서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해내 줬다.”
처음에는 루나레드, 레이븐, 살로메…… 세 명이나 되는 악몽 군단장이 함께 저 포로들을 납치하고 늑대굴을 점거하고 있었다.
천하의 무명이라도 혼자서 구출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방어전 때 루나레드가 죽었고, 무명과 크라운이 레이븐을 떼어낸 틈에, 살로메가 혼자 남았을 때.
운 좋게 내가 들어가서 포로 구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내가 다 한 일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며 무명에게도 공을 돌리려는데,
“그러니,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는 하기 뭣하지만…….”
촤륵!
무명이 품에서 좌판을 꺼내 바닥에 펼치더니, 주섬주섬 여러 아이템을 꺼내 좌판 위에 올려두기 시작했다.
입을 떡 벌리는 내 앞에서 무명이 양손을 펼쳐 보였다.
“오랜만에 서비스하지. 자, 골라가.”
“진짭니까-!”
던전상인 NPC 무명의 대출혈 아이템 거저 뿌리기! 제2탄!
온갖 화려찬란한 금빛 장비들이 좌판 위에서 번쩍였다.
감동의 뉴비배려 서비스 앞에서 나는 그만 눈물을 찔끔 흘리고야 말았다. 이게 참된 올드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