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303
◈ 303. [Side Story] 겨울이 온다 (3)
나와 라르크의 면담이 끝난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서부전선과 남부전선의 장(長)으로서 우리는 거칠게 다투기도 하고 온건하게 합의하기도 했다.
“애쉬.”
하지만 결국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잊지 마라. 우리는 형제다.”
개인사적인…… 형제라는 화두로 귀결되었다.
라르크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나는 너를 믿고 싶다.”
“얼마든지 믿어, 형.”
싱긋 웃는 내게 라르크가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페르난데스도 믿고 싶다.”
“…….”
아니 그 페르난데스랑 댁이랑 죽어라 싸우게 된다고…… 나름대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퍼부어 줬는데도 들어먹질 않네.
“너희 둘 모두 내게 소중한 동생이다. 나는 우리 제국의 수호자들이 서로 분열되어 싸우는 미래를 원하지 않는다.”
라르크는 굳은 얼굴로, 그러나 마음을 다잡은 듯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진정 브링어 공작의 생존을 바란다면, 나는 못 본 체 눈감아 줄 것이다. 그리고 페르난데스가 황위를 바란다면, 나는 기꺼이 양보할 것이다.”
“…….”
나는 이 선언에 일순 할 말을 잊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함께 있기를 바라는 건가. 이 첫째 형님께서는.
“그러니 애쉬. 나의 동생아. 세상에 단 셋뿐인 우리 형제가 사이좋게 우애 깊게 지냈으면 기쁘겠구나.”
“…….”
“나는…… 그저 그것을 바랄 뿐이다.”
묵묵하게 내뱉은 라르크가 자신의 올백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따뜻하게 미소해 주었다.
“나도야, 형.”
그래도 가족끼리는 이런 대화가 필요하겠지, 싶어서.
마음에 없는 소리였지만. 나도 대답해 주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오해가 걷히고, 또다시 우리 형제들이…… 수호자들이 평화롭게 회의를 나누면 좋겠네.”
그럴 일은 없다.
황도는 내전의 불길에 휩싸이고, 제국은 두 쪽이 난다. 다시는 네 명이서 수호자 회의를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밥 한 번 먹자’는 인사가 실제로 밥을 먹자는 뜻이라기보다는 안부를 전하는 성격이 강하듯이.
그저 기원을 담아서, 나도 저렇게 말해 주었다.
그 뜻을 읽었는지 씁쓸하게 미소한 라르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후드를 썼다.
“그럼 또 보자. 동생아.”
처음과는 달리 덜 아픈, 가벼운 포옹만 남기고.
라르크는 성큼성큼 걸어 내 저택을 빠져나갔다.
굳이 멀리 배웅 나가지 않고 나는 저택 입구에 서서 멀어지는 첫째 황자의 뒷모습을 살폈다.
키가 커서 그런가, 걸음도 널찍해서 순식간에 멀어진다.
“……간 게냐?”
라르크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저택 지붕 위에서 더스크 브링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진짜 간 게냐? 저 라르크가?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땅을 가라앉히거나 건물을 뿌리 뽑지도 않고, 대화 조금 하고는 얌전히 물러났다고?”
더스크 브링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형제사랑이 각별한 분이셔서.”
나도 아끼고, 페르난데스도 아끼기에. 당장은 황도로 달려갈 수밖에 없게 되었지.
위기의 크기에 비해 방향전환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되었다.
페르난데스가 시의적절하게 반역을 꾸며 준 덕에 이쪽도 편하게 넘겼네.
타닥!
지붕 위에서 더스크 브링어에 이어 그녀의 기사들이 하나씩 내려섰다.
저택 뒤뜰의 창고 쪽에서는 내 휘하의 영웅 캐릭터들도 어느새 우르르 몰려나왔다. 나는 혀를 찼다.
“시킨 적도 없는데 다들 전투 준비 끝낸 상태였네…….”
“저만한 강자가 기세를 숨기지도 않고 훤히 드러내면서 네 앞에 앉아 있는데. 네 부하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
다들 내가 위기에 처하면 난입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숨어 있었던 내 파티원들 모두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물에 젖은 강아지 같은 꼴의 부하들을 살피며 나는 피식 웃었다.
라르크는 명백한 규격외.
인간의 궤를 아득히 벗어난 강함의 보유자다.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보다 더한 압박감을 느꼈겠지.
사태 끝났으니 들어가서 자라고 다들 등짝을 한 번씩 가볍게 쳐주었다. 파티원들은 진이 빠진 얼굴로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정확이 어떤 대화를 나눴기에 라르크를 물러나게 만든 게냐?”
용안을 부릅뜨고 라르크가 서문을 통해 크로스로드를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더스크 브링어가 내게 물었다.
나는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페르난데스가 역모를 일으킬 것이고, 라르크는 그것을 막으러 황도로 돌아간다는.
“역모라니…… 과연, 과인이나 남부전선의 문제는 ‘따위’가 될 정도의 대사건이로구나.”
혀를 끌끌 차며 납득한 더스크 브링어가 눈을 내리깔더니,
“……애쉬. 너희 황가의 모든 후손은 신탁(神託)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느냐?”
갑자기 처음 듣는 주제로 입을 열었다.
“예? 신탁이요?”
완전히 낯선 이야기라 나는 미간을 좁혔다. 신탁이라니?
“제국의 수호목…… 상흑수 에버블랙은, 미래를 예견하는 마법의 등대이기도 하지.”
황궁 가장 깊은 곳에 황제와 함께 얼어붙어 있던 검은 가시나무.
제국이 나라의 이름을 따온 그 나무에 대한 이야기였다.
“황실 직계 후손의 운명은 제국의 앞길과 직결된다. 그래서 황손(皇孫)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예언을 받는다.”
에버블랙 제국의 형제국인 브링어 공국의 왕이어서일까.
한때 제국과 사이좋게 지냈던 브링어 공작은 제국의 관습을 모두 꿰고 있었다.
“그 예언에 맞추어 황족만이 사용하는 미들네임을 짓게 되는 것이고.”
“아하…….”
황족의 미들네임을 어느 철학원에서 지어 오나 했는데, 그 검은 가시나무에서 점지를 받는 식이었군.
“그 신탁의 자리에는 나도 있었다. 황제…… 트라하의 부탁으로, 에버블랙의 미래를 함께 들여다보았지.”
현 황제인 트라하 ‘피스메이커’ 에버블랙의 이름을 더스크 브링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불렀다.
양국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는 나름대로 친밀했나보다.
하기야 이 공작이 나이도 더 많고, 항렬로 따지면 더 위겠군. 황제에게도 친척 할머니 정도의 포지션 아닐까.
아무튼.
“어떤 미래였습니까?”
“트라하는 아들 셋을 후사로 본다고 했다.”
나는 내심 놀랐다. 미래 예언이라기에 잘 쳐 봐야 일기예보 정도 되는 정확도일까 했는데, 자식 숫자부터 정확히 맞췄네.
“첫째 아들은 사람이 너무 따뜻하고 인정이 많아서 고생하게 되고, 반대로 둘째 아들은 사람이 너무 차가워서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에버블랙은 예언했지.”
“와, 정확도 장난 아닌데요?”
한국에서 사주팔자 점집 했으면 떼돈 벌었을 거 같은데, 그 가시나무.
더스크 브링어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트라하는 두 아들의 미들네임을 반대로 붙였다.”
“엥?”
“말 그대로다. 예언의 반대로 미들네임을 붙였다.”
따뜻한 성정의 라르크에게는 ‘눈사태’를 뜻하는 ‘아발란체’를.
차가운 성정의 페르난데스에게는 ‘불씨지킴이’를 뜻하는 ‘엠버키퍼’를.
서로가 타고난 운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절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꿔 붙였다고.
나는 턱을 괴고 호오오- 소리를 냈다.
“재밌네요.”
내가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 자체는 재밌다.
“그럼 사실 라르크가 ‘엠버키퍼’고, 페르난데스가 ‘아발란체’인 건가……?”
“뭐, 미들네임이야 황제 입맛대로 붙이는 것이긴 하다만.”
더스크 브링어는 팔짱을 끼고 한숨을 옅게 뱉었다.
“라르크와 페르난데스의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문득 생각이 나는구나. 그 수십 년 전의 일이…….”
문득 목덜미에 한기가 느껴졌다.
겨울이 가깝다. 어쩌면 곧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저 둘의 미들네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곧 닥쳐올 겨울의 눈보라는. 이 제국에 쏟아질 눈사태는.
라르크인가. 아니면 페르난데스인가.
어느 쪽이 이 겨울의 진짜 주인인가.
“……저기, 대공. 그러면은.”
나는 슬금승금 더스크 브링어의 옆에 붙어서 그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셋째인 저는 어떤 운명을 점지 받았는지?”
“응?”
“어떤 운명을 예언 받았기에 이 모양의 미들네임을 붙였는지 좀 궁금한데요.”
본헤이터라니.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예언을 받았기에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의 미들네임을 이따위로 붙인단 말인가.
내심 궁금해서 옆구리를 쿡쿡 찔렀는데, 더스크 브링어는 크흠! 헛기침하더니 말문을 돌렸다.
“……기억이 안 나는구나.”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다른 둘은 기억하면서 나는 못하는 게 말이 돼?!”
“이런 말하기 뭣하지만, 라르크와 페르난데스는 에버블랙 황실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두 천재다. 반면에 너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노랬지 않느냐. 두 형에 비해 눈여겨 볼 필요가 없다 싶었지.”
더스크 브링어는 김애쉬의 망나니 양아치 경력을 푹 찌르더니, 내가 상처 받은 표정을 짓고 있자 재차 크흐흠! 하며 머쓱해 했다.
“그래서 기억에서 잊어버린 모양이다. 이해해다오.”
“너무하시네…… 궁금하게 해놓곤…….”
구시렁거리던 나는 다른 게 또 궁금해졌다.
더스크 브링어의 반대편 옆으로 이동한 나는 반대편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더스크 브링어가 당황해서 버둥거렸다.
“아니, 말로 하거라! 아까부터 옆구리는 왜 자꾸 찌르느냐!”
“친한 척 좀 하는 거죠…… 어쨌든. 이름 하니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사실 처음부터 궁금했던 것이다.
“왜 대공께서는 존함이 더스크 브링어에요?”
어떻게 사람 이름이 더스크 브링어?
……같은 놀리는 의미가 아니라.
눈앞의 이 소녀공작은, 자신의 먼 선조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서 자신의 이름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수호룡이자 세계 최후의 화룡. 수백 년 전 제국 황제와 결혼하여 초대 브링어 공작을 낳은 그 전설의 레드 드래곤 이름이 바로 더스크브링어.
세계를 뒤엎는 뱀 요르문간드를 막고 제국을 지켜 낸 용도 바로 이 분 되시겠다.
더스크 브링어는 그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뭔 이유가 있나? 쥬피터 쥬니어랑 같은 느낌인가?
“…….”
그러자 더스크 브링어는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아니 왜 그렇게 보시나? 혹시 실례되는 질문이었나?
“……애쉬. 네게는 자격이 있다.”
“예? 자격?”
갑자기 무슨 소리? 이름 이야기 중이었는데?
“너는 내 신민들을 받아들여 주었고, 호언장담한 대로 라르크를…… 그 휘하의 추격대도 뿌리쳐 주었다. 모든 동맹에게서 거부당하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우리를 너는 받아들여 주었다. 너는 이미 내 신의를 얻었다.”
“아니 뭐……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칭찬은 기쁜데, 아니 그래서 이름 이야기 중에 왜 삼천포로 새냐고!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예?”
“네가 내 이름의 의미를 알 자격이 있는 자인지는, 조금만 더 지켜보고 싶구나.”
천천히 내게서 시선을 거둔 더스크 브링어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때가 찾아오면 내가 먼저 알려 주도록 하마. 내 이름의 의미를.”
“어…… 네.”
가볍게 물은 것이었는데, 뭔가 무겁기 짝이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몰랐는데 이곳 동네는 이름에 깊은 뜻을 두나보다. 미들네임에 운명을 새기질 않나, 남에게 말 못할 의미를 담질 않나.
“자, 이름 이야기는 이쯤 하고!”
평소의 익살스러운 얼굴이 된 더스크 브링어가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오늘 훌륭했다, 애쉬. 앞으로는 더더욱 너의 말을 신뢰하도록 하마.”
가장 큰 걱정이었을 라르크와 제국군 제1군단이 싸우지도 않고 물러갔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얼굴이 환해져 있다.
나는 싱긋 미소해 주었다.
“서부전선과 황도의 동향은 제가 철저하게 감시하겠습니다. 마음 놓고 이곳에서 겨울을 나세요.”
“그래, 정말 고맙다.”
내게 마주 미소해 준 더스크 브링어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더니, 자신의 기사들을 데리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아가는 북쪽 방향을 보았다가, 나는 다시 서쪽을 보았다. 이미 라르크는 흔적도 없다.
이제 세계는 격변한다.
무너지는 낭떠러지 옆의 길을, 나는 필사적으로 달려 나갈 뿐이다.
***
“…….”
북문 밖의 피난처로 향하며, 더스크 브링어는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제국 황실의 셋째 황자가 타고난 운명을.
상흑수 에버블랙이 황제에게 뱉어냈던, 저주와 같았던 예언을.
– 너의 셋째 아들은 제국을 갈기갈기 찢고 파멸시킬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너의 셋째 아들은 제국을 영원히 번성토록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