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413
◈ 413. [Side Story] 귀환 (3)
윈터실버 상단 지부. 상단주의 방.
세레나데는 잠들어 있었다.
볕이 드는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처리 중이던 서류의 산 속에 파묻혀서.
안 그래도 마른 편이었는데 그새 살이 더 빠졌다. 흐트러진 물빛 머리칼은 반년새 조금 더 자라서, 꽤 길어졌다.
얇은 팔을 베고서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옆에 서서, 나는 말문을 잃었다.
그녀의 하얀 팔뚝에 남은 흉터가 보였다. 고블린 군단과의 전투 때 입은 상처였다.
“…….”
반년새 많은 것이 변했는데.
그녀가 나 때문에 입은 상처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잠자코 내 외투를 벗어 세레나데의 어깨 위에 올려주었다. 초가을이라 아직 더운 편이라 해도 이렇게 자다간 감기 걸릴지도 모르니까.
‘인사는 다음에 해야 하려나.’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잠들었을까. 깨우기도 뭣하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잠든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나가려는 때였다.
“으음…….”
세레나데의 긴 속눈썹이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은빛 눈동자가 뜨였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
“…….”
세레나데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책상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손으로 제 눈을 몇 번 비비더니,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건 꿈인가요?”
나는 빙그레 웃어 주었다.
“꿈이면 좋겠어?”
“……꿈이라도 좋아요.”
세레나데는 내 손을 잡아 가져가더니, 자신의 뺨에 대고 가만히 감촉을 느꼈다.
“꿈에서조차 전하를 못 뵌 지 한참이었거든요.”
“…….”
“매정하신 분…… 일평생 당신만을 기다렸는데, 적어도 살아 계신지는 알려 주셔야지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측은하게 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현실에서 나를 만나면, 뭘 가장 하고 싶어?”
“…….”
“여기는 꿈속이니까, 네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해 줄게.”
세레나데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더니, 쑥스러워하며 답했다.
“전하의 이마에 키스하고 싶어요. 아주 어린 시절의 전하께 그랬던 것처럼.”
나는 잠자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레나데는 생일 선물 포장의 리본을 푸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앞머리를 헤치더니, 드러난 내 이마에 그녀의 오뚝한 코끝을 갖다 댔다.
“기억하시나요? 아주 어렸던 시절, 우리가 함께 놀고 잠들던 때에는, 제가 이렇게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해드렸어요.”
“…….”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커 가시면서, 부끄러워하시게 된 탓에 더 이상 굿나잇 키스는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저는 늘 아쉬웠답니다.”
이윽고 그녀의 서늘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툭.
뒤이어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댔다. 눈을 감은 채 세레나데는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워라, 아름답던 날들이여.”
“…….”
“아름답던, 당신이여…….”
……정말로 아직도 꿈속인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럼 나도 조금 더 과감하게 용기를 내볼까.
천천히 맞닿은 이마를 떼어내고, 몸을 일으킨 나는 의자에 앉은 그녀에게 싱긋 웃었다.
“세레나데. 네가 나에게 굿나잇 키스를 받은 적은 있어?”
그러자 세레나데는 은빛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요. 하지만 제가 누나였는걸요. 늘 제가 전하의 이마에 키스하고, 이불을 덮어드렸지요.”
“언제나 내게 주기만 했구나.”
나는 조심스럽게 세레나데의 앞머리를 옆으로 넘겼다.
“앞으로는 나도 조금씩, 네가 내게 준만큼 갚아 나갈 테니까.”
그리고 나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세레나데는 가만히 눈을 감고서 내 이마 키스를 받았다. 그녀의 입가에 헤실헤실한 미소가 걸렸다.
“이렇게 행복한 꿈은 오랜만이네요. 전하께서 사라지시고, 언제나 마음이 아프고 불편해서…… 밤에는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꿈은 악몽만 꿨거든요.”
“…….”
“이렇게 행복한 꿈을 꿨으니, 어쩌면 잠에서 깨어나면…… 전하께서 곧 돌아오실지도 모르겠어요.”
천천히 눈을 뜬 세레나데의 미소가 조금 슬프게 변했다.
“감사해요, 전하. 꿈이라도 행복했어요. 하지만 이제 깨어나야겠어요. 너무 달콤한 꿈은…… 깨어 버리면 아프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슬슬 깨워 줘야 할 시간인 것 같다.
“꿈 아니야.”
“네?”
“꿈 아니라고. 이쪽이 현실.”
“하하, 무슨 소리에요. 봐요, 이렇게 볼을 꼬집어도 안 아프…….”
세레나데는 제 볼을 가볍게 꼬집더니,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어라? 아프네……?”
“그치?”
“하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전하께서 어떻게 소녀의 앞에…….”
“그야, 돌아왔으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세레나데의 은빛 눈에 점차 눈물이 들어찼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두 팔을 좌우로 펼쳐 보였다.
“다녀왔어. 세레나데.”
“…….”
“그동안 걱정 끼쳐서 미안해. 자, 내가 속을 썩였으니, 있는 힘껏 한 대 쳐도 좋…….”
세레나데는 나를 때리지 않았다.
대신 의자를 넘어뜨리며 자리에서 튕겨 나오듯 일어나서, 그대로 내 품에 달려들어- 나를 꽉 끌어안았다.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야…….”
나를 붙잡은 채 그녀는 울었다.
“다시는 못 뵙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내 품에서 오열하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나는 어색하게 들었던 두 팔을 내려, 그녀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많이 울리는구나.”
숨도 못 쉬고 흐느끼는 그녀의 등을, 아기를 달래듯 부드럽게 두들기며 나는 속삭였다.
“고마워. 세레나데. 그때 네가 해준 충고 덕분에,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었어.”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인 채 살아가면 된다던 너의 말.
그 말 덕분에 나는 나를 찾고,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언제나…… 참으로 언제나, 나는 이 여자에게 받기만 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말해 주자.
“앞으로는 나도 조금씩, 네가 내게 준만큼 갚아 나갈 테니까.”
나는 세레나데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앞으로는 이 여자를 조금 덜 울게 할 수 있기를.
눈물보다 미소를 더 자주 짓도록, 내가 만들 수 있기를.
그렇게 빌면서.
***
세레나데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간신히 설득해서 떼어 놓았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인사 돌리러 가야 하는 상황인지라.
세레나데는 내가 또 사라지지 않을까 굉장히 염려하는 듯했다. 이제 진짜 어디로도 안 간다고 몇 번이나 확언해 주었다.
“진짜죠? 진짜? 이제 말없이 사라지지 않으시는 거예요?”
“그럼그럼. 손가락 걸고 약속할까?”
고개를 끄덕이는 세레나데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나눴다.
마지막으로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 젖은 뺨을 닦아 주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고운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콧물 흥!”
“흥…….”
세레나데는 얌전히 내가 시키는 대로 코를 풀었다. 너무 울더니 이 아가씨 약간 유아퇴행한 거 같긴 한데…… 뭐 귀여우니 냅두자…….
세레나데는 우느라 탈진한 탓인지, 내가 돌아와서 안심한 탓인지, 그동안 제대로 된 잠을 못 잔 탓인지. 아무튼 방 침대에 뉘여 주자 금세 잠들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들여다본 다음 나는 밖으로 나섰다. 남은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마저 돌려야 한다.
번쩍!
나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호수왕국 던전의 베이스캠프로 왔다.
성배탐사대가 여기 머무르고 있다고 하고, 또 켈리베이나 무명 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멀쩡히 작동하네.’
게이트가 전처럼 또 나를 영계에 처박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멀쩡하게 작동했다.
하긴 그 고생을 해서 시스템 고쳐 놨는데 또 고장 나면 진짜 디렉터놈 오체분시 각이지.
“오! 돌아왔구만, 길 잃은 어린양!”
베이스캠프에 들어서자 켈리베이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푸근한 인상의 대머리 드워프를 보자 마음이 확 놓였다.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돌아오니까 울고불고 난리 나던데, 장인께서는 왜 이렇게 쿨하세요?”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너는 어디서 객사(客死)할 관상은 아니거든.”
“그럼 어떻게 죽을 관상입니까?”
“거울 보면 알지 않냐, 이 뺀질아? 여자 후리다가 칼 맞아 죽을 관상이지.”
켈리베이는 킬킬 웃었다.
“농담이고, 얼마 전에 던전 심부에서 악몽 군단장 둘이 동시에 쓰러지는 일이 있었어. 바로 눈치챘지. 실종된 네가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눈치 진짜 대단하시네요…….”
솔직하게 감탄하자 켈리베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내가 여기 들어온 뒤로, 그동안 악몽 군단장을 물리친 인간은 없었어. 그런데 너는 1년 만에 놈들을 넷이나 해치웠지.”
“…….”
“갑자기 둘이 더 쓰러졌다고 하면, 당연히 네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지 않겠냐?”
어라, 저렇게 들으니 굉장히 합리적인 눈치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악몽 군단장을 둘이나 물리쳤으니…… 마력핵도 구해 왔겠지?”
켈리베이가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뜨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개쩌는 나이트메어 슬레이어를 만들어 주마. 자, 얼른 꺼내 봐!”
“……아뇨. 마력핵은 못 회수했는데.”
“뭐시여?! 아니, 그 귀한 걸 어따 흘리고 다니는겨!”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애초에 마무리를 못하고 바로 영계로 튕겨나간 상황이었기에 마력핵이고 뭐고 회수할 상황이 아니었다고요.
레이븐과 살로메의 마지막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럼 고블린 신왕의 마력핵은? 그거라도 내놔 봐! 쌔끈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얼른!”
“……왜 이렇게 나이트메어 슬레이어 제조에 집착하세요. 그거 위험한 장비인데.”
“그만한 재료로 장비 만드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지? 또 그런 최고급 재료만 만지다가, 너 없는 반년 동안 변변찮은 재료로만 장비 만드니까 얼마나 심심했는지 모르지?”
켈리베이는 망치를 머리 위로 들고 붕붕 휘둘렀다.
“명심해! 너는 앞으로도 나한테 어려운 장비 제작, 희귀한 장비 제작을 맡겨야 하니까! 앞으로는 이렇게 장기간 실종되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조만간 그동안 밀린 장비 의뢰 한 번에 다 하기로 하고.
“앗, 황자 전하! 돌아오셨군요!”
그때 켈리베이의 조수 한니발이 대장간 안에서 나왔다.
여전히 더벅머리로 눈을 가린 이 소년 역시 반년 사이에 훌쩍 컸다. 어린애들은 진짜 빨리 자라는구나…….
장비에 정령 인챈트를 해 주는 한니발은 이제 아예 대놓고 등 뒤에 정령 몇 마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고 있었다.
내가 없는 반년 동안, 켈리베이는 닥치는 대로 무기와 갑옷을 생산했고, 한니발 역시 닥치는 대로 정령을 인챈트해서 크로스로드에 공급했다고 한다.
이 막강한 정령장비 덕분에 크로스로드의 방어선이 그나마 버텨 냈다는 모양이다. 감사하기도 하지.
두 사람을 치하하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나는 베이스캠프 안을 둘러보았다. NPC 모험가들이 여럿 보였는데, 코코 할멈과 무명은 보이질 않았다.
“그 둘이라면 던전 심부 쪽에 뭐 처리할 게 있다면서 들어갔어…… 뭐 늘상 있는 일이지. 돌아오면 네 이야기를 전해 주마.”
“네.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해 가는데, 베이스캠프 저쪽에서 엘프 다섯 명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성배탐사대였다. 선두에 선 베르단디가 나를 보더니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애쉬니이이임!”
재회했을 때 비명을 질러 주는 타입은 처음이군.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뒤, 다섯 엘프들에게 둘러싸여 그동안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 다섯은 크로스로드 방어에도 도움을 주면서, 내가 없는 동안 던전 탐사를 자체적으로 수행해 온 모양이었다.
“그동안 8구역 ‘마탑’으로 향하는 길을 뚫어 두었습니다. 이제 애쉬님께서 오셨으니, 언제든지 공략하러 떠날 수 있겠네요!”
8구역 던전 ‘마탑’에는 성배가 있다.
드디어 이들의 숙원을 이루러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유의 눈물점 찍힌 눈으로 방싯방싯 웃던 베르단디가 직후 표정을 굳혔다.
“아, 물론…… 마탑 던전 자체가 강력한 곳이기도 하고, 당장 며칠 뒤에 다음 방어전이니, 그것부터 치른 뒤에 생각해야겠지만요…….”
“걱정하지 마. 방어전도 무사히 치를 거고, 마탑도 공략하고 성배도 찾아올 거니까.”
“크흡, 애쉬님의 이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르실 거예요…….”
베르단디가 괜히 눈물을 훔치는 척을 했다. 피식 웃은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번아웃과 바디백은?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림자부대는 와해되었다.
남은 생존자는 번아웃과 바디백 뿐.
내심 같은 엘프인 베르단디가 그 둘을 챙겨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곳에 없었다.
내가 둘의 이야기를 꺼내자 베르단디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 둘은…… 얼마 전부터 릴리님에게 가 있어요.”
“릴리한테? 왜?”
“그게, 사실은…….”
베르단디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릴리님께 큰 일이 생겼거든요.”